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캐니 외 1편

[신작시]

 

 

언캐니

 

 

윤혜지

 

 

 

    나는 사랑에 빠졌다

 

    다른 행성에도 구름이 있듯

 

    예의를 차렸지만
    본색을 드러냈다

 

    내 사랑
    고구(그)프리니는 고도의 지능을 갖췄다 그는 고대 문어류가 지녔던 지식의 총체에 대해 연구 중이다 그들이 우주 심해에서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고, 고구(그)프리니는 설명했다

 

    먹을 수 있나요? 이를테면 미래 식량 차원에서요(눈치를 보며, 먹다니 아무래도 끔찍한 이야기죠? 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라고 묻자

 

    고구(그)프리니는 저글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밝고 산뜻하게

 

    여러 개의 팔다리로 행복을 쥐락펴락

 

    무수히 닥친 재난 앞에서도 이 루틴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지구 드라마
    요지경 세계

 

    처절하게 겪다 보면

 

    고구(그)프리니의 감정마저 혼탁해지는 것이다 몸처럼 마음도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 것이다

 

    모두
    그런 드라마퀸은 위험하다며
    거리를 두라고 충고했지만

 

    그래도 본래 성격은 참 밝다고,

 

    나는 아랑곳이 없었고

 

    불이란 불은 다 켜놓아
    대낮 같은 자정

 

    근린공원을 나란히 걸으며

 

    밝은 것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뒀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개 개와 함께 뛰는 사람 개 개 개 개 뛰면 자동으로 웃고 마는 개
    밤엔 밝은 개가 많고

 

    간혹 멈춘 개와 사람 무리 속
    개들은 풀밭에 엎드려 하품을 한다 개가 크면 클수록 따분해한다
    신난 건 사람들
    줄을 쥐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연결된 사람들이

 

    많아서 무서웠다

 

    많은 게 뭐가 무서워요
    없는 게 무섭지

 

    발 없는 말 천 리 간다는 속담을
    능숙하게 구사한 고구(그)프리니가

 

    무릎을 꿇고
    어두운 수풀 아래 들여다보면

 

    비탄에 빠진 사람들
    뒹굴고 있다

 

    멀찍이 제각기

 

    흔들리는 초록 몸뚱이

 

    보호색은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이라고

 

    이래서 공원 나무 전지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해야 한다고

 

    나무의 팔이라고도 불리는 것들
    바짝 깎아 놓아도

 

    뒤돌면
    금세 무성해지는

 

    일희일비
    지구 드라마

 

    이야기엔 더 이상 보탤 말이 없어서

 

    우리는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보급형 드론들
    우렁찬

 

    호버링 소리

 

    저것이
    발 없는 말의 미래인가

 

    몇 번 쓰지 않은 발과 발 사이를 넓혀

 

    웅덩이를 건너뛰며
    데이트 기분을 내보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

 

    다른 행성에서도 물이 부족하면
    생물들이 앞 다퉈 번성을 포기한다는
    고백을 받았다

 

    물이 물을 그만두는 온도까지

 

    사랑하자고 생각했다

 

 

 

 

 

 

 

 

 

 

켤레

 

 

 

 

    나는 나로 감겨 있구나

 

    알게 된 뒤로
    신발을 주우러 다녔다

 

    역 플랫폼과 번화가 식당 입구
    해변과 강가의 젖은 흙

 

    사람들 모였다 어디론가 들어가 버린 곳이면 어김없이 신발이 있었다 어린 연인들의 메리제인을 주우며 생각했다 개와 늑대가 한 켤레라면 사람은 무엇과 한 켤레일까 사람은 사람끼리 켤레겠지 어쩔 수 없이

 

    부지런히 일하고 밥을 먹고
    친밀한 사람을 골라 화를 내다가
    내려다보며
    생각하는 것이다

 

    또 신발을 벗어 놓고 왔구나

 

    태울 수도 없다
    불이 닿으면 불씨를 먹어치우고

 

    도자기처럼 빵처럼 부풀어 오른

 

    신발을 신고
    산책했다 따라오는 검정

 

    안으로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꺼내면

 

    내가 가장 잃어버린 것

 

    내 손목을 움켜쥔 채
    놓아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래그 페이퍼

 

    끝도 없이 뱉어내는 목록들:

 

    사람은 왜 이렇게 생겨먹은 걸까

 

    늑대의 배를 가르고 어린 양을 찾도록
    검은 털과 보드라운 속눈썹을 지닌 나의 양들
    계속 계속 꺼내도록

 

    괘종시계 뒤에 숨어 있던 마지막 양이 외친다

 

    나는 아직 잡아먹히지도 못했는걸요

 

    개는 늑대 바깥에 벗어 둔 신발
    저리 사람을 따르다니 저것은
    말끔한 홀로그램

 

    기도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에 잠긴 채
    기도했다

 

    멀리 보며 우는 사람보다
    웃는 사람의 뺨이 더
    파랗게 패이도록

 

    모두를 풀어 헤치는

 

    돌풍

 

    속에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을 줍는 사람이 있었다

 

 

 

 

 

 

 

 

 

 

윤혜지
작가소개 / 윤혜지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문장웹진 202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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