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흔적’이 아닌 ‘숨결’을 느끼다. – 이문열의 부악문원

이 에세이는 [2016년 문학집필공간운영지원사업] 협력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각 집필공간의 추천을 받아 해당 공간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작가의 에세이를 게재합니다.

 

 

‘흔적’이 아닌 ‘숨결’을 느끼다. – 이문열의 부악문원

 

 

김개영

 

 

    부악문원은 이천의 대표적인 산 중에 하나인 설봉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등산객들에게는 꽤 이름난 도드람산을 마주보고 있는데,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한 산 정상의 암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낮은 탄성을 지르게 한다. 문원이 자리한 설봉산과 도드람산 사이의 공간은 움푹 팬 지형을 이룬다. 덕분에 안개가 자주 끼고 눈이 두텁게 쌓여 외부와 단절된 듯한, 묘한 유적감(流謫感)을 느끼게 해준다.
    규모는 작지만 나름의 위엄을 가진 두 개의 산 사이에 위치한, 넒은 정원과 세 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문원은 그 크기에 비해 조용하고 아늑하다는 느낌을 준다. 거대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소나무를 비롯해 공들여 가꾼 각종 정원수와 작은 인공연못, 잔디밭 사이로 난 오솔길, 돌로 만들어진 조각 등이 풍취를 더한다. 풍수학의 대가인 최창조 교수의 조언에 따라 만들어진 탓인지 맑은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넓게 고여 있는 듯하다. 긴 시간 오롯한 문학적 영감 속에 젖어 있어야 하는 작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원래 부악문원은 작가 이문열 선생님(이하 ‘선생님’ 생략)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일종의 작가 양성소였다. 작가적 명성을 떨치며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한, 일종의 사회 환원의 차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문열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문학상은 거의 휩쓸어 한국 문단의 대가로 자리 잡았다. 최근 발표된 교보문고 북뉴스에 의하면 지난 30년간, 국내외 작가를 통틀어 가장 많은 베스트셀러 목록을 가진 작가이기도 하다.
부악문원 4기생이었던 나는 이곳에서 2년여를 보낸 바 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동서양 고전을 원문으로 독해하며 읽었고, 매주 창작물 합평을 했다. 20대 중반의 스펀지 같이 여린 뇌 속에 주옥과 같은 문장과 개념 들이 속속히 박혔다. 그것들이 지금 내 사유와 문학을 이루는 씨앗이 되었음은 물론일 것이다. 삼시세끼를 꼬박 꼬박 챙겨먹을 수 있었고, 큰 창과 화장실이 딸린 아늑한 방에서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작가 지망생 간의 동지적 연대감은 덤으로 받는 행운이었다. 무엇보다 격렬했던 술자리의 토론을 잊을 수 없다. 당시는 강의실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글을 배운다는 치기가 통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시절처럼 마냥 낭비적이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는 이 나라 최고의 문장가인 이문열이 있었다. 치열한 말들이 오갔는데, 그 주제는 문학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 미학, 신학 등 인문학 전역에 걸쳐 있었다. 시국담론에 이르러서는 스승과 제자라는 경계가 사라져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한판 승부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대학가의 고답적인 사제관계에 물들어 있던 나는 그 광경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는데, 어느 순간 그 논쟁의 한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드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이문열의 탈권위적인 태도에 있었다. 문원에 들어오기 전에 느꼈던 이문열의 이미지는 뭐랄까, 보수주의자에다가 권위적이기까지 한 완고한 ‘가부장(家父長)’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강요한 적도, 상대의 의견을 무시한 적도 없었으며, 혹여 제자의 무례한 발언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탓하거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심지어 이문열은 우리를 제자로 여기는 것조차 꺼려했다. ‘제자’가 아니라, 문학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라는 것이다. 과외 선생조차 스승으로 깍듯이 모시는 우리 사회의 풍토에 비하면 황송할 정도의 겸손이었다. 우리는 그때 20대 중후반에 불과한 애송이들이었으므로 그의 그러한 모습이 성공한 작가, 나이든 연장자로서 얼마나 갖기 힘든, 큰 미덕인지 잘 알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제공한 최적의 집필 시스템 속에서 그 모든 혜택이 당연하게 주어진 것처럼 지냈다. 작가 지망생에게는 실로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30여명의 문청들이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동안 그곳에서 젊은 날의 절정을 보냈다.
    2002년 즘이었을 것이다. 이문열은 90년대 중반부터 일련의 ‘시대와의 불화’를 겪다가, 이른바 책 장례식 사건을 맞게 된다. 작가와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더구나 정치색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작품을 폐기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순전히 작가적 모욕을 주기 위해 행한 그 퍼포먼스는 언론과 시민 사회, 심지어 문단의 암묵적 동의하에 이뤄졌다. 어린 소녀에게 영정을 들게 하고, 꽹과리와 북까지 치며 문원까지 밀어닥쳐온 그들은 천여 권의 책을 단돈 10원에 고물상에 넘겼다.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오직 고(故) 박완서 선생만이 문학적 모독행위라고 일갈했을 뿐이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이문열은 문원을 폐쇄하고 미국행에 오른다.
    다행히 그는 신작(『호모 엑세쿠탄스』)을 들고 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문원시설을 정비해, 이번에는 등단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 레지던스를 열었다. 여전히 무료로 숙박이 제공되며 주 1~2회의 술자리가 열리고 안채에서는 티타임을 갖는다. 그간 국내외 많은 문인들이 다녀갔다. 이문열에 대해 작가들이 말하는 공통된 이야기가 있다. 언론에 비친 것과는 사뭇 다른, 인간적이고 털털한 모습이 놀랍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이문열이 생래적으로 지녀 온 ‘정직성’의 다른 모습이라고 본다. 그는 시류나 이익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 그대로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민중민주주의 문학이 횡행하던 시기, 저항세력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문열 작품 또한 어쩌면 그러한 ‘정직성’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문단의 ‘인정’을 받고자 했다면 친민중적인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유리했겠지만 그는 그쪽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민중·반민주적인 진영에 서 있지도 않았다. 그의 작품에서 정치성이 드러나는 것은 ‘맹목적인 집단성’에 대한 혐오에 국한된다. 당대 권위주의 세력에 대한 반감 또한 기본적인 정서를 이룬다. 따라서 그가 친독재적, 권력지향적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전두환 정권의 문화부 장관 제의를 거부한 일화 또한 그를 뒷받침 해준다. 이후에도 보수 정치권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았지만 이문열은 그들과 거리감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간의 진단과는 다르게 이문열은 ‘문학권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문단과 학계에서는 거의 소외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의 명성은 순전히 그의 재능과 노력에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문원생 시절, 나는 밤새 꺼지지 않는 이문열의 서재 불빛을 보며 ‘엉덩이’의 힘이 큰 소설을 만든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함께 숙식을 하며 서로를 배우고 익히고 작품을 평하는 과정에서 문학의 길이 결코 외롭지만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문학의 종언이라는 말이 횡행하는, 이 돈과 천박의 시대에 문학을 포기하지 않고 오롯이 삶을 견딘다는 것은 수행자의 고행과 다르지 않다. 문원을 거쳐 간 많은 작가들 또한 문학의 삶을 완주할 수 있는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느끼지 않았을까.
    최근 탄핵정국과 맞물리면서 이문열의 정치적 발언이 화제다. 누구는 시류에 굴하지 않는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치켜세우고, 누구는 대작가의 씁쓸한 말로를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한탄한다. 이문열 자신, 침묵이야말로 자신의 문학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직성’ 내지 ‘결벽성’을 상기한다면, 내면에서 샘솟듯 분출하는 ‘말’을 세상에 토해내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위선과 거짓이 된다. 그에게 침묵은 절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는 언젠가 신문지상을 통해 진보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파에게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진보적 우파라고 위치지은 바 있다. 여기서 ‘진보적’이란 ‘합리적’이라는 말과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좌우 경쟁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건전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듯이, 문학계에서도 두 성향간의 균형점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껏 작가 이문열은 그 한쪽의 축을 홀로 지켜왔다.
    왠지 이 글이 부악문원보다는 이문열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신 후로, 부악문원은 생존하는 작가와 몇 달이고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 레지던스가 되었다. 한국뿐이겠는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작가의, 작가를 위한 진정한 ‘환대’의 장소일 것이다. 문원에서는 이문열이라는 대작가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란 대개가 숨결의 흔적에서 나타나는 환영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문학관이나 작가 레지던스는 대가(大家)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부악문원은 ‘흔적’이 아닌 ‘숨결’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환영’ 아닌 ‘실재’의 공간이다.
    내년 고희를 맞는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보았을 때, 이러한 유일무일한 문학 레지던스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가 보수주의자라고 주저되는가? 발자크, 도스토예프스키, 사또 브리앙을 상기해보라. 그들이 비록 수구적인 작가라 했더라도 그들의 작품은 영원히 전 세계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그들 모두 결코 ‘정치’를 ‘문학’ 앞에 놓지 않았다. 이문열의 자전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대하소설 『변경』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무리 소중한 당신을 찾는 일이라 할지라도 더는 이 길 저 길을 헛되이 헤맬 시간이 내게 남은 성싶지 않습니다. 또 다른 뜬소문에 들떠 새로운 길로 나서기보다는 마지막으로 그대의 자취를 느낀 그곳으로 먼저 돌아가 보렵니다. 거기 그대가 없을지라도 돌아가 그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대를 향한 내 노래가 짝사랑의 노래로 끝날지라도 그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부디 그때처럼 화안하게, 따뜻하게 그곳에 머물러 계십시오. 다시 아득한 그대에게.(『변경』12권, 민음사, 2013, 283면)

 

    여기서 당신(그대)은 두말할 것 없이 문학이다. 연서의 형식을 띠고 있기에 문청 이문열에게 문학은 사랑과 궁극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정치가 아닌 예술과 인간이 그 먼저인 셈이다. 오랜 방황을 끝내고 문학으로 들어서는, 바야흐로 한국문학의 거목으로 우뚝 설 대작가의 숨결이 이곳 부악문원에는 아직 생생하다.

 

 

 

 

 

 

 

 

김개영
작가소개 / 김개영

2013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2016 서울문화재단 지원 사업 선정
동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 졸

 

   《문장웹진 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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