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증평에서 보내는 편지

이 에세이는 [2016년 문학집필공간운영지원사업] 협력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각 집필공간의 추천을 받아 해당 공간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작가의 에세이를 게재합니다.

 

 

증평에서 보내는 편지

 

 

김석희

 

 

    김형,
    하 수상한 시절에 안녕하신가요?
    나는 지금 증평에 와 있습니다. 좀 생소한 이름이지요? 나도 처음 들었을 땐 그랬습니다. 지도를 보면 청주와 진천과 괴산에 둘러싸여 있는데, 좀 더 들여다보니 참 묘한 위치에 있군요. 바다와 동떨어진 충청북도, 그 안에서도 타도(他道)와 동떨어진, 그러니까 내륙 속의 내륙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증평은―섬인 울릉군을 빼면―전국에서 가장 작은 군이기도 합니다.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초정약수로를 따라 10여 분 달리면 황토색 건물이 보이는데, 여기가 ‘21세기문학관’이고, 나는 이곳에 입주해 있는 것이지요. ‘21세기문학관’은 고 김준성 선생(경제부총리를 지낸 소설가)의 문학적 유지를 기리기 위해 그분의 아들인 김상철 회장(디엔피코퍼레이션)이 마련한 작가 집필 공간입니다. 2013년에 개관했으니까 어느덧 5년째에 들어선 셈이군요.
    아니, 제주 바닷가 그 좋은 집 놔두고 무슨 변덕으로 그곳까지 갔느냐고 타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김형만 그런 것도 아니니, 변명 삼아 몇 마디 털어놓자면 이렇습니다.
    40년 타향살이를 접고 제주에 귀향하여 시골에 파묻혀 지냈는데, 대여섯 해 지나는 사이에 일상의 소일거리도 날마다 비슷해지고 마음마저 느슨하게 풀어진 듯해서 좀 다잡을 필요가 있겠다 싶더군요. 그러던 차에 ‘21세기문학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주 신청을 했는데, 다행히 ‘당첨’되는 행운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시설은 국내 곳곳에 여럿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는데 유독 이곳에 눈길이 쏠린 것은 증평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증평은 내륙 속의 내륙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곳 문학관에 입주한 것을 ‘자발적 유배’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이중의 가시울타리 안에 자신을 위리안치한 셈이지요. 내가 놓여 있는 위치를 심리적으로 그리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집까지 떠나면서 어딘가에 박힐 요량이라면, 그렇게 꼭꼭 처박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심사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곳은 청주공항과 가깝기 때문에, 구십 넘은 노모를 둔 내 처지에서는 여차할 때 제주로 신속하게 날아갈 수 있다는 점도 편리한 면이지요.
    문학관은 ‘디엔피’ 공장 부지의 한켠에 자리 잡은 3층 건물인데, 1층엔 도서실과 휴게실, 강당을 겸한 탁구장이 있고, 2층과 3층엔 열한 개의 집필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대여섯 평 되는 방마다 침대와 화장실, 책상과 스탠드가 있고, 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서 나는 거의 온종일 커튼을 내리고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일을 합니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내가 한창 글을 쓰던 무렵 일부러 시골에 가서 여관방에 박혔던 기억을 되살려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그렇게 폼만 잡았을 뿐 변변한 작품 하나 쓰지 못했지만, 손자를 얻은 이 나이에 다시 글을 붙잡으면서 그 시절의 기분을 새삼 만나는 것도 참 반갑고 즐겁습니다. 힘이 되기도 하고요.
    무슨 거창한 성과를 바라거나 기대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긴장감을 자아낼 만큼 나 자신을 다잡고 채근함으로써 정신 건강을 꾀하는 것도 좋겠지요. 사실 우리 나이쯤 되면 대개는 육신의 건강에만 신경을 써서 때아니게 운동을 한다고 호들갑떠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제라도 글을 다시 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합니다.
    이곳은 명색이 집필실이니까 방에 박혀 글을 쓰는 게 일이겠지요. 그렇다고 그 하고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수만도 없는 것. 그래서 날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한 시간쯤 산책을 합니다. 이 산책은 내가 제주에 귀향한 뒤 즐겁게 길들인 버릇이기도 한데, 산책하는 동안 떠오르는 상념들을 붙잡다 보면 처음엔 두서없이 떠오르던 것들이 나름대로 가닥을 잡으면서 줄거리를 이루기도 합니다. 화가라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겠지만, 나는 그것을 소설로 쓰고 싶어진 것이지요.
    한때 문학에 홀렸던 남정네의 주책없는 바람기가 다시금 동한 것일까요? 아니면 ‘문학, 이 요망한 것!’이 나를 다시 찾아와 한번 놀아보자고 꼬드기는 것일까요? 글쎄,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 그 유혹에 슬쩍 넘어가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내려놓았던 펜을 다시 집어 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곳에 왔으니, 산책에 나서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겠지요.
    문학관 밖으로 나서면 갈 곳은 세 방향으로 나 있습니다. 하나는 마을 쪽으로 들어가서 안길과 두렁길을 이리저리 잡으며 걷는 것인데, 이제는 어느 모퉁이에 무슨 꽃이나 나무가 있는지도 훤히 기억할 정도가 되었고, 마을 강아지 몇 놈과는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녀석들에게는 소시지나 비스킷 같은 주전부리를 챙겨 가서 나눠주기도 합니다. 처음엔 경계하며 짖어대던 녀석들이 이제는 내 발소리만 듣고도 반가워 짖어대니, 이런 관계 맺음도 이 낯선 곳에서는 은밀한 즐거움이지요.
    또 다른 산책길은 삼기천변에 조성된 자전거도로를 따라 걷는 것입니다. 우레탄으로 포장된 이 길은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적한 편인데, 이 길을 따라 두 시간쯤 걸으면 저수지에 당도합니다. 이곳에 물이 차면 호수처럼 드넓은 수면이 펼쳐지고, 그 둘레에는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어서 오후 나절 나들이하기 그만입니다. 동료 문인들과 어울려 소풍 삼아 다녀오기도 하는데,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식당에서 회식하며 우의를 다지기도 하지요.
    또 하나는 오일장이 서는 날 읍내로 가서 장터를 구경하는 것입니다. 이곳 장뜰시장은 상설시장이지만,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평소 통행로였던 곳에 좌판과 노점들이 늘어서면서 왁자지껄 활기에 넘칩니다. 싸전, 어물전, 청과물, 옷가게, 꽃가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눈요기를 하다가 국밥집에 들어가 한잔 걸치는 것도 즐거운 산책이지요. 이제는 단골집도 생겼습니다. 중늙은이 혼자 와서 술 마시는 꼴이 안쓰러운지 안주를 듬뿍 보태주는 인심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장날 나들이 때는 문학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대나 머릿고기를 사들고 와서 동료들과 한잔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날의 마무리로는 제격이지요.
    나는 이곳 증평을 내륙 속의 내륙이라고 표현했는데, 시선을 돌려서 보면 증평은 그야말로 ‘옴파로스’ 같은 곳이어서, 이곳을 시발점 삼아 각처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예 작정하고 1박 또는 2박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나는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버스나 기차 여행을 즐기는 편인데, 이곳 증평에서는 기차 여행이 편리합니다. 증평역에서 충북선을 타고 제천역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시간을 맞추어 태백­영동선이나 중앙선으로 갈아타면 정동진이나 경주까지 갈 수 있지요. 얼마 전에는 중앙선을 타고 가다가 안동에 탈춤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해서 그곳에 내려 하룻밤 지내고 왔습니다. 하회마을에도 가봤고요. 이런 기회에 우연하게라도 찾아가지 않으면 언제 그곳에 가볼 수 있겠습니까. 기차를 타고 가면서 특히나 가을빛으로 물드는 강원도나 경상도의 산야를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즐거움은 우리 같은 연배에게는 아련한 향수마저 불러일으키지 않나요?
    소설을 다시 쓰겠다고 집필실에 들어간 사람이 무슨 놀러 다닌 이야기만 늘어놓느냐고 핀잔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글 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직은 민망하니까요. 그 이야기는 직접 만나 대포라도 한잔 나눌 때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줄 테니, 그때를 기대하세요.
    밤이 깊었습니다. 잠깐 마당에 나가서 서늘한 밤공기를 마시며 스트레칭을 하고 왔는데, 여태 불이 켜진 방도 있고 벌써 불이 꺼진 방도 있군요. 이곳에 입주한 문인들 중에는 이런저런 사유로 출타하는 이들도 있어서, 열한 개 방이 다 차는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알려진 이름도 있고 생소한 이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저마다 진지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집필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면서, 글을 쓴다는 게 참 아름답지만 어쩌면 허망한 놀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 허망하기 때문에 거기에 그렇게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어쨌거나 작정하고 왔으니 열심히 써야겠지요. 언제 다시 소식을 전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총총.

 

 

 

 

 

 

 

 

 

김석희
작가소개 / 김석희

–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국문학과를 중퇴했으며,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가로 데뷔했다. 한때 창작과 번역을 병행했으나 2000년 이후에는 번역에만 종사하여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쥘 베른 걸작선집(20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등 많은 책을 번역했으며, 제1회 한국번역대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17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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