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우리 외 1편

[창작시]

 

 

아무도 없는 우리

 

 

“겨울의 연인에겐 간단한 언어가 있다.”

― 베이다오, 「겨우 한 순간」

 

 

 

 


    그렇다고 빈 괄호는 아닙니다
    우리는 겨울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침묵은 빈손이면서 언제나 즐거워
    폭설입니다
    흰 광목천을 두른 울창한 숲속에서
    우리는 빛이 다 청산하지 못한 어둠
    아마도 밤새 다 태우지 못해 젖은 장작들


   다시 태어나는 꿈을 반으로 접고
   적설량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실컷 서로에게 쏟아지다가
   기꺼이 무너져 버리다가
   더는 우리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를 봅니다
   나른하고 편안한 갈등 속에서


   다친 적도 없이 아프게 되었으니
   우리는 서로의 줄거리를 간호했습니다
   더는 간략해지지 않도록
   머물던 대피소엔 외풍이 있었는데
   열려 있는 곳 하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뒷면의 안간힘일까
   인적 드문 풍경이 되어 가는 것 나쁘지 않아요
   겨울 화가가 난로 옆에서 잠깐 졸다가


   그려 넣지 않은 아궁이 불이 있었는데
   우리는 벼랑에서 서로의 어디를 붙잡을지 생각하다가
   종일 매달려 있기도 했었는데
   침묵이 간지러운 숨바꼭질 중이었는데


   빈 괄호 안에 누워 눈을 맞다가 동시에 빠져나올 때
   자국과 실존을 동시에 떠올릴 때
   잠든 채로 서로를 잃어버릴 때


   겨울에 대해 정의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 괄호 하나씩 나눠 갖고
   간밤의 기도를 냉동실에 넣어 두고는
   침묵을 파괴하며 사는 것입니다
   겨울을 대답하겠습니다

 

 

 

 

 

 

 

 

 

 

 

귤창고

 

 

 

 


   따뜻한 이야기가
   귤을 썩게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옮기다 곪아 가던 것이 번져서
   머지않아 여길 모두 떠날 때까지
   우린 이 주소를 기억해 내야만 하고


   왔던 곳이잖아
   내가 한 번 끝났던 곳
   어두컴컴했지만 지나온 곳 중 가장 맑았던 곳
   너도나도 코너였던 곳


   아름다운 생각이 오고 있으니까
   나는 머물러 있을게
   따뜻해지면 죽어가는 것들을 돌보면서


   귤은 모질고 둥글기로 한다
   흩어지자는 말을 했던가
   살려 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갈무리하지 못한 채로 서로를 배회하다
   꼭지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다
   가장 떫고 신물 나는 초록을 속임수로


   우리는 누가 지키지 않은 맹세였던 거지?
   이야기가 바닥나 갈증이 나서
   귤은 자꾸 열리고


   겨울이 태어나도록 내버려뒀으면서
   따뜻한 이야기 듣고 싶어 해
   차디찬 귓바퀴에 손을 포개어 주며
   가본 적 없는 겨울 풍경을 짐작하기만 해


   겨우 귤이면서
   다 마를 만큼만 젖을 거면서
   새로운 기다림을 열어
   늑장 부리던 새의 호기심에도 미치지 않는
   껍질이면서
   눈에 띄지도 않는 동심원이면서


   아무도 여기가 어딘지 말하지 않는다
   그저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짓물러 가는 향기로 대화를 이어 나갈 뿐


   성에 낀 창밖에는
   자물쇠를 든 사람이 서 있다


   여긴 따뜻한 이야기가 망쳐 버린 혹한이었지
   아마도 거의 다 울어 가던 겨울이었지

 

 

 

 

 

 

 

 

 

 

 

 

작가소개 / 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와 산문집 『방과 후 지구』,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이 있다.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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