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그레이 그리고 둘 이상의 이야기 외 1편

[신작시]

 

 

얼그레이 그리고 둘 이상의 이야기

 

 

구현우

 

 

 

    낯빛이 어두워지는 너와 식을 줄 모르는 얼그레이 전등의 빛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도시의 저녁은 한 폭의 유화처럼 몽환적이다 가끔 보편적인 감상만이 최선일 때가 있다 나의 사랑은 일회성이다

 

    얼그레이는 조금씩 진해진다 연한 노을빛에서 한달음에 짙어지는 밤하늘 같다

 

    대각선으로 앉아 너는 너의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다 얼그레이에서 한창 김이 난다 보통 일하는 시간인데도 졸음이 쏟아진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보기로 했으니까

 

    오늘 저녁은 내가 너와 함께 있는다 티백을 아직도 꺼내지 않고 휘휘 젓는다 너의 기쁨에 맞장구치고 너의 슬픔에 동조하고

 

    그러면 좋겠지만

 

    얼그레이의 흔들림에 마음이 간다 추운 날씨에 쏟아지는 입김의 모양 같은 거 말이 되다 마는 거 그런 게 우리에게는 있다

 

    꼭 무슨 사연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는 아니니까

 

    이렇게도 볼 수 있는 거지
    얼그레이에는 여전히 따뜻함이 있고
    저녁이 식어 간다

 

    해가 바뀌면 또 만나 그래 봐야
    12월의 약속은
    12개월 후에 12월이 되어야 지켜질 텐데

 

    지켜지지 못해도 그러려니 하겠지

 

    너는 여전하지만 나는 내가 많이 어렵다 이야기 꺼내는 법이 어렵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어렵고 우리가 같은 세대라서 어렵다

 

    뜨거운 물을 붓고 다시 티백을 넣으면

 

    리필이 되는가 봐

 

    미아사거리에서 우리는 쉽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전등의 빛이 우리를 감싸 안고 있다

 

    얼그레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유명하고
    남이 시키는 건 자주 봤지만
    직접 얼그레이를 마셔 보기는 처음이야

 

    건강해지지는 않아도
    당장 더 나빠지지는 않는 기분

 

    그런 기분이야

 

 

 

 

 

 

 

 

 

 

무의식적으로

 

 

 

 

    밤마다 유령이 수돗물을 튼다
    나의 유령인가
    너의 유령인가

 

    한 번 잠에서 깨고 나면
    눈 뜬 채로 밤을 보내게 된다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물소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물소리 외의
    소리를 하나하나 의식한다

 

    주방 아니면 화장실
    화장실 아니면 주방 아니면

 

    이 방에 유령이 있을 것이다

 

    나쁜 꿈을 꾸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너에 대한 꿈은 아니었고

 

    일어나서도
    머리가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블라인드로 인해 어둠이 누적된다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물소리가 멈추는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는다

 

    네가 나오는 꿈은 모두 나쁜 꿈이지만
    네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꿈이 되지도 않는다

 

    어둠을 끄면 다음 어둠

 

    꿈꾸지 말아야 하는데 꿈같은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데

 

    다짐해도 안 된다

 

    자꾸
    네가 없이도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쉰다

 

 

 

 

 

 

 

 

 

 

구현우
작가소개 / 구현우

2014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집 『나의 9월은 너의 3월』.

 

   《문장웹진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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