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듯이 외 1편

[신작시]

 

 

시간이 멈춘 듯이

 

 

이 민 하

 

 

달리던 기차에서 와르르 얼굴들이 쏟아지듯이

 

저녁 길에 터져 버린 과일 봉지에서
굴러가 버린 동그란 것들을 어디선가
불쑥 알아볼 수 있을까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손을 적신 단물이 빠질 때까지

 

새벽의 대합실에서
토요일의 거리에서
기다림이 꽉 찬 빈방에서

 

낡은 가방을 들고 벌을 받듯이
고자질을 한 입이 다물어지지 않듯이

 

끝난 겨울과 시작되는 겨울이 불을 끄고 마주 앉아서
일 년을 혀로 핥았는데 녹지 않는 케이크라면
그 위에 꽂혀 있는

 

플라스틱 꽃불들은 누구의 피켓일까
아니면 눈물일까

 

눈앞에 떠 있는 눈송이가 공중에 매달려 내려오지 않듯이

 

 

 

 

 

 

 

 

 

 

삭비數飛: 희고 끝없는 소녀들

 

 

    한낮의 거리는 희고 길어서 끝이 보이질 않았다. 소녀는 아찔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불덩이처럼 흐르다가 이마에 붙었다. 발밑엔 검은 괴물이 납작하게 깔려 있었다. 그래서 기절했을 뿐인데, 눈을 떠 보니 고요한 방이다.

 

    거울 속에서 소녀들이 손짓을 한다. 이리 좀 와 봐. 손끝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좀 드니? 소녀2가 속삭였다. 기억나는 거 있어? 소녀3이 덧붙였다. 우리가 죽여줄까? 소녀4가 소리쳤다. 돕겠다는 뜻이야. 소녀5가 웃었다. 다시 시작하면 돼! 처음부터! 소녀6과 소녀7이 쌍둥이처럼 말했다. 쉿, 조용히 쉬게 하자. 소녀8이 말하자 잠시 침묵. 그런데 소녀9는 어디 갔지? 소녀1이 말하자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도무지 시끄러워 밤의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뒤로 걷고 있었다. 마주 보면 멀어졌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뻗어 있던 검은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또 기절했을 뿐인데, 눈을 떠 보니 다시 고요한 방이다. 그런데 모두 어디로 갔을까. 긴 꿈을 꾼 것 같다. 거울 속에는 한 소녀만 남아 있다.

 

    거울 속에서 소녀1은 자꾸 손짓을 한다.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다. 손끝에서 하얀 햇빛이 쏟아진다. 우린 죽은 척하자! 갑자기 어디선가 한 소녀가 말했다. 너라잖아! 너를 부르고 있잖아! 그런 말도 들렸다. 바로 옆에서 귀를 계속 찔렀다. 아무리 봐도 소녀들은 보이지 않고 괴이한 분장을 한 검은 소녀가 바닥을 기어 다녔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아서 유리문을 열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따라 나온 검은 소녀가 유리 계단 위를 구불거리며 기어올랐다. 유리 난간 위에 서서 소녀는 시계를 보았다. 언제부터 손목에 채워져 있었을까. 소녀는 아찔한 바닥을 내려다봤다. 소녀들이 모여 있었다. 누구라도 발을 떼기 좋은 날씨구나. 혼잣말을 했을 뿐인데 소녀들이 동시에 올려다봤다. 구름이 불덩이처럼 흐르다가 이마에 붙었다. 소녀들이 어미 새처럼 손짓을 했다. 갑자기 소녀가 날아올랐다. 검은 소녀는 아래로 흘러내렸다. 소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난간 아래는 희고 길어서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민하
작가소개 / 이민하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문장웹진 2017년 03월호》

 

kakao

1
댓글남기기

1 Comment threads
0 Thread replies
0 Followers
 
Most reacted comment
Hottest comment thread
1 Comment authors
  Subscribe  
newest oldest most voted
Notify of
바람을걷는법심리학도

https://www.youtube.com/watch?v=xaQAyN95PIM&t=4s

선생님 혹시 시를 이런식으로 홍보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연락주십시오 ㅎ010-7794-4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