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 & 마개

[권혁웅의 상상이야기_5]

뚜껑 & 마개

권혁웅
@ 커플지옥

바늘 가는 데 실이 있고 수나사 있는 곳에 암나사가 있듯, 마개 닫은 곳에는 따개가 있습니다. 커플에도 종류가 있는 걸까요? 실과 바늘이야 본래 천생연분이고 암나사와 수나사가 오래 산 부부와 같다면, 마개와 따개는 토라지고 달래는 애인들 같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그예 열어젖히는 솜씨 좋은 애인이 마개지요. 하긴 망치와 못도 있으니 다른 건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머리끄덩이를 잡고 두들겨도 찍소리 못하는 애인이라니, 솔로천국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 사지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왜 놀랐을까? 자라가 너무 커서일까, 아니면 너무 무거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뜨거운 자라여서일까? 혹 손잡이 달린 자라여서?

@ 사동과 피동의 차이

일의 내막을 공개하는 걸 뚜껑을 연다고 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는 걸 뚜껑이 열린다고 한다. 요는 누가 열었느냐 하는 것이다.

@ 버선의 종류

바닥이 다 해져서 발등만 덮게 된 버선을 뚜께버선이라 합니다. 뚜껑만 남은 버선이란 뜻이죠. 오래 씻지 않아서 발등이 새카매진 상태를 때버선이라 하면 그럴 듯 하겠죠? 뒤꿈치에 구멍이 난 버선은 조약돌처럼 뒤가 동그랗게 되었으니 몽돌버선, 여러 번 신어 앞코가 뭉그러진 버선은 야코죽은버선이라고 합시다. 참 서민적인 버선들이지요?

@ 알리바바와 40인의 짐승남

함부로 열어선 안 되는 뚜껑들이 있다. 이를테면 브래지어 같은 거. 지금 생각해보면 알리바바는 마흔한 번째 도둑이었다. 그 역시 보물이 숨겨진 문을 몰래 열었으니까.

@ 봉투는 늘 입에 풀칠을 한다

내용물을 담고 나면 봉투는 늘 입에 풀칠을 한다. 봉투를 흥부네 식구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심지어는 주걱에 붙은 밥알로 봉투를 붙이기도 했으니……

@ 봉투는 늘 풀칠한 입을 연다

봉투는 개봉과 밀봉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고백의 상징이다. 어린 시절 성적표에 부모님이 그렇게 흥분하셨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 설상가상

그녀는 떠났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그녀가 출렁일 때, 너는 잘 닫았어야 해. 너는 엎지르지도 않았고, 젖지도 않았어. 젖은 것은 다른 남자야. 그러니 질질 짜지도 마. 네가 물걸레야?

@ 사람이 덮개도 아닌데……

식스팩 광풍이 대단하다. 초콜릿복근이라는 말까지 있다니 아주 난리도 아니다. 초콜릿처럼 잘 배열된 복근이라고 하던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해부학교실이 생각나서 좀 끔찍하다. 인피(人皮)를 열어젖힌 너머에 알알이 박힌 초콜릿이라니…… 사람이 무슨 금박 포장 같다. 뒤척이면 배꼽을 중심으로 구겨질 것만 같다.

@ 한 귀로 듣지도, 한 귀로 흘려버리지도 않기

어떤 이들은 음악 없이도 이어폰을 낍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죠. 귀마개로 쓰는 이어폰이라니요. 따뜻하지도 않을 텐데요.

@ 63으로 원 샷 하기

회전문은 병뚜껑으로 치면 트위스트 캡이다. 퇴근 무렵의 63빌딩은 갓 딴 탄산음료 같아서, 3만 5000개의 거품이 여의로에 쏟아져 나온다. 벚꽃과 팝콘과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많을까? 부동산 다음으로 거품이 많이 낀 곳이 여의서로(汝矣西路)의 국회의사당과 여의동로(汝矣東路)의 63빌딩일 것이다.

@ 입과 항문 사이

위에서 닫는 마개가 있다면, 아래서 닫는 마개도 있다. 와인 병을 막은 코르크가 전자라면, 욕조 아래 하수구멍에 놓인 마개가 후자다. 전자는 술을 익히고, 후자는 때를 불린다. 마개를 놓치면 코르크가 물 위를 떠다니고, 욕조마개를 못 찾으면 때가 물 위를 떠다닌다. 그 둘을 입과 항문에 비교해도 좋겠다. 입이 위를 닫는 마개라면 항문은 아래를 닫는 마개니까. 술을 많이 마시면 위로 토하고, 물을 많이 마시면 아래서 설사를 하니까. 잘 닫고 여는 것, 그게 인생이니까.

@ 요람과 무덤 사이

요람과 무덤의 공통점은? 내 의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누가 누인다는 것. 차이점은? 요람에는 뚜껑이 없으나 무덤에는 있다는 것. 세상에, 뚜껑 하나 장만하기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니!

@ 민주주의의 중요성

침묵시위 때에는 마스크를 쓴다. 말할 수 없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 입에 뚜껑을 다는 셈이다. 그렇게 입을 막으면 먹을 수도 없고 키스를 할 수도 없다. 코감기에 걸렸다면, 심지어 숨을 쉴 수도 없다. 민주주의가 없다면 바로 그럴 것이다.

@ 시치미의 중요성

보고 싶을 때 눈에 밟힌다고, 눈이 빠질 뻔 했다고 너는 말하지. 그래서 안대가 필요하다고 나는 대꾸하지. 그건 맨홀 뚜껑 같은 거라고 혹은 압박붕대 같은 거라고 나는 얘기하지. 그렇게 나는 시치미를 떼지. 그러면 너는 눈을 흘기지. 시선을 옆으로 흘리지. 미처 못 닫은 주전자처럼, 주워 담을 수 없는 안타까운 눈을.

@ 행간의 중요성

모자가 사람의 뚜껑이라면 지붕은 집의 뚜껑이죠. 방언하는 어머니는 하늘의 뚜껑을 밀고 있고, 영어단어 외는 조카애는 대학 문을 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죠.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이마가 점점 넓어진 것도 비슷한 연유에서죠. 이마에 늘어나는 주름이 바로 행간이었어요. 문 열고 들어가면, 거기서 당신은 가계부를 쓰고 계셨던 거죠.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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