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

[단편소설]

 

 

낙산

 

 

강영숙

 

 

    철진과 나는 병원에서 나와 골목길에 세워 둔 자동차를 탔다. 앞좌석 문을 열어 주는 철진의 배려를 무시하고 나는 굳이 뒷자리로 가 앉았다. 철진은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차를 몰았다. 옷가게 앞 일자 행거에 걸린 분홍색 잠옷바지, 난전 위에 탑처럼 쌓아올린 귤 바구니, 중고 가구점 앞에 놓은 콘솔이며 수납장, 의자와 소파 따위가 지나갔다. 서울이지만 동네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이곳으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바짝 마른 입술을 물고 창밖을 내다봤다. 자동차가 골목을 벗어나 큰 도로에 접어들 때까지 여러 차례 보도 턱을 넘었고 그럴 때마다 속이 미식거려 토할 것 같았다. “아직도 그 향수 써?” 철진에게 물었다. 철진은 키엘에서 파는 갈색 병에 든 머스크 향의 향수를 썼다. 병원에서부터 따라온 약 냄새가 차 안에 퍼졌다. 약 냄새가 철진의 향수 냄새와 뒤섞인 순간 토할 것 같아 차를 세워 달라고 말했다. 철진은 비상등을 켠 채 길가에 차를 세웠고 나는 문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뺨에 닿는 바람이 놀랍도록 차가웠고 하늘에선 커다란 눈송이가 휴지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벌써 12월의 절반이 갔고 올해도 역시 별 성과도 없이 임신중절 수술로 한 해의 끝을 특별하게 장식하는 중이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빨리 가자.” 나는 차 문을 닫으며 철진에게 말했고 철진은 빠르게 차선을 바꾸고 속도를 냈다.
    오늘따라 원룸에 이상하게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철진은 보일러 밸브를 올리고 전기매트를 켜고 나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딱딱 소리를 내며 이빨이 떨릴 정도로 집 안 공기가 싸늘했다. 아무리 몸에 힘을 주려고 해도 힘이 잘 주어지지 않았다. “죽 좀 사올게. 누워 있어.” 철진은 이불자락을 끌어 입술까지 올려 덮어 주고는 나를 잠깐 내려다본 뒤 방을 나갔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한참만에야 눈을 떴다. 한쪽으로 머리가 눌리는 것 같아 머리 방향을 바꾸려다가 토하고 말았다. 짙은 노란 색깔의 위액이 베개 위에 선명하게 남았다. 유자차 색깔과 지독한 약 냄새는 몇 시간 전의 모든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부장님이 찾아서…… 이따 죽 사가지고 다시 올게.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해. 미안해.’ 소심한 철진은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메시지에 겁을 잔뜩 먹은 게 느껴졌다.
    꽤 오랜 동안 철진과 나는 연인이었고 지금도 아직 헤어지지는 않았다. 철진을 떠올리면 해가 든 방 한가운데 놓인 따뜻하고 환한 공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만일 땅 끝이라고 할 만한 곳에 닿게 된다면 꼭 철진과 함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우리가 바라보는 그 끝에서는 푸른빛이 절벽처럼 쏟아질 거라고 믿곤 했다. 나는 생의 어떤 결단을 내리는 일에서 도망쳤다. 그냥 공부가 더 하고 싶다고 말해버렸고 철진은 아직 아버지가 될 용기가 없다고 말했다. 그날 아기를 없애기로 했던 날 마셨던 스타벅스의 호지티 라떼는 살아 있는 동안은 다시는 마시지 않을 작정이다. 나는 종이 회사의 디자이너. 철진은 무역회사 영업부 직원. 아기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둘의 연봉을 합치면 최소한 굶지는 않을 테고, 십 년쯤 지나면 낡은 빌라 정도는 전세로 얻게 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철진은 결혼 생활을 시작할 토대가 약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자기개발과 육아라는 이중구속 상태가 부담스러울 거고, 결국 어렵게 될 거라는 이유를 댔다. 장소를 바꿔 얘기를 해도 결론은 늘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망설였다. 종이 패턴이나 디자인하는 주제에 무슨 자기 개발이 더 필요하냐고 하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원하지 않는 아이는 낳기 싫었다. 그렇다면 오늘 같은 날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누군가 몇 차례 연이어 현관 벨을 눌러댔다. 아랫배는 바람 든 비닐이라도 든 것처럼 벙벙하게 부풀어 있고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아려 두 손으로 감싼 채 밖으로 나갔다. 정장에 플랫슈즈를 신은 여자가 안경을 쓰고 백 팩을 멘 여자와 함께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집 좀 보러 왔습니다. 낙산부동산에 집 내놓으셨죠?” 한 삼 개월쯤 전에 부동산에 집을 내놓은 걸 잊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인데 삼 개월 전에 한 일을 잊어버리다니. 그날은 중국이 묵자라는 사상가의 이름을 딴 애칭을 붙여 인공위성을 발사한 날이었던 것 같다. 말이 대학로고 종로지 이곳은 평지로부터 한참 올라온, 낙산이 가까운 창신동의 절벽마을이었다. 한여름, 원룸에서 출발해 지하철역까지 걸어 내려가려면 몸에서 땀이 났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나 장마철에는 길이 험해 늘 지각을 했다. “가능하면 빨리 집을 빼고 싶어요.” 나는 비밀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부동산 중개사에게 주고 아무 때나, 자유로운 시간에 와서 집을 보라고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낙산 아래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도 없이 그냥 그랬다. 부동산 중개사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라며, 집을 보러 온 사람을 데리고 갔다. 이 추운 계절에 맨다리가 드러난 것 같은 살색 스타킹은 좀 심하지 않나, 나는 또 이를 달달 떨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 위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커피를 마시던 습관조차도 제대로 이어 가지 못할 정도로 위장이 불편했다. 계속되는 출혈로 신경이 곤두서고 날선 느낌이 지속됐다. 낮과 밤이 바뀌어 똑같은 뉴스를 반복해 보며 누워 있었고 한밤중에는 드라마만 보고도 눈물을 흘렸다. 철진은 업무 시간에도 자주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왔다. 낡은 월세 오피스텔이라도 얻어 결혼하고 함께 살기 시작했다면 모든 것이 나아졌을까. 어쩌면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잘 알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며칠 남지 않은 휴가 기간 안에 아기를 지운 일 따위를 깨끗하게 잊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어쨌든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기는 금세 사라지고 달라지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극장에라도 가야지! 그렇게 생각을 한 뒤 극장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하는 데만 꼬박 열두 시간이 걸렸다. 무슨 대단한 준비 때문이 아니라 갈까 말까 망설이는 데만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목이 긴 양말을 신었다가 목 짧은 양말을 신었다가 거울을 보며 한참을 앉아 있는 식이었다. 겨우 바깥으로 나와 쳐다본 창신동은 미세먼지에 휩싸여 절벽마을의 가파름이 뭉개져 보였고 낙산의 산세 또한 매우 부드럽게 보였다. 내가 사는 원룸이 커다란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진 벽화 계단이 있는 골목이 아니라 한 블록 옆 골목에 있어서 관광객들을 피할 수 있다는 게 행운일까. 벽화 계단 쪽은 벌써 관광객들로 시끄러웠다. 어쨌든 가끔 가던 대학로의 예술극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삭막하고, 매표소는 닫혀 있고, 마당에 엑스 자로 붉은 띠를 붙인 극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드나드는 사람이 없이 폐쇄된 것 같았다. 종로 3가의 시네마테크로 목적지를 바꾸기로 하고 늘 지나다녀도 지저분한 느낌만 있는 종로를 걸었다. 종로에는 움직이지 않고 길거리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게 늘 이상했다. 사람들의 잦은 발길로 실금조차 뭉개진 골목의 검은 길바닥이 혈관처럼 뻗어 있었다. 그래도 골목에 들어가면 늘 어떤 안정감을 주기는 하는 게 신기했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극장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깃발을 들고 선 가이드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는 아시아 관광객들로 골목은 막혀 있고, 극장 입구에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동그랗게 모여 서 있었다.
    쉼 호흡을 크게 하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지만 또 영화를 보지 않고 종로 3가 일대를 산책하는 것은 어떨까 상상했다. 오랜만에 광장시장 같은 델 가고 싶기도 했다. 빈대떡을 먹고 막걸리도 마시고 사람들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 뭐든 좀 나아질지도 몰랐다. 끝없이 이어진 시장 골목을 돌고 도는 것도 좋겠다. 오늘 상영할 영화는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라는 감독이 1982년에 만든,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던 미발표 다큐멘터리라고, 가벼운 백색 모조지에 인쇄한 작품 설명서에 적혀 있었다. 중앙을 텅 비운 촌스런 극장 내부와 키 큰 낙엽 활엽수 화분 몇 개가 전부인 조악한 인테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이곳에 오면 안정감을 느끼는 걸까. 모든 손님들이 단체로 다 잘못 들어와, 앞에 앉은 사람과 어색하게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커피숍은 어떻고. 천장이 낮고 변기가 헛도는 듯해 늘 불안한 화장실은 정말이지 이 극장의 빼놓을 수 없는 문제점. 그 모든 것을 모두 일별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영관으로 올라갔다. 상영관에서는 늘 쩨쩨함을 단번에 잊게 해주는 멋진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고, 너한텐 영화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하던 습관대로 오늘도 위로를 했다. 기억에 대한 흥미로운 탐색이라는 영화의 설명글처럼 영화는 복잡한 기억 속을 자유롭게 오가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웬걸, 상영관은 닫혀 있고 나는 매표소도 거치지 않고 그냥 지나쳐 올라온 것이었다. 심지어 포르투갈 영화제는 2016년 12월이 아닌 11월 프로그램이었고 하필 오늘은 아무런 영화 상영도 없는 날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내내 조물락거려 녹진해진 모리나가 캐러멜을 입 속에 넣었다. 단 걸로 비위를 조절해 토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누군가 내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여자화장실에 휴지 있나요?” 돌아보니 양복을 입은 남자가 곤란한 얼굴로 여자화장실 입구에 선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금은방 골목에 있는 분식집에 들어가서 김밥을 입에 넣고 최선을 다해 씹어 먹었다. 밥은 단물이 나올 때까지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고 했던 할머니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꼭 감은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가셨다. 입 속에 퍼지는 오래된 쌀 냄새가 쿰쿰하게 몸으로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난 힘든 일이 생기면 이상하게 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떠오르면 뭔가 힘든 것이었다. 김밥으로 부족했을까. 편의점으로 들어가 크림빵과 생수를 사들고 나왔다. 대학로까지 걸어가려면 꽤 멀었다. 모래주머니라도 있다면 양쪽 발목에 차고 걷거나 뭔가 잔뜩 등에 짐을 진 채 걷는다거나, 자신을 학대할 수 있는 도구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오랜만에 대학로 학림다방에 들어갔다. LP판이 있고 주홍색 조명이 은은하고 손때 묻은 나무 테이블이 있는 건 여전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철퍼덕 소리를 내며 소파에 앉았다. 사장님이 목례를 했고 나는 나달나달해진 메뉴판을 들춰보고 커피를 시켰다. 몇 안 되는 창가 자리에만 손님이 있었고 나머지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주방에 가까운 카운터 쪽 자리에 앉아 내 앞에 앉은 손님의 등 뒤를 봤다. 연보랏빛 스웨터를 입은 사람이 책을 읽고 있었다. ‘밥은 좀 먹니?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철진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이걸 위로라고, 무슨 종교인이야 미친놈!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철진은 임신중절이 몸보다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남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나는 왠지 철진이 싫지는 않았다. 철진은 나보다 12개월 4일 늦게 태어났는데, 한 살 위의 형과 늘 다투고 형을 질투하느라 어린 시절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느 날 말썽을 부려, 형의 친구가 필요했기에 동생인 너를 낳았다는 모욕적이고 어쩌면 결정적인 말을 부모로부터 들었고, 철진은 그때마다 형의 물건을 하나씩 망가뜨린다거나 형이 먹을 간식을 독차지함으로써 화를 풀었다고 했다. 철진의 아버지가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쓰러진 후 갑자기 사망하지 않았다면 철진은 결혼을 두려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철진은 혼자 된 엄마가 무선마이크와 무전기를 차고 고깃집에서 서빙 하는 모습을 봐야 했고, 생활비와 학원비가 모자라 늘 전화통을 붙들고 조용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철진은 내게 프로포즈 할 때 자신의 어릴 적 사진 한 장을 휴대폰으로 전송해 주었고 나는 그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원룸으로 와 바로 섹스 했다. 우리는 뭘 잘못한 걸까. 마음의 평정이라니, 철진은 유산을 하는 게 어떤 일인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우리는 각자 자신의 발등을 적신 흙탕물만 내려다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학로는 전처럼 활기가 있지 않은 지 오래였다. 술 마시러 나온 애들로 붐비지도 않았는데 유독 방송통신대 뒤쪽, 흰 외관을 한 높지 않은 건물 앞에만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옷가게와 피자가게가 있는 건물 2층에, 전에는 없었던 곳이 눈에 띄었고 두 건물 사이의 계단이 있는 입구에 코인 셀프 노래방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나는 삼십 분 이상, 줄을 선 채로 기다려야 했다. 이게 무슨 짓인지. 2층의 코인 노래방 문을 들어서자마자 종업원이 다가와 종이쿠폰 한 장과 캡에 든 마이크가 든 비닐봉지를 건네주었다. “빈 데 아무데나 들어가세요.” 방에는 기다란 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커다란 모니터가 벽 중앙에, 동전을 넣는 기계가 벽 아래쪽에 붙어 있었다. 방음이라고는 전혀 되지 않는지 옆방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는 물론 허밍에 콧소리로 부르는 노래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5백 원짜리 동전을 하나 넣고 노래책을 뒤적이기 시작, 하지만 뭐 딱히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커다란 창으로 대학로의 서울대학병원과 방통대 주변이 내다보였다. 반짝거리는 조명이 창틀을 따라 반복적으로 돌며 켜졌다 꺼졌다. 어떤 노래를 하나 골라 번호를 누르자 멜로디가 나왔다. 노래방에 가면 친구들과 자주 부르던 노래였는데 왠지 멜로디조차도 생소했다. 다시 5백 원을 넣고 또 다른 노래 제목을 찾아 번호를 눌렀다. 이번엔 영어로 된 노래였다. 그러나 역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냥 의자에 가만히 앉아 옆방에서 들리는 노래를 들을 뿐이었다. 어쩌면 코인 노래방에 들어온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왠지 코인 노래방에 자주 오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밖으로 나와서도 2층의 각이 진 작은 창들과 원색 불빛을 올려다봤다.
    현관에 화장실, 왼쪽 벽면에 옷장, 그리고 침대, 침대 안쪽 창 아래 티브이와 수납장이 다인 꼴깍만 한 작은 원룸이고, 훔쳐갈 것이라고는 없는 집이지만 현관문이 열려 있고 부동산 사무실 직원과 한 남자가 방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별로였다. “낙산이 뒤에 있어서 좋고 지금은 밤이라 별로지만 원룸치고는 해가 잘 들어요.” 부동산 중개사의 목소리를 듣고는 들어갈까 말까, 지나가는 사람처럼 그냥 지나갈까 망설이다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막상 집을 보러 온 사람을 만나자 서울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소음은 없나요?” 집을 구하러 온 남자가 내 쪽을 보고 물었다. “소음요, 조금 있죠.” 나는 옆방의 중국 대학생들이 아무 때나, 미친 듯이 대륙적인 기질을 한껏 발휘하며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는 걸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처음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원룸에는 인근의 성균관대나 성신여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자취를 많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생들은 없어지고 중국인 관광객이 묵는 일일 게스트하우스가 되어 가거나 장기 투숙객들을 받는 홈스테이 장소가 되어 갔다. 두 사람이 돌아가고 현관문을 닫아걸었다. 너무 오래 걸은 탓인지 배가 아프고 머리가 무거웠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말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몸 여기저기서 통증이 느껴졌다. 평생 생리를 할 것처럼 배가 아프고 내 몸에서 떨어진 입자들, 피, 살점, 기름기 같은 것들이 내가 디자인한 흰 종이 위에 박혀 눈앞에서 펄럭거리는 것만 같았다. 후유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컸다. 이제 금요일과 토요일과 일요일을 지나면 다시 회사에 출근해야 했고, 멀쩡하게 길도 오가야 했고, 앞으로 사람 노릇 하고 잘 지내려면 똑부러지게 회사일도 잘하고 잘살아야 하는데, 그 어떤 것도 잘할 자신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노래방 쿠폰을 자세히 읽어보니 낮 시간에 가면 두 곡이 무료였다. 다음번에 꼭 다시 가봐야지, 나는 결심했다. 이것도 행운이라면 행운 아닌가. 나는 용기를 내어 조금 전에 돌아간 부동산 사무실의 중개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하지만 집 안 내놓겠습니다. 마음이 바뀐 것 같아요.”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철진이 종이 박스에 든 홍삼즙을 들고 와서는 현관에 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유기농을 좋아하는 날 위해서 생협에서 샀다며 말이 많았다. 회사 동료가 내가 디자인하던 패턴 파일을 급히 보내달라고 해서 웹하드에 올리던 참이었다. 어디선가 또 새로운 발주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니가 아니어도 신제품 디자인은 계속된다는, 나쁜 신호처럼 느껴졌다. 비교적 조용하던 옆집의 중국 청년마저도 뭔가 화가 났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걸었다. 한 마디 한 마디 청년의 말이 끝날 때마다 나는 중얼거렸다. “아버지 나 돈 없어. 돈 없다니까. 제발 돈 좀 보내 주라. 한국은 진짜 좋아 아버지도 와봐. 명동에 가봐요 우리. 그러니까 돈 좀 보내 줘.” 언어감각 있는 내가 듣기에 그런 말이 틀림없었다. “아 자식 열나 시끄럽네.” 철진은 한 손으로 벽을 때리고 밖으로 나갔다.
    베트남쌀국수를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참 밀리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손님이 많기도 했고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아 조용히 먹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잔을 놓고 간 종업원은 주문 벨을 눌러도 오지 않았고 베이비 테이블에 앉은 한 아기가 죽을 듯이 울어대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광객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이를 보살필 겨를이 없을 정도로 할 얘기가 많아 보였다. 나는 짜증이 났고 뭔가 억울하고 말할 수 없이 분해서 철진에게 화풀이를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헤어져.” 나는 철진에게 말하고 쌀국수집에서 나왔다. 현관에 붙어 있던 시급 8천 원, 특별대우라는 안내문이 내내 머리에 남았다. 제지회사에서 잘리면 시도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
    철진과 헤어지고 갈 데가 없어 또다시 학림다방에 앉아 있었다. 사장은 내게 목례를 했고 뜨겁고 진한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가을에 쏘아올린 중국의 양자 위성 소식이 모니터 아래 뉴스에 떴다. 중국은 뭐든 다 잘 되어 가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상하게 어깨가 떨리고 추웠다. 흰 설탕 두 봉지를 찢어 커피에 넣었다. 밥을 먹지 않고 마시는 뜨거운 설탕 커피는 충분히 긴장을 완화시켰다. 뭔가 계속해서 길고 날카로운 꼬챙이가 질 속을 헤집는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몸의 자세를 바꿔도, 마음을 밝게 가지려고 해도 꼬챙이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꼬챙이는 결국 몸 안으로 들어와 머릿속까지 닿을 지경이었다. 나는 누군가 내 앞에 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한 여자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주짓수에 관심 없으세요?”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에 비친 그림자는 그러고도 계속 내 옆에 서 있다가 몇 초 후에 사라졌다. 그런데 정말 주짓수는 뭘까, 아는 게 이렇게 없어서 어쩌나, 궁금해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코인 노래방의 두 곡 무료는 오후 다섯 시까지였다. 한가할 줄 알았던 노래방은 수능이 끝난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로 빈 방이 없어 보였다. 나는 카운터 앞 빈 의자에 앉아 빈 방이 나길 기다렸다. 자동문이 수시로 열리고 닫히며 사람들이 들어와 전단지를 주고 나갔다. “너 뒤질래?” 여학생들이 방문을 세게 열고 닫고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방이 배정되고, 쿠폰을 사용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종업원을 불러야 했다. 종업원은 내가 건네준 쿠폰을 받고는 또 쿠폰 한 장을 갖다 주었다. 물론 노래 두 곡은 당연히 무료였다. 오늘은 영어 노래 같은 걸 불러 볼 생각이었다. 남의 나라 언어로 지껄이는 게 좀 덜 감상적일 테니까. 그러나 우리 노래든 남의 노래든 지금은 노래를 부르기가 어려웠다. 코인 노래방은 역시 고등학생들에게나 유용한 장소였다. 오늘도 두 곡 모두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동남아 관광객이 많아져 이화벽화마을과 낙산공원에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된 안내장이 붙을 정도였다. 벽화마을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관광객들 소음과 아무 때나 집 대문을 밀고 들어오는 관광객들 때문에 불편함을 호소했다. 낙산 성곽길에서 내려온 관광객들이 이화장 앞 공터에 모여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손에는 쇼핑한 가방들이 한둘씩은 들려 있고, 대형 관광버스가 이화장 앞을 크게 돌아 육중한 차 문을 연 뒤 그들을 실어갔다.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늘 열심히 걸어 올라가도 멀게만 느껴지는 집. 막 성곽을 따라 불이 켜지는 중이었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관광객들처럼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 갈 자격이라도 있는지, 스스로에게 상을 줄 만한 이유가 있는지 갑자기 또 자학 모드가 되었다. 원룸 건물 입구에도, 현관 우체통 안에도 전단지투성이였다. 손님이 뜸한 창신동의 매운 족발 가게들이 집집마다 전단지를 붙여 놓고 간 것이다. 배가 고파 전화로 족발을 주문했다. 매운 족발이니까 매운 게 당연했지만 너무 매워서 눈물이 나왔다. “어떻게 족발을 이렇게 만들 수가 있냐고?” 나도 오랜만에 말수가 많아졌고 혼자서 소주를 여러 잔 마셨다. 옆방 중국 학생한테, 너도 한번 소음에 시달려 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술김에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연말까지 계속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휴가는 이틀 후면 끝이었다.
    미장원에 들렀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미장원이어서 발을 넣기가 무서웠다. “어서 와 학생, 잘살다 왔어?” 카리스마 넘치는 미용실 원장님의 말에 그만 발을 넣고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너무 낡고, 오는 손님들은 모두 할머니들이고 원장조차도 칠십대 노인이었다. 주로 홍대로 머리를 하러 다녔지만 출근 전에 머리를 정리하고 싶었다. 작은 텔레비전이 켜져 있고 베트남에서 왔다는 이십대 초반의 종업원이 안 되는 한국말로 열심히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다. 할머니들은 머리를 만 채로 떡이나 귤을 까먹으며 수다를 떨었고, 집으로 갈 때는 베트남에서 온 학생에게 천 원짜리 몇 장을 팁으로 주었다. 헤어컬러를 하고 머리를 조금 다듬는 데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할머니들은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시끄러워 못 살겠다고 투덜거렸다. 관광객들이 많이 와봐야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좋지 실제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면서 옛날이 좋았다고 했다. “벽화마을에 있는 커피 가게는 하루 매상이 몇 백만 원이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면 좋지 뭘 그래. 여기 언제 누가 오기나 했었나.” 할머니들은 동네 얘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신문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앉아서 졸거나 아예 파마를 만 채로 옆으로 누워 자거나, 미장원은 노인 천국이었다. 한 이십 년 후면 나도 저들처럼 늙어 가는 인간이 될 터였다. 저들보다 나을 가능성도 없었다. 속 터진 소파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다 나왔는데 어느새 깜깜한 밤이었다. “잘살다 오세요.” 원장이 내 등 뒤에다 대고 한 말을 수첩에 적어 두고 싶었다. 하지만 또 오고 싶지는 않았다.
    벽화마을 계단 아래 천막을 치고 사주를 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렇다고 굳이 좁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누르고 누르던 감정을 폭발할 길이 없었던 건지도 몰랐다. 급기야 슈퍼마켓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검은 봉지 안에 이름도 모르는 맥주며 소주를 집어넣고는 계산대로 갔다. 술이 그나마 값싼 위안이 된 건 오래 전부터였다. 먹다 남긴 매운 족발을 레인지에 돌려 데워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용감해졌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학대도 이젠 그만, 나는 관대해지고 싶었다. 친구들이 개장수 모자라고 부르는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낙산공원으로 올라갔다. 하마터면 무릎이 꺾여 대형사고가 날 뻔했지만 발달된 순발력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어느 집 계단에 떨어진 뭉개진 아이스크림을 밟고 미끄러질 뻔하기도 했다. 벽화마을은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 천지였다. 날씨가 추운데 우리 동네에, 한밤중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는 게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한복을 아래위로 입고 드라마에 나오는 옛날 말투를 해대는 젊은 커플들은 뭔가. 미친 사람들 같았다. 옆 골목의 포장마차는 성업 중, 맥주나 막걸리를 파는 주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만날 출근했다 퇴근해 자고, 다음날 다시 출근하는 일상 속에만 있던 나로서는 신천지 같았다. 낙산에 올라가 본 대학로나 서울은 그저 작은, 아주 작은 스노볼 만도 못한 그런 크기로 다가왔다. 그때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는 저쪽 벤치에 앉은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세 명쯤, 어깨에 손을 얹고 낙산 아래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민주주의여 만세.” 도대체 이게 언제 부르던 노래인가. 아이들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80년대 생인 나도 안 부르던 노래였다. “코인 노래방 가서 노래 연습 좀 해요!” 나는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말하려다가 말았다. 애들은 계속해서 후렴구만 반복해 불러댔다.
    낙산공원에 다녀왔을 뿐인데, 도대체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 몸은 붉은색 멍투성이였고 왼쪽 손등이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약을 사러 창신동 골목으로 내려갔다. 창신동과 숭인동은 급속하게 변하는 중이었다. 전태일 재단 건물을 지나 시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봉제공장을 리모델링한 한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 홍보 배너가 보였다. 약국에 들러 약을 사고 검은 비닐봉지를 든 채 갤러리로 갔다. 갤러리는 전깃줄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창신시장 골목을 벗어난 곳에 마름모꼴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원래 봉제공장이었던 두 곳을 터서 만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미국 여행을 해보지 않았지만 갤러리에는 미국의 풍경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이 별로 재미가 없어 바깥으로 나오려다가 입구에 암막커튼이 가려진 동영상 상영 장소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알파벳 L로 시작하는 미국 동부의 어느 지역 사진들을 찍으며 동영상 기록도 함께 남겼다. 미국의 가난이나 소외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옛날부터 아주 많이 본 사진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 밖 한 발짝만 나가면 창신동도 여기 걸린 미국 사진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조금도 낫지 않았다. 작가가 창신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제 창신동 작업을 이어 갈 거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작가를 만나 보고 싶었다. 조금 후면 작가가 나와 대화를 하는 시간이 있다고 해서 미국 사진들을 더 보며 시간을 보냈다.
    작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내 또래이거나 더 아래로 보였는데, 초록색 스웨터에 귀여운 모자를 쓰고 관객들 앞으로 나왔다. 관객은 총 세 명뿐이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인류학자를 만났는데 함께 그 사람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어요. 그분은 아주 맑고 투명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는데 제가 좀 특이한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 친구가 하는 여행사에 기존 여행 상품과 다른 코스가 많다며 웹사이트 하나를 추천했어요. 그 여행 상품은 주로 1박 2일 동안이거나 2박 3일 동안 가는 건데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공장 지대 같은 곳을 돌아보는 여행 상품이었어요. 하룻밤을 자고 공장을 돌아보는 데 총 300불에서 500불까지 다양했어요. 물론 그 돈에는 숙박비와 헬멧 대여료, 간단한 여행보험료도 들어 있었죠. 저는 그때부터 버려진 지대를 여행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왠지 상실감이랄까, 어떤,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감정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작가의 얘기를 들으며 점점 기분이 오묘해지기 시작했다. 난 사실 별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작가가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지만 않기를 바랐다. 아니, 그 여행팀이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그때 작가가 내 앞으로 다가와 전단지를 내밀며 말했다. “저랑 같이 창신 지구 여행팀 하지 않으실래요?”
    어쨌든 그 여자 때문에 나는 즉흥적으로 창신 지구를 돌아다니는 주말 여행팀 멤버에 회원 신청을 하고 말았다. 살고 있는 동네를 탐사하는 여행팀에 들어가는 바보가 또 있을까. 하지만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작가가 잠깐 자리를 비우고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한 남자가 여행팀 인솔자라며 나와 인사를 했다. 나는 남자가 얘기를 하는 동안 찢어지지 않는 종이로 만든 명함 테두리를 오래도록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얘기를 할 때마다 두 팔을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남자와 여자는 창신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화동 벽화마을, 창신동 시장 골목, 낙산의 사계절을 사진이나 다른 기록으로 남기는 프로젝트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그들은 또 여기를 사진으로 찍어 지구 반대편에 가 전시를 하겠다는 거였다. 그게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내 정신 상태가 안 좋기도 했지만 과연 그게 옳은 일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든 뭔가 하기는 해야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널브러진 나 같은 인간보다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이어서 좋았다.
   늦은 오후에 철진이 왔다. 이젠 둘 다 힘이 빠져서 말할 기운도 없었다. 철진과 나는 침대에 누워 벽 쪽을 향한 채 같이 누워 있었다. 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둘 다 정신없이 잤고 일어나서 라면을 끓여먹었다.
    한밤중. 창신동 주민 한 사람이 잠이 들지 않아 긴 패딩을 입고 모자를 쓰고 낙산 아래 버려진 건물 앞을 지나 최근 새로 생긴 게스트하우스 앞을 지나치는 중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창신 지구 주말 여행팀 멤버로서 사전 조사를 하는 것일 뿐이었다. 미장원 할머니들에게 듣기로 낮에 보면 흉물스럽게 이끼까지 낀 이 건물은 건축 중이었다가 버려졌고, 신문에 나지 않아서 그렇지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장소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뭔가를 짓다가 중단한 건물은 꽤 있어서 이곳이 꼭 그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로로 테라스 형태의 긴 복도가 이어진 3층짜리 건물, 어두운 빈 공간 안에서 사람들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몸을 낮추고 가운데가 텅 빈 건물 쪽으로 좀 다가갔다. 남자들이 버려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뭔가를 잡아 뜯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더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기본 골조 공사를 끝내고 공사가 중단된 건물에 박힌 파이프를 빼내는 중이었다. 그들이 바깥으로 나오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빈 건물 안에서 길고 녹슨 파이프를 옮겨와 건물 입구에 쌓아 놓았다. 일을 하는 거라면 왜 저렇게 조용히 움직일까, 그리고 이렇게 한밤중에, 파이프를 훔쳐가는 이유는 뭘까. 모두 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파이프를 옮기는 사람들은 힘을 줄 때마다 이상한 신음을 낼 뿐, 아무 말도 없이 좀비처럼 앞뒤로 파이프를 쥐고 옮길 뿐이었다.
    휴가의 마지막 날, 나는 드디어 늘 마음속에서 한 번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기로 했다. 원룸 책상 위에 할머니가 좋아하던 빈대떡과 할머니가 좋아하던 문어, 창신동 명물인 매운 족발을 놓았다. 시장이 가까워 뭘 사오기는 정말 좋았다. 할머니 유품 중에 내가 갖고 있는 것은 할머니가 쓰던 돋보기와 바늘을 꽂아 두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스콘 크기만 한 오동통한 패브릭 하나뿐이었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술은 잘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술 대신 오렌지 주스를 놓았다. 날짜가 정확하지 않지만 할머니는 12월 중순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아무도 할머니 제사를 챙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건 그냥 제사 흉내를 내보는 것이다. 다음엔 인터넷으로 검색해 제대로 된 제사가 어떤 건지 알아보고 해야 할 것 같다. 할머니가 좋아하거나 말거나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내 휴대폰에 저장된 노래들을 원룸에 흘러나오게 했다. 하필이면 막 나오는 노래가 <아소토 유니온>의 Think About Chu'. 보컬인 김반장의 목소리와 할머니의 제사 분위기는 왠지 아주 잘 어울렸다. 내년에 또 할머니를 위해 할머니가 좋아하던 문어를 사러 다닐 수 있을까. 문어 말고 딴 걸 사야겠다. 여유가 된다면 더 귀한, 어떤 특별한 걸 사올 수도 있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때 해먹는다는 커다란 칠면조 요리 같은 것들……. 원룸은 불을 꺼도 달빛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흰색 커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가릴 수 없다면 함께 있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여럿이 울어대는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집 나온 고양이라도 한 마리 데리고 들어올까 파자마 차림으로 밖으로 나갔다. 골목을 내려가 새장 가게와 슈퍼마켓을 지나 해바라기 벽화마을 계단 쪽을 올려다봤다. 밤이면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벽화 계단에 앉아 있는 노숙자들이 있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벽화 계단 앞으로 뛰어갔다. 누군가 벽화 계단을 지우고 있었다. 한 사람은 계단 위에서 페인트를 붓고 한 사람은 커다란 공업용 붓으로 아래서 계단을 칠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페인트를 칠해 해바라기꽃을 다 지워버릴 수 있을까. 나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지워지는 벽화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래쪽에서 벽화 계단을 지우던 사람이 나를 돌아보고 조용히 하라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끝)

 

 

 

 

 

 

 

 

 

 

강영숙
작가소개 / 강영숙

강영숙(姜英淑 Kang, Young-sook)은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8월의 식사」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집으로 『흔들리다』(2002), 『날마다 축제』(2004),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2009), 『아령 하는 밤』(2011), 『회색문헌』(2016)이 있고 장편소설로『리나』(2006), 『라이팅 클럽』(2010)『슬프고 유쾌한 텔레토비 소녀』(2013)가 있다. 2006년 제39회 한국일보문학상, 2011년 제4회 백신애문학상, 2011년 제5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17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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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데미안

대학로에 오래있어서 그런지 편안하게 본 것 같아요. 마지막에 벽화에 페인팅하는 모습에서 음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