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정원 하나씩을 가꾼다

[단편소설]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정원 하나씩을 가꾼다

 

 

백민석

 

 

    내행랑 근처를 지나다 보니 아빠가 논문을 쓰는 소리가 들린다. 키보드의 키를 연달아 때리는 타격음이 하나로 붙어 와글거리며 흘러가는 정원 시냇물 소리처럼 들린다. 오늘도 아빠는 논문을 완성하느라 내행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안 그래, 하고 긍정과 부정을 반복하는 아빠 목소리가 들린다.
    틀렸어, 안 틀렸어, 하고 다시 부정과 긍정을 반복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옳아, 맞았어, 글렀어, 망했네, 하고 긍정과 긍정, 부정과 부정을 반복하는 목소리도 연이어서 들린다.
    아빠 목소리가 키보드 와글거리는 시냇물 소리와 함께 내행랑 주변을 휘감아 내리고 있다.
    아빠는 O, X, 하고 큰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알다시피 긍정과 부정의 목소리가 천만 번 반복되어도 논문은 끝나지 않는다. 아빠는 늘 같은 자세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왼쪽 어깨보다 오른쪽 어깨에 더 힘이 들어가 있어서 자음보다는 모음과 엔터를 칠 때 더 센 음이 터진다. 아빠는 턱이 가슴 위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여 매번 방금 입력한 문장을 되풀이 읽고, 옳고 그름을 혼잣말로 따져 보지만 논문은 언제까지나 검증을 마치거나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아빠는 어쩌면 내일쯤 내행랑을 나와 사랑으로 옮길지 모른다. 그 정도는 내 허락 없이도 가능하다. 하지만 거기서도 논문을 작성하며 응, 아니, 하고 수도 없이 정합성을 검증하려 노력하며, 이제껏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모순을 찾아내려 하겠지.
    뿡. 뿡뿡. 뿌웅뿡.
    이따금 살아 있는 사람처럼 캐러멜 향이 나는 방귀도 뀌며.
    아빠가 논문을 쓰는 내행랑은 정원 남문 근처에 있다.
    아빠가 논문을 쓰는 곳은 내 정원이다. 내가 아빠를 내 정원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아빠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방 안에 있어야 하고, 다른 어떤 일도 아닌 논문 쓰는 일을 하고 있어야만 한다.
    내 정원은 청운동에 핵폭탄이 떨어져도 조용하고 영향을 받지 않는다. 청운동은 서울 종로구에 있었는데 제2차 아트 워 때 사라졌다.
    나는 내 정원에서 언제나 즐겁고 안전하다.
    나는 무시로 내 정원에서 노닌다. 12시 13분에 잠시 들어와 놀았고, 지금 14시 51분에 펌프 조립라인이 잠시 혼란에 빠진 사이 또 들어왔다.
정원은 나와 늘 최단거리에 자리해 있고, 항상 태양이 머무르며, 내게 너무 뜨겁지 않은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온도는 항상 내게 너무 덥지 않은 섭씨 21도에 맞춰져 있다. 내 피부에 너무 끈끈하지 않게 어떤 날이건 뽀송뽀송 말라 있고, 내 호흡기가 너무 답답하지 않게 지나치게 건조하지도 않다.
    태양은 이따금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기가 왜 이런 낯선 곳에 붙들려 있는지 의문스러워하지만, 내가 너를 데려왔단다. 그러곤 실 하나로 너를 나의 정원에 묶어 두었지. 실 한 끝은 연못 석탑 보개에 묶고 한 끝은 네 배꼽에 꿰어 둥실 띄워 놓았지.
    태양은 내 손바닥 위에서도 내게 너무 뜨겁지 않은 섭씨 21도였다.
    내게 너무 우울하지 않도록 정원에서 밤도 없애버렸다. 하루의 끝은 정원 서쪽 마당을 나직이 눌러 놓으며 물러가는 황혼이고, 다음날의 시작은 채광창을 창백하게 들띄워 놓으며 물들어 오는 새벽빛이다. 그사이 정원이 깜깜해지는 몇 분에서 몇 십 분의 시간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정도가 내게 너무 지루하지 않은 밤의 길이다.
    정원에선 내키는 대로 여명의 시간도 황혼의 시간도 마음껏 늘였다 줄일 수 있다. 내가 황혼녘에 엄마 손을 잡고 안마당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건 틀림없지만, 안방 툇간에 앉아 새벽 먼동이 다가오며 정원의 담벼락과 정원수 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우는 광경도 그 못지않게 즐긴다.
    정원에는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지만, 내가 원하는 누구든 불러들일 수 있다. 그렇긴 해도 정원의 거주자는 나와 아빠와 엄마뿐이다. 아빠는 방 안에서 늘 논문에 몰두하고 있고, 엄마는 마당에서 늘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는 내가 마당에 들어서면 내 손을 잡고 정원을 한 바퀴 산책한다.
    나는 엄마의 오른편에 선다.
    엄마는 키가 165.5cm쯤 되고 내 키는 174cm이지만, 엄마의 오른손을 잡고 가다 고개를 돌려 보면 언제나 엄마의 치자색 비닐허리띠가 내 눈높이에 와 있다. 내가 배추애벌레색이라고 놀리는 화사한 체크무늬 프릴 원피스에서는, 오케스트라 동료들과 어딜 가서 뭘 먹었는지 늘 계피향이 난다.
    엄마의 손은 내가 잡고 끌고 다니기엔 너무 부드럽고 가냘프다.
    정원에 자리 잡은 그럴싸한 꽃나무나 바윗돌이나 연못의 형태는 아직 없다. 나는 그런 것들을 잘 모르고 또 관심도 없어서, 종종 변덕을 부리고, 그런 미완의 취향을 반영하듯이 갈 때마다 달라져 있다. 어느 때는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꽃나무인 목련나무에 백합 꽃망울이 한가득 터지고 있는가 하면, 마당에 있지도 않은 벚나무로부터 떨어진 망사처럼 성긴 꽃잎을 가진 벚꽃들이 칙칙한 봄 장마철 저녁바람에 날리고 있기도 하다. 어느 땐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본 라스베이거스 인근의 황무지를 방황하는 회전초 무리를 본 적도 있다.
    연못은 대체로 대각선으로 길쭉한 타원형이지만 어느 땐 논문의 오류를 발견한 아빠의 눈처럼 똥그랗기도 하고, 어느 땐 그저 물을 담아 놓는 사각형 콘크리트 수조 같기도 하고, 어느 땐 꼬리지느러미가 부풀어 오른 붕어처럼 팔자 모양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이런 변덕들은 기온이나 습도와 달리, 내가 아직 꽃나무며 연못을 충분히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실은 내 손이 감촉을 기억하는 나무는 가로수인 포플러와 대추야자뿐이다.
    몇몇 종류의 꽃잎은 감촉을 충분히 알기도 전에 손가락 끝에서 부서져 버리곤 했다.
    진짜 정원에 조성해 놓은 진짜 연못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내 정원은 온전히 내 정원이고 그래서 내게 뭔가 확실한 취향이 생길 때까지 얼마든지 나를 기다려줄 텐데.
    물소리가 들리는 햇빛 가득한 흙길을 어머니와 함께 걷는다. 바람의 길이와 세기도 내가 내키는 대로다. 짧게 끊어 톡 톡 톡 흙길을 노크하듯 불어오게 하기도 하고, 부드럽고 무른 바람이 줄기차게 불어오게도 한다.
    어머니와 나는 아무데서나 편백나무를 켜서 만든 널마루를 불러내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다리를 쉰다. 등나무 넝쿨이 우리 정수리 위에서 등롱처럼 환히 마음의 색을 밝힌다. 정원은 어두워지지도 뜨거워지지도 않는다. 정원은 항상성을 가지고 나와 엄마, 아빠까지 지켜준다. 내 정원의 종교는 항상성이다. 피톤치드 향이 정원 담 너머에 편백나무 숲이 있는 것처럼 불어온다, 언젠가 토요일 밤의 건강 쇼에서 봤던 대로.
    이것이 내 정원이다.
    내 정원의 주인은 나이고, 누구도 엿보거나 침입할 수 없다.
    나는 원하는 때,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맘껏 정원을 오갈 수 있다. 12시 42분, 점심밥을 먹고 나른해진 마음으로 들를 수도 있고, 19시 23분, 퇴근길 셔틀에서 꾸벅꾸벅 졸며 입장할 수도 있다. 15시 53분, 조립라인에서 기어레버를 조이다가 문득 손을 놓고 정원을 향해 몸을 던질 수도 있다.
    내 정원은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고, 그 안에 또 내가 자리하고 있다.
    자기 마음속에 자기만의 정원을 가꾸는 일.
    세상의 다른 많은 일들처럼 예전에는 특별한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알려졌었다. 특별한 훈련을 거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능력을 얻고 훈련을 받는 데에는 네가 감당키 어려운 수업료가 든다고 알려졌었다. 차마 묻기도 민망한 액수가 든다고 했다.
    나는 죽은 땅이나 다름없는 정원을 시작하며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도 정원을 가꿀 수 있어요?”
    엄마는 말한다.
    “그럼.”
    “에이, 아이큐가 88인데?”
    내 아이큐는 초등학교 이학년 때 88이 나온 이후, 작년까지 다섯 번의 검사를 받았는데도 87과 89 사이를 오간다.
    “호호, 좀 낮구나. 하지만 두고 봐야지. 아이큐 따윈 다 사기가 아니겠니?”
    하지만 이제는 나도 한다.
    내 월세방에는 화분 하나 놓여 있지 않지만, 화단 한 줄 가꿀 공간이 없지만, 내 마음속에는 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이들의 정원을 본 적이 없어 비교가 불가하지만, 아이큐 88짜리가 이 정도 키웠다니, 하는 뿌듯한 마음도 가져 본다.
    주변 이들도 마음속에 정원 하나씩을 가꾼다. 말들을 안 해서 그렇지 예외는 거의 없으리라고 짐작된다. 하나, 하나씩. 어떤 욕심쟁이도 정원을 두셋씩 가꾸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가꾸는 정원은 외부에 한계가 없어 바깥담을 무한대로 넓혀 갈 수 있고, 내부에도 한계가 없어 어떤 공간이든 무한대로 조그맣게 나누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계가 있다면 그저 정원사 마음의 한계일 뿐이다.
    나는 무시로 내 정원에서 노닌다. 그저 눈꺼풀을 내리닫고, 시야를 안으로 돌리고, 정원의 사립문을 열어 한 발을 내딛기만 하면 된다. 훈련만 충분하다면 눈꺼풀은 열어 놓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무수히 흐려지는 결들로 어둠이 퍼지고 있다. 빈터의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울린다, 커졌다가 여려졌다가, 다시 둔중해지고, 가볍게 어둠처럼 떠올랐다가 어느 순간 흠칫, 주저앉기도 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며 정원으로부터 눈을 떴다. 나는 십 초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그것이 제3차 아트 워의 두 번째 배틀을 알리는 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 발가벗은 열 발가락 너머에서 스크린이, 버려진 컨베이어 벨트처럼 황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눈가를 비벼 눈물이 마르고 난 찌꺼기를 털어냈다.
    나는 스크린을 켠 적이 없었다.
    이거 이상한데, 나는 발가락을 하나씩 꼼지락거려 보았다.
    “닥쳐, 닥치라고.”
    하지만 스크린은 꺼지지도 않았다. 미친 듯이 손가락을 튀기며 닥쳐, 닥쳐, 하고 몇 번이나 명령했지만 스크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크린의 중년 테러리스트는 대머리인데, 이마부터 정수리까지 날카로운 광택이 나는 광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모를 자세로 붐 마이크를 앞에 두고 거칠고 사나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퇴근, 알겠어? 잘빠진 양복에 저마다 개성 있는 넥타이를 졸라매고 어제 닦고 내일 또 닦을 구두를 껴 신은, 저 친구들. 여섯 시 혹은 반, 혹은 반의 반, 이 시각에 거리를 메우며 귀가 차편을 기다리거나…

    베개 밑에서 리모트컨트롤을 찾아 작동 버튼을 눌러 봤지만 스크린은 변화가 없었다. 볼륨도 먹지 않았다. 리모트컨트롤이 말을 안 들을 경우 스크린을 끄려면 이 건물 주인집의 중앙컨트롤 박스의 전원을 내려야 한다. 아니면 망치를 들고 다니며, 내 방 안 여기저기에 스크린을 쏘아 주는 렌즈들을 찾아내 박살을 내든가. 중년 테러리스트는 붉은빛이 도는 황색 정장 윗도리에 흰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폭이 넓은 연자주색 넥타이도 매고 있었다. 안경도 쓰고 있었는데 인공각막이나 홍채가 흔해진 시대에 진짜 안경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소설을 읽는 틈틈이 마치 욕을 하듯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렇다. 중년 테러리스트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남의 스크린 화면에 난입해선 붐 마이크를 켜놓고 낭송을 하고 있었다.

    …라디오 뉴스 앵커는 아직 이쪽 도로가 통제 불능, 이라 한다. 앞 유리창의 여자애는 몇 번 꿈틀거리더니, 잘 닦여진 창에 거품 자국 몇 줄기를 기일게 남겨 놓고는, 보닛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렇다. 이런 종류의 낭송 테러가 지난 제2차 아트 워 때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툴툴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가로질러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휴일에 저녁이었다. 동네 골목에 오줌색 황혼이 깔리고 있었다. 건너편 집 스크린에서도 소설이 낭송되고 있었다. 눈을 드니 통신사 빌딩 전광판에서도 중년 테러리스트가 소설을 낭송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18세 아이돌이 등장하는 소주 광고가 요란했을 것이다.
    웃음밖엔 나오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정원으로 입장했다. 정원엔 스크린도, 중년의 대머리 테러리스트도, 소설도 없다. 나는 항상성이 유지되는 안전하고 쾌적한 나만의 정원이 있다. 세상에서 전쟁이 터지든 말든 내 정원은 평온하고 늘 내 성격처럼 단조롭다.

 

    제2차 아트 워가 끝났을 때, 시민사회에서 존경받는 저명한 지식인이 방송에 나왔다. 그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부수적 피해는 아직도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습니다.”
    지식인의 배꼽 아래로 약력이 지나갔다. 이름난 화학자에, 책을 몇 권이나 낸 철학자에, 칸트 미학의 권위자에, 정신분석학자에, 서울삼성병원에서 핵의학과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수직도 맡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이력이 하나의 배꼽 아래 달릴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쟁이 정말로 끝나려면 두 세대가 지나야 합니다. 가스 공격 피해자의 신체에서 변형이 일어나고 있고, 그 병변이 언제까지 진행되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유전 형질의 변형으로 이어지지 않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스튜디오에 나와 있는 전쟁 희생자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진행자는 당장의 응급처지로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지식인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정원을 가꾸세요.”
    지식인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몸과 마음의 참화를 극복하려면 그 길밖에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이요?”
    “저는 아파트에 사는데요?”
    “이 와중에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으라는 말입니까?”
    “진짜 물고기가 얼마나 비싼지 아시잖아요. 그건 너무 가진 자를 위한 처방이 아닙니까?”
    “땅을 파는 행위 자체가 큰 위험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진행자와 출연자들은 질문이 많았다.
    “인부를 불러 연못을 파고 애써 수목원에 가 낙락장송을 사와 심을 필요가 없는 정원입니다. 일단 판단이 섰으면 정자를 세웠다가 부수는 데에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지식인은 망설임이 없었다.
    “저는 오늘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서 오래 전부터 실행해 오던 양생법을, 절대적인 양생법을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지도층에서 벌써 몇 세대나 세습되어 온 우주최강 양생법입니다.”
    스튜디오가 신음으로 가득 찼다.
    “세습 지도층만 알고 비밀에 부쳤죠. 비밀이 그렇게 잘 지켜지리라고는 우리 세습 지도층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진행자가 당황한 말투로 물었다.
    “우주최강 양생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미 말했듯 정원을 가꾸는 일이죠.”
    그러면서 지식인은 오른손 검지를 펴서 흉골 어디쯤을 가리켰다.
    “저마다 마음속에 토담을 올리고, 제택을 들이고, 연못을 파고, 묘목을 심는 겁니다. 취향에 따라서 뭔가 더 해볼 수도 있겠죠. 그리고 거기 들어가서 그저 한가롭게,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대로 노니는 거지요. 게다가 비용도 전혀 들지 않아요.”
    그 순간을 지켜보던 스튜디오의 누구든, 스크린을 보던 누구든, 절대적인 우주최강 양생법에 대한 지식인의 설명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이 절대적이라는 얘긴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게 어떻게 우주최강이 되는지 몰랐고, 양생법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시민 대개는 가정집에 시설된 정원을 진짜로 본 경험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처방은 옳았고, 시민들은 점차 지식인의 주장이 마음속에 정원을 하나씩 가꾸자는 이야기임을 이해했다.
    정원을 가꾸자.
    돈이 없는 너희는 그냥 마음속에 가꿔라.
    이미 오래 전부터 세습 지도층에서는 써오던 양생법이다. 우주최강, 절대적인 양생법.
    그렇게 해서 시민들은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무시간 무공간 무비용이라는 충격적인 양생법 처방에 유혹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남녀노소, 장애인/비장애인,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기혼자/미혼자, 연예인/비연예인, 예술가/비예술가, 한국인 혈통/비한국인 혈통…… 넘어설 수 있는 거의 모든 사회적 경계를 넘어 마음속 정원 가꾸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처음 의도대로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처방으로 가장 먼저 인기를 끌었다.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는 시민, 전쟁에 재산을 잃어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도 정원을 가꿀 수 있었고, 팔다리가 없어도 그저 두개골 안에 상상력을 발휘할 뇌의 최소 부위만 담겨 있으면 정원을 가꿀 수 있었다.
    누구나 정원을 가꿀 수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다정한 지식인의 폭로 덕분에, 일부 세습 지도층에서만 쓰인다던 양생법이 시민사회로 퍼져 나갔다.
    <1인 1정원 가꾸기 운동>, 이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도 지금 정원을 가꾸고 있다. 정원엔 엄마와 아빠도 계신다.
    남의 정원은 넘겨다볼 수 없다. 누가 어떤 넓이로, 어떤 스타일의 정원을 가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루 빛이 가장 강할 때 그 정원이 어떤 색깔로 빛나는지, 소나기가 지나간 다음 그 정원이 어떤 분위기로 가라앉는지 정원사 외엔 볼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당신 옆자리의 누군가가 반쯤 눈을 감고 눈꺼풀을 섬세하게 떨고 있다면, 그가 정원을 가꾸는 중임을 알라. 누군가 자전거를 시험 운전하다가 어칠비칠한다면, 그가 지금 정원을 노니는 중임을 알라. 횡단보도를 건너다 말고 멈춰선 채 입가에서 된침을 한 방울 흘리고 턱살을 파르르 떨고 있다면, 그가 잠시 자기 정원의 연못에서 붕어를 낚고 있다고 여겨라.
    나의 경우, 초기 비용으로 학원비를 좀 써야 했다. 왜냐하면 모든 시민이 자기 마음속에 정원을 들일 만큼 충분한 상상력을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어떤 업무에는 상상력이 치명적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자전거에 변속기를 달다가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날 그 조립라인의 생산품들은 전부 리콜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시민들은 수년에서 수십 년씩 상상력을 억눌러 왔고 상상의 날개가 기지개를 펼 때마다 힘껏 부러뜨려 왔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나는 정원을 가꿔야 했을 때 내 마음의 황무지, 죽은 땅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터파기 작업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원을 만들기 위한 국비지원 학원에 3개월을 다니며 상상력을 키웠고, 자비로 3개월을 더 다니고 나서야, 마음속에 정원을 들일 만큼 적당한 규모의 상상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이후론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학원을 다녀도 상상력이 여전히 부족한 시민은 상상력에 추진로켓을 달아 줄 약을 구하기도 한다.

 

    스크린은 밤 11시 30분이 좀 넘은 시간에 마침내 꺼졌다. 입주민들 중에 중년 테러리스트가 읽어 주는 소설을 재미있어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데다, 킁킁거리는 목소리도 낭송에 적합하지 않았고, 다들 쉬고 싶은 마음에 집주인에게 항의를 했다.

    …나는 들었던가? 팝콘 옥수수알들이며 사탕들이며 스낵들이 바닥으로 축복처럼 쏟아져 내리는 아주 맛좋은, 게걸들린 소리들을 들었던가, 그리고 쉼 없이 쩝쩝대며, 훌쩍대는 소리…

    하지만 아침에 알람이 울릴 시간이 되기도 전에 먼저 스크린이 켜졌다. 낭송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알람이 작동하려면 주인집 중앙컨트롤 박스에 전원이 들어와 있어야 했다. 목소리는 더 거칠고 볼썽사납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목도 줄거리도 주인공도 알지 못하는 소설 낭송을 들으며 출근 준비를 했고 셔틀을 탔으며, 셔틀에서도 이어지는 낭송을 들으며 공장으로 갔고, 공장에 도착해 조립라인에 앉아 작업을 시작하고서도 낭송을 들어야 했다. 셔틀이나 공장에 설치된 스크린은 평소에는 일상의 꿀팁이나 정류장 정보, 아니면 슈베르트의 생애 따위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던 것들이었다. 한 동료는 울적한 목소리로 이천 페이지짜리 장편소설인 모양이라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난생처음 소설이라는 것을 접한 어린 친구는 뭐 저런 성가신 게 다 있느냐고 했다. 다른 동료는 듣도 보도 못한 작품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 같은 게 흐르고 있다며 귀를 기울여 보라고 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다들 지긋지긋해 했다. 셔틀이나 공장의 스크린은 가정의 스크린처럼 함부로 전원을 내릴 수도 없었다. 중년 소설 테러리스트의 대머리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대머리가 됐다.
사드/샤데이가 두 번째 배틀에서도 승기를 잡아 가고 있었다.
    다들 지겨워 항복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주변의 어느 누구도 사드/샤데이 측의 적이 아니었고 따라서 항복할 권리도 없었다. 항복이란 적의 권리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정원 문을 열고 들어가 정원을 가꾸는 일뿐이다.

 

    제2차 아트 워가 끝난 지 10년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정원을 하나씩 가꾼다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젠 ‘정원이 내 인생을 구했다’ 따위의 주제로, 정원 가꾸기에 대해 간증하고 싶어 하는 시민들도 늘어나고 있다.
    초창기, 아침 토크쇼에 나와 정원 가꾸기에 대해 간증을 했던 할아버지를 지금도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전쟁 통에 왼손 손가락 두 개와 집을 잃었고, 1년 연금에 해당하는 금전을 잃었고, 좌골신경통과 우울증을 얻었다.
    “말은 안 하지만 다들 마음에 정원 하나씩을 가꾸기 시작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당신도 그렇지요? 하고 있으니 잘 알겠지만, 정원을 보살피는 것이 곧 정원으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실은 정원이 우리를 보살피고 있는 거지요, 안 그런가요? 맞아요, 내 나이 올해로 예순둘이고 아내는 둘이 있었고 자식도 둘이 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누군가한테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 건 요즘이 처음이랍니다. 그러니까 어린애처럼 말이에요. 아니, 어렸을 때도 지금과 같은 만족감은 없었지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어머니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세 개뿐인 왼손가락으로 얼굴 반절 정도를 감싸고는 잠시 흐느꼈다.
    “우리 인간은 정원처럼 만족스런 보살핌을 받으면서 이 세상이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는, 평생 가져 본 적이 없는 신뢰의 감정을 비로소 정원 한구석에 꽃처럼 피워냅니다. 이 늙은이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울기 좋아하는 스튜디오의 방청객들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네, 부정하지 마세요. 억울하고 혼란스런 우리네 인생은 정원 가꾸기로부터 버팀목을 얻습니다. 네, 맞아요, 당신도 그렇습니다.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다음부터 느닷없이, 까닭 없이, 별 맥락 없이, 갑자기 세상이 다정해지고 세상이 자신에게 호의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네, 당신 맞습니다. 이제 우리네 삶은 전쟁의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탈바꿈했고, 근본 없는 인생에서 신성을 발견했고, 예측 가능한 일관성을 되찾았습니다. 저는 정원을 믿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 체험에 대해 간증하고 있었다. 정원에 대한 신앙 간증을 들으며 누구나 울었다. 울면서 비워낸 자리에, 그 영혼의 공백에 누구나 정원을 들이기 위한 터를 팠다.
    초창기만 해도 상상의 힘이 부족해서 뭐든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떤 상상은 정원의 성격과 맞지 않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엄마의 젖가슴 환상.
    나는 정원에 엄마를 초대해 놓곤 어스름이 툇간을 물들이던 시간, 엄마의 젖가슴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땐 내가 아직 어렸을 때니 미치지 않고도 가능했던 시도라고 해두자. 내 입술이 젖꼭지를 찾는 동안 엄마는, 내가 상상한 대로 아일랜드의 민요인 <대니 보이>를 나지막이 흥얼거렸다.
    몇 초쯤 그렇게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약간 입술에 힘을 주자, 엄마의 빨개진 젖꼭지는 모래처럼 입술 아래로 흘러내려 사라지고 말았다. 눈을 뜨자 젖꼭지가 있던 자리엔 망실된 기억처럼, 안마당을 적시는 땅거미처럼 속절없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래를 씹는 듯한 깔깔한 뒷맛만 남겨 둔 채. 그 후로 다시는 그 비슷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학원 선생에게 상담했다. 물론 빙빙 돌려서. 엄마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선생은 정원의 신성함을 오염시키는 어떤 짓도 하지 말라고 했다.
    “하마터면 네 정원을 매음굴로 만들 뻔했구나.”
    선생은 본 적도 없으면서 말했다.
    “정원은 보고 즐기고 가꾸는 곳이야.”
    정원은 보고 즐기고 가꾸기 위해 마음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나처럼, 마음속 정원 가꾸기의 놀라운 효과를 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서울이라는 메갈로폴리스의 악당들이 그들로, 그들은 마음속에 ‘범죄의 기지창’을 가꾸려고 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데 드는 감정적 비용을 그곳에서 싼값에 충당하려 했던 것이다.
    아니면 ‘죄사함의 고해실’을 마음속에 들였다. 범죄를 짓고는 곧바로 고해실로 들어가 털어놓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범죄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아니면 ‘아편굴’을 만들기도 했다. 그곳에서 언제든 푹신한 러그에 등을 대고 누워 환각에 빠졌다 나오는 것이다.
    아니면, 아니면…… 하지만 범죄에 정원의 힘을 이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실패했다. 왜냐하면 정원은 근본적으로 안정과 신뢰, 호의에 의한 보살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정원의 종교는 항상성이었다. 마음속 정원은 늘 하나이고, 따라서 일원적 세계의 항상성이었다. 그래서 경쟁에 바탕을 둔 세계관은 정원에 발붙일 수가 없었다. 절대적으로 정원을 가꿀 수 없었다.
    쫓고 쫓기는 생활과 양심의 불안은 정원과 상극이어서 마음속에 정원을 들인 지 일주일이면 나무들은 말라죽고 연못은 바닥을 드러내며 정원 전체가 죽은 땅이 되었다. 어떤 범죄자도 자기 마음속에 죽은 땅을 수천 평방미터씩 품고 다닐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빈 페트병이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둥, 둥, 둥, 시작은 그렇게 느리고 둔중하게…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쇠못 술이 달린 막대가, 바닥을 때린다, 쇠못들이 바닥을 긁는다…

    소설 낭송이 시작된 지 30시간 이상이 흘렀다. 어느덧 지루함이 재앙이 되어 가고 있었다. 중년 테러리스트는 낭송 틈틈이 액상 형태의 음식물을 섭취했다. 가끔 가슴만 나오는 것을 보니 일어나 스트레칭도 하는 모양이었다. 너무 지루한 나머지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네가 이겼다고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어느 누구도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딜 가야 그를 찾을 수 있는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아마 자기 소설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운지도 몰라.”
    “그렇겠지. 소설이 뭐라고.”
    “소설이 뭔데요?”
    “넌 곤란한 질문만 하는구나. 저 사람한테는 소설이란 무기가 아닐까?”
    모든 대중매체가 점령되었기 때문에 미친 소설가에 대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두 시간마다 경찰청 홈페이지에 수사 경과에 대한 시민 브리핑이 떴다. 하지만 매번 같은 내용이었고, 게다가 퇴근시간인 6시면 브리핑도 중단됐다.

    …동네 사람 전부가 어쩐지 그것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에 대한 나쁜 평판들이 있었다. 그것은 근동의 인력시장에 나가 품을 팔던 노가다꾼이었다…

    나는 퇴근 셔틀에 앉자마자 정원에 빠져들었다. 둘러보니 다들 눈을 감고 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다.
    “엄마, 이러다간 정말 전쟁이 나겠어요.”
    엄마는 협방에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은 이미 일어났잖니. 첫 번째 배틀에선 어린애들이 많이 죽었다며.”
    엄마가 하는 말은 모두 내 모자란 머릿속에서 나온 말이다. 엄마는 두어 문장 이상 말하는 법이 없고, 어쩌다 거룩한 초자아의 목소리로 잔소리는 하지만 결코 나와 논쟁을 벌이지도 않는다. 나는 나와 싸우지 않는다.

 

    내가 정원에 엄마를 들였다고 엄마에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물론 나는 옛 기억 속 엄마의 목소리를 합성해 내고, 옛 가족사진에서 엄마의 손 모양을 오려내 엄마 잔소리 홀로그램 알람까지 만들어낸 사람이다. 주변에 나 같은 친구는 드물다.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다. 경찰이 감시카메라 영상을 USB에 담아 주며 ‘기념하라’며 입아귀를 귀밑까지 끌어올리며 웃었다. 나는 어째서 아직 미성년자인 내게, 전과기록도 없고 못된 짓을 저지르기엔 아이큐가 좀 낮은 내게, 말 한 마디 함부로 건넨 적이 없는 내게, 그 경찰이 그토록 적대적이었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전쟁 중이라서? 어쩌면 그저 귀찮아서?
    내가 열일곱 살, 여름이 막 지난 즈음이었다. 나는 USB를 손에 꼭 쥐고 등을 떠밀리다시피 경찰서 밖으로 밀려 나왔다. 내가 나오자, 줄을 서 있던 한 여자가 부리나케 뛰어 들어갔다. 블루 스크린 같은 하늘을 째며 소형 미사일 하나가 커서처럼 가로질렀다.
    USB에 담긴 동영상을 열어 볼 용기를 내기 위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실은 스무 살이 되기 몇 달 전에 동영상을 볼 충분한 용기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다른 스무 살 생일선물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생일날 이후, 내 사회적응지수는 94까지 떨어졌고 일시적으로 틱 장애가 왔다. 수업시간에 앉은자리에서 실례를 했고, 전공수업 교수에게 발길질을 했고, 공부하기 싫다고 교실 책상에 불을 질렀다. 교무과장이 나를 불러 교수님이 너만 보면 히스테리를 일으킨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차라리 원숭이를 가르치면 불은 안 내겠지.”라고도 했다. 나는 그날 나를 학교에서 영원히 데리고 나왔다. 나 말곤 그래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USB 동영상은 전쟁 포르노였다. 순찰용 장갑차의 블랙박스에서 촬영한 영상이었다. 소음으로 귀가 따가웠다. 군용장갑을 낀 손이 핸들을 잡고 있었다. 누군가 다급하게 숫자들을 불러댔다. 장갑차 앞으로 자전거 탄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발목의 복사뼈가 파리하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느긋하게 페달을 밟고 있었다. 벽돌색 롱스커트에, 소매가 팔뚝까지 내려오는 개나리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자전거 짐칸에는 파와 가지와 바게트 빵이 실려 있었다. 저녁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라고 경찰은 설명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트 워가 일어났다고 해서 외출도 삼갈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시민은 없다. 직장에 가고 학교에 가고 시장에 가서 장을 봤다. 아트 워는 진짜 전쟁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쟁이라고 보기엔 전쟁 희생자가 그리 많지 않은 데다, 방송국에서 중계를 할 정도로 지나치게 재밌었던 것이다.
    한순간 자전거가 지나치고 있던 자리에서 화염이 솟았다. 화면이 뻘겋게 한 번, 노랗게 두 번 물들었고, 그러고는 알록달록 총천연색 불꽃들이 경쟁을 하듯 화면을 핥았다. 동영상에 녹음된 목소리는 더 커졌다. 이젠 악을 쓰고 있었다. 화염이 일대로 번져 나갔다. 자전거를 탄 여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군인 한 명이 장갑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화염 가까이, 몇 발짝 다가가다가 그도 바닥에 쓰러졌다. 목소리는 더 다급해지고 더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5분, 10분이 지나도록 소음과 화염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장갑차 안이 잠잠해졌다. 욕지거리가 짧게 들리더니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이 사라졌다. 이제 장갑차 안은 적막뿐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불덩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맞은편 건물 현관을 때려 시커먼 아가리처럼 벌려 놓았고, 다른 하나는 장갑차 보닛에 떨어져 폭발을 일으켰다. 영상의 마지막은 장갑차가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바닥으로 처박히는 장면이었다.
    제2차 아트 워의 막바지였다. 내가 현장에서 무엇을 수습해 왔는지는 나 자신에게조차 설명해 줄 수 없었다.

 

    나는 가방의 가죽 파우치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은가락지를 꺼내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끼웠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던 은가락지였다. 하지만 어딜 가나 대머리가 나타나 거친 목소리로 소설을 읊어대는 지금은 예외이다. 테러리스트의 성가신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꾸 정원에서 튕긴다.
    마음속 정원을 가꾸는 일은 한때의 유행이 아닌, 양생의 영속적인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마음속에 정원을 가꾼다는 게 누구에게나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은가락지, 화웨이의 환상 추진기가 나왔다. 전에 없던 필요는 전에 없던 디바이스를 낳고, 전에 없던 디바이스는 전에 없던 산업을 낳는다.
    “손가락을 사군자 붓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화웨이의 네 번째 순환 CEO가 무대에 올라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앞선 세 번째 순환 CEO는 마음의 화선지를 강조했다.
    “인간은 도구의 동물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정원을 마음속에 가꾸는 일이라 하더라도, 손에 원예용 전지가위를 들고 있지 않으면 어쩐지 불안한 게 인간입니다. 어쩌면 전지가위가 정원 가꾸기의 역사를 낳았는지도 모르죠.”
    순환 CEO가 손가락을 찍 긋자 허공에 매화가 피어났다. 그리고 난초가, 그 옆에 국화가, 끝으로 대나무 숲이 콘퍼런스 홀 천장에 나타났다. 그는 음미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숲을 훑는 바람소리가 청중의 가슴도 훑었다. 그의 오른뺨은 신상 히트 예감에 바르르 떨렸다.
    “많은 소비자가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정원을 가꾸는 것임에도, 그저 몇몇 기술적 어려움으로 오히려 마음의 불안이 커지기만 합니다.”
    청중 일부는 벌써부터 울기 시작했다. 청중은 언제 어디서나 잘 울었다. 무대에 가득한 사군자는 미리 촬영된 홀로그램 영상이었다. 정원은 카메라로 촬영할 수 없었다. 온전히 정원 주인 혼자 가꾸는 놀이였고,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으며, 어떻게도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놀이였다. 순환 CEO의 정원은 다만 신제품을 효과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신제품을 사용했을 경우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시각적으로 재현해 본 것일 뿐이었다.
    “우리는 인류에게 필요한 바를 물었고, 답을 얻었고, 할 일을 했습니다.”
    순환 CEO는 사군자를 그렸던 집게손가락을 치켰다.
    “여러분, 환상 추진기를 소개합니다. <소박한 정원 GS1>입니다.”
    허공에 당신의 정원 가꾸기에 힘을 더해 줍니다. 당신의 정원을 업그레이드해 줍니다. 라는 플래카드가 떴다. 신제품 발표회를 마치고 콘퍼런스 홀을 빠져나오며 청중들은 은가락지를 하나씩 받았다. 행사 진행요원이 수천 명의 집게손가락에 일일이 사이즈 프리 은가락지를 둘러 주었다. 청중들은 신나했다. 버려지는 은가락지는 하나도 없었다.
    일 년이 지나자 화웨이의 발표회 영상은 일억 뷰를 기록하는 인기 동영상이 됐고, 환상 추진기는 새로운 사업으로 자리 잡았고, <소박한 정원 GS1>는 신사업의 이브가 됐다. 이제 시민들은 은가락지를 하나씩 끼고 다니며 뜬금없이 손가락을 휘두르곤 한다.
    내 환상 추진기는 <소박한 정원 GS2>이다. 외양은 실처럼 가는 사이즈 프리 은가락지이다. 끼워져 있다는 표현보다는 둘러져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왜냐하면 치즈 스틱처럼 두꺼운 손가락에도 들어갈 정도로 기본 사이즈가 넉넉한데, 손가락에 끼우자마자 줄어들면서 손가락 두께에 알맞게 조절되기 때문이다. 붓거나 빠지거나 해서 손가락 굵기가 달라져도 사이즈가 변했다.
    나는 시민들의 손가락에서 은은하게,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치 수줍게 빛나는 은가락지를 본다.
    누구나 손가락에 <소박한 정원>을 두르고 다닌다.
    <소박한 정원>을 아무리 훑어봐도 전원을 켜고 끄는 온오프 스위치 하나 달려 있지 않다. 새 제품을 사도 박스에 매뉴얼도 제품보증서도 들어 있지 않다. 은가락지 안쪽에 14자리 시리얼 넘버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화웨이 회사 로고조차 없다. <소박한 정원>은 고장도 나지 않았다. 어떤 상태가 고장인지 알려지지도 않았다. 거의 유일하게 알려진 고장은 은가락지가 끊어졌다는 것인데, 일 년 안에 끊어지면 새 제품을 보내줬다.

 

    어쩌면 그저 알고도 속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퇴근해 집에 돌아와 씻고 잠시 누웠다가 주방으로 가 인스턴트 자장면을 끓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크린에서는 낭송이 계속됐다.

    …정원수들과 꽃들, 부식토들이 뿜어내는 어떤 악취가 정원과 아버지 몸에서 가득했다. 몇 개의 물웅덩이가 아버지의 정원을 반짝반짝거리는 볕들의 곰보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테러도 이만한 테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원치 않는 책이야, 그 책은 정말 내가 읽고 싶지 않다니까, 하고 원망스런 눈길을 아무리 보내도 중년 테러리스트는 꿈쩍도 않는다. 마지막 남은 면발 하나에 단무지 한 조각을 둘둘 말아 입에 넣을 때 뭔가 끔찍한 것을 봤다. 무언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화면 오른편에서 검은색 총구가 나타나 중년의 테러리스트를 향해 불을 뿜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흘긋, 소리 나는 쪽을 한번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는 화면 바깥으로 튕겨져 날아 나갔다.
    중년 테러리스트를 찍고 있던 카메라 렌즈에 그의 핏물이, 녹고 있는 고드름처럼 방울져 흘러내렸다.
    한 시간쯤 지나자 전체 방송 시스템이 복구가 됐다. 뉴스에서는 살인 장면이 그대로 방송된 사고에 대한 해설이 나왔다. 방송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집하거나 삭제할 수 없었다는 얘기였다. 결국 또 하나의 걸작 전쟁 포르노가 탄생했다.
    “전쟁은 전쟁이다. 사상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경찰국장이 뉴스 룸에 나와 프롬프터를 읽어 내렸다.

 

    나는 각성제를 사먹는 것보다 <소박한 정원>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뇌를 망가뜨리지도 않는다. 다들 은가락지를 두르고 나서 효과를 봤다고 난리이다. 어젯밤 심야토론 시간에도 <소박한 정원 GS3>에 감동한 임상치료사가 나와서 이렇게 간증을 했다.
    “소설 낭송 테러 사건을 보십시오. 견디기 힘드셨죠? 이 세계가 안전하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위험합니다. 사람을 안일하게 하고 경계를 늦추게 하죠. 하지만 우리가 젖먹이였을 적, 우리를 보살펴 주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네, 엄마 말이죠. 우리는 양육자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을 쌓게 됩니다. 안전한 세계에 대한 근원적이고 지속적인 느낌이랄까요, 그런 게 생깁니다. 우리는 그런 느낌을 통해 이 불안정한 세계에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임상치료사는 좌우 패널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는 말을 이었다.
    “엄마가 나를 보살펴 준다는 생애 초기의 느낌은 삶을 긍정적으로 살게끔 합니다. 에러 없는 세계, 믿을 만한 세계. 우리는 종교가 있든 없든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의 질서를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자가 오른손을 살짝 치켰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엄마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겠죠.”
    그러자 스튜디오 안에서 잔잔하게 웃음소리가 흘러 다녔다.
    “그런 엄마가 어디 있겠어요, 아이 참.”
    누군가 부끄러워하며 중얼거렸다.
    “저희 어머니는 우리 쌍둥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공방에서 도자기만 구우셨죠. 언젠가 우리 형제 얼굴이 들어간 쌍둥이 도자기도 구우셨는데, 그게 우리 얼굴이 아니었거든요. 언제 봤어야 굽지.”
    토론에 나온 패널 한 명이 낄낄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 정원 가꾸기가 각성제나 신경안정제의 다른 말일 가능성은 없는지 물었지만 엄마 이슈에 묻혀버렸다.
    “아무도 엄마를 안 하려고 해요. 아무래도 어렵고 더럽고 위험하다 보니.”
    다시 임상치료사가 나왔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원의 존재가 더욱 소중한 겁니다. 현실의 엄마가 주지 못하는 많은 것을 우리는 정원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정원 안에서 엄마를 가꾸게 됩니다.”
결론을 낼 차례가 되었을 때 패널 한 명이 자신의 결론 끝에 조그맣게 “정원은 무슨. 망상이지, 정신 나간 놈들.” 하고 덧붙였다.

 

    인간이 내놓지 못하는 해결책이란 없다. 보살펴 줄 엄마가 없다면, 은가락지를 아기의 손가락에 둘러 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잘 시간이 되어 스크린을 끄고 이불을 끌어올리며 동시에 정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냐, 그래, 틀렸어, 맞다니까, 를 긍정과 부정을 영원히 반복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사랑채 어디쯤에서 흘러나왔다. 논문 쓰는 방을 또 옮긴 모양이었다. 죽은 테러리스트가 읽은 소설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라는 표현이 나왔다. 아빠의 그래, 안 그래, 소리가 가을밤 풀벌레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긍정과 부정의 풀벌레 소리에 자꾸 잠이 왔다.
    “엄마, 내가 엄마를 잘 가꿀 수 있을까?”
    “만져 봐서 흙이 보송보송하면 물을 주고, 이파리가 어쩐지 힘이 없으면 영양제를 놔주면 되는 거야.”
    “그러면 엄마도 나를 잘 보살펴 줄 거야?”
    “내가 날마다 우리 아들한테 물을 주는 거 몰라?”
    나는 생각해 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아빠도 잘 지내시겠지? 속 안 썩이고?”
    엄마는 웃기만 하고 더는 말이 없다. 나는 나 자신과 다섯 문장 이상 대화 나누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죽은 아빠는 지금도 골방에 앉아 중얼거린다. 나는 정원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정원보다 더 깊숙한 곳, 죽은 엄마 품보다 더 깊숙한 곳으로 빠져 들어간다.

 

 

 

 

 

 

 

 

 

배민석
작가소개 / 백민석

– 71년 서울 출생. 1995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단편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 『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 『러셔』, 『죽은 올빼미 농장』, 『공포의 세기』가 있다.

 

   《문장웹진 2017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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