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적 비평을 위한 서언

[비평in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묵시적 비평을 위한 서언

 

 

박 인 성(문학평론가)

 

 

1. 비평이라는 언데드(un-dead)

 

    하나의 극단적 전제를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이 글은 시작된다. 근대문학의 범주 내부에서 수행된 일부 형식들과 마찬가지로 문학비평 역시 현재 우리 시대에서 자신의 소임을 수행하는 연속성에 있어 한계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물론 얼마든지 비평에 내재된 광범위한 적용 가능성을 통해 비평의 존속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누구나가 비평하며, 어떤 대상이든지 비평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 비평은 오히려 활기를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글쓰기 형식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종래의 문학비평은 그러한 축자적인 의미의 광범위한 비평 행위와 달리 이미 과도하게 축소된 영역의 울타리 안에서만 성립하는 장르가 되어버렸다. 이를 우선 비평가의 과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답변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가가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은 비평을 보다 대중의 구미에 맞추어 쉽게 써야 했는가와 같은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비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존속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일련의 비평적 작업들에 대하여 우선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비판과 반성은 아니다. 오히려 비평가들이 직면한 것은 총체적인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도 여전히 비평이 성립한다는 이율배반에 있다. 즉, 비평은 ‘좀비문학’의 형태를 가장 직접적으로 채현하고 있는 장르이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서 ‘언데드’(un-dead)의 성격은 2010년대의 한국 문학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이며, 그중에서도 비평은 가장 명확하게 그러한 성격을 체현하고 있는 장르이다. 이때의 ‘언데드’로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인데, 단순히 대단한 지속력으로 죽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지속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비평은 가장 극명하게 ‘두 죽음 사이’에서 분열된 형식이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은 실제로는 거의 죽은 장르임에도 상징적으로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로 문학장 내부에 존속하는 외설적인 형식이다.
    비평의 독자는 과연 실재하는가? 대중 독자가 사라졌음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장 내부의 ‘동업자’들마저 적극적으로 비평을 찾아 읽지 않게 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비평의 형식을 존속시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문학장(場)의 관성에 있다. 독자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문학장 내부에서는 여전히 담론화함으로써 문학에 대한 상징적인 지지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여전히 문학에 대한 일종의 주술적 효과에 기대 있다. 이러한 주술적 효과는 물론 ‘문학성’이라는 대상에 대한 것이지만, 실제로 이때의 문학성이 요령부득의 대상임을 누구나가 알고 있다. 누구도 정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포기될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위상을 지니는 문학성이란 이데올로기적인 구조에 의해서 자연화된 누빔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일종의 환상에 불과함을 강조함으로써 일련의 효과들을 탈주술화한다면, 문학장 자체의 구조가 해체되어 버린다. 문학장이란 단순히 문단과 등가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단제도와 문학성이라는 합치될 수 없는 이중의 초점을 통해 구성되는 허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초점은 한쪽만으로는 불가피하게 서로의 결여를 대리보충하고 있으며, 의도치 않아도 문학에 대한 주술화의 효과를 공모한다.
    달리 말하자면 느슨한 의미에서의 ‘문학’이란 ‘왕의 두 신체’1)와 같다. 한 가지 신체가 파괴된다고 해서 왕은 죽지 않는데, 문단제도를 해체함으로써 문학권력을 정지시키는 것만으로는 문학성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까지 파괴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문학장 내부에서의 문학성이 가지고 있었던 일부 위상이 상업성과 화합하거나 오인될 수 있으며, 일련의 출판자본과 연계된 문학잡지들 역시 이미 문학장 내부를 묶어 주는 누빔점의 위상이 언제든 사후적으로 그 위상이 재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현재의 문학장에서 세속화된 방식으로 통체를 수행하는 정치신학적인 것(the political theological)이 이미 신학경제적인 것(the theological economic)으로 일부 대체되었거나 공존한다.2) 문학적인 것은 경우에 따라 상업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상업적인 것 역시 경우에 따라 더할 나위 없이 문학적인 것이 된다. 문제는 그 이음새를 형성하는 물신적인 효과이다. 따라서 문학장에 대한 비판은 한 가지 대상으로만 초점화될 수 없다. 한쪽에 대한 비판은 다른 쪽으로 극복되는 논리적 순환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2015년의 표절에 대한 논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시적인 타격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표절의 문제가 문학권력의 문제로 이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러한 논의는 어느 한쪽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다른 쪽의 논의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표절은 표절 논의에서 소외되었으며, 문학장 역시 이를 담론의 차원에서 소화함으로써 일련의 정상성을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관련 논의를 통해 드러난 것은 문학장을 오염시키고 있는 악이 아니다. 오히려 문단과 문학권력이 악의 근원인 것처럼 지적하는 종류의 비판은 실재하는 문단 일부만을 겨냥함으로써 초점을 흐린다. 표절 등의 논의는 결코 문단제도나 문학권력만으로 제한할 수 없으며, 전방위적인 문학 텍스트는 물론이고 앞서의 문학권력과 문학 텍스트 사이의 불가능한 동거를 가능하게 하는 문학성이라는 접착제에 대하여 엄밀하게 파고들었어야 했다. 단순히 실재하는 문단권력의 문제인 것처럼 원인을 환원하면 환원할수록 오히려 문학 자체에는 면죄부를 주며, 오히려 문학이야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소급적 해결책으로 다시금 구원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를 경유함으로써 우리는 최근 문단 내 성폭력과 같은 이슈에 직면하여 새로운 방식의 비판적 공공성에 직면했다. 그것은 문학장 내부의 공론화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찾아온 총체적인 비난이며, 따라서 문학장 내부의 제도나 불문율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외부의 목소리는 기존의 비평이 수행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총체적인 예외 상태를 문학장 내부에 안겨 주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문학장 내부에 있어 타자의 목소리에 해당하는 것이 보다 직접적으로 등장했음을 지시한다. 언제나 수용 가능한 타자에 대한 발견만을 수행해 온 비평가들은 이제 더욱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다. 순환적 의제를 도출하는 방식으로 연장해 온 비평의 역할은 스스로를 재고해야 한다. ‘위기와 전망’이라는 해묵은 태도는 더 이상 본질적인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오히려 현재 문학장이 직면한 것은 그동안 극복 가능한 ‘내전’의 형식으로 소환되어 온 위기 담론이라는 가상적 부채의 상환 기간에 직면했다는 점에 있다. 언제나 부채를 늘리는 방식으로 상환 기간조차 연장해 왔던 일련의 내재적 순환 과정이 총체적인 어려움에 도달했다는 인식 말이다.
    다시금 정리하자면 문학장은 문단권력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문단권력과 동일시되는 일련의 구조에 대한 자연화 때문에 문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화의 효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문학성을 끝내 금과옥조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비평적 태도임을 굳이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는 문학성 자체에 대하여 회의적인 비평가에게서도 동일하다. 그러한 비극적 비평가는 일련의 냉소적 주체에 닮았다. “나는 문학비평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학비평이 존속해야 한다고 믿어.” 이러한 비평적 태도는 비평이라는 장르의 존속과 관련된다. 비평은 냉소적 태도에 의해 여전히 죽지 않은 언데드로서 존속하고 있으며, 우선 스스로의 외설적인 분열과 그러한 분열을 극복함으로써 사후적으로 수행되는 동일시에 대하여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를 위한 둘’이라는 형식으로 분열된 두 가지 비평가의 존재가 그것이다.

  1)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의 왕이 “두 가지 육체”는 실제 왕의 육체와 “정치체”(body politic)인데, 왕이 군림하는 동안 이상적으로 지속되는 지정학적 존재와 동시대적으로 존재한다.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2)  애덤 코츠코, 「악의 문제와 정당성의 문제」, 정용택 옮김, 『자음과 모음』 2016년 봄호, p. 345.

 

2. 세 번째 비평가

 

    에일학파로 흔히 국내에 소개된 문학이론가 힐리스 밀러는 문학비평가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3)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적인 정신을 소크라테스와 디오니소스를 통해 분류하듯, 비평적 관점이 취하는 태도를 통해 소크라테스적인 비평가와 디오니소스적인 비평가로 나누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 비평가는 비극적인 비평가이며 언캐니(uncanny)하다. 이들은 문학에 내재하는 위기를 언제나 체감하고 있으며, 따라서 보다 낯선 타자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듯 언캐니의 언(un-)이 언제나 억압의 표지라면, 언캐니는 단순히 낯설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낯익은 것들 안에서 낯선 것들이 발견되고 낯선 것들이 돌연 낯익어 보이는 순간의 겹쳐짐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니콜라스 로일의 경우 언캐니는 주로 ‘억압된 것들의 회귀’나 죽음충동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언급한다.4) 이러한 비극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비평가는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을 앞으로 죽어갈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으로서 존속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를 수행한 직접적인 담론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한국식의 수용과 해석이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비평의 우울’5)이나 좀비로서의 문학6)과 같은 인식들 역시 비극적 비평가의 사례들이다.
    일견 종래의 문학에 대한 기본적 구조 위에 서 있는 비평가와 그러한 구조의 해체를 의식하는 언캐니 비평가의 비평적 태도는 서로 상반되며, 서로에 대하여 비판과 적대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학장의 이데올로기적인 구조 내부에서 이 두 가지 부류의 비평가는 결코 진정한 의미로 적대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온전히 마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만 담론의 순환적 연속성을 생산해 낼 따름이다. 단순화하자면 구조주의와 해체는 진정한 의미로 적이 아니며, 따라서 서로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언제나 극복 가능한 방식으로만 가능한 응답들을 미리 매개한다. 이러한 일련의 운동성은 정신분석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삶충동과 죽음충동의 관계에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 상반된 두 가지 충동은 상호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어법처럼 문학장을 이중화한다. 비극적 비평가는 문학성 자체의 미규정적 성격을 통해서 미리 상정되어 있던 규정성을 갱신하며, 이러한 갱신을 통해서 언제나 문학장의 유연한 재구성에 합류한다. 이는 담론화된 언어와 일부 형식의 해체가 다시금 문학장으로 재영토화되기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영토화 과정 중에서 문학장은 단순히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문단제도로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장 자체를 묶어 주는 상징적 누빔점에 의하여 이중으로 초점화된다. 무엇보다도 비평은 계간지 시스템 내부에서 담론의 생산 및 확산 기능을 통해서 상징적인 누빔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비평이 문학에 대하여 지니는 태도가 기존의 특권적인 위치를 점유하든지, 혹은 자신의 위상의 단순히 전문가를 지향하든지 간에 이러한 상징적 효과가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그것이 문학의 ‘전체’에 대한 앎을 주장하든 특수한 ‘부분’에 대한 앎을 주장하든지 간에 비평은 그러한 앎에의 특권화를 통해 ‘메타-언어’로서의 위상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의 유무와 무관하게 비평은 그 나름의 역할과 주술화의 효과의 차원에서는 지속되는 셈이다.
    일련의 비극적 비평가뿐만이 아니라 ‘비평은 비판’이라는 고전적인 정의로 되돌아가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의 움직임일 뿐이다. 이때의 비판은 문학장을 중심과 주변으로 요령 있게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문학장 내부에 대한 ‘정상성’을 상정한다. 이러한 일련의 비판은 문학과 문학장, 비평의 복권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문학장에 있어서 ‘정상성’이란 한정된 공론장에 의해 형성된 허구적인 타협점에 불과하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다시금 문학장 내부에 배치하고자 하는 시도는 기존의 문학장 내부에서 수행되는 이데올로기적 구조나 그것의 ‘통치’ 방법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판’의 요구들은 결코 공공성과 동의어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최근 문학장 내부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과연 문학장 내부의 제한된 형식과 공론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만이 강력해졌다. 일련의 비평이나 좌담 등의 형식으로 충분한 논의를 수행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며, ‘비판’들 역시 앞서 언급한 비평의 순환성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처럼 문학장 내부에서 일종의 ‘내전’을 수행해 온 비평가들의 입장은 서로를 지탱하며 유지시켜 왔던 변증법적 과정에 가깝다. 그러나 문학장의 ‘현재’에 요구되는 것은 보다 급진적인 부정변증법일지도 모르며, 기존의 모든 비평적 입장을 거절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두 가지 부류의 비평가들과 구분되는, 예외적인 세 번째 비평가의 모델에 대하여 언급해 볼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비평가는 오히려 비평이라는 문학적 언어에 대하여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문학장 내부에서만 성립하는 여러 맥락들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보다 급진적인 의미에서의 문학장 외부의 타자, ‘비존재자’에 대하여 개입하거나 교차시키는 방식의 시도가 요구된다. 병행하는 ‘현재’를 문학장 내부의 ‘현재’로 재발견하는 것이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구성해 온 범주적인 구분선에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이는 수행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지금까지 이루어진 ‘경계’나 ‘장르’의 논법과는 구분되며, 비평가 스스로가 마치 어떠한 미리 주어진 앎도 없는 것처럼 문학장의 불문율이 없는 것처럼 텍스트를 대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태도는 더 이상 문학이 펼쳐지는 층위가 문학장 내부에만 귀속될 수 없으며, 보다 넓은 시대성의 차원에서 여러 차원의 맥락들과 교차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최근 문학 텍스트들의 변화는 문학장 내부로부터 촉발되기보다는 동시대적인 여러 다른 텍스트 및 맥락에 영향 받거나 촉발되고 있으며, 이를 제대로 읽고 의미화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기존의 맥락들 이상으로 시선을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단순히 문학 외부를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학장 스스로가 제한하거나 보지 못한 척했던 종류의 온갖 종류의 텍스트들을 (재)발견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비평가는 사실상 더 이상 종래의 ‘문학비평가’의 정체성에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책임 있는 비평가가 되는 것은 가장 치열하게 ‘동시대인’이 되는 방법뿐이다.

  3)  힐리스 밀러는 「숙주로서의 비평가」(The Critic as Host, 1977)에서 “친숙한(canny)” 혹은 소크라테스적, 이론적 비평가와, “언캐니한” 혹은 아폴론적/디오니소스적, 비극적 비평가 사이를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혹은 해체)에 대한 구분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숙주로서의 비평가」에서 해체적 비평과 다른 비평적 독해 사이, 보다 일반적으로 해석과 문학 텍스트 사이의 관계는 손님과 적(敵)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기생물(parasite)과 숙주(host)의 불가분한 상호관계로 묘사된다. Miller, J. Hillis. “The Critic as Host.” Theory Now and Then. Durham: Duke UP, 1991. 143-170.
  4)  Nicholas Royle, The Uncanny,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3.
  5)  김영찬, 『비평의 우울』, 문예중앙, 2011
  6)  김형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문학과지성사, 2013.

 

3. 비평의 묵시, 혹은 묵시적 비평

 

    새로운 비평적 과제는 시대성의 층위에서 강조될 수 있으며, ‘동시대성(synchronism)’을 재정의하는 힌트가 된다. 동시대성이란 시대성 자체와 동의어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성에 저항함으로써 남아 있는 것들을 증상화할 때 비로소 등장하는 한순간의 흔적들에 가깝다. 아감벤을 참고하자면 “동시대성이란 거리를 두면서도 자신의 시대와 맺는 독특한 관계이다.”7) 따라서 가시적인 시대성으로 규합되지 않는 동시대성이란 여러 시대착오들의 비균질적인 모듬, 비유하자면 불협화음으로서 출현한다. 문학장이 일련의 페티시즘에 의해 구성된 선택적인 화음이라면, 타자의 목소리는 이질적인 외부의 침입으로 여겨질지라도 사실은 언제나 화음과 함께 병행하고 있었던 불협화음들이다. 실제로 현재 문학장 내부에서 맥락화되는 가시적인 시대성이 아니라, 언제나 문학장과 병행하고 있는 큰 틀의 온갖 종류의 파편적 텍스트들을 동시대적 목소리들로, 비평가가 수행하지 못한 방식의 공공성의 차원을 새롭게 문학장에 도입하고 있는 중이다. 다름 아니라 문단 내 성폭력의 이슈에 있어서 가장 먼저 문제제기를 수행하고, 이를 문학장 바깥에서 공론화한 것은 SNS 공간이었다. 익명의 비문학적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학장 내부의 문학적 형식보다 강력하게 문학장을 뒤흔들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고발이 단순히 가해자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한국 문학장 자체에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비평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수행하는 보다 강력한 목소리들에 의해서, 비평은 다시금 위기에 처했다. 아니,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보다 강력한 실재이다. 해당 이슈에 대하여 이미 다양한 관련 논의가 나오고 좌담이 진행 중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비평적 형식보다도 적확하게 문제를 파악하는 시선은 문학장 외부의 문외한적인 시선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선은 장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오염되지 않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문학적 물신들을 탈주술화한다. 그렇다면 동시대성의 차원에서 나란히 서야 하는 세 번째 비평가는 이러한 목소리에 대하여 누구보다 민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문학장 내부에서 불협화음에 호응하기 위하여 ‘끝’의 자리를 다시 마련하는 자이다. 단순한 비극적 인식이 아니라, 묵시적인 의미로 문학장의 ‘현재’에 ‘끝’을 도입한다는 것은 문학 텍스트와 문학장 사이의 간극을 사실상의 무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며, 문학을 문학장에 의해 가공되기 이전의 잠재적 가능성의 차원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타우베스의 말처럼 “세속의 권력과 영혼의 권력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분리가 필요하다는” 8) 주장을 실천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문학장은 문학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문고리를 쥐고 있지 않으며, 또한 문학 텍스트는 문학장에 의해 결코 규정되거나 해석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
    문제는 비평이 형식적으로 언제나 ‘위기’와 전망의 도돌이표 속에서 ‘끝’을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문학장 내부의 비판과 공론이 아니라, 문학장 자체에 대한 보다 총체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지금 시기야말로 비평 역시 스스로를 종말의 계기로서 사유하는 시도가 요구된다. 문학비평의 현재 문학장에서 가장 언데드의 형식에 가까운 언어이듯, 마찬가지로 문학비평은 가장 직접적으로 스스로의 제한적인 형식을 넘어서 스스로의 끝을 상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전히 말해지고 있지 않은 문학의 ‘끝’에 대하여 사유하는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과 새로운 ‘전망’이 아니라, 전망 자체의 폐기로서 ‘끝/종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문학은 어떻게 끝에 이를 것인가, 그리고 끝을 상정함으로써 현재에 어떠한 일상적인 변화가 야기되는지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장 자체가 형성하는 온갖 종류의 주술적 효과와 통치의 논리로부터 벗어나 비평가를 벌거벗은 몸으로 만든다. 비평은 비로소 문학장의 역학과 무관하게 텍스트와 나란히 설 수 있으며, 어떤 메타-언어도 아닌 ‘랑그’로서 동등하게 교차하게 된다.
    세 번째 비평가, 즉 묵시적 비평가는 이제 ‘끝’을 문학장 내부의 현재에 도입함으로써 문학에 대하여 이중의 타격을 가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학장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문학장으로 도입되는 주술화된 문학성 모두를 타격하기 위해서는 문학장을 상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언어 자체에 ‘정지’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지’는 문학에 대하여 통용되는 모든 종류의 언어활동 속에서 구현되는 일상적인 예외 상태이다. 문학장과 텍스트의 문학성을 접합하는 방식의 제도와 불문율을 모두 의문시하며, 그 효과로부터 탈주술화하는 것을 겨냥한다. 문학장 자체의 통치적 구조와 이데올로기적 효과 자체에 대하여 총체적인 정지 상태를 구성하는 것이다. 비평은 더 이상 문학장에서의 물신적 효과에 복무할 필요가 없으며, 거꾸로 그러한 물신적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선적으로 문학의 위기담론이나 반성적 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부터 상정할 필요가 있다. 문학이 위기에 처해 있는 한, 문학장의 존재 의의는 지속적으로 확보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반성적 기능의 효과와 그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음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비평은 더 이상 비평 자체에 대한 갱신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은 비평이 스스로를 문학에 대한 객관적 제3자로서 의탁했던 입장이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가상적 시선을 통해 문학장에 대한 페티시즘적 절합을 수행하지 않아도, 이제 근본적인 외부의 시선과 목소리는 직접적으로 문학장에 개입할 여지가 커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묵시적 비평가 스스로가 문학장 내부에서 동시대적인 다른 공동체, 스스로가 나란히 해야 할 더 절실한 자들과 공생하는 것이다. 문학장 외부에서 들려오는 한국 문학에 대한 목소리들, 문학장에 대한 일상적인 예외를 공유할 수 있는 동시대인 간의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학장 내부에 스스로를 위치하면서도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 이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문학장 외부의 의문을 공유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시도가 병행될 때, 비평은 가상적으로 문학장 내부의 상징적 좌표에 스스로를 억지로 동일시할 필요가 사라진다. 또한 문학장에 대한 의문들에 대하여 애써 응답할 이유도 사라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응답이 아니라 보다 총체적인 질문들이며, ‘위기’에 대한 해답과 전망이 아니라 보다 맨몸으로 일련의 위기를 문학 자체의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 나아가 ‘끝’, ‘종말’을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위기를 무효화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기존의 비극적 비평들의 문제는 지나치게 ‘위기’를 활용하는 와중에 더 이상 ‘위기’와 ‘종말’이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며, 문학장 내부의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그 겹을 상실해 버린다는 점에 있다. 문학에 대한 시선은 언제나 문학의 현재를 좁다란 길로 인도했으며, 몇 가지 한정된 텍스트를 통해 스스로의 문학성에 대한 사후적인 동일시를 수행하게끔 만들었다. 그러한 매끄러운 동일시야말로 사실 문학이 이질적인 형태의 동시대성으로부터 이탈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묵시적 비평은 단순히 문학의 종말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끝을 정함으로써, 손쉽게 모든 종류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간편한 종말적 결론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비평이 수행해야 하는 것은 “종말에 대한 기대와 재조정 작용”9)이다. 오히려 “‘종말’에 대한 보다 습관적인 자세로 인해 우리가 눈감아 왔을 무엇인가를 발견해 내는”10) 것이야말로 묵시적인 비평이 하는 일이다. 비극적 비평가와 달리 여기에는 비평가가 복무하는 것은 순환적인 문학의 재영토화가 아니라, 넓은 차원의 동시대성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더 이상 기존의 문학장 내부가 아니라, 보다 탈장소화된 곳에 산포된 형태일지라도 무관하다. 표면적으로 기타 장르를 기존의 ‘순문학’이라는 범주에 뒤섞음으로써 문학성을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 범주적 구분으로부터 벗어나 기술적이거나 수행적인 차원에서 동시대적인 문학적 행위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묵시적 비평의 한 가지 행위일지 모른다. 따라서 규정보다 중요한 것은 수행적 행위이며, 보다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따라서 그러한 행위를 공유하는 지평에서 더 이상 묵시적 비평가는 ‘문학’을 해석하는 ‘문학비평가’가 아니어도 좋은 것이다.
    정리하자면 ‘묵시적 상상력’은 우선 세속화된 시대성 내부로 ‘끝’의 시간성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존의 비평적 형식 자체가 언제나 전제하고 있는 지속과 전망을 걷어내고 의도적인 시대착오를 통해 ‘다른 시간’의 잠재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주체의 불안을 통해 내부적으로 잠재된 시간, 세속화가 구성해 낸 여러 가면들 아래 감춰진 것들을 시대성에 재도입한다. 따라서 세속화를 통한 주권적 권력의 정당화에 강력한 비판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세속의 권력과 영혼의 권력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분리가 필요하다는”11)주장을 실천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문학장의 권력은 문학성의 자리를 점유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재주술화의 작업을 거부해야 한다. 따라서 비평가는 문학장 내부에서 구성된 지형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시대에 포섭되지 않는 비동시성들에, 더 나아가 그러한 비동시성들을 통해 재구성되는 동시대성에 복무해야 한다.

  7)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p. 72.
  8)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조효원 옮김, 그린비, 2012, p. 233.
  9)  프랭크 커모드, 조초희 옮김,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문학과지성사, 1996. p. 31.
  10)  같은 책, p. 32.
  11)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조효원 옮김, 그린비, 2012, p. 233.

 

4. 늦게 온 자의 메시아니즘

 

    비평은 선지자의 언어가 아니다. 비평은 ‘먼저 오는 말’이 아니다. 비평은 언제나 ‘먼저 온 자들’에 비하여 뒤늦게 오는 자들이다. 뒤늦게 오기에 비평은 일견 텍스트 바깥의 특권적 위치를 점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평가는 실상 뒤늦게 왔기에 그 모든 선재하는 기호들 앞에서 막막해지는 사람이다. 앎은 어디에도 전제되어 있지 않으며, 비평가의 지식과 이론적 언어들 역시 또 다른 종류의 해결할 수 없는 기호들의 연속들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비평가는 스스로 해결 불가능한 방식의 해석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이 풀어야 할 고르기아스의 매듭을 더 복잡하게 엮어 가고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왜 매듭을 끊어버리지 않는지를 묻는 순진무구한 물음은 치명적인 것이다. 모든 것은 의문시되어야 하며, 이제 비평의 공론장은 그렇게 모든 것들을 의문시하는 방식으로 질문을 수행하는 자들의 혀 위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제 뒤늦게 온 자들은 선지자들의 불가해한 기호를 물신화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모든 종류의 남겨진 유산에 대하여 뻔뻔할 정도로 되물을 때, 뒤늦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으로 모든 의문은 정당화된다.
    라캉이 강조한 정신분석가와 비교하자면 비평가는 그 자신을 물 자체에, 실재에 놓는 분석가가 지녀야 할 정신분석의 윤리에는 끝내 미칠 수 없다. 비평가는 명징한 분석가라기보다는 그 자신이 시시때때로 분석 주체에 놓이는 순간과 직면하며, 오히려 저 자신이 찾는 저 물 자체에서 스스로의 증상을 마주하게 된다. 앎은 어떤 식으로도 도래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정되어야 하는 것은 총체적인 무의미이며 비평가의 귓가에 울리는 광인의 속삭임에 가깝다. 그러므로 비평은 차라리 전이와 역전이의 위험을 감수한 채로 어떤 미정형의 공간을 열어젖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공간은 역시 신경증과 정신병이 구분되지 않는 중층결정의 틈이자 간극으로서의 총체적인 시대착오의 장소이다. 이러한 시대착오의 장소에서만 비평가는 동시대적 의식을 지닌 자들과 적극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문학적 언어로 귀속되지 않으며, 더 이상 문학이 아니어도 좋은 무엇일 수 있다.
    따라서 비평의 메시아니즘은 문학의 종말 너머에 있지 않다. 그러한 방식으로 구원받기에 비평은 너무나도 세속화된 형식으로 존속해 온 장르이며,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자기변명을 수행해 온 언어이기도 하다. 문제는 세속을 넘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속의 모든 순간들 속에서 구원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비평은 스스로의 언어적 기능과 효과를 희생할지라도 문학장 내부에서 통용되는 기존의 언어적 규정과 소통 자체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어야만 한다. 단순히 문학이라는 구성적인 규정이 아니라, 이미 문학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실천이자 행위로서의 모든 언어 자체를 원래의 잠재적인 가능성의 차원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규칙화되고 율법화되기 이전의 예외적인 순간들을 문학의 모든 언어적 발화의 순간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며, 그렇게 무의미의 문턱에 도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제야 처음으로 비평가에게 모든 것은 허용되지만,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아니다. 묵시적 비평가는 끝에서 다시금 문학을, 혹은 더 이상 문학조차 아닌 미정형의 무엇을 본다. 그러나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구별되지 않는 곳에서 각각의 시선의 교차하고, 불확실하며 의미로 구성되지도 않은 말들이 비로소 서로를 마주 보게 되는 곳이야말로 비평이 가까스로 발 디딜 한 점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박인성
작가소개 / 박인성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으로 당선되어 등단. 현재 계간 《자음과 모음》 편집위원으로 활동.

 

   《문장웹진 2017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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