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미술관으로서 그래픽 노블

[리뷰 – 그래픽노블]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문학의 미술관으로서 그래픽 노블

– 자전적 그래픽 노블 읽기

 

김지은

 

 

 

1. 문학의 미술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클라리사 댈러웨이 부인은 거리의 한 서점 진열장 앞에 멈추어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거지? 뭘 기억해내려고?” 댈러웨이 부인이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반가워해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삶의 즐거움을 안겨주는 ‘존재의 힘’을 되찾는 일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속에서 삶 자체를, 특히 주인공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을 문학의 과제로 삼았다. 『댈러웨이 부인』에서도 그는 비본래적 현존재에 머무르는 것과 본래적 현존재의 삶 사이에 놓인 거리, 그 모순적 투쟁을 그려낸다.
    댈러웨이 부인이 진열장을 보았던 것처럼 그래픽노블을 펼치고 그 안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기억을 서늘하게 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이미지와 서사가 함께 발생시키는 기억의 환기 작용이 상당하다. 댈러웨이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존재의 힘을 되찾으려는 주인공의 실존적 안간힘을 그려낸 작품들이 있고 독자도 ‘나의 본래적 현존재는 무엇인가’ 나란히 되묻게 되는 것이다. 그래픽노블에는 문학작품만으로 읽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회화 특유의 인력이 있다. 그래픽 노블을 읽는 시간동안 우리는 문학의 미술관에 들어서는 경험을 한다. 그림이 압도할 때 문학은 잠시 하던 말을 멈춘다.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픽노블에서 문학은 회화와 살짝 엇갈리거나 뒤따라가면서 독자를 더 정교한 몰입으로 안내한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문학의 미술관에는 유난히 자전적 서사가 많다. 그림책으로는 픽션 작업을 하던 작가가 그래픽노블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기도 한다. 절제 속에 내피를 뒤집어 보일 수 있는 적절히 적은 글의 양이라든가 이미지가 회상을 더 가깝게 돕는 특성 때문에 창작자도 이 장르에서는 실존과 마주할 용기가 나는 것일까. 오늘 읽어보는 그래픽노블 작품들은 ‘존재의 힘’을 되찾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서사 또는 작가가 각별하게 여기는 인물들의 실제 서사를 토대로 한 작품도 있고 그동안 자신이 작업하며 쌓아온 캐릭터를 그래픽 노블로 다시 집약한 작품도 있다. 출간된 지 꽤 시간이 흐른 작품부터 한 달 남짓 된 신간까지, 문학의 미술관이라고 부를만한 책들을 골라보았다. 데이비드 스몰의 2009년작 『바늘땀』(원제:Stitches, 미메시스), 최향랑의 『믿기 어렵겠지만 엘비스 의상실』(사계절, 2018), 사라 룬드베리의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산하, 2018), 숀 탠의 『이너 시티 이야기』(풀빛, 2020)을 살펴본다. 기법도 다양해서 드로잉, 콜라주, 수채화, 유화, 아크릴화 등 다채로운 시도가 담긴 회화를 감상할 수 있다.

 

2. 10여 권의 초고를 거쳐 한 권의 바늘땀으로
    데이비드 스몰이 아내 사라 스튜어트와 함께 그림책 『리디아의 정원』을 작업해서 첫 번째 칼데콧상을 수상한 것은 1997년이었다. 『바늘땀』은 2009년에 출간된 작품이므로 그가 그림책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한 뒤로도 한참 후에야 세상에 나온 셈이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서 10여 권의 초고를 그렸지만 모조리 내키지 않아 책으로 묶는 일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자전적 그래픽노블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전미도서상 후보에 올랐고 도처에서 2009년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의 어느 주택, 거실 바닥에 엎드려 크레욜라로 그림을 그리는 여섯 살의 데이비드 스몰을 클로즈업하면서 첫 장면이 시작된다. 그의 엄마는 걸핏하면 흐느끼고 문짝을 후려쳤다. 울음과 분노가 대화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의사였는데 병원에서 퇴근하면 곧장 지하실에 가서 샌드백을 두드렸고, 형은 집에서 늘 드럼을 쳤다. 이런 가정에서, 말없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란 어린이 데이비드 스몰이 자기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앓아눕기’ 뿐이었다. 데이비드 스몰은 가정폭력 생존자로서 유년 시절 겪은 학대의 경험을 『바늘땀』 한 권에 놀랄 정도로 솔직하게 담았다. 아빠는 그 무렵의 의료적 한계 속에서 방사선이 만능 치료 방법이라고 믿었고 자주 크고 작은 아픔을 호소하는 어린 데이비드 스몰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여기저기 방사선을 쏘았다. 목덜미에 종양이 생겼고 치료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발생한 지 3년이나 지나서야 수술을 받게 된다. 그때 데이비드 스몰은 갑상선과 성대 한쪽을 잃는다. 중증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제대로 치료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던 할머니는 레즈비언이었던 자신의 딸, 데이비드 스몰의 엄마를 학대하며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엄마는 묵음의 세계를 향해 고함을 치며 살아남았고 아들 데이비드 스몰을 향해 울음과 비탄을 쏟아낸 것이었는데 데이비드 스몰이 당시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보게 된 것은 서른이 지나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지는 폭력의 연쇄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며 견뎠고 열여섯 살에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데이비드 스몰의 자전적 이야기는 한 사회가 정신질환자와 성 소수자를 억압하고 혐오한 결과가 그 가정의 최약자인 어린이의 삶을 어떻게 파괴의 국면으로 몰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데이비드 스몰은 자신이 겪은 일이 하나의 특별한 사례가 아님을 말한다. 휘몰아치는 거친 선의 흑백 수채화는 비슷한 구도를 되풀이하고 불 켜진 거리를 번갈아 비추면서 다른 집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가정폭력의 생존자에게 이 회상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는 “반복해서 꾸는 꿈은 아무리 여러 번 꾸어도 막상 그 장면을 다시 맞닥뜨리면 얼떨결에 급습을 당한 기분이 든다.”고 작업 과정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그가 ‘존재의 힘’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서 택한 방식은 몇 권을 되물리든,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간에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는 집안에 곳곳에 드리운 줄어들지 않는 그림자와 몸과 마음의 잦은 멍, 작고 야윈 몸을 투과하는 방사선의 공격을 수채화의 묽고 짙음으로 표현해낸다. 이 지독한 토로가 끝나고서야 성 소수자였던 어머니의 심장을 일컬어 “세상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하염없이 흐느끼는 분수와 같다.”고 이해하고 학대했던 자들의 얼굴을 눈을 들어본다. 325쪽의 격렬한 질주 같았던 이 작품은 가족들의 실사 사진을 마지막으로 하여 비로소 닫힌다.

 

3. 개구리의 세입자가 되어
    화사한 자전적 그래픽노블도 있다. 최향랑의 『믿기 어렵지만 엘비스 의상실』은 실크 스크린을 기본으로 콜라주를 부분 활용하면서 재봉으로 인형과 옷을 만들어 무대를 설치하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한, 산뜻한 책이다. 이야기는 어느 화가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는 십몇 년 전 여름에 작업실을 구하다가 좋은 조건의 집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햇살이 가득한 고층 아파트였는데 주인과 공간을 나누어 쓰면서 그의 집안일을 약간 거들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집을 보러 간 주인공은 이곳의 소유주가 엘비스라는 이름을 가진 개구리라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놀란다. 자신이 도와주어야 하는 집안일이라는 것도 하루에 한 번 살아있는 밀웜을 준비해 집주인 엘비스의 식사를 챙기는 일이었다. 공인중개사는 변기에서 반신욕을 즐기는 집주인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입주 원칙이라고 신신당부한다.
    이렇게 시작된 개구리와 화가의 동거 이야기는 금공을 빠뜨린 공주의 옛이야기처럼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며 흘러 흘러 이어진다. 화가는 개구리 엘비스가 오랜 시간 고립된 생활을 자처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엘비스에게 말을 걸고 바깥 생활을 해보라고 독려하면서 한 벌 두 벌 개구리 엘비스를 위한 옷을 디자인하고 직접 짓는다. 둘은 집주인과 세입자를 넘어서 속내를 훌훌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이쯤에서 엘비스가 주택 등기를 소유하게 된 사연이 궁금할 수 있는데 엘비스 말고는 혈육 하나 없던 할머니의 유산이었다고 한다. 돌아가시면서 반려 개구리에게 집을 물려주었다는 것인데 책 속의 서술자는 철저히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믿을 사람이 있거든 믿고 믿기 어려운 사람은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엘비스와 화가는 각각 비혼 1인 가구였지만 둘이 같이 살아보기로 결심하면서 이후의 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 책을 그래픽노블로 보는 것은 솔방울을 주워 옷장을 만들고 떡갈나무 잎으로 드레스를 만들었던 아티스트 최향랑의 작품 세계와 연결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최향랑의 전시에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그는 산에서 열매와 꽃잎을 주워 지상에 없는 옷을 만들고 그 옷으로 그림책을 만들며 전시를 연다. 그가 만든 옷들은 전시가 끝날 때쯤이면 부서지고 말라 사라진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개구리 엘비스에게 지어준 옷들은 매우 감각적이어서 패션 화보집을 보는 것 같다. 의상실 놀이 같기도 하고 실제 사건 같기도 한 흥분되는 피팅 장면들이 이어지고 엽렵한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는 사이에 모든 사건들은 심리적 리얼리티를 구축해버린다. 한 땀 한 땀 꿰매고 수를 놓은 엘비스의 옷은 작가가 실물을 재촬영한 것인데 실크 스크린으로 작업한 2D 장면과 바느질한 3D 사진 장면의 조화가 기묘한 사실감을 만든다. 점점 엘비스의 신체에서 팽팽한 입체감이 느껴지고 서사의 3분의 1은 만화, 3분의 1은 영화, 3분의 1은 회화처럼 독특하게 서로 얽히며 읽힌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어떤 면에서 작가가 직접 체험한 사실과 관련이 깊다는 점이다. 최향랑 작가는 실제로 9년 동안 개구리 한 마리와 함께 산 적이 있다. 다만 집주인이 최향랑 작가였고 개구리가 세입자라는 것이 책과 다르다. 그의 집에 살았던 개구리는 ‘엘비스’가 아니라 ‘풀잎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졌는데 엘비스와 화가처럼 대등한 동거의 관계였다. 작가는 우연히 집에 들어온 개구리 풀잎이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욕실 한 칸을 완전히 독립 공간으로 내어준다. 가족은 아무도 그 공간을 사용하지 않으며 개구리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먹이를 챙겨주며 돌보았다. 작가가 이 그래픽노블에서 엘비스의 생활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동거 경험의 덕이다. 능청스러운 작가의 태도를 믿게 되는 과정에는 그를 뒷받침하는 자전적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4. 세상이 저 혼자 잘 돌아가게 둘 수는 없었던
    2020년 출간된 스웨덴 작가 사라 룬드베리의 그림책 『여름의 잠수』는 정신질환으로 입원한 아버지와 그 어린 딸이 겪은 낯선 우정의 이야기를 다루어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사라 룬드베리는 스웨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엘사 베스코브상을 수상한 작가다. 그가 그리고 쓴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는 1910년에 태어난 화가 베타 한손의 일생을 바탕으로 한 논픽션이다. 이 책은 산하 그래픽노블 시리즈의 한 권으로 ‘2017년 스눼볼렌 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라 룬드베리 회화의 정수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전기 문학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다.
    이 책이 ‘내 안의 새’를 다루고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베타 한손이 일생동안 예술적 모티프로 삼았던 것이 새이기 때문이다. 베타 한손의 엄마는 1900년대 초반에는 치명적인 전염성 질병이었던 결핵을 앓았다. 엄마의 투병은 셋째 딸이었던 베타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 무렵 결핵 환자의 가족은 감염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보균 검사를 받아야 했다. 베타의 엄마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둘째 언니도 결핵에 감염되어 엄마가 떠난 1년 뒤 목숨을 잃는다. 베타의 아빠는 아픈 아내를 대신해서 딸들에게 가사노동을 시켰고 어른이 된 뒤에도 그들이 가사 관리사가 되기를 바란다. 자신의 딸을 비롯해 여성들이 하늘을 나는 새가 될 수 있다는 잠재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손 안에만 움켜쥐려 한다. 그러나 어린 베타는 그림 그리는 일이 더없이 좋고 언젠가 반드시 화가가 되고 싶다. 아직 날아갈 수는 없지만 몸을 한껏 웅크리고서라도 새로 살고 싶다고, 진흙으로 만든 잠자는 새라도 되고 싶다고 말한다. 베타가 날마다 그린 그림은 엄마의 침대 머리맡에 붙어 있고 엄마는 그 그림으로 힘을 얻어 질병을 견디고 베타는 그런 엄마에게 진흙으로 빚은 새를 선물한다. 진흙새가 엄마를 살릴지도 모른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새도 언젠가 바라는 곳을 향해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 작품은 ‘내가 나일 수 있는 곳, 아무도 나를 소리쳐 찾지 않고 스스로 나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곳’을 찾는 부단한 과정을 다룬다.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돌보기 위해 완두 수프를 끓이는 베타의 결연한 두 팔을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과 이어서 펼쳐지는 엄마와 베타의 이불 속 대화 장면, 그리고 완두 수프 국자에서 손을 놓고 똑바로 선 베타를 정면으로 그린 다음 장면은 긴 시간 돌봄 노동을 수행해온 어린 베타의 양가감정과 냄비 앞에서 떠나겠다는 결심을 한 줄의 문장도 없이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전환점이 되는 글이 등장한다. “타는 냄새가 곧 집 안에 퍼진다. 누군가 나를 소리쳐 부르지만 나는 못 들은 척 한다.”
    착한 딸로 그루밍 되고 “너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가스라이팅 당하던 베타가 집을 떠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래도 세상은 저 혼자 잘 돌아간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이 그래픽노블이 논픽션이라는 사실은 독자에게 좋은 참조와 위안이 된다. 1인칭으로 기록된 전기 문학이면서 자전적인 글이 아님에도 이 작품이 독자에게 이만큼 생생하게 읽히는 것은 사라 룬드베리를 비롯한 많은 여성의 삶 속에 베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타 한손은 1943년 스톡홀름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그래도 늙은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한 번 더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타고 새가 되어 날아간다.

 

5.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그래픽 노블로 만든 사람
    숀 탠의 그래픽노블 『이너 시티 이야기』(원제: Tales from the Inner City. 김경연 옮김. 풀빛. 2020)는 그의 포트폴리오 중간 결산 같은 작품이다. 이 연작 단편집 속에는 그가 그동안 작업해온 인물, 공간, 사건이 조금씩 자리를 움직여 재현되어 있다.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원제: Tales from Outer Suburbia. 이지원 옮김. 사계절. 2009)와 연결해서 읽는 작품이기도 하다. ‘Outer’에서 ‘Inner’로 건너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던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더욱 면밀하게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스물다섯 마리의 동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고백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숀 탠 특유의 알레고리가 전체를 지배한다. “아무도 이 도시 전체가 늪 위에 건설되었음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일갈하며 시작된 악어의 이야기는 연작집의 첫 단편으로 손색이 없다. “악어들의 서늘한 뇌에서 도시는 그저 대기실에 불과하다.”는 말과 함께 거래하지 않는 삶, 이유를 묻지 않는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간다. 작품 속 동물들이 모두 숀 탠 자신으로 읽히는 것은 각각의 연작이 1인칭으로 서술되면서 고민의 꽤 깊은 내부(inner)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거래하지 않는다.”와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말은 숀 탠이 그동안 그려왔던 작품의 방향을 요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여름의 규칙』에서 거래에 저항하는 두 어린이의 투쟁을 다루었고 『도착』에서 이유를 묻지 않고 이방인을 환대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모든 충동은 너덜너덜한 수수께끼(23면)”이며 “러시아 인형처럼 상어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67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상어들은 맑은 물처럼 신선하고 파랬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태어나지조차 못한다. 그에게 “모든 분개한 고함소리(61면)”는 거래의 소음들이다. 이 소음들에 대해 달팽이는 우아함과 자부심으로 응답하며 어둠 속에서 느릿느릿 춤을 추는 길을 선택한다.   
    말들의 이야기에 이르면 좀 더 직접적인 작가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말들이 그 무엇보다도 잘 아는 사실은 어떤 동물이건 인간에게 돈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저주라는 것(80면)”이며 “말들의 영혼만이 인간들에게 아무 쓸모도 없고 한 푼의 가치도 없다.(81면)”고 말한다. “친척 아저씨 같은 친절함은 모두 만료된(102면)” 세계에서 “서로 아는 이야기든 모르는 이야기든 모두 다 말하는 돼지들의 꿀꿀꿀꿀(87면)”을 들어보라는 말의 뉘앙스는 너무나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고 싶을 정도다.
    숀 탠은 이 그래픽 노블에서 자신이 그렸던 인물을, 그렸던 맥락에서, 그렸던 방식으로 재현하면서 독자에게 나머지 모든 작품을 다시 읽게 만드는 책을 펴내버렸다. 코뿔소의 이야기는 숀 탠 종합편 같은 이 작품의 핵심적 비판을 가볍게 간추린다. “그건 어제였어. 오늘 우리는 모두 끔찍한 느낌이야. 아무도 그것이 마지막 코뿔소인지 몰랐어. 어떻게 그것이 마지막 코뿔소인지 알았겠어?(107면)”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이것이 숀 탠의 주제어임을 독자는 알아듣게 되어 버린다.
    서두에서 악어는 이 세상을 대기실이라고 했지만, 올빼미는 “난 대기실이 두렵지 않아.(111면)”라고 말하며 “기다림의 냄새”에 희망을 걸어본다. 이익과 가치를 탐닉하기보다 “오로지 하마에 대해서만 꿈을 꾸었던(142면)” 소년이라든가 “우리의 얼굴을 갖고 있는 폐어(149면)”는 긍정적인 방향에서 그린 숀 탠의 자화상이자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찾아온 사람들, 꽃 피는 순간, 박수갈채, 벌, 그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 (213면)”는 벌의 말은 감염병의 위기를 통해 오랜 경고의 실체를 확인한 우리들에게 주는 독려의 문장이다. 변화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 때 움직이라는 것이다.

 

6. 거울의 미술관으로서 자전적 그래픽 노블
    숀 탠의 작품은 ‘문학의 미술관’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린다. 문학의 미술관으로서 그래픽 노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려면 서너 쪽의 서사를 한 장의 그림으로 단숨에 집어 삼켜버리고 다시 다음 이야기로 선선히 토해내는 그의 불투명한 그림을 보면 될 것이다. 그가 불투명한 이미지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 세계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전망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독자에게 꽉 막힌 것 같은 감각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전략이며 여기에 더해 그의 그림에 가끔 등장하는 한 두 줄기의 빛은 너무 명민하게 상업적인 기능을 하고 있어서 숀 탠이야말로 거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숀 탠의 작품이 2020년의 우리들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전적 그래픽 노블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거울을 보는 두려움을 자청한다. 무서움을 참고 거울을 보지 않으면 여기가 마지막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마지막 코뿔소를 떠밀어버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은
작가소개 /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문장웹진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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