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들지 않고는 가까이할 수 없는 세계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물들지 않고는 가까이할 수 없는 세계1)

 

 

양근애

 

 

 


   고통을 느끼는 존재의 권리


    2019년 7월 경기도의 한 종돈장에서 돼지가 구출되었다. ‘새벽이’라는 이름을 얻은 돼지는 생추어리(sanctuary)에서 올해 두 살 생일을 무사히 맞았다. 종돈장에서 태어난 돼지는 6개월 만에 도축된다. 그렇게 한 해에 천 팔백여 마리의 돼지가 도축된다고 한다. 새벽이는 동물권단체 직접행동 디엑스이(DxE)코리아 활동가들이 ‘공개구조(Open Rescue)’했다.2) 돈을 주고 돼지를 사 오는 것이 아니라 농장주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구조한 사례였다. 생추어리는 미국의 동물권 활동가 진 바우어가 만들어낸 공간으로 공장식 축산 등으로 피해 입은 동물들의 ‘안식처’이자 ‘피난처’다. 구조된 새벽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폐허가 된 지구에 마지막 남은 인류처럼 외로웠던 것은 아닐까. 다행히 ‘새벽이생추어리’에 최근 ‘잔디’라는 돼지가 구조되어 새벽이와 함께하게 되었다. 제약회사의 실험동물이었던 잔디는 새벽이와는 다르게 경계심이 없어 사람에게 잘 다가온다고 한다. 동물도 인간들처럼 다 다른 외양과 성격을 가진 고유한 존재다.
    인간만이 고유한 존재라는 환상은 근대 이후를 오래 지탱시켰다. 직립보행, 사회성, 자의식, 지능 등을 토대로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 피터 싱어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토대로 ‘동물 해방’을 주장했다.3) 벤담은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기준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가’, ‘말을 할 줄 아는가’가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가’라고 보았다. 피터 싱어 역시 인간이 다른 종들이 누리지 못하는 권리를 가지는 것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부여한 지위일 뿐, 종차별은 인종차별과 차이가 없다고 했다. 동물과 인간을 종이라는 기준으로 나누고 차별하는 것은 인종차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1978년 10월 15일, 유네스코에서 ‘세계 동물 권리 선언’이 발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인권 선언이 선포된 지 삼십 년 만의 일이었다. 세계 동물 권리 선언 제1조는 “모든 동물은 생태계에서 존재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권리의 평등은 개체와 종의 차이를 가리지 않는다”, 제2조는 “모든 동물의 삶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 동물은 권리 없는 ‘물건’에 해당한다.4) 생명 없는 유체물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최초로 동물권을 인정한 독일은 동물은 물건이 아니며 별도의 법률에 의하여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에서 동물은 비물건 혹은 제3의 존재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2021년 9월 기준 반려동물 인구가 600만 가구를 넘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동물에 관한 인식은 높지 않다. ‘감금’과 ‘전시’를 원리 삼는 동물원이 존재하고 움직임이 불가능한 번식틀에 갇혀 분만을 강요당하는 공장식 축산이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각종 동물실험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20년 국내 동물실험에 동원된 동물은 414만여 마리라고 한다. 통계 이후 최대치이며 5년 전 대비 무려 43.8% 증가다.5)
   새벽이의 구조 행위는 점잖은 캠페인이 아니라 질서를 들이받고 선을 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행해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DxE 활동가들은 비합법적인 행위에 대해 60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구조된 새벽이는 최초의 동물 활동가로서 인간 중심의 사유에 질문을 던진다. 조련사의 지시를 거부하고 돌고래쇼를 망친 수족관의 돌고래처럼, 비인간 행위자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와 구조를 교란한다.

   1)  이 글의 제목은 이소연 시인과 주영태 농부가 함께 쓴 ‘도시 시인과 시골 농부의 생태일기’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소연, 주영태, 『고라니라니-손의 일기』, 출판사마저, 2021, 50면.
   2)  디엑스이 코리아의 새벽이 공개구조 이야기는 향기, 은영, 섬나리,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호밀밭, 2021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책의 서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3)  피터 싱어, 김성한 옮김, 『동물 해방』, 연암서가, 2012.
   4)  법무부가 내놓은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민법 제98조의2 1항 신설)이 지난 9월 28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다만 제2항에서는 ‘동물에 대해서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물건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대신 말하기’의 윤리


    무대 위의 동물은 어떻게 재현 가능한가. 연극은 동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비인간 동물의 권리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 중심의 연극적 사유와 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비인간 행위자의 행위성은 인간 너머, 재현 너머의 성찰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연극은 오랫동안 인간의 전유물이었다. 비인간 동물은 의인화와 우화적 은유 속에서 인간을 위해 무대 위에 존재했다. 연극이 배우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는 이상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연극은 영화처럼 동물을 재현할 수도 없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동물은 서사 바깥에서 시야를 잡아끌며 물적 존재로서 동물 퍼포먼스를 발생시키지만, 주인공 혹은 주체로서 서사를 이끌어 가기는 역부족이었다.
    최근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동물권과 비인간 담론은 희곡 창작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동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그려내는 경우도 있지만, 생추어리에서 살게 된 새벽이의 이야기를 직접 가져오거나 동물권의 입법화를 위한 고민을 그대로 무대화하기도 한다.


    구지수의 〈훔쳐 온 손님〉의 이야기는 비교적 간단하다. 어느 날 효신과 효단은 집 안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를 맡는다. 그 냄새는 종돈장에서 가져온 돼지에게서 나는 것이다. 새벽은 이 돼지를 ‘훔쳐왔다’며 “물건처럼 구매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활동가들이 새벽이를 구해온 것처럼 새벽이 돼지를 구해온 것이다. 〈훔쳐 온 손님〉은 동물의 자유와 권리에 다가가는 대신, 고유한 생명인 돼지를 이미 집에 들인 사람의 행동을 보여주는 희곡이다. 새벽은 돼지를 보고 온 후, “그 동물이 ‘더 오래, 더 건강하게,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생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한다. 주저함이 없는 새벽의 말과 행동은 그가 실제 구조된 새벽이를 곧바로 지시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인 힘을 가진다. 희곡 안에서 새벽은 엄마와 형제와 함께 살고 있는 인간이지만, 그가 새벽이라는 인간이면서 새벽이라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하는 말은 비인간 동물인 돼지 역시 보고 듣고 느낄 법한 말이다.

 

효신   키우던 강아지만 죽어도 벌벌 떨던 애가 왜 이래? 얘 죽으면 감당할 수 있겠어?

새벽   왜 감당을 못 해?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죽는 건 얘야. 다시 데려다 놓든 병원에 데려가든 죽는 건 돼지야. 난 안 죽어. 내가 감당할 것도 없지.

효신   감당할 게 없다고? 잘살고 있던 돼지를 훔쳐 왔고 그 돼지가 네 눈앞에서 죽으면 넌 당연히 그 죽음을 감당해야지.

새벽   네 말은 눈앞의 죽음에만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뭘 상상하는지 모르겠는데 이 돼지는 거기서 ‘잘’살고 있지 않았어.

효신   내가 말하는 ‘잘살고 있다’는 행복하게 살았다는 의미가 아냐. 섭리대로 살고 있었다는 거야. 지금 네가 그 섭리를 무시하고 있는 거고.

새벽   돼지들은 서 있거나 온전히 누워 있을 공간도 없는 곳에 살아. 죽은 가족이나 친구들 시체를 비집고. 얘는 살겠다고 자기 형제를 밟고 기어 나오더라고. 철창에 짓눌려서 등이 다 긁히는데도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데려왔어. (돼지를 감싼 담요를 내밀며) 잘 봐봐. 얘 아직 살아 있어. 숨 쉬고 있어. 아파해.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똑같이 아파. 살고 싶어 해. 우리도 그렇잖아. 돼지라고 뭐가 다르겠어. 왜 다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데 돼지는 돼지라는 이유만으로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어야 해? 그게 네가 생각하는 섭리야?

효신   더 강한 존재가 약한 존재를 먹는 건 당연한 자연의 섭리야.

새벽   이렇게 고통스럽게 다른 존재들을 가둬 놓고 대량으로 학살하는 게 자연이라고? (강조-인용자)

 

   5)  고은경, 〈414만 마리의 비명… 지난해 동물실험 가장 많았다〉, 《한국일보》, 2021. 7. 28.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72812330004591
   5)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484


    인용된 대목처럼, 새벽은 돼지를 ‘식용 고기’로 대하며 인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돼지를 먹는 일을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는 효신에게 돼지 역시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복잡한 논쟁처럼 보이지만, 새벽의 직설적인 화법을 비인간 당사자의 말이라고 생각해 보면, 문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곧 쾌와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 효신은 새벽과 대립했지만, 빈집에 울리는 돼지 울음소리를 듣는다. 아직 엄마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새벽의 빈방을 둘러보는 효신 역시 비인간 존재의 생명을 감지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울음으로 다가와 아는 존재가 된 동물은 더는 도구가 될 수 없다.


    정진새의 〈외로운 개, 힘든 사람, 슬픈 고양이〉는 윤성호의 희곡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의 제목을 패러디/오마주한 제목으로 동물권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친다. 신촌극장에 올라간 초연에는 “본 작품에는 예술인 비하 장면이 있습니다.”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동물권이라는 의제를 다루고 있는 연극에 왜 예술인 비하 장면이 들어 있다는 것일까. 실제 연극에서 그 장면은 코믹했고 맥락을 알아차린 관객의 웃음을 유발했지만, 그 웃음은 동물의 권리를 예술인의 권리보다 못한 것으로, 또 ‘나중에’ 판단해야 할 일로 만드는 상황에 대한 유머였다. 동물권이 동물을 보호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예술이 담당해야 할 새로운 의제로 던져진 것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고양희 :  저기 의원님. 근데 그거 아세요? 예술인권리보장법, 차별금지법, 재난방지법 다 중요한데요… 동물은 촛불보다 구의역보다 달빛요정보다 더 먼저 있었어요… 구제역은 2010년이라고요. 왜 이건 맨날 나중인데요!! 안 된다는 건 그냥 그때나 지금이나 나중이나 안 된다는 말이잖아요!! 생명이 죽는 건데… 그것보다 더 먼저인 법안이란 게 어딨어…7)


    〈외로운 개, 힘든 사람, 슬픈 고양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강아재, 사아람, 고양희다. 이들은 국회의원실 보좌관으로 동물법 스터디를 위해 카페에 모인다. 여기에 국회의원실 수행 비서 김민주가 들어오면서 질문과 대답으로 진행되는 긴 대화가 오간다. 그 대화에는 실제로 동물권을 입법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의 역사가 들어 있다. ‘동물 천재’로 불리는 고양희 보좌관이 10년 전에 써 놓았다는 자료를 토대로 이들은 동물의 생존을 위해 정치가 가장 먼저여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극은 2020년에 시작해 2년씩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역순행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극 중에서 동물법은 2012년 19대 국회부터 2024년의 22대 국회까지 12년에 걸친 시간 동안 추진한 법으로 나온다. 그만큼 오래 걸리고 지지부진했다는 뜻이다. 극은 ‘반려동물’이라는 일종의 타자화된 정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인간과 함께 살게 된 이상 인간이 동물을 책임진다는 현실적인 안을 법제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타진한다. 그리고 동물이 스스로의 법적 권리를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대신해서’ 주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등장인물의 명명법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개와 고양이를 대신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현실 정치를 직접적으로 향하고 있다. 동물을 대표/재현(representation)하지 않고 그들의 권리를 대신 말하겠다는 것, 이것은 비인간 동물을 은유로 쓰지 않겠다는 일종의 윤리로 읽힌다.

 

사아람 :  88서울올림픽 알아?

김민주 :  아니요, 제가 98년생이라…

강아재 :  오, 마이~엠에프.

사아람 :  서울올림픽 앞두고 국민들이 개고기를 먹으니까 국제 사회에서 한국에 문제제기를 한 거야. 그래서 우리는 동물을 보호한다, 이런 선전용으로 급하게 만들게 된 거지.

강아재 :  법의 개정 목적이 개 식용 철폐였는데, 정작 그 조항은 만들지도 못하고 30년이 흘렀어. 그사이에 홍콩, 대만, 필리핀, 태국, 중국 다 금지했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만 개를 먹지.

김민주 :  우린 그동안 뭐 한 거예요?

강아재 :  우린 열심히 했어. 특히 동물 천재 양희 선배가 애썼지.

김민주 :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리면 되지 않나요?

강아재 :  하하하하하. 옛날에 이미 50만 돌파했다.

김민주 :  네…

강아재 :  정부는 국회에 떠넘기고, 국회는 상임위에 떠넘기고, 상임위는 그놈의 사회적 합의에 떠넘기고. 씨방, 사회는 다 합의했다고!! 합의합의합의!

김민주 :  그럼 왜 안 되는 거예요?

사아람 :  축산법과 동물보호법 모두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있거든. 아무래도 상임위에서는 도살을 금지하면 전반적으로 산업이 위축될 거라 판단한 거지.
   이번에 작은 걸 내주면 다음엔 더 큰 걸 내줘야 하니까 가만히 있는 거야.(p. 6)

   7)  정진새 작, 〈외로운 개, 힘든 사람, 슬픈 고양이〉 공연대본, 19면.(정진새 작가 제공)

 


    등장인물이 국회의원이 아니라 그들을 보좌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것 역시 흥미롭다. 정권에 따라 입장이 바뀌는 국회의원들의 정치 싸움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지속적인 법제화를 꾀하는 보좌관과 비서진들이 현안에 대한 경험치가 쌓일수록 전문성이 제고되는 모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용된 장면과 같이, 그동안 동물법은 부처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리 취급되거나 축산업 발달 등 자본주의적 계산에 따라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극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동물권의 헌법 명시만 건조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막간극으로 들어가 있는 파트라슈의 이야기는 외롭고 가난하고 슬픈 네로와 끝까지 함께한 개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루벤스의 그림을 보는 동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간과 동물과 예술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재현 너머, 더 가까운 존재로


    비인간 동물에게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사유는 고통받는 동물을 외면하지 않고 그 사태에 직면하기를 요구하는 명령과 마주한다. ‘대신 말하기’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거리를 상정하고 있다면, 비인간의 고통을 방치하지 않고 드러낸다는 것은 그 거리를 최대한 좁히는 시도로 나타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동물-되기(becoming-animal)’는 동물을 흉내 내거나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침투하여 존재론적 변이를 일으키는 일을 가리킨다. 구자혜의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를 기어코 밀어붙인다. 이 글의 제목에 인용한 것처럼, ‘물들지 않고는 가까이할 수 없는’ 비인간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극에 등장하는 비인간 동물은 개, 원숭이, 비둘기, 고라니, 북미 멧새, 비둘기 등 다양하다. 이 중에는 1957년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최초로 지구 궤도에 진입한 개 라이카와 라이카 이후 우주선에 탄 벨카와 스트렐카도 있다. 하루에 한 마리 꼴로 도로에서 죽는다는 고라니와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성화 점화 때 불타오른 비둘기들도 있다.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독특한 스타일을 밀어붙여 동물을 대상화하지 않고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명하게 드러내며 비인간 동물의 고통을 현시한다. 희곡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연극만큼 ‘씨어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지만, 의도적 끊어 읽기와 큰 소리로 말하기와 같은 배우의 접근법을 괄호 친 후에도 잔존하는 비인간 동물의 토로가 인간의 언어를 초과하고 있음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다.

 

라이카 :   그 상실감 생각해 봐. 나도 잡종(개)인지라 조금은 무서웠어. 돌아오지 못하는 건 괜찮아. 엄밀히 말하면, 나에게는 돌아올 곳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나도 잡종 개인지라, 조금은 무서웠어. 그곳(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아무도 모르니까, 나를 보내려 하는 거고. 나 말고 한 마리가 더 실렸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고통을 나누기 위해 또 다른 종을 태울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런 건 이기적인 거야. 모두가 잠든 밤. 나 라이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거리를 걷고 있었어. 모퉁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힐끗 나를 바라보고 있는 존재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때, 나는 그 자리에 멈추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어. 그런 종류의 어둠이 우주에는 팽팽하게 가득 차 있다 들었을 뿐이야. 그 밤 그 길거리에는 나 혼자였고, 나는 그런 어둠에 익숙한 개야. 그곳에 홀로 가도, 괜찮아. 그런데 말이야, 나도 잡종 개인지라 조금은 무서웠어. 다른 개들과의 경쟁에서 일부러 못해 볼까도 생각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걔네는 좀 무서워하는 거 같았어. 아니 고통스러워하는 거 같았어. 고통스러워? 저런 개들이 우주에서 견딜 수 있을까, 상상하는 거? 우주에서 직면하게 될 지독하게 추상적인 어둠도 그러할 테지만, 발사될 때의 속도, 소리 견딜 수 있을까. 우주선이 발사되자마자, 내 심장 박동 수는 세 배 증가. 아, 나랑 최종 선발까지 갔던 그 개라면 이걸 견디지 못했을 거야. 그 개라면 심장 박동 수가 다섯 배, 여섯 배 증가했겠지. 그러니 그래, 내가 오는 게 나았어. 나중에, 초등학생들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류의 원대한 꿈에 대해 시험 공부하게 될 때, 내 심장 박동 수에 대해 듣게 될 테지, 동물의 희생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나의 희생이 과학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에 깊이 감명받는 소수의 아이들은, 심장 터질 듯 두근거림 과학자 길 걷게 될 거야. (후략)8)(강조-인용자)

 


    이 극에서 동물은 인간의 시선에 의해 해석된 존재가 아니다. 동물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과 질서에 의해 고통받지만,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라이카를 주인공으로 한 노래와 영화, 각종 이야기들이 사천 개가 넘는다는데 정작 라이카의 원래 이름인 쿠드랴프카는 전해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에 의해 재단된 동물의 이야기는 으레 인간에게 유익한 교훈이나 즐거움을 위해 복무한다. 그러나 이 극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귀여움’이나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과 같은 매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죽음 직전의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고 인간에 의해 훼손된 ‘불구성’을 드러내는 존재다. 인용으로 다 담을 수 없었던 라이카의 말들은 ‘나’라는 발화를 통해 ‘동물-되기’의 틈을 오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라이카는 어둠에 익숙하지만 이 세계의 어둠을 다 알지 못한다. 다른 개보다 내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무섭다.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감지한 고라니의 마지막 순간’(p. 39), ‘평화 속에서 화려하게 죽어가는 비둘기의 인터내셔널한 순간’(p. 88)들의 잠재성을 ‘추상적인’ 세계로 밀어 올린다. ‘스킵할 수 있는 광고’, ‘알고리즘에 의한 논평 영상’ 등 미디어의 개입은 이 추상의 담론을 매개한다.

 

개 :         “호이! 헤븐호텔을 예약했어.” “뭐라고? 거기가 얼마나 비싼 덴데.” “그 호텔 방에서 커튼을 걷는 거야. 그 액자 안의 풍경, 그 풍경 안의 그림. 그 풍경 안의 호수. 그 호수에 비치는 한 사슴의 눈. 그 사슴의 눈에 비친 한 마리의 개. 그 개의 눈에 비친 아이. 아이의 눈에 비친 고라니. 고라니의 눈에 비친 사람들.” “당신 말이야. 거기서 뭘 볼 수 있는지 알아? 뭐가 보이는지 알아? 당신 무슨 생각 하고 있어?”(p. 76)

 


    이 극은 재현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도 ‘투명한 유리창’, ‘창문’ 등을 통해 재현하지 않을 수 없는 연극의 숙명을 의식한다. 대상화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타자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용인하고 동물-되기의 하이픈이 완전하지 않은 연결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창밖을 바라보는 개의 말은 인용된 것처럼 따옴표 안에 놓여 있다. 액자-풍경-호수-사슴의 눈-한 마리의 개-아이-고라니-고라니의 눈에 비친 사람들로 이어지는 연쇄는 ‘너머’의 보기를 타진한다.


    다시, 비인간 동물은 극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인간과 비인간은 동등한 객체로 무대 위에 존재할 수 있을까. 연극적 환영이 무력해질 때, 연극의 언어는 더 날카롭고 세밀하게 표상의 한계 너머를 향해야 하지 않을까. 〈로드킬 인 더 씨어터〉에 나오는, 더는 미안해할 수 없을 때까지 미안해하는 비둘기들의 대화(pp. 78~88)처럼, 우선은 인간이고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몹시 미안해하기로 한다.

   8)  구자혜 작,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국립극단, 2021, 33~34면.

 

 

 

 

 

 

 

 

 

 

 

 

양근애
작가소개 / 양근애

2011년 겨울부터 연극평론을 쓰기 시작했고, 2015년 가을부터 드라마터그로 연극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2020년 연극평론집 『‘이후’의 연극, 달라진 세계』를 냈다.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

 

   《문장웹진 2021년 12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