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디올로스 외 1편

[창작시]

 

 

글라디올러스

 

 

정화진

 

 

 

    빵에 버터를 바르고 밤을 응시하다 저 어둠의 강을 건너왔을 때
    누군가 빈 들판, 황무지 드문드문 풀숲에 꽃을 꽂아 두고 갔었지 미셸 세르가 글라디올러스를 발음할 때 그것은 물의 식물*이라 했었어

 

    사람들에게 다치거나 아플 때면 꽃잎 말아 넣듯, 자책하고 움츠러들던 네 모습처럼,
    뾰족한 잎 속에 너라는 존재를 꼬깃꼬깃 구겨 넣는 오래된 습관이 있었지 핏물이 배어 나오거나 상처가 덧나면 가까운 이들에게 유독 가혹하게 굴었지

 

    오래된 습관, 알 수 없는 마음

 

    물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야 눈을 뜨고 먼 숲을 바라보던 너
    어둠은 너의 배경이 되고 너의 아픔을 위로했지만
    빈 들판에 꽃을 꽂아 두고 가던 이름 모를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단다 글라디올러스는 물의 이름을 닮은 것도 같네 그렇지?

 

    물소리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던 네가 본 건 뭘까?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 아니면 둥실 구름, 솜털처럼 가벼운 존재, 존재의 공중부양, 아니면 조금씩 자라 오르는 글라디올러스, 글라디올러스, 햇볕 아래 몽상, 뭐 그런 거였니?

   *  『헤르메스』(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09) / 217쪽에서 빌려옴.

 

 

 

 

 

 

 

 

 

 

흰무늬로 툭,

 

 

 

 

    그림자도 없이 어떤 소음과 열기와 소용돌이 흐름을 피해 보려고 천천히 비행고도를 낮추는 순간이었다. 당혹이라는 말이 스쳐갔다. 떠난다는 것, 고통도 없이, 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사물은 많고도 많았지만. 사이와 사이들을 비좁게 날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 검은 차가 속도를 많이 낸 것도 아니고, 차선을 바꿔 나*에게로 온 것도 아니었지만…… 예상을 벗어난 좀 낮은 고도에 좀 느린 속도가 부딪힌 시간이었다.
    시간은 꽃다발처럼** 움직이며 왔다. 조금 전 다녀온 화단 패랭이꽃 덤불 향기를 뒤로 하고
    그녀의 차 전면 유리에 어떤 추억을 흔적으로 남겨 둔 채 휘어져, 4월을 마지막으로 나의 미미하고 흐리고 액체화된 몸이 짧은 열기를 뿜으며 슬그머니 툭, 이 세상과 고별인사를 한 거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생명체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로, 꽃가루로 뭉쳐진 몸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던 채로, 마지막 날을 날선, 낯선 생각을 남기듯 그렇게, 일순, 집착도 없이 떠나게 되었다. 잠깐 방문한 탈색된 한 닢 패랭이꽃 휘어진 시간을 안고 흰 무늬로, 네거리에 머뭇거리는 느린 차창 위로, 그림자도 없이 한 방울 열기를 잃은 채, 마냥 일순간을 안녕, 그렇게 작은 무늬인 채로

   *  오후 5시를 배경으로 무엇이라 느낄 사이도 없이 그것은 흐린 동쪽 하늘에서 사선으로 날아들었다. 약간의 부딪힘이었는데, 퍽, 흰 꽃무늬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잠깐 그는 생의 마지막을, 차창에 어떤 무늬를, 조그맣게 장식해 주었다. 끈적이는, 고체화 되고 있는 액체의 흔적만 남긴 채, 하오 5시를 배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붉은 듯 검은 듯 분홍 하늘이 조금씩 느리게 차창을 비껴 흘러갔다. 서로를 잘 알 수 없었던 채로 영원한 한순간이 잠깐, 멈칫, 툭! 패랭이
   **  『헤르메스』(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09) / 436쪽 역자 후기에서 따옴.

 

 

 

 

 

 

 

 

 

 

정화진
작가소개 / 정화진

1986년 《세계의문학》 가을호로 등단. 1990년 첫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 뜨게 하고』, 1995년 두 번째 시집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문장웹진 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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