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비평in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끝의 시작

—모르는 것, 어떤 실패에 관하여

 

 

김태선

 

 

시를 쓸 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요.
시는 무지(無知)가 주는 기쁨의 약속이에요.
-이성복

 

    2000년대 이후 현대시가 난해함의 경향으로 인해 대중 독자들로부터 유리되어 왔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난해함이 독자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한다는 점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나아가 난해함의 경향에 일부 비평가들이 편승하여 문학 권력을 만들어내며 스스로 고립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진단을 내린 이도 있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궁금함이 잇따른다. 어떤 시를 두고 난해하다 할 때, 그 시는 어째서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시에 있어서 난해함이란 무엇을 이르는 것인가. 시를 접할 때, 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그 이해란 무엇을 기반으로 작동하는가. 과연 시라는 것이 명징하게 이해 가능한 영역에 의해서만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일까. 소통이라는 것이 그런 해석의 관점에서만 작동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난해한 시의 해석에 대한 권한은 일부 비평가들과 시인들에게만 주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이를 권력에 대한 모의로 읽는 시각이 타당해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성복은 자신의 시론을 엮은 한 책에서 “시는 무지(無知)가 주는 기쁨의 약속”1)이라고 하였다. 시는 언제나 해석의 층위에서만 독자들과 만나지 않는다.
    모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모르는 것, 이는 기지(旣知)의 영역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이른다. 범박하게 이르자면, 모르는 것을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 언젠가는 앎의 영역에 포섭될 미지(未知), 앎이 없는 상태인 무지(無知), 그리고 앎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을 이르는 비지(非知) 등이다. 이들은 모두 앎의 영역에서는 타자인 것들로, 경험적인 차원에서는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모르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어떤 무한함을 이르기도 한다. 그 무한함 앞에서 인간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기에 이른다.
    인식이란 연속적인 것을 절합(articulation)하여 특정한 테두리 안에 집어넣는 일이다.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한계 지어져야만 한다. 합리주의(rationalism)라 이름 붙여진 기획은, 주체가 마주한 세계를 대상화하여 이를 앎의 영역에 포섭함으로써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일이었다. 이로부터 근대의 에피스테메(episteme), 즉 지식의 체계가 구축된다. 합리주의는 그 이름처럼 이성의 근거에 따라 확고부동하고 논증 가능한 것들만을 지식으로 삼는다. 때문에 경험적이거나 감각과 같은 것들은 주관적이고 모호한 것들이라 여겨짐으로 인해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경험적이거나 감각과 같은 것들은 지식의 부정적 한계가 되는 셈이다.
    아비탈 로넬에 따르면, 알지 못한다는 것의 문제는 지식의 부정적 한계를 발견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앎과의 관계가 부재하다는 사실에” 있다. 관계가 부재하기에 ‘모르는 것’에 이르는 앎이란 상징적으로 구성하는 일이 불가능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상징적 질서 내에 왜상(歪像)으로서 제 모습을 노출한다. 그럼에도 로넬은 “인식의 실패는 문학 언어의 관할구역”이라 한다.2) 분명 실패는 슬픔의 정념을 낳는 것으로 스피노자의 방식에 따르면 인간 능력의 감소이기도 할 터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식의 실패가 문학 언어의 관할구역이 되는 것일까. 어떻게 능력의 감소를 가져오는 슬픔이 글쓰기를 추동하는 것일까. 아마도 인식이 실패한 자리에서 드러나게 되는 또 다른 힘이 있는 것은 아닐까.
    ‘Je ne sais qoui’, 크리스토프 멘케는 이를 “감각적인 것의 영역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합리주의 철학의 대답”3)이라 소개한다. 서구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은 것’을 이르는 관용구로 쓰이는 표현으로, 직역하자면 ‘나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이다. 감성적인 것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개념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판명한 것으로 인식의 영역으로 포섭할 수 없다. 가령 우리에게 지각되는 ‘붉은 색’과 같은 감각은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사전에서도 ‘붉다’나 ‘빨강’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더라도 어떤 사물의 색을 예시로 들거나 동어반복만으로 설명하는 문장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이는 비단 시지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감각들 역시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물론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곤란하더라도, 우리는 대개 공통감(sensus communis) 같은 것에 의지해 ‘붉은 색’과 같은 감각에 대해서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 역시 감각을 판명하지는 않더라도 명석한 것에 해당하는 인식이라 분류한다.4)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은 해당하는 대상을 다시 보았을 때 그것을 동일한 것으로 재인식할 수 있음을 이를 뿐, 그에 대해 논리적으로 규정 가능한 것이라 이르지는 않는다. 감각에 대한 앎은 혼돈과 어두움에 휩싸여 있다. 라이프니츠의 통찰은 카오스에 휩싸인 감각에 대한 인식에 어떤 내적 원리가 있음을 일러준다. 그것은 지식의 영역에는 편입되지 않는 어떤 원리이리라. 그럼에도 이 원리는 이성의 근거에 따른 행위와는 또 다른 움직임이 있음을 증언한다. 물론 이성적인 인식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영역에서의 움직임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주체의 인식이 실패하는 자리, 기지의 앎이 실패하는 자리에서 문학은 약동한다. 시인은 모르는 것을 말하는 시로부터 기쁨의 약속을 본다. 이건 너무나도 이상하고 역설적인 믿음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니 실패의 지점에서, 기쁨보다는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끝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시를 먼저 살펴보자.

  1)  이성복, 『무한화서』, 문학과지성사, 2015, 12면.
  2)  아비탈 로넬, 『어리석음』, 강우성 옮김, 문학동네, 2015, 22-24면 참조.
  3)  크리스토프 멘케, 『미학적 힘』, 김동규 옮김, 그린비, 2013, 34면.
  4)  라이프니츠가 내리는 ‘명석함’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하나의 인식은, 그것이 표현하는 사물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내가 그 인식을 소유할 때, 명석하다.”(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인식, 진리 그리고 관념에 관한 성찰」, 『형이상학논고』, 윤선구 옮김, 아카넷, 2010, 11면.)

 

    이게 끝이면 좋겠다 끝장났으면 좋겠다
    젖은 솜처럼
    해수어와 담수어의 사이만큼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
    -백은선, 「가능세계」(『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 중에서

 

    어떤 파국에서부터 시작하는 절규가 들려온다. “이게 끝이었으면 좋겠다”, 어떤 희망도, 어떤 가능성도 없을 것만 같은 상황을 맞이한 이가 토로하는 목소리이다. “이게”라는 말로 특정되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빈자리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자신이 겪게 된 일에 대해 말로 형용할 수 없거나, 혹은 숨기고 싶은 것이기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시에 제시된 목소리를 통해서는 그에 이르는 앎이 막혀 있다. 그럼에도 그 빈자리에서 어떤 느낌이 우리에게 맞부딪쳐 옴을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절망과도 같은 정념이, 시의 목소리를 마주한 우리의 마음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제시되어 있지 않기에 이와 같은 정념에 노출된 독자는 적잖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혹감이 소통의 불능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물론 소통이라는 말을 발신자와 수신자가 공유하는 코드를 통해 일어나는 메시지와 그 의미작용의 교환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소통의 작용이 아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소통을 그저 ‘합의’를 이루는 재현의 모델에 만족할 뿐이다. 이 같은 소통은 어떠한 새로움도, 어떠한 생성도 기대할 수 없다. 진정한 소통은 의미작용 이전에 이루어지는 감각과 정감(情感; affect)의 나눔이자, 이에 따른 변용(affection; 정감에 의한 작용)의 잇따르는 이행으로 나타난다. 소통은 기지의 것을 서로 재확인하는 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한 몸과 다른 몸의 마주침과 그로 인한 변이(變異; variation)의 계기(繼起)들을 포함한다. 소통의 과정에선 의미작용과 재현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생성 또한 들끓는 것이다.
    우리가 시를 마주할 때,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이해 없이도 무언가를 알 것만 같은 느낌에 휩싸이는 일이 바로 정감에 의한 작용이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판명한 앎으로 환원되지 않기에, 이 같은 마주침은 변용을 겪는 이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당혹스러움이 기지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것일 경우 난해함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당혹스러움을 그저 난해한 것으로 여김으로 그치고 그에 대한 사유를 개진하려 하지 않을 때, 소통은 단절된다. 당혹스러움과 같은 난폭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할 것을 강요한다. 기지의 영역을 벗어난 것을 전해주는 마주침이기에, 좀처럼 풀어낼 수 없는 복잡한 주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의 몸을 휘감는 정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백은선의 시에 쓰인 “젖은 솜처럼// 해수어와 담수어 사이만큼”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이러한 표현들이 드러내는 움직임은 일정한 의미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감각들로 나타난다. 가령 “젖은 솜처럼”은 무겁고 축축한 느낌을 전해주고, “해수어와 담수어 사이만큼”이라는 말은 어떤 거리감을 이르는 듯하지만, 이들은 이어지는 “이미 실패했지만”이라는 언술, 혹은 그 앞에 자리한 “끝장났으면 좋겠다”라는 말과는 편안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발화된 것들의 배열이 의미작용을 산출해내는 데에 있어 일정한 고정점을 찾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즉 말과 말의 배열이 서로 불화를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말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지만 뒤로 물러서거나 멈추어 설 수도 없다.
    시의 문장들이 완결된 의미를 직접 제시하지 않더라도, 말과 말의 배열에 의해 독특한 정감들이 포착되며 발생한다. “이게 끝이면 좋겠다 [……] 다시 실패하고 싶다”라는 말에 의해 포착되고 발생하는 정감은 발화 주체의 기분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말하기와 그것이 그려내는 정감으로 인해 말하기의 주체는 “젖은 솜”이 되기도 하고 “해수어와 담수어 사이만큼”의 무언가에 속한 이가 되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처럼’ ‘-만큼’이라는 말이 픽션적인 상태를 지칭하거나 단순한 흉내 내기를 이르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말하는 주체의 잠재적인(동시에 실재적인) 현실을 구현하는 생성의 움직임을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주체가 처한 현실의 상황을 가늠해볼 수 있겠다. 가령 “해수어와 담수어”는 둘 모두 같은 물고기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바다와 민물처럼 커다란 차이를 지닌 것들이다. 이처럼 “해수어와 담수어 사이만큼”이라는 말은, ‘동일한 동시에 전혀 다른’ 모순되고 기이한 상황을 형상화한다. 시의 주체는 이중구속(double bind)에 놓여있는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가능세계」라는 제목과 달리, 주체는 무엇도 할 수 없는 ‘불가능 세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로, “이게 끝이면 좋겠다”라며 절규하는 이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백은선 시의 주체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무릎이 명상의 밧줄처럼 잘 땋여
    거기 남았다
    우린 모두 그가 다녀온 공간을 위로하고 있다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마술에 대해 생각했다
    통증으로만 구성된 꿈을 꾸었다는 듯이
    이 놀라운 상자를
    마술사에게도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유계영, 「지그재그」(『온갖 것들의 낮』, 민음사, 2015) 중에서

 

    자꾸 새로워지길 원하는 매표소, 거짓말은 노인들에게 암표가 되어 팔려나갔고, 앵무새 없인 할 수 없는 마술에 이미 거리를 떠도는 소년들은 모자에 동전을 구걸했다 세계의 모든 고요는 이미 매진이다 소년에겐 더 이상 할 수 있는 침묵이 없다
    -서윤후, 「구체적 소년」(『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민음사, 2016) 중에서

 

    「지그재그」와 「구체적 소년」의 장면들은 마술을 선보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보이는데, 이는 소재적인 측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유계영의 시에 등장하는 ‘레이디’는 관객들 앞에서 마술사의 상자에 들어가는 쇼를 펼치는 인물이다. ‘레이디’는 “미치기 직전의 상태로 끝까지 살아가는 식물처럼” 상자 속에서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도 “너를 좋아해서 웃어만 지는 얼굴”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이는 마술사와 관객들의 요구에 의해 수동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서윤후의 시에 등장하는 ‘소년’ 역시도 ‘새로움’을 보여 달라는 청중들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때문에 그이는 “새로움을 위해 거짓말을 펼쳐야 했던 소년”이다. 그리고 “앵무새가 소년의 거짓말을 똑같이 따라할 때 비로소 거짓말은 근사한 마술이 된다”는 점에서 ‘소년’은 온전한 주체로 행위를 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두 시에 쓰인 ‘레이디’와 ‘소년’이라는 인물의 명칭은 예사롭지 않다. 이들은 모두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서 ‘(대)타자’의 요구에 직면하여 희생당하는 인물들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들이 속한 현실은 “통증으로만 구성된 꿈”처럼, “낡은 구두”와 “벗겨진 지팡이”처럼 폐허와도 같다. 이러한 “폐허와 함께 역사는 감각화되어 무대 속으로 이동해간다.”5) 가령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마술에 대해 생각했다”라는 말처럼 스스로를 생각하는 주체로, 행동하는 주체로 구성할 수 있는 인물임에도 ‘(대)타자’의 질서는 그와 같은 점들을 무시한다. 그이는 “모자 속의 토끼”, “사과 속의 코끼리”, “대괄호가 많은 아이들의 말”에 종속되어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는 삶을 요구받는다. ‘소년’ 역시도 스스로 행위 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예전 사람들에게서 빌려온 것들을” 놓아두고 “일부러 연필을” 부러뜨리며 “미래의 누군가가” 연기하게 될 “거짓말을 발명”하며 “가장 긴 박수 소리에 외롭지 않을 모험을” 걸지만, 그를 도와줄 “앵무새는 날개를 잊었고 새로운 거짓말을 배우기엔 이제 늙어버렸다”고 한다. ‘소년’이 속해 있는 기성의 질서는 그이에게 ‘새로움’을 요구하지만, 그런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는 않는 것이다. ‘레이디’와 ‘소년’이 속한 현실은 폐허 속에서 주체로 하여금 불가능한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다.
    알레고리는 고정된 지식이나 현실을 재현하는 모델에 머무르지 않는다. 탐 코언에 따르면 벤야민에게 “알레고리는 선시간성 그 자체가 재정초되고 재기입되며, 교호하는 ‘미래’가 열리게 될 변환의 장소를 확증하는 것 같다”6)고 한다. 즉 알레고리는, 그것이 다루는 어떤 것을 모방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기성의 언어로 기술할 수 없었던 움직임을 ‘다시 기입’함으로써 앞선 시간에 틈을 내고 뒤흔든다. 그렇게 파국 속에서 닫혀있던 시간의 문이 열리고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래는 단순히 요청됨으로써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변환을 맞이하려는 움직임에 의해 다가온다.
    「지그재그」와 「구체적 소년」에서 ‘레이디’와 ‘소년’은 닫혀 있는 폐허의 시간 속에 유폐된 이들처럼 보이지만, 이와 같은 노력에 의해 현실에 틈을 내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레이디’의 경우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무릎이” 상자에 남음으로써 여전히 자신을 억압하는 구조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나, “이 놀라운 상자를/ 마술사에게도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함으로써 전복을 마련하고 있다. 전복은 시에서 전개된 언어의 차원에서도 작동한다. 첫 행에 쓰인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마술에 대해 생각했다”라는 표현은 마지막 행의 “마술사에게도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했다”에 의해 재문맥화된다. 마지막 행에서 “생각했다”를 반복함으로써 시는 자신을 ‘지그재그’로 다시 읽을 것을 요청하는 것, 이로써 억압받고 이면으로 은폐되었던 ‘생각하는 주체’가 다시 무대 전면에 부상한다.
    생각하는 주체인 ‘레이디’는 고통의 정념에 머무르지 않고 변이를 추동하는 독특한 정감을 표현한다. 이제 “나는 아프고 너는 지켜보기만 했는데/ 너를 좋아해서 웃어만 지는 얼굴”은 무력한 수동성을 표현하는 것에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황을 넘어서고자 하는 능동의 표현으로 이행한다. “잘려 나간 팔다리가 식어 가는 동안에도/ 몸에서는 부드러운 털이 자라났지”라는 움직임은 ‘레이디’로부터 아무리 앗아가려 해도 앗아갈 수 없는 ‘힘’이 그이의 몸에 있음을 드러낸다. 겉으로 보기엔 분명 자신을 무력에 이르게 하는 조작들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지만, ‘레이디’는 생각함으로써 그러한 조작들을 넘어서는 ‘힘’을 분출하는 것이다. 이 힘은 레이디를 둘러싼 현실을 “통증으로만 구성된 꿈”으로 변용시키는데, 이로써 억압 받는 수동적인 몸은 반격을 꾀하는 능동적인 몸이 된다.
    ‘소년’의 경우엔 “세계의 모든 고요는 이미 매진이다 소년에겐 더 이상 할 수 있는 침묵이 없다”라는 말로써, 새로움을 요구하는 세계로 인해 모든 것이 소진되어버린 상황이 결론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국 속에서도 전복이 싹트고 있다. 「구체적 소년」에 등장하는 청중들이 ‘소년’에게 원하는 것은 “근사한 마술”이었다. 마술은 “앵무새가 소년의 거짓말을 똑같이 따라할 때 비로소” 선보일 수 있다. 그러나 ‘소년’의 마술은 “가장 긴 박수 소리에 외롭지 않을 모험을” 거는데, 결국 청중들이 원하던 것과는 다른 것을 선보이게 된다. ‘소년’이 ‘청중들이 원하는 소년’으로 머무르기 위해서는 “흰색이 필요”했으리라.
    ‘소년’이 모험 후에 꺼내든 것은 “파란 장미”이다. 이는 마치 ‘소년’의 실패를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는 ‘소년’으로 머물라는 청중들의 요구를 벗어나게 하는 움직임을 가져온다. 이제 ‘소년’은 청중들의 요구에 종속된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이행은 이제 「구체적 소년」의 세계에 드리워졌던 은폐막을 벗겨낸다. “앵무새 없이 할 수 없는 마술에 이미 거리를 떠도는 소년들은 모자에 동전을 구걸했다”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는 비극적인 결말을 그려내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표면이 그려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감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앵무새’라는 말을 따라하도록 하는 장치 없이도 ‘소년’은 스스로 행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꺼내야만 했던 ‘모자’는 이제 ‘소년’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담는 역할로 바뀜으로써 착취-요구의 구조를 전복시킨다. 이 같은 전복은 이제 “소년에겐 더 이상 할 수 있는 침묵이 없다”는 의미작용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힘을 예감케 한다. 이제 ‘소년’은 청중들의 요구에 따른 말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년’은 스스로의 말을 하게 되리라.
    「가능세계」로 돌아가 보자. 앞서 「가능세계」의 주체는 이중 구속에 묶여 실패하는 이로 절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의 주체는 무력한 상태로 파국의 상황에 주저앉지 않는다.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라는 말처럼, “이게 끝이면 좋겠다”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이는 ‘끝까지’ 가고자 한다. 이러한 의지에 따라 시의 언어는 어떤 끝을 향해 나아간다. “천체의 운행 손을 잡아도 기분이 없는 밤 밤을 떠올리는 빈 나무 의자”에서 “없어도 없고 싶은 없는 것, 이런 문장은 위험하니 쓰지 말라고 충고해줄 선배 혹은 드럼을 치는 전 애인과 일면식도 없는 사진사”를 거쳐 “마지막에는/ 뭐가 남을까/ 전파를 찾아 다리들이 온다/ 말하겠지 하고 싶다고 하고 싶다고/ 결국 하겠지/ 어떻게든”을 지나 “거스르는 것이 회귀인지 도주인지 봄의 식물이 싹을 내미는 공포인지 하고 싶다 하고 또 하고 하다가 분류하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이 구들장인 어깨와 효과 없는 반복으로 가득 차고 싶다”라는 말에 이른다.
    ‘끝’에 가닿고자 하는 의지에 따른 언어의 배열은, 마지막에 쓰인 것처럼 “효과 없는 반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능세계」의 말들은 아무렇게나 나열되어 어떤 연관성도, 어떤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연쇄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인용을 통해 제시한 것처럼, 시의 목소리가 선택한 말들은 그저 무작위로 선택된 것들만은 아니다. “해수어와 담수어 사이만큼/ 이미 실패했지만”이라는 발화의 정감에 의해 촉진되어 오는 것들, 기성 언어의 흐름과는 다른 마주침을 기대하며 호명되어 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주어진 한계 안에서 그 한계를 시험하는 말들을 이어나감으로써 어떤 소진에 이르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그와 같이 범람하는 말들과 직접 마주침으로써 이중구속의 상태를 불러왔던 것과는 또 다른 정감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이행은 언어가 질과 외연을 얻음으로써 특정한 의미작용에 고착되었던 상태를 반복을 행함으로써 뒤흔들며 그 안에 감싸여 있던 차이의 역량을 다시 발산하도록 한다. 이처럼 “결국 하겠지/ 어떻게든”과 같이 체념하는 듯한 외연을 띤 말들은, 주체의 끝까지 밀고 나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을 통해 체념을 넘어 담론의 층위에서 언어를 억압했던 코드의 작용들을 무력화하며 새로운 정감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시인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주체는 자신이 속한 세계 안에서 (대)타자, 혹은 어떤 질서로부터 억압 받으며 무능과 불가능의 정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헬조선’, ‘신자유주의’, ‘수저 계급론’, ‘갑질’, ‘스펙’, ‘혐오’…… 등의 호명으로 표출되었던 담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겪게 되는 정감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런데 앞서 살펴본 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주체가 겪는 상황과 정감의 문제를 ‘주체와 세계의 갈등 및 투쟁’이라는 고전적 양상으로 단순화 할 수 없다.
    ‘주체 대 세계’ 혹은 ‘주체 대 사회’의 대결 양상에 초점을 맞춰왔던 논의들은 대개 푸코가 다루었던 ‘규율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의 일면만을 다루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즉 한편에는 사회에 순응하는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 메커니즘들, 신체에 점증적이고 반복적인 훈련을 부과함으로써 주체를 예속화하는 움직임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그에 맞서 몰락하거나 저항하는 주체가 있음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현실의 지형을 단순화한 것이다. 이는 주체가 능력을 갖게 되면 사회의 억압적인 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주의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그 능력이라는 것이 결국 규율권력에 의해 부과되었다면, 주체가 과연 능력을 통해 예속화를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문제 삼을 수 있다. 따라서 최근 시인들의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감의 문제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근대의 인간 주체를 이루는 정교한 미학[감성]적 메커니즘에 대한 살핌을 요청할 필요가 있다.
    물론 주체는 그것이 규율권력에 의해 부과된 것이라 할지라도 능력을 얻어야만 실천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 능력은 사회적 훈련을 통해 획득된다. 그 능력은 의식적인 자기 통제에 의해 실행되는데, 이런 통제는 사회가 부과하는 담론의 질서, 즉 ‘아버지의 이름’ 혹은 ‘(대)타자’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 누군가 타인과 의사교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의 말하기가 사회적인 코드를 따른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작(詩作)과 같은 예술의 행위 역시 사회화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블랑쇼는 헤겔을 인용하며 “글을 쓰고자 하는 자는 처음부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는 모순에 봉착한다”7)고 하였다. 그가 행하려는 것이 사회에 저항하는 움직임이라 할지라도, 모든 주체는 사회가 부과하고 요구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과업[작품]은 능력을 통해서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에 있어 작품에 이르는 길에는 능력 이외의 것이 함께해야 한다. 헤르더의 사유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멘케는 “주체로 훈련되기 전에 인간은 이미 힘을 지니고 있다”8)고 주장하는데, 바로 이 ‘힘(Kraft)’이 미학적인 행위의 또 다른 심급이자 근원적인 심급이다.
    ‘힘’은 “영혼의 근거이자, 모든 것을 연습하며 형성된 주체 능력에 선행하는 영혼의 어두운 메커니즘”으로 ‘능력’과 함께 하지만 그 ‘능력’에 맞서는 것으로, 어떤 법칙이나 목적도 모르는 능동적인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주체의 형성 이전에 자리한 ‘본성’으로 인식이나 실천과는 다른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이른다. ‘힘’은 일종의 ‘감정(Gefühl)9)’으로 “하나의 사건 내지 하나의 대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를 가리키는데, 이런 관계의 구조는 “하나가 타자에 미치는 영향”으로 헤르더에 의해 정식화된 바 있다. 이때 ‘타자’는 ‘하나’를 통해 영향 받고 산출된 것을 이르며, ‘힘’이란 “타자와 마찬가지로 오직 작용 속에서만, 타자 속으로의 이행 속에서만, 하나로부터 타자의 산출 속에서만 존재”함을 이른다. 이러한 ‘관계’는 곧 ‘타자’가 ‘표현’되는 동시에 ‘표현’하는 일을 이른다. 멘케는 이 ‘힘’을 사회의 훈육을 통해 만들어진 주체적인 것이 아니며 기계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것도 아닌, “미학적인 것이라고 확정”한다. 미학적인 이 ‘힘’은 스스로를 표현함과 동시에 은폐한다. ‘능력’이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매번 자신 안에서 완성되는 데에 비해, ‘힘’은 매번 자신을 다른 것으로 표현하고 그 표현 안에서 표현을 뛰어넘는다. 때문에 ‘힘’은 “표현의 원천이자 과잉이고 근거이자 탈근거라면, 힘의 표현은 동시에 힘의 은폐”인 것이다.10)

  5)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최성만·김유동 옮김, 한길사, 2009, 264면.
  6)  Tom Cohen, Ideology and Inscription: “Cultural Studies” after Benjamin, de Man, and Bakhtin, Cambridge UP, 1998, p.233; 아비탈 로넬, 앞의 책, 172면에서 재인용.
  7)  모리스 블랑쇼,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3, 16면.
  8)  크리스토프 멘케, 『예술의 힘』, 신사빈 옮김, W미디어, 2015, 13면.
  9)  Gefühl은 ‘감정’ 외에도 ‘감각 능력’이나 ‘감수성’, ‘지각’ 등의 의미를 포괄한다.
  10)  크리스토프 멘케, 『미학적 힘』, 3장 참조.

 

    예술과 사회의 흐름에서 살펴야 할 지점 중 하나는 이와 같은 ‘능력’과 ‘힘’이 함께 어울리는 동시에 맞부딪히며 싸우는 현장일 것이다. 오늘날 합리적 주체는 ‘능력’을 과도하게 요구받음으로 인해 과부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진적으로 표출된 후 사회의 담론을 만들어냈던 ‘혐오’와 ‘헬조선’ 등의 정감과 그 움직임은 과부화된 주체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실패와 파국의 정감들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까닭도 이 같은 시대의 흐름과 연동되어 있으리라. 시의 주체는 그와 같은 정감을 통해 무력한 주체로 변용되지만, 그에 멈추지 않고 ‘힘’을 통해 그와 같이 고착화되는 현실에 틈을 내며 저마다의 목소리를 표현하고자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러한 목소리는 어떤 목적이나 당위의 움직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실존과 우연을 긍정하는 가운데 기성의 질서에 파산을 선고하고 계속되는 실험, 그것이 끝내는 실패할지라도 끝까지 지속되는 실험을 추구한다. 이는 인간의 삶이 기성의 것을 모방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생함을 창조해내는 가운데 필연으로 인식되었던 삶에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시 쓰기와 같은 예술행위에 있어 사회적인 ‘능력’과 미학적인 ‘힘’은 함께 작동한다. ‘능력’이 신체를 규율권력의 치하에서 훈육함으로써 기성의 질서에 따라 미학화(감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획득된 것이라면, ‘힘’은 그러한 능력으로부터 주체를 퇴행시킴으로써 규율과 목적을 벗어난 유희를 산출한다. ‘능력’이 기성의 질서와 함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결정화(結晶化)의 움직임을 그려낸다면, ‘힘’은 그와 함께 하면서도 맞서며 정감을 산출하는 동시에 그 정감에 의해 변용되어 가는 도주선(逃走線; ligne de fuite)을 그린다. 이처럼 시는 자신이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며 자꾸 다른 것이 되어간다. 기지의 것으로 시에 나타나는 힘과 정감의 움직임을 살피는 일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의 언어 역시 시인이나 사물처럼 하나의 몸이다. 언어란 사회화된 코드로서의 체계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물질이기도 하다. 시의 언어는 시인이 마주치는 정감들을 포착하며 이를 다시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시인이 포착하는 정감들은 세계가 발산하는 기호(sign)들로부터 오며, 이는 의미작용으로 결정화된 것이 아니라 의의(sens), 즉 ‘의미’ ‘감각’ ‘방향’ 등과 같은 것들이 한 몸을 이루는 미분화(未分化)된 덩어리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시의 언어가 포착하고 다시 표현하는 것은 기성의 앎 이전에 있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르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실패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시작은 인간화된 이전의 힘, 즉 차이 지으며 나아가는 생성을 담아내고 다시 드러내는 것이기에 언제나 실험적인 성격을 띤다. 이는 어떤 목적이나 기획에 따라서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서 자유로운 미학적인 움직임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시 쓰기는 기성의 앎만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과 함께 반복한다. 이러한 움직임으로써 시의 언어는 자신이 표현한 것 안에서 그 표현을 넘어서며 기성의 질서에 틈을 내고 우연을 긍정한다. 물론 실험은 언젠가 앎에 편입될 수도 있고, 혹은 영원히 앎의 영역 바깥에 머무르는 움직임으로 남을 수도 있다. 후자는 어떤 실패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는 오히려 인간의 힘을 긍정하는 독특한 역량의 증언이기도 하다. 이는 기성의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 실존의 무한이 결코 소진되지 않는 힘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 모르는 것을 말하는 일이 ‘기쁨’이 되는 까닭도 이와 같다. 시의 언어가 어떠한 불행을 노래하더라도 그것이 실천의 선이 되는 까닭은, 그 노래가 단일한 의미로 결정화되지 않고 끊임없는 생성으로, 차이의 긍정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시는 기쁨의 표현이다.

 

 

 

 

 

 

 

 

 

 

 

김태선
작가소개 / 김태선

–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장웹진 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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