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아, 너만 믿는다 외 1편

[창작시]

 

 

봄아, 너만 믿는다 *

 

 

김승희

 

 

 

 


   거주자 우선 주차, 골목에 세워진 작은 자동차를 보았다
   자동차 후면 유리창 왼편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고
   몇 겹의 투명 스카치테이프를 둘러 정성껏 고정해 놓았다,
   ‘요 주의’ (빨간 글씨)
   ‘위급 시 아기 먼저 구해 주세요/ RH-B형’ (검은 글씨)
   글자가 빗발처럼 요동친다


   누군지 모르지만 RH-B형 아기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내가 RH-B형이 아니어서인가,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은
   공기 속에는 모자 쓴 해골이 늘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연고와 무연고 사이
   위독은 두서없이 오고
   몸이 금방 무덤이 되는
   시간을 넘는 시간이 파도를 넘어 또 오고 있다


   RH-B형 피를 가진 사람이 늘 아이 가까이 있기를 바라면서
   미모사 같은 가슴의 현악기들이
   불시에 일어서며 우수수 흔들린다


   봄아, 너만 믿는다

 

   *  김형영 「화살시편 29-봄을 믿어봐」에 있는 구절 “믿을 건 봄뿐이야”를 변형함.

 

 

 

 

 

 

 

 

 

 

 

땅끝마을의 붉은 황토 흙

 

 

 

 


   땅끝,
   모든 아픔의 역사가 여기에 와서 소멸되는 땅
   보름달 커지듯 커지다가 사위어지고
   땅끝 가까이 와서
   돌연 흙에 피가 펄펄 도는 것 같다
   소멸에 가까운 곳인 줄 자기도 알고 있는 게다


   너는 어떤 흙이냐
   이런 흙, 저런 흙, 오만 가지 흙,
   봄에 일어서는 흙, 우는 흙, 울지 않는 흙,
   모든 것을 기억하는 흙,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흙,
   인간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흙, 용서하는 흙, 간호하는 흙,
   신의 손이 들어 있는 흙,
   젖으로 가득 찬 흙, 뿌리가 운행하는 흙, 포옹하는 흙…


   돌연, 끝에 와서 희열의 흙에 피가 돌아 꿈틀거리는
   땅끝,
   끝, 끝의 끝, 모든 것의 끝, 끝, 마지막 끝, 절대 끝


   세상에,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의 웅혼이 가득 찬 붉은 흙
   (피콜로1, 플루트2, 오보에2, 클라리넷2, 바순2, 콘트라바순1, 호른4, 트럼펫2, 트롬본2, 팀파니, 큰북, 심벌즈, 트라이앵글, 현악5부, 소프라노 1, 알토1, 테너1, 베이스1, 혼성4부 합창)
   한 베이스 독창자가 노래하네
   “오, 벗이여, 이런 곡조 말고 더 즐겁고 환희에 찬 곡조를 노래하자!”


   그 흙이 땅에서 끝나니까 땅끝,
   땅끝이니까 바다가 나오지
   물감을 칠한 듯한 파란 다도해


   땅끝, 기막힌 끝에서 서로 마주 본다는 이 격한 포옹,
   붉은 피가 콸콸 끓고 있는 진심의 황토 흙
   태초의 사랑과
   소멸하는 생명의 웅혼이 모두 여기에 와서
   (알레그로 마논 트로포, 스케르조 몰토 비바체, 아다지오 몰토 이 칸타빌레,
   프레스토-알레그로 아싸이-프레스티시모 곡조로)


   해남의 땅끝마을 황토 흙 속에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의 장엄한 초연(初演)이
   늘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작가소개 / 김승희

1952년 전남 광주 출생.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으로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1990)·고산문학대상(2021)·청마문학상 (2021) 등 수상.

 

   《문장웹진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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