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와 마주하기-서序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백지와 마주하기-서
: 시 읽기 현장1)

 

 

김준현

 

 

 

    백지 :
    백지(白紙)를 공간으로 인식할 때 흰색은 텅 빈 것입니다. 무의 상태-부재를 증명합니다. 이 공간에 존재(활자)를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 모든 작가의 숙명입니다. 종이 위에서 채도가 다른 흰 물감을 존재로 인지하는 화가들의 작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글자가 견인하는 의미와 소리의 영역에서 색 또한 폭력적인 구분 속에 묶인 하나의 단어-의미에 불과할 뿐입니다. 빨강, 주황, 파랑, 노랑, 보라. 이렇게 써놓아도 우리의 눈은 다만 이토록 흰 종이와 이토록 검은 글씨-백을 배면에 두고 존재하는 흑의 다양한 모양새를 통해 시시각각 의식으로 전환되는 글자들을 볼 뿐입니다.

 

    면벽행위 :
    2020년 《문학동네》 100호 특별부록집으로 나온 책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에서 진은영 시인이 쓴 산문 「기침, 종이, 죽음, 또 기침」의 두 구절을 가져옵니다. “문학을 해서 다행이다. 펜, 종이, 영혼만 있으면 된다. 어쩌면 영혼이 안 필요할 수도 있다. 끄적거리고 있는 흰 종이 위에서 찾아내면 되니까.” “나는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떠돌다가 종이에 닻을 내리기라도 하듯이 내가 곧 써내려갈 흰 종이 뒤에 숨겨져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집과 거리, 그들의 삶과 죽음을 문득 생각한다.” 여기서 흰 종이는 세계를 가리고 있는 막(膜)인 동시에 작가 개인의 영혼 옮기기에 선행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집과 거리, 그들의 삶과 죽음’에 닿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마주할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면벽행위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인연-생각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그러니 활자로 응집되어 뜻이 되려는 것들을-속가(俗家)의 인연을 뜻 아닌 것으로 두어 세계의 바깥쪽-무(無)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모습은 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하다고 했던 『금강경』의 한 구절을 생각할 때 지금 현재 이 세계의 형상은 언젠가 사라질 것-무로 돌아갈 것-지금 여기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바라보았을 때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 절대적 허무 앞에서 영혼을 준비하지 않은 채 쓰는 자들에게 이 흰 세계-무엇을 말하는 순간 사라지는 침묵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깜지 :
    중학생들이 ‘깜지’라는 벌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깜지 쓰기’는 종이를 오로지 글자만으로 빽빽하게 채워 캄캄하게 만들어야 하는 작업입니다.

    ‘잘못했습니다.’2)

    하나의 문장이 띄어쓰기도 없이 반복되며 종이를 가득 채우는 것을 보며 이 세계에서의 노동 행위란 더는 무엇도 쓸 수 없는 상태의 어둠-죽음에 다다른 자가 결국 종이 한 장이라는 드넓은 가능성을 잊고 단 하나의 문장에 사로잡혀 살다가 끝에 다다르는 구조적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징조 :
    최근 몇 년간 시인들의 데뷔작3)을 중심으로 유독 흰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  〈백지와 마주하기〉-서序는 근 몇 년간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흰색’ 및 ‘흰 이미지’를 주된 소재로 한 시 읽기의 현장을 가상으로 구상하여 만든 기록입니다. 옆에서 옆으로 건너뛰는 말하기의 환유적 속성으로 인해 흰색을 배후로 둔 채, 단어에서 단어로 사유가 비선형적nonlinear으로 전개됩니다.   
   2)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 종이 전체가 시커멓게 될 때까지 반복되는, 이유도 인과도 잊어버릴 정도로 지속되는 죄의식의 세뇌 외 손 운동은 청소년들에게는 새로운 체벌의 유형일지도 모릅니다.
   3)  장혜령, 「백」, 「눈의 손등」(2017년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 이다희 「백색소음」(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한여진 「검은 절 흰 꿈」(2019년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 김지연 「애도캠프」(201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수상작)

 

 

    마치 눈처럼 사라졌어.
    그에게, 유키는 snow와는 다른 단어였다. 그는 snow를 눈으로, 유키라는 단어를 죽음과 아름다움 사이의 것으로 기억했다.

(중략)

    여자의 등은 눈처럼 희었다. 남자는 다다미 바닥에 웅크린 여자의 목덜미를 보았다. 새벽녘에 여자의 붉어진 이유가 부끄러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단단하게 뭉친 눈의 따뜻함에 대해 생각했다. 백지白紙라는 흰 손의 손등을, 뒤집어도 손등뿐인 흰 꽃잎의 배면을 생각했다.

*

    일본 사람들은 생각하다라는 단어로 사고하는 것과 느끼는 것 양쪽 모두를 표현했다.

– 장혜령, 「눈의 손등」 부분(『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새의 날개를 닮은, 고요히 물결치는 백白의 입구로 들어가라” 그녀가 말했다. “그것이 너의 내부다. 너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희었고 내 앞에서 슬픔처럼 부드럽게 벌어지며 열렸다. 나는 걸었다. 빛의 계조를 따라 어두운 흰빛에서 밝은 흰빛으로, 점점 더 밝은 흰빛으로.

– 장혜령, 「백」 부분(『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언어가 언어라서 함의하고 있는 고통이 스스로를 향하건 타자를 향하건 언어는 존재 자체로 구제불능인 병적 상태-중증 환자-수동태입니다. 이토록 오랜 시간 인간의 입과 인간의 손에서 쓰이며 닳고 지친 육체가 된 언어를 새로운 언어로 교체하고자 하는 동력으로부터 시가 온다고, 거칠게 가정해 봅니다.
    여기서 언어가 놓일 자리-언어를 놓기 이전의 상태-즉 텅 빈 지면을 언어로 보존하고자 하는 모순되는 욕망은 가능한 걸까요? 배려라고 불러야 할까요? 혹은 시로서의 존엄(尊嚴)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가 여백(때에 따라서는 행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상 언어와 언어 사이의 휴지 상태-언어가 도약하는 순간 잠시 의미의 바깥쪽으로부터 비롯되는 휴지 상태를 이른다고 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언어의 존재를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언어의 부재 상태를 ‘희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쥐어야 하는 손바닥으로 상징되는 욕망의 바깥-반대편에서 “손등”은 무해하고 무력한 상태입니다. “유키”와 “snow”가 공동의 영역에서는 하나의 뜻을 공유하지만 한 개인에게는 딸의 이름이자 그 딸이 함의하고 있는 “죽음과 아름다움 사이의 것”이라고 할 때 생기는 그 간격의 무해함입니다. 사고하는 것과 느끼는 것이 (최소한 언어상에는) 분화되어 있지 않은 일본 사람들의 언어-세계관 속에서 경계를 만들어 감각을 분할하는 일과 경계를 없애고 결코 나눌 수 없는 생각-감정의 덩어리를 이야기하는 것의 차이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덩어리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후 ‘백색소음’과 관련하여 이어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그 두 언어-두 세계의 사이가 만들어낸 공백 상태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보편-공동의 언어 속에 폭력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할 때 여기에서 빠져나온 한 개인이 보존하고 있는 단어란 폭력적으로 들이치는 폭설 속에서 단 하나의 눈송이이고자 하는 힘입니다. 비록 그것이 끝내 세상 어딘가에 닿아 사라진다고 해도요.

 

    단 하나의 눈송이:

 

    처음 산 『단 하나의 눈송이』4)(사이토 마리코, 봄날의 책 2018) 사람의 손을 타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커피 얼룩과 한 손으로 돌리다 떨어뜨리며 생긴 펜의 흔적과 손때 등등― 흰 책의 숙명일까요? 새로 한 권5)을 더 샀습니다. 옆의 책과 같은 운명이 될까 봐 이 책은 읽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보존의 욕망이지만 바로 그 ‘보존’의 욕망으로 인해 대상의 내면으로 일정 부분 이상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복사본의 존재 이유는 원본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박물관의 유리 속에 전시되어 있는 고서古書의 내면은 복사본에도 담겨 있으니 같은 걸까요? 복사본은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인간-디스토피아적 미래사회의 클론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의 원본으로부터 양산되는 복사본들, 프린터 아래로 몇 장이고 나오는, 따뜻하고 잉크가 찍힌 지 채 1초도 지나지 않은 새 종이들-그들이 영혼이 없는 존재라면 어떻게 갓 낳은 달걀처럼 따뜻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은 2018년 초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으로 유학을 와 한국어로 쓴 시집을 지닌 한국인이 극동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얼어붙은 바다를 보며 읽은 것입니다. 해양공원 앞에 얼어붙어 있는 바다 위를 걷는 사람들이 활자처럼 보이는 순간-그들이 시처럼 느릿느릿 전개되어 가는 것을 그들과 같은 속도의 시선으로 읽으며 일본어로는 “ki”라고 하고 한국어로는 “나무”(「광합성」, 사이토 마리코 『단 하나의 눈송이』)라고 하는 것이 뿌리 내리는 순간과 “통역할 필요가 없는 바다”를 배면에 둘 수 있었습니다.
    눈이 아닌 “눈송이”. 한국어에만 있는 이 단어의 사용은 단·복수의 구분 없이 쓰는 “눈”과 달리 “눈송이”를 수많은 눈송이 가운데 하나로서 고유하고 개별적인 것-개인으로 인지하는 방식입니다.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눈’에 주목하는 자의 시선은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는 마지막 언술에서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욕망-개인의 고유성이 삭제된 자리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한국, 일본, 조선, 일제라는 역사적 맥락의 바깥을 향합니다.
    여기서 문득 흰색과 동일한 초성 ㅎㅅ을 공유하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내리고 사라지고 내리고 사라지는 순간의 반복을 거치다 보면 어느새 세상은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흰색은 세상 전체의 풍경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색입니다: 북극, 남극, 시베리아, 혹은 쓰는 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종이 등등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눈 덮인 세상(혹은 유사현실)은 희고 무해하며 춥고 외로운 것들의 공동체입니다.

   4)  보는 쪽에서 왼쪽
   5)  보는 쪽에서 오른쪽

 

 

    백색소음 :
    헤어드라이어, 비, 차 안에서 비, 샤워, 계곡 물, 진공청소기, 폭포: 아기를 위한 한 어플에 있는 백색소음(white noise)의 목록입니다. ‘음폭이 넓어 공해에 해당하지 않는 소음’이라는 사전적 정의와 흰색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모든 스펙트럼의 빛을 보여준다는 데 착안해서 백색(white)라는 명칭의 어원까지 함께 읽어 봅니다. 이 모든 소리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에게 효과적인 수면을 제공합니다. 의미를 동반하지 않고 규칙적이면서 동일한 주파수가 지속되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동안 의식은 무의식으로 향합니다. 아래의 시는 그 반대의 상황-눈을 뜨는 것으로부터, 이 희고 넓은 세계 속에서 형상을, 사물의 경계를, 각각의 선을,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하는 자의 발화입니다.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 이다희, 「백색소음」 전문(『시 창작 스터디』, 문학동네, 2020)

 

 

    “눈”을 뜨는 행위는 사실 ‘조용히’라는 부사가 없어도 소리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바깥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이미지는 정교해져서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날이 생기”므로 어쩔 수 없이 대상은 존재 그 자체로 예각이며 보는 자에게 아픔이 될 소지-가능성입니다. 눈을 감고 있지 않는 이상 세계는 시각의 영역에서 인지될 수밖에 없고 이 하나의 감각이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압도합니다. 활자화되어 읽힐 수밖에 없는 시에서 주체로서의 화자가 지닌 시선의 힘은 무해하거나 무력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말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에서 주체와 대상은 결코 빈자리로 둘 수 없습니다. 반성하거나 의심하며 질문하는 일: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졌다는 사실이 선행되면서 이 상황은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하나의 전제조건이 됩니다. ‘손을 가진’ 주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주어-서술어 관계에서 새로운 주체-대상의 관계를 맺게 된 “컵”과 “미끄러짐”의 문제입니다. 컵과 미끄러짐은 모두 “믿겠습니까?”라는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대상과 대상의 행위 중 한쪽만을 믿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던가요? 종교에서 ‘유일신’이라는 배타적 세계관은 하나의 제도적 장치가 되어 믿는 자들에게 주입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우 ‘믿음’은 세계를 구성하는 단일한 논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컵”도 “미끄러짐”도 주체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믿음에 앞서 우리의 눈부터 먼저 의심하는 게 일반적인 태도로 느껴집니다. 시는 참 이상해, 시는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는 일부 사람들의 말 혹은 낙인 효과에 기대면 시인은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유일한 목격자”이기에 그 어떤 증인도 옆에 둘 수 없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니 독자는 이해가 아니라 오로지 ‘믿음’만으로 수동태로서의 시에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없이 지속되는 백색소음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의식에 의해 포섭된 뚜렷한 이미지들로부터 탈주하여 잠-무의식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통로입니다. 말(나)을 덮어버리는 소리(이불)입니다. 잠이 꿈으로 연결된다면 이미지들의 질서와 정교한 서사 등은 사라지고 언어는 의미를 갖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꿈 혹은 시에 해몽(解夢)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아이가 쌀빛의 미음을 삼킨다 마음속 풍경은 언제나 소리가 없다 누 떼가 달려도 옥수수밭이 힘차게 스쳐도 누렇고 까맣고 육중한 흔들림일 뿐 세상은 젖은 앞머리처럼 고요하고 아이가 울 때마다 입속에서 쌀알이 갈린다 종일 어항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소리를 끈 TV 화면에 이마를 대고 아이가 아파서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본다 도요 도요 창밖의 나뭇잎은 반짝거리고 나는 물고기처럼 조용히 물을 삼키고 가슴속 옥수수들이 누렁니를 꺼낼 때 일어서라 사랑아 오늘은 힘을 내볼까 리본을 상상하며 발가락에 힘을 줘볼까 돼요 안 돼요 돼요 안 돼요 도요 도요 괜찮아요 바람 많이 불고요 작은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리면 아이는 실눈을 뜨고 자막만 한 세계를 본다 새들이 하늘을 파먹고 있어요 주님, 이 모든 걸 보고 있나요 나를 보는 너를 보는 게 서로 아파서 병원은 과일을 들고 찾아가는 곳 과수원은 무른 이마로 가득하다네 아이가 누워서 햇살인 듯 천장을 볼 때 나는 녹색 의자 위에서 눈을 감았다 드릴을 들고 수박만 한 머리를 뚫을 때 과즙이 흐르는 손목처럼 하찮게 빛나는 기도를 하고 싶었다

– 고명재, 「백색소음」 전문(2020 《공정한 시인의 사회》 8월호 수록)

 

 

    “마음속 풍경은 언제나 소리가 없다 누 떼가 달려도 옥수수밭이 힘차게 스쳐도 누렇고 까맣고 육중한 흔들림일 뿐 세상은 젖은 앞머리처럼 고요”하다는 것: 그러므로 “소리”는 언제나 육체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일 뿐이며 소리를 낼 수는 있어도 소리를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시각적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세계의 한편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소리를 끈 TV 화면”은 그 어떤 타자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상이기에 아래에 나오는 “주님, 이 모든 걸 보고 있나요”라는 질문과 공명하면서 (말하기·듣기의 영역으로서의) “하찮게 빛나는” 기도가 지닌 효용성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기도조차 빛으로 인식한다는 점까지 포함하여 세계를 시각 영역에서의 현실로 한정하는 데 강세를 찍습니다. 주체에게서 신에게로 향하는 일방통행로처럼 기도가 지닌 일방적 방향성은 눈을 감은 상태-세계의 숱한 이미지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기도할 때 입술을 달싹거리는 웅얼거림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는 내면의 소리이므로, 이 소리는 신에게 닿는 게 아니라 말하는 자의 내면을 맴돌 뿐입니다. “나를 보는 너를 보는 게 서로 아파서 병원은 과일을 들고 찾아가는 곳” 앞서 이다희 시인의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날이 생기”는 대상 이미지의 생래적 공격성을 너/나로 나눠 양자가 시선을 가지는 상태로 옮겨 봅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아픔이 된다는 점에서 유대/연대가 지닌 위로의 반대편에는 타자를 견뎌야 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병원”이란 공간, 이를테면 중환자실과 같은 공간이 환자를 식물적인 상태-수동태로 인지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과일”은 그 식물적인 상태가 어떤 절정-결실을 얻는 순간에 다다른 상황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혹은 동물)이 먹지 않는 “과일”은 “무른 이마”가 되게 마련이므로 쓸모없음: 대체로 무용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 병원에서의 삶을, 역설적으로 그래서 백색白色의 상태로 보존된 영혼을 드러냅니다. 누군가를 위해 달콤해질 필요도, 누군가를 위해 영양분을 제공해야 할 필요도 없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타자를 충만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시가 지닌 긍정적 가능성이자 미래가 아닐까요.

 

    지우개를 한 번 갖다 댈 때마다
    흰
    공터가 생겨나고

 

    거기 빛이 들어요

 

    졸려요
    엄마 품에 안기기엔 너무 나이들어 버렸으니
    말랑말랑한 지우개 가루 만지며
    잠이 들까요

 

    방금 막 열심히 지운 지우개의 가루는
    따스해요
    건조기에 넣고 돌린 수건들처럼

 

    졸려요 안고 있으면

 

    꿈은 여전히 온갖 선과 색채 들로 가득하겠죠
    꿈에서도 지우개가 필요할지
    꿈에도 몰랐나요

 

    몰랐나요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몰라도 돼요
    제가 방금 만든 거니까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 같은 생각들이 자꾸 쿵쾅거리며
    머릿속을 들락거리는 밤
    지우개를 손에 쥐고 잠을 자볼까 봐요
    꿈의 한쪽을 하얗게 지워 주고 나올까 봐요

 

    너무 열심히 지우면 꿈 한쪽이 뜨거워지겠죠
    그럼 전 또 집에 불이 난 꿈을 꿀 테고……

 

    괜찮아요
    시커메진 곳엔 다시 새 지우개를 갖다 대면 되고
    다 타서 재가 된 곳을 위해서라면
    지우개를 수백 수천 개라도 사오면 될 테니

 

    좋아요 좋아 다 못 지워도 좋아
    어차피 다 지울 수 있을 리 없잖아

 

    백색은 못 되더라도
    어쩌면 백색소음에는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밤새 흰 눈이라도 내린 듯

 

    하얗게

 

    하얗게

 

– 황유원, 「백색소음」 전문(《현대시》 2020 12월호 수록)

 

    (황유원 시인의 「백색소음」과 관련해서는 《현대시》 2021. 1월호에 비슷한 논지의 졸고를 실은 바 있어 해당 부분을 변용하여 앞서의 동일한 제목의 시들과 연결/단절의 지점을 찾아보았습니다.)
    우선 이 시의 전개 과정은 백색을 이루기 위해 공간을 구성하는 대상을 “지우개”로 지워 나가는 과정입니다. 백색을 색채로 인지하지 않을 때의 백색은 철저한 공空의 상태가 될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반대로 백색을 색채의 일부로 인지한다면 현실세계에서 공空의 상태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황유원 시인이 이야기하는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명제가 보편적 삶의 대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백색소음은 시각과 청각의 결합이라기보다는 다른 모든 소리-생각이 들어올 여지를 대체하는 무의미의 부피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소음”을 없애고자 하는 의지는 존재의 소멸 혹은 ‘존재’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수많은 소리-생각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여기서 흔히 이미지와 동일시되는 의식으로부터의 도피처로서 “꿈”을 들 수 있는데, 황유원의 「백색소음」은 “꿈은 여전히 온갖 선과 색채 들로 가득하”다며 “꿈에서도 지우개가 필요할” 거라는 언술을 통해 의식/무의식의 경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이미지의 힘-시각적 대상이 ‘쓰기’의 영역에서마저 그 권능을 드러내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백색소음에는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쓰기의 반대편에 놓인 “하얗게/ 하얗게”를 지향하는 시인은 어디에 도달했을까요?6)

   6)  졸고 〈백지白紙가 당신의 시선에 힘을 줄 때〉 부분 변용하여 인용, 《현대시》 2021. 1월호

 

 

    백석은 아름다운 성씨(白)를 타고났기에 ‘국수’와 ‘흰밥’과 ‘가재미’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눈’을 맞고 서 있는 ‘갈매나무’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가설: 이들은 백지에서도 제 이미지에 가까운 형태로 잔존할 수 있는 존재들의 공동체입니다.

 

    흰 머리와 병원의 흰 이불과 산소호흡기의 입김과 상복과 국화와 귀신과 유령과 손톱과 끄트머리와 수평선으로부터 모래사장에 다다른 파도의 끝:
    이들은 왜 모두 죽음 근처에 있습니까? 이들은 전부 어둠의 대립항입니까?
    동양인의 검은 머리를 절에서는 무명초無名草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 없는 풀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러므로 주체의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생명력을 통해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는 힘인 동시에 자르고 잘라도 뿌리로부터 끊임없이 밖으로 나오려는 욕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존재(혹은 존재하려는 의지)를 부정하는 행위로서의 삭발은 앞서의 면벽행위와 같은 맥락에서 속의 연을 끊었음을 표면화하는 한 방식입니다. 이러한 인위와는 대비되면서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노화입니다. 노화의 여러 징후로는 시력의 감퇴, 가는귀먹음, 속도의 둔화 등과 더불어 흰 머리카락을 들 수 있습니다. 백발白髮은 동·서양 혹은 인종적 차이를 막론하고 멜라닌 색소가 빠져나간 이후의 텅 빈 상태를 통해 표면화되는 늙음-무력함입니다: 식물성 1

 

 

    사람이 참 얄팍하다고 할 때 나는 종이를 생각한다. 뾰족한 펜의 끝을 생각한다. 그 끝에서부터 노랗게 말라가는 식물의 잎과 떨림을 생각한다. 핏기가 빠진 세 손가락 끝의 노랑을 생각한다. 노랑은 왜 잠깐인지 차량 신호등이 멈칫하는 호흡인지 안전선인지 더는 발끝을 내밀 수 없는 곳인지 생각한다. 그런 곳마다 피는 민들레를 생각한다. 어둠을 움켜쥔 악력을 생각한다. 철봉에서 나는 피 냄새를 생각한다. 내 온몸이 그 가는 선에 매달려 있었음을 생각한다. 흰 머리카락을 생각한다. 민들레의 최후가 풍장風葬임을 생각한다. 바람의 힘을 생각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1월부터 바다가 얼어붙는다는 것을, 텅 빈 눈을 생각한다. 그곳을 걷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먼 곳에서 보는 그들은 알 수 없는 글자라고 생각한다. 뜻이 없고 문법에도 맞지 않아서 슬프다고 생각한다. 글자들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노화라고 생각한다. 눈살을 찌푸리고 안경을 코에 걸치는 것을 늙음이라고 생각한다. 콧등에 진 주름을 얼음에 간 금이라고 생각한다. 곧 깨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는 사람이 참 얄팍하다고 생각한다.

– 김준현, 「흠」 전문(《시애》 2019 수록)

 

    ‘-생각한다’는 서술어가 반복되는 문장들은 첫 구절 “사람이 얄팍하다”에서 시작해 마지막 구절 “사람이 얄팍하다”로 회귀하는 구조를 이룹니다. 메타적 성격을 띤 것처럼 보이는 이 시에서 “글자들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노화로 보는 시선은 명징한 뜻을 가진 문자-언어가 육체의 쇠락과 함께 그 의미를 잃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물리적 한계로 인지 자체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축소된 문자는 주체와 대상 간의 거리를 만듭니다. 시선을 무력하게 만들어 ‘보는 자’가 지닌 ‘보이는 대상’ 앞에서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권능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즉 주체가 대상에게, 대상이 주체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을 정도의 거리입니다. 종이 위에서 모든 대상-글자들이 소멸하고 나면 남는 것은 주체일까요?
    한 장의 종이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텅 빈 종이입니다. 발화가 존재하지 않으면(글자가 없다면) 주체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한 공간입니다. 다만 여기에 단 하나의 형태소라도 있다면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영역 혹은 표면화된 세계로 그 단어를 가져온 주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 한 글자라도 쓰인 이상 보이지 않는 주체, 드러나지 않는 주체란 없습니다. 글자가 곧 주체의 존재 가능성입니다. 노화로 인해 그들-주체가 흐려지는 시간은 곧 현실에서 붙잡고 있던 자아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입니다. 그 경계가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입니까? 여기서 “핏기가 빠진 세 손가락 끝의 노랑”과 “흰 머리카락을 생각한다. 민들레의 최후가 풍장風葬임을 생각한다.”는 익숙한 환유-건너뛰기에서 힘을 준 부위의 피가 빠진 상태라는 역설을 돌려세워 봅니다. 색의 전환을 통해 긍정적 의미에서는 성장이 되고 부정적 의미에서는 노화가 되는 자연의 순리에 대해 이야기해 볼 때 노랑과 하양의 관계는 아래에 제시한 몇몇 예로 변주됩니다.
    ① 갓 태어난 새끼 오리가 노랑이었다가 성체가 되면 하양이 되는 것
    ② 민들레의 씨앗은 하양, 민들레는 노랑이라는 것
    ③ 달걀에는 노른자와 흰자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경계를 만든 채 함께 있다는 것
    ④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이 리본이 상징하는 정서를 내면화하는 일
    * 노란 리본은 전쟁터에 있는 사람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뜻으로 시작된 상징입니다. 기다림입니다.   

 

    영혼을 흰 상태라고 할 때 우리는 그 흰 상태 위에 누군가의 이름이, 소리 내어 부를 수 있는 누군가의 육체가, 구체적인 상(狀)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흰 영혼으로부터 구체화되는 노랑이란 “혁명을 민들레로 바꿔 부르는” (고명재, 「장례식에서」 부분, 《문학동네 》 2020 봄호) 시도에서 관념을 현실화하는 동력이 됩니다. 공간의 제약 없이 뿌리를 내려 정착하고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민들레를 이름 없는 수많은 존재-민중이라고 본다면 “혁명”은 그 존재가 자신의 색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만으로 이미 이뤄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 이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민들레 씨의 유랑은 사실 바람-타자에 의한 것이므로 자유의지라기보다는 숙명적인 것으로 읽히겠지요. 육체 이전의 상태는 곧 영혼이며 영혼이 어느 육체에 뿌리를 내릴지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숙명에 달린 것입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식물성 2

 

    그러므로 공간은 시선 자체에 관여하는 후퇴와 임박함의 장소가 되기 위해 자신을 비웠다. 터렐이 이야기하듯 들여다보기(a looking into)는 오브제를 쫓는 모든 시선(a looking at)의 반대편에 있다. 백색 장소가 되었다는 말로 비워진 공간을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색채상 백색일 뿐만 아니라 특히 ‘빈 곳(blank)’이라는 의미에서 ‘백지의(blanc)’ 장소다. 이 의미는 단순 색채나, 색채의 단순 제거와 무관하며 간격 두기(espacement) 일반, 침묵, 인적 없음, 결정적 누락과 연관된다. 이곳은 순전한 가상성과 관련된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터렐의 욕망은 사소한 공간-다시 말하자면 분별해야 하고 알아보거나 명명해야 할 가시적인 바가 존재하고 있는 공간들-을 해체하여 이로부터 빛을 발하는 간격이라는 순전하고 간단한 시각적 권능을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빛 가운데 걷기」(『색채 속을 걷는 사람』, 현실문화A, 2019)

 

 

    여기서 우리는 흰색의 의지-빛에 대한 격렬한 저항과 거부의 몸짓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대상의 경계-선을 인지하는 인간에게 있어 그 경계를 뚜렷한 형태로 드러내는 빛은 신神과 다르지 않습니다. (* 유럽 대성당의 가장 높은 지붕에는 빛이 들어오는 통로가 있습니다. 이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신(神)과 동일시된다는 점과 더불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한 자는 후광(後光)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봅니다.) 이때 흰색은 그 빛을 고스란히 바깥을 향해 반사하는 존재입니다. 사제들이 입는 흰옷이 신과 동일시되는 그 빛을 표면화하는 방식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사제들의 검은 옷은 최대한의 빛을 흡수하여 신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읽힙니다. 그러니 ‘빛’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로서의 흑백: 흰 종이 위의 검은 글씨란 빛을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힘을 통해 종이-무(無)의 공간에서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글이 종이 위에 쓰이지만 여백마저 제 것으로 함의하고 있는 시, 행과 연만큼의 호흡을 제 것으로 가져가는 시는 신이 마치 모스부호처럼 띄엄띄엄 하는 하는 말-신탁(Oracle)으로서의 언어-“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게(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부분)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오해라면 ‘시는 결과적으로 운명론적 체념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장르로군’ 같은 것이겠지요. ‘죽음’은 이미 모두에게 정해져 있는 결말입니다만 그것을 인간의 한계로 인지하는 태도는 적어도 여기-종이 위 언어가 놓여 있는 현실에서는 지양하고자 합니다. 태어남과 죽음을 처음과 끝으로 섣불리 정의하지 않음-보류하고 유예하고자 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의 시를 생각합니다. 거기서부터입니다. 시의 이후-언어가 다 끝난 상태(혹은 인간의 발화-말하기가 다 끝난 상태: 죽음으로 봐도 무방한)로부터 시는 다시 시작됩니다. 다 말할 수 없기에 다시 얼마간의 여백을 품은 채로 시작됩니다.

 

 

    흼과 힘의 동어반복적 성향 :

 

 

    한국 농담 하나를 해볼까
    한 여자가 애도를 표하는 하얀 상복 차림으로
    초상집에 가. 그녀는 몇 시간이고 곡하고,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누가 죽었죠? 나는 생각해 이 여자를

 

    그리고 그녀가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를. 본질적인 슬픔을.
    식민지 시기에 일본 역사가들은 확신했어
    한국의 하얀 도자기와 옷들은 가없는
    슬픔을 보여준다고. 색의 빈곤함을, 기쁨을 품을 수 없음을-

 

    무수한 외침外侵으로 사람들은 허하고
    공허해졌고, 영원히 애도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그 역사가들은 반도인들에 대한 유감을
    그들의 티 하나 없는 꽃병이 지닌 사랑스러운 순수함을 말했어.

 

– 에밀리 정민 윤, 「페티시」 부분(『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열림원, 2020)

 

 

    ‘곡비(哭婢)’라는 직업(職業)에서 업(業)에 강세를 주면 이 단어는 자연스럽게 전생과 후생이라는 맥락 속으로 이동합니다. 타자의 슬픔과 연대하며 울어야 하는 운명. 여기서 “누가 죽었죠?”라는 여자의 질문은 감정 이후에 도착하는 인식입니다. 혹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자”의 내부에 있으며 타자의 죽음은 단지 이를 밖으로 꺼내게 만드는 매개체라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누가” 죽었을까요? 죽은 자는 나와 같은 동료일지도 모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나를 버린 사람일지도 모르고 식민지 여성의 삶을 유린한 일본인일지도 모르는데, 왜 울기부터 먼저 했을까요?
    저는 여기서 사후적으로 오는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백색 즉 한 편의 시가 울음으로서, 쏟아지는 힘으로서, 그 어떤 색이든 제 색을 유지하며 펼쳐질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인 백색을 상상합니다. “한국의 하얀 도자기와 옷들은/ 가없는 슬픔을 보여준다고. 색의 빈곤함을. 기쁨을 품을 수 없음을-”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서 색채가 지닌 자질을 드러내고자 했던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 역사가들”의 대상화는 백색을 색채 이후의 것이라고 보는, 일종의 결정론적인 태도를 취한 게 아닐까요? 그들의 시간은 ‘거기’였고 그들에게 여성은 ‘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윤동주의 경우, 그들이 혹은 저들이 인간이어서, ‘우리’가 될 수 있는 자들이어서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물리적 경계를 넘어선 존재로서의 우리는 성별도 국적도 인종도 모를 그저 인간의 “백골”(윤동주, 「또다른 고향」)이며, 피와 살을 지니지 않은 그 흰 골격은 드러나지 않으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인간의 원형(原型)입니다. 윤동주는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인간으로서 모두가 느낄 수 있다고 믿었던 이 보편의 감정을 동일시함으로써 합일의 가능성에 닿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 역시 곡비(哭婢)의 운명을 짊어지고, 타자의 죽음에서 타자보다 죽음에 초점을 맞춰 슬픔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재도 여전히 후쿠시마 형무소 앞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는 일본인들의 모임 또한 그런 슬픔의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입니다.) 윤동주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백(白)의 이미지, 조선의 색(色)이라고 ‘인식되는’ 이 백(白)의 이미지는 에밀리 정민 윤의 「페티시」에서 하나의 성적 취향-소수자의 기호로서 타자에게 읽히는 정황을 뜻합니다. 문제는 이들의 해석 또한 자기중심적인 동시에 사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순수’란 비정상적인 세계를 옹호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구획된 폭력을 함의할 때가 많습니다. 저 역사가들의 머릿속에서 순수와 동일시되는 ‘흰 것’은 결코 더럽혀져서는 안 되며 그 어떤 타자와의 접촉도 연대도 허락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배타적인 경계선입니다. 인간과의 모든 연결고리가 끊긴 채, 다다미 깔린 그들의 방 안에서 “티 하나 없는 꽃병”으로 남아 거세된 꽃들을 담은 채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상화의 가능성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에 두는 세계관에 뿌리를 내린 채 타자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흰 자는 가까이 다가서 보면 더럽다.
    저 여자의 외로움이 지르는 비명.
    찢어지는 허파. 겨드랑이의 새둥우리.
    저 여자의 뱃속 냉동된 시신들로 붐비는 서랍.
    그 품속으로 등반가들이 시작한다.

 

    먼 옛날 연로하신 국어학자 선생님이 학생인 나에게 자신의 겨울 코트를 입히라 하시곤 말씀하셨다.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이라고 하잖아. 나 어렸을 적, 그 백의를 입은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면 너무 더러웠어. 저고리 깃이나 소매 깃, 가랑이가 얼마나 더러웠는지. 까맣고 반들반들했다니까.

 

    흼은 불가능이다. 미끄러지는 돛처럼 멀리서 보면 그제서야 희다.

 

    보다 큰 흰고래가 뱃전에 부딪힌다. 돛을 부러뜨린다, 배를 뒤집는다, 흼. 흼. 흼. 흼. 흼. 흼. 흼. 흼. 흼. 무서운 흼!

 

(중략)

 

    이 희디흰 알 속에서 몇 천 년인가.

 

    재로 변한 나의 뼈는 희지 않다.

 

    냄새 때문에 5인실에서 쫓겨나 1인실에 누운 흰 자의 기저귀를 갈고, 기저귀를 갈고, 기저귀를 갈고, 기저귀를 갈고.

 

    늙은 발레리나가 이제는 더 작아져서 조그맣게 커서처럼 깜박거린다. 희끄무레한 나신. 작은 몸이 깜깜한 어항 속에서 곧 죽을 치어처럼 팔락거린다. 그러니 숨도 크게 쉬지 마라. 미소도 짓지 마라. 쳐다보지도 마라. 저것이 녹을까 두렵다. 늙은 발레리나가 우주선에서 본 흰고래처럼 팔딱거린다.

 

    나는 일 년에 한 번 비행기를 타고 가서 흰 자를 본다. 그때마다 운다.

 

    남자가 여자를 때린다. 피가 번지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고 흰옷으로 갈아입히고 때린다. 감히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해? 하면서 때린다. 여자가 죽은 다음, 남자의 아버지는 남자가 여자를 때릴 수도 있지 하고, 카메라 앞에서 말한다.

– 김혜순, 「더러운 흼」 부분(《문학동네》 2020 봄호)

 

 

    “흼”은 수동태로서의 존재방식이며 ‘당함’을 전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서 동음이의어인 ‘힘’ 맞은편에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이라고 하잖아. 나 어렸을 적, 그 백의를 입은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면 너무 더러웠어.” ‘흼’을 관념적 대상으로 치환해 다른 색채로의 변주가 곧 오염으로밖에는 읽히지 않는다고 현실을 몇 번이나 뒤집어 가며, 성별과 세대와 세계를 가로지르는 파도를 타며 살면서 부서지는 순간-파편화되고 찢기는 한 충격의 순간에만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흼”을 드러내며 오는 시, 이제 하나의 장르라고 불러야 할 법한 ‘김혜순’의 리듬 안에서, 질기고 영원할 것 같은 청바지의 찢어진 부위가 너덜너덜 흰 섬유를 드러낼 때의 그 아픔과도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 지점으로부터 인간의 맨살이 드러나고 “저 여자의 외로움이 지르는 비명”을 들을 수 있으며 “지구 어머니의 큰 얼음이 녹아내리는 고통”이 시작되는 것을 감지합니다. 북극과 남극 두 극단이 끝내 지키고자 하는 그 “흼”이 인간의 영역에 들어서면 얼마나 속절없이 무너지는지 ‘데이트 폭력’을 연상하게 하는 “남자가 여자를 때린다. 피가 번지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고 흰옷으로 갈아입히고 때린다. 감히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해? 하면서 때린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피를 가장 잘 받아들이는 ‘흰옷’을 미학의 범주로 넣는 것은 여성의 오랜 대상화를 드러내는 역사, 그러니까 뮤즈(muse)라는 말의 함의가 아닐까요?

 

 

    기본 티는 기본으로 갖고 있어야죠. 점원이
    말했다. 흰 티셔츠를 찾아다니다 집에 있는
    흰 티셔츠가 기억났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집으로 돌아와

– 임솔아, 「기본」 부분(『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

 

 

    입었으되 입지 않은 것, 면으로서의 흰 티는 내 몸의 살을 비치게 합니다. 그것의 얇음-세계를 직접적인 영역에서 대면하게 하는 “흼”의 자질은 “기본”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손쉽게 “기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때나 얼룩이 묻게 마련이라서 금방 기본 이하의 존재가 되어 세계-바깥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이미지가 됩니다. “흼”이 주체가 될 때 그것은 언제나 자신이 감싸고 있는-보호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오염된 세계의 흔적이 묻는 것은 지극히 당위적인 것임에도 우리는 공들여 치약으로 그 얼룩을 문질러 ‘기본’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결벽 상태-기본은 어떤 기획에 의해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산물일까요?

 

 

    말할 수 없게 하는 것들-코로나19와 마스크, 눈을 가리는 것들-겨울이면 따뜻한 곳에서만 서리는 안경의 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는 괴물의 출현으로 인해 생긴 (정확히는 언론에서 존재한다고 공표한)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는 사회가 나옵니다. 횡단보도에 나란히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거칠게 기침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자들의 시선-시선은 대개 말이 압축된 표현입니다. 불안과 경계와 공포를 한 단어 이하로 축소해서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의 시선, 마스크는 바로 그 시선만 남겨 놓는 도구입니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백색(白色)으로 가리는 것이 표정이 삭제된 만큼 늘어나는 침묵의 영역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2020-2021년의 현실로부터 도출해 낸 결론: 코로나19가 내재된 말(-비말) 혹은 말 자체가 함의한 불순물이 곧 실재하는 바이러스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당위로 여겼던 대화의 새로운 (불)가능성을 고민하게 됩니다. 이제 대화는 원거리에서만 가능한 무엇인가가 되고 보다 비물리적이고 비신체적인 행위로서 말을 전달하는 방식-글에 가까운 것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인간의 내부에 함의된 말의 공격성과 폭력성을 인지하기 이전에 현장에서 마주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환하는 것이 비약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존재들에 대해 공포를 가져야 하는 상황의 은유란 ‘한강’이라고 하는, 서울시민들의 보편-공통의 영역 내부에서 잠들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온 괴물 한 마리로 인해 벌어진 아비규환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현실에 선행하여 보여준 것은 아마 2020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것-이미 많이 회자되었을 것 같지만-우리가 일상이라고 믿었던 감각의 재구성, 즉 공동체나 국가, 민족 등의 담론을 뛰어넘어 공유하는 공통감각의 허상이기도 할 것입니다. 혹은 코로나19라는 존재 앞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통감각이 구성되는 중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대한 개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타인과 함께하는 삶에서 ‘타인’의 존재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人이 아닌 人間이라는 세계관에서 이제 間을 적정한 거리로 벌려야만 지금의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 흰 마스크를 씁니다. 표정의 절반이 여백 속에 사라졌기에 남은 힘-시선을 통해 더 호소력 있는 표현이 가능해진다는 역설로서의 언어: 시와 마주하기 위해 다시 백지를 마주합니다.

 

 

    첨언

    처음 본격비평에 대한 청탁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작품 활동을 시작할 즈음부터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 지역_대구·경북에서의 경험적 사례에 기반해 지역문학과 관련된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살고 있고 이른바 ‘전국지(全國誌)’에 작품을 발표하는 주류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지역’과 관련한 일체의 것들은 사유의 영역 바깥에 있다. 그들이 지역문단에 관심을 가질 이유나 계기는 단언컨대, 없다. (중략)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서울의 ‘젊은’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서울’이라는 지역 개념이나, ‘문단’이라는 소속 관념은, 없다. ‘서울’은 특정 지역이 아닐뿐더러, 문학은 떼를 이루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개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략) 서울지역 문학이 가는 길을 모든 지역이 답습하는 경로 의존(path dependency)의 현실에서 지역문학, 지역문단이 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언컨대 없다.”7)

   7)  김문주, 「지역문학의 곤궁(困窮)과 가능한 미래」, 『낯섦과 환대』(열린시선 2019)

 

    인용한 비평이 적시하고 있는 명명백백한 사실로부터 나는 지역문학이 단순히 소외나 배제의 구도로 논의되는 대상이 아닌, 애초에 현재 시점에서 호명呼名 가능한 대상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논지 전개를 위해서는 우선 지역문학이라는 말이 지닌 중층성에 대한 이해가 (특히 경험적 측면에서) 선행되어야 한다. 더불어 해당하는 ‘특정’ 지역문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려면 결국 나 스스로의 경우로부터 시작하여 지역문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사유가 동반되어야 했다. 비평의 주체와 비평의 대상이 동일할 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 글이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할 가능성 및 자기-변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전업작가로서 지역의 지원사업 혹은 문화사업과 관련한 일을 직·간접적으로 마주할 때마다 특정한 단체 혹은 마치 지역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개인이, 기획자로서의 입장에서 비대칭적인 형태로, 독점적으로 사업을 주도하고 운영하는 실태를 마주하게 된다.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를 따로 나눌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인적 자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문학계(-특히 지역문학의 경우)의 구조적 문제겠지만 그럼에도 지역 내에서 최소한의 몇몇 ‘문학적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수평적 구도에서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한 장場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 혹여 그 장場이 존재한다 해도 지역문학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공동체 내에서 유의미한 형태로 수용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 지역문학에 대한 발언의 의지 이전에, 어떤 체념을 하게 만들었다.
    지역문학의 문제에 대해 현재로서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시점에서 조금 우울한 마음으로 떡볶이 1인분을 먹으며 〈그대 안의 블루〉를 듣다가 생각해 낸 것이 아동문학비평의 영역 중 동시 평론의 질과 공급에 대한 문제였다. 동화의 경우 동시에 비해 비교적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는 최근에 나오는 양질의 동화가 튼튼하고 건강한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비해(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가독성이 높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지점이다. 그만큼 동화에 대한 비평의 장도 넓은 편이고, 논의도 아동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물리며 다양하게 그리고 시의적절하게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시 장르의 한 하위 장르로서, 혹은 아동문학의 하위 장르로서 문학사적으로 동요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창작되어 왔던 동시는,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쓰는 시라는 정의가 필연적으로 일정 부분 내포하게 되는 한계-동시의 공리적 효용성 혹은 ‘어린이’를 계도 내지는 계몽의 대상으로 고착화하는 형태의 말하기8)로 인해 잠시 활발함을 잃었다가, 2000년대 후반 그리고 201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를 쓰던 시인들9)이 동시 창작을 병행하는 조류, 그리고 동시 창작자- 즉 동시단으로 일컬어지는 내부로부터의 자각 등 쉽게 일원화할 수 없는 다양한 요인으로 다시금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읽는 이와 쓰는 이 그리고 ‘동시’만을 다루는 문예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출판사마다 독자적인 개성으로 동시집을 기획하는 등 우선 양적인 측면에서 ‘동시’는 풍성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동시’와 관련된 논의 특히 현재의 ‘동시’가 작품으로서 성취하고 있는 지점 및 한계에 대한 논의는 창작된 작품군에 비해 너무도 부족한 실정이다. 뚜렷한 인과로 이을 수는 없겠지만, 동시를 쓰는 신인의 유입10)이 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으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으로서 동시 창작을 시작하는 평균 연령대가 (그렇지 않아도 고령(?)인)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더 높다는 점, 그리고 동시를 다루는 평론집의 수가 극히 적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조금 거칠게 동시 평론에 있어 최소한의 필요성을 정의하면, 우선 좋은 작품의 소개, 그리고 표면화되어 있지 않은 작품의 유의미를 지면 위로 끌어내는 일 정도가 될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은 이후 이어질 다른 작업들의 선행 작업으로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며, 평론가 각자의 개별적 작업으로서, 자기-미학을 배타적으로 옹호하고 이를 발언할 수 있는 이들, 즉 자기 관점을 견지하며 동시 평론을 수행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충분할 때 가능해지는 일이지 않을까. 그러나 동시 비평을 수행할 수 있는 소수의 지면이 있고, 발언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도,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이들이 지면으로 들어설 뚜렷한 입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하여 일종의 차선책(혹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진입로)이라 해도 좋을, ‘등단’이라는, 제도권 내부로의 진입로조차도 동시 평론이라는 분야의 경우 거의 한 손에 꼽아도 좋을 만큼 적다는 사실 등이 동시 평론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동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열린 지면이 보다 많아지면 동시 평론의 장이 활발해지는가? 구조적으로 여전히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등단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경로가 많아지면 동시 평론의 장이 보다 활발해지는가? 아니면, 이런 의문에 선행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 ‘동시’라는 장르, 혹은 그 장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중 해설과 감상 이상의 비평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토록 여러 의문에 방점을 찍고 나면 아무래도 아득해진다. 우후죽순, 동호회에 가까운 형태, 아주 좁은 세계,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읽히는 동시’에 집중하여 출판 생태계-출판 자본의 논리에 몸을 맡기는 게 보다 덜 머리 아프지 않을까? 물론 그 ‘읽히는 동시’가 어린이들의 구미와 상응한다는 보장은 없으며, 초등학교 교육 현장의 온작품읽기 혹은 작가 개인의 인지도, 그리고 다른 장르와의 연계(이를테면 랩 동시 혹은 동시집에 함께 실리는 그림 혹은 시그림책의 형태, 카툰 형태)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현 시점에서 동시 평론이 앉을 자리는 일견 꽤 협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동시에 대한 현장 비평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보다 전문적인 형태로 수행되고 있는지 보다 구체적인 자료와 실태 조사, 그리고 이 논의를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라도 완결에 가까운 형태로 써보고 싶은 내 마음이었기에, 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그리하여, 자꾸만 방대해지고, 옆길로 새는 것만 같은 생각을 굳이 모으지 않고 펼쳐 놓은 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래, 언젠가 보다 적극적인 취재를 기반으로 생각이 멀리 진행되고 그 생각을 온전히 따라잡을 수 있을 때까지 이 두 가지 비평-기획을 미뤄 두는 게 맞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청탁서에 적혀 있는 이 비평의 주제는 ‘자유’였지만, 동시에 ‘모두 함께 이야기 나눠 봐야 할 문학장 내 주요 문제점 및 이슈’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기에, 주제와 부제의 간격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가, 보다 징후에 가까운 작품들을 통해 초점이 아닌 방점을 찍는 마음으로, 몇몇 ‘시’들을 느슨하게 이어 읽는 현장을 구성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본격비평 청탁을 받기 전부터 조금씩, 자유롭게 쓰고 있었던 ‘흼’에 대한 이야기를 부족한 방식으로나마 이 지면에 일부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8)  이외에도 몇 가지 요인: 자연주의 일색이라거나 ‘동심’에 대한 일방적인 정의에 입각해서 쓴 동시 등을 들 수 있다.
   9)  정지용 백석 윤동주 박목월 등으로 이어지던 이 흐름은 한 세대를 느슨하게 건너와 김개미 김기택 김륭 김용택 문인수 손택수 송찬호 안도현 안상학 오규원 유강희 이안 이정록 장옥관 장철문 최명란 함기석 함민복 등 시와 동시를 함께 창작해 온 시인들의 작품이 동시단 내에서 다양한 자기-미학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0)  이와 관련해서는,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의 커리큘럼에 ‘동시 창작’이 있는 경우가 극히 적다는 점도 한 요인일 수 있다.

 

 

 

 

 

 

 

 

 

 

 

김준현
작가소개 / 김준현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2015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에 동시가, 2020년 《현대시》 신인추천 작품상에 평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나는 법』을 냈다. 서울 및 수도권, 하늘나라가 아닌 경산慶山에 살고 있다.

 

   《문장웹진 202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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