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시간과 비인간 행위자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지구의 시간과 비인간 행위자

 

 

양근애

 

 

 


    1. 인류세의 역설과 비인간 존재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연대는 1995년 노벨상을 수상한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제안한 말로 알려져 있다. 지구의 역사에서 지금은 신생대 제4기의 마지막인 홀로세(Holocene)에 해당한다. 만칠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났음을 알린 흔적을 바탕으로 2008년에 결정되었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능력이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할 정도로 강력해졌다며 새로운 지질학적 시기를 주장한다. 인류세를 두고 일어난 과학적 논쟁과 정치적 담론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홀로세의 종말을 고하고 인류세를 명명하는 과정의 논란은 덜 알려져 있을지 몰라도, 이산화탄소의 과다 배출과 거대한 플라스틱 쓰레기 섬, 엘니뇨, 라니냐 현상, 지구온난화 등이 지구를 향한 경고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홀로세까지 지질시대를 구분한 동력은 자연이었지만, 인류세는 지구를 변화시킨 인간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돌아오고 있다.
    인류세의 역설은 기후 위기와 환경 담론을 넘어 정치경제적 문제, 나아가 사회문화적 문제로 이어진다. 인류세 담론은 지구와 지구 밖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역사적 주체임을 자임하던 인간은 인류세의 위협 앞에서 주체의 자리를 의심받게 되었다. 인간중심주의와 서구적 근대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인간의 지위 역시 객체로 놓는 존재론이나 포스트 휴머니즘, 신유물론과 만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이 인류세를 몰고 온 인간의 책임을 덜어낸다는 뜻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의 문학예술이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고 인공지능 로봇, 동물, 자연, 사물 등 비인간을 조명하고 있는 흐름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연극에서도 인간이 아닌 비인간 객체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포스트 휴머니즘 논의나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작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대 위에 존재하는 배우라는 인간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연극에서 비인간은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연극이 멸종된 미래 사회에 등장한 로봇 배우를 다룬 <액트리스 원: 국민로봇배우 1호>, <액트리스 투: 악역전문로봇>은 자신을 로봇이라고 주장하는 성수연 배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믿는 연극적 약속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로봇만의 문제는 아니다. 동물과 사물은 또 어떠한 방식으로 무대 위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일종의 의인화를 수반하지 않고 비인간을 무대화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글은 그러한 질문 혹은 상상을 놓지 않고 비인간을 다룬 희곡, 그 중에서도 로봇이나 사물, 광물 등을 다룬 희곡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물에 관한 희곡의 이야기는 추후에 이어 나가고자 한다.)

 


    웹진 《연극in》의 희곡 코너에는 2020년부터 ‘다른 손(hands/guests)’을 주제로 한 희곡들이 소개되고 있다. 2) 홈페이지의 해당 코너에는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라는 문구가 안내되어 있다. 아직 무대화 되지 않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새로운 희곡들을 읽으며 이 주제가 지향하는 ‘다름’과 ‘인간/비인간’의 경계에 대해 오래 골몰하는 시간이었다.

   1)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list.do

 


    2. 사물 행위자의 운명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은 기술결정론과 사회구조론을 거부하며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이나 동물, 식물, 무생물, 기계 등도 행위자라고 주장한다. 인류학자인 라투르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변화를 진단하며, 기후위기를 비롯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인류와 문명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기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ANT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존재 역시 행위자이며 비인간이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범주에 인간 아닌 존재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즉 ANT에서 행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연결망 혹은 관계이다. 인간과 비인간은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를 구성하는 동맹으로 맺어져 있다.
    “내 머리를 마구 돌렸다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어?”로 시작되는 이남주의 〈JET-AMI〉(203호, 2021-06-24)에는 볼펜들의 목소리가 아우성친다. 볼펜은 사용자의 손에 의해 비틀리고 바뀌고 버려지는 존재로, 그러한 운명을 벗어나기가 만만치 않다. 제트와 아미라는 이름에서 어느 정도 암시가 되긴 하지만, ‘손’의 등장이 없었더라면 와닿지 않았을 힘의 크기와 작용이 그 운명을 손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아미  제트, 나는, 이 세상에 나타난 지 너무 오래되었어.

제트  아미?

아미  손은 몹시 나쁜 버릇을 갖고 있어. 그건 다 쓰지 않은 우리 동료들을 쉽게 버런다는 거야. 조금이라도 속을 채운 액체를 보고도 손은 아랑곳하지 않아.

제트  그렇다면….

아미  아까 손이 내 몸통을 비틀었을 때 봤어. 내 존재가 얼마 남지 않았어.

제트  (다급하게)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미  난 너 같은 비싼 공산품과는 달라, 아미들은 쉽게 쓰고 버려지는 운명을 타고났어. 우리 그러니 미리 작별 인사를 하는 거 어때?

제트  아미, 제발!

아미  네가 살아남는 그 기간 너무 힘들지 않길 바라.

 

제트, 몸을 돌려 손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자신의 입으로 손을 깨문다.
손이 따갑다는 듯 깜짝 놀라 제트를 놓친다.
제트 그대로 바닥 위로 떨어진다.
아미는 그 모습을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본다.
제트가 몸을 데구루루 굴러 손과 멀어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손이 다시 제트를 잡는다.
그리고는 제트를 다시 들고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아미가 갑자기 소리를 치며 울부짖기 시작한다.

 


    〈JET-AMI〉를 인간이 그저 쓰고 버리는 도구에 불과한 볼펜과 그 볼펜을 통해 자기 운명을 넘어서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말한 희곡으로 읽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접근이다. 운명이라는 말이 다소 과잉되어 보이긴 하지만, 이 극에는 같은 볼펜이라도 손이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다른 삶을 살아가는 볼펜의 지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공산품이라는 틀을 벗어나기 어렵지만 어떤 볼펜은 전시되고 어떤 볼펜은 다 쓰기도 전에 버려지고 또 어떤 볼펜은 재사용되기도 한다. 이 극에서 ‘나쁜 버릇’을 가진 손은 인격화 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볼펜-행위자와 손-행위자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틈이 열린다. ANT에 따르면, 볼펜이라는 새로운 쓰기 도구의 발명(기술결정론)이나 인간이 볼펜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쓰는 것(사회구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볼펜과 손의 연결과 관계 맺음에 따라 무언가 쓰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JET-AMI〉를 사물 행위자를 발견했으나 아직 행위에까지 나아가지 못한 극으로 읽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박찬규의 〈THE TEN〉(195호, 2021-02-18)의 사물 행위자는 운동화다. ‘더 텐’은 나이키와 오프화이트가 콜라보한 열 개의 운동화로 그 중 프레스토, 맥스90, 포스원, 블레이저가 이 극에 등장한다. 이들은 무대에는 등장하지 않는 태호라는 인물이 모은 운동화다. 운동화들은 자신들 중 가품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태호가 “신발끈 다 풀고 밑창까지 다 까서 박음질부터 본드 자국 확인하고 냄새 맡고” 확인하게 될까봐 끔찍해한다. 하나씩 운동화가 끌려나갈 때마다 의심의 목소리가 커진다. 공홈 출신인지 개인 거래인지에 따라, 가격에 따라, 만듦새에 따라 감별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이들의 의구심을 깨는 목소리는 맥스다.

 

맥스  우리가 짭이냐 아니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포원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가 가품이면 존재 이유 자체가 없는데.

맥스  짭이면 못 신는 거야? 인간들 발이 아작이 나?

포원  그렇지는 않지만 가치 자체가 훼손되잖아.

맥스  (코웃음) 그건 인간들이 만든 가치잖아.

포원  그럼, 우린 코끼리가 만들었냐? 우리자체를 인간들이 만들었으니깐 그 룰을 따라야지. 만약에 룰에 어긋나면 퇴출 되야 하는 거고.

맥스  퇴출?

포원  가짜는 이 세계를 기만하는 거잖아.

맥스  니가 가짜여도 상관없다는 거야?

포원  응

맥스  그거 너무 위험한 발언이다.

포원  어차피 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지는 입장에서 만듦새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게 웃겨서 그래.

 


    운동화는 인간의 발에 신을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사용가치를 넘어서는 교환가치로 상품의 가치가 매겨진다. 교환가치는 둘 사이의 관계를 토대로 발생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사회, 즉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운동화와 인간의 관계는 행위자 연결망으로 인해 새로운 행위를 구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 그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한 행위자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다른 행위자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 곧 권력의 작동 관계를 사물들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동일한 사용가치를 지닌 운동화지만 교환가치에 따라 우열을 가리는 경쟁 관계에 놓인, 미묘한 미시권력의 작동은 결국 태호가 종량제 봉투를 꺼내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 운동화의 가치는 곧 그것을 사 모은 인간이 추구하고자 한 가치일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생활에 침투해 들어온 수많은 비인간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정의되고 또 그 비인간들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라투르식의 정치철학으로 보면, 집합적 관계 속에서 인간은 비인간과 다름없는 부분일 뿐인 것이다.

 


    3. 카라비너의 소리와 시간의 팽창


    김연재의 <매립지에서>(186호, 2020-09-10)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아니라 해체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창조와 해체는 반대편에 있다기보다 서로에게 깃든 개념의 쌍으로 존재한다. ‘매립지’라는 공간의 양가성도 그와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묻거나 채우기 위해 만든 땅은 창조와 해체, 생성과 죽음을 함께 품고 있다. “도시의 사람들은 만들기보다 없애는 게 더 성가신 것들을 숲에다 버려요. 여기가 우리의 앞마당인 줄도 모르고요. 그러고는 모르는 척 구경을 오죠.”
    극에 등장하는 동상 해체공은 전기톱을 가지고 동상을 최대한 쪼개 더는 동상이었던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작업을 요구받는다. 동상 하나를 해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주 길다. 그러나 동상을 해체해도 돈을 벌기는 힘들다. 빈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체공1  동상을 몇 개나 해체했어요?

해체공2  간신히 하나를 끝냇어요.

해체공1  세상에. 나는 아직인데.

해체공2  그동안 이렇게 늙어버렸어요.

해체공1  동상 하나를 다 해체하면 얼마를 벌 수 있어요?

해체공2  하는 한 푼도 받지 못했어요.

해체공1  왜요?

해체공2  시청 시설물 관리과 사람들이 내 고철들의 무게를 쟀어요. 처음 동상을 가져왔을 때의 무게와 다르다면서 내가 고철을 빼돌렸다는 거예요.

해체공1  무게가 달라졌어요?

해체공2  네 그도 그럴 것이, 빈 공간이 사라졌으니까요.

(중략)

해체공1  빈 공간이 소리를 낼 수 있나요?

해체공2  이건 비밀인데요.

사이

해체공2  처음에는 동상이 비명을 지르는 줄 알았어요.

해체공1  누구나 처음 전기톱에 베일 때는 아픔을 느끼잖아요.

해체공2  비명이 아니었어요. 전자음이었어요. 쉭쉭거리고, 웅웅거리다가 금속성의 물체를 긁어내리듯이 규칙적으로 클클거리는 소리요.

해체공1  백색 소음 같은 건가요.

해체공2  그럴지도요. 내내 소음에 시달렸어요. 그러다가 오래 전 내가 코를 막고 내뱉었던 재채기 소리가 들렸어요. 전자음을 뚫고요.
 나는 그때부터 누군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소리를 들었어요. 죽으려다 마는 소리와 태어나려다 마는 소리를 들었어요.
 비가 오려다 마는 소리와 눈사람이 녹는 소리와 바다 안개의 소리를 들었어요.
 나는 이제 철을 통과한 모든 파동을 느낄 수 있게 된 거예요.
 생각해 봐요,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모든 파동이 계속 남아서 공명하며 신호를 보낸다고 말이에요.

 


    해체공이 매립지에서 듣는 소리는 그냥 소음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영영 사라지는 소리’, ‘죽으려다 마는 소리’, ‘태어나려다 마는 소리’이다. 이 극에서 동상, 전기톱, 양동이 등의 금속성이 환기하는 광물적 상상력은 문명의 비판을 위해 동원된 것 같지 않다. 다만 동물이나 식물과는 다른 광물들의 단단하고 차갑고 느린 속성을 바탕으로 완전히 해체될 수도, 사라질 수도 없는 존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극에는 광물들이 내지르는 비명 속에서 끊임없이 팽창되고 늘어지는 시간에 대한 사유가 도사리고 있다. 거대한 동상을 해체하는, 차마 인지하기 힘든 시간 속에서 해체공들은 기억을 잃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 나가기도 하며 카라비너가 되어 바스라지기도 한다. 인류세의 시간. 인간은 비인간과의 교집합, 혹은 인간의 여집합으로 전이되어 간다.
    <매립지에서>는 인간이 비인간이 되는 변신의 순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이 혼종적이고 변칙적인 세계에서 카라비너의 소리를 듣는 자는 누구일까. 해체공1은 해체공이었다가 카라비너가 되고 만 존재와 대화를 나눈다. 카라비너의 소리는 해체공1만 해독할 수 있다. 그가 그 소리를 이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체공들은 “안에서부터 사라져”가고 있다. 비생명, 비인간의 타자들이 인간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다. 결국 무대 위에는 해체공1의 손만 남는다. 해체된 동상들의 무덤이 된 매립지에서 인간의 형상은, 인류세의 지층처럼 흔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4. 익트수아르포크(Iktsuarpok): 지구가 아닌 그리움


    인류가 멸망한 후의 지구의 미래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전서아의 <무루가 저기 있다>(205호, 2021-07-29)는 ‘시내’라고 불리는 외계인과 지구인 ‘미이’가 지구가 보이는 행성에서 나누는 대화로 전개되는 희곡이다. 지구 바깥 행성에 불시착한 미이는 그 행성에서 만난 외계인에게 시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파도 소리 들리고 파란색 풀을 뜯는 것이 일상인 이 낯선 행성에서 미이는 지구로 가는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다.
    미이가 그리워하는 것은 무루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다. 미이는 지구에서 마지막을 맞은 무루가 지구 밖에 있는 이 행성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다. 익트수아르포크, 이누이트어로 누군가 올까봐 괜스레 문밖을 서성이며 기다리는 마음과 행동을 가리키는 이 말은 이 극의 미이와 시내에게 맞춤한 단어다.(이 단어는 <매립지에서> 카라비너를 쓸 때 작가가 참고로 한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연상된 것이다.) 다리 하나가 없었지만, 갖고 있음과 가지지 못함의 구분이 없었던 무루를 사랑했던 미이는 “무루가 떠나도 야옹야옹 소리가 내 안에 있어” 쓸쓸하지 않다고 말한다. 무루가 불교에서 말하는 그 무루(無漏)라면, 번뇌 없는 마음이라는 뜻이 죽음 이후를 가리킬지도 모르겠다.

 

시내  그럼 우린 왜 만났어? 이 이상한 곳에 왜 내렸어?

미이  불시착이라니까. 불시착에 이유가 어디 있어.

시내   여기가 널 죽이잖아.

미이  (지구를 본다)

시내  떠나는 게 나아.

미이  너도 마찬가지야.

시내  난 왜.

미이  여기도 멸망 중이니까.

시내  아주 나중의 일이야.

 

미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시내를 바라보며 쪼그려 앉는다.

 

시내  아주 아주 아주 나중에. 네가 다른 별로 가서 여기를 다 잊어버릴 때쯤 멸망할 거야.
지구처럼 이상하지도 않을 거고. 지나가다 우연히 이 별을 보게 된다면. 그냥 처음부터 바다만 있던 별인 것처럼.
아주 조용히. 슬프지도 않을 거야.
어떤 멸망은 하나도 슬프지 않아.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 모르는 죽음이잖아.


    이 극은 지구 멸망 이후에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인간과 그 행성에서 만난 외계인, 그리고 지금은 없는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다. 더는 현실 세계의 질서에 붙들릴 필요가 없을 때, 그러니까 지구가 지구 바깥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그리워하게 될까. <무루가 저기 있다>는 지구 멸망이라는 사건을 거대한 비극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 극은 죽음 혹은 사라짐 끝에 무엇이 남는지를 차분하게 묻는다.
    극의 마지막에는 드디어 이 행성에 도착한 우주선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주선을 타고 가야 할 미이는 보이지 않고 아마도 그 우주선을 타고 온 것 같은 고양이가 새로 등장한다. 그 고양이가 무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이의 지구의 삶에서 존재했던, 그래서 그리움으로 남은 무루의 존재를 시내가 알게 되고 만난 고양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시내는 이제 미이가 기입된, 미이의 고양이에 대한 그리움이 전이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내가 새로 만난 이 손님에게는 미이와 무루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 <매립지에서>에서 과거의 지층이 다시 쌓이는 것처럼 시간이 무한히 팽창되는 감각을 느꼈다면, <무루가 저기 있다>에서는 존재마다 다르게 감지되는 시간의 교란이, 오히려 다른 존재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음을 느꼈다. 지구는 멸망했지만 지구 바깥의 어느 존재에 닿을 수 있다는 것. 시내의 말대로 “처음부터 도착하고 싶은 곳에 제대로 도착할 수는 없”어도 불시착이 적어도 우연은 아니라는 것. 지구와 지구 바깥, 인간과 비인간의 동등한 관계 속에서 이 만남을 여러 차례 곱씹게 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에서처럼 문명의 질서가 붕괴되고 야만이 들끓는 황량한 땅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을 그리지는 않지만, 핵전쟁으로 인한 위기와 좀비의 출몰과 같은 스펙터클도 없지만, 인간도 아니고 생명도 아닌, 그러나 지구에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존재들을 조명하는 이 작고 소중한 희곡들을 읽으며 지구의 미래를 상상한다. 지구의 행로를 바꾸는 인간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인간에 대한 위협이 커진다는 인류세의 역설. 지구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이 망가진 지구에서 인간만의 생존을 위한 삶은 불가능하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우리가 지배하고 사용하고 활용한다고 믿었던 비인간들이 실은 우리가 의존하고 적극적으로 관계 맺는 연결체이자 행위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공존의 가능성이 조금씩 열린다고 믿는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으나 인간으로 수렴되지 않는 연극의 힘도 그 안에서 새롭게 생성될 것이다..

 

 

 

 

 

 

 

 

 

 

 

 

양근애
작가소개 / 양근애

2011년 겨울부터 연극평론을 쓰기 시작했고, 2015년 가을부터 드라마터그로 연극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2020년 연극평론집 『‘이후’의 연극, 달라진 세계』를 냈다.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

 

   《문장웹진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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