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불완전함만이 우리를 구원할거야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너의 불완전함만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임지훈

 

 

 

0.

 

    다소의 변명부터 늘어놓자면, ‘나’는 모든 분야의 평론가가 아니다. 게임을 할 때에는 일개 유저(User)에 불과하며, 영화를 볼 때에는 일개 시청자에 불과하고, 음악을 들을 때에는 일개 청자에 불과하다. 예컨대 내가 평론가로서 있을 수 있는 것, 평론가로서 어떤 발언권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학’과 관련된 글을 쓸 때뿐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문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게 되었지만, 실제 이 글의 바탕이 되는 체험과 인상, 분석은 문학뿐만이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있다. 먼저 밝히자면,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문학이라는 특정한 예술 형식에 대한 분석과 그에 따른 효과들에 대한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 평론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고 있지 못하다. 더불어 이 글은 이론적 해석과 주관적 인상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객관성을 충족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이 자리에 쓰게 된 것은, 최근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Feminism)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한 반론을 다소 성글고 급하게나마 이 지면에 공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완결된 한 편의 글이라기보다는, 앞으로 계속될 평론과 연구에 대한 거친 프로포즈(Propose) 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즉, 이 글은 하나의 주장일 뿐이다. 다만, 계속해서 이어 나가고픈 주장이다.

 

 

1.

 

    개인적으로 게임을 비롯한 대중문화들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와 관련된 커뮤니티들을 탐독하고 있자면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요즘 게임들은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의 색채가 강해 재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의 세례(?)를 받은 게임들은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탓에 캐릭터의 디자인이나 플롯의 구성에 있어 너무 평면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특정한 경향에 대한 제작자의 과도한 몰입이 스스로 만든 세계관의 개연성이나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을 해치고, 결과적으로는 작품의 재미를 해친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게임에서만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라 서사를 가질 수 있는 모든 장르에서 동일하게 제기된다.
    한편으로 나는 이와 같은 주장에 동의한다. 게임을 비롯해 많은 종류의 작품에서 그와 같은 사례가 종종 목격되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휴식을 취할 때면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데, 이때 선택의 기준은 몰입감이다. 때문에 얼마만큼 단독적인 작품으로서 독립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으며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가, 내적인 개연성이나 핍진성은 얼마만큼 확보되어 있는가는 작품을 선택할 때 작용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렇기에 나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세계의 개연성이나 핍진성을 무시한 채 작품 외적 사상에 기반을 둔 급전(急轉)을 취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어떨 때는 나의 휴식을 방해받는 기분마저 드는데, 나에게는 다른 세계로의 몰입이 곧 휴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평론가적인 입장에서(비록 뉴비지만), 이와 같은 급전에 대해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이것은 정말 작품의 개연성을 해치는 급전에 불과한가. 주인공의 급진적 행위는 세계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주인공의 급전이 초래하는 세계의 개연성과 핍진성의 훼손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가 아닐까 하고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을 던졌을 때 납득이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작품의 개연성을 해칠 뿐인 과도한 급전으로밖에는 해석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에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모종의 질문을 던져 본다. 예컨대, 이 작품의 내적 진리는 오직 그와 관계될 수 있는, 사건에 연루된 자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기에, 해당 작품의 급전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그 내적 진리와 연관될 수 있는 사건에 대해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주 간략화 시켜서 말한다면 위와 같은 추상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겠다. “난 사실 페미니스트가 아닐지도 몰라.”1)
    물론 평론가가 페미니스트일 필요는 없다. 사실 이건 좀 잘못된 진술인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정의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란 단지 페미니즘적 사상에 동의하며 그와 관련된 실천을 수행하는 사람을 지칭할 뿐, 정작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완전하게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페미니스트야”라는 진술은 정작 내가 어떤 진리에 충실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충실성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진실되고 적확(的確)하게’ 진술하지 못한다. 내가 어떤 진리에 복무하고 있는가를 진실되고 적확하게 진술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실천뿐이다. 때문에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적 실천을 통해 주장될 수 있을 뿐이지, 어떤 진술을 통해 주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 진술을 조금 더 확장해 보자면, ‘나는 페미니즘적 사상을 가진 평론가이다’라는 진술은 오직 그러한 실천으로서의 글쓰기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지, 진술 그 자체만으로는 확인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페미니즘적 사상을 가진 평론가이다’라는 진술은 불필요하다는 말이 되겠고, 보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평론가는 굳이 어떠한 무엇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되겠다. 오직 페미니즘적 글쓰기를 통한 실천만이 있을 뿐이고, 평론가는 단지 평론가일 뿐이라는 동어반복적인 진술이 덧붙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불어 나는 ‘평론가’란 단지 평론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평론가이기에, 어떤 작품이 페미니즘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작품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어떤 작품이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와 관계없이 그 작품이 최소한의 작품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으며, 나름의 절차를 통해 그 작품성을 논하는 과정을 거칠 뿐이다. 그 작품의 사상에 따른 가치는 이러한 해석 절차의 부산물일 뿐, 해석 이전에 선험적(先驗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평론가로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논함에 있어 어떠한 기준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론가란 객관적일 필요보다는 정치적 방향성을 지닌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평론가는 평론가로서 나름의 경향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적인 해석 절차의 결과로 산출된 부산물로서의 가치에 대해서, 그 가치를 옹호하느냐 혹은 평가절하 하느냐는 평론가 고유의 몫이며 해석의 자유이다. 때문에 나는 특정한 작품에 대해 평론가들이 서로 다른 관점을 취하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 무척이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평론가들은 동일한 작품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고, 서로 다른 가치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으며 그러해야만 한다. 모두가 이건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때에도 이건 이런 점에선 좀 별로라고 논증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며, 반대로 모두가 그 작품의 가치를 평가절하할 때에도 그 작품의 나름의 가치를 발견하고 재해석해 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2)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작품이 문제인 것일까, 아니면 평론가인 내가 잘못된 것일까. 사실 이 작품은 어떤 윤리적, 정치적, 혹은 여성적 관점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내가 그러한 내적 진리에 충실하지 못한 까닭에 이와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내가 요즘 들어 가지고 있는 고민이다. 처음에 나는 작품을 꼼꼼하게 읽고, 관련될 수 있는 것들을 더 꼼꼼하게 확인함으로써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예컨대 내가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하게 알게 된다면, 혹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얻게 된다면, 나는 그 지식의 잣대 위에서 대상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이른 결론을 내보자면, 세상에 그런 지식 따위는 없었으며, 그에 기반을 둔 판단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3)
    이건 위에서 내가 내린 평론가의 정의와도 부합하는 것인데,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어떤 평론가도 확고하고 불변하는 지식의 층위(層位)에서 작품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아니, 못 한다. 나는 내가 좀 더 공부를 하게 된다면, 다시 말해 내가 그러한 ‘지식’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면 적어도 이러한 혼란은 최소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절대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부를 반복하고 습득한 지식을 체계화할수록 내가 절감하게 되는 것은 나의 앎의 한계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것, 내가 체득할 수 있는 것,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선택에 대한 확고한 근거로서의 지식이라는 토대는 결코 나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나에게 가능한 것이라고는 말을 고르는 일련의 선택의 과정들 속에서 겪게 될 혼란과 불안일 뿐이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친 판단을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해보고자 한다. 예컨대, 위에서 제시한 ‘급전’의 사례들은 단지 ‘재미’가 없는 작품일 따름이며,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의 ‘세례’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작가의 역량이 부족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 안 좋은 사례들은 따로 열거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 작품들에서도 누군가는 나름의 내적 진리의 분출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작품의 몰입을 해치는 과잉의 지점으로 꼽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 작품의 내적인 진리가 확인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 즉, 여기에서 수행되는 나의 독해와 해석은 결코 진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특정한 작품에 대한 나의 이해는 특정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의 진리를 옹호하고자 하며, 그것이 이 글의 핵심이 될 것이다.

   1)  물론 여기에서 고려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나’의 독해능력이다. 나는 ‘나’의 독해능력을 믿지 않음에도 이 글에서는 그러한 부분에 대한 고려를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2)  다만 나 또한 다른 평론가가 높게 평가한 작품들에 대해 동일한 진술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러한 결과는 해석의 절차에서 교집합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해 보자면 우리가 공부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현대 이론의 교집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러한 우리의 평가에 있어 확증 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의 지점은 없는지 계속해서 의심이 된다. 정말로 A라는 작가는 좋은 작가인가? 정말로 A라는 작품은 좋은 작품인가? 이러한 논증의 작업은 단지 심증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기에 이론의 개진과 함께일 때에만 이뤄질 것이고, 해석 절차가 첨예해질수록 이러한 판단은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례의 좋은 예시로 두 권의 책을 꼽고 싶다. 하나는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은 위험하다』이다. 나는 이와 같이 ‘정전(正傳)’에 도전하는 사례들이 보다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정전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계속 거듭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혹자는 이러한 해석이 과도한 것이며 여기에는 시대적 문제를 과도하게 하나의 작품, 한 명의 작가에게 귀속시킨다는 주장 또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이 작품은 현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두 권의 해석은 정전에 대한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며, 나는 이러한 과정의 지속이 문학의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3)  이것은 일견 동일한 하나의 실체로 사유되곤 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사상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은 결코 하나의 일관된 실체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인 하나의 정답으로서의 ‘페미니즘’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개념으로서의 ‘페미니즘’과 현실적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사이의 괴리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괴리는 옹호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페미니즘’이라는 운동 하나에 제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개념과 현실적 운동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는 옹호되어야 하며, 그러한 괴리에 대한 사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운동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즉, 우리는 해야만 한다. 비록 ‘그것’이 불완전할지라도, 그 불완전함과 함께하기로 마음먹고서. 진정한 적은 그러한 불완전함을, 내적인 적대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자체의 실패로 간주하고 이러한 운동 자체를 무화시키고자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제 조화나 균형이라는 말과 싸워야만 한다. 조화, 혹은 균형은 단지 악무한에 불과하다. 우리는 서로 싸워야만 한다. 계속해서 싸우는 한에서만, 우리는 살아 있을 수 있다.
   4)  그렇기에 나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공감, 이해, 소통과 같은 표현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동일한 지식의 지평에 서는 순간 공감, 이해, 소통이 가능하리라는 착각을 하곤 하는데, 그러한 지평은 과연 실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보다 문제적인 것은, 그렇다면 공감, 이해,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내가, 혹은 대상이 그러한 지평에 서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공감, 이해, 소통이란 타자의 몰이해에 대한 비난을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단어의 정의를 통해 사유해 볼 때 공감, 이해, 소통은 타인이 나와 동일한 지식의 지평에 서지 않았을 때에도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공감, 이해, 소통이라는 말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것의 불가능성과 함께 말이다. 예컨대, 절대적인 지식의 한계라는 지점과 함께 말이다.

 

 

2.

 

    누군가에게는 작품의 몰입을 해치는 과잉의 지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작품의 내적인 진리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 된다는 것. 이 점은 작품의 재미가 관점에 따라 다르게 작동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지점을 가리킬 것이다. 먼저 꼽아야 할 것은 작품의 재미란 생각보다 단순한 가치 척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재미는 수많은 방식을 통해 추구될 수 있는데, 단순하게 열거해 보자면 입담과 같은 위트를 통해 발견될 수도 있으며, 새로운 지식의 전달을 통해 발견될 수도 있고, 억압에 대한 저항의 지점을 통해 발견될 수도 있다. 이는 재미란 것이 서사의 완급 조절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재미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추구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방식을 통해 체험될 수 있는 지점임을 가리킨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재밌다!”고 느끼는 지점은 수없이 다양하다는 점이고, 마찬가지로 창작자가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 방식 또한 수없이 다양하다는 것이겠다. 이는 작품의 지향이 단순히 하나일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며, 우리가 작품을 즐기는 방식 또한 한 가지로 축소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나는 재미라는 것이 단순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며 때로 재미란 언어화될 수 없는 지점에 가닿아 있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럼에도 평론가는 이러한 재미의 메커니즘(Mechanism)과 그것의 가치에 대해 나름의 해석과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라는 주석 또한 달아 놓고 싶다. 즉 평론가란 특정한 사상에 대한 옹호를 주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다양한 재미 요소를 발견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가치 체계 내에서의 척도와 순위에 따라 작품의 재미를 평가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작품들 가운데에서 해당 작품의 가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정의를 꽤 소중히 여기는 편인데, 왜냐하면 문학평론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가진 문학적 재미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도 한 가지 단서를 달고 싶은데, 앞서 주장했듯이 재미를 추구하는 방식은 실로 수없이 다양하므로, 그러한 사상의 분출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특정한 가치의 발현(發現)이나 재현(再現)으로서의 특정한 문학 작품을 옹호하는 사람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단지, 그것이 정말 합당한 재미를 가지고 있음을 적확한 언어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만약 그와 같은 평론가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차이를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다. 나에게는 재미가 1순위인데, 그 재미가 분출되는 지점이 다소 비윤리적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다만 나는 평론가로서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이 작품은 재미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윤리적이다.” 그리고 만약 그 재미가 그 비윤리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압도할 만큼의 희열을 선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이 작품은 비윤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재미있다.” 이걸 조금 색다르게 말해 보자면 나는 다음과 같이 바꿔 보고 싶다. “윤리, 좋지. 다만, 재밌는 한에서.” 왜냐하면 나는 내가 휴식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택한 작품에서 윤리가 재미를 압도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싶지 않으며, 그러한 압도가 나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의 창조물을 통해 재미를, 휴식을 취하고 싶은 것이지, 그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답변은 한 가지 의문을 자아낸다. 즉, 내가 재미가 없다고 느끼는 지점과 나의 휴식 시간을 침입해 온 저 압도적인 윤리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 예컨대 그 윤리를 재현하는 방식이 재미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윤리가 나를 불쾌하게 만들기 때문인가. 즉, “윤리, 좋지. 다만, 재밌는 한에서”라는 나의 진술은 정말로 문학적 재미라는 불분명한 실체를 제1가치로 추구함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떠한 윤리나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는 것인가? “(등장인물의 행위에 대해) 그래? 그것도 좋지. 다만 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지점을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저러한 지점들에 대한 분리선이 명확할수록, 우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만약 문학적 재미라는 것에 무게 중심을 놓는다면 우리는 대상이 되는 작품에 대해 “이 작품은 문학의 재미라는 내적 가치를 충분하게 구현하지 못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될 것이며, 반대로 윤리적 가치에 중점을 놓는 순간 “문학의 윤리라는 내적 가치를 충분하게 구현하지 못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될 것이다. 두 진술은 모두 일종의 실수인 셈인데, 왜냐하면 문학에 있어 고유한 실체로서의 어떤 진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은 무엇이다”라는 진술이 구체적이게 될수록, 우리는 그러한 진술로는 포획될 수 없는 잔여(殘餘)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손 틈 사이를 가뿐하게 빠져나가는 작품이라는 사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구체적 진술이 좀 더 많은 것을 포괄할 수 있도록 변경해야 할까? 그러한 포괄에 의해 길어진 정의는 정말 정의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문학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주의적 생각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정의도 모두 실패하고 말 테니 그러한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거듭해서 정의를 내리고, 또 그 정의를 깨부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진술은 결코 문학을 실체로서 포획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실패하는 무수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최소한의 정의가 있을 때,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할 때, 거기에는 적어도 하나 정도의 최소한의 차이가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차이이며, 그 차이를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정의를 반복해야 한다. 다만 그러한 정의를 불변의 정상 모델로서 간주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한에서, 우리가 내린 정의가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구체적 작품을 통해 얼마든지 깨질 수 있다는 인식과 함께하는 한에서. 예컨대, ‘저것은 문학이 아니다’라는 진술만은 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우리가 실패의 순간 발견하게 되는 차이, 정의와 그것의 현실적 운동 사이에서 발견하게 되는 그 차이는 ‘문학’의 불완전성을 지시한다. 어떠한 실제 작품도 문학의 정의를 온전하게 실현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는 작품의 실패를 지시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내린 어떤 정의도 결코 완전할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지시한다. 때문에 이 불완전성은 이중의 운동을 지시하게 되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작품의 내부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가진 개념의 내적 운동이다. 이때 변화하지 않는 것은 개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자리와 현실적 층위에서의 작품이라는 자리일 뿐이며, 이는 곧 운동의 형식만이 불변할 뿐,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실체적 진술들은 거듭 변화할 수밖에 없음을 지시한다. 이러한 진술들의 운동이 멈추는 순간, 문학은 정지한다. 개념에 완전하게 부합하는 문학 작품의 등장이란 곧 더 이상의 문학 작품이 불필요함을 의미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불완전함은 모든 운동의 조건이다.” 다만 현실에서 그러한 운동이 멈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므로 우리가 체험하는 개념과 작품의 완전한 일치는 단지 한순간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 그것이 한순간이 아니라 영속적(永續的)이게 되는 순간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바로 문학의 종언을 알리는 소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 보자면 이러한 불완전성이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뿐, 문학일 수 없다. 따라서 문학이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문학이기 위해서 이 불완전성은 포기할 수 없는 유일한 진리이다. 오직 불완전성만이 작품을 지탱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이며, 그러한 한에서 문학은 단순한 사실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5)
    그러니 역설적이게도 작품의 내적 ‘불완전성’은 문학이라는 예술 형식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단서이다. 혹자는 이러한 진술을 과도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것이 유일한 문학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불완전한 덕분에 아직도 글을 쓰고 글을 읽는 이 행위를 지속할 수 있다. 오직 이 모든 것이 불완전한 한에서, 우리의 문학은 계속될 수 있다.

   5)  이는 문학의 정의 가운데 하나인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의 언어화’라는 정의와 완벽하게 부합한다. 예컨대 문학이 가지는 불완전성은 세계와 언어의 불일치로부터 비롯될 수밖에 없는 형식 그 자체의 특성이며, 따라서 문학을 옹호한다는 것은 곧 세계와 언어의 불일치를 숙명으로 하는 인간의 존재 형식 그 자체에 대한 옹호이기도 하여야 한다. 또한 이러한 옹호는 세계와 언어의 불일치가 인간 존재의 필연인 한, 문학은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3.

 

    모든 문학 작품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불완전성이 문학의 작동 원리라는 것은 곧 작품의 모든 내적 요소들이 합리적이거나 개연성을 가질 필요는 없음 또한 의미한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독자로 하여금 상상을 부추기며, 더 많은 유연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토대라는 점에서 작품에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서사상의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어떠한 궁금증도 자아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연 성공한 서사라고 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서사상의 빈틈은 독자로 하여금 더 깊은 독해를 추동(推動)한다는 점에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함에 있어 매우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6)
    그러나 이 말은 결코 작품의 개연성이나 핍진성의 부재를 합리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물의 행동 및 서사상의 사건은 그 세계에 합당한 수준에서 벌어져야만 한다. 즉, 모든 작가는 자신의 문장에 대해 작품 내에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 때문에 문제는 서사상의 빈틈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빈틈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이고, 작가가 내세운 그 방법에 따라 작품의 성공 또한 갈리게 됨을 의미한다.
    가령 임솔아의 「단영」7)을 살펴보자. 산속의 깊은 절인 ‘하은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스님인 효정과 묵언수행 중인 아란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지인 효정은 절을 맡아 운영할 후계를 찾기 위해 대안학교를 운영하는데, 아란은 그 대안학교의 학생이다. 효정은 아란이 이후 자신의 역할을 승계해 주길 바라는데, 아란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왜 아란은 소설의 뒷부분에서 절을 떠나고 마는지에 대해서 소설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속내를 독자 스스로가 유추하게끔 지시할 따름이다. 이처럼 아란의 속내가 은근하게 감춰지면서도 그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절을 떠난다는 결정적인 행동을 할 때, 독자는 그의 행동에 대해 일련의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 그는 ‘하은사’를 떠나는 것인가, 왜 그는 정작 자신에게 잘해 준 ‘효정’에게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은 채 그 절을 떠나는 것인가.
    이처럼 아란의 행동에 일련의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왜인가. 표면적으로 볼 때 그것은 아란의 행동이 소설에 드러난 요소들을 통해 합리적으로 해석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즉, 아란의 행동은 소설 내적 요소들을 통해 완전하게 설명되지 않으며, 일련의 서사적 빈틈 위에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으로 따져 보자. 이 소설의 독자가 아란의 행동에 대해 그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단순히 그의 행동이 서사적 빈틈 위에 성립하고 있기 때문일까? 독자는 모든 서사적 빈틈에 대해 반응하는 존재일까? 독자가 그러한 행동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단순하게 말해, 아란의 행동이 그만큼의 어떤 매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회화에서 작동하는 매혹과 유사한 지점으로,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웃고 있는 것인가,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왜 그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가 등등의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회화가 지닌 매혹에 관람자가 유혹될 때이다. 마찬가지로 임솔아의 단편 「단영」에서 아란의 행동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독자가 아란의 행동에 매혹되었을 때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매혹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적어도 서사에서 그것은, 그러한 인물의 행동을 둘러싼 나머지 장치들로부터 시작되는 듯하다. 우리의 시선이 시작되는 소설의 첫 장면에서부터, 언어가 독해되는 방향을 따라서 말이다. 예컨대 아란을 둘러싼 모든 것들, 하은사라는 공간적 배경에서부터 이 절의 성립 배경과 그것을 융성하게 만든 효은의 (흡사 자본가의 모습과 유사하게 보이는) 노력들, 절에 함께 머물렀으나 어느 날 남몰래 떠난 능원과 그러한 여자들이 많았다는 진술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단영이라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임솔아의 소설은 흡사 말미에 벌어지는 아란의 떠남에 우리의 시선을 이끌기 위해 첫 장면에서부터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직조(直照)된 것처럼 보인다. 마치, 그러한 ‘떠남’에 우리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우리가 그것에 매혹되도록 만들기 위해 이 모든 시공간을 아름답게 서술한 셈이다. 회화로 치자면 이러한 서술들은 각각이 메인 오브제(Objet)로 우리의 시선을 인도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배치된 서브 오브제들에 해당할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오브제, 장면들이 개별적인 개성과 매력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매혹의 지점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이끌 수 있도록 기능해야만 한다. 우리가 아란의 ‘떠남’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러한 오브제-장면의 인도에 성공적으로 인도되었을 때이며, 뒤집어 말해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그러한 구조에 성공적으로 매혹되었음을 증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별적 매력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도록, 우리의 시선을 한 점으로 이끌어 가도록 만드는 일관된 구조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설의 서술에서 늘 얼룩처럼 자리 잡고 있는 존재의 쓸쓸함, 실존의 감각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모든 공간적 배경과 인물의 모습에는 약간의 쓸쓸함과 무정함이 배어 있다. 이러한 일관된 분위기는 ‘하은사’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드러나는 부흥의 분위기, ‘하은사’라는 대안적 공동체의 공간이 갖는 의미와는 대조되는 요소이다.

   6)  혹자는 역사 기록을 하나의 서사로 간주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고자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도 여전히 그러한 지점은 남는다. 예컨대 우리가 감탄을 터뜨리는 순간(어떻게 이럴 수 있지?)은 곧 역사 기록의 불완전성을 가리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감탄이 가능한 모든 서사는 문학의 한 종류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러한 감탄의 지점에 대해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문학적 해석의 하나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7)  강화길, 손보미, 임솔아, 지혜, 천희란, 최영건, 최진영, 허희정,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은행나무, 2020.

 

    능원이 떠나자 아란은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상실감을 극명하게 드러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느꼈다. 누군가 보다 못해 아란에게 능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게 되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사람들은 아란이 묵언수행을 시작했다고 믿었다. 아란은 자신이 효정처럼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누가 어떤 말을 하든 아란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누구도 능원에 대한 회고는 하지 않았다. 능원은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 같았다.(p.104)

 

    위 장면은 하은사라는 대안적 공동체 공간의 역설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아란은 능원에 대한 상실감으로 인해 묵언을 선택하지만 이는 ‘하은사’라는 공간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수행의 일종으로, 아란의 진로에 대한 선택으로 왜곡된다. 공간과 인물 사이에 나타나는 미묘한 불일치. 이를 바탕으로 이전까지 ‘하은사’와 효은의 입지전적인 인생담, 단영의 귀여운 모습 등이 부각되던 소설은 이 장면을 기점으로 그 맥락이 바뀌게 되며, 음각되어 있던 쓸쓸함의 정서가 보다 표면적으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즉, 완전한 치유의 공간처럼 보였던 공간은 이윽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결핍을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한 공간으로 뒤바뀌게 된다. 이 유사 가족적 관계와 그것을 위해 효은이 안배하는 공간이 결코 완전한 공간일 수는 없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아란의 ‘떠남’은 이러한 복선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기에 비록 그 동기가 완전하게 추론 불가능할지라도 나름의 합리성을 얻는다. 이는 작품의 말미에 등장하는 효은의 행동, 자신이 애써 만든 꽃밭을 스스로 짓밟는 모습과 겹치면서 그 매력을 배가시킨다. 두 행동은 모두 명확하게 그 동기가 설명되지는 않으나, 작품 내에 등장하는 공간과 인물들의 미묘한 불일치로부터 모종의 행동이 돌발하게 될 개연성을 확보해 놓았기에 두 장면은 서로 겹치면서 각각의 장면이 갖는 매력을 서로 간에 배가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즉, 서사 내에서 하나의 행위가 매혹의 지점으로 작동하는 것은 이처럼 완전한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하면서도, 나름의 내적 개연성과 핍진성을 소지하고 있는 한에서이며, 소설 내의 장면들이 그러한 지점을 향해 독자의 시선을 성공적으로 인도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소설이 하나의 장면을 매혹의 지점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소설이 지닐 수밖에 없는 불완전성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단순히 어떤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봉합함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작품이 매혹을 발산하지 못하는 것은 인물이나 공간, 혹은 작가가 가진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불완전성을 사유하고 이를 다루는 역량의 문제이다.

 

 

4.

 

    이와 같이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작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기 때문이다. 적어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로서, 작가는 자신의 서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는 방법은 자신이 서술한 문장들에 대해 나름의 개연성과 핍진성, 그것에 독자가 충분한 매력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방식을 통해서, 그리하여 독자를 매혹시키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모든 사건과 인물의 행동에 대해, 그 동기를 완벽하게 서술하고 합리화시킬 필요는 없으나, 그와 같은 요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앞선 문학의 정의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서사는 완벽할 수 없다. 모든 서사는 각기 다른 서사적 빈틈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작가는 그러한 빈틈에 대해 나름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 책임은 단순히 빈틈을 메우는 것만이 아니며, 그러한 빈틈을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룰 것인가에 달려 있다. 예컨대 임솔아의 「단영」에서 보았듯이, 그러한 빈틈은 결코 완전하게 메워질 필요가 없으며 비록 그 행위의 동기를 완전하게 추론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러한 행위의 내적 개연성과 핍진성을 나름의 방식으로 부과하는 것을 통해 다뤄질 수 있다. 이 경우 서사적 빈틈의 지점은 단순한 빈틈이 아니라 독자를 매혹하는 지점으로 작동하게 되며, 보다 깊은 독해를 추동하는 요소로 작동하게 된다는 점에서 서사가 가질 수 있는 매혹의 지점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리가 효은과 아란이 보여주는 행동들에 대해 나름의 동기들을 유추해 보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8)
    다시금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따라서 서사의 ‘재미’를 해치는 것은 서사적 빈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빈틈을 작품 외적 사상에 기반한 과격한 급전을 통해 메우려는 작가의 태도이다. 즉, 작품이 재미가 없는 것은 그것이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의 색채를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서사적 빈틈을 다루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의 실패는 결코 서사적 빈틈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빈틈을 과격하게 메우려는 시도/혹은 그러한 빈틈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가 서사의 실패를 부추긴다.
    독자가 작가/인물의 사상에 대해 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이다. 인물의 행위나 서사상의 사건이 소설 내적 요소들을 통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외적 요소를 통해 설명될 수밖에 없을 때, 그러한 작품 외적 요소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당할 때, 독자는 작가가 설정한 이와 같은 구도를 하나의 폭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독자가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작품 내에 등장하는 어떤 서사적 빈틈이 작품 내적 요소를 통해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독자의 무능이나 게으름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렇게만 치부해도 될 문제일까? ‘어디까지 독자에게 친절해야 하는가’라는 반론 또한 가능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품이 작품 내적 요소를 통해 어느 정도의 해석이 가능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작품 외적 요소를 참조점으로 삼는 것이 결코 디폴트(Default)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품 내적 요소를 통해 최소한의 설명도 불가능한 인물/행위의 돌출은 단지 작가의 무능을 표지하는 것일 뿐 독자의 무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작품을 지목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최근에 나타난 일련의 경향들, 소설과 시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무해한’ 인물과 ‘무해한’ 세계는 이런 지점에서 다소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물의 행위나 사건의 전개가 작품 내의 개연성이나 핍진성으로부터 발원(發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경향에만 기대어 갈 때, 그리하여 인물의 행위나 사건의 전개가 오직 ‘정치적 올바름’의 요소를 통해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와 더불어 작품에 구현된 세계와 인물상이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된 나머지 모든 것이 단지 무해할 뿐이어서 그것이 세계의 폐쇄성을 증언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면, 그것은 좋은 작품인가? 물론 나는 이러한 구성에 대해서는 온전히 작가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무능은 아닌지 물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금 말하는 바이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재밌는 소설, 재밌는 시이지, 도덕적으로 완벽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작가가 어떤 특정한 요소를 잘라내고 싶다면, 그리하여 무해한 세계를 자신의 작품 속에 축성(築成)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매혹을 갖춰야만 한다. 그리하여 독자를 그 매혹에, 서사적 빈틈을 가리고 있는 그 매혹의 지점을 탐닉할 수 있도록 끌어들여야만 한다. 단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기만 한 작품을 나는 원하지 않는다.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요소에 대해서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과연 확고한 실체인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상식인가? ‘정치적 올바름’ 또한 하나의 운동(Movement)이라는 점에서 개념과 운동 사이의 간극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고, 이는 모든 독자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동일한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는 없으며, 동일한 태도를 지닐 수도 없음 또한 의미한다. 즉, ‘정치적 올바름’은 결코 진리가 아니며, 하나의 실체도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을 불변하는 하나의 실체로서 사유하는 순간 우리는 앞서 거론한 개념과 운동의 불일치에 대한 판단의 실수와 동일한 덫에 걸릴 수밖에 없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을 하나의 영속적이며 불변하는 실체로 사유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현실에 아직 구현되지 않은 (그리고 영원히 구현될 수 없는) 저 너머의 실체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러한 사유 방식은 그 자체로 문제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의 운동으로서 가치를 지녀야 하는데, 그것을 현실 너머의 실체로 정립하는 순간 이와 같은 운동은 현실에서의 정치적 운동이라는 층위를 벗어나 그릇된 종교의 구조로, 사이비에 대한 믿음의 구조로 변모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그리고 과격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몇 해 전, 문학적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정한 표현 방식, 특정한 구도의 성적(性的) 요소가 누군가에게는 불쾌할 수 있으며 또한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음을 말할 때, 이들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그와 같은 주장은 문학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성적 요소들을 표현을 할 자유가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동감하는 편인데,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표현이 충분히 필요하다고 여겨질 수 있을 때에 한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과연 그러한 성적 표현이 문학적으로 충분히 필요하기 때문인가. 불필요할 수도 있을 표현임에도, 그들은 단지 그러한 성적 표현에 탐닉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닌가. 물론 이에 대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고유한 몫이기에,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다만, 그것이 작품의 내적 완결성을 위해 필요한 한에서. 그리고 그러한 표현의 활용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비난받을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한에서.
    앞서 충분히 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반복하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Gesture)들이 이와 같은 구조의 외설적 이면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도한 천착(穿鑿)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작품의 내적 완결성을 해침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작품들은 왜 그러한 요소에 집착하는가.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의 구조는 한편으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의 구조와 상동(相同)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의 제스처들은 일종의 필연이 아닌가? 즉, 작품의 내적 결여를 과잉된 성적 메타포(Metaphor)를 통해 봉합하고 해명하려는 시도들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 역시 작품의 내적 결여를 거칠게 봉합하고 해명하려는 시도인 것은 아닐까. 즉, 작가의 역량 부족을 이와 같은 사상의 문제로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은 과잉된 것이면서 동시에 비겁한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나는 여기에서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의 제스처를 하나의 독립된, 단지 과잉일 뿐인 움직임으로 사유하는 것에 대해 이것이 성적 메타포를 비롯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도착과 연관된 문제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움직임들을 작품의 내적 결여의 지점에 대한 봉합의 방식이라는 동일한 틀 내에서 사유해 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를 전체주의에 비견하기도 한다. 물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에는 분명 전체주의적 태도가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어떤 특정한 가치(당)에 대한 무한한 복무와 스스로를 그것의 대리자로 여기는 마조히즘(Masochism)적 태도 등등…….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놓치고 있는 바가 있다. 그것은 전체주의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듯,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 역시 과도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사실이다. 과잉에 대한 원인을 하나의 분명한 사회적 작인(Agency)에 부여함으로써 체제의 항상적(恒常的) 균형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전체주의에 대한 귀결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 역시 과잉된 표현의 자유에 있어 그 과잉을 하나의 사회적 작인에 부여하고 표현의 균형을 강제하는 구조인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는 표현의 자유의 문제의 이면인 셈이고,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가 “올바름? 좋지, 다만 나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라는 비윤리적인 주장을 할 때 마찬가지로 정치적 올바름 또한 “자유? 좋지, 다만 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라는 비윤리적인 주장 또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두 주장의 동일한 구조적 난맥(亂脈)과 그것이 하나의 과잉으로서 출현하게 된 계기를 묻지 않은 채 이 모든 상황을 단독적 문제로 부과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판단일 따름이다.9)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가 (성적 메타포로 대표되는) 과잉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외설적 이면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즉, 현재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일련의 부정과 비판들은 과잉된 표현의 자유가 가진 문제를 메우기 위한 단지 구멍마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는 결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와 외적으로 대립되지 않는다. 외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제스처들은 과잉된 표현의 자유의 한 판본(版本)으로, 그것의 역전된 판본이자 표현의 자유에 대한 내적 진리로 사유되어야 한다. 따라서 무엇을 위한 정치적 올바름이냐는 질문은 무엇을 위한 표현의 자유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사유되어야만 한다. 정치적 올바름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는 결코 외적인 대립이 아니며,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현재의 담론으로부터 표현의 자유의 문제를 함께 사유해야만 한다.

   8)  예컨대 우리가 ‘떡밥’이라는 요소에 열광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한 장치가 우리를 불확실성의 지점/매혹의 지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떡밥에 우리가 지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한 장치가 우리에게 불확실성의 지점/매혹의 지점을 강요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컨대 ‘복선’은 단순히 작가의 서사적 오류에 대한 보험이 아니다. 복선은 양날의 검이기에, 외려 독자를 피로하게 만들 뿐이다. 매혹의 지점을 가리키는 복선과 결론을 통해 사후적으로만 유추될 수 있는 복선을 적절하게 혼재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이러한 독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독자는 단순히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9)  다만 여기에는 하나의 단서를 덧붙이고 싶다.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때, 이와 같은 구조는 과연 어디까지의 자유를 말하는 것인가. 또한 그러한 자유의 근거는 무엇인가. 누군가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나’의 향유를 침해할 때, 우리는 그러한 표현에 대해 환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전적으로 그러한 폭력에 저항할 권리를 주장해야 하지 않는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은 이러한 폭력에 대한 저항의 제스처라는 층위에서 사유되고 주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불필요한 복잡함을 감수하고 말해 보자면, 정치적 올바름은 무조건적 환대의 불가능성과 함께 사유되어야 하지 않을까?

 

 

5.

 

    따라서 다시금 문제는,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의 강제라는 거짓된 외적 대립에 있지 않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다. 둘은 단지 서로의 외설적 이면에 불과할 뿐이고, 어느 것을 고르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문학이라는 형식에 있어서, 그러한 선택이 강조되게끔 만드는 문학의 내적 결여 그 자체가 아닐까? 다시금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모든 서사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성에 대하여,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도착(倒錯)이 이러한 불완전성을 감추거나 봉합하려는 시도의 일종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면 결국 문제는 그러한 불완전성을 다루는 방식 그 자체가 아닌가.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의 대립은, 곧 쓰는 자 혹은 읽는 자의 작품의 불완전성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실패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강화길의 「음복」10)을 예로 들어 보자. 시댁의 제삿날 벌어지는 일화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 가족극은 다음과 같은 주인공의 대사로 시작한다.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작품은 시종일관 평범하고 일상적인 다툼과 스트레스를 표면적으로 노출하는데, 이 과정을 일종의 심리적 서스펜스(Suspense)로 탈바꿈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주인공의 대사이다.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네가 ‘모르는’ 사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이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왜 감추어져야 했는가. 강화길의 소설은 이처럼 알 수 없는 미지의 요소를 전면에 등장시킴으로써,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바탕으로 평범한 일상을 따라가게 만든다. 이 미지의 요소로 인해 인물, 사건, 공간적 배경들로부터 발원하는 일상적 스트레스들은 나름의 자리를 부여받는다. 과연 그 미지의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말이다.
    소설은 이와 같은 미지의 요소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를 통해 전개되며, 소설의 말미에서는 이와 같은 물음들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예컨대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서사의 전개 과정에서 점차 해소되며, 따라서 처음의 질문인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는 “걔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어”라는 질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렇게 질문이 변화하는 과정이 곧 소설의 얼개이기도 한데, 이와 같은 과정은 주인공이 끝내 그 비밀들을 모두 알게 되었음을,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에 대한 은폐가 어떤 구조의 성립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최초의 질문인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에 대해서 완전한 해답을 얻은 것일까? 오히려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로부터 “걔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어”로 이어지는 이 과정들은, 우리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미지의 요소들이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은폐되어 있음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컨대, 우리가 얻은 것은 해답이 아니라 다시금 질문이며 그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이 소설의 구성적 결여(缺如)로, 그리고 현실의 결여로,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빈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강화길의 소설은 서사적 빈틈을 메우는 방식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가족적인 미담이 가리고 있는 비일관성을 바라보게끔 유도하는 방식으로, 이를 위해 서스펜스적인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강화길의 「음복」은 최초에 제기된 주인공의 질문에 대해 완전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서사적 빈틈을 완전하게 메우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소설에서 제기된 최초의 문장은 주인공이 동일한 은폐의 구조를 선택하였음을, 그리하여 이 구조의 지속을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이처럼 서사적 빈틈을 하나의 장치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이를 소설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장치로 활용하는 강화길의 방식은 그 내적 구조를 설명함에 있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외적 요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설 외적 요소들, 작품 내에서 적극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어떤 사상이나 경향이 이 작품에 대해 작용하는 것은 주인공의 행위와 인물의 성격을 보다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부차적 요소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즉, 이 소설은 작품 내에 제시되지 않은 외부적 지식의 기반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내적 구조를 통해 완결성을 획득하고 있기에 우리는 작가가 서사 내의 빈틈을 활용하는 방식에 보다 손쉽게 몰입할 수 있으며, 주인공의 행동과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들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 어떤 관점이 적극적으로 기용(起用)되는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공간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시도할 때이지, 작품의 서사를 향유하는 데 있어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나는 이러한 작품의 사례를 하나의 사상이나 경향이 문학 내에서 재현됨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말하고 싶다. 문학의 윤리란 어디까지나 작품의 내적 요소를 통해 발원하는 것이지, 작품 외적 요소로 정립되어 있으면서 작품이 그에 기대어 가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 문학이 윤리가 태어나는 자리일 수는 있어도, 외적으로 정립된 윤리의 단순한 재현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겠다. 문학과 윤리의 관계는 문학의 형식 자체가 소유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성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정립되는 것이지, 그 고유한 불완전성을 메우는 방식으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태도는 문학이 가질 수 있는 매혹의 지점을 스스로 매몰시키는 어리석은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10)  강화길, 『화이트 호스』, 문학동네, 2020.

 

 

6.

 

    위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Ⅰ. 모든 작품은 완벽할 수 없다. Ⅱ. 불완전성은 문학의 성립과 지속을 위한 조건이다. Ⅲ. 소설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작품의 불완전성은 작품이 지니는 매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Ⅳ.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작품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성을 어떻게 사유하고 다룰 것이냐에 달려 있다. Ⅴ. 과도한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의 제스처는 서로의 외설적 이면이며, 이는 작품에 존재하는 불완전성을 과격하게 메우려는 시도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리 속에서, ‘좋은’ 작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작품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성의 지점을 성공적으로 다루는 작품, 작품이 가지는 고유한 매혹의 지점으로 탈바꿈시키는 작품이다.
    이와 같은 정리는 다음과 같은 지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작품에서 특정한 사유에 대한 과도한 옹호가 돌출된다면, 그것은 창작자가 작품의 필연적인 불완전성을 다루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는 표지로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특정 작품의 해석과 사유에 있어서 특정한 사유에 대한 과도한 옹호가 돌출된다면, 이는 해석자가 그 작품에 내재한 불완전성을 다루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는 표지로 독해되어야 한다.
    물론 문학 작품은 오직 문학 작품으로서,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현실 내에서 완전하게 독립된 채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문학이 다른 어떤 것의 재현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둘의 차이는 곧 문학 작품이 소유할 수밖에 없는 내적인 불완전성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러니 문제는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 사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거짓된 대립으로 단호하게 거부해야만 한다. 둘 중 어떤 것을 택하더라도 결과는 같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문학 작품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매혹으로서의 불완전성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사유하지 않는 결과를 불러올 뿐이다. 요컨대, 문제는 사상이 아니다. 문제는 작품의 고유한 불완전성 그 자체에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의 억압 사이에 있지 않다. 문제는 불완전성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불완전성 그 자체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오직 불완전성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기에.

 

 

 

 

 

 

 

 

 

 

 

임지훈
작가소개 / 임지훈

2020년 《서울신문》,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을 통해 등단. 한양대학교 국문과 박사 수료.

 

   《문장웹진 202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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