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꽂이 외 1편

[창작시]

 

 

꽃꽂이

 

 

이기리

 

 

 

 


   어쩌면 며칠
   생활을 잠시 두고 온 것뿐인데


   오늘은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날이 벌써 밝아지고 있어서 수평선이 보일 것 같아서


   숲을 걷다 노래를 부르고 생선 구이를 먹다 혼자라는 단어에 가시가 박혔길래
   그냥 살다 보면 다 넘어가겠지 싶었는데
   그런 결론은 너무 무책임했는데 책임지는 건 또 왜 이리 싫은지


   보기만 해도 좋을 이 삶을 누가 꺾어 갔으면 하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에게 말도 걸어보았습니다


   갑판 위에 올려놓은 말린 오징어들
   뜯은 빵 부스러기들
   나날들


   모두 당신 것이지요


   눈빛을 부러뜨리고 도망쳤습니다
   구두를 벗으니
   살갗이 까진 뒤꿈치


   바다는 혼잣말을 하지요


   계절을 실재하는 것으로 증명하기 위해
   비와 눈이 내리고
   나무는 열매와 잎을 맺고 열매와 잎을 떨구고
   바닥은 낙엽을 치우고 발자국을 새기고 두들겨 맞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몸을 내어 주고
   사람과 만나고 사람과 헤어지고 사람과 죽는 일
   다음 세대 다음 세기가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지난 일이 될 수 있다


   파도가 부지런히 몰고 온 물의 가능성에
   발끝을 적실 뿐이지요


   그렇다면
   가능하지 않은 물이 되고 싶습니다


   무효한 석양 아래서
   그림자의 발목만 두고 옵니다


   취하고 싶습니다 이거 너무 약합니다
   강한, 더 강한 사건을 주세요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한


   요구한 대로 조명이 어두워지니
   이제야 모든 창문을 벽으로 볼 줄 압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아무 팔을 붙잡고
   차가운 가로등에 기대 오물을 뒤집어써도
   발견되지 않을 만합니다


   당신 없이도 지내볼 만합니다


   나날이 죽어가고 있는데
   계속 주어지는 생활
   생활을 버리자 또 다른 생활이
   침대를 흔들자 삐걱거리는 소리


   헤아리는 뜻은 안감
   다정한 목소리는 겉감
   입어보니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릎까지 오지도 않는 생일
   이런 걸 누가 입니


   어울리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듯이


   검은 풀밭에 엎드려 자신의 상처를 핥는 길고양이는
   태어나자마자 주인을 잃었을 듯합니다


   일종의 자가수분인 셈입니다
   양동이에 물을 받아 주고 싶습니다


   스스로 흩뿌리는 꽃가루


   거기에 몰려드는 각기 다른 유서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
   무슨 모양일지 궁금합니다


   그래도 언젠가 세상에 내놓을 푸념조차 없어
   몸이 바싹 마르더라도
   우리를 예쁘게 묶어주세요
   아무렇게나 의미하세요


   너무합니다


   단 하루
   잘 자라고 싶었을 뿐인데

 

 

 

 

 

 

 

 

 

 

 

   무언가를 적는 손

 

 


   무언가를 적는 손은 회색 연필을 쥐고 있다. 새로 깎은 것임을 가늘고 길쭉한 몸을 보
고 알 수가 있다. 무언가를 적는 손이 쏟아지는 햇빛에 고스란히 담긴다. 손에 닿은 햇빛
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손에게 밝음을 나누어준다. 흰 벽에 무언가를 적는 손의 실체가
달라붙는다. 어둡진 않고 단지 검음뿐이라서 창문을 열고 닫는 일에 온 정신이 쏠리게
된다.


   반복적인 행위를 계속하다보면 의미가 생기고 질서가 형성되는가. 리듬은 끊어진다.
리듬이 생기는 그 순간부터. 악기의 소리들이 쌓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여기는 시간을 미워하는 곳이다. 단 한 번도 시간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모두 바보인 셈이다.


   심장의 단면에도 별거 없다. 유리로 된 책을 읽는다. 글자들이 유리 위를 떠돈다. 물을
쏟자 흐릿하게 번져간다. 책을 놓치자 사방으로 깨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밟고 발바닥으
로 피를 흘리며 문장을 쓴다. 그 말들엔 국적이 없다. 수신자가 없다. 또 누군가는 흥미
를 잃어서 창문을 열고 닫다가 열어 바깥으로 뛰어내린다.


   손 좀 줄래요? 하는 사람을 피한다. 꿍꿍이가 있다. 여기서는 오로지 손으로 무언가
를 적어야 하는 곳. 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의 마지막 자세 따위를 궁금해하지 않고 연필
을 쥘 수 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할 것인가.


   그간 적었던 일들을 지우개로 지우고 창밖으로 던진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일제
히 암전된다.


   그 앞에서 무언가를 적는 손.
   지치지도 않고. 검은 유리 위에.

 

 

 

 

 

 

 

 

 

 

 

 

작가소개 / 이기리

2020년 제39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가 있다.

 

   《문장웹진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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