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달 외 1편

[창작시]

 

 

땅의 달

 

 

최재원

 

 

 

 


   오래된 달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걷는데


   꺼졌다


   전자가 발길을 끊은 후에도
   달은 주황빛으로 익어 가고 있었다
   필라멘트에 남겨진 입자가 식어 가고 있었다


   멍하니 입 벌리고 바라보며 가는데


   배수로에 덮어 놓은 그물망에
   발이 빠졌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발 바깥쪽을 삐고 말아서


   다리를 절며 돌아가는데


   켜졌다


   철쭉 잎
   익은 제 살을 뒤집어
   오므라드는 가운데


   철모르는 몇몇의 낙엽을 밟고
   절뚝절뚝 가는 겨울을
   재촉하는 봄의 성급한


   발


   발


   밤


   봄바닥 위 떨어진 달
   봄 내내 깜빡이더라


   강동구의 오래된 가로등을 LED로 교체한다고 했다

 

 

 

 

 

 

 

 

 

 

 

산화

 

 

 

 


   바람이 불었고 아침이 왔고 비가 내렸고 우산이 찢겼고 물을 마셨고 약을 먹었고 커피를 샀고 글을 썼고 계획을 세웠고 고개를 저었고 손을 주물렀고 그러자 너를 떠올렸고 세수를 했고 로션을 발랐고 담배를 피웠고 백업을 시켰고 마우스를 충전했고 빨래를 돌렸고 이불을 개었고 집이 흔들렸고 천장을 올려다보았고 옷을 널었고 아침이 갔고 싸락눈이 휘날렸고 물이 떨어졌고 바람이 들었고 창을 닫았고 청소기를 돌렸고 반짝이 스티커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았고 닫힌 책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오늘은 빵을 만들리라 생각했고 번역을 했고 하지 않은 것들을 했다고 적었고 눈이 그쳤고 계란을 삶았고 빵을 구워 살구잼을 발라 먹었고 찢긴 우산 더미가 목까지 차올랐고 거짓말을 더 능숙하게 했고 거짓말을 본격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고 어떻게 하면 거짓말이 더 사실처럼 느껴질 수 있을까 골머리를 앓았고 어떻게 하면 거짓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고 거짓말이 뭔지 궁금했고 거짓말을 잘할 수 있을 때 나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할 수 있다면 더더욱 오해가 없을 것 같았고 진실이라는 것의 허망함에 지쳤고 자꾸만 진실을 내어놓으라고 우기는 통에 더욱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거짓말과 진실은 이름만 바꾸어 거짓말은 거짓말의 진실이 되었다가 진실의 거짓말의 거짓말의 진실이 되었다가 진실을 탐했다가 진실을 내쫓았다가 진실을 붙잡았다가 진실과 한몸이 되었고 진실은 애초부터 거기 있지 않았으므로 거짓말은 제 몸을 끌어안고 슬피 울다 보니 어느새 하나의 진실이 되어 있었고 차차 자신을 잊어 갔고 자신의 잊혀진 이름이 못내 지겨웠던 거짓말은 자신의 원래의 이름을 불러 줄 이를 찾아 길을 떠났고 그 길에서 수많은 거짓말들을 마주쳤고 대부분의 거짓말들은 자신이 거짓말인지도 모른 채 – 아니,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 거짓말임을 상관하지 않은 채 가장 진실된 삶을 살고 있었고 진실과 거짓말을 구별 없이 속삭였고 거짓말은 문득 서러워져서 자신과 같은 거짓말이 어디 없나 그를 찾고 말리라 다짐했고 길을 나선 거짓말의 뒤로 다른 거짓말들은 저도 모르게 줄지어 섰고 거짓말들의 긴 행렬은 거짓말쟁이 산을 넘었고 거짓말쟁이 구름을 만났고 거짓말쟁이 해 아래 거짓말쟁이 볕을 쬐었고 이윽고 거짓말쟁이 바다에 도착한 거짓말과 그를 따라나선 수많은 – 이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 거짓말 집단은 지친 몸을 거짓말쟁이 파도에 담갔고 거짓말쟁이 썰물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쓸려 내려가 가장 깊은 바닥의 거짓말을 만났고 그곳에서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본 거짓말들은 화들짝 놀라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쳐 나왔고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들려 올라갔는지 자취를 찾을 수 없었고 거짓말 행렬의 긴 허물만이 남아 미생진실은 영양가가 많은 허물을 조금씩 뜯어 먹으며 몸집을 불렸고 진실의 군집을 이루어 거짓말쟁이 바다를 뒤덮었고 바다 밑 거짓말쟁이 땅까지 진실의 뿌리를 박아 넣었고 진실의 나뭇가지들은 거짓말쟁이 하늘을 꿰뚫어 즙을 빨아 먹었고 게걸스럽게 자꾸 자라나 더 이상 잡아먹을 것이 없어진 진실의 괴물은 제 몸을 베어 먹기 시작했고 비대한 배를 간신히 접어 진실의 발가락부터 진실의 물갈퀴, 진실의 허벅지, 진실의 꼬리, 진실의 엉덩이, 진실의 전립선, 진실의 질, 진실의 배꼽, 진실의 지느러미, 진실의 날개, 진실의 젖꼭지, 진실의 더듬이, 진실의 눈알까지 다 와작와작 씹어 먹었고 진실의 입은 마지막까지 남아 진실의 입술을 베어 먹었고 진실의 볼 안쪽 살을 녹여 먹었고 마지막으로 진실의 이를 삼켰고 위치로 남겨진 진실은 구조신호를 보냈지만 좌표마저 먹어버린 진실은 거짓말 신호밖에 보낼 수 없어서 애타게 기다려 보았지만 진실과 진실이 소화시킨 거짓말의 허물은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거짓말과 그를 따르던 거짓말들은 뿔뿔이 흩어져 팽창하며 싹을 틔웠다. 옥상의 새들이 떨어지듯 헤어졌고 구름이 길을 남기며 떠났고 비와 눈은 뒤범벅으로 떨어졌고 안개가 피었고 우유팩을 헹궜고 계란을 깠고 머리를 감았고 대강 말리다 말고 급히 집을 나섰고 가는 길에 분리수거를 했다. 대문 앞에 내놓은 음식 쓰레기를 두고 나왔다.

 

 

 

 

 

 

 

 

 

 

 

 

최재원
작가소개 / 최재원

거제도, 창원, 횡성, 뉴욕 그리고 서울에서 자랐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시각예술을, 럿거스 대학교 메이슨 그로스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2018년 Hyperallergic을 통해 미술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한영·영한 번역과 감수를 하고 있다.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로 제40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2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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