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방학

[단편소설]

 

 

봄방학

 

 

도수영

 

 

 


    무슨 여름이 이래. 미옥은 스탠드를 켜고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새벽 세 시였다.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낯선 방. 얇은 이불을 두 개나 덮었는데도 움직일 때마다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호주는 여름이라는 말에 패딩을 맡기고 반팔 위주로 짐을 챙겼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영이 씨에게 말해 볼까 생각했지만 새벽 세 시였다. 영이 씨는 이층에 있고 미옥은 거실에서 한 층 내려가는 지하층에 묵었다. 지하는 작은 거실에 침실, 부엌, 안마당이 딸린 하나의 독채였다. 영이 씨의 아들인 앤드류가 쓰던 곳인데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째 여행 중이다. 침실에는 앤드류가 쓰던 붙박이장, 침대, 책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책상에 붙은 사진이나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주인 있는 방이란 걸 상기시켰다. 얇은 카디건과 서걱대는 윈드재킷을 껴입고 웅크려 있던 미옥의 시선이 검은 테이프가 작은 X자 형태로 붙어 있는 붙박이장에 머물렀다. 영이 씨에게 아침에 말하리라 생각하고 테이프를 뜯고 옷장 문을 열었다.
    나란히 걸린 옷들 가운데 두툼한 하늘색 샤워 가운이 보였다. 체구가 작은 미옥이 서랍을 밟고 올라가 가운을 꺼냈다. 입어 보니 팔꿈치가 하나 더 붙은 것처럼 소매가 길고 길이는 발목까지 내려왔다. 앞섶을 완전히 포개어 허리끈으로 졸라매고 소매를 둥둥 접어 올렸다. 담요를 뒤집어쓴 것처럼 둔하고 무거웠지만 비로소 한기가 가셨다. 문을 닫으려다 미옥은 옷장 깊숙한 곳에 갈색 병과 작은 상자를 보았다. 갈색 액체는 한눈에 보기에도 위스키란 걸 알 수 있었다. 납작한 초록색 금속 상자 안에는 네모난 종이와 라이터, 잘 마른 차 같은 갈색 부스러기가 비닐 팩에 들어 있었다.
    미옥은 그게 뭔지 안다. 몇 년 전 태국에서 게스트하우스의 외국인들과 섬에 갔었다. 물놀이를 하고 입구가 넓은 해안 동굴에 들어갔다. 동굴 안은 어둡고 선득할 정도로 시원했다. 누군가 난 니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라고 말했다. 서머, 서머. 동굴은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만담 콤비 같던 독일인 리나와 스웨덴 남자가 너는 지난여름에 한 번도 못 했다, 너는 지난여름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네 문을 매일 밤 두드렸지, 따위의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동굴 가득 헛소리와 낄낄대는 웃음이 퍼졌고 미옥은 묘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평상처럼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랜턴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앉았다. 어둠 속에 수영복이나 비치가운만 걸친 몸의 일부가 허공에 떠다녔다. 미옥도 현웅이 깔아 준 수건 위에 앉았다. 네팔인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그것을 꺼냈다. 리나도 꺼냈다. 리나가 미옥에게 할래? 했다. 들어는 봤지만 가까이에서 본 적도, 하는 사람을 본 적도 처음이었다. 해볼까? 라고 미옥이 현웅에게 묻자 현웅은 미쳤니? 그냥 나가, 라고 말했다. 어느덧 일행들은 하나 둘 벽에 기대어 늘어졌다. 미옥과 현웅이 일어서자 사람들은 착한 아이들, 이라고 놀렸고, 현웅은 닥쳐, 사악한 유럽인들, 이라고 대꾸하며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향했다. 동굴 입구에 이르렀을 때 수영복을 입은 또 한 무리가 동굴로 들어갔다. 그들이 그것 냄새가 난다며 낄낄댔다. 미옥과 눈이 마주친 동양인이 은밀하게 웃었다. 그때 미옥은 이 섬이 인기 있는 것은 해변 때문이 아니라 동굴 때문이란 걸 알았다.
    마른 잎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집어 흰 종이 위에 길게 놓았다. 종이를 돌돌 만 다음 침을 발라 원통 모양으로 붙였다. 양끝은 손가락으로 꼬아 내용물이 새어 나오지 않게 했다.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찬 밤공기가 묵직하게 밀려들었다. 살그머니 입술에 물고 라이터를 갖다 대며 숨을 빨아들였다. 매캐한 연기가 숨으로 들어오는 순간 핑, 뇌의 한 부분이 침몰했다. 주춤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팔다리에서 서서히 중력이 빠져나갔다. 그때 부스럭, 소리가 났다. 일층 거실과 연결된 문이 열리더니 피타가 눈을 끔벅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피타, 미옥이 부르자 다가온 개는 미옥의 무릎에 코를 대고 빤히 올려다보았다. 머리를 쓰다듬자 피타는 카펫에 길게 엎드렸다. 여전히 눈은 미옥을 향해 있었다. 미옥은 가만히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꼈다. 고통을 줄여 준다고 했는데 알 수 없었다. 피타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황갈색 털이 한 올 한 올, 귀의 분홍색 점막을 덮고 있는 흰 솜털, 촉촉한 콧마루에 솟은 자잘한 돌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만지지 않았지만 어떤 느낌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피타뿐만 아니었다. 묵직한 밤공기의 밀도와 수분의 함량, 진동하는 나뭇잎들, 마당으로 떨어지는 달빛, 폭주하는 모터사이클과 야행성 동물들의 거침없는 동선마저 미옥의 감각으로 포집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짧게 만 한 대가 타버렸고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섰는데 휘청거렸다. 머리가 무거웠지만 그뿐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영이 씨가 채워 준 과일과 쿠키, 치즈, 물, 주스가 있었다. 물 한 컵을 마시고 치즈를 집어 들자 피타가 화들짝 일어나 다가왔다. 미옥의 손에 올린 치즈에 피타가 입을 갖다 댔다. 손가락에 닿는 혀의 가슬가슬하고 축축한 감촉 사이로 단단한 치아가 느껴졌다. 미옥은 옷장에서 위스키를 꺼내왔다. 다시 마리화나를 말고 위스키를 컵에 따른 뒤에 소파에 깊숙이 앉았다. 치즈를 먹어치운 피타는 졸린 눈으로 미옥을 지켜봤다.


    어제 미옥이 가르친 아이들이 졸업을 했다. 학교는 봄방학에 들어갔다. 미옥은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공항으로 향했다. 교사에게 봄방학은 새 학기를 준비하는 바쁜 시기지만 교감은 휴가를 허용했다. 학부모들의 우려 섞인 전화가 왔다고 했다. 물어보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 눈치였지만 감사하게도 참아 주었다. 알겠습니다. 한 선생님. 언제까지? 미옥이 머뭇거리자, 학생들이 없으니 일단 쉬어요. 결정되면 연락 주세요, 라고 말한 뒤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난데없이 눈물이 솟아 미옥은 고개를 푹 숙이며 교무실을 나왔다.
    아이들은 한 명씩 단상에 올라가 졸업장을 받았다. 익살스럽게 혹은 진지하게 찍은 사진과 장래희망이 화면에 떴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로 시작하는 축사가 흐르고, 일 년간 가장 많이 대화를 주고받은 아이들이 떠나는데도 미옥은 집중할 수 없었다. 너도 봤니? 봤구나? 보셨나요? 그 일 이후로는 누구를 만나든 그 생각만 들었다.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짓는 아이를 보거나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그들도 그것을 봤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과 게시물이 캡처 되고 입에서 입으로, SNS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고 부풀려지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졸업식에 온 부모들과 동료들 모두 자기들끼리는 다 돌려보고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교감선생님의 권유로 참여했지만 다가와 인사하는 부모들의 눈빛에는 한미옥이 너 맞지? 낯짝 한번 보자, 라고 쓰인 것 같아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학기가 끝나기 얼마 전 미옥이 근무하는 초등학교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자격 없는 교사’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올린 이의 아이디는 낯설었지만 현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헤어진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미옥의 사진과 사생활이 까발려져 있었다. 황급히 홈페이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기 전까지 게시물의 조회 수는 131회를 찍었다. 그 앞 게시물의 조회 수는 7이었다. 현웅은 연락이 닿지 않았고 학교에서는 사건을 키우지 않고 조용히 덮길 바랐다. 항의하는 부모들의 전화가 교무실로 걸려왔고 미옥은 남은 기간 동안 병가를 내야 했다.
    피타는 더 이상 눈을 뜨지 않고 요란한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었다. 위스키 한 잔과 치즈 한 조각, 두 번째 마리화나까지 태웠다. 하루가 지났는데 졸업식이 까마득한 과거의 일처럼 여겨졌다. 꽃다발을 든 아이들 사이에서 미옥은 서둘러 졸업식장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식이 끝난 뒤에 담임 선생님을 찾고 있었을 반 아이들이 떠올랐다. 일 년간 웃고 울었던 아이들인데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왔다. 형편없구나. 자격 없는 교사인 것이다.


    마주 앉아 늦은 아침을 먹는 동안 영이 씨는 한국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랜 친구인 미옥의 엄마로부터 미리 언질을 들었을 것이다. 밤에 추웠다고 하자 영이 씨가 이곳은 하루에도 사계절의 날씨가 수시로 나타난다며 히터 켜는 법을 알려주었다. 앤드류의 옷장을 열어 봤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피타 산책하러 가는데 같이 갈래? 영이 씨가 물었다.
    좋아요. 미옥은 막상 도망치듯 떠나오긴 했지만 이 낯선 곳에서 무엇을 할지, 얼마나 묵을지 아무 계획이 없었다.
    영이 씨는 젊었을 때부터 혹시 수영선수나 테니스선수냐는 질문을 들을 만큼 큰 키에 단단한 어깨를 가졌다. 선글라스를 쓰고 짧은 레깅스에 반팔 티를 입은 영이 씨가 목줄을 챙기자 피타는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추위에 질린 미옥은 긴 바지를 빌려 입고 윈드재킷을 걸쳤다. 차 문을 열자 익숙하게 뒷좌석에 올라탄 피타는 영이와 미옥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가까운 공원쯤으로 생각했는데 차로 삼십 분을 가야 했다.
    산책로 입구에 큰 주차장이 있었다. 차가 많았다. 주말이라 그래. 영이 씨는 피타의 목줄을 쥐고 자신은 피타와 같이 뛰어갔다 올 테니 미옥은 천천히 걸어오라 했다. 길은 하나이니 되돌아오면서 미옥과 만나겠다고 했다.
    곳곳에 덤불이 솟아난 완만한 들판이었다. 구불거리는 트레일을 따라 사람들은 여유롭게 걷거나 달렸다. 어젯밤과 달리 날은 따듯하다 못해 덥다 싶은 정도였다. 피타와 영이가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걸 보고 미옥은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금세 정수리가 뜨거워졌다. 미옥은 점퍼를 벗어 팔에 걸쳤다. 많은 사람들이 미옥을 앞질러 갔다. 작은 개 두 마리를 데리고 포니테일을 한 금발 여자가 지나갔고 어깨까지 챙이 내려오는 모자에 지팡이를 짚은 세 명의 노인들이 큰 목소리로 대화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현웅과 자전거를 탔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반바지에 민소매티를 입은 마른 남자의 엉덩이 골에 생긴 땀자국과 날렵한 종아리 근육을 미옥은 한참 동안 바라봤다. 길을 벗어나면 들판이었다. 하늘과 지평선이 맞닿은 들판이 실제로 있었다. 게다가 들쥐와 두더지 같은 동물들뿐 아니라 물소나 캥거루가 거짓말처럼 출현했다. 캥거루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뜻의 원주민 언어란 것이 떠올랐다. 어떤 의무감으로 검색한 호주 정보에서 미옥은 캥거루 이름의 유래, 남반구에서는 화장실 물이 거꾸로 돈다는 코리올리 효과 등 몇 개의 페이지만 읽고 창을 닫아버렸다. 애당초 호주가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이틀 만에 미옥은 두 계절을 건너뛰었고, 몇 천 킬로를 날아와 지평선이 보이는 들판을 걷는 중이다. 그럼에도 읽다 만 책처럼 새로움이 없었다.
    느리게 걷던 미옥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휘어지는 길 안쪽에 나무 서너 그루와 작은 덤불이 무성했다. 그늘에서 쉬려는 생각으로 다가갔는데 덤불에 웅크린 사람이 있었다. 주황색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곱슬머리의 남자였다. 구토를 하거나 떨어진 물건을 찾는 것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미옥은 덤불에서 조금 떨어졌다. 남자는 바닥을 아니 바닥에 있는 뭔가를 보고 있었다. 새였다. 검고 희고 갈색인 깃털이 뒤엉킨 날개가 솟아 있었다. 마포걸레처럼 던져진 몸뚱이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비둘기나 까치보다 훨씬 큰, 일 미터는 될 것 같은 맹금류임이 분명한데, 죽었든지 거의 죽은 것 같았다. 남자는 미옥이 다가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만 응시하고 있었다. 미옥은 시선을 돌리고 걸었다. 새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남자가 왠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남자를 지나친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머리 위 하늘에 검고 두꺼운 구름이 만들어졌다. 어두워지고 바람이 불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이 말이 맞았다. 변덕이 심한 날씨였다. 사람들은 우산을 펴거나 자연스럽게 모자를 썼다. 미옥만이 제자리를 서성였다. 다가오는 사람들을 지켜봤지만 영이 씨와 피타는 보이지 않았다. 미옥은 걸음을 돌려 왔던 길로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게 가장 합리적인 일 같았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머리가 흠뻑 젖고 앞머리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미옥은 주차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주차장 한구석에 있는 게시판의 작은 지붕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영이와 피타는 보이지 않았다. 전체 트레일 코스는 무려 7킬로미터로 벗어 놓은 스타킹같이 느슨하게 늘어진 타원 형태였다. 빗속을 한가로이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영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미옥 앞에 섰다. 창문이 내려갔다.
    괜찮으면 태워 줄까요? 지극히 낮은 톤의 영어. 놀랍게도 새를 보던 남자였다.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친구를 기다리고 있어요. 갑작스런 호의에 미옥이 더듬거리는 영어로 대답했다.
    혹시, 당신 영기의 친구예요? 남자가 물었다.
    영기? 영기? 영이요? 미옥이 되묻자 이번에는 남자가 미소를 띠고 한국어로 말했다.
    아, 영이 친구예요?
    미옥이 놀라서 그렇다고 하자, 남자는 차에서 내렸다. 자신도 영이 친구다. 영이와 피타는 금방 올 거라고 우산을 내밀었다. 미옥은 우산을 받아들었다. 씨야레이터,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차를 움직였다.
    그로부터 삼십 분도 더 지나서 영이와 피타는 비에 젖어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서두르지도 않고 미옥을 보고 쓱 웃었다. 차에서 수건을 꺼내어 미옥에게 내밀고 자신도 닦고 마지막으로 피타의 털을 문질러 닦은 다음 차 안으로 들여보냈다. 붉어진 뺨이 건강해 보였다. 차 유리창이 금세 뿌예졌고 피타에게서는 쉰 행주 냄새가 났다. 미옥이 남자 이야기를 하자, 영이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립이야! 필립을 만났구나. 안 그래도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신기하네. 여기는 작은 도시라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아. 호주인과 결혼한, 지금은 이혼했지만 어쨌든, 나 같은 사람이나 이민 2세인 필립처럼 히스토리가 있는 사람들이 살지. 필립은 내 친한 친구야. 앤드류와도 친했고. 그는 간호사야. 부모님은 멜버른에 살고 있어. 여기 병원에서 일한 지 삼 년쯤 됐나 봐. 잘 됐어. 안 그래도 미옥이 왔으니 초대해서 같이 저녁을 먹을까 했어. 그래도 괜찮지, 미옥아?


    영이 씨는 주중에 도서관에서 풀타임으로 일했고 주말에는 낮 동안만 마트에서 일했다. 다음날 미옥은 영이 씨가 일하는 마트로 갔다. 함께 장을 봤다. 미옥의 엄마가 보낸 황태에 양념을 발라 굽고 호주산 소갈비로 찜을 했다. 디저트는 필립이 좋아한다는 애플파이를 샀다. 필립은 이른 저녁에 영화 DVD를 들고 영이의 집을 방문했다. 구슬처럼 투명한 갈색 눈동자에 강한 곱슬머리를 가진 30대의 남자였다. 영이 씨처럼 그도 까무잡잡한 피부에 기미가 흩뿌려져 있었다. 필립은 뛰어오르는 피타를 알은체하고 영이와 가볍게 포옹했다. 영이가 필립에게 미옥을 소개하려는 순간, 필립이 잠깐만요, 미 오케이. 맞죠? 라고 말했다.
    미 오케이요?
    미오케이. 여기서 봤어요. 멋진 이름이에요. 필립이 가리킨 현관 한쪽에 미옥의 캐리어가 있었다. MI-OK HAN이라는 그녀의 이름이 알파벳 스티커로 캐리어에 붙어 있었다. 미옥은 그제야 필립이 자신의 이름 ‘옥’을 ‘오케이’로 말했다는 걸 알았다. 영이가 웃었고 필립은 덩달아 눈을 빛내며 미옥을 봤다. 미옥은 같이 웃을까 하다가 저녁 시간 내내 억지로 웃어야 할 것을 염려해서 웃음기 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미 오케이 아닙니다. 저는 미옥이에요, 미옥.
    웃던 영이 씨가 머쓱하게 다가와 말했다.
    미옥은 아름다운 구슬이란 뜻이야. 그렇지 미옥아? 영이 씨가 말했다.
    맞아요. 옛날에 흔한 이름이었죠.
    아름다운 구슬, 알겠습니다. 미오케이 아니고 미옥. 저는 필립, 김필립이에요. 필립이 미옥의 손을 꽉 잡았다.


    호주의 여름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요. 2월에 내리는 폭설만큼이나 사람을 당황스럽게 해요.
    2월이고 봄방학이었지만 미옥이 호주로 올 때 인천공항에 폭설이 내렸었다. 2월의 눈은 적어도 공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활주로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비행기에 탑승한 채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두운 기내 안에서 한 아기가 지치지 않고 울어댔다. 아기의 부모는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한국의 여름은 북쪽 호주와 비슷할 거야. 북쪽은 온화한데 여기 남쪽 호주 날씨가 좀 변덕스러워. 호주는 워낙 크니까. 영이가 말했다.
    인천공항에 내린 폭설을 미옥이 가져왔나 봐요. 미옥이 온 날부터 날씨가 유별나게 추워졌습니다. 필립이 말했다.
    설마요. 미옥이 말했다.
    지구는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심지어 우리가 마시는 이 물도 언젠가 미옥이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버린 물일 수도 있습니다. 필립이 어눌한 한국말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정말 호주에선 변기물이 한국과 거꾸로 돌아가나요? 코리올리 효과를 떠올린 미옥이 물었다.
    네, 맞아요. 그것이 북쪽 바닷물과 남쪽 바닷물이 하나란 것을 말해 줘요. 위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아래쪽에서는 반대쪽으로 도는 힘이 작용하는 거예요. 지구가 비스듬히 돌면서 그런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필립은 왼손으로 주먹을 쥐고 오른손가락을 주먹 가까이 갖다 대고 적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날개가 달린 8자 모양을 그려 보였다.
    미옥이 가르치는 아이들은 코리올리 효과나 물과 대기의 지구적 순환에 대해서는 자세히 배우지 않는다. 하지만 호주에 부는 바람이 자신들에게도 불어온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환경문제를 가르칠 때나 국제시민교육 수업의 동기유발로 좋겠다고 미옥은 생각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들이 무서웠어요. 아무리 친절한 선생님도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가 있었거든요. 뭔가 들켜버릴 것 같은 느낌말이에요. 그래서 선생님 앞에 서면 말도 잘 못했는데, 미옥도 무서운 선생님이에요? 필립이 부드럽게 물었다.
    동기유발을 생각하고 있던 미옥이 필립의 말에 무심코 대답했다.
    선생님들이 딱딱해 보이는 건 무의식적으로 긴장하고 있어서 그럴 거예요. 학생들 앞에선 가르치는 대로 행동해야 되니까요. 다음 순간 미옥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고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은 발작적으로 터졌고 얼굴이 붉어지도록 멈추지 않았다.
    영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옥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니? 갑자기 왜 그래.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현웅의 문장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로 도로에 주저앉아 카메라를 쏘아보는 만취한 여자, 속옷만 입은 채로 창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미옥의 사진 아래에는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 교사의 기본 자질이다. 이 여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칠 걸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고 쓰여 있었다. 미옥은 방금 자신의 입으로 그 말을 태연하게 내뱉은 것이 믿기지 않았다. 도덕적인 그 직업군의 구성원처럼 말했다는 것이 부끄럽고 혼란스러웠다. 숨이 색색거리고 눈물이 그렁거리면서 미옥은 괜찮다고 말했다.
    선생님들도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게 늘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필립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영이가 말했다. 애들 가르치는 게 얼마나 힘든데. 환자 돌보는 것보다 힘들지 몰라. 적어도 환자들은 가만히 있잖아.
    필립이 영이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오우 노우,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는 환자들도 있죠. 그러나 대부분의 환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아요. 환자들은 고통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고통의 에너지가 그들을 활기차게 만들어요. 월요일 아침에 병원에 도착하면 주말 동안 이렇게 컴프레슽된 고통을 가진 환자들이 가장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습니다. 저를 보면 너무 아프다면서 슬퍼합니다. 화를 내고요. 당장 응급 처치를 해주지 않는다고 그들은 의사나 간호사를 때리기도 하고, 기물을 부수기도 해요. 돈이 많거나 멋진 옷을 입거나 얼굴이 잘생긴 것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늘 자신의 고통을 제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요, 저렇게 고통스럽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생명이 끊어져야 완전히 사라지니까요. 당장 낫게 해달라고 소리치는 환자들에게 저는 속으로 말합니다. 아파요? 아프다고요? 방법이 있어요.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아프지 않아요. 죽으세요. 당장 죽으세요. 죽어요. 죽어! 지금 죽어! 눈앞에 환자가 앉아 있는 것처럼 필립은 진지하게 허공을 향해 외쳤다. 미옥과 영이가 당혹스러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필립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또 흥분했습니다. 조킹! 이라고 덧붙였다.
    아무튼 방학이 있어서 좋겠다. 미옥. 영이가 화제를 돌렸다.
    휴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두 번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필립이 덧붙였다.
    저녁식사를 정리한 뒤 영이가 큰 그릇 가득 팝콘을 튀겼고 세 사람은 맥주를 한 병씩 들고 소파에 앉았다. 필립이 가져온 영화를 막 틀기 시작했을 때 미옥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미옥이 지하로 내려왔다.
    영이 이모 지금 영화 봐요. 친구 와서 같이 보기 시작했어요.
    친구? 남자이긴 한데, 남자친구 같진 않아요. 나이? 몰라요. 영이 이모보다는 훨씬 젊지만 글쎄. 몰라요. 엄마, 사실 모르겠어요.
    엄마와의 통화가 길어지면서 미옥은 소파에 기대앉았다. 다리를 스툴에 올리고 전화를 받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엄마가 미옥의 새 이름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개명? 내가 촌스러워서 바꿔 달라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엄마의 목소리에 생전 없었던 간절함이 묻어났다.
    알았어요. 가서 볼게요.
    대학생 때 미옥은 진지하게 개명을 알아본 적이 있었다. 엄마 세대의 올드한 이름을 지어 준 할아버지를 원망하면서.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다고 콧방귀를 끼던 엄마였는데, 그녀가 미옥의 새 이름을 알아보고 있다니, 울적했다. 엄마는 자신의 생활에 열중하는 타입이었다. 가끔 섭섭함을 느낄 정도였는데 지금 엄마는 미옥의 일로 슬퍼하고 있었다. 지금은 미옥이 그렇게 생각했다. 개명을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이 딸의 애인이 저지른 일과 딸이 저지른 일 중에 후자가 아니길, 미옥은 바랐다.
    영화를 볼 기분이 깨끗이 사라진 미옥이 일층으로 올라가 필립과 영이에게 그만 자겠다고 말했다. 영이는 여독이 안 풀렸을 테니 얼른 쉬라고 말했고, 필립은 시차 때문이냐고 약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미옥은 괜찮다고 말하고 지하로 내려왔다.


    그날 밤 미옥은 또 한밤중에 깨어났다. 잠들기를 포기하고 일어났다. 사진 속 앤드류는 농구 유니폼을 입고 있는 덩치 큰 소년이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썹, 쌍꺼풀 없는 눈매가 영이 씨를 닮았다. 다른 사진에는 어린 앤드류를 사이에 두고 영이 씨와 전남편이 서 있었다. 소년의 어깨에 팔을 올린 키 큰 백인 남자는 사냥용 장총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녹황색 얼룩무늬 점퍼에 챙 넓은 모자를 쓴 모습이 악어 한 마리쯤은 거뜬히 잡을 것처럼 호주스러운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대학교로 진학하는 대신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고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떠난 앤드류. 그 봉사가 배낭여행으로 이어졌다고 영이 씨가 말했다. 간식처럼 위스키와 마리화나를 옷장 속에 두는 앤드류. 여기는 물도 계절도 거꾸로 돌아가는 호주니까. 미옥은 사진 속 앤드류에게 말을 걸었다.
    앤드류, 반가워.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나이도 어린데 너 좀 제법이다. 근데 너 말이야, 부모님이랑 말 안 통하지? 친구도 많지 않고. 딱 보면 알아. 그런데 옷장 속에 있는 것 보니 나는 니가 마음에 든다. 내 타입이야. 그러니 그거 누나랑 같이 하자. 나중에 한국에 놀러오면 이 은혜는 꼭 갚을게.
    미옥은 위스키와 마리화나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잠시 뒤에는 어김없이 피타가 부스럭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서늘한 바람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바람에서 남극의 얼음향이 났다. 미옥은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뜨자 소파에 앉은 지구가 보였다. 울퉁불퉁한 표면에 물과 바람이 흘렀다. 미옥이 손가락으로 거대하고 느슨한 8자 모양 고리를 그리자 고리는 서서히 트레일이 되었다. 머리 위로 올라오는 큰 배낭을 멘 앤드류가 트레일 위를 묵묵히 걷고 있었다. 뒤를 따라오는 요란한 아이들은 미옥의 어린 제자들이었다. 여전히 시끄럽구나. 미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여드름이 창궐한 이마를 앞머리로 가린 남학생들과 흰 양말에 슬리퍼를 신고 틴트를 바른 여학생들이 끊임없이 웃었다. 그 아이들에게서 뚝 떨어져 혼자 게임을 하고 있는 진우가 보였다. 진우. 일 년 동안 미옥이 가장 많이 신경을 쓴 아이다. 은근히 따돌림을 당했고,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던 아이였다. 이런저런 노력에도 진우도 아이들도 달라지지 않아서 미옥에게 무력감을 안겨 주기도 했었다. 그런 진우가 게임에 열중하며 교실에선 볼 수 없던 미소를 띠고 있다. 학교와 맞지 않을 뿐이지 진우가 틀린 것은 아니다. 미옥의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왜 진작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봄방학이 지나면 아이들은 중학생이 된다.
    아무리 애정을 준 아이라도 일 년이 지나면 떠난다. 아무리 말썽을 부리는 아이라도 일 년 후에는 책임에서 벗어난다. 봄방학이 지나면 다시 시작이다. 3월의 교실에는 또다시 낯선 아이들이 앉아 있다. 고작 일 년짜리 책임이고 일 년짜리 애정인 것이다. 경력이 쌓여 갈수록 미옥은 새 학기의 시작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또 시작이구나, 이 거대한 쳇바퀴를 서른 번 정도 달리고 나면 정말 끝이겠지, 라는 막연한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방학은 달랐다. 봄방학이 끝나면 새 학기가 시작될 텐데, 봄방학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새 학기가 아무렇지 않게 시작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영 시작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미옥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발을 헛디뎌 쳇바퀴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는데 멀리 굴러가는 쳇바퀴를 보고만 있는 심정이랄까, 끝도 시작도 아닌 사이에 딱 걸린 기분이었다.
    바람이 불어 앤드류의 이마에 솟은 땀을 식힌다. 이 바람은 우리 집 창문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이 다니는 영어 학원에도 화장품 가게에도 코인노래방에도 불 것이다. 들판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응시하는 필립이 보이고, 영이 씨와 피타를 찾아 트레일을 구석구석 살펴보는데 자전거를 타는 두 사람이 보인다. 현웅과 미옥이다. 여기 있었구나. 현웅을 보니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 일 이후 현웅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번호도 사는 곳도 바뀌어 있었다. 미옥은 분한 마음에 자전거 방향을 바꿔 거꾸로 돌기 시작한다. 현웅과 멀어진다. 현웅이 뒤돌아보더니 이쪽이야. 이리 와! 라고 외친다. 미옥은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거기 아니라니까! 현웅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미옥은 못 들은 척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가다 보니 통쾌했던 기분은 점점 사그라지고 불안이 스며든다. 뒤를 돌아봤는데 현웅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아닌가, 미옥은 주위를 둘러본다. 현웅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울적하다. 조금씩 손바닥이 축축해진다. 불규칙적인, 태연하지 못한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지? 한참을 생각한다. 피타다. 피타가 미옥의 손을 핥고 있다. 타버린 마리화나와 마시다 만 위스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꿈이었나, 멍하니 앉아 있던 미옥은 냉장고에서 치즈를 꺼내 피타에게 건넸다. 꿈이었지만 생생한 느낌에 한동안 울적함을 떨치기 어려웠다.


    미옥아, 밥 챙겨 먹어. 5시에 온다. 외출 좀 해. 영이 씨의 쪽지였다.
    정오가 넘어 한 끼를 먹은 미옥은 창문을 활짝 열고 마리화나를 말았다. 비닐 팩에 든 풀은 많이 줄어 있었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미옥이 소파 깊숙이 앉아 있는데 피타가 짖기 시작했다. 왜 그래, 피타? 미옥이 몸을 일으켰다. 피타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동시에 미옥! 목소리와 함께 지하로 들어오는 문이 열렸다. 필립이 얼굴을 내밀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미옥의 손가락으로 필립의 시선이 꽂혔다.
    정적이 흘렀다. 필립이 먼저 더듬더듬 말했다. 현관에서 불렀는데 계속 대답이 없어서 들어왔어요. 미옥이 마리화나를 끄려고 하자, 필립이 손을 저었다. 노노노, 계속해요. 미옥이 집에만 있다고 해서 혹시 외출하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왔어요. 혼자 있고 싶으면 나는 갈게요.
    그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하나 꺼냈다. 계단참에 그걸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옥이 잠을 잘 못 잔다고 들었어요. 멜라토닌이에요. 자기 전에 한 알. 안전해요. 안녕. 갈게요
    가지 마세요. 필립. 미옥이 다급히 말했다. 이대로 필립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영이와 필립에게 진 빚이 너무 많기도 했고 이대로 보내면, 다시는 필립을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미옥은 앤드류의 가운을 입은 채로 필립과 마주 앉았다.
    이거 해본 적 있어요, 필립? 미옥이 물었다.
    위드 말이에요? 대학생 때 몇 번 했어요. 기숙사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국 여자가 하는 건 처음 봤어요.
    이거 사실 앤드류 거예요. 옷장 안에 있기에 몰래 해보는 거예요.
    아하, 필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드류가 그걸 좋아했어요. 그럼 여기서 처음 한 거예요?
    그렇진 않아요. 사실, 태국에 여행 갔을 때 남자친구 몰래 한 적 있어요.
    여기선 누구나 한 번쯤 해요. 집에서 하면 불법 아니에요. 아픈 사람에게 진통제로 줄 수도 있어요. 힘들면 해도 괜찮아요.
    불법이 아니군요. 여긴 정말, 호주네요. 그런데 저는 힘들어서 한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 안 되는 것은 꼭 해보고 마는 이상한 사람일 뿐이에요. 평온한 일상보다는 드라마틱한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어릴 때도 파란만장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다가 엄마한테 등짝을 맞기도 했어요.
    필립이 빙긋이 웃었다.
    누구나 그런 것 있어요. 저도 이상하고 제 환자들도 다 조금씩 이상해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필립. 미옥은 말했다. 하지만 교사로서 이건 최악인걸요.
    그렇지 않아요. 미옥은 선생님이지만, 또 미옥이에요. 미옥으로서 솔직해야 해요. 그렇지 않아요?
    미옥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것 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요? 필립이 물었다.
    그런 셈이에요. 남자친구는 이런 제 성격을 너무 싫어했거든요. 그는 교사도 아니지만 완전 교사 중의 교사 같은 사람이었어요. 어떤 사람인 줄 알겠어요?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선생님처럼?
    네.
    미옥이 웃었다.
    사귀는 내내 싸우다 결국 헤어졌어요. 그렇게 끝난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제가 일하는 학교 홈페이지에 저에 대한 글을 썼어요. 제가 교사 자격이 없다면서 사적인 사진들을 올렸어요.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연락이 안 돼요. 분하지만 그 끔찍한 사진들을 보니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요. 그가 말한 대로 저는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별만은 제가 바라던 대로 파란만장하게 하는 중이에요.
    어쩐지 힘든 일, 미옥에게 있어 보였습니다. 미옥은 많이 힘들었어요. 위드 잘했어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미옥이 잘못한 것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진실한 것은 나쁜 것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을 속이라고 가르칠 수는 없어요. 파란 이별을 축하해요. 엑스 남자친구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개자식이에요. 욕해서 미안, 이 말은 영이한테 배웠어요. 아무튼 그 사람과 이별한 것 축하합니다. 그 사람은 미옥에게 잘못했어요. 호주에서는 그러면 수할 수도 있어요. 이별이 꼭 나쁜 것 아닙니다. 좋은 것이에요. 다른 사람과, 이를테면 안 되는 것 꼭 해보는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어요.
    필립이 욕설을 내뱉을 때 미옥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내 눈물이 나려고 했다.
    정말 고마워요, 필립. 정말 저는 계속 받기만 하네요. 근데 지금 혹시 속으로 나보고 죽으라고 말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미옥이 눈물을 닦으며 웃으면서 말했다.
    오우, 필립은 화들짝 놀라고는 미옥과 함께 웃었다.
    사실 우리 처음 주차장에서 만난 날, 그날 트레일에서 필립을 봤어요. 죽은 새가 있었고 필립이 거기 앉아 있었어요.
    아, 필립이 눈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맞아요. 거기 새가 있었어요
    새를 보고 있었던 거예요?
    필립은 잠시 입을 앙 다물고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미옥이 솔직히 말했으니까 저도 말하고 싶어요.
    그는 잠시 창밖의 나무에 시선을 두었다.
    저는 죽은 동물을 보면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요. 불쌍해서가 아니에요. 너무 보고 싶어서요. 생명이 사라진 것을 보면 끌립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특히 커다란 고통 끝에 오는 죽음일수록, 생명과 죽음 그 둘의 차이가 클수록 더 아름답다고 느껴요. 고통스러워하던 환자의 생명이 마침내 끝에 도달했을 때 가족들이라 하더라도 그 고요함에 있는 미적인 가치를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그때 흘리는 눈물에는 고통과 함께 어떤 가벼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매혹합니다. 저를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마이 엑스 걸프렌드는 이걸 너무 싫어했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겁이 난다고 했어요. 실제로 저를 무서워했을지 몰라요.
    지그시 미옥을 바라보는 필립의 눈에 두려움이 있었다.
    저는 아픈 환자들에게 진통제를 주고 돌봅니다. 그들의 고통이 줄어들면 간호사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요, 마침내 숨이 끊어진 환자를 대할 때 제가 느끼는 것은 슬픔보다는 아름다움이에요. 죽음의 평화와 아름다움이 이 일을 하면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저는 간호사예요. 미옥. 간호사에게 이런 점은 큰 문제일 수 있어요.
    필립은 미소를 지었지만 슬퍼 보였다.
    우리는 어쨌든 공통점이 있네요.
    미옥은 필립의 손을 쥐었다.


    그날 밤 미옥은 중간에 깨지 않았다. 필립이 준 멜라토닌 덕분인지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잘 수 있었다. 커피를 내리던 영이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일이야? 시끄러워서 깬 거야?
    미옥은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필립이 준 멜라토닌이 듣나 봐요. 깨지 않고 푹 잤어요.
    영이가 기뻐했다.
    미옥, 괜찮으면 오늘 피타 산책 좀 시켜 주겠어? 요즘 살도 찌고 게을러졌어.
    그럼요
    미옥은 영이를 데려다주고 피타와 함께 트레일로 향했다.
    남부 호주의 여름 햇빛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내렸다. 미옥은 개를 키워 본 적이 있었지만 피타처럼 큰 개는 아니었다. 피타를 데리고 여유 있게 걷기란 불가능했다. 피타가 달리면 같이 뛰어야 했고 피타가 무엇엔가 호기심을 보이는 동안은 기다려 주어야 했다.
    달리던 피타가 나무 아래로 들어갔다. 예전에 필립이 쭈그려 앉아 죽은 새를 보던 곳이었다. 안 돼, 피타. 안 돼. 미옥은 죽은 새가 떠올라 피타를 잡아당겼지만 소용없었다. 피타는 이미 코를 죽은 새에게 들이대고 탐색하는 중이었다. 안 돼! 하지 마. 피타. 죽은 동물에게 세균이 있을지도 몰라 피타의 머리통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어쩔 수 없이 바닥의 새에게 눈길이 갔다. 죽은 새는 내장이 사라지고 뼈가 드러나고 근육이 말라 가는 중이었다. 머리 형태만 비교적 온전한, 깃털이 반 이상 사라진 유기물 덩어리였다. 어디에 치인 것일까, 여기 죽어 있는 이유는 뭘까.
    미옥은 쭈그리고 앉았다. 죽은 것. 생을 끝낸 것. 미옥은 끝이라는 것의 속성을 알아내고 싶었다. 움직임이 없다. 물기가 없다. 견고하게 서로를 지탱했을 부분들이 무너지며 형태가 허물어졌다. 크기와 중량이 줄어든다. 바람에 깃털이 흔들렸지만 새는 움직임이 없었다. 고요했다.
    이런 것인가. 이것이 끝인가. 필립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 평화롭다고 느낀 그 ‘끝’은 무엇일까. 올해가 끝나고 내년이 되는 것. 애인과의 관계가 끝. 생명이 끝. 커리어가 끝장나는 것.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끝나고 새 이름으로 불리는 것. 미옥에게 그 일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끝이 이렇게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시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끝나길 바라는 건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끝과 시작 사이에서 영영 유예되는 건 아닐까. 기나긴 봄방학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미옥이 새를 들여다보는 사이 피타는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피타가 코를 들이민 곳, 새의 사체 바로 옆에는 작고 노란 꽃이 피어 있었다.
    피타에게 끌려 달리던 미옥은 점점 겁이 났다. 산책길은 끝까지 돌면 자연스럽게 처음 지점에 도달하는 구조였다. 미옥의 체력으로는 너무 긴 트레일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지금이라도 뒤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미옥은 망설이다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되었다. 너무 많이 와버린 것 같아서다. 걷다 보면 도착하겠지. 끝이 나지 않는 이상 시작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깔끔하게 잘리는 끝이란 것도 착각이 아닐까. 새는 죽고 꽃은 피어나니까. 마침내 한 바퀴를 다 돌아 주차장이 보였을 때는 내일이면 다리에 알이 배겨 꼼짝 못 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땀을 흘린 뒤 맞는 시원한 바람이 상쾌했다. 앞으론 운동을 자주 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곧바로 현웅과 자전거를 탄 뒤에 똑같은 기분으로 똑같은 결심을 현웅에게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랬더니 현웅이 말했었다. 그 말 몇 번째 하는지 알아? 이제 니 말 안 믿어. 그랬다. 항상 그딴 식으로 얘기했지. 늘 가르치려 드는 꼰대, 비겁한 새끼. 나타나기만 해봐라. 그 잘난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 비겁한 놈, 치사한 놈, 찌질한 새끼! 미옥은 소리를 질렀다. 피타와 지나가는 호주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현웅을 향해 실컷 욕설을 퍼부었다.


    앤드류의 가운을 세탁했다. 고급 위스키를 사서 옷장 안에 넣어 놓았다. 마리화나는 조금 남아 있었다. 감사 쪽지를 마리화나 통에 넣어 놓았고, 진심으로 언젠가 앤드류를 만나 은혜를 갚을 수 있기를 바랐다. 왔을 때처럼 미옥을 공항에 데려다주기 위해 영이 씨는 반나절 휴가를 냈다. 앤드류는 언제 집에 올 계획이냐는 질문에 영이 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은 나도 몰라. 미옥. 그 애가 돌아올 결심을 하면 올 거야. 나도 앤드류 얼굴을 매일 보면 좋겠지만, 그런 건 바랄 수 없어. 워낙 그 애한테 나쁜 짓을 했어.
    네?
    부모가 다 그런 거지, 뭐.
    다정하고 속 깊은 영이 씨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영이 씨의 표정을 보면서 미옥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영이씨도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이다. 앤드류는 봄방학을 보내는 중이다. 시작하기 위해서는 끝내야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신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걸 느끼면 그때가 바로 끝이자 시작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오늘도 달리시겠네요.
    그럼, 나는 달리는 게 제일 좋아. 앤드류가 떠난 이후로 하루도 걸러 본 적이 없어. 영이 씨가 말했다.
    공항에서 영이 씨와 포옹을 했다.
    호주에 다시 올 거지?
    그럼요.
    한국에서 잘 안 되면 여기 와서 살아.
    진짜 올 거예요. 영이 씨네 집에요.
    피타와 나는 대환영이야.
    어느덧 봄방학이 끝났다. 잘 돼도 잘 안 돼도 여기 오고 싶은 이유는 영이와 필립 그리고 피타 때문이다. 이곳의 물이 내게로 흐르고, 남극의 얼음을 품은 바람이 한국에도 불어온다. 돌아올 곳과 반겨 주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자 한낮 호주의 들판처럼 미옥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탑승장 입구로 들어갔다. 곧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겠지. 공항 직원이 따분한 표정으로 미옥의 얼굴과 여권과 탑승권을 차례대로 들여다봤다. 미 오케이?
    미 오케이.

 

 

 

 

 

 

 

 

 

 

도수영
작가소개 / 도수영 

2020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문장웹진 202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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