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나온 길 외 1편

[창작시]

 

 

우리가 지나온 길

 

 

김유림

 

 

 

    우리가 지나온 길에 대해 묘사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할 수 있다. 물소리가 들렸다고. 그것은 내게만 들렸다고. 물소리는 아니야 아니야 말할 것이다. 말을 할 수 있다면. 흰 저수조를 내가 이미 안다면. 놀라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햇빛은 그대로였고
    나무도 그대로였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대리석 난간과 면하고 있었고 대리석 난간은 나무들을 가두고 있었다.
    나무들은 나무들이 만드는 빈 공간을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연인이라면 그곳에서 키스를 한다.

 

    내 말에 귀 기울이던 동행자는 놀란다. 그가 생각하기에 나는 이제 마술사다. 그러나 내가 말한 공터는 여기에 있고 공터를 에워싼 나무들도 여기에 있으며 나무들을 비집고 선 거대한 흰 저수조가 여기 있는데. 고개를 들어야 할 차례지만 사람은 결과를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장막을 내려 사람의 입을 부드럽게 막을 것이다.

 

 

 

 

 

 

 

 

 

 

완이 생각에는 주술이 이렇다

 

 

 

 

    언덕에서 내려와

 

    언덕에서 천천히
    언덕에서 빠르게

 

    언덕에서 내려온다. 우리는
    언덕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

 

    강아지풀이 흔들리는걸. 강아지풀이
    흔들리는 걸 미워하는 사람들.
    흔들리는 걸 사랑하는 사람들…….

 

    유림은 쓰고 있는 책은 어떻게 되어 가냐고 묻는다. 유림의 동행자는 대답이 없지만 표정은 풍부하다. 유림의 동행자의 동행자는 애꿎은 잡초를 뽑고 있다. 그러나 잡초는 잘 뽑히지 않고 단지 뜯긴다. 사람들은 올라가거나 내려가다 말고 계단과 그늘에 멈춰 서서 한강을 바라본다. 동행자와 동행자는 비밀스러운 눈빛을 주고받는데 유림은 거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바람에 바람이 날리고 나무는 나무에 날린다. 잎사귀는 잎사귀를 때리고 바람은 바람을 때린다.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을…….

 

    혹은 유림은 혼자 걷고 있다. 해가 내리쬐는 여름날이다. 유림의 동행자였던 사람이 혼자 걷고 있다. 유림의 동행자였던 사람의 동행자였던 사람도 걷다 보니 기억이 난다. 그는 공기를 채운 여름의 열기. 그는 멀어지는 강아지의 꼬리. 그는 문득 생각한다. 그날 좋았지. 유림은 땀을 훔치고 고개를 들어 굴뚝이 있는 아이보리색 건물을 본다.

 

    그는 망원에 가기 위해 전철역으로 간다. 전철역으로 내려간다.

 

    도약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쓴다. 사물이 거부하고 사람이 거부하고 힘이 거부하는 동시에 길이 열리고 그는 쓴다. 나는 쓰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 상수리나무의 잎사귀를 관찰하는 산림청 직원을 보았다. 그는 나무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고 색 끈을 하나 꺼낸다. 색 끈으로 나무의 허리 즈음을 조인다. 그러나 나무는 한참 자랐다. 한참 자라서 사람의 키를 추월하고도 남았다. 사람은 자신의 머리가 닿는 높이에 색 끈을 묶지만 나무의 허리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썼을 거야. 유림은 생각하고 유림이 생각한 걸 쓰던 나는 고개를 들어 카페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노인의 복장을 본다. 가족도 지나간다. 나의 가족 말고. 가족은 가족이라는 게 중요하다.

 

 

 

 

 

 

 

 

 

 

김유림
작가소개 / 김유림

시를 쓴다. 시집 『양방향』, 『세 개 이상의 모형』과 앤솔로지 『셋 이상이 모여』 등을 펴냈다.

 

   《문장웹진 2021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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