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없는 시대의 문학 정치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적’이 없는 시대의 문학 정치

 

 

양진영

 

 

 

    1.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쓰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총을 겨누지 않는다.”1) 2008년 한 시인의 한탄은 2000년대 이후 문학이 행하는 정치를 숙고하게 한다. 지난 20년간 대중적 관심을 끌었던 사건들―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광우병을 둘러싼 촛불시위(2008년), 용산사태(2009년), 세월호(2014년), 대통령 탄핵 촛불시위(2016년)―을 멀리서 바라보아야 했던, 일군의 작가들은 1980년대에 위풍당당했던 계급문학론과 문학의 위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기간은 현대문학의 전개 과정에서 강력히 떠올랐다가 1990년대 이후 급속히 퇴조한, 변혁지향적 문학의 궤적을 환기하는 계기였다. 참여문학에서 민족·민중문학, 계급문학으로 계승됐던 한국 문학의 한 기둥이 급격히 무너지는 과정은, 사회·정치적 지향성을 표방하는 문학적 실천이 오히려 사회적 영향력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반성을 낳았다.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응하려 했던 문학의 실패와 정치적 변혁에 동참했던 문학의 쇠락은 그 문학이 전제하고 있던 정치관의 시효 만료를 뜻했다. 한편으로 문학의 이런 교조성에 맞서 미학성을 중시한 문학 활동도 자신의 위상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2000년대에 문학의 정치성을 정면으로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문학에서 정치성 혹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화두가 문단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이때 정치성은 텍스트에 표명된 언어, 즉 ‘말 자체의 사용의 문제’에 드러난 텍스트의 내재적 정치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표의 정치적 명확함과 주제 의식이 부재해도 기존의 제도와 사고에 불화하는 문학 언어는 그 자체로 정치성을 띤다는 함의가 문단 내부에서 주도적으로 수용됐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문학의 실천적 수행을 중시했던 작가들은 이른바, 문학의 ‘적’이 사라진 시대에 문학을 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무슨 글을 써도 국가나 권력이 간섭하지 않는 시대는 사회 변혁에 기여하고자 글을 쓰는 부류에게는 무미건조한 사막 같았다. 소위 미래파로 불리는 젊은 시인들이 낯선 감각과 새로운 어법으로 주목 받았지만 일제강점기의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 1970년대 이후 참여문학론과 민족·민중문학론이 불러일으킨 문단 내·외적 파장에 비교하면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다.
    2008년에 발표된 한 젊은 시인의 글2)이 현재진행형으로 논쟁 중인 까닭은 이런 역사적 맥락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 진은영은 자크 랑시에르의 입론이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영원 회귀하는 질문들”3)에 해답을 줄 수 있다고 하는데, 결국은 오랫동안 한국 문학계를 지배한 문학과 정치의 이항대립적 관계, 다시 말해 참여문학 대 순수문학의 구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에 대해 김동규는 “그의 고민은 니힐의 밤을 지새운 고민이며, 1990년대 이후 비정치적인 예술 동향과의 내부적 대결”4)이라고 호평하는데 이것은 직접적인 사회정치성을 표방하는 문학에 목마른 작가들이 상존함을 암시한다.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미학적이고 싶다는 이중의 욕망은 전위적인 작가들에게서 흔히 드러난다. 동시대처럼 문학의 ‘적’이 없는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직접적인 변혁을 가져오려는 이들의 욕구는 좌절되거나 무화될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진은영은 랑시에르적 사유에 기대었으나, 실제 분석에서는 “김수영의 문학적 사유는 불화 또는 불일치의 정치학이 표명하는 미학적 정치성을 구현하고 있다.”5)고 결론 내 랑시에르의 입론을 비껴갔다. 랑시에르는 이렇듯 텍스트에 표명된 언표나 글쓰기 자체에서 정치성을 구하지 않는다. 문학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 속에 개입하는 어떤 방식”6)으로 규정해, 문학 정치는 ‘말 자체의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적’이 없는 시대에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세계에 개입하는 문학’을 통한 정치성7)의 구현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문학을 통해 세계에 개입해 온 대표적인 작가를 찾다 보면 김숨이나 박상영이 눈에 띈다. 특히 김숨은 2016년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위안부를 대상으로 하는 소설에 천착해, ‘적’이 없는 시대에 문학이 스스로 행하는 정치를 실천해 오고 있다.

   1)  진은영, 「70년대산」,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 76쪽.
   2)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36-4, 2008, 67-84쪽. 백낙청, 신형철, 김형중 등 약 30여 명 이상의 논객이 이 글에 대해 지금까지 비평하고 있다.
   3) 
   4)  김동규, 「멜랑콜리 감성의 정치적 힘 : 김수영 ‧ 진은영」, 『멜랑콜리아­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문학동네, 2014, 385쪽.
   5)  진은영, 〈김수영 문학의 미학적 정치성에 대하여 – 불화의 미학과 탈경계적 정치학〉, 《현대문학의 연구》 40, 한국문학연구학회, 2010, 499쪽
   6)  Jacques Rancière, The Politics of Literature, trans. by Julie Rose, Polity, 2011, p.7;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옮김,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11, 15-16쪽.
   7)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예술의 감상과 평가가 아니다. 그는 칸트의 감성론에 바탕해 미학을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자리 배치의 문제로 보기 때문에 미학과 정치가 동일시된다. 그런 점에서 그가 개념화한 정치는 미학적 정치성으로 불린다.

 

    2.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권력의 행사나 권력 투쟁, 다시 말해 정치적 이해관계의 대립을 조정하는 절차가 아니다. 랑시에르는 정치의 사전적 개념인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를 치안(police)이라고 규정하고 이런 치안의 본질을 감성의 분할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개념을 빌려 재정의한 치안은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을 정의하는 신체들의 질서”로, 이것은 개개인의 활동을 가시적과 비가시적으로, 개개인의 말을 담론과 소음으로 구획한다. 통념상 치안의 본질은 공권력이나 법체계 같은 것인 데 반해 랑시에르적 치안은 감성의 짜임(configuration du sensible)인 셈이다.
    랑시에르가 정의한 정치는 이런 치안의 짜임을 다시 짜는 것인데 그것은 기존의 치안에서 배정된 개개인들의 장소를 변경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 결과 기존의 치안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몫 없는 이들(데모스, demos)’8)을 보이게 만들고, 그동안은 소음으로만 들렸던 ‘몫 없는 이들’의 말을 담론으로 들리게 만든다. 랑시에르는 정치가 존재하기 이전에 데모스는 아무것에도 참여하지 않는 혹은, 아무런 몫도 지니지 않은 이들에 불과한데 이들은 정치를 통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전환된다고 본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의 구분을 데모스의 자리의 재배치, 즉 기존 치안 질서에서의 감성의 분할(partage du sensible)을 둘러싼 대립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누구에 의해 감성의 분할은 주도되는가? 이에 대해 랑시에르는 예술과 미학(esthetique)을 재개념화해 예술과 정치는 치안에서 분할된 감각 질서에 균열을 가져올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랑시에르에게 예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 속에 개입하는 어떤 방식, 세계가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되는 방식”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은 예술에 대한 이론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감각적 세계 안에 몸이 기입되는 방식, 다시 말해 몸이 세계를 느끼는 방식”9)과 관련된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미학은 칸트의 감성의 선험적 형식에서 유래했는데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 감상과 평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자리의 배분 형태이므로 시간과 공간의 문제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좁은 의미에서는 그가 개념화한 예술의 미학적 체제를, 넓은 의미에서는 감성학을 의미하는데, 이는 미학이 예술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질서에 관여함을 뜻한다.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은 정치와 무관한 예술을 위한 예술도 아니고, 정치에 종속되는 예술도 아니며,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실천을 행하게 된다. 이런 점에 입각해 랑시에르는 예술은 본래적으로 정치적인데, 예술이 정치에 종속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 자신의 내재적인 성격, 즉 감성의 분할이라는 미학적 성격 때문에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점을 근거로 랑시에르는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가 아니며 문학이 정치 행위를 그 자체로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문학 정치란 “자기 일 외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소음으로 취급됐던 목소리를 말이 되게 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비가시적인 상태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감성적인 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분할하려는 시도”10)이다.
    지금까지 설명으로 보면 랑시에르의 문학 정치 개념은 특정한 언어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낱말들과 사물들을 사고하는 새로운 방법”에 기초한다. 즉, 문학이 기존에 부여된 치안의 질서에 개입해 ‘몫 없는 이들’의 자리들과 정체성을 재배열하는 역할을 할 때에 문학 정치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랑시에르의 문학 정치를 원용해 작품을 해석해 온 여러 논문들은 문학이 스스로 정치를 행할 가능성을 언급한 랑시에르의 문장을 모든 작품에는 정치성이 내재돼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랑시에르는 텍스트에 표명된 언표나 글쓰기 자체에서 정치성을 구하지 않는다. 그는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 속에 개입하는 어떤 방식”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문학 정치는 ‘말 자체의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랑시에르의 문학 이론에 기대어 문학의 미학적 정치성을 해석할 경우 가장 먼저 대상 작품이 기존의 치안 질서에서 배제된, 데모스를 드러내는 텍스트인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방대한 자료와 분석에 기반해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데모스들이 존재했던 시기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개략적으로 보면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은 제국주의 치하에서 법적 권리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데모스에 해당하고, 박인환과 김수영 등이 활동했던 1950년대 역시 6·25, 4·19 등의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실향민, 전쟁 포로 등의 데모스들이 대거 형성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숨의 소설에서도 기존의 치안 질서에서 배제된, ‘몫 없는 이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조센삐(조선 여자의 성기)도 곤충이나 풀벌레 이름인 줄 알았다. 일본 군인들은 세계위안소의 조선 여자애들을 조센삐라고 불렀다. 버러지 이름을 부르듯.(『흐르는 편지』, 57쪽)11)

 

    여자를 소나 돼지 같은 가축처럼 사고 팔기도 한다는 걸 중국에 와서야 알았다. 소나 돼지마다 값이 다르듯 여자도 나이나 생김에 따라 값이 다르게 매겨진다.(『흐르는 편지』, 66쪽)

 

    우리만 사람이 아니야.
    악순 언니가 말한다.
    “사람이 아니면 뭐예요?”
    을숙 언니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던 요시에가 묻는다.
    “개나 돼지겠지.”
    끝순이 말한다.
    “개나 돼지보다 못하지”
    악순 언니가 말한다.(『흐르는 편지』, 106쪽)

 

    그들은 석순 언니를 땅에 묻지 않고 변소에 버렸다. 그들은 죽은 소녀에게는 땅도 아깝고 흙도 아깝다고 했다.(『한 명』, 21쪽)

 

    간호사가 눈빛으로 되묻는다.
    ‘네가 사람이었어?’
    ‘나는 아기를 가졌어.’
    ‘아기가 아니라 새끼겠지.’
    ‘새끼?’
    ‘짐승이 아기를 가졌다고 하는 소리는 못 들었어. 새끼를 뱄다고 하는 소리는 들었어도.’(『흐르는 편지』, 108쪽)

   8)  랑시에르가 우리말의 인민, 국민, 민중에 해당하는 뜻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푀플(peuple)이다. 푀플은 영어로는 피플(people)에 해당하는 프랑스어인데, 랑시에르는 고대 그리스의 빈민인 데모스(demos)라는 말의 프랑스어 표현으로서 푀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자크 랑시에르, 2016, 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285-289쪽.)   
   9)  자크 랑시에르, 2012, 주형일 옮김, 『미학 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12쪽.
   10)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앞의 책, 10-11쪽.
   11)  이하 인용하는 김숨의 소설은 『한 명』(2016, 현대문학), 『흐르는 편지』(2018, 현대문학)로 본문 인용 시 쪽수만 표기한다.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팔려간 10대 소녀들은 언어도 생소한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배치돼 일본군의 성욕과 불안을 해소하는 성(性) 기계로 전락했다. 자신을 보호해 줄 국가가 망해 버린 여성들은 제국의 팽창을 위해 쓰이다 버려지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위안부들은 제국의 눈에는 ‘벌레’로 보이고, 그들은 벌레의 이름을 부르듯 ‘조센삐’로 불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처음에 위안소에 도착했을 때 자신에게 붙여진 ‘삐’라는 호칭이 삐삐, 우는 풀벌레의 애칭으로 오해한다. 위안부들은 이, 벼룩, 빈대 속에 섞여 살면서 그 벌레들과 동급으로 취급되던 제국의 벌레였기 때문에 그들이 낳은 아이는 일본군 의사나 간호사에게 짐승의 새끼나 다름없다.
    ‘제국-위안부’는 곧 ‘제국-벌레’의 관계가 되고, 이런 위안부들은 비인간화돼 소나 돼지처럼 사고 팔린다. 가축이 성장 상태에 따라 값이 다르듯 위안부도 나이나 생김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나이 어린 여자를 선호하는 일본 군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열한 살의 애가 끌려오기도 하고, 위안부가 아이를 가지면 군인을 받을 수 없어서 갯값도 안 되는 가격에 팔려가기도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주체화가 불가능해진 위안부들은 “우리만 사람이 아님”을 인정하고, 심지어 “개나 돼지보다 못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가축을 묻을 때 봉분을 쌓지 않듯이 비인간화된 인간 존재들은 그들을 묻을 “땅도 아깝고 흙도 아깝기” 때문에 배설물 처리장인 변소에 버려진다. “천황이 일본 군인들에게 내린 하사품”(『흐르는 편지』, 115쪽)으로 불렸던 위안부들의 주체성은 살아서는 ‘제국-벌레’의 관계로, 죽어서는 ‘제국-배설물’의 관계로 끝난다.
    이런 존재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무젤매너(Muselmanner)12)로 불렸다. 엎드려 기도하는 무슬림의 형상을 빗대어, 일어설 힘과 의지조차 없는 비인간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용어이다. 조르조 아감벤 철학의 중심 개념인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기도 한 무젤매너들은 함께 있으되 그 존재를 깨달을 수 없고, 그가 죽더라도 죽음이 인식되지 않으며, 설령 인식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죽어도 그만인 비존재, 비인간들이다. 안토니오 그람시13)는 사회적 하위주체인 서발턴 계층은 기존의 체제에서는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위안부 같은 비인간들이 내는 말은 동물의 발성이나 자연의 소음으로 간주된다.
    비인간의 말은 소통되지도 않고, 발화된다 해도 동물들의 웅얼거림으로 간주되니까, 김숨의 소설에서도 열다섯 살이 되도록 글자를 배우지 못해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위안부 소녀는 흐르는 물결 위에 편지를 쓴다.(『흐르는 편지』, 7-8쪽) 그곳 낙원위안소의 일본인 주인은 신이나 마찬가지로 위안부들은 그가 하늘이 땅이라고 하면 땅인 줄 안다. 그 신은 고로시테시마우(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 때문에(『흐르는 편지』, 24-25쪽) 누구도 그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악순 언니는 혼자 말하고, 혼자 화내고, 혼자 우는 것이 습관이어서 소설의 주인공은 위안소에 온 첫날 그녀가 종일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누구와 저렇게 말을 하나 의아했었다.(『흐르는 편지』, 53쪽)
    김숨은 소설을 통해 70년 전에 소음으로 간주됐던 위안부들의 말을 오늘날 담론으로 들리게 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와 문학은 세계가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되는 방식, 이 가시적인 것이 말해지는 방식”14)이라는 전언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치는 국가 권력의 장악과 분배가 아니라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들고, 비가시적으로 숨겨진 것들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따라서 문학이 행하는 정치는 작가의 구호와 투쟁에 있지 않다. 문학 정치는 숨겨져 있던 ‘몫 없는 이들’을 보이게 만들고, 그들의 말을 담론화할 때 발동된다. 박노해, 백무산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의 노동문학은 동시대 치안의 질서에서 ‘몫’이 없었던 도시 노동자의 말을 시로 표출시켜, 숨겨진 그들의 삶을 가시화시켰다는 점에서 정치성을 띤다. 같은 사유로 해석해 보면 김숨의 위안부 소설 역시 스스로 정치를 행하는 문학 정치의 전형이다.

   12)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136쪽.
   13)  그람시는 서발턴 계층을 기존의 체제에서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문맹 소작농, 선주민, 도시 최하층 하부프롤레타리아로 정의한다.(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외 지음,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그린비, 2013, 79쪽.)
   14)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앞의 책, 16쪽.

 

    3.

 

    비인간적 존재로서 위안부들의 기억은 말해질 수 있는가? 매일 수십 개의 삿쿠(일본식 콘돔)를 씻어 재활용하고(『흐르는 편지』, 9쪽), 불임하도록 수술로 아기집을 들어내고(『흐르는 편지』, 66쪽), 시체처럼 누워 마흔, 마흔하나, 마흔둘······ 자신의 몸에 다녀가는 군인들의 숫자를 세다 까무러친(『흐르는 편지』, 128쪽) 10대 소녀들. 그들의 몸에는 보통 하루에 15명 정도가 다녀갔고, 일요일에는 50명도 넘었다. 일본군이 벌건 쇠막대기로 질을 후벼 떨어지는 살점을 바라보아야 했고(『한 명』, 60쪽), 자기 피와 아편을 먹으면 자면서 죽는다고 믿어 그렇게 죽어갔던 위안부들. 그들은 심지어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는 경운기같이 생긴 오토바이를 타고 폭격을 피해 다니면서 군인들을 받아야 했다.(『한 명』, 95쪽) 좋은 데 가는 줄 알고 간 곳에서 위안부들의 몸은 낙서장이 되었다. 일본 군인들은 바늘과 먹물로 위안부들의 배에, 불두덩에, 혀에 문신을 새겼다. 그곳에서 소녀들의 몸은 자신들의 몸이 아니었다.
    에른스트 짐멜은 기억을 사진술의 개념을 통해 서술했는데 “경악의 순간은 사진처럼 정확한 자국을 각인한다.”15)라고 적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몸의 기억은 정신의 기억보다 신뢰성이 높아서, 배의 상처를 보여준 위안부 할머니처럼 나이가 들어 정신의 기억이 파괴될지라도 몸의 기억은 그 힘을 잃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고통스런 기억이 동반하는 정념은 견딜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 지나치게 되면 기억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파괴한다. 바로 트라우마의 경우가 여기 해당하는데 트라우마는 몸에 직접 각인되어 그 경험을 언어적으로 작업하여 해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니체에 따르면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감시와 처벌 같은 제도는 문화적으로 몸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에 해당한다. 상처와 흉터로 된 몸의 기억은 정신의 기억보다 신뢰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자주 보듯이 나이가 들어 정신의 기억이 파괴될지라도 몸의 기억은 그 힘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기억을 저장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문제와도 연관 지었다. 기억이란 “사라지지도, 사멸하지도 않는 인상들의 피난처”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상들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니체에서 프로이트에 이르는 기억 이론에서 기억 흔적의 견고성은 지배적인 것이다. 위안부들처럼 정신적·육체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은 온전한 자아를 확립할 가능성도 파괴되고, 그 결과 스스로의 언어로 과거를 증언할 수 없다.
    소설 『한 명』의 주인공은 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나도 열세 살에 끌려가 그 짓을 당했던 피해자다…… 나도 만주 하얼빈까지 끌려가 그 짓을 당했다…… 열세 살에 끌려가 그 짓을……”(『한 명』, 147쪽)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그들이 그 이야기를 스스로의 가슴에서 끄집어낼 수는 없다. 막상 진술을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한쪽으로 돌아간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한 명』, 236쪽) 위안소에서는 군인들이 이름을 물어도, 나이를 물어도, 고향을 물어도 같은 말로 대꾸해야 했다. 아리가토(고맙습니다), 아리가토, 아리가토······.(『흐르는 편지』, 198쪽) 위안부들은 애초부터 언어를 잃어버리도록 강요받았고, 고국에 돌아와서도 죄의식과 트라우마 때문에 증언 불능 상태에 빠졌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루트 클뤼거는 회고록에서 “그곳에 대한 기억은 흡사 수술로도 제거해 버릴 수 없는, 몸속에 박혀 있는 탄환처럼 내 영혼 속에 이물질로 남아 있다.”16)라고 쓰고 있는데, 그가 의도하는 기의는 위안부들이 겪은 것과 같은 심리적인 트라우마 경험을 언어로 옮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클뤼거는 말을 하고 시를 쓰면서 살해되어 장례되지 못한 채 버려진 자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남동생이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도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듯이 자신의 마음이 안정을 찾고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술로 제거해 버릴 수 없는 탄환’이라는 심상은 트라우마의 역설적 모순성을 분명하게 해준다. 이것은 인간의 몸에서 제거할 수 없는 일부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의 정체성 구조에 동화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 논리학 범주를 깨어 버리는 이물질이라는 것은 그것이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으며,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클뤼거가 느꼈던 트라우마의 정념은 비슷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김숨의 위안부 소설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그 이는 블라우스 안에 입은 속옷마저 훌렁 벗더니 배 한복판에 녹슨 지퍼처럼 박힌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애기만 긁어냈으면 내가 애기 낳고 살잖아. 그런데 애기보까지 싹 들어냈지 뭐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애기 낳으려고 별 지랄을 다 했잖아.(『한 명』17), 15쪽)

   17)  김숨은 이 소설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했음을 밝히고 주석을 통해 316명의 증언 출처를 밝히고 있다.(김숨, 『한 명』, 앞의 책, 259-268쪽.)

 

    여자가 우유잔을 들어 그녀에게 내민다. “우유를 먹으면 소화가 안 돼서······.” 남자 정액이 생각나서라고 차마 말할 수 없어 그녀는 그렇게 둘러댄다.(『한 명』, 53쪽)

 

    그녀는 오징어도 못 먹는다. 오징어 다리에 붙은 빨판이 매독에 걸렸을 때 불두덩에 똥글똥글 번지던 물집과 흡사해서. 물집이 한번 번지기 시작하면 눈까지 가려웠다. 눈동자를 바늘로 찌르고 싶을 정도였다.(『한 명』, 54쪽)

 

    만주에서 돌아와 10년 넘게 그녀는 아래가 너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길을 가다가도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 아래를 긁었다. 팬티에 피가 묻어나도록 긁어댔다.(『한 명』, 186쪽)

 

    한 시간 전에 뭘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70년도 더 전 일은 기억이 난다. 위안소 방 천장에 매달린 알전구가 깜박깜박하던 것까지.(『한 명』, 150쪽)

 

    현재나 미래의 어느 시점이 배경인 소설 『한 명』에서는 70년간 숨어살던 할머니가 세상에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려고 한다.(『한 명』, 236쪽)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아 자궁을 들어낸 탓에 아이를 낳을 수 없어 평생을 홀로 지낸 할머니는 주민등록도 없이 허름한 재개발 지역에 살 수밖에 없다. 그 자신의 언어로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에 속옷을 벗고 배 한복판에 각인된 불임 수술 자국을 드러내곤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입속에 쏟아 붓던 일본 군인들의 정액이 떠올라 우유를 마시지도 못하고, 매독에 걸렸을 때 불두덩에 번지던 매독균과 흡사해 보여 오징어 다리를 먹지도 못한다. 길을 가다가도 위안부의 기억이 연상되는 일을 목격하면 속옷 아래를 긁을 수밖에 없는 그들.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는 이율배반적 양상으로 표출된다. 위안소에서 겪었던 일들은 위안부들의 머릿속에 얼음조각처럼 흩어져 있어서 때로는 분명하고, 때로는 얼음처럼 냉동돼 있다. 어느 위안부는 70년 전에 위안소 방 천장에서 깜박이던 알전구의 색깔까지 기억한다. 자기 피와 아편을 먹고 스스로 죽은 언니의 이빨이 석류알처럼 반짝이던 것도 또렷이 떠오르고, 검은깨를 뿌린 듯 주먹밥에 촘촘 박혀 있던 바구미의 개수도 셀 수 있다.(『한 명』, 151쪽) 반면 어느 위안부는 일본군이 석순 언니를 어떻게 죽이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면서, 그 언니가 죽던 모습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군인 백 명을 상대하라는 일본군 장교의 명을 거절한 석순 언니는 맨몸으로 대못이 박힌 판자에서 구르다 죽었다. 그들에게 조선인 소녀를 죽이는 것은 개를 죽이는 것보다 아깝지 않았고(『한 명』, 21쪽), 석순의 시신은 변소에 버려졌다. 소설의 주인공은 말한다, “그런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했으면 오늘날까지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위안부 문제와 같은 집단적·역사적 차원에서의 트라우마와 재현에 관심을 두었던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도 이러한 트라우마의 특성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리오타르는 프로이트의 억압이라는 개념을 가져오는데, 이 개념은 망각 형식이 아니라 반대로 단단하게 보관된 저장 형식이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억압을 치료를 통해 제거돼야 할 것으로 본 반면 리오타르는 그것을 규범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리오타르는 트라우마야말로 홀로코스트와 관련되는 유일한 형식이라고 설명한다. 그에게 기념비란 재현물로서 기억의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므로 실제로 망각의 한 전략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기념식이 화려해지고 기념 장소가 늘어날수록 위안부 개개인의 증언은 묻히게 되고, 그들의 치유는 지연된다.

 

    4.

 

    그렇다면 20만 명의 조선인 위안부 중에서 고국에 돌아온 2만의 증언은 이대로 묻혀야 하는가?18) 그들을 대리한 증언은 불가능한 것인가? 아우슈비츠 참상을 직접 겪었던 아감벤은 참된 증인은 증언하지도 않았고, 증언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며,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의 대리인으로서 의사 증언한다고 본다. 이런 주장에 근거해 리오타르는 예술은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는 대신 그것을 극복될 수 없는 심연으로 남겨 둬야 하며, 다만 재현 불가능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현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어떤 것들은 어떤 유형의 형식으로만 재현될 수 있고, 그것들에게 적합한 언어의 유형에 의해서만 재현될 수 있다. 리오타르에게 있어 재현 불가능한 것은 가스실로 상징된다. 『분쟁』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가스실의 존재를 증언할 수 없는 희생자의 상황을 고찰한다. 실제로 거기서 죽음을 맞은 자만이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로베르 포리송(Robert Faurisson)의 극단적 논법에 따라, 살아남은 자는 가스실의 실재를 말할 수 없다. 리오타르는 존 케이지(John Cage)의 침묵의 음악과 바넷 뉴만(Barnett Newman)의 추상 회화 등을 포스트모던적 숭고의 미학으로 설명한다. 이때 예술은 무언가를 지시하고 재현하는 매체가 아니라 의미가 없어도 스스로 작동하는 ‘사건’이 된다. 재현 불가능한 것은 번역되지 못하는 실체로 남아 작품의 공동(空洞)이 된다. 관람객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여기 재현 불가능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뿐이다. 랑시에르는 이 불가능성의 윤리가 무력함을 비판하며 그것을 가능성의 정치로 대체한다.
    랑시에르는 재현의 가능성에는 어떤 내재적 한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주제에 고유한 언어나 형식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예로 홀로코스트 영화 <쇼아(Shoah)>를 제시한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감독이 학살 장면은 생략한 채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말로만 구성해 홀로코스트를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고 비판받았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재현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술이 아니라 재현의 옛 질서와의 단절이다. 재현 불가능하다는 것은 재현의 규범에 의해 어떤 표현의 권리가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 재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재현적 체제의 질서에 반대하는 반재현적 예술은 재현 가능성이나 재현 수단들의 선택에서 더 이상 제한받지 않는 예술이다. 랑시에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재현 불가능성은 예술의 재현적 체제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쇼아>를 두고 전개된 아우슈비츠의 재현 불가능성 논의, 나아가 리오타르의 숭고의 예술 개념은 과장된 윤리적 요청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렇듯 “말할 수 없는 이들이 말하기 시작하고, 몫 없는 이들이 몫을 주장할 때 생기는 불화의 상황을 정치 및 예술의 근본”19)으로 보면, 김숨의 위안부 소설들은 배제된 자들이 자신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감성의 분할을 행함으로써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정치성을 내파한다. 일제강점기의 위안부들처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와 충격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은 재현되고 분유(分有)됨으로써 각인된 상처가 치유돼야 한다. 이런 할머니들을 대리해 김숨은 강박스럽다고 할 정도로 위안부 소설에 매달려 그들의 증언을 문학의 언어로 복원 중이다. 제국주의와 남성중심주의에서 자신의 ‘몫’이 없었던 피해자들이 타인의 입을 빌려 증언하는 김숨의 글쓰기는 그동안 소음으로 간주돼 왔던 ‘몫 없는 이들’의 말을 담론화시키고, 그들의 존재를 비가시적인 상태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문학의 정치를 수행 중이다. 이미 고인이 돼 더 이상 증언할 수 없는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회고를 바탕으로 쓰인 두 편의 증언 소설집―『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2018),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2018)―은 그런 점에서 더더욱 문학 정치적이다.

   18)  『한 명』이 출간된 2016년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38명뿐이다.(위의 책, 286-287쪽)
   19)  자크 랑시에르, 주형일 옮김, 『미학 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12, 147-167쪽.

 

    5.

 

    『한 명』의 주인공이 만주 위안소에 있던 7년 동안 그녀의 몸에 다녀간 일본 군인은 어림잡아 3만 명이었다. 그들 중 그녀에게 어떻게든 살아서 조선에 돌아가라고 말한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한 명』, 174쪽) 애초부터 위안부들은 제국의 소모품, 천황의 하사품에 불과했으니까. 소설의 기표는 단 한 명 남은, 살아 있는 위안부를 표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의는 단 한 명도 인간이지 않았던 현세의 한 모습을 상기하는지 모른다. 그런 시대를 겪은 위안부들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이 여전히 무섭고, 시시때때로 열세 살의 자신이 아직도 만주 막사에 서 있는 혼미를 느낀다.(『한 명』, 258쪽) 그들이 겪은 폭력은 일종의 인간 한계를 넘어선 단계로 그들은 죽음에서 돌아온 이들과 마찬가지이다. 가사(假死) 상태를 증언하는 일은 언제나 재현 불가능성을 내포하므로 이런 글쓰기는 실패를 각오해야 한다. 더군다나 ‘성’과 남성주의적 ‘폭력’의 조합은 다수의 예술이 매혹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소재주의의 혐의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김숨은 이런 위험성을 감내하면서 끊임없는 붓질을 통해 위안부들의 몸에 각인된 사건과 기억의 잔해를 복원해 내고 있다.
    혹자는 더 이상 문학의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의미 있는 대상이 없는 문학은 소모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런 작가들은 김숨이 위안부를 직시했듯이 우리 주변의 이주자와 퀴어들을 직시해 보면 어떨까. 김숨은 작가의 말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20)고 말한다. 작가가 자랐던 곳에도, 작가가 여행을 갔던 곳에도 그들은 살고 있었다. 김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자신의 할머니였을 수도 있고, 아니라면 그들이 자기 할머니를 대신해 그 지옥에 다녀왔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주자와 퀴어들은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지만 그들의 말은 희미하고, 그들의 모습은 흐릿하다. 위안부들이 만주에서 겪었던 것처럼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주자들의 발화는 묻히기 쉽다. 성도착자로 투영되곤 하는 퀴어들의 실체는 불분명하기만 하다. 이런 ‘몫 없는 이들’이 발화하는, 소음에 불과한 말들을 담론화시키고, 비가시적인 이들을 가시화시킬 때 문학은 스스로 정치를 행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문학의 ‘적’을 외면하고 있거나, 그 ‘적’에 무관심한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적’을 드러내는 것도 작가의 소명 중 하나라면, 김숨이 그러했듯이 작가들은 보이지 않는 문학의 ‘적’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김숨식의 문학의 정치는 계속돼야 한다.

   20)  김숨, 『한 명』, 앞의 책, 285-286쪽.

   

 

 

 

 

 

 

 

 

 

 

 

양진영
작가소개 / 양진영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박사 수료. 2019 중앙일보 신인문학상(평론), 《경상일보》 신춘문예(시). 김만중문학상·송순문학상·목포문학상 외 다수 수상.

 

   《문장웹진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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