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외 1편

[신작시]

 

 

청포도

 

 

손진은

 

 

 

    부연 지붕 아래
    게슴츠레한 눈으로 하품을 하며
    물방울로 맺히는 햇빛에 게으르게 머릴 굴려 본다

 

    이봐, 오늘 밤 어때?
    칙, 담배 꺼내 물고 달 처녀 불러내던
    갈기 구름 아래 어슬렁대며 햇살 낚아채던
    한 번씩 장대비에 두개골 깨지고 싶은 건달의 시절은
    진즉 담을 넘어 떠나버렸다

 

    우아하게 분사되는 스프링클러 앞에
    사육우처럼 하루 더
    속절없이 또 하루 몸피 늘려 가는

 

    머리칼 바람에 날리지도 못하는
    저치들은, 별수 없이
    수인이 다 돼 간다 헌데

 

    분이 묻은 하품을 잘 익었다고
    푸푸, 옛 추억 내뱉는 입술은 또 무언가
    칸칸이 포개진 방 안에 머릴 포개고
    트럭에 실려 가는 출옥수가
    왜 저리 심드렁한가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는 말은
    수정될 때가 되었다
    팅팅 불은 저 우울의 안구 앞에서

   *  이육사, 「청포도」

 

 

 

 

 

 

 

 

 

 

고산孤山을 찾아서

 

 

 

 

    봄 해남 길,
    장난기 발동한 일행 하나가
    나 왔네, 헛기침하며 녹우당 문 열어젖혔을 때

 

    고산,
    그 외론 영혼이 웅크리고 있다 나오셨나
    평온으로 물댄 표정의 종손이
    어서 오시게, 손 내밀며 나왔다

 

    말 붙인 사내 벌게진 얼굴 더 붉어지도록
    봄날 오후 네 시가 둑이 터지도록
    껄껄껄껄 웃음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어른은 고산일 리가 없지

 

    고산이 뭔지를 아는 인 초상화 속에서만 넌지시 웃고 계시고
    흰 새로 파닥이는 목련 부신 빛으로 환생하시려는가
    우린 그 빛에 기대어
    외론 산에 대해 생각했다

 

    푸른 글자가 번져서 읽을 수 없는 산자락
    자꾸 발이 빠지는 웅덩이에서
    어쩌면 우린 모두 저마다 깊어진 골로
    고산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또 하나의 고산이 아닐까
    고산의 기분을 살피며 때론 울상으로
    때론 고요와 폭풍우로

 

    갑자기 지평선이 가물거려 와서
    제각각의 일기를 펼치고 접으면서
    비틀거리며 해질녘 녹우당을,
    고스란히 우릴 잊어버리기 위해 빠져나왔다

 

    저마다 둘로 셋으로 쪼개진 그림자 늘어뜨린 채

 

 

 

 

 

 

 

 

 

 

손진은
작가소개 / 손진은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저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등 4권, 저서 『시창작교육론』 등 8권. 시와경계문학상·대구시인협회상. 경주대 교수.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학장.

 

   《문장웹진 202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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