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 몰라

[신작시]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 *

 

 

이소호

 

 

 

    꿈을 꾼다
    현관 앞의 맨 앞방. 오대양 같은 마음. 설거지 재능꾼에 타고난 살림 밑천인 나는, 네가 되는 꿈을 꾼다

 

    신 앞에 단둘만 남아버린 우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치며 방언을
    읊조린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했다

 

사랑했다

 

    사랑했었다

 

사랑했었다

 

    사랑하는 척 했었다

 

사랑하는 척 했었다

 

    누군가는 나를 착하다고 불렀다

 

    좋은 언니가 되려고 그러니까
    좋은 언니가 적당히 얘기를 듣는
    척 하는

 

    언니다

 

    넌 말만 잘 들어
    내가 언니니까
    아무런 의견도 내지 마

 

회유를 위한 휴전이야?
아니면 휴전을 위한 회유야?

 

    둘 다

 

    라고 답하고 나는 연필을 들어 가정용 자살 지침서를 적었다 연필의 어둠은 깊으면 깊어질수록 쉽게 뭉툭해졌다 나는, 더, 자주, 자주 연필을 깎으며 아주 선명한 어둠으로 우리를 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네 죄가 내 죄가 되는 그런 삶은 더는 싫어 그러니까 따라해 봐 내가 없으면 이건 전부 네가 할일이야 설거지, 빨래, 분리수거, 청소기 돌리기, 걸레질, 하루 세 번, 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해야 해, 따라해 봐, 따라해 봐

 

    어서!

 

당연한 장면이나 감정은
문학적 가치가 없다는
위대한 선생님들의 조언에 따라서
이 부분은 모두 삭제되었다

 

언니 나 궁금한 게 있어
언니는 왜 이 이야기로부터 도망가지 않아?

 

    왜냐면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거든

 

    어째서 이 얘기는 써도 써도 닳지 않을까?

 

지겨워

 

쌍둥이로 태어났다면
조금 더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나이를 맞추자 내가 적게 먹고 네가 많이 먹으면 돼 일 년에 한 번 새알을 똑같이 나누어 먹자

 

    똑같은 옷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이 반성하고 똑같은 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될 수 없었다

 

    봤지?
    한 살 한 살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넌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몰라

 

언니
스스로의 죽음을 꿈꾸는 동물은
어차피 인간뿐이래
걱정 마 방법은 아주 많아
잊었어?
우리 집에 널리고 널린 게 끈이랑 문고리인 거

 

    그러게
    우리는 이 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족’이지
    더는 비밀도 아닌 비밀로 이 집은 이미
    넘칠 대로 넘쳤어 내가
    나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말이야
    너 따위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는 사실 그거

 

    나는 이불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가 새알을 더 낳는다 하나 하나 둘 둘둘 셋 다리를 휘저으며 조금 더 조금 더 냄비 속으로 풍덩풍덩 빠져든다 국자에 걸린 동생을 새로이 건지며 팥알에 새알을 갈아 끼운다

 

    자 새알은 똑같이 넣고 입에 하나씩 굴리는 거야
    절대로 밥알이랑 헷갈려서는 안 돼

 

서른셋 서른넷 너는 숫자도 셀 줄 몰라?

 

    다시 시작해 보자 천천히
    서른넷 서른다섯…

 

우리는 새알 하나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밥상머리에서 일어섰다
등을 맞대고 누워
말했다

 

    있잖아 옛날에 우리 집 강아지 두 마리 생각나? 걔들도 형제였는데 동시에 태어났는데 각자 다른 데 가서 쥐약을 먹고 죽었잖아 쥐도 새도 모르게, 검은 쓰레기봉투로 얼굴을 감싼 채, 아무데나 묻혔잖아 장마에 나무 십자가도 휩쓸려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그 개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고 점점 그 개죽음에 익숙해졌잖아

 

    두려워 말자 죽는다는 건 그런 거야

 

결국에 우리는 다시, 다시
빠끔히 열린 두 눈을 맞추다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서로의 눈을 억지로 감겨 준다

 

언니
내가 언니가 외로울까 봐 태어났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선 안 돼

 

    그래 나도 널 지키려고 태어났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아

 

살다 보니 알고 보니 우리는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다
그냥 한 배에서 우연히 태어났을 뿐

 

언니 그런데 말야 왜 낮에 눈을 감으면
모든 풍경이 다 빨갛게 보이는 걸까?
빨간 풍경 위로 날벌레가 날아다니는 것 같아 두려워
사실 벌레가 눈동자 안을 기어 다니는 거고 그게 눈을
감았을 때만 몸을 드러내는 것 같아
무서워 죽겠어

 

    걱정하지 마 만물은 뭐든 죽기 전에는 다 빨개져 사과도 사람도 그렇잖아 봐봐 저 하늘도 오늘이 죽기 직전에 저렇게 빨갛게 물들잖아 괜찮아 다 지나갔어 나쁜 일들은 이제 진짜로 전부 다

 

    끝났어

 

 

우리는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나는 편지봉투에 우리의 미래와 부푼 희망을 적었다 봉투가 너무 작아 들어가지 않았다 우체국에서 편지의 무게를 쟀다 말의 무게만큼 더해지는 값.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부칠래요? 직원의 말에 나는 조용히 혓바닥에 우표를 붙였다 그때 너는 말했다 언니 언니는 이 종이를 알아? 난 알아 저 나무는 종이가 되기 전의 언니를 기억하거든 종이가 된 후에는 늘 언니를 원망했었어 더러운 그 손으로 빽빽하게 남긴 상흔을. 끊임없이 기억해 내면서. 그래서 나무는 슬프지 숨겨온 나이를 억지로, 한참이나 드러낸 채로 시름시름 앓다가 한 꺼풀 한 꺼풀 드러낸

 

    숲

 

그게 바로 저 종이야

 

언니가 망친 한 그루의 이야기지

 

저녁이었다

 

    너는 자연사를
    나는 돌연 죽을 일을
    기다린다

 

    저 편지처럼 당도할 곳은 없을지도 몰라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천국을
    저 나무라고 봤을까?

 

    그러니까 다음에 생에는 우리 맛있는 밥을 먹자 같이 저번에 갔던 그 카페도 가자 영화는 프란시스 하가 좋겠어 실패한 예술가의 이야기니까 오후 4시쯤이 되면 미술관 마지막 입장 시간이겠다 그때 들어가서 좋아하는 그림 딱 하나만 골라서 오래오래 머물러 있다가 오자 문을 닫으면 어둠이 내린 거리를 걷자 걸으면 내일이 오겠지 내일은 분명히 오늘과는 다를 거야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예감한 예수님이 빌어도 빌어도 하나 바뀐 것이 없던 것처럼 우리는, 신이 정하신 변하지 않을 미래를 바라본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이미 죄인이니까 성수를 마시고 깨끗해진 줄 알았겠지만 실은, 어쩌면 이미 저 성수는 여러 죄인의 손을 씻었을지도
    몰라

 

    아마도

 

    이맘때였던 것 같다 우리는 예년처럼 돌아오는 예수님의 장례식에서 달걀을 한가득 받아 왔다 동생이 내 이마에 대고 달걀을 쳤다 미안해 이보다는 딱딱할 줄 알았어 왜 그랬을까

 

    나는

 

    마지막으로 침이라도 묻히면 곧 바스러질 듯한 종이로 만든 성경을 들고 운다 몇 세기에 걸쳐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또 읽는다

 

    저렇게 적은 말로 오래 읽히는 작가가 또 누가 있을까?

 

    연필로 세상을 적겠다던
    내 손과는 다르게 나는
    다르게 읽힌다

 

 

 

 

 

    여기 텅 빈 공간을 둔다

 

 

 

 

 

    누군가는 기도로
    누군가는 헌금으로 채우는

 

    이 공간은

 

    죄를 사하기 위해 태어났다

 

    안녕 나는 이 시를 덮고 읽지 않을 거야 불온하니까 좋아하는 단어를 전부 넣었는데도 왜 이 시가 왜 망했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 이건 어쩌면 그 편지 한 장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무와 나무가 닿아 만들어진 이 글은
    나무의 살을 깎아 쓰였다

 

    여기 나무 잠들다

 

    쓰고

 

    나는 동생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             )

 

    (           ) **

 

    그 말만큼은 남겼어야 했는데

 

홀수는 문득 슬프다
홀수는 자주 슬프다

 

언니 미안하지만 나는
살아야 해
남은 자들의 몫은 이것뿐인걸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는 시간
그 부재를 견디는 사람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잖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울지 않고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
이제 그만 써야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는 것
네 ‘시’에 무엇으로 영원히 박제되어도
묵묵히 견디는 것
알지?
네 ‘시’의 그것들은 전부 날 닮은 것 같아

 

재수 없어

 

    그 말만이 남은

 

    그날

 

    나는 테라스에서 스스로 나의 목을 조르며 중얼거린다

 

    내 손가락은 죄가 없다 내 손가락은 죄가 없다 내 손가락은 죄가 없다 먼저 가버린 네 죄를 적은 죄만 있을 뿐 네 죄를 적은 내 죄만 남아 있을 뿐

 

    마치 예로부터 전해오던
    이야기를 전해, 전해, 전해, 전해들은
    이야기처럼

 

    펼쳐 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눈 감으면 걸리는 은, 는, 이, 가 를 자꾸만 고치고 싶어서 원고를 펼쳤다가 접는다 아무래도 나는 나무의 내부가 자꾸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무의 내부는 죽기 전까지는 영영 비밀이니까 죽이지 않고는 알아볼 수 없으니까

 

그럼 네 말로 켜켜이 쌓아 둔 이 책도
죽기 전까지는 비밀이야?

 

    응 비밀이야

 

    거대한 마침표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이 글을 봉인하기 직전
    세상의 흔해 빠진 연인처럼
    표면에 깊고 두꺼운 상흔을 남기기로 한다

 

    잠시

 

“우리, 여기 이곳에 왔다 감.”

 

    나무를 연필로 있는 힘껏 찍어 눌렀는데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끝끝내
    간증도, 고해도, 하지 않았던 독실한 무신론자에게는
    그게
    어울린다

 

   *  이우성,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展(2021.3.1.~3.31, 두산갤러리) 제목 차용
   **  나는 꾸준히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 약을 먹는다. 약은 총 아침, 저녁으로 18알이며 가장 큰 부작용은 단어를 잊게 한다는 것이다. 감각을 무디게 하며, 불안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게는 해주지만,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약봉지를 뜯을 때마다 사실 내가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극도의 불안을 명확하게 느끼지만 내가 약을 끊을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것 그것뿐. 그것 하나만으로 나의 생업과 삶에 거대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단어건망증, 대화건망증은 정말 아찔한 결과를 불러올 때가 많다. 그러니까 이 시를 쓰며 나는 가장 중요한 말을 했었을 저 부분을 비워 둔다. 별의별 말로 채워 보려 했으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저 부분을 그대로 건너 뛰어 보려 한다. 부디 작가의 혼란스러운 감정까지 제대로 전달되길 바라며, 꼭 이 날의 사건이, 말이 기억나는 대로 다음 수정 원고에 채워 놓겠음을 이 시를 읽는 독자와 약속한다.

 

 

 

 

 

 

 

 

 

 

 

이소호
작가소개 / 이소호

1988년 여의도에서 연년생 장녀로 태어났다. 월간 《현대시》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2018년 시집 『캣콜링』으로 제37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2021년 영문 시집 『catcalling』(번역 soje),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에세이 『시키는 대로 제멋대로』의 저자로 시와 산문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문장웹진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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