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평가다, 고로 나는 비평한다 - 황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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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나는 비평가다, 고로 나는 비평한다

 

 

황현경

 

 

    나는 비평가다, 고로 나는 비평한다. 내게는 이 명제 하나면 충분하다. 나만 이 명제에 충분하면 된다. 이 글은 나는 충분한지를 고민한 흔적들이다. 혹여 비평가에 대한 글일 수는 있어도 비평에 대한 글은 아니다. 두서없을지언정 솔직하게 적어 볼 참이다. 그러기로 했으니 충분히 두서없어 보이기 위해 충분히 고민해야 했다는 것을 이 글에서만큼은 밝힌다.

 

*

 

    비평이란 무엇인가. 자랑은 아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두서없이 적기로 작정했으니 이런 건 어떨까. 국수(國手)로 불리는 조훈현 9단이 날고 기던 시절 그의 유일한 호적수였다던 서봉수 9단은 바둑을 ‘나무판 위에 돌 늘어놓는 게임’으로 정의했다고 한다. 과연 고수의 대답이다. 또 이런 건. 가수 이문세의 영혼이었던 작곡가 이영훈은 곡을 쓸 때면 피아노 앞에 앉아 하루 마흔 잔의 커피와 네 갑의 담배를 마시고 태워서 없앴다고 한다. 삶과 음악을 맞바꾼 저 위대한 작곡가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게 의미가 있을까. 서봉수에게 바둑이 무엇이었는지는 그의 기보가, 이영훈에게 음악이 무엇이었는지는 그의 곡들이 증명한다. 필립 로스 식으로 말하자면, 프로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필립 로스, 『에브리맨』,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9, 86쪽)
    너무 거창한 예를 든 탓에 차마 묻어갈 수는 없어졌다. 그렇다면 이런 건. 비평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 없이도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비평가는 비평을 쓴다.’ 그 글은 대상(작품)을 원료로 삼아 만들어지므로 비평가의 일은 제조업, 곧 이차 산업이다. 대상이 없는 글을 상상할 수도 있을까. 없다. 내 경우에는 대개 소설이지만, 꼭 소설을 재료로 삼지 않더라도 비평은 무언가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은 또 다른 비평일 수도 있고, 역사나 철학이나 혹은 철학의 역사(를 철학자도 아닌 비평가가 왜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일 수도 있으며, 더 물러선다 해도 결국 인간과 세계다. 그러니 이건 이를테면 책상을 만드는 일과 다를 게 없다. 누군가는 철제나 플라스틱을 쓰기도 하는데, 나는 주로 나무만 쓴다.
    나는 문학평론가다. ‘등단’이라는 인준 절차까지 거쳤으니 더 복잡하게 생각 않기로 했다. 아무리 장롱에 오래 묵힌들 운전면허증이 어디 삭아 없어지기야 하던가. ‘소설을 쓰지 않아도 된다면 소설가는 괜찮은 직업’이라는 농담이 그저 실없는 농담만은 아니듯, 평론을 쓰지 않을 때라도 나는 어쨌거나 문학평론가다. 시 평론을 쓴 적이 없으니 엄밀히는 소설평론가라고 해야겠다. 시 평론을 안/못 쓰는 이유도 복잡하지 않다. 한국 시를 읽긴 하나 뭐라 자신 있게 말할 만큼 읽진 않아서다. 다 읽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럼 소설은? 역시 복잡하지 않다. 다 읽는다. 어제 롯데가 이겼는지 기아가 이겼는지 모른다면 그 사람은 야구를 해설할 자격이 없다.
    물론 싹 다 읽을 수는 없다. 한 해에 나오는 소설이 몇 편이나 될 것 같은가. 많을 줄은 알았는데 뒤져 보니 생각보다도 더 많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매년 발행하는 문예연감에 따르면 2014년에는 244종의 문학잡지에 1,825편의 소설이 발표되었다. 나는 그중 325편을 읽었으니 1/5 정도 검토한 셈이다. 325편 중 내 ‘기준’을 통과한 소설은 1/10 정도다. 이 비율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거기서 거기다. 적으면 30편, 많으면 40편. 단순하게 계산하자면 읽지 못한 1,500편 중 150편 남짓한 소설들은 ‘기준’을 통과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단순하게 말하자. 그럴 리는 없다. 읽어야 할 작품들은 다 읽었다.
    이 ‘기준’에 대해서는 (억지로라도) 자부할 필요가 있겠다. 너무 엄격하면 좋은 작품을 놓칠 수 있고 너무 느슨하면 애초에 좋은 작품을 가려내질 못할 테니 어느 쪽이라도 비평가로서는 결격이다. 한 해의 주요 문학상 수상작과 후보작을 일별하면 30~40편 된다. 그 목록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한 해에 그 정도’인 걸 보니 내 ‘기준’도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듯싶다. 솔직하게 말하자. 나는 한 해에 적어도 300~400번, 그러니까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기준’을 점검하고 보완한다. 찬장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볶은 지 삼 년도 넘은 원두로 내린 커피를 아로마 운운하며 극찬한다면 그는 그냥 문외한이거나 사기꾼이다. 문외한이나 사기꾼이라는 말에 비평가보다 더 발끈하는 이는 없다.
    너무 뻔해졌다. 바둑 이야기나 조금 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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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몇 과학자들의 예상대로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압승을 거뒀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어서, 바둑을 모르는 나 역시 체스가 이미 정복당한 마당에 별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처음 둘 수 있는 수는 19×19=361개밖에 없고 그다음에는 360개밖에 없으니 원리만큼은 아주 간단한 계산 아닌가. 아무렴, 인공지능이 소설도 쓰는 세상이다. 과연 ‘좋은 소설’을 쓰는 날이 올 것인지 예상하기에 나는 인공지능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다만 소설가가 위협받는 날이 오게 된다면, 그 과정 중에 비평가는 자연스레 실업하게 될 것으로 짐작한다. 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이라는 말뿐일 그날이 오게 된다면. (비평가가 문학을 산으로 보내는 사람이라는 오해가 확산되는 걸 보고 있노라니 더 빨리 실업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게 다 내 탓이려니 한다.) 바둑을 모르니 이쯤에서 바둑을 아는 이가 쓴 글을 읽자.

 

    불가능한 상상이지만 어쩌면 영화비평의 최종 목적지도 알파고의 감각을 닮지 않았을까. 거시적 포괄과 이론적 개념으로 안치되지 아니하고 현재의 화면에 온전히 몰두하는 글. 나의 인상, 나의 신체, 나아가 ‘나’라는 1인칭 개인의 존재가 소거된 비인간적인 글. 영화의 카메라처럼 “무생물 특유의 기계적인 냉정한 정확성(로베르 브레송)”이 활자에, 특히 비평의 언어에 적용되는 글을 생각해 본다. 탈인간적인 인칭, 사물화된 문장, 카메라가 된 육체. 그러한 형식이 구축될 수 있다면, 비로소 문자 비평을 ‘시네마틱’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김병규, 「서문」, 『0번 – 영화비평선』, 부크크, 2016, 7~8쪽)

 

    Fantasy라는 필명으로 영화비평 블로그(http://blog.naver.com/satan_tango)를 운영해 온 이의 언급이다. “영화비평의 목표가 영화를 겨냥하지 않을 때, 영화글은 초점을 잃어버립니다.”(「비평에 대한 단상 – 매드 맥스 ver」, 같은 책, 427쪽)라고 단언하는 그의 글들에서 수도 없이 배웠음을 꼭 밝히고 싶다. 대체로 동의한다. 지금 내 앞의 바로 그 작품에 몰두하는 게 내가 하는 일이다. 등단하며 수상 소감에 ‘비평가적 자의식’이라는 유령과도 같은 무언가와 내내 싸웠다고 썼다. 한참을 더 허공에 주먹을 날리다가 언젠가부터 그만뒀다. 나는 그냥 이차 산업에 종사하는 수공업자다. 기계화된 공장이 이전까지는 수공업자가 해왔던 일을 대신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비평가로서의 내 일도 인공지능이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비평 같은 것에 관심이 있기만 하다면.
    대체로 동의한다고 했다. 나는 내가 내 글에서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자주 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설령 내 일이 지금-여기의 작품을 지금-여기에서 읽고 쓰는 단순한 작업에 불과하다 해도, 거기에 ‘지금-여기’가 두 번이나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시민이다. 누군가는 지니고 있을 ‘비평가적 자의식’을 대체하는 것이 내게는 지금-여기에서 읽고 쓰며 산다는 ‘시민적 자의식’이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그래서 나는 병신년이 정말 힘들었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아서는 아니다. 사실 나는 이 말이 싫다. 현실은 현실이고 소설은 소설일 뿐. 누구누구에게 ‘개 같다’고 한다면 개에게 실례 아닌가.
   이런 것이다. 촛불을 들고 함께 전진하는 행렬 안에서, 여기 누군가는 우리의 시간을 5년 그리고 다시 5년 뒤로 돌리는 데 힘을 보탠 이였겠거니 하는 불경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중 누군가는 필시 또 5년을 뒤로 돌리는 데 일조하리라는 예감 때문에, 정말 위험한 건 소수의 괴물들이 아니라던 프리모 레비의 말을 새삼스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괴물이 위험하지 않다는 말은 물론 아닐 것이다.) 동시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도. 전에는 지당한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최후의 보루’라는 표현이 퍽 서글프다. 더 밀리지 않기 위해 이리도 큰 힘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밀리고 있지 않은가.
    너무 처연해졌다. 영화 이야기나 조금 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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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극장에 가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요즘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해서는 아니고, 사람 많은 데 가는 게 싫어서. (내 옆에 앉은 이는 꼭 둘이 와서 소곤거리고, 내 뒤에 앉은 이는 꼭 의자를 발로 차더라.)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영화도 전만큼 안 보게 되었다. 내가 영화를 열심히 봤던 게 벌써 십 년 전이다. 《키노》가 폐간되기 전이었으며, 새벽까지 PC 통신에서 ‘영퀴(영화 퀴즈)’를 하고 다음 날 씨네큐브나 시네코아에서 ‘벙개’를 하던 시절이었다. 옛날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그 시절이 무엇을 남기고 지나갔는지를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정성일을 인용해야 제맛이겠으나 듀나를 인용해야 이 글의 격에 맞겠다.

 

    영화에 대한 예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예전에 《키노》에 실려 한동안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했던 공포 영화 리스트가 있습니다. 그 리스트의 방대한 내용에 감동한 공포 영화 팬들은 허겁지겁 비디오를 구해 비디오를 보거나 상영회를 열었는데, 그 결과 그들은 그 리스트의 내용 중 상당수가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자료를 그냥 베낀 것이며 그 결과 발생한 수두룩한 오류가 분 단위로 떨어진다는 걸 알고 열 받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들이 식견을 늘리고 자기 생각을 쌓아올린 것 역시 그 스노비시한 리스트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결국 아무도 손해 본 사람은 없었던 겁니다.
    (듀나, 「시네 스노비즘」, http://www.djuna.kr/movies/scrawl_1999_09_25.html)

 

    1999년 9월 25일 개시된 글이다. “과시성, '척' 하는 태도, 자기 만족성”을 스노브(snob)의 특성으로 들며 영화비평가들까지 도매금으로 취급하는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위와 같은 ‘팩트’들은 말 그대로 사실이었던 것 같다. 같은 글에서 듀나는 “스노브들은 예술가들을 먹여 살린”다고 쓰며 1995년에 뒤늦게 국내 개봉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유작 <희생>(1986)을 십만 명이 관람했던 사건을 언급한다. ‘손해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딱 맞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이렇듯 영화를 (‘스노비시’하게) 향유했던 경험을 남기고 지나갔다는 게 내 판단이다. <곡성>(나홍진, 2016)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쏟아져 나오는 걸 단순히 시장 규모나 관객 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부럽다 부러워.
    ‘문단의 문법’이라든지 ‘자기들끼리만 돌려보는 소설’이라든지 하는 말들을 들으면 속상하다. 삼십 톤짜리 컴퓨터가 손바닥 안에 들어오기까지가 반백년인데, 소설은 ‘한국 현대소설’의 역사만도 짧게 잡아 백 년이다. ‘인식’은 몰라도 ‘미학’은 일종의 테크놀로지다. 소설의 기술(記述)은 기술(技術)이란 말이다. 기술(技術)은, 테크네(techne) 운운하며 어원 따질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 고급 손목시계의 뒷면을 시스루백(see-through back)으로 처리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모두가 그런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폭력이지만, 시계는 시간만 잘 맞으면 그만이라는 이들이 그런 아름다움을 모른다는 것은 가치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스노브들은, 그 자신이 그런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향유하는가의 문제와는 무관하게, 아무튼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퍼뜨리는 자들이다. 그러다 보면 누구 하나는 짜증이 나서라도 시계를 뒤집어 무브먼트를 들여다보게 된다.
    듀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도 스노브일 것이다. 소설에 관해 쓸 때 나는 종종 아는 척을 하니까. 상관없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네 해석은 틀렸다는 욕을 나도 좀 먹었으면 좋겠다. <캐롤>(토드 헤인즈, 2015)의 퀴어적 요소를 예민하게 다루지 못했던 이동진이 욕을 먹었듯 그렇게. 결국 누군가는 아는 척을 해야 싸움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 물론 비평이 해석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지당하다. 내가 그렇게 안/못 쓰는 것일 뿐. 그러면서도 솔직히, 해석‘에서’ 나아가지 않는 글을 보면 그냥 나아가질 말지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글들이 ‘징후’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게 보기 싫어서, 나는 그 단어를 안 쓰기로 결심했고 써본 적도 없다.) ‘작금의 비평’을 싸잡아 비판하자는 건 아니다. 소설이 1/10이라면 비평이라고 1/10이 아니란 법은 없을 테니.
    너무 빈정댔다. 숫자 이야기나 조금 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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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은 서평가이기도 했던 조지 오웰의 산문에도 등장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일 것이다.”(조지 오웰, 「어느 서평자의 고백」, 『나는 왜 쓰는가』,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2010, 287쪽) 나는 이 대목을 무심히 넘겼다가, 서평가 금정연의 「서평과 평론」(《문학과 사회》, 2014.겨울)을 읽고 다시 펼쳐보았다. (금정연의 글은 “그렇지만 영화평론가는 자신이 비평하는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회사가 만드는 매체를 위해 활동하진 않는다.”(523쪽)로 끝난다. 내가 다 낯이 뜨겁다. 2016년의 금정연을 2014년의 금정연이 미리 비판한 셈이니 이런 걸 ‘예상 비평’이라고 불러야 하나.)
    오웰이 좀 너무했다는 생각과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드니 비겁하게 말을 돌리진 말자. 쓸모없다기보다는 애초에 제대로 ‘작동’을 안 하는 작품들이 있다. 다시금 시계에 비유하자면, 아예 바늘이 안 돈다. ‘쓸모없는’ 작품들도 있다. 이걸 왜 지금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소설들을 이름인데, 그런 소설들치고 제대로 작동하는 소설은 드물다. ‘문학의 쓸모없음’이 이러한 종류의 쓸모없음까지 두둔해 주는 건 아닐 테다. 그런 소설들이 열에 아홉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2015년 기준 우리나라의 고교 야구선수는 2,351명이었고, 프로야구 10개 구단의 1군 엔트리를 다 합하면 270명이다. 소위 ‘인프라’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다. 선수층이 두꺼워야 훌륭한 선수도 많이 나온다.
    ‘작동’에 대해서만 더 생각하자. 저 자신도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일본의 ‘음악연주과학자’ 후루야 신이치의 『피아니스트의 뇌』(끌레마, 2016)에는 다음과 같은 실험이 소개되어 있다.

 

    먼저 프로 피아니스트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이 되지 않은 초보자를 대상으로, 건반을 한 번만 치게 하고 그때의 위팔 근육 활동을 근전도로 측정했다. 위팔에는 팔꿈치를 구부렸다 폈다 하는 근육이 있다. 위팔두갈래근(‘알통’을 만들 수 있는 근육)이 힘을 발휘하면 팔꿈치가 구부러지고, 반대쪽에 있는 위팔세갈래근이 힘을 발휘하면 팔꿈치가 펴진다.(172쪽)

 

    결과는 이런 것.

 

    타건하려면 먼저 손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이때는 피아니스트와 초보자 모두 팔꿈치를 구부리는 근육(위팔두갈래근)을 수축시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에서 차이가 났다. 초보자는 팔꿈치를 펴는 근육(위팔세갈래근)을 수축시켜서 팔꿈치를 펴고 건반을 두드리지만, 피아니스트는 팔꿈치가 펴지는데도 근육(위팔세갈래근)이 수축하지 않았다. 자세히 관찰해 보니 피아니스트의 경우 팔꿈치가 펴져 있는 동안 팔꿈치를 구부리는 근육(위팔두갈래근)이 이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피아니스트는 손을 들어 올리기 위해 수축했던 알통을 이완시킴으로써 팔을 중력에 맡긴 채 낙하시켜서 타건하고 있었다.(173쪽)

 

    저자는 이를 에너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말하자면 피아니스트는 근육 수축을 위한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며 연주한다. “한 곡 전체를 연주하거나 콘서트에서 두 시간 내내 연주할 때에는 에너지 절약 기술이 무척 중요해진다.”(184쪽)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무책임한 비유보다는 이런 식이 더 낫지 않은가. 이밖에도 책에 소개된 연주자와 감상자의 뇌와 신체에 대한 수많은 실험들은 우리가 듣는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와 함께 ‘좋은 음악’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접근법에 동의한다. 너무 극단적인 예시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소설을 통한 인식적·정서적 경험은 미학이 제대로 작동했을 때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소설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뭘 어쩌겠는가. 큰 사고를 친 게 아니라면, 운전을 못 한다는 이유로 면허증을 압수할 수는 없다. 다만 제대로 작동하는 소설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그게 내 일이다.
    나는 ‘우리 비평가들’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수가 적어서 그렇지 ‘좋은 비평’은 있다. 내가 읽었던 작품을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러나 결국에는 내가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비평들. 혹은 내가 놓쳤던 지점들을 짚어내어 그것이 훨씬 더 좋은 작품이었음을 알게 하는 비평들. 그런 비평들은 틀림없이 ‘작동’한다. ‘논증’에 성공한다는 말이다. 쉬운 글이 곧 좋은 글은 아니라는 핑계로 논증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비평들이 있다. 글쎄, ‘우리 비평가들’은 종종 대학에서 ‘논증문’ 쓰기 같은 걸 가르치는 강의를 맡곤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저도 못하는 걸 심지어 가르친다는 말인가.
    너무 격앙됐다. 숫자 이야기나 조금 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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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판을 다 못 파는 소설들이 많다. 이삼천 부도 안 나간다는 건데, 적은가 싶으면서도 사실 많은 건지 적은 건지 판단이 잘 안 선다. 더 많이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건 별 의미가 없다. 그 시절에는 음반도 더 많이 팔리지 않았나. 어떤 소설책이든 한 백만 권은 너끈히 팔린다면 글 쓰는 게 더 신날 것 같긴 하다. 단순히 독자 수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고, 그런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일 것 같아서 그렇다. 수전 손택(『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도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시적 정의』, 박용준 옮김, 궁리, 2013)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메커니즘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메커니즘과 흡사하다. 한 백만 명만 그렇다는 걸 확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경제학자 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개정판, 뿌리와이파리, 2009)은 ‘합리적 인간’이 어떻게 이타심을 발휘하는지에 대한 연구다. 경제학자에게 ‘합리적 인간’은 곧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다름 아니므로 이런 책에는 어설픈 낙관이 없다. ‘유유상종’에 관한 실험(17장)이 특히 흥미롭다. 20×20 격자판에 이타적 전략을 가진 사람과 이기적 전략을 가진 사람을 각각 이백 명씩 무작위로 뿌려 놓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타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은 서로 끼리끼리 모이게 되며, 그렇듯 끼리끼리 모인 상태에서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론에 따라) 이타적인 사람들이 더 높은 보수를 얻게 된다. 그다음이 더 흥미롭다. 더 높은 보수를 기대할 수 있으므로 이타적인 사람들 주위의 이기적인 사람들 또한 이타적 전략을 택하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이타적인 사람들만의 세상이 오는 걸까. 아니, 이타적인 사람들만 잔뜩 모이게 되면 다시 이기적인 전략이 엄청난 보수를 기대할 수 있는 우월전략이 된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상대가 이타적으로 나올 게 확실하다면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우월전략이다.) 실험에 따르면 이러한 밀고 당기기의 ‘전선’은 60%의 이타적인 사람들과 40%의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다. 이 실험을 내 멋대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결국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이기적인 사람들 중 일부를 한 편으로 만든다. 다만 그것이 애초에 50:50의 싸움이었을 경우에.
    소설을 읽는 이들이 모조리 이타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타적인 이들 모두가 소설을 읽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러나 적어도 소설은 읽는 이에게 타인의 존재를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예술이므로, 소설의 독자와 이타적 인간 사이의 상관관계만큼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정도도 의심해야 한다면 나는 글을 못 쓸 것 같다. 소설을 읽지 않는 이들에게 타인을 생각하라 말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타인을 생각하기 위해 하필 소설을 읽을 필요도 없다. 하필 소설을 읽어 보겠다는 누군가가 기적처럼 나타났을 때, 이렇게 저렇게 읽으면 된다고 참고할 만한 독해를 제공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내 글이 제대로 쓰여[作/用] 소설을 읽는 이가 조금이라도 늘어난다면 자연스레 타인을 생각하는 이도 조금이나마 늘어날 것이다. 이런 걸 믿으면서 나는 쓴다.
    책은 상품이지만 소설은 작품이다. 작품을 작품으로서 파는 이가 없으면 작품도 상품으로 팔린다. 다른 게 아니라 그런 게 바로 ‘상업주의’다. 그럴 때 ‘소설의 대중화’라든지 ‘쉬운 소설’이라든지 하는 말이 슬그머니 등장한다. 나는 ‘소설이 어려워졌다’는 말이 ‘기계가 복잡해졌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지라, ‘쉬운 소설’ 운운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문이 막힌다. 소설의 대중화라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한 해에도 셀 수 없을 만큼 연주되곤 하는데, 그래서 클래식이 대중화되었나. 누가 뭘 어떻게 해도 소설의 독자가 확 늘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더 줄어들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니까 이건 전면전이 아니라 진지전이다. 그 ‘최후의 보루’를 작가들이 지키는 동안 밖으로 나가 동지를 포섭하는 게 비평가의 일이다.
    너무 비장해졌다. 푸념이나 좀 늘어놓고 마치자.

 

*

 

    현경은 필명이다. 등단할 당시 나는 박사 논문을 쓰지 못한 수료생이었으므로, 비평은 비평대로 연구는 연구대로 하려면 왠지 두 정체성을 분리해야 할 것 같았다. 괜한 짓을 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현경으로 보냈고 필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논문은 어떡한담.) 『김이나의 작사법』(문학동네, 2015)에서 한 대목 옮긴다. 이 책은 이런 문장들로 시작한다. “한 번도 내가 예술을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좋은 일꾼이라고는 생각해 왔다.”(5쪽) 김이나는 <너랑 나>(아이유, 2011)의 작사가이며, 무엇보다도 <꽃이 핀다>(케이윌, 2015)의 작사가이다.

 

    다섯 곡 중 하나 꼴로 ‘녹음이 내일이다’라며 데모를 보낼 정도로 이 일은 늘 급박하게 돌아간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선약을 잘 잡지 않는다. (…)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며칠이고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막상 한가한 시간이 2주일을 넘기면 불안해진다. 이 일은 특히 시류와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아무리 경력이 많고 노하우가 있다 한들 소용없다. ‘잘 써왔던 사람’이라는 것보다 지금 당장, 오늘 잘 쓰는 사람의 가사가 필요한 것이다. 실은 나는 오늘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불안하다. 일이 즐거운 만큼 욕심도 커진다.(88~89쪽)

 

    마감을 지켜 본 적이 거의 없지만 일정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미룬 적도 없다. (아니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렇게 읽고 쓰고 하다 보니 사 년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글만 한 팔십 편 남았다. 읽고 쓰는 게 곧 삶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낯간지러워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그걸 빼면 내게는 남는 게 별로 없다. 돈도 다 그 일로 버니 누가 뭐래도 이건 내 직업이고 밥벌이다. 한때는 생산의 효율을 고민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그만 하기로 했다. 시간이 남으면 놀기밖에 더 하겠나. 이 이상 놀긴 좀 그렇다. 나는 비평도 비평가의 일도 궁금하지만 그보다는 소설이 더 궁금한데, 그러면서도 한 해의 삼사십 편 중 많은 작품들을 치열하게 읽고 쓰지 않은 채 그냥 흘려보냈다. 하여 푸념을 늘어놓는 일도 누워서 침 뱉는 일도 이것으로 끝이다. 나는 비평가다, 고로 나는 비평한다. 일이나 하자.

 

 

 

 

 

 

 

 

 

 

 

 

황현경
작가소개 / 황현경

– 문학평론가.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 <반격, 김사과!>로 등단.

 

   《문장웹진 2017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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