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외 1편

[창작시]

 

 

 

 


   이유 없이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마음 한구석이 부서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끝없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이 부서지면 이상한 곳으로 질주할 것 같아 마음을 다 내놓을 때가 있다. 세상이 너무 커다란 구멍 속으로 사라져 뒤쫓아 통과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아 책장을 넘길 때가 있다. 누구에게도 화내고 싶지 않아 아주 먼 언덕으로 도망간 적 있다. 아무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 언덕에서 굴러떨어진 적 있다. 떨어져 맨홀 속으로 들어간 적 있다. 뚜껑이 잘 닫히지 않아 다시 닫으러 올라간 적 있다. 어둠 기둥 속에 서서 끝없는 구멍을 내려다본 적 있다. 먼저 떨어뜨려 본 발바닥이 종잇장처럼 날아다니는 것을 본적 있다. 발 딛지 못한 곳에서 흐르는 물소리 들려온 적 있다.

 

 

 

 

 

 

 

 

 

 

*김오순

– 이모는 외출 중

 

 

 

 


   “긍게 아부지가 내 승질을 알고 순하게 살아라 순할 순자를 지어 줬는개벼. 지금도 내가 승질이 나믄 물불을 모르자녀.”


   1958년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에서 아버지 김영철(1914년생)과 엄마 문수자(1930년생) 사이 4남 3녀 중 둘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1961년(4세) 남동생 김종덕이 태어났다.


   1963년(6세) 여동생 김동순이 태어났다.


   1965년(8세) 밭일 나간 어머니 대신 집안일하고 동생들 돌보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도사처럼 하얀 도복 차림에 두건을 쓰고 상투를 틀고 다녔다. 동네 사람들이 ‘빗자루 부대’라 불렀다. 온 집안 식구가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 신앙이 깊었다.


   1968년(11세) 남동생 김종열이 태어났다.


   1970년(13세) 남동생 김종근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종교 생활을 그만두었다.


   1971년(14세) 나무하러 간 동생 종덕과 동순을 데리러 간 뒷산에서 돌을 굴리고 앉아 있는 산신령을 보았다. 이맘때부터 신이 보여 자리에서 쓰러졌다. 어머니 등에 업혀 몇 차례나 아랫동네로 쫓아 내려갔다. 만신 앞에 놓여 살풀이를 받고서야 겨우 살아났다. 학교를 다니고 있던 동순으로부터 한글을 배우다 중도 포기했다.


   1973년(16세) 막내 여동생 김종님이 태어났다. 10월 17일 생일날은 가을걷이 끝날 때라 집에 먹을 것이 많았다. 배부르게 생일 밥을 지어 먹은 아침, 신이 나서 아랫마을에 놀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렸다. 아버지와 큰오빠 종문이 지팡이를 짚고 온 동네를 다니며 찾고 있다는 소식을 동네 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잡히면 맞을까 두려워 친구 집에 있던 고구마 쌓인 대나무 바구니 뒤에 한참 숨어 있었다. 해가 지고 집에 돌아가려 산에 올랐으나 밤중에 또다시 길을 잃고 말았다. 다 찢어진 옷을 입고 헤매다 모르는 집 문을 두드려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했다. 금방 돌아가려 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옆 동네에 결혼 못한 사촌동생이 있다고 소개시켜 주겠다 나서며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고 붙잡았다.


   1974년(17세) 딸 정숙을 낳았다. 가족들 볼 낯이 없어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시아버지가 집을 찾아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린 것을 집으로 보내지 왜 함부로 데리고 있었냐며 불같이 성을 냈다는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도 용서하지 못했다.


   1977년(20세) 아들 정상을 낳았다.


   1979년(22세) 딸 정남을 낳았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핍박을 많이 받았다. 동료 도움을 받아 이 악물고 두 달간 한글을 배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983년(26세) 서울 중곡동에 자리 잡은 네 식구가 빠듯하게 살았다. 공장, 식당, 아파트 공사판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남편은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으나 술만 먹으면 난폭해져 같이 살기 힘들었다. 어느 날 여동생 동순이 어렵게 주소를 얻어 집으로 찾아왔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서울까지 와서 사는 꼴이 이게 뭐냐며 펑펑 울던 동순이는 하룻밤도 자지 않고 갔다.


   1984년(27세)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동순이 집으로 피신 갔다. 남편이 찾으러 왔으나 동순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돌아간 남편은 평생 이혼해 주지 않았다.


   1985년(28세) 이종필 사이에서 아들 해원을 낳았다. 서울 중곡동, 면목동, 상봉동 등지 단층집에 살았다. 어렵게 배운 한글을 잊어버리는 게 아까워 새벽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 골방에서 한 이십 분인가 울면서 주님 찾으면서 기도를 막 하는데 뭣이 오냐면 회오리여. 회오리바람이 싸고 들어오는 거여. 물줄기 같은 것이. 글더니 찬송가 책 130, 144페이진가 그려. 그 책이 저절로 막 넘어가는 거여. 책을 다시 탁 여니까 그담부터 술술 읽어지는 거여?! 그 참에 아침에 목사님한티 가서 얘기하니까 아이고 김오순 자매님 은혜 받았다고 그려. 근데 성경책을 읽을라믄 안 읽어지는 거여. 페이지도 안 찾아지고 (…)나도 하도 안 돼 가꼬 인쟈 서울 미아리 가서 공수를 물어봉게 경상도 보살이 팍마 문디 가시나 패지기뿔라 그려. 왜 그렇게 욕을 하시냐고 그랬더니 너는 빨리 이 길로 가야 된다 그려. 글도 모르는디 내가 어떻게 가요, 보살님은 책도 다 읽고 글씨도 쓰는구만요, 그랬더만 팍마 패 지기뿔라 마, 니가 하나? 그럼 뉘가 하는디유, 신에서 갈켜 주지 문디 가시나 마! 그려.”


   1989년(32세) 서울에서 호프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1994년(37세) 익산 큰오빠 집에서 아버지가 눈을 감았다. 26살 된 딸 정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 이종필이 사망했다. 아들 해원이 9살 되던 해였다.


   1995년(38세) 28살 된 남동생 종열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9년(42세) 쉬는 날 고모집에 놀러 갔던 엄마가 급작스레 돌아가셨다. 제때 풀지 못한 신병이 격해져 온몸을 떨었다. 몇 달 앞서 만신이 된 막내 여동생 종님을 따라 경기도 안산으로 갔다. 소개받은 신엄마를 만나 내림굿을 받았다.


   2000년(43세) 여동생 동순의 권유로 법당에 나가기도 했으나 기도할라치면 몸에 신들이 완강히 거부했다. 백일기도를 위해 고향 장수로 내려갔다.


   “내가 애기 때 태어난 장수를 갔어. 거길 가서 인쟈 동서남북 인사를 하는디 별이 해 지는 쪽으로 요만하다가 갑자기 크으으은 달로 변하더니 뾰쪽뾰쪽한 모자를 쓰고 책을 딱 보여주는 거야. 같이 간 보살헌티 해지는 쪽에 별을 쳐다보면 뭘로 보여요, 별이 별로 보이지 뭘로 보여, 아니 나는 별이 갑자기 큰 달로 변했는디 달 속에 할아버지가 들었어, 그랬더니 아이고, 월광신을 받으라고 그러는 거야. 할아버지 가신다 할아버지 가신다, 할아버지 어디 앉으실래요, 그랬더니 좌측 편에 앉는다 그러더라고. 그 할아버지 모셔 놓고 불교사 가서 경문책을 샀어. 사 갖고 3일 딱 되니까 다 읽어지는겨. 그래 가꼬 그놈으로 일했자녀.”


   2002년(45세) 큰오빠 종문과 올케언니, 두 여동생의 제부들과 파주와 횡성 등 신축아파트에 타일 메지 작업을 하러 다녔다. 아들 해원과 떨어져 전주에서 신당을 차렸다.


   2009년(52세) 선미촌 건너 동네에 살았다. 아들 해원이가 훗날 아내가 될 여자친구 강현주를 데려와 처음 보았다.


   2013년(56세) 이맘쯤 선미촌 한복판 골목길에 5년쯤 살다가 바로 옆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7년(60세) 아들 해원과 며느리 현주가 10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선미촌에 도착한 대절버스에 동네 지인들 10명쯤 태우고 서울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폐백 때 대추를 던져 주며 싸우지 말고 잘살아라, 했다. 명절 때마다 아들 내외가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와서 자고 갔다.


   2018년(61세) 9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탔다. 아들 부부와 사돈댁 손잡고 간 2박 3일 제주도 환갑여행이었다. 12월에는 한참 비어 있던 옆집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작은 서점을 차렸다. 매일 들러서 커피 타다 주면 먹고, 결혼했는지도 묻고,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하면서 얼굴을 익혔다. 종종 손금을 봐주다가 관상도 말해 주고 어떤 조상신이 지켜주고 있는지 알려주기도 했다.


   “여그가 말하자면 물터여 물터. 동초등학교 그쪽부터가 물왕멀이야. 쩌쪽 집에 물이 돌아 흘러 내려 가. 여그서 한 집, 두 집, 네 집 가운데 물 내려가. 우리만 단체로 노는 것이 아니라 이 터에 먹을 것을 먼저 드리고 우리가 먹어야 혀. 내가 항상 오동나무 저짝에다가 초하룻날, 초삿날, 명절날 항상 과일하고 떡허고 막걸리허고 갖다 바쳤었거든.”


   2019년(62세) ‘만신 김오순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서점에서 강연했다. 바닥에 앉아 포스터 그림도 직접 그리고 오랜만에 깨끗한 옷도 꺼내 입었다. 관객 중 한 명이 몇 명의 신을 모시고 있냐고 물어오기에, 일곱 분 중에 다섯 살 먹은 아들도 있고 세 살 먹어서 간 여동생도 있다고 말해 주었다. 40분쯤 이야기하다 영도 오고 눈물도 나서 말했다. “이제 그만 하믄 안 되까?”


   2021년(64세) 딸과 똑같은 손금을 가진 젊은 친구를 보면 붙잡고 눈물을 쏟았다. 2월 마지막 주엔 서울로 올라가 아들네랑 사돈댁이랑 도란도란 식사를 했다. 키우던 강아지 복덩이와 고양이 복순이는 여전히 사이가 좋았다.


   3월 5일 낮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초저녁 거리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다. 예수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으나 이튿날 새벽 5시경 숨을 거뒀다. 8일 오전 9시 30분 발인 후 전주승화원으로 옮겨진 뒤 불상에 들어갔다. 장례 후 아들 해원이가 집을 찾아 강아지 복덩이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3월 21일 아침 남동생 종근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집을 비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하는 사람 3명이 달라붙어 방마다 끝없이 나오는 물건을 마대에 담았다. 작은 포클레인이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와 싣고 나르기를 반복했다. 신당에는 아들과 며느리 이름과 생일이 적힌 종이가 달려 있었고 종근이 선물로 준 한지 항아리가 한쪽에 놓여 있었다.


   3월 23일 오후 막내 여동생 종님이 환송굿을 하고 갔다.


   5월 햇살 비치던 날 빈집에 남겨진 고양이 복순이가 새끼 네 마리를 낳았다.

 

   *  안도현 시 「임홍교 여사 약전」 형식을 빌려옴.

 

 

 

 

 

 

 

 

 

작가소개 / 임주아

201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전주 선미촌에서 창작자 동료들과 서점 〈물결서사〉를 운영하고 있다.

 

   《문장웹진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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