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팔

[단편소설]

 

 

펜팔

 

 

오한기

 

 

 

인간만세

 

    예상 밖이었다. 『인간만세』를 출간한 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하필이면 제목을 『인간만세』라고 지었냐는 것이다. 막 아저씨로 접어든 소설가의 삶과 문학에 대한 현타와 분노를 담은 소설이라서 인간(휴머니즘)이나 만세(긍정성)와는 관련도 없는데 말이다. 여러 매체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 나는 상징과 의미라는 레이어 뒤에 숨은 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부끄러워서였다. 진실을 고하자면, 인간만세는 주문이다. 실제로 내가 사용하는. 삶이 버거우면 중얼거리는 주문.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인간…… 만세…… 그럼 나는 좀비처럼 되살아난다.
    인터뷰 순회가 일단락되자, 나는 제목에 대해서는 언제 어디에서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내밀하지 않게 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소설, 『펜팔』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이게 바로 그 첫 소설이 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펜팔(pen pal). 숨겨진 속뜻 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귀는 벗이라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얼마나 단순 명쾌한가.
    『인간만세』가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증쇄를 찍지 못하고 시들해질 즈음부터였나. 나는 이유 없이 불안해졌는데, 알게 모르게 외부로 표출이 된 것 같았다. 진진이 성인 ADHD가 의심된다며 증상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캐물었지만, 나는 테스트 문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 산만해진 상태였다. 그러던 중, 불현듯 내가 인생 자체를 내려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조는 샤워 중에 나타났다. 평소처럼 샤워를 하다가 문장들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심지어 한 문단 전체가 떠올랐지만 메모해 두지 않은 것이다.
    아. 진진. 『인간만세』뿐 아니라 거의 모든 소설에 줄기차게 나오는 진진. 아마 지금 말하는 진진이 진짜 진진에 가까울 것이다. 넷플릭스에 히트작을 띄운 능력 있는 전도유망한 기획PD라고 하는데, 아직도 믿기지는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답십리도서관에서 상주작가로 일할 때 썼던 미니시리즈 <미지와의 조우>를 진진이 일하던 제작사 공모전에 제출한 것으로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진진은 <미지와의 조우>에 확신을 가졌지만, 대표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진진은 독립해서 성수동에 제작사를 차렸고 나와 계약했다. 무언가 내게 올인하는 듯한 제스처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진진은 남부럽지 않은 계약금을 제시했고, 나는 부담을 감수했다. 지금은 편성사 몇 군데에 기획안과 대본을 보내고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다. 반년가량 지났지만 특별한 연락은 없다. 나는 진작 포기했지만 진진은 여태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받은 계약금 때문에 진진을 아직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진진은 편성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작품을 기획하자고 난리인데, 월급을 주지 않는 한 내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계약 문제로 갈등을 겪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위약금을 뱉어내고 쿨하게 갈라서고 싶지만 목돈을 내줄 형편도 아니었다. 덕분에 주 1회 요식행위에 가까운 기획회의를 감내하고 있었다. 대본을 넘긴 뒤로는 비좁은 회의실에 붙어 앉은 채 가상 캐스팅을 하거나 서로 앓는 소리 죽는 소리를 하며 두 시간을 꼬박 채우곤 했는데, 진진만큼 나한테 관심을 표하는 이도 없어서 은근히 미팅이 기다려진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가상 캐스팅을 몇 번이나 갈아엎은 뒤 누가 먼저 신세한탄을 하려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진진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월급 대신 나를 선택한 건 우리가 비슷한 타입이어서였다나. 비슷한 타입이라니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어떤 타입이냐고 묻자, 진진은 계획인과 비계획인이라는 분류법을 제시했다. 말 그대로야. 계획인이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풀리는 인생이라면, 비계획인은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인생이지. 진진은 이렇게 설명한 뒤 둘 중 누가 더 행복할 거 같으냐고 물었다. 별 고민 없이 전자가 행복하지 않을까, 라고 답하자, 진진은 본인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인생을 즐기는 건 후자일 거라고 장담했다. 진진은 회의실 스크린에 노트북 화면을 띄우고 워드에 표를 그려서 칸을 나눈 뒤 유명인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계획인 : 아이유, 관우, 신사임당, 고이즈미 신지로, 장국영, 마이클 조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비계획인 : 헬렌 켈러, 슬라보예 지젝, 홍명보, 이순신, 수잔 손택, 이명박, 조지 클루니……

 

    지금 기억나는 건 이 정도다. 무슨 기준인지도 말해 줬는데 가물가물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계획인 타입으로 마음이 갔던 건 떠오른다. 그 뒤 진진은 계획인과 비계획인은 물과 기름처럼 상극이라느니, 필경 상대방을 배척하고 끼리끼리 뭉친다느니, 계획인과 비계획인의 기질은 타고난 거라느니, 장광설을 늘어놓았는데, MBTI처럼 순전히 억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진진의 눈에 광기가 서려 있었기에 말을 삼가고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다. 진진의 말이 잦아들 때쯤, 마침내 그토록 궁금했던 걸 물을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계획인이란 말인가, 비계획인이란 말인가.
    진진의 분류에 의하면 우리는 비계획인에 가까웠다. 나도 인정하는 바다. 따져 볼 것도 없이 내 인생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비계획인의 범주에 속한다. 한 가지 의문. 진진이 희망을 잃지 않는 건 비계획인다웠지만, 난 왜 희망을 잃었는데도 비계획인에 속하는가.
    다른 건 모르겠다. 계획인, 비계획인 가리지 않고 현실이 무지막지했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고는. 생계를 제쳐 두고 마냥 편성이 되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인세라도 챙기기 위해 진진이 드라마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 미뤄 두자고 했던 단행본 출간을 강행했다. 그 책이 바로 『인간만세』다.
    『인간만세』는 판매량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출간 후 인터뷰가 줄지어 잡혔다. 어느 인터뷰에서 차기작을 묻는 질문도 받았는데, 나도 모르게 이명박과 펜팔하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고, 완전 범죄를 위해 연달아 다섯 개의 인터뷰에서 똑같이 떠들고 다녔다. 이건 부끄러움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한 거짓말이다. 기질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소설가라서?
    그래도 노력은 했다. 마감을 앞둔 단편이 있어서 진지하게 동부구치소에 갇힌 이명박과 펜팔하는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아서 왜 그런 소설을 쓰고 있다고 대책 없이 내뱉었나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긴 했지만. 어느 순간 글 쓰는 동료들 사이에서는 내가 4대강 찬양론자라는 농담이 밈처럼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어서 처음에는 웃기지도 않아서 대꾸도 하지 않다가, 요즘에는 4대강 찬양론자가 맞다고, 좌파 같은 건 개나 줘버리라고 너스레를 떨 만큼 변해버렸던 게 떠올랐다. 달리 이유가 있겠는가. 좌파에 기댈 데가 없어서고, 또 아저씨가 돼버려서다. 아무튼 이명박이라는 키워드는 여기에서 나온 것 같고. 그런데 그럼 펜팔은? 이건 도무지, 도무지 모르겠다.
    결국 다른 소설을 써서 마감을 했다. 그런데 묘하게 미련이 남았다. 이명박이 손자뻘 되는 작가와 펜팔을 통해 우정을 쌓는 소설을 읽고 운동권 출신 국문과 교수가 나를 서정주에 비견할 만한 어용작가라고 맹비난하는 상상을 하니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이쯤 되면 나는 백 퍼센트 마조히스트가 아닌가 싶다.
    이명박이 초등학생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는 뉴스가 떠돈 건 계절이 바뀌고 진진마저 편성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 접은 후였다. 언론에 노출된 이명박의 답장에는 학생의 행복을 빌며 나라의 앞날을 우려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뒤 나는 충동적으로 이명박에게 편지를 보냈다. 돌이켜보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작가인데 위약금의 포로가 돼 철창 없는 감옥에 갇힌 상태다, 각계각층에 인맥이 넓을 테니 취업 자리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 같은 문장들을 거르지도 않고 줄줄 써서 보낸 걸 보니. 아, MBC나 KBS 사장에게 끈이 닿으면 제 드라마를 황금 시간대에 편성하도록 압박해 주시든가요. 추신으로 이런 말도 던졌구나. 별 이야기를 다 했네.
    얼마 지나지 않아 친애하는 오한기 작가님께, 라고 시작하는 답장이 왔다. 청탁은 원칙적으로 불법이고 오랜 정치 경력을 돌이켜볼 때 아무리 선의더라도 자칫 잘못하면 여론이 나빠진다면서 단칼에 거절했다. 이미 각종 비리로 범죄자 낙인이 찍혀서 수감 중인 데다가 여든이 넘고 대통령까지 해먹은 양반이 뭐가 그리 두려운지 의문이었지만, 편지 후반부를 읽자 의문은 곧 해소됐다. 정부와 사면에 대한 물밑 협의가 끝났고, 트럼프가 다음 대선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영감을 받아서 출소한 뒤 비밀리에 차기 대선 캠프를 꾸릴 예정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재출마에 대한 법적 근거도 나열돼 있었는데, 그가 얼마나 진지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왜 이런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았는지 스산한 느낌이 들어서 답장을 하지 않았다.
    보름 뒤, 이명박은 다시 편지를 보내왔다. 보통 밑도 끝도 없이 찬양을 늘어놓는 지지자의 편지나 비난과 욕설이 뒤섞인 편지를 받았는데, 마치 고등학교 동창이 보낸 듯한, 진솔하고 격의 없는 편지를 받은 건 오랜만이라면서. 그래서 주책맞게 대선 출마 같은 비밀도 스스럼없이 털어놓게 된 것 같다고도 적혀 있었다. 이래봬도 현대건설 대표이사 시절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집필한 작가라면서 동질감이 느껴진다는 구절도 눈에 띄었다. 남은 수감 기간 나와 편지를 나누며 지치고 각박해진 마음을 달래고 싶다는 제안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선입견 때문에 꿉꿉하기도 했지만, 진정하고 주제파악을 하니 나를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해 주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어서 수락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현실에 대한 징징거림, 그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주를 이뤘다. 대여섯 번 정도 편지가 오간 뒤였나. 어느 편지에선가 내가 정부와 민주당을 비난했더니 정치권 비사와 외교 대외비가 화답으로 날아왔다. 그때였다. 이명박이 비로소 나한테 마음을 활짝 열었다는 느낌이 든 건.
    편지를 주고받을수록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명박만큼 남녀노소가 싫어하는 정치인도 드문데, 욕먹을 각오로 말하면 이명박은 그 어떤 정치인보다도 진솔했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이명박 역시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작가님과 서신을 교환하고 있자니 마치 젊은 시절의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저도 흙수저였어요. 영혼 하나만을 가진 채 혈혈단신으로 자수성가했지요. 영혼이 중요한 겁니다, 영혼이. 설혹 그 영혼이 새까맣게 썩었을지라도. 이명박과 내가 같은 영혼을 지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느 순간 진진의 분류법에 표기된 이명박이 떠올랐다. 우리가 이렇게 잘 통하다니. 역시 이명박은 진진의 말대로 비계획인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기분 탓인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외로웠다. 절교는 기본이었고, 절교하지 않은 친구들은 절교하지 않고도 떠나갔으며, 내가 절교하지 않은 친구들을 떠나기도 했다. 어쩌면 이명박은 하늘이 내려 준 마지막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날 수 없으므로 애틋하고, 나이 차가 나므로 예의를 차릴 수 있는, 그야말로 바람직한 친구 관계. 그도 나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지금은 편지를 모조리 불태우는 바람에 정확히 어떤 문장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장난삼아 이니셜을 따서 그를 B라고 불렀다. 그도 애칭을 마음에 들어 했다. 친애하는 B에게. 존경하는 B에게. 나의 마지막 친구 B에게.
    이건 진짜 비밀인데, B가 부탁을 하나 한 적이 있다. 파리 떼처럼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 먹던 측근들이 이제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면서.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不十年), 이게 다 권력의 뒤안길이야, 라고 그때부터 말을 놓았던 것도 기억난다. 부탁이란 다름 아니라 추징금으로 인해 논현동 사저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는데, 그전에 몰래 들어가서 블라디미르 푸틴이 선물했던 다이아몬드 박힌 만년필을 청계재단 행정실에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몰래라는 말에 담을 넘는 상상을 했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B는 비밀번호를 가르쳐줬고, 나는 별다른 제지를 당하지 않고 사저에 들어섰다. 아직도 생생하다. 텅 빈 저택.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마당.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바비큐 도구. 거미줄. 쥐똥. 길고양이. 가스가 유출된 듯한 큼큼하고 시린 냄새. 시체를 매만지면 이런 섬뜩한 느낌일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차디찬 마루.

 

 

 

산책하기 좋은 날

 

    나는 문장에 민감하다. 문장에는 작가의 인생이 묻어난다는 게 지론이라면 지론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별거 아니다. 블로그에 일기를 쓰는데, 일기에 쓰인 문장의 길이, 호응 관계, 쉼표 횟수, 리듬, 단어와 수식어 활용, 묘사법 따위를 통해서 컨디션이나 운세 따위를 점치는 것이다.

 

    초여름부터 유난히 덥다. 스콜을 연상시키는 소나기가 수시로 내렸고, 선풍기보다 에어컨 실외기 팬이 돌아가는 걸 자주 봤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하고 선명한 쌍무지개도 떴다. 저 무지개가 무슨 모양하고 비슷할까 직업병처럼 생각했는데, 무지개면 무지개지 뭐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을 멈췄다. 무지개 사진을 찍어서 지인들에게 보냈는데, 답장이 없거나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왔다. 딱히 실망스럽지 않았고, 이런 내가 로봇이 된 것 같았다. 휴대폰을 매만지며 길을 걸었다. 그림자가 길게 뻗어서, 길가에 있는 다섯 개의 돌무덤을 건드렸다.

 

    올해 7월 20일 일기다. 담백? 무미건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씨니컬? 무심? 아무튼 앞에 언급한 표현들이 어울릴 듯한 문장들이 일기를 채우고 있다. 1년 넘게 이런 식의 문장들이 쓰이고 있다. 숨을 죽이고 꾸역꾸역 살고 있달까. 나는 내 문장들을 이렇게 해석한다. 최근엔 조금 나아진 것 같긴 한데, 아직도 혈이 막힌 느낌이 분명히 든다.
    문장에 대한 개똥철학으로 이 챕터를 연 건, 『산책하기 좋은 날』 역시 꾸역꾸역 사는 듯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고 밝히기 위해서다. 일기에 쓰인 문장이 어떻든, 소설을 쓸 때는 오디션장에 들어선 뮤지컬 배우처럼 방방 뛰곤 했는데, 요새는 그 간극이 줄어들고 있다. 철이 드는 건가 죽어가고 있는 건가.
    문장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두자. 『산책하기 좋은 날』은 지난 5월 현대문학 핀시리즈에 발표한 경장편으로, 겨울이 되면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코로나 재택근무에 지친 화자 오한기가 동이나 구 단위의 먼 거리를 산책하는 내용으로, 특이할 만한 지점은 화자가 어린 시절 살던 집까지 산책 갔을 때, 그 집을 매수하려고 둘러보던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과 우연히 조우했고, 그 만남을 계기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 제목은 미정이며 화자와 앵무새를 주연으로 한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이다. 출간 전에 묘사를 보강할까 숙고 중이다. 묘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다시 그 긴 거리를 산책해야 하는데, 그게 두려워서 그대로 출간할 가능성이 높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본주의를 미래 인간의 시선에서 그린 영화를 기획 중이었는데, 설명만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을 테니 시나리오를 옮겨 놓겠다. 다음은 소설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시나리오 14씬이다.

 

    #14. 롯데타워 / 낮
    잠실역에서 나와 롯데타워 로비로 진입하는 오한기.
    오한기의 어깨에는 앵무새가 앉아 있다.
    뚜벅뚜벅 어디론가 향하는 오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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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대행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오길 기다리는 네댓 명의 인간들을 멀거니 바라보는 오한기.
    오한기, 품에서 단도를 꺼내 인간들을 연달아 찌르기 시작한다.
    징, 하고 금속 파열음이 나더니 푸르스름한 냉각수를 흘리며 주저앉는 인간들.

 

    오한기 : 휴먼……

 

    그때 어디선가 호각소리가 나고, 경찰들이 달려온다.

 

    앵무새 : 비상! 비상!

 

    달아나는 오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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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계단.
    오한기, 전망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앵무새는 푸드득 푸드득 위로 올라갔다가 오한기의 어깨에 앉길 반복한다.

 

    30층.
    60층.
    90층.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헐떡이는 오한기.
    앵무새도 그런 오한기를 따라하다가 지겨운 듯 한숨을 쉰다.

 

    앵무새 : 에계, 지쳤어?
    오한기 : AI……
    앵무새 : 지쳤냐니까?
    오한기 : AI……

 

    120층에 다다른 오한기와 앵무새.
    전망대를 지날 때쯤 경찰들이 보이고,
    오한기는 황급히 옥상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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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질녘 서해안 고속도로.
    서해대교. 질주하는 수십 대의 레이싱카.

 

    우측에 펼쳐진 서해.
    해가 바다에 잠기더니, 거대한 꽃게가 솟아오른다.

 

    꽃게 : 꽃게. 꽃게.

 

    고속도로 위로 떨어지는 꽃게의 음성.
    그 순간 레이싱카들이 갑자기 게처럼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리 난간을 부수고 바다로 추락하는 레이싱카들.

 

    꽃게 : 꽃게. 꽃게.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구름 위로 올라가는 꽃게.
    언뜻 해가 다시 뜬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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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타워 옥상 문을 여는 오한기.
    주체할 수 없이 눈부신 빛이 한 움큼 들어오고. 오한기와 앵무새는 눈을 가린다.
    빛 사이로 언뜻 보이는 괴생명체.

 

    괴생명체 : 휴먼?

 

    오한기, 괴로운 듯 신음을 내며 손을 뻗는다.
    그때 누군가 오한기의 복부에 칼을 찔러 넣는다.

 

    앵무새(음성) : AI……

 

    윽, 하며 주저앉는 오한기.
    온몸에서 파란 피가 흘러나온다.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예술영화이니 시나리오에 대한 평가는 제쳐 두자.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시나리오 자체보다는 연출자의 아우라가 텍스트와 결합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소 불공정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차별성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기대를 걸어 본 것도 있다.
    말하다 보니, 내가 실제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 출연한 걸 얼떨결에 밝힌 것 같다. 공개적으로 말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산책하기 좋은 날』은 픽션이지만, 크리스토퍼 놀란과 예전에 살던 집에서 만나서 영화 출연 제안을 받고 촬영에 임했던 것 만은 사실이다. CN이라고 불렀던 것도!
    이건 자존심 같은 거라서 밝히는데, 참고로, 나는 CN의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싫어하는 편이었고 정신적인 여유도 없어서 캐스팅 제안을 몇 번이나 고사했다. 출연료를 두 배로 올려 준다고 하기 전까지는.
    진진에게는 비밀로 했다. 용돈벌이일 뿐인데, 제작자랍시고 소속 작가를 관리한다며 설치면 성가실 것 같아서였다. 진진에게 CN이 계획인이냐, 비계획인이냐 떠본 적은 있었다. 진진이 CN은 전형적인 계획인이라면서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인정하긴 싫지만 진진의 말대로 CN과 내가 상극이었던 건 맞는 것 같다. 예상 외로 CN은 아마추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사전 예약이나 허가를 받지 않아서 딜레이된 촬영도 허다했지만, 배우 역시 작품의 구성요소라고 가스라이팅하며, 직원에게 능동성을 강요하는 사장처럼 배우를 대하는 연출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갈등이 일 때마다 CN은 촬영을 멈추고 잠수를 탔고, 나는 CN의 유아적인 면모에 진절머리를 쳤다.
    CN을 달래며 힘겹게 촬영을 이어 가던 도중, 핀시리즈 마감이 다가왔고 CN에게 영화를 찍는 과정과 시나리오 일부를 소설화하면 안 되겠냐고 문의했다. CN은 같은 창작자 입장에서 반대할 수는 없지만, 실명과 작품이 사전 공개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같아서 다른 소설을 쓸까 고민하던 중, 동업자의 탈세로 CN의 제작사가 파산한 뒤 촬영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그러나 CN이 출연료를 미지불한 채 자취를 감추면서 나는 모든 걸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산책하기 좋은 날〉의 집필 목적은 확실했다. 〈산책하기 좋은 날〉이 번역돼 조세피난처 같은 데 숨어 있을 CN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글에 담긴 분노도 고스란히. 감히 꾸역꾸역 마지못해 살고 있는 순문학작가의 돈을 떼먹다니.
    입을 연 김에 미처 공개하지 못한 것도 밝히겠다. 소설에 인용한 시나리오에는 앵무새의 비중이 꽤 높은데, 사실 초고에서는 파트너가 아니라 소품일 뿐이었다. CN은 나 스스로가 영화 창작의 주체가 돼 파트너 캐스팅에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나의 거대한 메타무비로서 말이다. 안 그래도 상극인데 되도록 말은 섞지 말고 돈이나 받자 싶어서 굳이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았지만, 소설가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항상 메타소설 취급받는 자타공인 메타서사 전문가로서 CN의 감각이 낡았다고 생각했다. 메타는 본능적으로 하는 거지 의도적으로 하면 망하기 십상이거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몇몇 씬을 촬영한 뒤, 나는 본격적으로 캐스팅에 착수했다. CN은 배우가 아니어야 하며, 직관적으로 단번에 자신을 설득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나는 친분이 있는 예술가들의 프로필을 읊었지만, CN은 도무지 영감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보아하니 화제가 될 만한 셀럽을 원하는 것 같았고, 나는 고민 끝에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로 B였다. CN은 B와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수감 중인 걸로 아는데 영화에 출연할 수 있냐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캐물었다. 펜팔 친구라고 하면 설명도 길어지고 믿지도 않을 것 같아서 대충 둘러대며 사면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가능성이 있다고도 말하자, CN은 B에게 캐스팅 제안 편지를 쓰는 장면을 시나리오로 써서 보내주며 당장 캐스팅하라고 주문했다.

 

    #오프닝 / 밤
    책상 앞에 앉아 백지 위에 글을 쓰는 앵무새.
    앵무새 날갯죽지에는 금으로 도색된 펜이 끼워져 있다,

 

    오한기(음성) : 뭐라고 써야 할까?

 

    책상, 스탠드 밑에는 가재들이 가득 담긴 어항이 있다.
    어항 속. 수면 위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가재들이 부유하고 있고,
    자갈 바닥에는 가재 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때, 오한기 F. I.
    앵무새 뒤편을 오가며 고뇌에 잠긴 오한기.

 

    오한기 : 함께 물구나무를 서 주시겠습니까?

 

    앵무새가 오한기가 말한 내용을 그대로 적는다.

 

    오한기 : 아니, 고쳐. 서로의 팔꿈치 뼈를 도려내 볼까요?

 

    앵무새가 물구나무가 들어간 문장을 지우고,
    팔꿈치 뼈가 들어간 문장을 쓴다.

 

    오한기 : 아니! 아니!

 

    머리칼을 잡은 채 주저앉는 오한기.
    앵무새, 심드렁한 표정으로 황금 펜을 어항에 넣고 이리저리 휘젓는다.
    어항 속 물이 황금색으로 물들고,
    그때 알에서 깨어나는 가재 새끼들.

 

    오한기 : 읍!

 

    그때 오한기,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텔레파시를 보낸다.
    펜이 저절로 움직여서 백지에 글씨가 써지기 시작하고 앵무새가 펜을 붙잡고 버틴다.

 

    오한기 : 천재!

 

    앵무새가 공중에 떠서 어항 속에 처박히고, 가재들이 앵무새를 갉아 먹는다.
    황금색 물에 퍼지는 앵무새 피.

 

    펜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백지 위에 써지는 글씨.

 

    오한기(음성) : Will you marry me?

 

   다시 읽어도 조잡하기 그지없다. 나는 상식적인 현대인이며, 당연히 시나리오처럼 비현실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다. B에게 출소한 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있냐고 공손히 물은 것이다. 머지않아 답장이 왔다. 〈다크 나이트〉를 감명 깊게 봤다며, 악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영웅인 배트맨 캐릭터가 자신의 인생과 동일시되는 지점이 있어서 신기했다는 내용이 서두에 적혀 있었다. 자신을 다룬 영상물 이야기가 이어졌다. 〈야망의 세월〉이 자신의 성공담을 모티브로 삼은 드라마이며, 주진우라는 기자가 자신의 비자금을 다룬 〈저수지 게임〉이라는 논픽션 영화를 제작해서 떼돈을 벌었다고 말이다. 아직 새 발의 피도 못 찾았지. 저수지는 깊어. 저수지 바닥에는 금은보화가 그득하지. 물론 시체들도. B가 편지 속 문장들을 읊조리며 빌런처럼 킬킬거리는 장면이 연상돼 나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뒤 B는 대선을 앞두고 위기에 몰린 정부가 사면을 무기 삼아 여당과 딜을 하고 있다면서, 지금으로서는 촬영 스케줄에 맞출 수 있을지 확답할 수 없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정치적인 논쟁에 휩싸일 수도 있으니 가능한 정치인의 출연을 재고해 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역시 B는 한 나라를 통치했던 인물다웠다.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혹시 그래도 본인을 캐스팅하고 싶으면, 2007년 대선 때 무리한 스케줄로 연단이 먼 행사마다 대역을 썼는데, 그 대역에게 출연을 제안해 보라면서 매니지먼트사의 연락처를 적어 준 것이다. 나는 매니지먼트사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지만, B의 대역이 재작년 사망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인간 쥐의 습격

 

    『인간만세』를 출간하고 『산책하기 좋은 날』까지 발표하자, 진진은 왜 드라마에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고 토라졌다. 편성사에서 연락이 없는 것도 드라마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붓지 않는 내 탓이라는 것이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인간만세』를 구입해서 읽어 봤는데 더 이상 소설에 시간낭비하지 말라며 신경을 긁는 메일이 왔다. 회신하지 않으니까 투잡 금지라는 계약서 항목을 들먹이며 드라마에 집중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물어내고 소송도 불사해야 할 거라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그제야 나는 덜컥 겁이 나서 신작을 구상 중인데 메가히트작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둘러대며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선수를 쳤다. 마지못해 승낙한다는 듯 단답형으로 답장이 왔다. 메일을 보낸 뒤 환희를 주체하지 못한 채 입 꼬리를 코 가까이 올리고 있는 진진의 모습이 상상됐다. 한편의 청춘 드라마를 닮은 우리 비계획인의 우정을 담아, 라는 멘트를 적은 뒤 사인을 해서 『인간만세』 단행본도 보냈으니 하루 종일 히죽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구상도 하지 않은 작품에 대해, 메가히트작 운운해 놓고도 걱정이 되지 않을 만큼 확신했던 것 같다. 그게 어떤 작품이든 진진의 마음에 들 거라는 걸. 아무래도 우리는 비계획인이니까.
    신작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인간 쥐의 습격〉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인간 쥐의 습격〉은 내가 대학 다닐 때 직접 쓰고 연출하고 편집한 15분짜리 단편영화다. 원본은 어디 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장난삼아 만든 예고편은 유튜브에 올라가 있다.

 

    로그라인 : 쥐를 닮은 남자가 세상에 복수하는 이야기

 

    상상마당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제출했던 게 기억난다. 본선 통과돼 상상마당 홈페이지에 게재됐다가 경성대 영화과 학생에게 신랄한 비판이 담긴 쪽지를 받았던 것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을 오독한 거 아닌가? 영화는 장난이 아니니 장난칠 거면 당장 그만두라는 게 요지였다. 신기하다. 문학판에서 들었던 비판과 일맥상통한다는 게. 「새해」가 젊은작가상을 탔을 때 절정이었던 거 같은데.
    미련이라도 남아서 〈인간 쥐의 습격〉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인간 쥐의 습격〉이라는 영화 자체가 아니다. 다름 아니라, 〈인간 쥐의 습격〉의 주연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윤주환에 대해서다. 윤주환은 설치류와 유사한 구강구조를 지닌 160센티미터대의 남성이며, 나는 아직도 고3 때 쉬는 시간마다 기이한 손동작을 취하며 물리 문제를 풀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성균관대학교 전자전기공학과에 입학했고 운동권 노래패와 힙합동아리에서 활동했다. 4학년 때 정보통신공학부 단과대학 부회장을 맡은 뒤 본격적으로 NL 대학생 단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민중당 당원이 됐다. 지금은 안양에 위치한 중소기업 연구원으로 일하는 중이며, 최근 간신히 파산을 극복했다. 윤주환이 금전 문제로 한창 힘들 때 30만 원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받는 데 3년이 걸렸고 서로 빈털터리라는 걸 이해하는 사이라서 관계는 틀어지지 않았다. 특이한 이력으로는 2018년 민중당 소속으로 수원시 시의원에 출마한 적이 있다는 것 정도. 이 정도 프로필 외에는 밝히지 말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써둔다.
    왜 윤주환의 프로필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느냐면, 신작의 주연 역시 윤주환이기 때문이다. 신작은 내가 직접 쓰고 연출할 영화이며, 윤주환 외에도 주연이 또 있다. 일론 머스크다. 맞다. 테슬라의 CEO.
    메가히트작을 얼른 내놓으라는 진진의 재촉에 벼랑 끝까지 몰렸던 어느 날, 나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일론 머스크의 어린 시절 사진을 봤고 소름이 돋았다. 윤주환과 닮았기 때문이다. 구강구조를 비롯한 외모적 특성뿐만 아니라, 이과적인 천재성이 유사했다. 차이라면, 일론 머스크는 세계 최고의 부자이고, 윤주환은 신용을 갓 회복한 중소기업 연구원이라는 점. 유사성과 차이성의 엄청난 간극을 접한 뒤 영감이 화상 상흔처럼 부풀어 올랐고 나는 미친 듯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로그라인 : 도지코인 투자로 파산한 윤주환이 일론 머스크에게 복수하기 위한 여정에 오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대강의 시놉시스를 이야기하며 출연 제안을 하자 윤주환은 뛸 듯이 기뻐했다. 직접 만든 나조차 잊고 있었던 〈인간 쥐의 습격〉 포스터를 보내면서, 영원히 연구실과 원룸을 오가며 인생을 탕진할 것 같았는데 이번 작품이 어쩌면 지지부진한 삶을 벗어날 기회인 것 같다고 해서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승낙을 받아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울한 목소리로 연락이 왔던 것도 기억난다. 시나리오에 결정적인 오류가 하나 있다면서. 단순히 구강구조가 유사하다뿐이지, 아무리 거울을 봐도 일론 머스크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을 했고 윤주환은 수긍했다. 간단해. 일론 머스크와 네가 거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고 생각해 봐. 너는 일론 머스크가, 일론 머스크는 네가 되는 거지. 그럼 너는 테슬라의 CEO고, 일론 머스크는 민중당원이자 중소기업 연구원이라고. 거울을 매개로 뒤바뀐 거야.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넌 거울에서 뭘 보게 될까? 그건 과거일까 현재일까 미래일까 아니면 아예 다른 세계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진은 좋아했다. 시나리오를 내밀고 윤주환과 일론 머스크의 사진을 나란히 보여주자 진진은 투자를 자처했다. 편성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선댄스 영화제를 목표로 삼자며 흥분했는데, 역시 부담스러웠지만 투잡 금지와 위약금 반환이라는 협박 멘트를 도로 집어넣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진진이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회의에 나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묻자, 진진은 생각해 보니 다른 건 부딪혀 보면 가능할 것 같은데 일론 머스크를 대체 어떻게 섭외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직도 올림픽 3관왕을 보듯 나를 우러러보는 그의 눈을 잊지 못하겠다.
    믿는 구석이란 B였다. B에게 편지를 써서 대강의 시나리오를 이야기하고 이건 청탁이 아니며 캐스팅 과정이다, 그러니 출마에 방해가 되지 않을 거다, 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크레딧에도 올려 줄 테니 영화가 성공하면 예술에 조예가 깊다는 이미지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허풍을 떨기도 했다. 아마도 윤주환과 일론 머스크가 주인공인 이유를 곡해한 듯한데, 답장에서 B는 양극화 극복은 평생의 숙원사업이었다며, 도움을 요청해 주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공치사를 했다. 이어서 절친 오바마를 통해 민주당-친환경사업 로비스트에게 줄을 대면 일론 머스크의 연락처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거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감사 편지를 보내고 사흘 뒤 B에게 답장이 왔다. B는 일론 머스크의 VIP 메일 주소를 가르쳐주며, 운을 띄워 뒀으니 시나리오를 보내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일론 머스크에게 B의 친구라고 소개한 뒤 시나리오 번역본과 윤주환의 사진을 보냈다. 다음날, 일론 머스크에게서 홍보팀과 상의하고 답을 주겠다는 짤막한 회신이 왔다.

 

 

 

마름모 브라우니

 

    일론 머스크, 그 인간 이야기는 하지도 말자.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몇 차례 더 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수신확인을 하질 말든가.
    좀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마름모 브라우니」는 『인간만세』 초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썼던 작품이다. 『인간만세』의 대체품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초고를 쓴 뒤 긴가민가해서 도로 『인간만세』로 돌아갔다. 「마름모 브라우니」를 쓰기 시작할 당시 나는 브라우니에 꽂혀 있었는데, 맛이 아니라 모양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동안 브라우니를 정사각형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왜 마름모라고는 불리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 어느 순간 나를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브라우니가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인지하고 갈등했지만, 이미 불이 붙은 터라 그 정도 오류로는 제동을 걸 수 없었다.
    「마름모 브라우니」는 화자인 소설가가 태릉에서 자양동으로 이사를 가고 옆집에 살던 변호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무척 신기했는데, 나 역시 소설을 따라 자양동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진진이 신작에 집중하라며 성수동과 가까운 자양동에 작업실을 마련해 줬고, 때마침 전세 계약이 끝나 가던 차라 거처를 아예 작업실로 옮긴 것이다. 혹시 소설로써 내 미래를 예측이라도 한 것 아닐까, 혹시라도 불운의 복선을 무의식적으로 깐 게 아닐까, 무덤덤한 결말인데 해피엔딩으로 수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수없이 「마름모 브라우니」 초고를 훑어보며 전전긍긍했던 것도 떠오른다. 다행히 옆집에 변호사가 아니라 단란한 가족이 살아서 안심했지만 말이다,
    이사를 하고 나서 B에게 새 주소가 적힌 편지를 보냈다. 이사 소식을 전한 뒤 일론 머스크가 시나리오를 검토해 본다더니 장기간 답이 없다며, 오바마를 통해 다시 한 번 로비를 해달라고 우는 소리를 하곤, 딱딱하게 부탁만 한 것 같아서 당신 권력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고 농담도 섞었던 게 떠오른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좀처럼 답장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권력 운운하는 농담을 오해해서 감정이라도 상한 것 아닐까, 사면이 지체돼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심리가 불안정한 것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확인할 길이 없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병이 악화돼 B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뉴스가 떴다. 댓글창에는 입에도 담기 싫은 악플들이 수없이 달려 있었다. 나는 안도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건강이 악화됐다면 안도가 아니라 걱정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혹시 나는 악플러보다 더한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혼란스럽기도 했다.
    일론 머스크의 회신을 기다리다 지쳐 신작은 무기한 연기됐다. 진진은 새 기획안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보챘고, 윤주환은 자신의 인생은 이대로 주저앉는 거냐고 칭얼거렸다. 둘을 보고 있자니 더욱 심란해졌고, 뭐라도 하는 척해야 될 것 같아서 잡아든 게 「마름모 브라우니」였다.
    「마름모 브라우니」를 퇴고하고 있을 때 드디어 B에게 답장이 왔다. 이사를 축하한다며, 작업실 주소를 보니 건국대학교 병원 인근인 것 같다고, 80년대에 건국대학교 부지가 야구장이 될 뻔했던 것 아냐고, 당시 건대 이사장과 친분이 있었는데 본인에게 자문을 구해 야구장 부지에 자리 잡았으며, 덕분에 거부가 됐지만 배은망덕하게도 사식 한 번 넣어 주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여전히 광진구는 저평가됐다며, 자금 여력이 되면 자양동과 광장동 한강변 주택들을 매수하는 것도 좋을 거라는 훈수가 뒤따랐다. 자화자찬을 하는 걸 보니 병이 나은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는데, 공교롭게도 중반부에 그동안 몸과 마음이 아파서 답장할 기력도 없었는데, 최근 건강을 회복해서 다시 서울동부구치소로 이송됐다고 적혀 있었다. 이번 기회에 죽었으면 사면시켜 달라고 문재인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되는데, 라는 농담도 쓰여 있어서 안심이 됐다. 그 뒤 B는 일론 머스크가 아이 같은 구석이 있으니 기다려 보라고 타이르기도 했고, 편지에 적힌 내 농담을 읽다가 병상에서 추락사할 뻔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나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재빨리 답장을 했고, 한동안 편지는 사흘에 한 번 꼴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당시가 가장 많이 편지를 주고받았던 때가 아닌가 싶다. 쓸 말 못 쓸 말 다 쓴 뒤 할 말이 떨어져서 인간만세라는 주문까지 털어놓았고, B는 옥고에 지쳐 인간만세라는 주문을 외웠는데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호응했다. 심지어 다른 말 없이 인간…… 만세…… 가 한가득 채워진 편지를 받기도 했다. 언젠가는 진진의 계획인간 이론에 대해서도 썼는데, B는 흥미로워하며 모두가 자신을 계획인으로 여기겠지만 진진의 말대로 비계획인이 맞는 것 같다고 회신했다. 비계획인은 비계획인을 첫눈에 알아본다, 비계획인의 역사에 남을 우리 우정을 위해, 같은 낯간지러운 멘트를 쓰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을 계획인과 비계획인으로 나눠서 보내 주기도 했는데, 기억에 의하면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계획인 :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무현, 박근혜
    비계획인 : 이승만,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문재인

 

    B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름모 브라우니」를 탈고했다. 그러나 공개될 일은 없을 것이다.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는데, 브라우니 모양 따위가 아니라 근본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거라서 바로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름모 브라우니」를 읽은 사람은 단 하나다. 짐작했겠지만, B가 맞다. B는 몇 달째 내 소설을 보고 싶다고 조르던 상황이었다. 감방에 책을 들여오는 게 녹록지 않다며 프린트해서 편지에 동봉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B의 부탁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내 소설을 비난한 친구들과 절연한 경험이 많기에.
    생각이 바뀐 건 반대 여론으로 인해 B의 사면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을 때였다. 편지에서 B는 직접적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우울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었다. 내 소설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고, 이번에는 마음이 동했다. 나는 「마름모 브라우니」를 프린트해서 보냈다. 왜 하필 그 작품인지는 확실히 이유를 댈 수 있다. 기대 때문이었다. 혹시 B라면, 비계획인이자 소울메이트인 B라면, 소설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하고 품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B는 몇 주 동안이나 답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편함을 들여다봤던 것 같다. 빈 우편함을 볼 때마다 장기 하락 중인 주식 차트를 보듯 속이 울렁거렸던 것도 떠오른다.
    세계 최고의 부자와 전직 대통령의 답장을 기다리는 게 무언가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무렵, B에게서 편지가 왔다. B는 고민 끝에 친구라면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드디어 결심을 했다고 선전포고하듯 편지를 시작했다. 느낌이 싸했는데 역시나 「마름모 브라우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B의 충고는 다음과 같았다. 황석영, 이문열 같은 당대 문장가들처럼 문장에 공을 들여라. 매가리가 없다. 경험을 토대로 대지에 발을 딛고 시대정신을 담으라. 진솔함이 부족하다. 감동을 주어라. 하늘 위로 붕붕 뜨는 것 같은데 원고지에 육필로 써보는 건 어떠냐. 소설에 깃든 그 음험한 사상은 사이코패스가 연상된다. 다른 건 익숙한 악평이었는데, 마지막 사이코패스 운운하는 평은 폐부를 찔렀다.
    나는 답장을 썼다.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예의를 차려서 에둘러 말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역시 비리 정치인하고 엮이는 게 아니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는데 큰일 날 뻔했다. 입원 뉴스에 달린 악플에 이제 공감이 간다. 당신이야말로 사이코패스 아니냐. 댓글 부대 관음증 환자에 돈에 미친 사람 같으니라고. 아, 그때까지 받은 편지들을 모조리 불태운 것도 이게 계기였구나. 역시 소설은 친구들을 떠나가게 한다. 나를 외톨이로 만드는 건가.
    B에게서 편지가 끊겼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좀 더 어른스럽게 대처했더라면, 아직까지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는 마지막 친구를 떠나보냈다. 아, 이 이야기도 해야겠구나. 그 무렵, 청와대 민정수석실 수사관들이 작업실에 들이닥치기도 했다. 몇몇은 작업실을 수색했고, 수사관 중 하나가 나를 심문했다. B와 무슨 사이기에 편지를 그렇게 많이 주고받았냐는 것이다. 나는 답했다. 우리는 그저 펜팔 친구입니다.
    며칠 뒤, B의 사면이 무산됐다는 뉴스가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편지지를 앞에 두고 고민했지만 어떤 말부터 적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관뒀다. 며칠이 더 흘렀다. 놀랍게도 B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자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네.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B는 민정수석실에서 조사 나간 걸 들었다며, 억울한 고초를 겪은 걸 사죄한다고, 더불어 작가의 자존심을 건드린 늙은이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편지를 보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예술가에게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다며, 본인과 얽힌 사람들의 끝이 좋지 않으니 이쯤에서 관계를 정리하는 게 맞지 않겠냐고 하는 구절에서 코가 시큰거렸다. 편지의 말미에는 자양동 출신 오세훈이 서울시장에 당선된 소식을 들었다면서, 예전처럼 오세훈과 가까웠으면 자양동에 친구가 있으니 잘 봐달라는 이야기 정도는 하겠지만, 이제 본인은 아무 힘도 희망도 없다고, 그러나 자양동은 예로부터 종마를 기르던 기름진 땅이었다고, 그 땅에 서린 영험한 기운이 당신에게도 깃들길 기도한다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인사말을 읽고 나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의 마지막 친구 B로부터. 굿바이.

 

 

 

 

 

 

 

 

 

 

오한기
작가소개 / 오한기

소설가. 201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했고, 『의인법』, 『홍학이 된 사나이』, 『나는 자급자족한다』, 『가정법』, 『인간만세』를 썼다.

 

   《문장웹진 202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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