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생활자와 그의 아들

[단편소설]

 

 

연금생활자와 그의 아들

 

 

오현종

 

 

1

    무대 위에서 햄릿을 연기하다 객석에서 나를 닮은 얼굴을 보았다. 무대 위로 햄릿의 죽은 아버지가 등장한 직후였다. 좁은 객석을 짓누른 어둠 속에서 나를 닮은 얼굴을 목도한 순간 흠칫 목덜미를 떨었고, 외줄을 타면서도 줄줄 읊을 만큼 외운 대사를 몇 번이고 놓쳐버릴 뻔했다. 어둠에 감싸인 얼굴은 흐릿해서 불명료했지만, 그것이 내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았다. 꿈속에서 나를 보았을 때, 이목구비를 살피지 않고도 그게 나라는 걸, 어느 누구도 아닌 나일 수밖에 없다는 걸 자연스레 알듯이.
    1막이 끝날 때까지는 객석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무대 아래 무엇이 웅크리고 있든 지금은 무대 위의 유령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햄릿>을 재해석한 대본이라 햄릿의 비중이 원작에 비해 훨씬 작다 해도, 광대만을 연기했던 내가 왕자 옷을 입게 된 첫 공연이었다. 개막일에 관객이 절반밖에 차지 않은 무명 극단의 공연이라도 나는 햄릿이었다.
    아들아, 잘 있어라, 잘 있어. 아비를 기억해 다오.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퇴장하고 이 공연에서만큼은 실질적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 광대역의 배우가 자신의 대사를 내뱉는 동안, 나는 소리 없는 말을 주문같이 반복했다.
    나는 햄릿이야. 왕자야. 여기서는 누구도 대신 왕자가 돼줄 수 없어. 정신을 차리라고.
    손바닥에 밴 축축한 땀을 긴 소맷자락에 닦고, 사라진 유령에 대해 말하고 곡하고 그리고 웃었다. 막간에 객석을 훑어보았을 때는 나를 닮은 얼굴이 그야말로 무대 위 유령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림자도 남기지 않은 채. 나는 곧 안도했고, 2막부터는 조금씩 앞자리 관객들과 눈을 맞춰 가며 연기했다. 나를 닮은 얼굴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려 아무도 모르게 엄지와 검지를 맞비볐다.
    나는, 햄릿은 원작과 달리 어릿광대의 명령에 의해 단두대에 오른 후에야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햄릿이 아니라 내 목이 달아나 없어진 기분이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목젖을 더듬었다. 목덜미를 매만졌다. 난방시설이 부실한 극장 안에서 굳어 있던 손가락은 맥박을 읽지 못했다. 다만 살갗의 부드러움만이 내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출구 쪽에 서 있던 스태프에게 몸이 좋지 않아 구토가 날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땅 위로 올라서자마자 1월의 밤바람이 뺨을 훔치고 지나갔다. 뺨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과 함께 공연을 망쳤다는 자각이 들었다. 나를 닮은 얼굴 탓이었다. 내 얼굴이 내 공연을 망쳐버렸다고 믿기 시작하자 내가 미웠다. 소극장들이 모여 있는 뒷길을 빠져나와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령을 연기한 김 선배가 어디 있냐고 연달아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답하지 않았다. 김 선배와 대사 맞추는 연습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창백한 낯을 보기만 해도 정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헛것을 김 선배가 불러오기라도 한 듯 그도 미워졌다.
    정류장에서 번호를 확인하지도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공연장에서 세 정류장만 지나면 집이었다.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 가운데 내가 사는 동네로 가지 않는 버스는 어차피 몇 개밖에 되지 않았다. 덕다운 점퍼 주머니 속 휴대폰 진동이 전해졌으나 주머니 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단원들이나 연출가의 입을 통해 실패를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연출을 한 송은 미친 새끼, 만날 제멋대로인 새끼, 늘 하던 욕을 되풀이할 테지만 상관없었다. 집으로 가야 했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을 지날 때 수연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만두었다. 연극이 끝났고,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2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문간 등이 자동으로 불을 밝혔다. 현관을 빼놓고는 오래 비워 둔 집처럼 어두웠지만 운동화를 벗고 마루 위로 오르니 오래 데워진 공기에 얼굴이 녹는 느낌이었다. 거실 등을 켜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건너편 안방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넓은 대리석 식탁 위는 짐작대로 텅 비어 있었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식탁 위에 나물이며 조림 반찬이 깔려 있고, 가스레인지 위에도 미리 끓여 놓은 찌개 냄비가 올라 있었을 것이다. 압력밥솥 뚜껑을 열면 쌀밥에서 뿌연 김이 올라와 눈앞을 가렸겠지.
    점퍼를 식탁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고 쌀을 씻었다. 첫 공연이 주는 긴장으로 아침부터 식사를 하지 못했다. 오후에 누가 건넨 빵조각을 뜨거운 커피에 녹여먹긴 했지만, 하루 세 끼 꼬박 챙겨먹던 여느 날과 달라 저녁에는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밥이 가장 빨리 되는 백미를 밥솥에 안치고 좀 있다가 달걀을 볼에 풀어 젓는데 등 뒤에서 칙칙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왔냐.
    익숙한 목소리에 이어 식탁 의자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는 하셨어요?
    나는 아버지가 밥을 해먹지 않았으리란 걸 알면서 물었다.
    이제 먹어야지.
    주방 시계를 흘끔 올려다봤다. 공연이 끝난 뒤니 저녁식사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나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도마에 양파를 놓고 채쳤다. 주방 칼이 너무 무뎌 칼질이 어려웠다. 언제고 칼을 갈아야지 갈아야지 하면서 내버려둔 지 오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칼을 간 기억이 없었다. 차라리 낡은 칼을 버리고 새 칼을 장만하는 편이 빠를 것 같았다.
    먼저 드시지 그랬어요. 기다리실 필요 없는데.
    먹을 게 없는데 뭘 먹으란 말이냐.
    나는 냉장실 문을 열어 작은 전골냄비를 꺼냈다. 그밖에는 상 위에 올릴 만한 반찬이 눈에 띄지 않았다. 두 시간 거리의 신도시에 사는 누나가 다녀간 지 한 달이 되었으니 마른반찬이 떨어진 것도 당연했다.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자 진한 된장 냄새가 주방을 채웠다.
    찌개를 데워 드시면 됐을 텐데. 서랍에 라면도 많고요. 짜장 라면도 있네.
    나는 싱크대 서랍에 들어 있던 배달음식점 스티커를 냉동실 문에 소리 나게 붙였다. 어머니는 나랑 아버지를 식성이 까다로운 사람들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가 된장찌개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잊은 척 달궈진 냄비를 식탁 한가운데 올려놓았다. 주방 벽에 매달린 텔레비전 전원을 켰다. 막 지은 밥을 퍼 두 사람 몫의 상을 봤다.
    텔레비전 화면은 언제나처럼 요리 전문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거나 울거나 그러지 않으면 악다구니를 쓰는 드라마는 질색이었다. 대학 연극반보다 못한 배우를 보며 밥알을 씹고 싶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알면 너는 네 연기에 설득당하냐고, 진짜 그러냐고 문자를 찍어 보내고 싶었다. 너 자신도 설득 못할 흉내 내기로 누굴 설득할 셈이냐고.
    텔레비전 볼륨은 높지 않게 맞춰져 있었다. 주방에서 어머니의 의자가 치워진 뒤로 텔레비전이 어머니의 자리, 어머니의 목소리를 대신해 주었다. 어머니도 목소리가 큰 사람은 아니었다.
    오늘이 공연 첫날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배우들 식구나 친구들이 많이 왔어요. 그런다고 객석이 다 차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공연하는 극장에 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아버지를 조금 비난하고 싶었기에 공연 얘기를 꺼냈다.
    언제 보러 오시면 아실 텐데, 어느 왕국의 왕자 얘기예요. 아버지의 귀에 독을 넣어 죽인 숙부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데 단칼에 하질 못하네요. 젊은 놈이 용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잃을 게 더 많기 때문이겠죠? 녀석은 왕궁을 떠나기 싫은 게으른 인간일 뿐인지 몰라요. 사느냐 죽느냐 하는 고뇌는 그저 고상한 포장지죠. 내 생각이 그렇다기보다 우리 작가랑 연출가 의견이 그렇다고요. 그래서 우리 연극에선 왕자를 단죄하기로 했어요. 광대가 왕자를 벌해요. 목을 자른다고요.
    공연은 아직 한 번밖에 안 했지만, 연습하면서 수도 없이 단두대에 목을 올렸어요. 공연을 세 번 더 해야 하니까 최소한 세 번은 더 목이 잘려야겠죠? 그 생각을 하면 자꾸 멀미가 나요. 목덜미가 오그라들고. 아, 왜 공연을 네 번밖에 안 하냐면, 우리가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 참가한 여섯 팀 중 하나라 그래요. 여섯 팀의 합동 공연이죠. 이번에 반응이 좋으면 말이죠…….
    하지만 요리 프로그램 게스트의 웃음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아버지는 내 얘기를 듣는지 마는지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는 한쪽 귀가 어둡기도 했다. 식사 중에 오가는 말을 잡소리라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된장찌개 냄비를 젓가락으로 슬쩍 밀어 놓은 아버지는 참기름을 치고 쪽파를 얹은 명란젓에도 젓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좀처럼 밥 생각이 없는 모습이었다. 온종일 밖에 나가지 않고 대문 안에서 머물렀을 테니 식욕이 없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혈압 걱정에 소금 든 반찬을 안 드시는 거예요? 내일은 연습실 나가기 전에 식료품을 좀 배달시킬게요. 갈치 토막이라도 구워먹게. 한우는 값이 너무 올랐어요. 제가 바빠서 주문을 못 했더니 냉장고가 비긴 했네요.
나는 달걀말이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식비며 공과금, 때론…… 내 용돈까지 전부 연금생활자인 아버지의 통장에서 현금카드로 꺼내 쓰면서 내가 벌어 대는 듯 생색을 냈다. 연금생활자의 통장은 썰물과 밀물처럼 한 달을 주기로 비워졌다 채워졌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통장을 내가 맡고는 한두 번 잔고가 빈 적도 있었지만, 그 후로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연금생활자는 많이 먹고 노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퇴직자가 가질 만한 취미도 친구도 없었다. 연금생활자의 통장은 쉽게 마르지 않았고, 달걀말이는 아직 식지 않아 맛있었다. 혈압이 심각하게 높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양파를 채 썰어 넣었는데 아버지가 먹지 않으니 내가 먹어버리는 수밖에.
    된장찌개가 맛이 안 나요? 그렇죠, 된장은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게 최고였는데. 어머니가 안 계시니 그런 된장은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네요.
    나를 또 비난하고 싶은 게냐? 내가 네 어미를 죽였다고?
    그렇다고 말한 건 아닌데요.
    아니라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처럼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암이 아버지 탓은 아니지. 누구에게나 생기는 병 아니니. 내가 화를 낼 때면 누나는 그렇게 타이르곤 했지만, 아버지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이 그랬다. 아버지나 누나나 잘한 건 없었다. 나는 오 년 동안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살았다.
    마당에는 나가 보았냐. 한파가 며칠짼데 보일러가 터지진 않는지 살펴야 할 게 아니냐. 네 집이 아니라고 무관심한 게냐.
    아버지 역시 비난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와 나는 닮았다. 마르고 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눈두덩이만 닮은 게 아니었다.
    그런 말 마세요. 이 집이 아버지 집인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보일러실…… 은 아무 문제없다고요.
    정말 그래?
    네, 멀쩡해요. 꽝꽝 얼어붙은 게 정상이에요.
    뭐가 정상이냐.
    겨울이잖아요. 아직 1월도 다 가지 않았어요.
    빨리 겨울이 지나갔으면 좋겠구나. 날이 너무 춥다.
    나는 공기에 남은 밥을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먹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건더기가 남은 찌개 냄비와 반찬이 남은 식기까지 모조리 개수대로 옮기고 수도를 틀려는데 어깨 너머에서 반쯤 쉰 목소리가 넘어왔다.
    겨울이 지나면 넌 어쩔 작정이냐.
    나는 수도를 세게 틀어 그릇을 닦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보니 빈 의자만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밥그릇과 수저가 식탁 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안방 나무문 틈으로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밤이 물러가도 저 소리는 멈추지 않겠지. 나는 아버지와 나의 TV디너가 끝난 것에 안도했다.

 

 

3

    공연 두 번째 날은 4막의 한중간 객석에서 나를 닮은 얼굴을 보았다. 살짝 웃는 듯 찡그린 듯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첫 공연날만큼 놀라지는 않았지만, 내가 뱉은 긴 탄식이 햄릿의 것만은 아니었다.
    나를 닮은 얼굴은 자리를 오래 지키지 않았다. 대사를 몇 마디 외우고 돌아보는 사이 환각처럼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수연이 있었다. 영화를 볼 때만 끼는 낯익은 뿔테안경이 객석의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알려주었다. 이 모두가 꿈은 아닐까, 악몽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떠올랐으나 이내 오필리아의 비명소리에 떠밀려갔다. 내 꿈에 수연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연은 너무나 현실에 속한 사람이었다. 현실적이어서 지루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 시간이 꿈일 리 없었다. 안도한 나는 다시 오래전 왕국의 왕자가 되었다. 왕자라는 또 하나의 허상 속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 먼저 수연의 휴대폰으로 기다려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무대의상을 갈아입으면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언제인가 가늠해 보았다. 첫눈이 쌓인 다음날 보고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도 서로 연락하지 않았으니 근 두 달 만이었다.
    수연의 방문이 뜻밖은 아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지도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는 누구와 보냈냐고 물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수연과는 대학 졸업반 때 만나 헤어지고 만나길 반복했다. 처음 헤어졌을 때만 끝인 줄 알고 괴로웠지 똑같은 일이 반복되자 이별도 일상이 되었다. 연애에서 빼놓으면 안 될 한 과정, 무시할 수 없는 절차가. 떨어져 지내다 도로 만나게 되는 주기도 보름이었다 한 달로, 길면 두세 달로 점점 길어졌으나, 완전히 헤어지지는 못했다. 메트로놈의 추처럼 동일한 궤도를 오가는 관계가 지겹다 못해 이제는 그녀가 빨리 다른 남자와 결혼해 주었으면 하는 소망까지 들었다. 그러면 그녀의 이별 통고에 진심으로 울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슬픔다운 슬픔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늦은 저녁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말을 건넸더니 수연은 별 말 없이 따라왔다. 언젠가 수연이 찾아왔을 때 저녁식사 겸 반주를 나눴던 주점을 찾아 골목을 걸었고, 잘못 들어선 길을 돌아 나오며 수연의 손을 쥐어 덕다운 점퍼 주머니에 끌어넣었다. 수연은 내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수연보다 손이 차가운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주점 안에 들어가 마주 앉고서야 비로소 수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온종일 영하로 내려가 있던 날씨 탓인지 그녀는 화장이 뜨고 표정이 굳어 있었다. 해가 바뀔 때 혼자만 나이를 두세 살 먹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녀를 정말 반가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오늘밤 나 역시 지쳐 있고, 단잠을 자고 싶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악몽을 꾸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면에 시달리는 밤을 덜어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겨울밤이 너무 길었다.
    뜨거운 우동에 정종을 마시고, 감자 고로케에 정종을 마시고, 이어서 참치다타키에 정종을 마신 다음 수연에게 말했다. 술을 마셨기에 말했는지 말하기 위해 술을 마셨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오늘 우리 집에 갈까.
    너희 집?
    수연이 입술에 댔던 술잔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녀도 술기운이 도는지 눈자위가 빨갰다.
    그래.
    그동안 집 나왔어?
    아니.
    아버지는?
    아버지는…… 먼데 가셨지.
    여행?
    오늘은 안 돌아오셔.
    정말 가도 돼? 무슨 일이야. 너네 집엔 한 번도 데려간 적 없잖아.
    나는 술잔을 깨끗이 비우고 일어섰다. 수연도 따라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내일은 공연이 없는 날이었다. 잠을 좀 자고 싶었다. 잠다운 잠을 못 잔 지 일주일째였다. 수연을 깊이 안고 같은 베개를 베고 누우면 나쁜 꿈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잠든 왕의 귀에 독을 넣는 동생과 자신이 남긴 왕국을 맴도는 죽은 왕과 그 왕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는 긴 잠을. 수연은 꿈이라곤 없는 사람이니까.

 

 

4

    수연의 감긴 눈꺼풀 위 작고 붉은 점, 내 목을 감싸 안는 어김없이 차가운 손가락, 모두가 같았다. 지난해의 그녀와 같았고, 지지난해의 그녀와도 같았다. 너무 익숙해서 수십 번 돌려 본 해묵은 영화의 여배우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 보고 들어서 돌려 보고 싶지 않지만, 마땅히 볼 영화가 없을 때면 다시 찾곤 하는.
    그리고 영화가 끝날 무렵 여배우가 종알거리는 대사는, 어김없이 동일했다.
    우리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없을까.
    나는 매번 우리? 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없었다.
    우리 이제 같이 지내면 안 돼?
    수연의 옷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좁디좁은 원룸에서 내 방으로 공간이 달라졌다 해도 대사는 똑같았다. 수연과 처음 헤어지기로 결정한 새벽에도 들은 말이었다.
    어디서?
    질문이 같으면 같은 답을 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너는 그 말밖에 몰라? 우리도 이젠 애들이 아니잖아.
    애들처럼 살면 안 되는 건가?
    연극하는 사람들이 모두 너같이 살지는 않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아주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수연은 이불 밑의 손을 내 몸으로 뻗어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아랫배로 올라오는 손바닥이 냉장실에서 꺼낸 생선 뱃살처럼 차가웠다. 소름이 돋았다. 극단 후배 정처럼 낮에는 닭을 튀기고 밤에는 맥베스로 살거나 선배 윤같이 아내의 가게 일을 도우면서 충무로로 나갈 꿈을 키우는 사람도 있지 않으냐는 소리가 이어질 차례였다. 순서가 그랬다.
    수연은 나를 잘 안다고 믿겠지만 모르는 것도 많았다. 그녀를 사귀는 동안 내가 두어 달 집에서 나가 산 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래층에 당구장과 호프가 있는 여섯 평짜리 방에서 집들이를 하기도 싫었고, 수연의 연락이 뜸한 사이 극단 후배를 만났기에 더더욱 수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수연을 방으로 부르기도 전에 죄다 싫증이 나버려 아버지가 혼자 남아 있던 이층집으로 돌아오게 됐지만. 집에서 나가는 게 어려웠지 집으로 들어오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이 집으로 대출 좀 받으면 안 되나. 마당이 생각보다 넓은데 언제 지은 집이야? 방이 몇 갠가. 우리 살 집 작은 거 구하고 벌어서 갚아 나가면 안 될까?
    오늘은 대화의 경로가 조금 달랐다.
    이 집은 아버지 집인데.
    아버지 집이니까 물어보라고 하지.
    …….
    주택은 관리하기 힘들다던데, 팔고 아파트로 이사하는 게 낫지 않아? 둘이 살기엔 집이 너무 넓다.
    그럼 네가 들어와 살든지.
    아, 그건…… 이 근처로 오피스텔 하나 얻으면 어때? 이 동네 신축 오피스텔은 없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취기가 묻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리모컨처럼 버튼이 달렸다면 볼륨을 낮춰 주고 싶었다.
    집주인이 되고 나면 밥은 누구 돈으로 먹고?
    같이 조금씩 벌어야지. 네 아르바이트는 내가 알아볼게.
    난 조금 벌어선 못 사는데.
    수연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선을 피하려고 나는 몸을 모로 돌렸다. 그녀를 등지고 누웠다.
    너는 왜 음소거가 안 되니.
    수연은 내 말을 아주 못 들은 것 같았다. 이불이 들춰져 등이 시렸다.
    넌 언제까지 아버지랑 살래? 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 서른도 넘었어. 몰라? 독립 안 해? 생각 없어?
    내가 왜 여기서 나가야 하지. 나가라는 사람도 없는 집에서 왜.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에 돌돌 말았다. 고치처럼 말았다.
    아, 또 그 소리! 그만 해! 아버지랑 살기 지긋지긋하다고 한 사람은 너였어!
    같은 말만 하는 사람은 너야. 난 누구를 책임질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넌 어떻게 받기만 하고 줄 생각을 안 하니! 난 어떡하라고!
    수연이 내 등을 세게 밀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손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찬 것 같았다. 살면서 이런 모욕은 당해 보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없는 집에 여자를 데려오다니 실수였다. 내가 나빴다. 이곳은 수연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었다. 수연은 이 집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침대 등을 켜고 일어나 트렁크 팬티와 라운드 티셔츠를 찾았다. 수연은 이미 청바지에 다리를 꿰어 넣고 있었다. 알몸을 보여준 적 없는 여자처럼 브래지어만 걸친 등을 돌린 채 서둘러 옷을 입는 중이었다.
    네가 대체 뭘 줬는데?
    뭐라고?
    수연이 휙 돌아서자 흐린 조명에 비친 낯이 돌연 나를 닮은 얼굴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내 수십 번도 더 보았던 일그러진 얼굴, 눈가가 젖은 얼굴로 바뀌었다.
    너도 나가서 아버지 같은 사람을 찾아보라고.
    이 말은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넌 개새끼야.
    수연은 가방과 코트를 한데 움켜쥐고 방문을 열었다. 닫히지 않은 방문 너머로 탁탁, 탁탁, 일층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연아, 넌 왜 이렇게 요구가 많니. 어머니는, 아버지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나는 침대 등을 끄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오늘은 꿈 없는 잠을 자고 싶었는데, 글러버린 모양이었다. 수연은 몇 달 뒤 기억이 다 날아갔다는 듯 나를 또 찾을까. 이번에는 진심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와 완전히 헤어지기 위해 내가 사는 집으로 데려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도, 이런 밤도 모두 마지막이기를 바랐다.

 

 

5

    공연 네 번째 날, 마지막 공연일에는 좀처럼 나를 닮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5막이 끝날 무렵, 내가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에야 객석 맨 뒷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를 닮은 얼굴이 맞았다. 오늘 연극을 하는 내내 어딘가 불안했던 까닭을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왜 안 나타나나, 어제는 3막 1장에 나타났는데 오늘은 왜 안 오나, 안 나타나다니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토막토막 스쳐갔었다.
    입을 꼭 다물고 객석에 있는 그 얼굴을 유심히 살필 여유는 없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극을 감상하는 모습이 제법 진지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내가 아니라 햄릿이 되어 흐느꼈고, 마지막 대사를 외쳤다. 첫 공연처럼 망친 기분은 아니라 무대에서 내려올 때 다리가 가벼웠다. 햄릿의 나날이 끝났으니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을지 몰랐다.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는 안도감에 기대어. 관람을 마치고 몰려 나가는 관객들 사이에 짐작처럼 나를 닮은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밤이 깊도록 극단 사람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셔야 했다. 그저께 후배들 앞에서 내게 욕을 퍼부었던 연출가 송이 오늘은 사랑한다고 말했다. 술자리 중간에 나는 두 번이나 가게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수연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태 연락이 안 되니? 어딜 가셨다고 했지? 휴대폰도 안 받는 건 무슨 경우야?
    누나는 왜 같은 말을 자꾸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매형이 자정 넘도록 퇴근을 안 했나. 아버지는 친목회에서 눈 구경을 갔다고 했는데 왜 내 말을 안 듣나. 길가에 덜 녹은 눈이 얼어붙어 네온사인 불빛에 빛났다. 꼬리가 얼어 땅에 떨어진 유성처럼. 가게 문 밖은 한데라 휴대폰을 쥔 손이 시렸지만, 눈이 얼마간 더 있다 녹았으면 싶었다.
    휴대폰을 두고 가셨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무슨 일은, 무슨 일이 생겨. 지진이라도 날까 봐?
    그래서 언제 오신다고?
    나도 바빠. 때가 되면 오시겠지.
    누나는 할 말을 실컷 하고도 전화를 끊으려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큰조카의 학원비에 대해 얘기했고, 중학교에 다니는 작은 조카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어 했다. 아이를 가져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가질 생각 없는 사람에게 상의를 해서 무얼 얻을 수 있다고. 누나는 아버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할 사람이 필요해 전화 건 것 같았다.
    누나는 그런 식이었다. 나는 누나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누나는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는 것보다는 눈 구경을 갔다 돌아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이층집을 이단 케이크처럼 잘라 누나와 나누어야 할까. 딸기와 청포도 알이 얹힌 생일 케이크를 조심조심 잘라먹던 어린 시절처럼 벽에 금이 가지 않게 집과 마당을 갈라 나눠야 할까.
    새벽에 해장국을 먹으러 가자는 일행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주방에 전등이 밝혀져 있었다. 아버지였다. 구석에 약통만 올려 있는 텅 빈 식탁 앞에 아버지가 혼자 앉아 있었다. 졸고 있나 했더니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오셨어요.
    술을 좀 깨야겠다는 생각에 정수기에서 냉수를 한 컵 따라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자 흠칫 목덜미가 떨렸다.
    저녁은 드셨어요?
    안 먹었다.
    그럼 왜 이러고 앉아 계세요. 주무시든지 뭘 찾아 드시죠.
    나는 낡아서 뚜껑이 건들거리는 김치냉장고를 열어 양파즙이 든 비닐 팩을 꺼냈다.
    어제 배달받았어요. 무안 양파로 만든 양파즙이라는데 혈압에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거라도 드세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몸 생각은 안 하기로 하셨어요?
    소용없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모르긴 뭘 몰라요? 어머니처럼 갑자기 쓰러지려고 그러세요?
    나를 또 비난하고 싶은 게냐? 내가 네 어미를 죽였다고?
    제가요?
    죽은 사람을 어쩌겠냐. 죽었으면 죽었다고 인정을 해라.
    누가 모른대요?
    넌 왜 인정을 못 해.
    나도 안다고요. 하지만 아버지가 잘했단 말은 못 하실 텐데요.
    나는 그때껏 쥐고 있던 비닐 팩을 식탁 위에 던져 놓았다.
    너 그러면, 아비가 죽고 나면 누굴 탓할 작정이냐? 응?
    아버지의 눈이 빨갰다. 못 볼 걸 보았다는 듯 흘겨보던 수연의 눈처럼 빨갰다.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런다고 누가 무서워할 줄 알아요? 예?
    맞다. 무서울 일이 뭐 있겠냐. 죽음이 지금 오면 다음엔 오지 않고, 다음에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오겠지.
    술자리를 정리할 때 목구멍에 급하게 털어 넣은 소주 탓인지 술이 깨기는커녕 뱃속을 누가 쇠 국자로 휘저어대는 듯 울렁거렸다. 아버지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속이 메스꺼워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주방 바로 옆 욕실로 뛰어 들어가 세면대에 구토를 했다. 술과 섞어 먹은 것이 빨리 올라오지 않아 검지를 목구멍 깊이 찔러 넣었다. 헛구역질하는 내 등을 누가 손바닥으로 서너 차례 두드려 주었다. 손바닥이 등에 세게 부딪치면서 벌건 토사물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죽음이 지금 오면 다음엔 오지 않고…… 다음에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오겠지…… 죽음이…….
    나는 숨을 참고, 완전히 삭아 내려가지 못한 고기와 밥찌꺼기를 죄다 쏟아냈다. 위장 밑바닥 물기를 다 짜낼 때까지 토악질하는 동안 단두대에 목이 잘려 나간 시체처럼 숨이 막히고 사지가 떨렸다.
    나는 장님처럼 더듬더듬 수도를 틀어 입속을 헹구고 젖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세면대 모서리를 움켜쥐고 등을 굽힌 채 사각거울을 올려다보니 피가 몰려 검붉어진 얼굴이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몸을 돌렸다.
    아버지.
    흰 타일 벽에 등을 대고 서 있는 아버지, 조금 전 손바닥으로 내 등을 두드려 주었던 아버지에게 물었다.
    햄릿의 대사를 어떻게 아셨어요?
    빨간 눈의 아버지는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반갑지 않은 졸음을 쫓으려는 듯, 어려운 문제를 고심하는 듯 머리를 갸우뚱 기울인 채로.
    죽음이 지금 오면 다음엔…… 어디서 들으셨어요? 네? 말 좀 해봐요, 아버지.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빨리 말해요.
    네가 말해 놓고.
    언제요.
    햄릿이 너 아니었냐?
    아버진 공연에 온 적이 없어요.
    내가 극장에 가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싶어 그러냐. 그럼 공연날마다 네가 봤던 사람이 누구란 말이냐. 나는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공연장에 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콧물을 들이마시듯 코를 훌쩍였다. 내 습관과 같았다.
    아니에요. 난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요.
    네가 누굴 봤다고 믿는 거냐.
    아버지는 연극을 싫어하시잖아요.
    보일러실보단 극장이 따듯하더구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런 말 마세요.
    생각보단 연기가 괜찮았어.
    나는 양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돌아섰다. 거울 안에 가장 익숙한 얼굴이 들어 있었다. 그래, 나였어. 내가 아니면 누구라고.
    얼굴은 그러나 손바닥을 귀에서 떼는 순간 미묘하게 균형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얼굴은 객석에서 보았던 나를 닮은 얼굴로 바뀌었다가, 이내 뺨이 패고, 입 꼬리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육십 촉 백열등 아래 흐릿한 이목구비가 일그러졌다. 거울 속 얼굴이 누굴 닮아 가리라는 예감이 목구멍 안쪽을 차갑게 훑어 내려갔다. 나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얼음처럼 투명한 거울 속 얼굴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더는 부정할 도리가 없다고, 연극이 끝났다고, 속삭였다. 복화술사처럼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말했다. 나를 닮았다고 믿었던 얼굴, 나를 지켜보았던 객석의 얼굴이. 그 얼굴은 실상 내 얼굴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나와 닮은 얼굴, 타인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나를 가장 닮은 남자의 얼굴.
    나는 망친 그림을 들여다보는 아이의 심정으로 거울을 응시했다. 늙어 지친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불편했던지 거울 속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리고 우는 듯 웃는 듯한 내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에, 더는 아버지가 서 있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거울 속에도 욕실 안에도 아버지가 없으리라는 걸.
    언제까지 날 버려 둘 작정이냐. 겨울도 곧 지나갈 텐데.
    아버지가 만약 가지 않고 있었다면 그런 말을 하고 싶었겠지.
    이제는 진짜 연극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햄릿>의 막을 내린 것처럼 아버지와 나의 연극도 끝내야 했다. 관객을 내보내고 극장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얼굴을 마른 수건으로 훔치며 누나에게 전화를 걸지 구급차를 먼저 부를지 고민했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구급차에 실을 수 있는지, 아버지가 등 뒤에 있다면 물어보았을 텐데.
    내일, 아니면 모레는 자신이 남긴 왕국을 맴도는 죽은 왕과 그 왕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는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허튼 꿈속에서라도, 죽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햄릿의 마음으로 아버지가 나타나 주기를 한 번은 더 기다려 보고 싶었다.

 

 

 

 

 

 

 

 

 

 

 

오현종
작가소개 / 오현종

1973년 서울 출생. 1999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와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소설집 『세이렌』, 『사과의 맛』, 장편소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 『거룩한 속물들』, 『달고 차가운』,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7년 03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