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템, 토템

[단편소설]

 

 

토템, 토템

 

 

은모든

 

 

 

1

 

    은경이 소하와 만나지 못한 것은 여름 한철에 불과했다. 따지고 보면 고작 몇 달이었건만, 그사이에 소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조금 과장하여 말하자면 삶을 대하는 태도를 아예 새것으로 갈아 끼운 듯 보일 지경이었다. 은경은 소하에게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며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카디건에 팔을 꿰었다. 그러다 가벼운 도발을 감행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너희 부장은 좀 어때? 요새도 진상이야?”
    소하는 그렇다고 대답하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휴대폰을 들었다. 이어질 상황이야 빤했다. 소하는 박 부장이 스리슬쩍 자신에게 떠넘긴 일이나 어김없이 회피한 일에 관해 상세하게 토로할 것이다. 증거로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보여줄지도 모른다. 박 부장의 횡포를 낱낱이 까발리다 보면 몇 십 분쯤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전부 쏟아 놓은 후에 “내가 이상한 거야?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하고 동의를 구할 일이 눈에 선했다.   
    그러나 은경의 예상은 빗나갔다. 소하는 “말하자면 길지만, 전에도 많이 한 얘기니까 생략하고.” 하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며 바로 이럴 때 명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했다.
    “명언?”
    은경이 되묻자 소하는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물비늘이 이는 수면 위에는
    누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더라도, 앙갚음을 하려들지 마라.
    강가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곧 그의 시체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게 되리라

    라는 문장이 떠올라 있었다.
    소하는 노자의 명언이 담긴 이미지를 보내 준 사람이 회계팀의 선배라고 밝혔다. 허리를 곧추세워 앉으며 자세를 바로 하더니 “이 문장을 보면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어.” 하고 덧붙였다.
    “노자 명언을 영접하고 나서 해탈이라도 한 거야?” 은경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소하를 쳐다보게 되었다.
    “해탈이 그렇게 쉽겠니. 그냥, 회사 안이랑 밖을 좀 더 나눠서 보려고 해. 회사 밖에 있을 때도 자꾸 부장 얘기하게 되면 부장 손해가 아니라 내 손해잖아. 그럴 시간에 맛있는 거 먹고, 이렇게 단풍도 보고 그러는 게 낫지 뭐.” 소하가 검지로 테라스 밖을 가리켰다. “여기 밖에 있는 단풍 말이야, 이거 전부 벚나무 단풍인 거 알았어? 우리 내년 봄에 여기 또 오자.”
    “누구냐 너. 내가 알던 징징이는 어디에 가둬 두고 군만두를 먹이고 있는 거냐.”
    장난처럼 내뱉으면서도 은경은 묘한 박탈감을 느꼈다. 뭐든 자신보다 한 발 앞서 해낸 소하가 급기야 마음의 평화까지 먼저 손에 넣은 것만 같아서였다. 사실 은경은 전에도 이런 기분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자기는 종종걸음을 걷고 있는 동안 소하는 조금씩 보폭을 넓히며 걷고, 이따금 펄쩍펄쩍 뛰어가기도 하는 것 같은 기분. 친구의 성장은 얼마든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럴수록 둘 사이에 벌어지는 격차 때문에 입맛이 썼으므로 은경은 소하를 따라 허리를 곧추세워 앉고는 물었다.
    “저 이미지 한 장이 다가 아니지? 비결이 뭐야? 요가 같은 거라도 시작했어?”

 

    그런 게 아니라, 하더니 소하는 오른손을 재킷 안으로 넣었다.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집은 뒤에 꺼낼지 말지 망설이는 모습이 마치 무기라도 숨기고 있는 사람의 동작처럼 보였다. 그러나 소하가 내민 것은 플러스 펜이었다. 어느 문구점에서나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하는 은경의 눈을 바라보며 목소리마저 살짝 낮추더니 이 펜에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말했다. 은경은 그게 웬 스파이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냐고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소하는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지 가늠하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펜을 부드럽게 회전시켰다.

 

 

2

 

    두 사람은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 스터디 모임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은경은 그 모임에 맨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 멤버였는데 처음 참여하는 날 자못 긴장한 탓에 필기구를 가져가지 않아서 소하에게 빌려야 했다.
    “검은 건 남는 게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이건 빨간 펜인데.”
    그렇게 말하는 소하에게서 은경은 친절한 인상을 받았다. 그날의 모임을 이끌고 이후의 일정을 공지하는 모습은 야무지고 빈틈없어 보이기도 했다. 몇 달 지나 은경에게 자신의 첫인상에 관해서 들은 소하는 “친절한 건 맞아요. 좀 그런 편인 거 같아.” 하고 수긍했다. 하지만 빈틈없는 성격은 되지 못한다고, 남들 눈에라도 그렇게 보이도록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남들 시선이 미치지 않는 집 안에서는 한심의 극치인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집에서 공부가 안 돼서 도서관에 가고 취업 스터디도 조직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 나도 그런데!” 은경은 친밀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못 기대감을 가지고 향했던 면접을 치르고 온 소하는 은경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장소는 도서관 근처 편의점 앞의 파라솔이었는데 수평이 살짝 틀어진 하얀 플라스틱 의자 위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소하는 이미 코끝이 빨갰다.
    “완전히 예상 못 한 질문이 나온 건 아니거든. 아니, 하나 있기는 했는데 나쁘지는 않게 대답했어.”
    “그럼 가능성 있겠네. 미리 실망하지 마.” 은경이 달래듯 말했다.
    소하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기대해 볼 만한 여지가 없다고 했다. 썩 괜찮은 정도로는 뽑힐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않느냐고, 면접관의 눈빛에서 이미 판가름이 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야, 너 그거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하는 눈빛 있잖아. 정말이지 차라리 어디를 어떻게 고쳐오라고 딱 짚어서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구직을 시작하면서부터 매일 자신의 가치가 수직으로 하락하는 기분이라고 소하는 덧붙였다. 은경의 처지도 별반 다를 게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의 눈물과 한숨을 자기 것인 양 느꼈다.
    소하가 취업에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두 계절이 지난 후였다. 중견기업에 정직원으로 채용된 소하를 부러워하던 은경은 석 달이 더 흐른 시점에 한 중소기업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은경이 세 번의 계약 연장 끝에 정사원이 되었을 때, 소하는 이직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길고 까다로운 면접을 거쳐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한동안 소하는 면접을 치르던 때 예상한 것과 달리 막상 접한 업무 환경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고 기함하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단순 반복 업무에 질릴 대로 질린 은경은 그런 놀라움이라도 좀 겪어 보고 싶다고 대답하곤 했다.
    회사원이 된 후에는 그렇게 주로 메시지로 대화하던 둘이 본격적으로 자주 만나게 된 시점이 올해 봄이었다. 소하가 본가에서 나와 얻은 새집이 은경의 집에서 십 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했던 것이다. “이제 자주 보자 우리. 나 너무 외로워.” 소하는 독립을 하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3

 

    그해 3월 한 달 동안 은경은 몇 번이나 소하의 집으로 향했고, 그때마다 소하는 배달음식을 잔뜩 시켜 주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 엇비슷한 자극적인 맛에 물린 은경은 소하를 이끌고 동네에서 다년간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있는 와인 바로 향했다. 장소는 은경이 소개했지만 와인은 소하가 골랐다. 적절한 바디감에 풍성한 맛과 향을 지닌 데다 가격까지 마음에 들었으므로 은경의 입에서는 최고라는 말이 나왔다.
    “최고는 모르겠고 가성비 괜찮은 거래. 우리 신입이 유학 가서 존나 와인만 퍼마셨는지 워낙 조예가 깊으셔.” 소하가 빈정거렸다. “안 밀리려고 나도 몇 개 좀 외워 놨지.”
    “너희 회사는 회식 때 와인도 마시고 그러는구나. 외국계는 다르다 달라. 우린 무조건 소맥인데.”
    “콜키지 프리인 데서만.” 소하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박 부장이 그 주제에 요새 와인에 꽂혀 있는데, 신입이 와서 맞장구쳐 주니까 아주 신났어. 원래도 유학파만 챙기는데 아주 대우가 떡상했지.”
    “얘 미간 구겨지는 것 좀 봐. 그래도 좀 잘 지내 봐. 너 작년 생각하면 올해는 아래로 신입도 들어오고 좀 나은 거 아니야?”
    소하는 고개를 저었다. “낫기는, 올해는 정말 내 인생에서 최악인데.”
    그러자 은경은 설마 그럴 리가 있느냐며 둘이 처음 알게 된 시절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돈과 시간 중 어느 것 하나 낭비할 수 없었던 그때는 아무리 속상해도 기껏해야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마주 앉아 옆자리의 담배 연기를 그대로 들이마시며 훌쩍이지 않았느냐면서. 그에 비하면 이제는 가격을 신경 쓰기는 하지만 와인을 병째로 주문해서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있지 않느냐는 사실을 언급했다. 게다가 아직 본가에서 살고 있는 은경에게 소하의 새집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소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간에 다시금 세로로 긴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맞아, 알아. 객관적으로 보면 지금이 최악일 수가 없어. 회사가 아무리 거지같아도 자소서 쓰던 시절보다야 낫겠지. 그거를 분명히 머리로는 아는데 피부로 와 닿지가 않아. 왜 이런 거야? 왜 가도 가도 작년보다 올해가 더 빡센 거야?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감사할 줄을 몰라서?”
    “왜기는, 항상 빡빡하게 미션 클리어하면서 사느라 그렇지.” 은경이 대꾸했다. “첫 직장 일 익숙해질 즈음 이직하고, 텃세 뚫고 과장 달고, 돈 모아서 독립하고, 신입한테 안 지려고 와인 이름까지 외우면서 사는데 당연히 빡세지 그럼.”
    “그래. 우리 언니도 나한테 인정 욕구가 뻗친다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그러더라.” 소하는 습관적으로 찌푸려 생긴 주름을 펴듯 검지와 중지로 미간을 문질렀다. “내 연봉 두 배를 받아 먹으면서 나만 부려먹는 부장이 있는데 그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소하의 상사인 박 부장은 중역이나 고객사 앞에서는 안 된다거나 힘들다는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모든 요구를 떠안는 전형적인 예스맨이었다. 뒷수습은 응당 부하 직원들의 몫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일 처리가 빠른 소하를 해결사처럼 여긴다고 했다. 은경의 상사인 공 차장 역시 뭔가 수습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은경에게 떠넘기기 일쑤였다. 그러니 일견 비슷한 처지 같지만 떠안는 업무의 규모는 비교가 민망한 수준이었다. 사실 직장의 규모 자체가 달랐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이따금, 그러니까 지금처럼 불현듯 취기가 돌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물 잔을 볼에 가져 대다 말고 문득, 초라하다는 생각이 은경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곤 한다는 게 문제였다. 어째서 초라한가 하면 직장에서만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오빠에게는 전하지 않는 고모와의 다툼이며, 크고 작은 경제적 고민을 은경에게만 토로했다. 남자친구인 범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달 넘게 주말에 만나지 않았는데도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퇴근은 했는지 어떤지 메시지조차 없었다. 결국 직장에서도, 엄마도, 남자친구에게도 자신은 적당히 필요한 존재에 불과한 것만 같았다. 누구도 은경이라는 사람을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봐주지는 않는 것만 같았다. 은경은 어째서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되었더라,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취기를 빌려 떠오르는 생각을 가감 없이 소하에게 털어놓았다.
    “야, 내가 있잖아. 가까운 데로 이사까지 온 거 보면 몰라? 난 너밖에 없어. 엄청 중요해.”
    은경과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소하는 옆자리로 옮겨와서 팔짱을 끼더니 은경이 얼마나 소중한지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가며 강조했다.
    “알았다고. 알았어.” 은경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너, 나한테만 이러지 말고 전부터 맘에 든다던 그 동창한테도 좀 이래 봐. 그러다 누가 채간다.”
    은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하는 깊은 한숨과 함께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엎드린 채로 머리를 몇 차례나 흔들더니 “했는데, 까였어.” 하고 웅얼거렸다.
    “까였다고? 왜? 걔도 참 사람 보는 눈 없다.”
    소하는 흐느적거리며 원래 자리로 돌아가더니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짚어 보아야겠다고 했다. 일단 이십대에는 연애를 하며 건강한 관계를 맺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는데, 당시 자신은 못 말리는 ‘금사빠’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은경에게 있어 순식간에 타오르는 연애에 달려드는 소하의 모습은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외려 익숙한 것은 소하가 금사빠 시절의 혹독한 경험을 통해 ‘생존을 위해’ 간추리게 되었다는 연애 대상에 관한 체크리스트였다. 그 목록에는 분노 조절에 문제가 없는 성격, 최소한 자신의 한 달 수입과 지출을 파악하고 있는 정도의 금전 감각, 피임에 진지하고 일관성 있게 임하는 태도 같은 점이 포함돼 있었다.
    “아니, 이게 그렇게 큰 욕심이니? 이게? 다들 나더러 눈이 높아서 문제래. 내가 비정상인 거야?” 소하가 탄식했다.
    “아닌 거 알면서.”
    “맞아, 알아. 그런데 나 이러다가 선볼지도 몰라.”
    “부모님이 보라셔?”
    “응. 같이 살 때는 방에 들어가면 그만이었는데 나와 사니까 전화하고, 문자하고 더 집요해졌어. 골치 아프니까 한 병 더 시킬까?”
    “하긴, 와인은 원래 각 1병이 기본이지.” 은경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봄을 지나는 동안 은경은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와인을 자주 마셨던 적이 있었던가 싶은 몇 달을 보냈다. 그러다 5월에 접어들면서 소하와 공유하는 취미가 하나 더 늘었다. 술자리가 잦아짐에 따라 늘어난 체중에 위기감을 느낀 소하가 공원을 함께 걷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50분 정도 되는 산책로를 왕복하는 동안 두 사람은 각자 일하는 업계와 조직의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면면에 관해, 행성처럼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무례한 질타와 간섭들에 관해, 때로 고통스러울 만큼 마음을 파고드는 불안과 초조함에 대해,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어 더 나은 평가를 받고 싶다는 갈망에 대해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4

 

    소하와 함께하는 밤 산책의 재미에 빠진 은경은 여름을 맞이하여 통풍이 잘 되고 가벼운 워킹화를 구입했다. 집에서 좀 더 거리가 있는 산책 코스도 알아 두었다. 그러나 막상 집으로 워킹화가 배송되었을 때는 새 신을 신고 산책을 즐길 여유가 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회사원이 된 이래 처음으로 사수의 위치에 서게 된 일의 영향이 컸다.
    은경이 신경 써야 하는 신입 지원 씨는 인사팀에 입사했을 때 사내에서 역대급 오버스펙이라고 입방아에 오르던 인재였다.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취업이 너무 늦어지면 초조하니까 일단은 들어왔나 본데, 아마 금방 현타 와서 몇 달 못 버틸걸?” 하고 수군거렸지만 외려 인사팀장이 지원 씨를 두고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은경이 일하는 구매지원팀으로 이동한 것은 좌천에 가까운 인사였던 셈이다.
    신입이 어째서 인사팀장의 눈 밖에 났는지 체감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지원 씨의 첫인상은 또래치고는 과하게 깍듯하다 싶을 만큼 반듯하고 성실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함께 일을 해보면 신입인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업무에서 실수가 잦았다. “지원 씨, 명세서에 제품명이 틀리게 나가는 건 곤란하지 않겠어요?” 하고 지적한 뒤에는 은경도 종일 찝찝했다. 감정적으로 혼을 낸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의 어투가 더 자존심 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입 때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잘 알았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가 연달아 일어나면 때로 대형사고가 터지고, 그런 일이 생겼다가는 사수인 은경이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원 씨의 근태에 관해서도 할 말이 없지 않았는데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세상에, 근태 지적을 하고 싶다니. 은경은 자신이 꼰대가 된 것 같아서 입맛이 썼다. 기분전환이 절실했지만 여름휴가 기간 전에는 좀처럼 짬을 낼 수 없어서 소하와도 좀처럼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소하는 결국 ‘선개팅’에 나가기로 했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은경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 등쌀에 결심한 거냐고 묻자 소하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나이 차가 나는 사람은 싫다고 했더니 엄빠가 나더러 시건방 떨지 말래. 어이가 없어서. 내가 없는 말이라도 했냐고.”
    소하가 수화기 너머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선개팅을 받아들인 이유는 한 가지였는데 결과가 어찌 됐든 세 번만 만나면 부모님도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5

 

    폭염이 최고조에 다다를 무렵 지원 씨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미 지난주에 배송이 끝난 건을 바로잡아야 하는 터라 그날 밤에 은경은 사정을 알리고 읍소하는 전화를 수도 없이 걸어야 했다. 게다가 하필 금요일 저녁에 일이 벌어진 탓에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소하와의 약속도 취소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부주의한 일 처리에 관해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못했는데 사무실에 둘만 남았을 때 지원 씨가 손끝을 떨며 작은 알약을 삼키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어디 아파요?”
    은경의 질문에 지원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그냥 가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요. 공황까지는 아닌데, 그냥 좀…….”
    사무실에서 나서는데 비가 내렸다. 우산은 지원 씨만 가지고 있었으므로 은경은 택시를 호출한 뒤에 그녀가 받쳐 주는 우산 아래에서 기다려야 했다.
    “대리님, 저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더 주세요. 제가 원래 이렇지는 않아요. 정말이에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진짜 잘할게요.”
    “뭘 엄청나게 진짜 잘할 거까지는 없고, 일단은 더블 체크를 더 열심히 하면서 가봅시다. 이렇게 우산도 얻어 썼으니까.” 은경은 그렇게 말하고 택시를 탔다.   
    기진맥진한 은경이 집 안에 들어섰을 때는 여느 때처럼 텔레비전에서 건강 정보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근 들어 부쩍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빨라진 엄마는 이미 주무시는지 거실에는 아빠 혼자였다. 소파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발톱을 깎고 있던 아빠는 고개를 돌렸으나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은 채 은경에게 “왔냐.” 하고 알은체를 했다.
    둥그렇게 말린 아빠의 등을 보면서 은경은 왜 이 밤에 발톱을 깎고 있는지 의아해했다. 아빠는 은경과 오빠가 어릴 적에 밤에 손발톱을 깎는 일을 금지했던 것이다. 이유를 물어도 원래 그런 거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빠는 그밖에도 일상에서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원칙이 몇 가지 더 있었다. 이를테면 아빠가 퇴근을 하고 오면 온 가족이 현관 앞으로 나와서 제대로 인사를 하는 것 역시 매일 지켜야만 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포옹을 하며 온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자주 간식을 사 들고 오는 것도 아니어서 고작 “다녀오셨어요.” 하는 인사에 “오냐.” 한마디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 은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대로 서서 눈을 맞추고 인사하는 게 중요하다면서요. 아빠가 강조한 거잖아요, 하고 따져 볼까 싶었지만 그조차 귀찮아져서 방으로 향하는 은경의 등에다 대고 아빠가 “그거 취소해라.”라고 말했다.
    “뭘요?”
    “여수 가는 거 말이야.”
    “이제 금방인데 왜요?”
    “아무튼 취소해.”
    여행 정보 프로그램을 보고는 꼭 가보고 싶다며 호텔이랑 교통편 예약해 달라고 보챌 때는 언제고. 다시 한 번 이유를 묻는 은경의 어투에는 짜증이 실렸지만 아빠는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이튿날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엄마와 마주 앉았을 때였다.
    “맞아 그래, 그거 취소해야 돼. 생각해 보니까 그 돈이면…… 암튼 그때 아빠는 할머니 댁이나 한번 가보기로 했어. 엄마도 갈 데가 있고.”
    “엄마는 어디 가시게요?”
    “느이 오빠 지낼 방을 좀 보려고. 아무래도 고시원에서 집중이 잘 안 되는가 봐. 엊그제 저녁 사주면서 보니까 애가 눈이 맹해.”
    그래, 이런 식이지. 은경은 생각했다. 뭐든 자질구레하게 알아보는 일은 당연히 내 차지고, 그걸 취소하고 나오는 돈이 들어갈 데는 항상 따로 있지.
    “집에서는 텔레비전 소리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고 해서 고시원 들어가 놓고 거기서도 안 된대요?” 별안간 식욕이 뚝 떨어진 은경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냥 어디 절에 들어가라고 하세요. 채식하면서 살도 빼고 1석 2조겠네.”
    “아이구, 인구가 언제 고기 좋아하디? 닭고기나 좀 먹지. 걔 살찐 거는 밥을 못 줄여서 그래. 뻑하면 두 그릇씩 비우니까. 그런 애를 절에 보냈다가는 큰일 나, 탄수화물 중독인데.”
    “엄마, 절이야 그냥 예를 든 거죠.”
    “알았으니까 마저 먹어, 얼른.” 엄마는 오빠가 불평을 한 게 아니라 눈치가 그렇다고 변명하듯 웅얼거리며 은경 쪽으로 계란말이 그릇을 밀어 주었다.
    하긴 오빠는 가족들 앞에서 워낙 말이 없어서 속을 알 수 없는 게 문제였지 투덜거리는 타입이 아니기는 했다. 이전 직장을 다니는 동안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도 집에서는 입도 뻥긋 한 적 없었다.
    “붙기만 하면 우리 인구가 진짜 잘할 텐데. 당장이라도 시켜만 주면.” 엄마가 말했다.
    “진짜 잘하는 게 뭔데요. 눈이 맹하다면서.”
    은경은 어깃장을 놓고 화제를 돌렸지만 며칠 뒤 지원 씨와 둘이서만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조심스레 상담 치료와 우울증약 복용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지나가듯 물어볼 셈이었건만 자기 일처럼 집중해서 들어 주는 지원 씨의 태도에 어느새 그간 오빠가 전 직장에서 겪었던 일에 관해 퍽 자세하게 털어놓게 되었다.

 

 

6

 

    여름휴가를 맞은 은경이 참석해야 할 일정이라고는 마카롱 원데이 클래스뿐이었다. 강습을 진행하는 대학 동기가 인원 부족으로 취소될 위기에 놓였다며 도움을 청하기에 응한 것이었다. 어딘가로 떠날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된 데는 작년까지 네 해를 거듭하여 남자친구와 휴양지에 다녀온 탓이 컸다.
    에메랄드빛 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풀, 거대한 쇼핑몰과 달콤한 열대 과일까지 처음에는 낙원으로 다가왔던 휴양지의 요소들이 이제는 식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름휴가 첫날에 1호선 지하철에 몸을 싣고 노량진으로 향하게 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마 오빠가 은경이 보낸 메시지와 링크를 보고 짧게나마 어떤 반응을 보였다면 직접 만나러 갈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은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만 하더라도 전화를 거는 선에서 타협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경의 손에 들려 보낼 셈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녹두삼계탕을 끓이며 눈치를 보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최대한 빨리 가서 최대한 짧게 보고 오기로.
    은경은 계획대로 노량진역에서 3분 거리의 카페에서 오빠와 만났다. 녹두삼계탕이 든 꾸러미를 내밀고 링크로 보내 두었던 상담센터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지원 씨에게 받은 명함도 건넸다. 엄마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예상한 것과 달리 오빠는 무기력하고 멍해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손톱 끝과 거스러미를 물어뜯고 연신 하품을 하는 등 산만한 모습이었다. 어느 쪽이건 공부를 하는 데 집중을 해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오전인데 왜 그렇게 하품을 해. 잠 설쳤어?”
    “응. 요새 너무 못 자.”
    다시금 검지를 물어뜯는 오빠를 보며 은경은 지금이라도 택시에 태워서 병원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치미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대신 그 점을 그대로 오빠에게 전했다. “그러고 싶어도 등치 때문에 힘에서 밀리니까 참는다, 정말.” 농담처럼 덧붙이자 오빠는 기운 없는 얼굴로 웃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고 대답했다.
    은경은 카페에서 나와 서둘러 지하철에 올랐다. 그대로 집으로 향하면 기분이 처지다 못해 발밑 아래로 흘러내릴 것 같았으므로 오후에 동기를 돕기로 나선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쿠킹 스튜디오 안에는 슈거 파우더와 가나슈의 달콤한 냄새가 둥실둥실 떠다녔고 색색의 디저트를 만드는 일은 실제로 기분전환에 그만이었다.
    여름에 잘 어울리는 마카롱 원데이 클래스에서 맨 처음 작업한 것은 위쪽은 라임빛, 아래쪽은 아이보리빛으로 꼬끄 색을 달리한 라임 코코넛 마카롱이었다. 맛은 두 번째로 만든 무화과 마카롱이 더 마음에 들었다. 연핑크빛 꼬끄 안에 채워 넣은 필링에서 무화과 씨앗이 톡톡 터지는 게 일품이었다. 은경이 특히 공을 들인 작업은 꼬끄에 스카이 블루와 아이보리빛을 뒤섞어 만드는 마블 마카롱이었다. 지금껏 알아챌 기회가 없었는데 자신은 마카롱을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론 설명을 듣고 나서 실습이 시작되고서부터 “정말 처음 하시는 거 맞으세요?” 하는 질문이 쏟아지더니 마블 마카롱의 꼬끄가 완성됐을 때는 박수까지 받았다. “어머, 이거 꼭 지구처럼 보이지 않아요?” 누군가 말하자 아까워서 못 먹겠다는 감탄이 잇따랐다.
    돈을 내고 클래스를 신청한 세 명이 돌아간 뒤에 동기는 은경에게 얼마간 수업을 들은 후에 자신과 동업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칭찬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하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윤경은 그날 직접 마카롱을 만들고 맛본 순간보다 짐짓 칭찬을 무르며 겸손한 척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달지 않은 와인이 더해진다면 그 기분을 더 오래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은경은 스튜디오에서 나오자마자 소하에게 연락을 넣어 보았다.
    소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곧바로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이 따라붙었다. 이사가 방금 전에 사무실을 뒤집고 간 여파로 박 부장이 회식을 선포했다고 했다.
    아쉬운 대로 은경은 연인인 범상의 집으로 향했다. 범상은 그녀보다 삼십 분쯤 후에 집에 돌아와서 앓는 소리를 내며 외출복을 입은 상태로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으나 은경의 시선을 느꼈는지 방바닥으로 내려와서 입을 열었다.
    “너도 아직 저녁 먹기 전이지? 다시 나가기 짜치는데 뭐 시켜 먹자. 네가 골라.”
    은경은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에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마카롱 한 상자를 접시에 담아왔다.
    “예쁘지? 나 소질 있대.”
    “파는 거 같은데?”
    “정말? 하긴 얼마나 집중했는지 어깨가 다 결린다니까. 이 중에 뭐가 제일 잘 된 거 같아?”
    범상은 세 종류의 마카롱 중에 한가운데 놓인 마블 마카롱을 집었다. 그러더니 칭찬받은 내용을 전하며 뿌듯함을 만끽할 새도 없이 덥석 베어 물었다.
    “야!”
    은경이 손바닥으로 범상의 허벅지를 때리자 그는 삼분의 일쯤 남은 마카롱을 은경에게 내밀었다. 지구를 연상시킨다던 깊은 하늘빛 꼬끄에 그의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 진짜, 홍차도 내려오기 전에 그걸 홀랑 먹냐?”
    “먼저 고르라는 얘긴 줄 알았지.”
    은경이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만 빨라 하여튼.”
    “네 개나 더 있는데 되게 뭐라고 하네.”
    “내가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칭찬받은 거라고, 그거.”
    “취미는 스스로 즐기려고 하는 거 아니야? 남한테 칭찬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범상이 입가에 묻은 가루를 털며 삐죽거렸다.
    “논리왕 나셨네.”
    “그렇잖아. 좋아서 하는 게 취미잖아. 평가는 일하면서 받는 거고.”
    “일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을 일이 있어야 말이지!”
    “따지고 보면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범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무슨 차 내려? 홍차면 되는 거야?”
    은경은 싱크대 앞에 선 범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줄어든 데는 저 뒷모습의 공이 컸다. 언젠가부터 범상은 자기가 먼저 굽히고 싶지는 않지만 언쟁이 시작될 것 같다 싶을 때면 우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캔 맥주나 과일 같은 것을 가져왔다. 내올 게 없으면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다. 그렇게 시간을 번 뒤에는 짐짓 없었던 일인 척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능청을 떠는 게 귀여워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보여준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어찌할 도리가 없이 침울해졌다.
    그때 범상은 은경에게 더 이상 그런 대접을 받으며 연애하지 말고 자신에게 오라고 했다. “제가 정말 잘해 드릴게요.” 설렘과 비참함이 번갈아가며 폭죽처럼 요란하게 터지던 관계를 청산하고 그와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에 범상은 실로 비상한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은경의 기분을 세세하게 살피고 주저 없이 사과했을 뿐 아니라 사과할 일을 만든 점을 자책했다. 또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눈을 맞추며 다짐했다. 더 이상 애정을 갈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은경의 마음 구석구석을 녹여 주었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범상의 태도에서 조심성이 옅어지자 은경은 어쩐지 이럴 줄 알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게 그렇게 좋은 패가 주어질 리가 없지 싶었던 것이다.
    지난 몇 해간 은경과 범상의 관계는 은경이 회사와 맺고 있는 관계와 별다를 바 없는 양상을 보였다. 실은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던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럼에도 잠시 기대를 걸어 보았고, 기대감이 흔적도 없이 흩어진 후에도 대안이 없으니 지루하게 지속하는 것. 그런 이유로 버티다 보니 크고 작은 단점들까지 속속들이 알게 된 게 편하기는 했다. 이를테면 은경은 홍차가 든 잔을 가지고 돌아온 범상의 심사를 건드리며 약 올릴 만한 화제도 술술 읊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물론, 그가 응원하는 프로 야구팀을 놀리는 것이었다.
    “즐기면서 하는 것만 취미면 말이야, 그럼 굳이 욕을, 욕을 해가면서 꼴등 하는 팀에 목메는 그런 피학적인 취미는 어떻게 설명을 할래?” 은경은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꼴등은 무슨, 아래로 두 팀이나 있는데.”
    범상은 펄쩍 뛰며 손사래 쳤다. 그러고는 관심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은경에게 자신이 애정 하는 팀이 가진 잠재력에 대해 피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응원하는 팀은 그날 경기에서 또 한 번 패배했다. 심지어 8회까지 선전하다가 역전패를 당하는 바람에 범상은 벌게진 얼굴로 화면 속 선수와 코치진에게 삿대질을 하며 쉼 없이 맥주를 들이켜게 되었다.

 

 

7

 

    같은 날 밤에 소하 역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상을 쓴 채로 맥주 캔부터 쥐었다. 원래는 다음 주중으로 예정돼 있던 출장 일정이 고객사의 불평을 접수한 이사의 말 한마디에 금요일 출발로 바뀐 것이다. 이사 앞에서는 싫은 내색을 입도 뻥긋하지 않던 박 부장은 회식 자리에서 본인 때문에 출장에 꼼짝 없이 합류해야만 하는 소하를 붙잡고 하소연을 쏟아냈다. 주말을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선을 본 남자보다 더 싫은 사람을 딱 한 명만 꼽자면 바로 박 부장이었으므로, 소하는 최악이라고 수도 없이 되뇌며 빈 맥주 캔을 구겼다.
    금요일 낮에 박 부장은 KTX에 오르자마자 한시도 쉬지 않고 회사 구성원들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가 욕하는 대상은 대체로 중역들이었는데 한 명 한 명 언급하며 한계와 맹점을 지적하는 데 동원되는 예시가 원체 시시콜콜해서 소하는 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급격히 축소되는 기분이었다. 듣다 지쳐 잠깐 잠든 척하는 수를 써보기도 했다. 그러자 박 부장이 음료수를 건넨다는 핑계로 깨우는 극성을 보였기에 별수 없이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오늘 고객사에게 강조할 내용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그러고도 B시에 닿기까지 시간이 남았으므로 제품 소개를 시작하기에 앞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할 만한 농담으로 적절한 게 뭐가 있을지 추려 보았다.
    준비한 농담이 제대로 먹힌 것을 시작으로 소하는 준비해 온 PPT를 순조롭게 선보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별일이다 싶을 정도로 한마디 막힘없이 말이 술술 이어졌다. 엄밀히 따지면 갑의 위치가 아님에도 갑처럼 굴며 일정 변경을 강요했다던 고객사의 중역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우호적으로 나왔다. “백 점! 나는 이렇게 귀에 쏙 들어오는 설명은 처음 들어 봤지 싶은데!” 하며 퍼붓는 칭찬에 소하 역시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숙소로 예약한 호텔의 객실 안에 들어섰을 때는 이번 출장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은 지나갔다는 상쾌함과 적당한 나른함이 부드럽게 엉켜 있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전경에 흘긋 시선을 던진 후에 소하는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객실에서 틀어 놓은 텔레비전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렸지만 호텔에 대한 호감도는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베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객실의 청결 상태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자세를 바꾸어 모로 누웠을 때 발견한 펜 한 자루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메모지 위에 새빨간 펜이 놓여 있었다.
    일반적인 것은 호텔의 로고를 새긴 검은 볼펜일 터였다. 때로 검은 연필로 대체되는 것도 보았지만 빨간 펜이라니? 소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펜을 집어 보았다. 미끈하면서도 도톰한 몸체에 겉면은 스포츠카를 연상시키는 광택이 도는 붉은색 펜이었다. 본체와 뚜껑 어디에도 호텔의 로고는커녕 브랜드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 혹시 겉만 붉고 실제로는 검은색 펜인가 싶어서 메모지 위에 1이라고 숫자를 적어 보았다. 호텔의 로고가 새겨진 흰 종이 위에 의심할 바 없는 붉은색 선이 보였다.
    그 순간 소하가 맨 먼저 신경 쓰인 것은 박 부장의 방에도 붉은 펜이 놓였을까 하는 점이었다. 사소한 데 꽂혀 기본기를 들먹이며 트집을 잡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박 부장이라면 이 점을 구실 삼아 소하가 고른 호텔에 대해 한소리 할 법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출장의 핵심 목적이었던 발표 자료 준비부터 몽땅 소하가 했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소하는 빨간 펜을 짜증스레 협탁 위로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해가 저물기 시작한 거리에 붉은빛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체크아웃을 하면서, 그게 껄끄럽다면 나중에라도 호텔 계정으로 메일을 보내서 메모용 펜은 검은 것으로 비치해 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건의해 볼까 싶기도 했다. 실제로 박 부장이 핀잔을 준다면 그럴 가능성은 더 높아질 터였다. 메모를 꼭 검은 펜으로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굳이 한 자루만 놓여 있는데 새빨간 펜을 고를 게 뭐람. 소하는 다시금 펜을 집어 들었고 눈에 띄지 않도록 재킷 안주머니에 숨기듯 꽂아 넣었다.

 

 

8

 

    이튿날인 토요일에 조식당은 무척 붐볐다. 소하는 잠시 입구에서 대기한 후에 구석 자리를 안내받았다. 다시 줄을 서서 받아 온 쌀국수를 반쯤 먹었을 때 박 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자기가 불러 주는 것을 메모하라고 했고, 소하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예의 빨간 펜밖에 없었다. “잘 받아 적었지?” 박 부장이 확인차 물었을 때 소하는 입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냅킨 위에 붉은 글씨로 적은 내용 위에 큼지막하게 엑스자 표시를 했다. 그것은 이미 소하가 파악하고 있는 것일뿐더러 수치마저 차이가 났던 것이다. 소하는 가볍게 혀를 차고 쌀국수를 마저 먹었다.
    잠시 후에 소하가 막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곁으로 다가온 웨이트리스가 빈 그릇을 집어 들기 위해 상체를 숙이면서 “저도 그 펜을 가지고 있답니다.” 하고 속삭였다.
    소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대략 사십대 정도로 보이는 웨이트리스는 실팍해 보이는 어깨 하며 접시 여러 개를 겹쳐 쌓아 들고도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모습에서 프로의 풍모가 느껴졌다. 그녀는 “그걸 가지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 뭐예요.” 하고 말하고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멀어졌다. 소하는 얼떨떨했다. 난데없는 알은체가 뜬금없기도 했고, 호텔에 비치된 펜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알은체를 할 만큼 별일인가 싶어 의아하기도 했다. 이 붉은색에 뭔가 특수한 염료라도 섞인 것일까? 소하는 냅킨을 들어 가까이에서 관찰했지만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조금만 덜 바빠 보인다면 빨간 펜의 정체에 대해, 의미에 대해 직접 묻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레스토랑 안은 여전히 만석이었다. 그에 비해 직원의 숫자는 턱없이 적어 보였다. 뷔페의 빈칸을 채워 넣는 이도, 테이블 사이를 누비는 이들의 얼굴도 졸음과 피로로 굳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소하에게 말을 건 웨이트리스의 활기찬 움직임은 단연 눈에 띄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소하에게 비밀 사인을 보내는 듯한 눈짓을 보내며 미소 지었다. 여전히 어떠한 연유로 그러는 것인지는 알아챌 수 없었다. 그러나 든든했다. 이토록 든든한 미소를 본 적 있었던가 싶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는 미소라고 소하는 생각했다.

 

 

9

 

    출장을 마친 이튿날 오후에 선을 본 남자와 만남을 가지던 중에 소하는 그녀의 미소를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약속 장소는 번화가 대형 쇼핑몰에 위치한 카페였다. 소하는 토요일까지 이어진 출장의 여독으로 간절히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세 번을 채우면 더는 만남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약속에 쥐어짜듯 기운을 내서 그곳으로 향했다.
    “저는 소하 씨가 마음에 듭니다.”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재고 따질 것 없이 마음에 들어요.”
    소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말인가 싶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의 마음 씀씀이가 피곤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또한 막을 도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호감을 표하는 말을 굳이 꼬아 들을 게 뭔가 싶었던 것이다.
    “성급하게 굴고 싶지는 않지만 소하 씨도 저도 마냥 어린 나이가 아니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소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는지 설명하기 시작했고, 소하는 그의 말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소하는 역시 그의 말을 삐딱하게 듣게 되었다. 한없이 길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끊고 건물 화장실의 거울 앞에 섰을 때 비친 모습은 울적함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한 주의 피로가 눈가에 드리워진 듯한 자신의 얼굴은 생기 없이 칙칙했다. 남자의 말대로 마냥 어려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여기서 좀 더 가면 선도 잘 안 들어온다고, 대체 왜 그렇게 눈이 높은 거냐고 핀잔을 주던 엄마의 말도 떠올랐다. 기운 없이 핸드 드라이어 앞에 서서 물 묻은 손을 말리려던 때였다. 소하의 시선이 벽에 붙은 위생 점검표에 닿았다.
    세면기는 깨끗합니까?
    거울은 얼룩 없이 닦여 있습니까?
    바닥은 물기 없이 관리 되어 있습니까?
    점검을 위한 질문은 더 이어졌다. 총 열 가지로 이어지는 항목마다 담당자가 두 시간에 한 번씩 체크할 수 있도록 마련된 칸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었다. 작고 빨간 동그라미가 일렬로 늘어선 와중에 한 곳만 기준 미달이었는지 X자 모양으로 체크되어 있었다. 그 순간 소하는 새삼 빨간색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빨간색이란 채점을 하는 색이었다. 대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평가한 사항을 알리기에 용이한 색이었다. 소하는 자신을 재고 따질 게 없이 마음에 든다고 말한 남자가 실은 채점을 하듯 꼼꼼히 재고 따져 봤을 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하가 마음에 든다고 했을까. 그 기준은 배우자가 될 사람을 찾는 데 있어서 소하가 중요하게 두는 가치와 과연 얼마나 일치할까. 소하는 씁쓸한 기분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재킷을 걸치고 안주머니에 있는 펜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이 펜을 가지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던 직원의 눈빛과 든든하던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에 자신이 가치를 두고 있던 기준들도 차례차례 떠올랐다.
    남자는 소하의 얼굴이 창백한 것 같다고 말했지만 곧이어 자신이 세우고 있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하는 팔짱을 끼었다. 그러자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붉은 펜의 존재가 느껴졌다.
    “잠깐만요, 노산이요? 얘기가 어느새 거기까지 갔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둘 다 마냥 어리지가 않으니까 서둘러서 나쁠 게 없잖습니까. 저는 소하 씨가 마음에 들어요. 진심입니다.”
    “네. 아까부터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좀 거슬리네요.”
    “거슬린다고요?” 남자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동작을 멈춘 채 되물었다.
    “거슬리죠. 제가 면접을 보러 온 것도 아닌데. 나이 얘기도 그래요. 자꾸 우리 둘, 이라고 얘기하시는데요. 그렇게 퉁치기에는 갭이 크지 않나요?”
    남자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손끝을 떨었다. 그는 허둥거리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요는 소하가 자신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여자로 보였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명백하게 평가를 내리는 말이었으므로 외려 소하는 마음이 편해졌다.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곤 그에게 우리 둘 다 지금 바로 일어서면 아직 귀가하는 데 차가 막히지 않을 시간이라고 일러주는 것으로 의사 표시를 했다.
    카페에서 나온 지 몇 분 되지 않아 득달같이 걸려온 부모님의 전화에 남자 쪽이 먼저 무례하게 굴었다고 선을 긋고 나자 남은 일요일 오후는 온전히 소하의 것이었다. 소하는 곧장 집으로 향하려던 계획을 바꿔서 가볍게 쇼핑몰을 돌아보았다. 정말 원하는 것이나 필요한 것과는 조우하지 못했으므로 삼십 분 후에는 건물 밖으로 나가 가까운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입구 근방의 아치형 터널에는 만개한 능소화가 드리워져 있었다. 짙은 녹색 잎 위로 어린아이 주먹만 한 붉은 꽃이 흘러넘치듯 매달린 덩굴이 만든 그늘 아래를 지나며 소하는 꽃다발 안을 통과하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일요일 오후의 공원은 나들이객으로 북적였다. 갈증이 난 소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그늘이 드리운 벤치 끄트머리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 옆으로 맨발로 걷는 지압 코스가 보였다. 입술을 붉게 물들이며 수박 맛 아이스크림을 먹는 내내 소하는 굽은 높지 않지만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발꿈치가 불편한 샌들을 벗어버리고 지압 코스를 걸어 볼지 말지 고민했다. 결국에는 샌들을 손에 들었다.
    그러자 누구 말마따나 마냥 어린 취향이라면 시도하지 않을 일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게 뭐냐 싶어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동글납작한 돌이 박힌 구역이 끝나고 예각으로 솟은 구역에 이르자 웃음은 순식간에 가셨다. 발끝이 찌릿찌릿하게 따끔거리는 한편 등줄기가 곧게 서며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이마와 목에 난 땀을 식혀 주었다. 걸음에 속도를 냈다. 다시금 등장한 맨들맨들한 돌길에 맨발로 서서 바람을 맞았다.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최근 들어 몸도 마음도 이토록 개운한 적이 있었던가 되짚어 보았다.

 

 

10

 

    이야기를 마치기까지 소하는 버릇처럼 자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빨간 펜을 회전시켰다. 그러다 펜을 떨어트릴 것만 같아서 은경은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사실 소하가 여름에 겪었다는 일을 듣고 난 지금도 궁극적으로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했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빨간 펜의 존재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도 한 자루 가져.”
    소하가 펜을 내밀었다. 은경은 얼결에 받아든 후에야 손에 쥔 플러스 펜이 소하의 이야기에 등장한 것, 그러니까 도톰한 두께감에 스포츠카 같은 광택의 붉은빛 몸체를 가진 펜과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어디다 뒀어?”
    “사무실 서랍 안에 잘 모셔 뒀지.”
    “박 부장이 긁을 때마다 꺼내 보는 거야?”
    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 모셔 뒀고 이건 회사 앞에 알파가 세일하길래 들어갔다가 아예 한 다스를 산 거야. 가방마다 안주머니마다 꽂아 놓고 이렇게 중요한 사람 만나면 선물도 하고.”
    “전도사님인데?” 은경이 빨간 펜을 가방 안에 넣으며 장난스레 말하자 소하는 “한번 믿고 의지해 보라니까.”라며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잠시 뒤에 와인 바로 장소를 옮겼다. 붉고 향기로운 술을 곁들이며 느긋하게 그간 말린 화젯거리를 나누었다. 은경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은, 지구를 연상시키던 마카롱을 보여주었다. 소하는 그 푸른빛이 자기 눈에는 마치 은하수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 다음에 준비 단단히 해서 은하수 보러 갈래?”
    태백의 고랭지 채소 경작지 위로 은하수가 보이는 스폿이 있다고 소하가 전했다. 휴대폰에 저장해 둔 몇 장의 사진에는 쏟아지듯 빛을 내뿜는 별 무리 아래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배추밭이 있는 사진이 함께 담겨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데 관심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앞으로 가져 보기로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언젠가 직접 풍경을 눈에 담을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설렘을 선사하는 장소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설렘을 느낄 일이 부족하니까. 직접 좀 만들어 보려고.” 그 말이 듣기 좋아서 은경은 자기도 데려가라고 졸랐다. 두 사람은 이미 놓친 여름휴가 대신 주말을 이용해 짧은 여행을 할 계획을 세웠다.

 

 

11

 

    그날 밤, 기분 좋게 취한 상태로 잠자리에 든 은경은 붉은색이 채점을 위한 색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정작 빨간 펜이 꿈에 나온 것은 그날 밤이 아니라 며칠 뒤였다. 은경은 스포츠카처럼 광택이 흐르는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뱅글뱅글 돌리다가 내키는 대로 점수를 주었다. 도톰한 펜의 감촉이 묘한 여운을 남겼다.
    꿈을 꾼 이튿날의 퇴근길에는 오랜만에 문구점에 들러서 갖가지 펜이 잔뜩 꽂힌 매대 앞을 서성였다. 소하가 그랬던 것처럼 사무실 서랍 안에 넣어 둘 것을 고르던 은경은 마침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감기듯 착 붙는 펜을 가지고 계산대로 향하다 말고 은경은 도로 매대 앞으로 돌아왔다. 나누어주고픈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그마한 설렘을 느끼며 은경은 자신이 고른 것과 같은 빨간색 펜을 몇 개 더 골라 들었다.   

 

 

 

 

 

 

 

 

 

 

은모든ⓒ강희갑
작가소개 / 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그밖에 지은 책으로 『꿈은, 미니멀리즘』, 『안락』, 『마냥, 슬슬』, 『오프닝 건너뛰기』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21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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