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

– 윤지영 희곡-텍스트 「황금동의 죽음」

 

 

임형진

 

 

 


“나 자신의 죽음과의 관계는 비록 그것이 예감이나 예지의 차원에서라 할지라도
앎이나 경험을 의미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지 못하며, 설령 죽음이 무화(無
化 aneantissement)
라고 해도 그 무화에 대해 관여할 수 없다.” 2)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윤지영 작가의 희곡-텍스트 「황금동의 죽음」은 다소 복합적인 연극-내부-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일상의 사건과 행동을 담담하게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물과 공간, 상황과 환경 사이에 ‘보이는’ 물리적 요소와 ‘보이지 않는’ 내면적 요소는 문학적 텍스트를 넘어 연극의 수행적 특성으로 이어지게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섯 인물(character)은 단순히 인간-존재로서만 설정되어 있지 않다. 여기엔 동물도 포함되는데, 바로 황금동이란 이름을 가진 개다. 작가는 이 개가 50세에 가까운 건장한 사람이며,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이러한 극적 장치는 우화적(allegory) 특성이 강조된 상징(주의)적 연극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동시대 사회와 일상의 보이지 않는 실체를 연극적으로 목격하게 만드는 ‘새로운 사실(주의)적’ 특징을 예상하게 한다. 그리고 개와 인간의 대화가 동시적으로 어긋나는 소통의 불가능성은 부조리극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개와 관련된 연극적 장치의 주요한 목표 지점은 바로 그 존재를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획득하게 될 인간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에 있다. 인간이 개의 정서를 혹은 개가 인간의 정서를 확보하려는 연극적 시도와 노력은 독자의 문학적 수용과 해석을 “공동현존(co-present)”3)의 신체화 과정에 이르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동물이 포함된 「황금동의 죽음」의 여섯 인물은 인터넷 포털 신문의 사회면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유형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상 속 내 주변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분명히 사회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독립적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양가적(ambivalent)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제목에 제시된 개의 죽음은 잘 드러나지 않는 누군가의 소외된 상태를 강조하려는 의도와 연관돼 보인다. 작품 속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소외의 양상과 흔적들은 존재자의 관계성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동물의 실존을 이야기하기 위해 포스트휴먼(posthuman)에 대한 개념적 정리가 필요하겠지만, 이 작품의 개의 역할은 연극을 위한 알레고리적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개가 동물의 실재성을 확인시키려는 극적 행동보다는, 일상적 존재와 그 주체를 소외시키는 수행적 과정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애플tv가 제작한 SF드라마 〈핀치〉(Finch 2021)도 이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핀치〉의 주요 인물은 병든 육체적 인간과 기계-인간, 그리고 개다. 이들은 인간 중심의 실존적 관계를 재고할 수 있는 행동을 서로 공유한다. 그 행동의 시간은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황금동의 죽음」은 ‘현재’의 시간을 중심으로 행동이 이루어진다. 작품 속 모든 인물은 ‘바로 지금 여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연극이 사회와 일상의 장(field)을 형성하고, 그 동시대적 감각과 시간성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1)  메를로-퐁티(Merleau-Ponty)의 미완성 텍스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동일한 제목임을 밝히는 바이다.
   2)  엠마누엘 레비나스, 쟈끄 롤랑 편집, 김도형 외 공역, 『신, 죽음 그리고 시간』, 그린비, 2013, 34쪽.
   3)  Erika Fischer-Lichte, 『Ästhetik des Performativen』, Suhrkamp, Frankfurt am Main, 2004, p.58.

 


    패치워크 패밀리(patchwork family)


    작품에는 가족을 구성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여고생 황영서와 할머니 금여사이다. 이 두 인물은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작품에는 황영서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그리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황영서의 학교 친구인 석자연은 황영서에게 그들의 가족사를 지속적으로 언급하는데, 이것은 인물의 심리를 점차 불안하게 만든다. 석자연은 황영서의 할머니를 엄마로 의심하기도 한다.

 

자연 :   그래서?

영서 :   뭐 손녀라고 하면 나나 그쪽이나 손해는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자연 :   야 근데 너네 할머니, 아니 엄마면서 할머니로 위장하는 금여사, 남편 없었잖아. 몇 십 년 동안.

영서 :   응.

자연 :   근데 어떻게 널 낳아?

영서 :   말미잘이냐. 미혼모는 남편 있어서 애 낳아?

자연 :   아…….

영서 :   종로 어디 공원에서 만났대.

영서 :   없는 자리에서 누굴 욕 못 해?

자연 :   벌써 죽진 않았겠지?

영서 :   ?

자연 :   니네 아부지.

영서 :   뭐 하러.

자연 :   금여사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영서 :   그놈의 아가리는 태어날 때부터 눈치가 없지.


    황영서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미혼모 이야기를 하면서 종로의 한 공원에서 만났다는 다소 모호하면서도 뜬금없는 대화는 그의 가족 구성이 어떠한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황영서에게 공원은 단지 아버지가 있었다고 들었던 공간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황영서의 할머니가 데려온 개 황금동을 발견한 장소 역시 동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금여사, 이불을 펴준다.
황금동에게 와서 누우라고 손짓하면 싸구려 이불에는 안 앉겠다는 황금동의 표정과 몸짓
금여사, 그런 황금동을 안아서 이불 위에 누인다.
황금동, 잠깐 놀라지만, 금여사를 가만 보다가 손을 핥는다.

 

영서 :  키울라구?

금여사 :  그럼.

영서 :  남이 버린 걸 왜?

황금동 :  (울적해 고개를 숙인다)

금여사 :  남이 버리긴. 날 찾아와 준 거지.

황금동 :  (감동해 금여사를 올려다본다)

금여사 :  ……너처럼.

영서 :  누가 버린 걸 주웠어? 할머니 딸이 아니고?

금여사 :  야. 비유잖아, 비유. 국어공부 좀 해라.

영서 :   난 또.

금여사 :  황금동 어때?

영서 :  뭐가?

금여사 :  이름.

영서 :  동네 이름도 아니고 뭔 황금동.

금여사 :  황영서의 황. 금숙자의 금. 황금은 좀 그러니까 황금동. 어때?

황금동 :  (썩소를 짓는다)

금여사 :  봐봐라. 얘도 좋아서 웃잖아.

영서 :  황? 황 씨야?

금여사 :  뭐가.

영서 :  내 아부지.

금여사 :  자자, 황금동아. (황금동을 토닥인다)

영서 :  누구야?

금여사 :  …….

영서 :  누군지도 몰라?

금여사 :  아이고, 잠이 오네, 그치 황금동아?

영서 :  (금여사에게로 다가가) 누군데?

금여사 :  (강하게) 몰라.

영서 :  …….

금여사 :  (속삭이듯) 진짜 몰라.

   […]

황금동 :  공원에서 자고 있는데…… 금여사가 날 깨웠거든. 그렇게 자다 죽었으면 사람이 미웠을 텐데, 금여사가 날 깨워서, 니네 단칸방으로 데려가 줘서 다시 좋아지더라, 사람이. 금여사가 좋고, 니가 좋더라.

 


    위 내용을 살피면, 황금동과 황영서의 입장과 처지는 서로 유사해 보인다. ‘버린 것을 주워왔다’고 표현하는 황영서의 대사는 작품의 제목에서 제시하는 죽음의 대상이 실제로 누구였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실제로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할머니에게 계속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는 황영서의 행동과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할머니의 태도는 일반적인 가족의 분위기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전사를 발견하기 어려운 두 인물 황영서와 할머니의 가족의 형태는 패치워크 패밀리를 닮아있다. 생물학적 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패치워크 패밀리는 유럽에서는 이미 흔한 가족 형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작가는 가족 구성원 사이에 인간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를 하나 더 여기에 포함시킨다. 바로 아파서 버려진 개다. 이것은 가족으로의 단순한 편입이라기보다, 소외된 존재의 내부적 동질감의 공유와 위로를 우선하는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유전적으로 다른 가족 구성원은 황영서와 할머니, 황금동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석자연도 이들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심리적인 측면이 강하다. 황영서는 자신에게 항상 폭력을 일삼는 친구 석자연과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다. 또한 강지수가 그에게 황금동의 수술비용 해결을 조건으로 친구 석자연의 얼굴을 면도칼로 그을 것을 제안하자 이를 수용하고 바로 실행하지만, 피해자 석자연은 황영서와의 관계를 이어가길 원한다. 이 사건 이후 둘의 관계는 오히려 더욱 단단해진 것처럼 보인다. 황영서는 황금동을 태웠던 유모차의 빈자리에 석자연이 앉는 것을 허락한다. 이때 석자연은 아늑하다고 말한다. 바로 이 순간 황영서에게 새로운 가족이 한 명 더 추가된 것이다.

 

영서 :  왜 또 팰라구.

자연 :  이게 합의해 준 은혜도 모르고. 너 나 아니었으면 지금쯤 빵에 있어.

영서 :  ……헛소리 할라믄 가라.

자연 :  (뺨을 보이며) 어때, 감쪽같지?

영서 :  그러네.

자연 :  강지수 엄마한테 수술비 받았어.

영서 :  나한테 받아야지 왜 걔네 엄마한테.

자연 :  왜긴, 강지수가 너한테 시켰잖아. 넌 돈 없을 게 뻔하고.

영서 :  (한숨)

자연 :  아, 나도 정학이나 당할까. 낮에 학교도 안 가고, 팔자 좋네.

영서 :  (헛웃음) 야, 쓸데없는 소리 할라믄 학교나 가.

자연 :  (유모차 보며) 타봐도 되냐? (유모차에 앉는다)

영서 :  아씨.

자연 :  야, 밀어 봐.

영서 :  뭐?

자연 :  밀어 보라고. 황금동이 타고 있을 때처럼.

영서 :  허참.

 

황영서, 유모차를 민다.
황금동, 옆에서 아이들을 따라 걷는다.

 

자연 :  (유모차에 기대며) 이런 뷰였구만.

영서 :  뭐가.

자연 :  황금동이 본 경치.

영서 :  ……좋냐?

자연 :  cozy.

영서 :  뭐, 코딱지?

자연 :  아씨, 무식한 년. 아늑하다고.

 


    석자연 역시 황영서와 동일한 전사를 지닌 인물처럼 보인다.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이 두 인물이 서로 폭력적으로 행동하였어도 서로를 버리지 않는 이유가 된다. 이 작품에서 누군가에게 버려진 인물은 황영서, 황금동, 석자연으로 나타나지만, 할머니는 황영서를, 황영서는 황금동을, 죽은 황금동은 다시 황영서를 지켜주고자 한다. 이제 여기에 석자연도 함께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자신의 개인적 삶을 하루하루 인식하며 지내고 있다. 다음의 대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자연 :  (버럭) 너 또 나 무시하냐?

영서 :  내가 언제 너 무시했냐. 지도 맨날 나 무식한 년이라고 하면서.

자연 :  황금동만 챙겼잖아. 나 보지도 않고.

영서 :  너 지금 개를 질투하냐. 그것도 죽은 개를?

자연 :  ……난 친구 너 하나야.

영서 :  (한숨)

자연 :  그동안 나 상대해 준 거 너 하나라구.

영서 :  …….

영서 :  그냥 가라.

자연 :  그때, 편의점에서. 니네 엄마 얘기한 거 아니야. 진짜 스토리 구상한 거야. 재밌을 거 같아서.

영서 :  …….

자연 :  나 눈치 없잖아. 다들 나보고 눈치 없대. 철도 안 들었고.

영서 :  …….

자연 :  난 이야기 생각한 건데 니가 내 얘기 들어보지도 않고 씹었잖아. 맨날.

영서 :  그래서 팼냐.

자연 :  그래.

영서 :  그게 친구냐.

자연 :  ……먼저 버림받기 싫어서 그랬다.

영서 :  …….

자연 :  아씨, 졸라리 재미없네. 학교나 가야겠다.

 

석자연, 사라진다.

 


    가족은 외적인 형태로서 드러나기도 하지만, 서로 의지하고 공유할 수 있는 심리적 관계에 의한 보이지 않는 상태로서도 가능한 것이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죽은 황금동이 황영서가 앉은 유모차를 밀어주며 천천히 사라지는 장면은 소외된 이들을 버리는 사람들과 이들을 발견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우리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병든 개였고, 그래서 버려졌고, 치료조차 금전적 이득을 위한 어른에게 이용당하고, 결국은 죽어서, 보이지 않는 모습의 황금동은 황영서의 곁에서 행복을 빌어 주고자 한다.

 

황금동 :  (웃는다) 그래, 가끔은 들리는구나. 나 여기 있어, 영서야. 나 혼자 아니야. 석자연도 있고 나도 있고. 저기 다리 건너 하늘엔 금여사도 있어. 금여사가 4년 대학 등록금 무사히 내고, 시집가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도록 보험금까지 빵빵하게 나오게 해놨더만. 계약서 잘못 써서 아직은 못 쓰겠지만. 이제껏 편의점 알바로 용돈 쓰고, 참고서 사고, 전기세, 수도세까지 냈으니까 앞으로 2년은 잘살 수 있지? 넌 늘 의젓했잖아. 영서야, 우리 둘이 안 만났으며 나는 참 불행했을 거야. 여기 이렇게 떠돌아다니면서 누구 행복을 빌어 줘? 날 버린 사람들밖에 안 남아 있는데. 난, 여기 바람에 실려서 니 행복을 빌어 주다 너랑 같이 갈 거야. 그게 우리 할 일이래. 알고 있었니? (입김을 분다) 후- 니가 여기 있을 동안 나도 내내 같이 있을 거라고.

 


    소외를 대하는 방식


    이 작품을 관통하는 동시대의 성향과 그 특징은 소비적 정서와 내밀하게 연결돼 있다. 소비는 이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언급하였듯이, 소외의 현상을 지속적으로 발생시킨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간에게 풍부한 환경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풍부함만큼이나 상대적인 결핍도 가져온다. 보드리야르는 이와 관련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의 소비적 경향은 폭력과 피로를 발생시키는데, 이것은 “소비와 똑같이 끝도 목적도 없다”4)고 설명한다. 신자유주의-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우리의 일상 내부에 촘촘하게 고착된 현실은 「황금동의 죽음」의 연극-내부-구조와 인물들 사이에도 발견된다. 황영서가 석자연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모습은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피로의 증상과 같은 심리적 충동의 무화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석자연의 폭력 역시 사회적 환경에 대한 분노의 표출보다는, 우리 사회의 일상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의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4)  장 보드리야르, 이상률 옮김, 『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 2002, 269쪽.

 

목적이 없는 이러한 폭력은 몇몇 나라에서는 아직 산발적이지만, 고도로 발달한 (또는 너무 발달한) 모든 국가에서는 사실상 만성적이다. 이러한 종류의 폭력의 문제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의 일환인데,
그것은 단순히 풍부함의 사회학적 부조화의 문제가 아니라 풍부함 그 자체의 근본적인 모순의 문제이다.5)


    작품의 인물들이 제시하는 폭력의 양상은 앞에서 언급한 석자연 이외에도 다양하게 발견된다. 강지수가 석자연의 얼굴을 칼로 긋는 것을 제안한 것이나, 이를 그대로 실행한 황영서의 행동 모두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본주의 환경의 근본적인 모순적 지점은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을 모든 대상에게 냉정하게 마주시키는 데 있다. 작가는 황영서에게 가족의 부재를 가져온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한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 사회를 향해 작가가 던지려는 소외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에 해당할 것이다. 작품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 석자연에게 라면을 먹자고 전화로 담담하게 말하는 황영서의 모습은 명료하고 경쾌해 보인다. 그는 소외를 피하기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죽음을 그대로 마주하고 인정하려는 것처럼 비친다. 이것은 주체의 존재론적 걱정과 공포가 버려진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공감과 책임의 자세로 전환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글을 마무리해 보자면, 이 희곡-텍스트는 무엇보다 황금동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분석할 것인지가 중요한 작품이다. 황금동은 개념적으로 대상이나 도구가 아닌 개별적 인격으로 파악된다. 병들어 버려진 개의 죽음은 어떠한 종말과 단절의 상태가 아니라 타자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에 반응하고 행동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상태로서 작용한다. 여기에 에이즈에 감염되어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윤지영 작가의 희곡-텍스트 「황금동의 죽음」은 소외를 피하는 방식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타자의 얼굴을 인식함으로써 죽음의 영원성을 떠올릴 수 있는 극적인 순간을 무대 위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5)  위의 책, 270쪽.

 

 

 

 

 

 

 

 

 

 

 

 

임형진
작가소개 / 임형진

2008년 제5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젊은비평가상 수상으로 연극평론을 시작하였으며,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대표 및 상임연출, 상명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문장웹진 202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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