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대신 고양이

[단편소설]

 

 

렘브란트 대신 고양이

 

 

진연주

 

 

    불이 나면 나는 렘브란트 대신 고양이를 먼저 내보낼 거야.
    그 말은 꽤 근사하게 들렸다. 단호하고 거칠 것 없는 믿음에서 비롯된 아홉 개의 어절은 남자의 낮고 부드럽고 섬세하면서도 짐짓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뱉어내는 말투 때문에 더욱 호감을 주었다. 아이가 그 말을 처음 들은 건 네 살 무렵이었다. 빛을 등지고 선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숙연해서 아이는 차마 남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남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디 하나 없이 매끈하고, 길고, 하얀 손가락들이 서로를 어루만지고 문지르며 꼼지락대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종종 렘브란트와 고양이는 불타는 링 위에 올랐다. 그리고 남자에 의해 두 손이 높이 쳐들려 왕좌에 오르는 건 언제나 고양이 쪽이었다. 아이는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들렸고 자신이 그 문장을 발음할 때도 남자처럼 멋있는지 알고 싶었으나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은 없었다. 남자만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불이 나면 나는 렘브란트 대신 고양이를 먼저 내보낼 거야.
    남자가 그 말을 할 때마다 여자는 남자의 목을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가 춤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서면 남자는 웃었고 아이는 여자와 남자가 만들어낸 그림자 속으로 기어 들어가 몸을 움츠렸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남자는 두 팔을 벌리고 다가서는 여자에게서 몸을 돌렸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여자 앞에서 그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 문장은 술자리의 안주로 올려졌다. 예전보다 격앙되고 열광에 휩싸인 목소리였으나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여자처럼 사려 깊은 눈동자로 남자를 바라보거나, 동의와 감탄의 제스처로 입을 맞추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군가의 눈치 없는 말 한 마디가 남자로부터 그 말을 빼앗아갔다.
    에이, 그거 조각가 자코메티가 한 말이잖아요.
    남자는 더 이상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아이도 더 이상은 그 문장을 떠올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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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을 구하기 위해 이 집에 들어섰을 때 전 세입자는 도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인의 무신경으로 세입자가 누리게 될 자유에 대해서도.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수도꼭지를 돌려 보고 변기 물을 내려 보고 벽에 금이 간 곳은 없는지 곰팡이가 슬어 있는 곳은 없는지 살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의례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다락방을 본 후 이미 이 집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다락은 사다리를 통해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위에서 사다리를 접어 올린 뒤 문을 닫으면 다락의 존재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더 돌아볼 필요도 없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사 와서 처음 한 일은 다락문에 박힌 문고리를 떼어내는 것이었다. 문의 모양을 따라 사각의 홈이 패어 있긴 했어도 그곳에 다락방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크림색 벽지를 볼 때마다, 아니 천장에 나 있는 홈을 볼 때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지난날의 어떤 과오, 박탈감, 치욕, 증오 같은 것들을 떠오르게 했다. 그것은 내가 갖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내 미래가 밝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곤두박질쳐도 마땅한 것 역시 아니었다. 내 유일한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두드러지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탈했고, 궤도를 이탈한 것보다 더 억울한 것은 바로잡기에는 이미 늦은 시기에, 늦은 나이에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에 와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가 내 앞에 와 있었다. 나는 천장을 볼 때마다 미간을 찌푸렸다. 천장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어느 날 나는 외출했고, 천천히 돌아왔고, 천장에 나무를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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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천장에 붙어산다. 천장은 습하고 어둡다. 어둠은 미동도 없이 천장에 붙들려 있고 나는 어둠을 빨아들여 더욱 어둡고 앙상해진다. 이차원의 공간에서 더욱 어둡고 앙상해지도록 결정된 게 내 삶이다. 나는 빛을 모른다. 아주 오래전 어떤 날에는 빛 속에서 빛이 되기도 했던 것 같은데 말 그대로 너무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그것이 빛이었는지 아니면 분절된 어둠이었는지도 헷갈린다. 나는 빛을 안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어둠 속에서는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는 것도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았다고 확신하기도 어렵다.
    나는 어둠 속에 놓여 있다. 이곳에는 창이 없고, 전구 하나 매달려 있지 않다. 낮도 밤이고 밤도 밤이다. 눈을 떠도 어둠, 눈을 감아도 어둠이다. 온통 어두워서, 나는 눈을 뜨고도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주 눈을 만져 보아야 한다. 아직도 코가 매달려 있는지 귀는 또 거기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코를, 귀를 만져 보기도 한다. 입술도 달싹거리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내 성대는 말라 쪼그라 붙은 게 분명하다. 나는 그날 밤 이후 일 밀리미터도 성장하지 않았다. 수년간 천장에 붙어 납작하게 짓눌려 있다 보면 성장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나는 어둠과 함께 천장에 붙들려 낮이고 밤이고,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시간을 정지해 있다.
    그리고 소리를 듣는다. 스스스, 아니면 시시시, 같은 소리들. 컁컁컁, 아니면 꺙꺙꺙, 같은 소리들. 틱 택 탁 슉 챙 같은 소리들. 동그랗거나 뾰족한 것들이 구르거나 떨어지는 소리들. 무엇인가가 벽에 스치거나 멈춰 있는 소리들. 또 다른 무엇인가가 쏟아지거나 잠잠해지는 소리들. 그 소리들을 상상한다. 소리들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귀에 힘을 주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여자가 나무를 그릴 때면 하늘 한복판에서 별들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뚫고 존재가 폭발하다가 마침내 화사한 침묵으로 바뀌는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침묵은 이내 어두워지면서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나무 위에 앉거나 덤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침묵마저 잠잠해진 후에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작고 낮지만 공간을 꽉 채우며 풍성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이 왔고, 오래도록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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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의 집에서 나온 후로 숙면을 취한 적이 없다. 꿈을 꾸었고, 그것은 대부분 나쁜 꿈이었다. 그래도 나쁜 현실보다는 나쁜 꿈이 나았으므로 깨어 있기보다는 기어코 잠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잠에 들기까지의 시간은 언제나 형편없었다. 술을 먹고 술을 늘리고, 약을 먹고 약을 늘려도 자는 시간보다 잠에 들기 위해 애쓰는 시간이 많았다.
    내게서 열정이 빠져 나간 지는 오래이다. 나는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고 바람대로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일은 분별력 없는 일일 테지만, 그 무엇도 하지 않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생길 테지만, 나는 더 이상 분별력을 지니고 싶지도 않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일이 도움이 됐다. 무중력 상태처럼 나를 들어 올려 고통에서 한 발 벗어나게 해주었다. 고통은 이제 내게서 한 발 물러나 좀 더 먼 곳에 머물렀으며 나는 어떤 도취 상태에 나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까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은 나를 흔들며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나는 기억에 내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더러 떠오른 기억을 소리 내어 말해 보려고도 했다. 밖으로 내보내는 만큼 기억의 부피가 줄어들 수도 있으리라는 어떤, 경적소리 같은 것이 내 안에서 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리를 내려 하면 할수록 기억은 옅은 어둠 속으로, 냉랭한 과거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현재와 아무런 마찰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가뿐하게 걸어 들어갔다. 나는 끝내 기억에 소리를 입히지 못했고, 기억은 과거 속에서 시체처럼 영원히 살아남았다. 기억은 기억으로만 존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채로, 자신이 있어야 할 그곳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기억이란 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어가 끼어드는 순간 망하는 것, 언어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억이 끼어들어도 망하는 것. 그러니까 조금 더 잘 망하도록 깔끔하게 태워버렸어야 했다. 눈알도 뽑아내고, 귀도 잡아 뜯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새카만 숯덩이가 될 때까지 가만 놔뒀어야 했다. 모두 망하게. 모두 망해서 아무도 그 실패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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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기억은 남자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됐다. 불이 나면 나는 렘브란트 대신 고양이를 먼저 내보낼 거야. 그리고 노래가 있었다. 잔잔하고 맑고 풀냄새 나는 노래가. 남자의 목소리와 노랫소리에 홀려 있을 때 마침 나뭇가지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갈색 새 한 마리도 날아올랐다. 바람도 불었다. 여자의 치맛자락이 뒤집혔다. 흰 허벅지와 그보다 흰 속옷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자가 치맛자락을 잡아 끌어내리며 웃었다. 남자도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등에 얹고 새가 활개를 치며 날아다녔다. 주위가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모든 게 환했다. 뱃속 깊은 곳에서 햇살이 비집고 올라오는 듯했다. 그것은 중력을 견디며 계속해서 치솟다가 어느 순간 팡 터지며 사방을 에워쌌다. 빛으로 이루어진 돔 같은 것이 주변을 감쌌다. 나는 정체불명의 감정을 느끼며 서 있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으나 그 감정이 나를 간지럽히고 들어 올리고, 그리고 그 환한 반구형 지붕 밑에서 언제까지나 안전하리라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을 선사했다.
    그때 새와 함께 돋쳐 오르던 노래가 <에버그린>이다. 내가 아는 유일한 노래.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내 사랑이 언제까지나 푸르다면 꽃은 시들지 않을 거라는, 그러니 내 손을 잡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사랑이 되어 주겠노라고 말해 달라는 노래이다. 그 말을 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낮으로 저녁으로 밤으로 바뀌어 갔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내 기억 속의 여자는 늘 <에버그린>을 듣는 여자였고, 노래는 아직 내 곁에 있다. 노래는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풍경이 되고는 했는데, 그래서인지 노래를 떠올릴 때마다 빛으로 이루어진 돔과 함께 심연 속에서 펄떡이던 심장소리가 펼쳐진다. 심장소리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놀라 깨던 날들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노래에서는 여전히 풀냄새가 나고, 나는 빛으로 이루어진 돔 안에서 다시 간지러워지고 안도한다. 기억할 것이 많지 않은 자들에게 기억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굉장해지고 가혹해진다. 나는 그 기억의 놀라운 에너지에 체념하듯 나 자신을 맡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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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는 모서리에서 시작해 중앙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가지들은 모두 앙상하고 뒤틀려 있는데 옹이가 두텁고 색마저 진한 고동색이라 아무리 그림이라 해도 생명의 기운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가지 끝이 모두 갈고리처럼 날카롭게 구부러져 누군가의 목을 낚아채려 달려들 것만 같고 가느다란 잎맥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잎들도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져 있다. 다락이 제 존재를 알리려는 듯 검게 나 있던 홈을, 냉기라도 내려올 것 같은 그 홈을 감추기 위해 나무는 점점 짙은 색을 갖게 되었다.
저 나무에게도 생기에 넘치는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꿈같은 것이, 제 몸뚱이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던 때가.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빛줄기 속으로 팔을 벌린 채 뛰어가던 때가. 아주 작은 사물에도 정열적으로 반하고 사소한 이별에도 가슴이 갈라지는 그런 시절이 말이다. 갑자기 천장에 달라붙은 나무가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오그라들고 짜부러진 몸뚱이 속에 숨어 있는 빛은 속절없다고 할 만큼 순수했고, 파양된 고아처럼 분노로 이글거렸다. 어쩌다 저런 나무를 그리게 됐을까. 나무를 볼 때마다 피로가 엄습한다. 심장 주위가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피가 돌지 않고, 돌지 않는 핏속으로 온 생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나무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거둬 이불 속에 묻는다. 검정색 바탕에 흰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한 마리 얼룩말처럼 보이는군. 늙고 병들어 초원으로도, 산악지대로도, 하다못해 동물원으로도 가지 못하는 얼룩말. 누군가가 그렇게 말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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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을 움직인다. 언제나처럼 바닥에 등을 펴고 누울 수는 없다. 등과 바닥이 평평하게 맞붙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내 등은 둥글다. 지구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자보다는 둥글다. 몸통을 더 둥그렇게 만들기 위해 두 다리를 접어 올린다. 두 다리가 가슴팍에 들러붙는 일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힘줄이 찢어질 것처럼 안간힘을 써도 두 다리는 가슴팍에 들러붙지 못하고 등도 바닥에 맞붙지 못한다. 자라나지 않는 몸의 자라나지 않는 근육과 힘줄과 뼈들이란 그런 것이다. 퓨우, 하고 큰 숨을 내쉰다. 숨소리가 다락 안에 가득 찬다. 어둠을 밀어낼 정도는 아니다.
    나는 자고 있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는 잠이 들어도 자는 것 같지 않고 잠을 자지 않아도 자는 것 같다.
    나는 조금 더 납작해졌고 조금 더 어두워졌다. 눈과 코와 귀를 만지고 입술을 달싹인다. 손을 뻗어 팔을, 다리를 확인한다. 미지근한 체온을 담고 있는 살덩이가 만져지기도, 느껴지기도 했으나 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여전히 존재한다면, 이토록 감쪽같이, 여자가 나를 잊는 게 가능할 수는 없다.
    나는 죽었다.
    살아 있다는, 그 어떤 기미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걸 보면 나는 죽은 것이 분명하다. 죽은 채로, 죽지도 못하고, 삶과 죽음 사이에 오도 가도 못하고 붙들려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면서, 나는 죽은 채로 살아 있고 산 채로 죽어 있다. 기진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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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갑갑하고 침울한 공기가 사방에 배어 있다. 소심하고 그런 만큼 고요하면서, 그런데도 완강하게, 모든 것을 불안 속으로 떨어뜨리는 것 같다. 팔을 휘저어 공기를 밀어낸다. 공기는 저만치 물러났다가 잠깐 사이에 밀려와 몸을 누른다. 질식할 것 같다. 공기 속에서 텅 빈 허공이 손을 내리뻗어 목을 조인다 해도 이상할 게 없겠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편할 것이다. 나의 모든 부분은 죽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죽어갈 것이나 감각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점점 날카로워졌다. 날카로워서 아주 작은 소음이라도 들릴라치면 피부가 째지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몸을 일으켜 조금 열려 있던 창문을 닫는다.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사라진다.
    멍이 들고, 멍이 든 곳을 발견하고, 그곳을 눌러야 비로소 통증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홀림 탓이었다. 홀려 있는 상태에서는 그 대상 외의 모든 것들에 무감각해졌다.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생각도 인식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어지는 풍경도 낯설기만 했다. 낯설뿐더러 아무런 상관이 없기도 했다. 나는 홀림 안에 있었고 그것 외의 다른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영혼이 온통 하나의 존재에만 집중해 모든 것을 거부하기, 오로지 하나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일이 홀연히 일어나 현실에 관한 한 마비 상태가 되어버리기, 홀림이란 그런 것이다. 홀림에서 깨어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급격히 냉각되고 모든 것에 냉소적이 되던 순간을.
    무엇엔가 홀리지 않을 경우에는 기대할 만한 것이 더 많아진다. 폭죽이 터지는 강렬한 순간을 포기한다면, 파노라마와 같은 시선으로 더 많은 것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고요와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저 나무가, 천장에 달라붙어 어둠의 활력을 고요히 펼치고 있는 저 나무가 전부이다. 볼 때마다 격분과 슬픔의 감정이 동시에 일어난다. 한때 내 안에 존재했던 어떤 것의 고통이 내게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게으름을 책망하고 나무라면서 죽지도 않고 저기 붙어 있다. 꼼짝없이 달라붙어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다. 죽은 나무, 계속해서 죽어지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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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자가 없는 틈을 타 산책을 하기도 했다. 천장에서 몸을 떼어내면 온통 어둠뿐이었던 피부가 하얘지고 납작하게 짓눌려 있던 몸도 조금은 입체감을 갖게 된다. 내 몸의 부피감이 비로소 날 살아 있게 한다. 옹이만 같았던 관절이 펴지고 꺾이고 또다시 펴지며 앞으로 전진한다. 피 흐르는 소리, 비리고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냄새들, 움직이는 팔들, 다리들, 웃는 그리고 우는 입들, 굵고 얇고 높고 낮은 소리들, 그 모든 것들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다채롭고 무한한 표정의 사람들과 수시로 뒤바뀌는 풍경들과 여러 가지 색으로 반짝이는 네온사인들. 싸늘한, 빛의 천지.
    길은 끊이지 않고 어디로든 이어졌고 길이 있는 한 나는 그치지 않고 걸었다. 내 다리는 내 하중을 견디느라 부쩍 긴장해야 했고 간혹 내 하중을 견디지 못해 후들거리기도 했으나 걷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내 다리는 확고부동하게 걷기를 원했다. 내 팔이, 다리가, 생식기가, 비로소 살아 움직였다.
인적이 많은 골목을 지날 때에는 되도록 깊이 몸을 움츠렸다. 골목은 대체로 좁았고 간혹 넓었으나 그들을 충분히 비껴갈 만큼은 아니었다. 나와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나도 그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들은 짓뭉개진 나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고 나 역시 그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내 시선은 땅을 향했다. 나는 그곳에서 편편하거나 뾰족하거나, 이끼가 끼어 있거나 반질반질한 돌들을 보고는 했다. 나는 그것들을, 또 때로는 머리핀과 동전과 트럼프와 용수철과 수첩들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또다시 정처 없이 걸었다.
    누군가를 뒤쫓기도 했다. 그들은 내게 등을 들키며 천천히 걷다가 한두 번, 그러다 자주 뒤를 돌아보다가 어느 순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들과 묶인 채로, 그들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걷고, 왼쪽으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몸을 틀기도 하면서,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모쪼록 빨리 들키기 위해 더 많이 주의했다. 그들의 등은 방범등 아래서 동그래지기도 하고 순식간에 어둠을 들이마셔 캄캄해지기도 했다. 뒤를 돌아보고, 멈추고, 종종걸음으로 다시 움직이고, 따라 움직이고. 나를 눈치 챈 사람들은 용건도 없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거나 이유도 없이 달음박질쳐 달아나기도 했다. 나는 그 뒤에서 웃어대거나 있는 힘껏, 전 속력으로 내달려 그들의 뒤통수를 돌로 내리쳤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모습은 어릴 때 보았던 폭죽놀이를 떠오르게 했다. 렘브란트보다 고양이가 먼저 구출되던 시기였다. 그들이 길바닥에 코를 처박고 고꾸라지면 나는 그들의 등에 올라타 몇 번쯤 더 뒤통수를 돌로 찍었다. 살점이 흐물거리고 두개골에 우물 같은 어둠이 고일 때까지. 피가 길바닥에 카펫처럼 깔리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났고,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제멋대로 씩씩해진 웃음소리에 놀라 담벼락에 꼭 달라붙었다.
    누군가 죽더라도 이 도시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나는 모든 것들과 영원히 만나지 않으면서 영원히 사라지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 하나의 존재였던 영혼, 여덟 살로 끝이었던 어떤 영혼을 복기하고 삭제하기도 하며, 절름거리며, 사라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나는 번번이 여자의 다락방으로 돌아갔다. 가서, 내가 주워 온 것들을 쌓았다. 내가 주워 온 것들은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지지도 않았고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다만 나와 함께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다. 눈을 뜨고 있어도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손으로 만져 보아야 했다. 나는 내가 나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머리핀 같기도 했고 동전 같기도 했고 트럼프나 용수철 같기도 했다. 돌멩이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수첩 속의 글자인지도 몰랐다. 나의 이야기가 없으므로 나는 누구의 이야기라도 될 수 있었고 누구의 이야기라도 될 수 있었으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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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속적인 시간과 불연속적인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두 개의, 다른 시간들을 배정받는 삶에 대해. 그것은 어떤 운명일까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엉망진창을 엉망진창인 채로 잘 누리는 삶에 대해, 충분한 좌충우돌을 겪어내며 일관성 없는 감정들에 휩쓸리며 불친절과 친절을 오르내리며 연속적인 시간을 연속적으로 살아내는 삶에 대해.
    반대로, 겪을 법한 일들을 겪지 못하고, 시간의 연속을 살지 못하고, 시간의 끝과 끝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어린 시절을 놓친 어린아이와 숨기고 숨는 이상한, 강탈당해서 도중이 사라진, 불연속적인 시간을 사는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우 씨팔, 하는 날이 올 테지. 어우 씨팔, 하면서 숨을 놓고, 뭐 그런 거지. 시련이라니. 누구나 시련을 겪게 마련이야. 거기에서 살아남는 사람과 죽는 사람이 있을 뿐. 누구를 그렇게 사랑하고, 누구를 그렇게 사랑하도록 놔둔다니, 너무 이상하잖아. 하긴 자신이 전부인 사람은 외부를 갖는 법이 없으니까, 누가 누구를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해서 누가 어떻게 되든 그냥 놓아두는 것이겠지. 그렇게 사랑한다는 것의 고통을 알 수가 없는 것이겠지.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렸다. 점차 중얼거림이 잦아들었고 그것이 나를 나에게서 떼어 놓았다. 나는 멀찌감치에서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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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하루에 한 번 밥을 줄 때만 나를 기억해 냈다. 여자가 사다리를 오르내릴 때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침묵은 분노와 모멸을 감추기에 그럴듯한 속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천장을 두 번 두드리면 나는 사다리를 내리고 구석에 몸을 숨긴다. 불빛이 다락에 스며든다. 깊고 잔잔한 빛이 고인다. 잔잔함을 깨뜨리며 여자의 정수리가 올라오고, 하얗고 마른 팔이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들키지 않도록 더 깊이 몸을 움츠린다. 여자가 식판을 들이밀고 여자의 팔이 정수리가 사라진다. 여자가 다시 천장을 두 번 두드린다. 나는 몸을 풀고 사다리를 올린다. 밥과 마른반찬 하나가 전부인 식판과 내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나는 어둠 속에서 어두운 밥을 먹고 조금 더 어두워진다. 목이 말랐고, 밥은 언제나 부족했으나 물도 밥도 참아야 했다. 천장에 달라붙은 채로 용변을 보는 일은 매우 난감했다. 더구나 어둠은 냄새를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여자는 그조차 잊은 듯했다. 나는 완벽하게 실종했다. 실종한 상태로 느끼는 허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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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는 일을 멈춘 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아무 짓도 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모든 짓을 하지 않는 것이 마땅했다. 존재하기 위해 반복해야 하는 행위들이 구차하고 넌덜머리나기도 했다. 어떻게든 존재하기 위해 어떻게든 반복해서 나를 버려야 했던 상황들이 진절머리 났다. 한때 나는 그것을 일종의 유예라고 생각했다. 달리기 위해 힘껏 움츠리고, 놀라움을 위해 비밀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절벽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참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적어도 바다로 뛰어들면 죽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바다는 너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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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번 꿈을 꾼다. 여자의 손으로부터 불길이 시작되고, 불길이 치솟고, 천장을 타고 쏟아지고, 문짝이 떨어지고, 이불에 불이 붙고. 나는 달아나는 대신 더 깊이 숨는다. 몸이 타고 노린내가 진동하고 내 몸이 반으로 줄어든다. 붕대 속에서, 오그라들고 짜부라진 몸뚱이가 여자를 올려다본다. 여자는 한 번도 표정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불길이 치솟기 전에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러지 못했던 것은 여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아무런 표정도 지니지 않은, 한 번도 표정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얼굴. 그 얼굴이 말하는 것 같았다. 넌 고양이나 렘브란트보다도 못한 존재야. 나는 뛰쳐나가는 대신 더 깊게 숨었다.
나는 지워진 존재였으나 아무리 걸어도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아무리 자도 완벽하게 죽지 않았다. 짜부라진 육체로, 천장에 붙어, 온통 어둠인 채로, 여전히 존재했다. 놀라움 없이, 기대 없이, 확신 없이, 녹초가 되지도 않고 미치광이가 되지도 않으면서. 넘어오는 빛줄기 하나 없이 아침이 오고 밤이 오는 곳. 충분히 붙들려 있고 충분히 사라진 곳.
    나는 지금의 내가 몇 살인지 알 수 없고 이곳에서 얼마를 버텼는지도 알지 못하겠다. 불이 나던 때는 여덟 살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내 또래 아이들이 그해에 학교에 입학했고, 나는 그들이 부러웠으나 부러운 것을 내색하지도, 학교에 보내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그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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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은 여전히 뛰고 있으나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손을 가슴 위에 얹어 맥박을 확인한 후 다시 입으로 가져간다. 손바닥에 뜨거운 김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직 숨이 멈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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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천장에 붙어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동안 내부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소리들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여자의 옷에서 나던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환하고 슬픈 냄새였다. 여자의 눈은 여러 가지 풍부한 감정들을 담은 채 천천히 깜빡였다. 나는 여자의 눈에서 내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여자의 옷자락을 붙들고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여자의 무릎 위에 무릎을 접고 앉아 여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여자의 냄새 때문에 나 또한 슬퍼지는 것 같았다. 여자의 손이 내 뒤통수를 여러 번 쓸어내렸다. 천사 같구나. 그렇지만 언젠간 너도 아버지가 될 테지. 네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여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령들 얘기를 해주세요. 밤마다 숨어서 속삭이는 혼령들 말이에요. 여자의 옷을 잡아당겨 젖가슴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혼령들은 밤마다 숨바꼭질을 한단다. 숨는 게 특기야. 혼령들은 아주 잘 숨기 때문에 그들을 찾는 건 쉽지 않아. 아주 골똘하게 골몰하고 있어야 찾을 수 있지. 혼령들은 머리카락 속에 숨기도 하고…… 얘, 손가락을 가만히 두렴. 여자의 젖꼭지가 딱딱해졌다. 머리카락 속에 숨기도 하고요? 숨기도 하고, 손톱 밑에 숨기도 하고, 발가락 사이에 숨기도 해. 벽장엔 안 숨어요? 문 뒤엔요? 응, 그런 곳엔 안 숨어. 손가락을 가만 두라고 했잖니. 움직임을 멈췄다. 두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젖꼭지는 여전히 딱딱했다. 그래서요? 숨으면요? 너같이 예쁜 아이들이 찾아내면 이야기를 시작하지. 엄마같이 예쁜 사람이 찾아내도요? 응, 그렇단다. 아빠같이 예쁜 사람이 찾아내도요? 쉿, 조용히 하렴. 자꾸 그러면 나는 잠이나 잘 거니까. 안 떠들어요. 손가락도 떠들게 해선 안 돼. 네, 손가락도요. 너같이 예쁜 아이들이 찾아내면 이야기를 시작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딱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응, 딱 하나만. 혼령들은 아주 작나요? 손톱 밑에 숨으려면 아주 작아야 하잖아요. 혼령들은 산만큼 커졌다가 씨앗만큼 작아질 수도 있어. 너같이 작은 아이가 될 수도 있고. 아빠 고추처럼요? 그게 무슨 말이니? 아빠 고추가요, 내가 놀아 주면 커져요. 행복하면 커진댔어요. 내가 놀아 주면 행복하니까 커지는 거래요. 손가락으로 여자의 젖꼭지를 비틀며 말했다. 여자가 내 손을 쳐냈다. 여자의 손에서 깊은 진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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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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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을 더듬어 문고리를 찾는다. 문짝을 열고 사다리를 내린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사다리를 내려간다. 바닥을 딛고 선다. 척추가 펴진다. 여자는 누워 있다. 천장을 향해 누워 있다. 자는 것 같기도 하고 영원히 잘 것 같기도 하다. 천장을 올려다본다. 나무는 앙상하고 뒤틀려 있다. 진한 고동색 옹이를 박고, 가지 끝은 모두 갈고리처럼 날카롭게 구부러져 누군가의 목을 낚아채려 달려들 것만 같다. 가느다란 잎맥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잎들도 누군가를 매달기에 적당해 보인다. 울고 싶다. 똥도 마렵다. 아랫도리를 까 내리고 똥을 한 무더기 싸지른다. 비로소 아랫배가 편안해지고 터질 것 같던 울음도 잠잠해진다. 다시 여자를 본다. 여자는 웃고 있는 것 같다. 웃음은 너무 오래된 이야기이다. 여자는 웃고 있는 것 같다. 여자가 웃는다. 이제 나쁜 꿈을 꾸지 않기로 다짐한 것일까. 이제 표정이라는 것을 갖기로 결정한 것일까. 자면서도 웃기로, 그렇게 한 것일까. 여자에게서 풀냄새가 난다. 젖은 흙과 짓이겨진 풀이 내뿜는, 생명과 주검이 한데 묶여 뿜어내는, 감미로우면서도 역겨운 냄새. 짙고 축축하고 노골적인 냄새. 여자는 계속 자고, 계속 웃고 있다. 그런 여자는 재미없다. 여자를 깨워야 한다. 여자 앞에 선다. 돌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김개영
작가소개 / 진연주

–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방>이 당선되어 등단. 장편소설 <코케인> 발간.

 

   《문장웹진 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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