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비울 때까지

[단편소설]

 

 

얼굴을 비울 때까지

 

 

최윤

 

 

 

    어찌 보면 특수하다고 할 수 있는 내 직업으로 인해서 나는 인생의 매 단계에서 예외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예외적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상식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예외적이니 말이다. 그들은 나와의 관계에서 예외적이 된다는 뜻이다. 나는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다. 초상화가의 관점으로는 매우 그렇다는 얘기다. 초상화만 그리지는 않지만 나의 생활원은 주로 내게 초상화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작품 값에서 나오므로 사람들이 나를 초상화가라고 부른다 해서 서운해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초상화 이외의 그림들, 일테면 풍경화나 추상화 같은 여느 그림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그 반대다. 사실 나는 조금씩 이 협소하고 고루할 수 있는, 게다가 자칫하면 매우 형식적일 수 있는 초상화 장르에 대해 무언가 파격적인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게다가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어 가는 추세이기에 잠시 나의 행보를 멈추고 잔잔한 마음으로 다음 단계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초상화가 아주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내게는 있다.
    언제부터인가 초상화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나를 찾게 되었고, 최소한 그림이 완성되는 동안은 그 사람과 자주 만나며 시간을 지내다 보니,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나는 사람들과 조금은 특수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자주 놓였다.
    나는 어쩌다가 초상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막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와 함께 입시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수강생으로 들어온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우리 또래나 많아야 서너 살 위의 사람으로 딱하게도 여느 사람들처럼 정규적인 직업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는 흠이 있는 남자였다. 그는 한 초로의 남자 손에 이끌려 우리 미술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초로의 남자는 젊은 남자의 아버지였다. 이미 나이 들어버린 한 젊은 남자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미술학원에 학생으로 오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즈음은 그를 생각할 때면 어느새 귀에 고통이 감지되며 귀마개를 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독특한 심리적 문제를 가진 남자였다.

 

    간판을 달지는 않았지만 입시생들은 그곳을 〈말타〉 미술학원이라고 알고 찾아왔다. 내가 보기에는 어디 특별히 광고를 내지도 않는 것 같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술을 전공으로 택해 볼까 생각하는 중고등학생들이 알음알음으로 네다섯 명 정도는 늘 등록해 있었던 것 같다. 친구는 대화법이라고 부르는 특수한 방법으로 학생이 미술 쪽에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미술과는 무관한 사적인 질문을 던져 아이들을 당황케 했다. 그러고는 그림을 그려 보라고 주제를 준다. 그들이 애써 그린 그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어떻건 그런 식으로 상담을 거친 아이들에게 미술 개인교습을 하는 학원이었고 친구는 이미 대학 재학 중에 이 학원을 시작했다고 했다. 물론 친구는 그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처지였다. 서영이라는 이름의 보조개가 들어가는 미소가 예뻤던 그 친구는 여러 면으로 운이 좋은 친구처럼 보였다.
    우선 재능도 있었고 모든 일에 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에 비해서는 그랬다. 서영의 엄마는 한때는 사업에도 재능을 보여 패션업계에서는 꽤 큰손으로 통했던 디자이너였다고 친구는 말해 주었다. 나는 물론 패션업계, 큰손, 런웨이…… 이런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추상적이기만 한, 삶의 경험이 매우 협소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늘 서영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곤 했다. 서영의 얘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마치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만 쓰는 특수 사전의 단어들을 내가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은 친구의 보조역이었다. 학생들 중 서영이 내게 맡기는 아이들을 나는 데생 기초부터 가르쳐야 했다. 서영이 가장 가르치기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서영이 아주 바쁠 때 그녀를 대신해서 서영이 맡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수입을 나누었고 지금 생각해도 그 부분에서 서영은 매우 투명하면서도 정확했다.
    임대료라도 나누어 내겠다는 나의 제안에 친구는 어차피 자기도 엄마 소유의 장소를 거저 빌려 쓰고 있으니 나 또한 거저 쓰는 것이 당연한 거라고 시원한 어조로 답해 그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건물이 위치한 그 동네는 당시 상업적으로 막 뜨기 시작했기에 친구가 조금 과하게 요구해도 나는 응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서영은 여러 면에서 매우 관대했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배려해 준 서영과 서영이 엄마에게 나는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서영의 엄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서영의 입에 아예 매달려 있는, 그녀가 ㅇㅇ 여사라고 부르는, 한때는 잘나가는 명성을 얻은 디자이너였다는 서영 엄마의 이름을 지금은 까맣게 잊었다. 그 명성이라는 단어는, 서영을 통해서 알게 된 그 엄마 얘기에 끝도 없이 딸려 나오는 무수한 에피소드 덕분에, 내게는 매우 연약하고 덧없는 어떤 것으로 각인되었는데 시간이 지나고도 이 단어에 대해 내가 가지는 느낌은 변질되지 않았다.
    나는 서영과 아이들을 가르치던 이 년여의 기간을 대체로 매우 평화로웠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공간은 작은 건물의 삼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가끔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보듯이 밖에 지그재그로 설치된 꽤 가파른 쇠 층계를 통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삼층에 있던 창문 자리에 벽을 부수고 문을 내고 층계를 설치한 것은 서영의 아이디어였다고 했다. 서영은 그 층계에 말을 주제로 한 알록달록한 모티브로 색칠 장식을 했기에 누구나의 눈에 띄었다. 매우 이국적으로 들리던 학원의 이름 〈말타〉의 의미가 ‘말 타듯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라’는 뜻임을 알고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오는 학원생들에게 전화로 길을 알려줄 때는 늘 ‘알록달록한 말 장식이 있는 층계집’이라고 설명을 곁들였다.
    지금은 외부 층계를 설치한 건물을 때때로 만나지만, 당시로서는 신선하고 팬시한 매력을 풍기는 데다 어딘지 도발적인 멋이 있었다. 층계는 가파르고 좁았기에 오를 때보다는 내려갈 때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했다. 특히 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미끄러지다 층계 난간에 매달릴 때도 있었다. 모래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라, 우리는 훔쳐온 굵은 흙을 듬뿍 뿌렸다. 시멘트로 뒤덮인 도시 골목에서, 대로변 화단이나 동네 공원에서 흙 서리를 한 사람은 우리뿐 아니었을까.
    서영 엄마 소유의 그 건물은 층계를 제외하면, 가게로 개조한 주변의 빌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래된 집들을 각양각색으로 리모델링을 해서 일, 이층에 가게들에 세를 주었다. 모자나 옷을 파는 집들, 작은 식당, 아이디어 상품이나 가죽 공예품을 파는 가게들이 올망졸망 들어서 있는 동네 한가운데 그 층계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건물의 아래층에도 빵집과 옷가게와 빈티지 장신구 가게가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서영은 미술 공부하러 온 아이들을 데리고 간단하고도 빨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옆 골목의 피자가게나 일본 식당으로 데려가곤 했다. 물론 나도 함께.
    “너희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그렇지만 엄마한테는 우리랑 놀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나는 서영의 재정적인 여유가 아주 기이한 거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어쩌다 알게 되었다.
    주로 내가 없는 오전에 이루어졌을 거래가, 아이들이 떠나고 우리 둘만 남은 어느 저녁에 성사되던 것을 기억한다. 따뜻한 허브차가 좋은 인상을 줄 것이라면서, 서영은 누가 올 테니 예의 갖추어 맞으라고 하며 맞은편 건물에 입점한 카페를 향해 서둘러 층계를 내려갔다. 다행히 서영이 차 세 잔을 들고 다시 올라왔을 때 방문객이 층계 저 아래서 ‘이서영 씨’를 불렀다. 그리고 한 여인이 오랜 시간을 걸려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 삼층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외양의, 우리보다 열 살 정도는 많아 보이는, 고상한 제스처가 몸에 밴 여자였다. 서영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사가지고 온 차를 대접했다. 서영은 휴식 장소로 쓰는 작은 방에서 밍크코트를 걸쳐 더욱 무거워진 마네킹을 조심스럽게 들고 나와 여자 앞에 세워 놓았다. 한눈에 보아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 옷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털 코트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가까이에서 밍크코트라는 것을 보고 만져 본 터였다. 여자는 옷을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보고는 마침내 코트를 걸쳤다. 서영은 권위 있는 목소리로 단 한 마디 했다.
    “유니크한 디자인이죠.”
    밍크를 걸친 손님은 자기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한 듯이 거울 앞에서 여러 자세를 취했다. 우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우리 또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가을이었다. 밍크에 감싸인 그녀는 더욱 아름다웠다. 마침내 여자는 가방에서 분홍색 봉투를 꺼내 서영에게 내밀었다. 꽤 두툼했다. 아직 여름의 습한 기운이 밤바람에 묻어나는 저녁, 여자는 밍크코트를 걸친 채로 〈말타〉를 서둘러 내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영은 봉투 안의 고액권을 꺼내 세면서 무심한 듯 털어놓았다. 자기 엄마가 잘 알던, 유명인들이 드나드는 옷가게가 있는데 손님을 보내주면 이런 식으로 엄마가 입지 않는 고가의 옷을 판다고 했다. 엄마에게는 기억상실 증세가 있어 괜찮다고 했다. 게다가 옷이 너무 많아 무엇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기억상실증? 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서영을 바라보았다.
    “응, 너무 여러 남자를 사귀다가 생긴 병이야.”
    기억상실증과 여러 남자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내게 충격을 준 서영의 대답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역시 충격이 거의 그대로 재생된다. 서영의 목소리의 질감이 그 충격적인 대답과 늘 같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서영이 그 대답을 했을 때는 플라스틱 대머리에, 쇠다리 위에 서 있는 누드의 마네킹을 다시 방으로 들여놓느라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서영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고 느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씩씩해 보이는 서영에게도 때때로 슬럼프의 시간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서영은 대체로 밝은 편이었고 유머도 있었다.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에 어느 늦은 저녁, 누군가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가 유난히 소란스럽게 울렸다. 그리고 예약도 없이 초로의 남자의 손을 잡고 온 한 젊은 남자가 삼층의 유리문을 조급하게 두드렸다. 입시철이 막 끝난 즈음이어서 나와 서영은 우리 나름으로 망중한을 즐기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각자 막 시작한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다. 졸업 동기들과 봄에 있을 단체전에 참가할 생각이었다.
    “여기가 〈말타〉군요.”
    우리가 권유하지 않았는데도 나이 든 남자는 작업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를 당겨 젊은 남자를 앉히고 자신도 옆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젊은 남자는 집중한 시선으로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어 시선을 한 번은 내게, 또 한 번은 서영에게 번갈아 고정하고 무표정하게 똑 바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둘 다 그의 태도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특이한 증상을 보았기에 서로 눈짓을 했다.
    “아들입니다. 보시다시피 조금 아픈 채로 나이가 들었어요. 그림을 잘 그립니다. 우리는 저쪽 건너편 건물에 살아요. 여기서 아이들이 미술 배우는 것을 알고 왔어요. 건물 아래층에서 슈퍼 합니다. 그래서 가게 들르는 학생아이들한테 물어봤어요. 두 분 다 좋은 선생님이시라고…….”
    겉으로만 본다면 젊은 남자에게 이상한 점은 없었다. 서영과 나는 서로의 의견을 묻는 눈길을 교류했다. 서영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솔한 한 번의 고갯짓으로 모든 것이 시작된 셈이다. 서영은 그러면 뭐, 하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를, 그것도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운다는 사실에 고무된 듯했다.
    일주일에 두 번 아이들이 오기 전 오후 시간에 남자는 한 시간씩 와서 그림을 그렸다. 얼마 동안은 모든 것이 잘 진행되어 가는가 싶었다. 남자의 이름은 박호수였다. 그는 말이 없고 온순해 보였으며 그림 솜씨도 나름대로 익히고 있었다. 서영은 처음에는 그를 힘들어했다. 그는 나쁜 남자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르는 남자와 나만 혼자 두고 싶지 않다면서 박호수가 올 때는 볼일이 없어도 〈말타〉에 나와 주었다.
    그는 나무만 그렸다. 어디서 찍었는지 모를 나무 사진을 가져와 앞에 놓고 열심히 집중해서 그렸다. 왜 사진을 앞에 놓고 그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진 속의 나무와 조금도 닮지 않은 환상적인 한 그루의 나무가 일주일에 한 그루씩 그의 스케치북에 들어섰다. 내가 도와줄 일은 거의 없었다. 상점들이 한가한 고즈넉한 오후, 집을 나와 〈말타〉에서 또래의 두 ‘미술 선생님’ 앞에서 나무를 그리는 일에 박호수는 혼신을 쏟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행복해 보였다. 우리가 사소한 조언을 주면, 그는 곧 바로 그것을 자신의 그림에 반영했다. 그는 착한 데다 그림에 재질이 있는 학생이었다. 말이 없는 화가 지망생, 박호수. 우리끼리 얘기하면서 그를 이렇게 지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와 서영은 그가 처음 왔을 때 우리가 감지한, 어딘가 이상한 징후 같은 것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그는 위험한 남자였다. 그 자신에게 위험하다기보다는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이상한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에 의해 촉발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어떤 상황에 봉착해 한번 말문을 열면, 그의 목소리가 달라지며 말을 멈추지 않는 증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마치 랩이 유행하기도 전의 래퍼처럼 그는 목소리를 가늘고 날카롭게 해서 듣는 사람의 귀가 아프도록 고음과 고속으로 몸을 흔들면서 끊임없이 말을 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그린 나무들로 이루어진 깊은 숲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 보였다. 자세히 들어 보면 그는 집안 식구를 비롯해 우리가 알 도리가 없는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마도 그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적나라한 얘기들을 쏟아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말타〉의 실내를 돌고 또 돌았다. 그가 다른 곳에서 나나 서영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서영도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그 현상에 대해 박호수가 “아프다”거나 그것을 “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나도 서영도 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와는 달리 서영은 박호수의 이상 행동 앞에서 침착했을 뿐만 아니라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참으로 철이 없었다. 우리는 그것을 고통의 한 표출로 이해할 용기도 성숙함도 없었기에 그저 예술의 한 형태로 봐주자고 작정했던 것 같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다르게 흉내 내며 실내를 춤을 추듯 돌아다니는 박호수의 행동은 실제로 일인다역을 해내는 일인극 연극배우를 연상시켰다. 우리는 그에게 박폭포수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서영은 박호수가 말의 폭포수에 빠져 실내를 춤추듯 돌 때 장난스럽게 그 뒤를 따라 뛰며 질문을 던졌다.
    “박폭포수 씨,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거예요?”
    서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박호수의 뒤에서 그의 몸짓을 흉내 내며 뛰었다. 그녀 또한 박호수처럼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얘기나 빠른 속도로 뱉어냈다. 부조리극이 따로 없었다. 나는 한걸음 떨어져, 웃지 않을 수 없는 둘의 모습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서영은 숨이 차는지 멈추어 서서 손을 내저었다.
    “아, 못 하겠다. 폭포수 씨 잠깐 멈춰 봐요. 저기서 그리고 있잖아요.”
    서영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스케치를 하고 있는 나를 본 박호수는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멈추고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부탁이나 한 듯, 내 앞의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그는 온순하고도 호수처럼 고요하게 내가 그의 얼굴의 스케치를 멈출 때까지 포즈를 취해 주었다.
    서너 번의 유사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박호수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를 향해 스케치북을 들고 앉으면 박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광증 같은 말 폭포수를 멈추고 온순하게 맞은편에 와 앉았다.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후 내가 그의 초상화를 완성하는 시간 동안 나는 박호수의 얼굴이 놀랄 만큼 달라져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집중해서 바라보아 주고 자신을 그림으로 그려 준다는 것이 그 얼굴에 나타난 평온의 이유가 되는 것일까. 초상화가 그려지는 시간을 그가 즐기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와 깊은 생각에 젖은 듯, 길 위에서 서성거리며 〈말타〉의 층계를 오르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의 변화는 신기하게도 나와 서영에게 은연중에 큰 힘이 되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작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정상적인 젊은 남자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적어도 〈말타〉에서 박호수는 더 이상 박폭포수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린 첫 초상화이자 박호수가 모델이 된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호수>라는 제목을 단 그 작품은 준비 중이던 단체전에 나의 출품작이 되었다. 나와 서영은 박호수의 아버지에게 우리의 관찰을 알려주고 아들에게 건강을 되돌려주려면 그림을 배우라고 했다. 우리는 박호수의 아버지가 ‘발작’이라고 부르는 말의 폭포수가 집안 식구들에게 고통스러우리라는 것을 잘 알기에 한 조언이었다. 실제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날카로워져 일이 분이 지나면 귀가 아파져 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시 후, 아무도 사가지 않은 <호수>를 나는 박호수에게 선물로 주었다.
    박호수의 아버지나 누나가 그림을 배웠는지, 박호수가 이후 그림으로 인해 건강을 회복했는지 나도 서영도 알 수 없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영 엄마의 건강 악화로 서영은 건물을 팔아야 했고, 엄마의 고향인 제주도로 갈 계획이어서 〈말타〉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금 박호수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이 그의 말 폭포수를 멈추게 했을까, 이리저리 질문을 던져 보지만 딱 부러지는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것은 전문가가 밝혀내야 할 영역이었다. 다만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 그중에서도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어떤 존재적 특성이 그림의 성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설명할 길은 없다. 그걸 구태여 설명해 보라면 이런 식 아닐까. 어느 날 물방울이 한 방울씩 내 몸의 어딘가에 고이기 시작한다. 그동안에 나와 초상화 주문자 사이에는 은밀한 무언가가 일어나며, 그 방울방울은 한 움큼의 물로 고인다. 물이 어느 정도 고였다고 느낄 때 그림을 시작하면 된다. 그것이 박호수와 함께 시작된 내 초상화의 원칙이다. 이런 걸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나는 사진을 가져와 그것으로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사람의 요청을 수락한 적이 없다.

 

    〈말타〉 이후 나를 맞은 곳들이 여러 곳이었다. 내 두 손 외에는 딱히 기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기에,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동원해 나는 꾸준히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림들은 더러는 팔렸고 더러는 아직도 여러 곳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다. 나는 초상화 이외에도 여러 장르의 그림을 그려 팔았고, 시간이 쌓이면서 갤러리들이 전시 제안을 꺼리지는 않는 화가가 되었다. 때로는 미술 전문학교에서 강의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는 수락할 만한 실력도 조건도 갖춰지지 않았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나는 한 번도 제도권 안에서 일할 기회를 가져 보지 않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자유로움이란 늘 어느 정도는 생활의 불안정과 함수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를 나는 일찍이 낙관적으로 해결했다. 나는 큰 잘못만 저지르지 않으면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검증되지 않은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조심조심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수입만큼만 살기로 결정을 하니 어느 해는 풍성했고, 어느 해는 빈곤했다. 그러나 역시 그런 것으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안정적 생활을 위해 멀리 갔다가도 나는 다시 초상화로 되돌아왔다. 역시 한번 소문이 나면 그것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나의 이름 뒤에는 자주 초상화 화가라는 꼬리표가 붙는데 나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내 속생각을 털어놓자면 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얼굴을 그려 주기를 요구하는 구체적인 생명체보다는, 정물이나 풍경 같은 부동의 물질적 대상을 그릴 때의 평화가 어떤 건지 알고 있다. 초상화라는 긴장의 작업 사이사이에 선물같이 주어지는 평화.
    그럼에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역시 초상화가 내게는 가장 어렵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독된 사람처럼 초상화를 떠나지 못하고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다행히 세상에는 초상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이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세부적 요청사항도 다양했기에 그에 따라 나는 가격을 부과했다. 서영이 얘기해 준, 그녀가 만난 엄마 주변의 사람들에 내 상상력이 가미되어 만들어진, 그 연약하고 덧없는 명성이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만났다. 이름이 알려진 갑부들과 내로라하는 정치인, 이름 있는 문화계 인사들…….
    그러나 대부분은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그들은 초상화 화가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관해 궁금증이 일기 시작한다. 자신의 얼굴과 정직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드물기에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 그들은 자신의 초상화에 관심을 가진다. 역량의 한계가 있는 화가로서 모든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이들과 한두 시간 만나 시시껍절한 일상의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방의 얼굴이 마치 보이지 않는 액자 속에 고정되듯이, 각자가 고집스럽게 가꾸어 왔다고 생각한 어떤 특성이 초상화가가 요청하는 시간 속에서 흐트러지고 이완되며 마침내 포기되는 어떤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 그건 참 운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건 시작일 뿐이다.
    나는 사진도 좋아하고 실제 작품을 출품할 정도는 못 되어도, 이름을 대면 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진작가의 촉망받는 문하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진작가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얘기를 하자면, 나는 사진이 초상화를 능가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글쎄, 평면과 입체의 차이라고나 할까. 질료가 무엇이건 초상화의 얼굴에는 체적이 있고, 무엇보다 사진은 포착할 수 없는 극적인 시간의 깊이와 결을 화가가 손에 쥔 붓의 터치는 길어낼 수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여전히 갈 길이 먼 나 같은 사람의 부족한 사견임을 밝히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자주 이런 사견은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도했기에 여기서는 내 생각을 더 멀리 밀고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지금까지 그린 초상화 중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은 어떤 것이냐고. 매우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그것은 당사자에게 물어보아야 하는데 나는 완성된 그림에 가장 적합한 액자를 고르고 내가 디자인한 포장지에 정성껏 작품을 싸서 주문자에게 내어줄 때에 한 번도 그들의 의견을 물은 적이 없다. 그러니 아쉽게도 그런 질문에 대답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내가 그리면서 만족스런 기쁨을 맛본 작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문자도 같은 기쁨을 맛보았을까? 그건 복잡한 얘기다. 작품이 완성되어 주문자가 원하는 공간에 놓인다는 것은 언제나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일단 완성이 되었다는 것은 완성된 초상화와 주문자 사이의 애증의 드라마를 이겨낸 작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모든 주문자가 그러했는가. 그렇지 않다. 화가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은 만족감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얼굴과 그려지는 중인 얼굴 사이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어 사실 첫 반응에서 공격적인 대응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비록 예의를 갖춘 공격이라고 해도 말이다. 화가 앞에 앉아 있는 초상화 주문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그의 내면에 어떤 보이지 않는 사건들이 지나가는지 나는 상상을 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에 대해 가지는 불화와 불만족, 부정과 결핍감 등 몇 개의 명사로 요약할 수 없는 복합적인 과정을 건너뛸 수 없는 것이다. 초상이 진전되는 데 따라 내면의 동의가 이루어지고, 주문자는 화가와 함께 자신의 참을 만한 얼굴을, 혹은 드물지만 때로 자신이 닮아 갈 만한 얼굴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는 채로 말이다.
    작품으로 완성된 자신의 초상에 동의하는 일은 누구나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서로의 요구사항을 세밀히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한 초상화를 찾아가지 않는 사람도 여럿 만났다. 그런가 하면 내가 캔버스 앞에 앉기만 하면 졸다가, 급기야는 코를 골며 아예 자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고매한 사람들이어서 그림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결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를 모욕한 것이었을까. 자기 자신에 숨어 있던 어떤 부분이 초상화로 고정되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었을까. 어떻건 모든 사람이 이 마지막 난관을 잘 넘기지는 않는다.
    안타깝게도 주문 요청을 받은 모든 초상화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시간을 많이 들여도 결국 완성되지 않는 초상화가 있었고 아예 초기에 내 편에서 시도를 포기한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주문자가 마음을 바꾸는 것은 더 자주 있는 일이다. 진행되는 자신의 얼굴을 증오하다 못해 나를 증오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또는 주문자가 끝까지 요청사항에 만족하지 못해 여러 달에 거쳐 여러 버전이 그려진 적도 있었다. 그들은 때로 “망친” 그림을 요청하기도 한다. 마치 덤으로 달라는 듯이. 그러나 내게도 원칙이 있다. 나는 상대방이 동의한 완성작 말고는 주문자가 보는 앞에서 차선의 초상화 위에 붓으로 X표 사선을 그려 그 작품이 폐기될 것임을 알려준다. 이렇게 초상화는 나와 주문자가 같이 만들어 가는 작품이어서 그것을 매개로 우정과 존중과 때로는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부디 오해 없으시기를. 한 얼굴을 함께 완성해 가면서 생성된 우정과 존중이 혼합된 그런 예외적인 만남의 내밀한 확인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 인간은 정말 복잡하고 세심하며 신비하게 불가해하구나, 이것이 어느 날 내 입에서 터져 나온 탄식이었다. 모든 주문자들이 화가의 붓질 앞에서 박호수같이 순진하게 즐겁고, 무구하게 집중해, 아이처럼, 그려지는 그림 안으로 자기를 비워버리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으로서 그런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에 박호수는 예외적이었고, 그는 아팠던 것이다. 그는 슬픈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내게서 초상화를 배우겠다고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겼다. 나는 내가 겪은 당황스러운 사례들을 이들에게 얘기해 주기도 한다. 기운 빠지게 하거나 이 일의 의미를 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일을 하다 보면 자기 얼굴을 찾은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새 지망생이 올 때 나는 그 옛날에 서영이 가르쳐준 나름의 방식을 기억에서 떠올려 그들을 상담했다. 기준? 내게 그런 것이 있었겠는가. 서영에게도 그런 것은 없었음을 확신한다. 나는 서영이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의 눈빛을 도전적으로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 그녀는, 애인 있어요? 코 예쁘네, 수술했어요? 혹시 물건 훔쳐 본 적 있어요? 같은 도발적인 질문을 했을 것 같다. 신참자를 주눅들게 하며 또 매료하는 서영의 방법을 나는 따라갈 수 없다. 그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지만 아주 소수만이 머물렀다.
    도시 외곽에서 찾은 낡은 농가를 고치고 다듬어 나는 그곳을 일종의 작업실로 만들었다. 〈말타〉의 층계를 흉내 내 보았다. 내가 화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딘 〈말타〉에 대한 노스탤지어였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외벽을 값나가는 보석처럼 알록달록하게 칠했지만 어딘가 기품이 나는 조화로운 색을 택했다. 그곳에서 몇 명의 초상화가가 탄생했다. 나는 그들에게 가르쳐준 것이 없으니 감히 ‘제자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들 중 한 명이 제주도의 한 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임용이 되어, 그곳에서 초상화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했기에 나는 오랜만에 서영에 대해 생각했다.
    서영 특유의 거의 남성적인 필치와 저돌적인 색채로 제주의 산들을 선보인 두 번의 개인전을 끝으로 그녀가 작품 활동을 그만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서영의 예술적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녀는 타고난 화가였는데…… 제주도로 내려가 그녀의 창작혼은 절정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한두 해 간격으로 연이어 열린 서영의 개인전은 제주도에서는 물론 모든 미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서영은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됐고 화가로서의 활동을 ‘미련 없이’ 포기했다. 나는 직접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서영의 개인 신상에 대한 인터뷰가 한 월간잡지에 실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결혼과 함께 서영은 화가보다는 사업가로 제주도에서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제주도 특산품인 희귀 약재를 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수출하는 부유한 약재상 집안의 아들과 결혼한 서영은 사업수단을 발휘해 침체돼 있던 이 사업을 키우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놀랐겠지만 내게 그 소문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다. 서영에게선 그런 쪽으로도 특출한 재능이 일찍부터 엿보이지 않았던가.
    나는 서영에 대한 무수한 소문을 들으면서 이따금 질문을 던져 본다. 한 재능 있는 예술가가 어떻게 그 재능을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 서영에게 어머니라는 악재는 늘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녀가 미술판을 떠나 제주도로 내려간 것도 그렇지만 엉뚱하게 약재상집 아들과 만난 것도 서영이 엄마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인생에서 만나는 악재는 약이 되기도 한다. 악재로 인생에 근육이 붙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지 않던가. 그런데 서영은 그 엄마라는 악재에 지고 말았다. 그녀는 늘 지고 있었다. 정상적인 모녀 관계와는 다른 어떤 관계의 패턴이 서영과 서영의 엄마 사이에는 형성되어 있었다. 기억상실증과 엄마의 많은 애인은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우리가 함께 보낸 2년 동안 서영이 엄마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한 것은 그때 단 한 번뿐이었다.
    그녀가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에 한두 번 만났지만 서영은 마치 지난 시간이 닳아 없어져 버린 것처럼 다른 이야기만 했다. 우리가 그나마 공유하고 있는 단체전 얘기보다는 지루한 그 뒷이야기들. 〈계단〉이라는 제목의 서영의 참가작은 구상과 추상을 대담하게 결합한 것으로, 우리의 단체전에서 단연 돋보이는 꽃이었다. 전시장을 방문했던 은사들도 서영에 대한 각별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내 기억이 옳다면 그 작품으로 서영은 신인화가에게 주는, 상금이 결코 가볍지 않은 상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상은 몇 년 운영되다 없어졌는데 그것도 서영의 그림 포기만큼 안타까웠다.
    이후에도 우리가 최소한 각자의 전시회는 알리기로 약속한 대로, 몇 년에 한 번 정도 서영에게 전화로 알리고 안부도 물었다. 그러나 서영은 그림과는 아주 멀어진 사람의 무심하고 나른한 어조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여일하게 했다.
    “그래. 이번에는 꼭 가도록 노력할게.”
    서영은 한 번도 전시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헤어진 후, 나는 서영이 엄마의 고가 옷을 비밀리에 거래하는 깜찍한 사업을 계속했는지 알지 못한다. 만약 그랬다면 서영의 엄마는 우리가 내다버린 마네킹처럼 되지 않았을까. 서영 엄마의 건물이 서영의 말주변과 수완 덕분에 ‘좋은 가격’에 팔려 각자의 집으로 이삿짐을 옮긴 후 우리는 마지막 정리를 하러 그곳에 갔었다. 실내는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그 저녁 왠지 서영은 조심성이 없었다. 겨울이었고 늦은 오후였을 뿐인데 서둘러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떤 상념에 빠진 듯 불안해 보였다. 이제 실내는 비었고 마지막으로 그사이 서영에게 효녀 노릇을 한, 옷들을 수없이 걸치느라 수고한 마네킹만 층계 아래로 내려다 놓으면 되었다. 옷이 걸쳐져 있지 않은 나체의 마네킹은 서영의 거친 동작으로 작은 방문에 걸려 잘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네킹은 거기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서영이 번쩍 들고 옆으로 안고 나올 때 기둥에 얼굴 한쪽이 걸려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마네킹은 둘이 들기에도 가볍지 않았다. 삼층 층계를 내려가다가 미끄러져 셋이 모두 굴러 떨어질까 봐 조심조심 한 계단씩 내려갔다. 한 층을 내려오니 빛이 한 단계 어두워졌다. 마네킹의 머리 쪽을 잡고 있던 서영은 어둠 속에 멈추어 서서 상체를 돌려 내 시선을 찾았다. 그 순간 나와 서영은 동시에 우리를 사로잡은 이상한 기분에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에 둘이 공모해 해치운 시체를 옮기는 것만 같은 묘한 느낌. 그러나 서영은 이내 딴청을 부렸다.
    “에잇, 이대로 저 밑에 던져버릴까?”
    갑자기 우리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고 그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웃다 보니 양손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진짜 마네킹 시체를 놓칠 뻔했다. 마네킹을 어두운 골목에 버려두고 우리는 막 떠나온 빈 〈말타〉를 올려다보았다. 실내에 불을 켜놓은 채였다.
    “내가 올라가 불 끄고 올게.”
    어렵사리 내려온 층계를 다시 오르려 했을 때 서영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말타〉의 마지막 기억이 환해야지! 켜두고 가자. 하루 저녁 전기 요금으로 새 주인 망하지 않을 거야.”
    갑자기 골목에 몰아친 바람에 서영은 내 팔을 끼고 걸었다. 골목을 나와 건널목 앞에 서 있는데 “선생님!”을 부르며 박호수의 부친이 뛰어왔다.
    “오늘로 아주 떠나시네요. 그사이 고마웠습니다. 저도 이제 아들 녀석을 제법 그리게 됐어요. 한번 꼭 연락 주세요.”
    그는 지갑을 뒤지더니 꼬질꼬질한 기색이 역력한 명함을 한 장 꺼내들었다.
    “이런 한 장밖에 없네…….”
    그는 서영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명함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무심하게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명함이 필요 없는, 무소속의 미성숙한 개인들이었고, 나로서는 난생처음 받아 본 명함이었다. 우리는 동네 슈퍼 주인아저씨에게, 친구에게 하듯 경망스럽게 이별의 손을 흔들며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는 마지막으로, 마침 초록색으로 바뀐 건널목을 건넜다.
    그랬다, 서영은 끝내 그녀를 따라다니는 악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서영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것이다. 마치 어두운 밤 골목에 세워 둔 마네킹이 스산하게 버려진 채 지금까지 우리 기억의 바람모지에 그대로 서 있는 것처럼. 그래서 서영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괜히 내 일처럼 억울하고 나도 모르게 우울해진다. 깊은 밤, 서영의 말문이 터질 때마다, 기이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서영의 엄마, 한때는 명성을 날린 패션 디자이너였던 그 엄마를 서영은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너무 애인이 많아 기억상실증을 앓는 서영의 엄마를 그래서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초상화가에게는 두 가지 특수한 난점이 있다. 한 가지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을 때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그려낸 초상화로 전시를 열 수 없다는 것이다. 묘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그림이 그렇기는 하지만 각별히 초상화가의 작품은 사라져 버리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초상화의 초상권은 화가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결여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에서 기인하는 초상화가의 운명은 자신이 그린 초상화가 어디에 어떻게 걸려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런데 나는 지금에 와서 처음으로 초상화가의 규약을 깨려 하고 있다. 화창한 봄날, 아주 오랜만에, 새롭게 문을 연 한 화랑에서 개인전 제안이 들어왔다. 후배 소유의 화랑이었다. 타인의 얼굴을 그린다는 초상화의 현실적 한계와, 화가와 주문자 사이의 운명적인 긴장에서 벗어나고자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시골집 주위의 풍경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과 건강관리와 사색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러, 나는 부쩍, 내가 직접 주문 생산한 가벼운 재질의 바퀴 달린 그림 도구함을 끌고 집 가까운 자연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자동연상처럼 나무만 그리던 박호수를 생각했다. 그것은 박호수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었다. 박호수가 〈말타〉의 층계를 오름으로써, 서영이 아니라 바로 내가 박호수 부친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내 삶의 저울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여기까지 걸어온 짧지 않은 내 생애에 〈호수〉를 그릴 때만큼 맹목적으로 한 사람의 얼굴을 집중해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지금 나는 〈호수〉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아니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는가. 나무만 그리던 기이한 문제적 남자, 박호수. 그렇게 나무에 못 박혀 버린 것만 같던 말없는 남자. 그가 그리던 나무들은 지금쯤은 숲을 이루었을까. 기이하게도 내가 이사를 다닐 때마다 따라오던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상자 속에서 나는 이미 오래전에 버린 줄 알았던 박호수 아버지의 명함을 찾아냈다. 명함을 받던 이십여 년 전에도 이미 명함 주변이 낡아 있었기에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러 보았다. 안내의 말대로 전화번호는 잘못된 것이었고, 나의 때늦은 수소문은 초상화가로서는 확실히 잘못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한번 확 망가져 봐. 가봐!”
    그 명령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따금 전화 속에서 들려오던 모서리가 둥글려진 나른한 서영의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재수 없게 철없던 시절, 허세와 도발과 선동인 줄 알면서도 모두가 이끌렸던 스타카토로 음절을 자르듯 거친 서영의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그것을 핑계로 삼고, 나는 어느 날 〈말타〉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갔다, 손에 잡히지 않기에 더욱 절실했던 그림에 대한 정처 없는 열기에 휩싸여, 가난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모두 괄호 안에 가두었던 그 시절로. 헐렁한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나는 서울 행을 감행했다.

 

    그 언저리만 가면 당장 찾을 줄 알았는데, 살아 있는 왕뱀처럼 먹이를 찾아 똬리의 방향을 수시로 바꾸는 서울의 지리이다 보니, 〈말타〉가 있던 동네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도 우리 자신에 집중해 있던 때였기에, 오롯이 〈말타〉가 올라앉아 있던, 지금은 사라진 건물의 모양만 겨우 기억에 부유하고 있었다. 모든 거리가 비슷비슷하게 불분명했다. 한 시간 남짓 골목을 돌다가 나는 겨우 박호수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슈퍼의 자리라고 추정되는 모퉁이 건물 앞에 다다랐다. 무엇을 알아보기에는 우리 기억의 자료가 부족했다. 명함의 주소가 도움이 되었다. 슈퍼가 있던 자리에는 놀랍게도 미술학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통유리로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실내 안쪽에, 여느 미술학원이 그렇듯이, 〈말타〉가 그랬듯이, 작업 테이블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의 하나에, 등이 넓적하고 살이 붙은 남자가 거리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내 나이 정도로 보이는, 옆얼굴이 단아한 한 여자가,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고요히 과일을 깎고 있었다. 아직 학생들이 학원으로 몰리지 않는 한가한 낮 시간이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실내의 벽을 훑어보았지만 나무를 그린 어떤 그림도 걸려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 학원을 거쳐 갔을 무수한 아이들의 서툰 그림들이 이름표를 달고 벽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와 그 옆에서 과일을 깎는 여인이 만들어내는 정물화 같은 시간을 방해할 권리가 내게는, 결단코 없었다.   
    벽에 걸린 그림을 그린 이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나 또한, 아주 어릴 때부터 왜 그토록 절실하게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무엇 때문에 나는 무언가를 그리는 그 시간에 그토록 넋을 잃고 몰두했던 걸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중독처럼 빠져들던 그 농밀한 시간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 바로 그때만 완벽하게 내가 나를 잊는 자유로운 부재의 경험. 마치 액체로 된 한 존재가 그리는 대상 속으로 흘러 들어가 완전히 비어지는 그 황홀한 느낌, 나는 그것을 처음으로 박호수를 그리면서 어렴풋이 맛보았던 것 같다. 박호수가 나무를 그리면서, 스스로 나무가 되면서 그의 말 폭포수에서 벗어났듯이.
    그래서 나는 발꿈치를 돌려 그 거리에서 멀어졌다.

 

 

 

 

 

 

 

 

 

 

최윤
작가소개 / 최윤

1953년 서울 출생. 1978년 《문학사상》 평론 등단. 1988년 《문학과 사회》 소설 등단
소설집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꾳 잎이 지고』, 『회색눈사람』, 『속삭임, 속삭임』, 『숲속의 빈터』.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첫만남』, 『동행』
장편소설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겨울 아틀란티스』, 『마네킹』, 『오릭맨스티』, 『파랑대문』
수필집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 등.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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