F. 카프카 : 음치의 음악 혹은 미지의 음식

[음악의 순간과 언어의 떨림]

F. 카프카 : 음치의 음악 혹은 미지의 음식

김진영

아노렉시아(Anorexia), 작자 미상

지난 주 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말이 줄어든다. 입맛이 떨어진다. 내 안의 무언가가 입을 닫기 시작했다.” 멜랑콜리에 빠지면 P는 걸신이 들어 살이 찐다지만 나는 먹기가 싫어진다. 거식증에 빠진다. 그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입을 닫고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음악을 들으며 잠드는 습벽이 다시 시작된다. 물론 그건 다분히 불면에의 두려움 때문이다. 긴 밤을 뒤척이는 황량함 대신 멜로디에 실려서 몰래 잠들고 싶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잠들기 전에는 오래 된 카세트를 적당한 거리에 두고(이 적당한 거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CD를 삽입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에 실려서 슬그머니 잠의 문지방을 건너가는 일이 며칠째다. 그런데 식욕이 사라지면 왜 잊었던 음악에의 기억이 눈을 뜨는 걸까. 그건 혹시 멜랑콜리가 시작되면 식욕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허기가 입을 벌리기 때문은 아닐까. 그 허기가 음악에의 기억을 불러들이는 게 아닐까. 하지만 어떤 음악?
 
카프카는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고백한다: “당신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가진 무능력들 중에서도 음악에 대한 무능력이 가장 심각합니다. 나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비음악적 (unmusikalisch)입니다…….” 자기는 타고난 음치라고 카프카는 실토한다. 그러나 카프카가 자인하는 무능력은 음악만이 아니다. 일기 어느 곳에서 그는 또 이렇게 고백한다: “글 쓰는 순간이 오면 모든 능력들이 사라진다. 성욕도, 식욕도, 수면의 욕망도 모두 사라진다. 무엇보다 음악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음악에 대한 능력은 카프카에게 섹스에 대한, 먹기에 대한, 잠자기에 대한 능력과 다르지 않다. 선천적으로 음치인 것처럼 그에게는 선천적으로 섹스와 먹기와 잠자기를 욕망하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카프카처럼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이 또 있을까. 카프카는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모든 욕망들이 다 소독된 금욕의 빈자리에 카프카의 욕망은 똬리를 틀고 있다. 그건 글쓰기에의 욕망이다(‘삶이냐 문학이냐, 이것이 문제다’라고 카프카는 햄릿을 패러디한다). 카프카의 문학은 욕망의 글쓰기다. 그 욕망의 글쓰기 안에서는 음악이 들린다. 그 음악은 그런데 음악이 아니다. 카프카에게는, 세이렌의 노래와 오디세우스의 음악이 그렇듯, 서로가 서로를 알아듣지 못하는 두 개의 음악이 있다. 작곡된 음악과 작곡 너머의 음악, 음률의 음악과 음치의 음악. 음률의 음악에 카프카는 선천적으로 무능하다. 그러나 음치의 음악에 그는 선천적으로 민감하다. 이 음치의 음악, 음악 너머의 음악은 카프카의 글들 속 곳곳에서 들린다. 윙윙거리는 전화기 속에서, 이웃 마을에서, 사무실의 밀실에서……. 그러나 이 음치의 음악이 가장 또렷하게 들리는 건 그가 굶을 때다.
 

샨유(Shawn Yu),  단식광대(The Hunger Artist), 1989

<단식광대(Ein Hungerkuenstler, 1924)>는 그 서커스단에서 슈퍼스타다. 철창 안에 앉아서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굶기만 하는 그를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든다. 그러나 단식광대는 언제나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그건 우선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밤에도 집에 가지 않고 사람들은 철창 앞에 불을 밝히고 그의 굶기를 지킨다. 정말 아무것도 안 먹는지, 물 한 모금 안 마시는지를 감시한다. 하지만 단식광대를 정말 슬프게 하는 사람은 그런 의심 많은 구경꾼들이 아니다. 그건 서커스단의 매니저다. 매니저는 그를 마음껏 굶지 못하게 한다. 예수처럼 40일 단식이 끝나면 굶기를 금지시키고 그를 철창 밖으로 끌어낸다. 그 날이 오면, 그가 예수가 되는 날이 오면, 축제가 벌어진다. 그 축제를 그러나 단식광대는 견딜 수 없다. 우선 여자들을, 뼈만 남은 그를 부축해서 철창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젊은 여자들의 육체를 그는 참을 수가 없다. 또 그는 음악을 견딜 수가 없다.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안겨서 철창 밖으로 나올 때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팡파르 음악을 그는 참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를 무엇보다 역겹게 만드는 건 음식이다. 철창에서 식탁으로 옮겨지면 그의 앞에 놓이는 음식. 그 음식은 그에게 ‘생각만 해도 구역질’을 불러일으킨다. 그 음식은 그에게 식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40일 단식 저 너머 ‘불가해한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굶기의) 영광을 빼앗겨 버린’ 치욕의 냄새만을 풍긴다. 세월이 흐르고, 모든 슈퍼스타와 베스트셀러의 운명이 다 그렇듯, 굶기 이벤트의 인기도 시들해진다. 철창의 무대는 철거되고 굶기의 아티스트는 잊혀진다. 하지만 잊혀진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또 많은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 버려진 마구간을 치우다가 서커스단 매니저는 여전히 혼자 굶고 있는, 먼지처럼 작아진 그를 다시 발견한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묻는다: 자네는 아직도 굶고 있나? 도대체 자네는 왜 굶는 건가? 단식광대는 꺼져 가는 소리로 대답한다: 난 그럴 수밖에 없어요. 굶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을 발견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 맛있는 음식을 찾아낸다면 나도 당신들처럼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을 텐데……. –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흐려진 눈에는 더 이상 자랑스럽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확고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맛있는 음식을 찾을 때까지) 앞으로도 단식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단식광대는 굶어 죽는다. 굶어 죽지만 굶기를 계속하다가 다시 깨어난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사건을 동반한다. 그 특별한 사건 중에는 <변신(Die Verwandlung, 1915)>도 있다.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서 자기가 밤 사이에 징그러운 갑충으로 변했음을 발견한다. 그는 하나도 놀라지 않고 자기를 관찰한다. 딱딱한 갑옷 같은 등판, 단단한 마디들로 그어진 배,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길고 가느다란 다리들. 그 다리로 만지면 ‘온몸이 소스라칠 정도로 아픈 배 위의 (전에는 없던) 흰 반점’. 그러나 관찰이 다 끝났을 때, 그는 자기 육체에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안심한다. 그건 여전히 변함없는 식욕 때문이다: “……더구나 그레고리는 모진 시장기마저 느꼈다.” 시장한 그에게 누구보다 그의 입맛을 잘 알고 있는 누이동생이 음식들을 가져다 준다. 그가 좋아하는 신선한 우유와 치즈 그리고 소금 뿌린 흰빵. 그러나 음식들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 냄새조차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그를 습격한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육체가 달라졌음을, 자기가 몹쓸 거식증에 걸렸음을 깨닫는다. 입 안에서 이빨들이 모두 사라졌고, 이전에 먹었던 모든 음식들을 거부하면서 그의 육체가 그 어떤 다른 음식을 맹렬하게 먹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그 음식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처음에는 썩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역겨움 때문에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는 하염없이 굶기 시작한다. 굶으면서 단식광대처럼 맹렬한 허기로 어떤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 그 음식은 무엇일까.  
 
그레고리의 허기에게는 두 개의 음식이 주어진다. 하나는 사과다. 아버지가 던져서 갑충이 된 아들의 등판에 깊숙이 박아넣는 사과, ‘온몸에서 모든 감각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사과, 금지된 허기를 배운 아들의 육체에 염증을 일으켜 나날이 썩어 가게 만드는 사과는 아버지의 음식이다. 신선한 음식들, 요리된 음식들, 메뉴의 음식들, 맛집의 음식들, 전에는 그레고리가 즐겨 먹었지만 이제는 거식증만 불러일으키는 세상의 허락된 음식들은 모두가 이 아버지의 사과 맛이 난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음식, 금지된 음식,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 있다. 그건 누이동생의 바이올린이다. 어느 날 저녁, 늘 음식 씹는 소리와 역겨운 사과 냄새만 건너오던 저편 부엌에서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온다. 세이렌의 노래를 따라가는 어부처럼 그레고리는 아버지가 금지시킨 문지방을 타고 넘어 거실로 나간다. 아무도 누이동생의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오직 그레고리만이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한 채 스스로에게 묻는다: “음악에 이토록 감동을 받는데, 과연 내가 동물이란 말인가?” 맹렬한 허기의 황홀경 속에서, ‘마치 그토록 열망했던 미지의 음식에 이르는 길을 찾은 것처럼’, 그는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 속으로, 음치의 음악 속으로, 누이동생의 육체로 접근한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까지 몸을 일으키고, 출근을 한 다음부터 리본이나 칼라도 없이 드러내 놓고 다니는 그녀의 희고 긴 목에 키스를’ 한다, 혹은 깨문다.
 

카프카와 펠리세(Kafka und Felice), 1914

1914년 카프카와 펠리세의 약혼 사진은 (결코 결혼이 될 수 없는 이 약혼) 우스꽝스러운 커플을 보여준다. 타고난 거식증을 엿볼 수 있는 깡마른 남자와 소화기관들이 아주 튼튼할 것임이 분명한 건강한 육체의 여자(‘무엇보다 당신의 건강한 이빨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라고 카프카는 편지에서 펠리세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이 사진은 동시에 암시로 가득 찬 공포 영화처럼 위험한 커플을 보여준다. 흰 목을 다 내놓고 앉은 무심한 여자와 모종의 허기가 가득한 눈으로 여자의 목 바로 뒤에서 은밀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남자. 이 한 장의 사진 안에 숨겨진 코드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간파한 사람은 들뢰즈다. 들뢰즈에게 카프카는 흡혈귀다. 더 정확히 여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흡혈귀다. 낮 동안 일상의 관 속에서 굶주린 카프카는 여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박쥐들이다. 박쥐들은 먼 곳의 여자들에게(펠리세는 한 여자의 고유명사가 아니다. 희고 긴 목을 가진 모든 여자들에 대한 보통명사다) 날아가서 목을 깨물어 흡혈한다(“마치 목마른 동물이 마침내 찾아낸 샘물에 혀를 날름거리며 달려들 듯이 K.는 뷔르스트너 양의 목에 키스를 했다.” 카프카, <소송>). 박쥐들은 주인의 관으로 다시 날아와서 토혈하고 그 피들은 잉크가 된다. 카프카의 글들은 모두가 이 잉크로 씌어진다.    
 
들뢰즈는 카프카의 글들이 금지된 음식, 미지의 음식에 대한 식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정확하게 파악한다. 하지만 미지의 음식을 기억케 하고 그 금지의 음식으로 유혹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음악이라는 사실은 놓친다. 카프카의 글 들 속에서는 언어의 의미들이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음치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카프카는 자기가 음치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신이 끊임없이 어떤 음악을 듣고 있음을 실토한다. 글쓰기는 카프카에게 언어들이 교란되는 틈새로 이 음치의 음악을 누설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그의 글들 속에서는 의미들이 읽히는 대신 어떤 음악이 들린다. 들리지만 사실은 들리지 않는다. 카프카의 음악은, 음치의 음악은, 음악 너머의 음악은, 개들의 악단이 ‘입 다물고 부르는’ 침묵의 노래처럼(<어느 개의 연구>), 기억이 금지된 40일 단식 너머의 기억, 망각이라는 이름의 기억 속에서만 들리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 음악은 청각이 아니라 후각으로 기억된다.  음악은 카프카에게 소리가 아니라 냄새다. 미지의 어떤 음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어떤 냄새. 그 냄새로 이끌어가는 어떤 음악. 음악은 카프카에게 듣는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 음식, 미지의 음식이다. 그리하여 카프카의 글들은 식욕과 허기를 자극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허기를 채울 수 있을까. 음치의 음악을, 미지의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이 레스토랑의 세상에서, 메뉴의 세상에서, 허락된 음식들의 세상에서, 그 음식들을 날마다 강제섭취당하는 세상에서(참고. Zwangsernaehrung -videoclip@kanalB.org).
 
그러고 보면 이제 알겠다. P의 폭식증과 나의 거식증이 다른 것이 아님을. 그의 탐식과 나의 절식이 다 같이 미지의 음식에 대한 금지된 식욕임을. 멜랑콜리 속에서, 맹렬한 허기 속에서 들려오는 그 어떤 음악의 냄새에 대한 예민한 후각임을. 《문장웹진 11월호》   
 

세바스티아노 살가도(Sebastiano Salgado),

말리의 정신병원(Das Krankenhaus von Gourma Mali),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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