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아름다움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살아남은 자의 아름다움

– 편혜영, 『재와 빨강』(2010)

 

 

한승은

 

 

 

    1.
    비루한 연명은 아름답지 못하다. 남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방관하며, 심지어 남의 목숨을 끊어서라도 나는 살아남겠다는 생존 본능은 애달프지만 구차하다. 구차하지만, 내버리고 싶어도 내버리기 쉽지 않은 목숨의 내성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비겁하고, 이렇게 연명하는 삶은 추할 뿐만 아니라 삶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넋두리는 좀체 면역력이 형성되지 않는 고질적 자조(自嘲)의 현상이다. 죽고 싶지만 죽지 못하고,1 죽지 못한 손에 쥔 칼을 내가 아닌 너에게 휘두를 때, 나의 삶은 어떤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삶도 죽음도 괄호 친 것 같은 생존. 쓰레기 더미를 뒤져 상한 음식을 먹고, 지하 하수도관에 숨어 눈을 붙이는 삶은 삶이라 부르기에 궁색해 보인다. 이 궁색함을 삶의 앞뒤에 괄호 치기로 무마한다. 우리가 삶을 말할 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삶은 쓰레기를 뒤지며 연명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방제 대상으로 취급되는 쥐처럼, 전염병이 도는 한 방역 대상으로 환원되는 인간의 죽음은 쓰레기 소각장에서 쓰레기와 함께 태워지고 쓰레기와 함께 오염된 강을 떠내려가는 최후를 맞는다. 이런 최후는 죽음을 괄호 친다. 우리가 죽음을 말할 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죽음은 쥐 잡듯 색출되고 쓰레기처럼 버려짐을 뜻하지 않는다. 앞뒤에 괄호가 달린 삶과 죽음은 이렇게 생존을 부연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1  죽지 못하는 것일까 죽지 않는 것일까. 살아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살고 싶은 욕구도 없다지만 목숨을 끊을 뜻은 없다거나 자살을 감행할 용기가 없다면, 이렇게 사는 삶은 죽지 못해 사는 삶일까 죽지 않고 사는 삶일까. 이 문장에서 쓰인 ‘죽지 못함’에는 죽지 못함과 죽지 않음의 차이를 묻는 의도가 담겨 있다.

 

    2.
    『재와 빨강』은 그 진원지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전염병으로 이미 초토화한 동네, C국의 수도 Y시 제4구를 서사 공간으로 삼는다. 병인이 불명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은 사람들을 각자의 집에 가두고, 약국이든 남의 트렁크든 약탈을 일삼게 한다. 그러나 감염률이 높은 데 비해 치사율은 높지 않은 이 병 또한 조만간 계절성 독감처럼 때가 되면 나타나는 유행성 질환의 하나로 자리매김할지 모른다. 처음 발견된 바이러스여서 그 감염률이나 치사율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아직 지켜봐야 하고, 따라서 병의 정체에 대한 두려움은 당분간 잦아들지 않겠지만, 치료제와 백신이 마련된 다른 유행성 질환처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언젠가 잦아들 것으로 기대되는 전염병. 이러한 전염병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지는 대로, 사회 체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사회에 속한 개인의 삶에도 유사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신종 전염병으로 인한 낯선 불편은 감수할 만한 불편으로, 익숙한 불편으로 서서히 일상화한다. 다시 말해 전염병과의 공존은 차츰 익숙한 일상이 된다.
    소설 속 문제의 전염병은 그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널리 퍼졌다가 잦아든다. 미지(味知)의 병인과 별개로, 걸핏하면 전염병의 병원체이자 매개체로 지목되는 동물인 쥐와 집 앞에, 건물과 건물 사이에, 도로 위에 방치된 채 쌓여 가는 쓰레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C국 Y시 제4구는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도시다. 지하에 산적한 쓰레기 말고도 지상을 뒤덮은 쓰레기 더미가 지하에서 살아가는 쥐를 인간 삶의 주 무대인 지상으로 출몰하게 하는 미끼라는 것이다. 그러나 발병 원인은 쥐도 쓰레기도 아니라는 게 방역 당국의 소견이고, 소설은 이러한 진단을 단지 대중의 의혹을 잠재우기 위한 당국의 근거 없는 미봉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전염병과 쥐의 관계는 느슨하다. 다시 말해 쥐를 소탕하는 것과 전염병을 소탕하는 것의 인과관계는 불분명하다. 소설 속 전염병 사회는 전염병과 쥐의 느슨한 관계를 내비친다. 전염병이 잦아드는 것과 쥐를 없애는 일은 영영 만나지 않는 평행선처럼 소설의 끝을 향해 나란히 뻗어 나간다.
    출판사에서 『재와 빨강』이라는 제목을 추천하기 전, 작가가 붙인 가제는 '생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였다.2
그렇다면 '생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라는 제목은 소설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으로서, 원심력과 구심력의 중심으로서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3 쥐는, 있다면 없애야 하고 없다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해야 하는 혐오와 기피의 대상으로 표상되곤 한다. 이러한 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건 과연 무슨 뜻일까. 쥐와 형편이 다르지 않은 인간은, 오염과 전염병이 차단된 생활공간을 영위하는 인간 세상의 이면, 오염과 전염병에 부대끼는 한데 한 귀퉁이에서 연명한다. 이들은 더위와 추위에 노출된 채 상한 음식을 삼키며 상한 몸으로 연명하는 부랑자로서 번성한다. 쥐의 질긴 생명력만큼 질긴 생존 본능 덕분에 인간은 쉽게 소탕되지 않는다.4 그들은 죽이고 죽는 세상에서 죽임을 피해 소탕되지 않고 살아남는 쥐처럼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이런 연명은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작가는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앞뒤에 괄호를 친 아름다움이 전염병에 포위된 도시를 뒤덮은 소독약 안개처럼, 감각을 타고 되살아나는 섬뜩한 기억처럼 생존자의 주위를 맴돈다.
    생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인간이 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살해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인간은 쥐를 없애야 한다는 확고한 목표와 의지를 갖고 쥐약, 덫, 몽둥이 등을 써서 쥐를 잡아 죽인다. 이와 달리 쥐는 인간이 쓰는 것과 같은 도구를 써서 인간을 직접 잡을 수도 죽일 수도 없고, 쥐가 인간 제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염병을 옮기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즉 인간은 쥐를 쥐 잡듯 죽일 수 있지만 쥐는 인간을 쥐 잡듯 죽일 수 없다.
    모든 전염병이 그렇듯 병인은 하나가 아니다. 페스트균은 쥐,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는 원숭이, 에볼라 바이러스는 박쥐,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천산갑을 매개로 인간에게 감염된다고 알려졌지만, 병인은 비인간 동물 매개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은 이미 잘 알려진 의학적 사실이다. 쥐와 원숭이와 박쥐와 천산갑이 인간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는 배경은 인간 주도로 오염되고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다. 『재와 빨강』의 전염병도 소탕되어야 할 특정 병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병인과 느슨한 인과관계를 갖는다. 소탕 주체로서 소탕 대상을 찾는 인간이 전염병의 원인을 쥐에게서 찾는 쉬운 길을 택하고, 이를 위해 애꿎은 쥐에게 전염병의 단골 원인이라는 오명이자 누명을 씌워 전염병이 돌 때마다 쥐를 병인으로 오해하는 관습을 만들었을 뿐이다. 신종 전염병의 발병 원인을 밝히지 못해 두려움에 떨며, 이 두려움을 떨쳐내고 다른 발병 원인을 밝히는 데 드는 수고를 덜고자 손쉬운 표적 소환을 답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혹시 인간에게 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측한 상상을 흩트리고 책임의 여지를 감추려는 것이다.

   2  [커버 스토리] 편혜영 “내가 계속해서 쓸 수 있는 소설은 뭘까?”, 채널예스, 2017.03.03.(게재연월일), http://ch.yes24.com/Article/View/32879.
   3  작가의 가제는 ‘생쥐’를 특정하지만, 필자는 생쥐가 포함되는 쥐를 고려한다. 이 가제가 일본 록밴드 The Blue Hearts의 노래 ‘リンダリンダリンダ’(린다린다린다) 의 가사 “ドブネズミみたいに美しくなりたい”(생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에서 착안한 점(위의 기사 참고), 소설에서 줄곧 언급되는 쥐가 생쥐에 한정되지 않는 쥐인 점을 감안하면 생쥐를 쥐로 확대 해석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4  편혜영, 『재와 빨강』, 창비, 2010, 100-117쪽의 내용 참고.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하는 경우 해당 쪽수를 본문에 직접 표기한다.

 

    3.
    '그'5는 파견근무 발령을 받고 모국에서 외국인 C국으로 이주한다. C국에서의 근무 기간이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그'는 잊고 싶고 등지고 싶은 일이 많은 모국을 떠나 C국에서 시작하게 될 새 삶을 기대한다.
    '그'는 출국 전날 밤 자신의 집에서 그가 기르던 개, 전처와 함께 살 때부터 길러 온 개와 전처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미 C국에 있는 '그'는 이 소식을 학교 동창이자 전처의 두 번째 남편인 유진으로부터 전해 듣고 깜짝 놀란다. 출국 전날 밤 만취한 '그'는 무슨 일을 벌인 걸까.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는 이미 외국으로 와버렸고 도망자 신세다. 낯선 환경에서 홀로 기억을 더듬는 '그'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독자에겐 이 모든 의문이 물음표로만 남는다. 소설은 자욱한 안개가 서서히 걷혀 앞이 보이기 시작하듯,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던 ‘그’가 서서히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을 쫓는다. 따라서 소설의 시작부터 중간을 넘어서도록 이 살해 사건이 '그'가 저지른 범죄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그’도 독자도 ‘그’가 저지른 짓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간직한 채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의 손바닥에 남은 멍 자국과 손에 조금만 힘을 줘도 욱신거리는 통증은 ‘그’가 개와 전처를 살해했으리라는 추측에 힘을 싣는다.
    전염병이 창궐한 제4구의 거리와 대기는 온통 소독약에 젖어 있다. 소독약 살포 차량이 수시로 분사하는 소독약은 길 위에 하얗게 쌓이고 공중을 안개처럼 부유한다. 소독약은 방치된 쓰레기 더미에도 하얗게 떨어져 내린다. 소독약은 전염병 바이러스도, 쓰레기 더미에서 발생하는 오염도 소독하지 못한다. 그저 걷히지 않는 안개처럼 눈앞의 현실을 가릴 뿐이다. ‘그’는 출국 전날 밤의 일을 기억해 내지 못한 채 용의자 신분이 되어, 본사에서 제공한 숙소를 도망쳐 나온다. 경찰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는 동안, 공원 벤치를 제 집 삼고 쓰레기 더미에서 구한 상한 음식으로 연명하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전처를 죽이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는 출국 전날 참석한 동기 모임에서 유진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전처와 유진이 최근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어쩌다 보니 유진과 단둘이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이튿날 ‘그’는 출국했다. C국에 도착해 경황없이 며칠을 보내고 나서 ‘그’는 문득 모국의 집에 두고 온 개를 떠올리고, 개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할 만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한데 ‘그’는 숙소에 도착한 날 트렁크를 통째로 잃어버렸고, 지인의 연락처 목록이 저장된 휴대전화는 그 안에 있다. 다행히 유진이 다니는 회사 이름을 알고 있어서 전화번호 안내센터와 유진이 다니는 회사 인사과를 거쳐 어렵게 유진과 연락이 닿았다. 그런데 ‘그’를 기다린 건 청천벽력과도 같은, 끔찍한 소식이다. ‘그’의 집에서 전처와 개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참혹하게 찔리고 뭉개진 상태로.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정황상 ‘그’는 유진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와 전처에게 연락했고, 집으로 온 전처와 전처에게서 빼앗다시피 해 기르던 개를 함께 죽인 것으로 보인다.
    C국에서의 생존에 익숙해지며 차츰 선명해지는 과거의 기억은 ‘그’로 하여금 내가 전처를 죽였다고 자인(自認)하게 만든다. C국으로 입국할 때부터 언제 생겼는지 모를 멍 자국과 손목부터 손 전체에 번진 통증이 예사롭지 않았고, 숙소에 비치된 부엌칼이든 ‘그’가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항공사 마크가 찍힌 칼이든 칼을 손에 쥘 때마다 ‘그’를 엄습하는 섬뜩함이 예사롭지 않고, ‘그’가 한동안 전처를 죽이는 꿈에 시달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이 예사롭지 않은, 몸에 밴 감각과 감정의 상기가 ‘그’를 자신이 전처를 죽였다는 확신으로 이끈다.
    소설 전체에 걸쳐 ‘그’가 자신이 전처를 죽였다는 것을 실감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천천히 진행된다. 소설은 살해 현장에서 떨어져 나온, 자신의 집과 모국으로부터 단절된 것은 물론 자신의 과거와 예정된 현재에서 벗어난 ‘그’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전처, 개, 유진 등 여러 인물의 시점을 배제하고 오직 ‘그’의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는 것은 소설이 사건의 객관적 사실보다 사건의 주관적 경험에 착목함을 방증한다. 따라서 ‘그’가 전처의 살해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일임을 확신한다 해도 독자는 ‘그’의 확신을 재판 결과처럼 받아들이고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짓는 데 동의할 수 없다. 소설은 ‘그’가 전처의 살해자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은 ‘그’를 움직인 두려움이 현실에서 살해와 같은 방식으로 실현되는 가시적 결과보다 ‘그’가 불러내는 기억 또는 ‘그’를 찾아오는 기억에서 일깨워지고 때론 꿈속에서 구현되는 암시적 정황에 착목한다.

   5  소설에서는 ‘그’를 언급할 때 작은따옴표를 쓰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인칭대명사 그와 소설 속 인물 그를 구분하기 위해 후자에 작은따옴표를 붙여 ‘그’라고 표기한다.

 

    4.
    ‘그’의 폭력성은 크게 두 가지 성격을 띤다. 하나는 마음의 허기와 뱃속 허기가 숨통을 죄는 환경에서 쥐든 인간이든 생존 본능만 남은 개체가 느끼는 두려움과 이 두려움에서 일어나는 폭력성. 다른 하나는 '그'가 애증의 대상인 전처에게 되돌린 자기혐오의 폭력성. 둘 다 나를 두렵게 하는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다는, 나의 절박한 생존 본능에 기인한다. 그러나 전자의 폭력성이 나의 생존이 절박한 내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남의 생존을 위협하는 생존 본능의 외향성으로 나타난다면, 후자의 폭력성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일 수 있는 자신의 폭력성을 자각하는 내향성을 드러낸다. ‘그’가 전처를 죽인 것이 맞는다면, ‘그’가 전처를 대하는 – 전처라는 거울을 통해 반사되는 –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자신이 아니라 전처에게 행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처와 함께 사는 동안 전처와 소원해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를 쓰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녀에게 다가가려 할수록 멀어지고 어긋나는 관계에 ‘그’는 분노하고, 표출된 분노는 전처를 공격한 후 후회와 절망을 거쳐 ‘그’에게로 되돌아와 증오의 탈을 쓴 혐오로 남았다.
    소설은 전염병이 출몰한 사회의 숨 가쁜 정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 나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 위협당한다고 여기는 – 데서 오는 본능적인 두려움과 이 두려움에 맞선 폭력성을 매개하는 매체로서 전염병에 착안한다. 작가가 3인칭 시점을 취해 오직 ‘그’의 시선으로 서사를 전개하는 것, 다시 말해 작가가 쫓는 ‘그’의 시선이 유일한 목격자로서 상황을 기술하는 것 또한 소설의 주제는 전염병이라는 덫에 걸린 사회라기보다 상존하는 전염병처럼 고질적인 절망의 주체임을 암시한다.
    소설 속 ‘그’의 폭력 서사는 ‘그’가 상사의 집들이 자리에서 가방을 던져 쥐를 잡는 데서 시작해 모국이 아닌 외국에서 죽고 죽임이 일상적인 생존에 길들여지는 결말에 이른다. ‘그’가 전처의 죽음을 알게 되고, 자신이 전처를 살해한 용의자임을 알게 되며 가속화하는 위기는 외국에서 방문 방역원으로서 살아남아야 하는 ‘그’가 근무차 찾아간 가정집 주인여자를 해치는 절정에 이르며 일단락 지어진다.6 ‘그’가 모국에서도 C국에서도 쥐 잡는 일에 종사하는 것은 오직 ‘그’만이 휘두르는 폭력이 아니다(‘그’는 모국에서 방역업체의 약품개발원으로 일했고, 쥐약을 다뤘다). 쥐가 소탕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 ‘그’는 쥐를 소탕하는 최전선에 섰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가 전처를 죽이고 주인여자를 칼로 찌른 것은 ‘그’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적(私的)으로 휘두른 폭력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는 유진과의 술자리에서 전처가 자신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지웠다는 얘기를 듣는다. 전처에 대한 ‘그’의 배신감이, 그리고 이 배신감이 도화선이 되어 불붙은 전처에 대한 애증이 오랫동안 ‘그’를 사로잡은 자기혐오의 한계점을 넘어서며 전처를 살해하게 만든 결정적 동기라면, 이 폭력은 쥐를 소탕하기 위해 일삼는 폭력과도, 노숙자들이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감염자로 의심되는 노숙자를 포박해 쓰레기 소각장에 버리는 폭력과도 다르다. 내가 나를 혐오하는 고통이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한계에 도달했을 때, 거울 속 남에게 혐오를 증오로 바꿔 고통을 주는 것. 이러한 폭력은 오랫동안 굶주린 이들이 눈앞의 먹이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며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의 소산은 아니다. 한편 ‘그’가 주인여자의 목에 칼을 들이댄 동력은 나의 속임수를 알아챈 그녀로 인해 방문 방역원으로서의 삶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쥐를 잡거나 감염된 노숙자를 제거하도록 이끄는 동인(動因)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일 수 있고 죽여야 한다는 것. 상대가 한때 친밀했던 전처든 쥐잡이를 의뢰한 주인여자든 관계없이 누구든 죽일 수 있고 죽여야 한다는 것. ‘그’의 폭력성은 폭력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나의 생존이라는 유일한 목표만을 쫓는다는 점에서 일관된 한편 폭력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폭력의 동인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공적(公的)인 동시에 사적이다.
    ‘그’의 생존 본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게다가 이러한 살해 동력은 왜 굳이 여성에게 작동하는가. ‘그’가 두 명의 여성을 해치고도 살아남은 설정은 남성 가해자의 태연한 삶과 여성 피해자의 당혹스러운 죽음을 부각하며 가해자의 성별과 피해자의 성별을 주목하게 한다. 소설이 ‘그’라는 남성의 시선을 따라가기에 여성인 전처와 갈등을 빚고, 이 갈등을 상기하는 계기 또한 다른 여성과의 갈등이라는 소설의 전개 논리는 개연적이다. 그러나 이 개연성을 겉도는 의문을 방치할 순 없다. ‘그’가 자신에게 위협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의 생존을 억압하는 것은 본능적이라면 본능적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본능을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능을 따르지 않는다. 이러한 책임의 부재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두 명의 여성을 해쳤고, 이에 마땅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어째서 그는 비루하게나마 살아남았나. 의혹의 맥락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가 전처 살해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데, ‘그’는 용의자로서 취조를 받는 절차를 밟지도 않고, 따라서 가해자임이 입증될 경우 살해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당위로부터 또한 벗어나 있다. ‘그’는 사건 직후 모국에서 외국으로 떠났고, 국제적 수사 공조 망 또한 피했다. 그 대가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노숙자가 되어 구차하게 생존에 매달리는 지독한 비참함을 맛보지만, ‘그’가 타국에서 노숙 생활에서 겪는 고충이 전처를 잔혹하게 죽인 짓을 무마할 수는 없다. 둘째, ‘그’는 주인여자를 해쳤지만 ‘그’ 말고 ‘그’가 저지른 짓을 아는 자, ‘그’의 죄를 묻는 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노숙 생활에서 벗어나 방문 방역원이 되어 가정집과 업소를 찾아 쥐 잡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가 방문한 어느 가정집에서 ‘그’가 그동안 저지른 속임수를 주인여자에게 들켜 그녀의 입을 막고자 우발적으로 칼을 휘두른다. 그녀가 알아챈 속임수는 다음과 같다. 방문 방역원의 보수는 그날그날 잡은 쥐의 수에 따라 책정된다. 방문 방역원이 방문 건당 잡힌 쥐의 꼬리를 잘라 의뢰인에게 보여주면 그 꼬리 수에 따라 요금이 지불된다, ‘그’는 그날 잡은 쥐의 꼬리에 전날 잡은 쥐의 꼬리를 더해 수를 늘리는 속임수를 썼고, 주인여자는 그것을 쉽게 발견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위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은 물리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남성에게 억압당하기 쉬운 약자의 위치에 있다. 소설 속 현실이 성평등이 요원한 소설 밖 현실을 반영한다면, ‘그’가 남성으로서 남성의 위력에 취약한 여성을 해쳤다는 (소설 속) 사실은 ‘그’의 생존을 더욱 비루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생존 본능을 따라 두 명의 여성을 해쳤고, 이 피해자들은 남성인 ‘그’가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다. ‘그’는 자신의 생존이 위태롭다고 느낄 때, 자신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외부 요인을 찾고,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약한 대상이라면, 그 대상이 쥐든 개든 사람이든 구분 없이 해쳤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 현실에서 남성과 여성 간 위계가 잔존하는 소설 밖 현실을 읽어내지 않는다 해도, 다시 말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을 문제 삼지 않는다 해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명백한 문제다. 이 문제의 답 또한 명백하다. ‘그’가 전처를 죽인 상황은 ‘그’의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고, 그 기억은 소독약 안개가 부유하는 현실처럼 모호하다. 사건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것, 다시 말해 실제 그날 밤 ‘그’와 전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음은 이 사건을 일단락 짓는 유일한 증거가 ‘그’의 집에서 전처가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다는 사실뿐임을 방증한다. 즉 사건의 전모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가 가해자고 전처가 피해자임이 명백하다면 피해자의 처참한 최후가 가해자의 무참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음이 역설적으로 명시된다. 이러한 한편 ‘그’가 주인여자를 해친 상황은 그녀가 무고한 피해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며 그녀의 허망한 죽음을 암시한다.7 ‘그’는 엄연한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 삶을 찾고 일상을 유지한다.
    ‘그’는 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현재에 이르게 한 쥐를 두려워하는 한편 쥐를 쥐 잡듯 죽이는 자신을 두려워한다(228-229). 심지어 ‘그’는 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 한다지만 과연 ‘그’는 ‘그’가 죽인 쥐, ‘그’가 죽인 개, ‘그’가 죽인 전처, ‘그’가 죽인 주인여자와 무리 없이 공존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생존 본능에 충실했고, ‘그’의 생존 본능은 절박했다. 사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고, 살아남기 위해 비루한 생존을 택한 ‘그’의 서사는 ‘그’의 것만이 아니라 그의 것이기도 그녀의 것이기도 하고 나의 것이기도 너의 것이기도 하다고 일반화할 수 있다. 결국 우리 모두 쥐이기도 개이기도 전처이기도 주인여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쥐와 개와 전처와 주인여자를 죽일 수 있는 ‘그’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 우리 모두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고 그 역 또한 성립한다는 식으로 주워섬기며 ‘그’의 행적을 무덤덤하게 보아 넘긴다면, 이는 엄연한 폭력이다.
    이 소설의 가치는 ‘그’가 살해자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대변하는 한 개인에게 잠재하는 본능과 감정, ‘그’의 실존에 주의를 기울일 때 발견된다며, 마치 전염병 감염을 막는 방역복처럼 서사를 방어하는 태연한 가해자와 무방비 상태에서 당혹스러운 피해자의 구도를 문제 삼지 않을 순 없다. ‘그’가 자신의 속임수를 알아챈 주인여자를 위협하고 마침내 칼로 찌른 것은 ‘그’가 자신이 전처를 죽였다는 것을 실감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답과 이어지는 물음들을 제기한다. ‘그’가 전처를 죽였다. ‘그’는 전처를 왜 죽였을까. ‘그’가 출국하기 전날 밤 ‘그’는 전처를 만났는데 전처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느낀 것일까. 그렇다면 전처는 왜 ‘그’를 두렵게 만든 것일까.
    꼬리를 무는 물음을 따라가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이런 자문자답과 맞닥뜨린다. ‘그’는 전처를 죽여야 했을까. 이유를 막론하고, ‘그’가 주인여자를 칼로 찌른 후 맡은 피 냄새로 실감하듯(217-218) ‘그’가 전처를 죽인 것이 맞는다면 그 사실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가 근무차 방문한 가정집에서 주인여자를 칼로 찌른 사건이 ‘그’가 전처를 죽인 사건과 포개진다면, ‘그’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위험인물인 전처를 죽이는 조처를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전처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존 본능에 못 이겨 전처를 죽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유를 막론하고 ‘그’가 그녀들을 죽였다는 사실, 그녀들을 죽이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나의 생존이 절박한 만큼 남의 생존도 절박하다는 진실에 부딪힌다. 진실의 문책에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살기 위해,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순탄치 않은 모국에서의 삶을 벗어나 외국에서 더 나은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C국행을 반겼다. 그러나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C국에 고립되었고, 이름의 모든 글자에 종성이 들어 있어 C국에서는 발음하기 힘든 모국의 이름 대신 몰이라는, ‘그’와 소통했던 유일한 본사 직원의 것이기도 한 C국에서 흔한 이름을 쓰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 과정에서 쥐든 인간이든 남을 죽여 먹고 산다. 가정집과 업소에 출몰하는 쥐를 잡아 그 대가를 받는 일에 종사하며, 자신에게서 이 일마저 빼앗아 갈 수 있는 모든 위험 요소로부터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위험인물을 죽이는 것도 불사한다. 그가 속임수를 쓴 사실을 알아챈 주인여자는 그에게서 그를 먹여 살리는 일을 빼앗을 수 있는 위험 요소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칼로 찔렀다. 그리고 힘없이 늘어진 그녀 앞에서 전처를 떠올린다.
    소설은 ‘그’가 전처와 어떤 관계였는지를 들려주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가 전처와 함께 사는 동안 그녀에게 느낀 것, 전처와 헤어진 후 그녀에게 느낀 것, 전처에 대한 ‘그’의 마음을 되살리고 곱씹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전처를 떠올리고, 전처와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대목에서 ‘그’는 후회하고 각성한다. 이 후회와 각성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기억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 파국에서 목숨을 부지한 건 ‘그’뿐이다. ‘그’는 죽은 전처와 죽은 과거를 마치 집 앞에 방치된 쓰레기처럼 모국에 버리고 도망쳤다. 전처의 목숨을 끊어서라도 살아남겠다는 ‘그’의 생존 본능은 후회하고 각성하는 이성보다, 후회와 각성의 여운인 감정보다 빠르고, 강하다.

   6  이 소설에서 죽고 죽이는 행위 또는 사건은 마치 신체의 관절처럼, 이야기라는 몸의 뼈마디가 되어 툭툭 불거진다. 죽고 죽이는 장면의 묘사는 치밀하고 그 이미지는 선명하지만, 폭력의 실체는 비밀스럽고 모호하다. 소설 속 살해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전통적인 강자와 약자의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편 그 누구도 절대적인 강자 또는 절대적인 약자일 수 없음을 내비친다. 인간 남성인 ‘그’는 쥐, 개와 같은 동물(비인간 동물), 전처, 노숙자, 주인여자 등 다른 인간(인간 동물)을 직접 죽이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가 생존 본능으로 환원되는 ‘그’의 실존은 ‘그’가 타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의 의미를 복잡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는 맥락상 전처와 주인여자를 향한 ‘그’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폭력성과 이에 희생된 피해자에 관한 폭넓은 논의는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7  “그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여자가 바닥에 쿵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여자가 죽는다면 칼에 찔려서라기보다 딱딱한 바닥에 머리를 찧은 충격 때문일 것 같았다. 그는 몸을 구부려 바닥에 쓰러진 여자의 옷자락으로 방역복에 묻은 피를 닦았다. 여자가 죽는다고 해도 사체는 당분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전염병이 돈 후 주민들은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 출근하지 않는 직원은 감염된 것으로 여겨져 자동으로 병가처리되었다.” 『재와 빨강』, 218쪽.

 

    5.
    ‘그’는 전처를 죽이지 않고 C국으로 삶의 무대를 옮길 수 있었을까. 출국 전날 밤 벌어진 일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그’가 동기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유진을 만나 술을 마시고 전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그’는 전처를 살해하는 파국을 맞지 않고, 그 파국의 유일한 생존자로 비루하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순탄하게 C국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킬 수 있는 일로 가정하며 깨닫는 것은 ‘그’는 결국 전처를 죽이거나 이와 다름없는 파국을 맞고, C국에서도 순탄한 삶을 살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8 ‘그’는 전처와 사는 동안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시달렸고 이혼하고 나서도 그 욕망을 못 벗어났다. ‘그’가 전처와 헤어지기 전 ‘그’의 내면은 이미 전처에 대한 애증이 염증처럼 번졌고, 헤어진 후로도 그 염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와 전처는 그녀가 유진과 재혼한 뒤 종종 만났다. ‘그’는 전처에게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집착했다. 거부당했다는 수치심과 이에 대한 반작용과도 같은 집착에 시달리며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이어 갔다. 회사에서는 자신의 파견근무를 탐탁지 않아 하는 동료들의 외면으로 괴로웠다. ‘그’는 외로웠다. 이 외로움을 등지기 위해 ‘그’는 다른 외로움을 택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신종 전염병으로 골머리를 앓는 타지에서의 생존이 그것이다. ‘그’는 낯선 외국어와 원인 모를 전염병, 기간이 확실치 않은 파견근무 조건 등 불안투성이의 삶을 막연히 긍정하며 – 지금보다 나은 삶이리라는 기대를 안고 – 출국일을 기다린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의 생존은 기대했던 순탄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순탄치 못한 것은 물론 모국에서의 일상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비루하다. 더 비루한 생존은 ‘그’가 살아남기 위해 전처의 죽음을 불사한 일말의 대가일 것이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그’는 그동안 냉장고 안에 방치되어 있던 상한 건새우 볶음을 꾸역꾸역 먹는다. 곰팡이가 핀 음식을 먹고 오래 배앓이를 한다. ‘그’는 그렇게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상했다. 어머니의 유품과도 같은, 어머니와 함께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간 그 음식을 먹고 배앓이로 고생하는 게 ‘그’가 어머니를 애도하는 방법이었을까. ‘그’가 전처를 살해하고 C국으로 온 뒤 노숙하며 쓰레기 더미에서 구한 상한 음식으로 연명하는 것은 바로 이 장면과 포개진다. 어린 ‘그’가 어머니의 상한 반찬을 먹고 배앓이를 치르며 죽은 어머니를 애도하듯, 성인이 된 ‘그’는 쓰레기로 내버려진 상한 음식을 먹고 죽은 전처를 애도하는 것일까. 상한 반찬을 먹고 엉덩이가 해질 정도로 설사하는 아픔을 감내하고, 음식쓰레기라도 뒤져 먹을 만한 것을 찾아야 하는 비참함을 견딤으로써 어머니의 죽음을, 전처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을까.
    ‘그’는 불분명한 기억 속에서 자신이 전처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이 전처를 죽인 것이 맞는다는 확신에서 오는 안도감으로 이행한다. 이 ‘기이한’ 안도감(218)은 ‘그’가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확보된다. 모호한 기억이 분명해지며 의문이 풀리자 그의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안도감은 그간 C국에서 허비한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 데 기인한다. 이 안도감은 내가 전처를 죽인 것 같은데 확실치 않아, 죄책감마저 불안에 요동치던 시간이 끝난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할 테다. 그러나 내가 전처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느끼는 안도감은 분명 기이하다. 나의 처지가 쥐와 다를 바 없어서 두렵다가도 나는 쥐를 잡을 수 있는 처지임을 실감할 때, 즉 내가 직접 죽인 쥐를 바라보며 나는 쥐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도 기이하다면 기이하다. 본능을 다스리는 도덕과 법에 기댄 인간성에 비춰 보면, 남의 목숨은 아랑곳없이 내 목숨을 지키는 것만이 삶의 전부이자 유일한 목표일 때 이러한 삶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를 인간이 아닌 – 인간성이 파괴된 –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 윤리적 가치라는 관점 못지않게 중요한 서사의 맥락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소설의 배경이고 ‘그’가 처한 환경이다. ‘그’의 죄를 정당화하자는 게 아니다. 소설은 ‘그’가 벗어나기를 바란 모국에서의 환경과 그가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한 외국에서의 환경이 ‘그’의 생존 본능을 어떻게 사회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유죄 판결을 보류하는 것이 아니라 법 밖에서 비루하게나마 살아남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다.
    종일 거리를 맴도는 소독차에서 수시로 분사되는 소독약이 안개처럼 부유한다. 마치 꿈속처럼 모든 것이 불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사람들은 방진마스크와 방역복으로 무장하고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지금 나와 대화하는 경비원이 지난번에 말을 섞은 경비원인지 식별할 수 없다. “그에게 방역복은 안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거리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지만 여전히 방역복 차림의 사람이 많았다. 방역복을 입었다는 것은 남들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였다. 남들과 같아진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또한 감염되어 일상이 다치는 것 말고는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이었다.”(195) 전염병이 창궐한 곳에서 모든 생존자의 바람은 전염병에 걸리지만 않아도, 전염병에 걸려 죽지만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것일 테다. 방역복으로 무장한 차림새는 이런 바람을 뜻하고, 이렇게 입은 사람들은 모두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생존자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전염병에 걸려 죽을 수 없다는 일념에 매달리는 것으로 삶을 대체했다. 어쩌면 ‘그’가 외국으로 이주하며 기대한 삶의 순탄함은 필사적인 생존이 수반하는 안도감을 뜻하는 것인지 모른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삶에서는 내가 누군지,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누군지 식별할 수 없는 익명성에 묻어가면, 누구나 죽지 않고 살아남기에 매진하는 생존자 일반에 머문다면 나만의 비루함을 잊고 안도할 수 있다.
    방진마스크와 방역복이 전염병 감염을 막기 위한 조치라면, 전염병이 은유하는 사회 병리는 어떤 방역 조치를 필요로 할까. 그것은 몰이 ‘그’를 속이듯이 – 소설 후반부에서 ‘그’가 본사를 찾아가 물어물어 어렵게 만난 직원은 몰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 아는 사이지만 알아보는 사이는 아닌 사이를 유지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아니라는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그 대가로 나의 생존을 번다. 이렇게 나의 정체를 숨김으로써 남들과 같아짐에 안도할 수 있다면 그만일까.
    잊었던 기억이, 잊고 싶은 기억이 돌아와도 필사적인 생존 앞에서 기억의 비루한 냄새는 금방 사라진다. 나의 목숨이 위태롭다. 살기 위해 비겁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을 잊는다. 그렇게 살아남아 나의 생존을 실감하는 가운데 내가 혐오스럽고 수치스러운 짓을 저질렀고 그 비참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비루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을 잊었다가 떠올리기를 거듭하며 살아간다는 것. 이런 삶은 비루함의 원인을 알기도 전에 비루함의 통증에 익숙해지고 비루함에 무덤덤한 면역력을 기르며 연명하는 것일 뿐이다. 나의 생물학적 면역체계를 무너뜨리는 전염병 바이러스든, 정서적 면역력을 앗아가는 사회 병리적 조건이든 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지 않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미안하지만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나를 방어하는 본능과 의지는 남의 희생을 요구한다. 내게 전염병을 옮기는 것, 내게서 일을 빼앗는 – 나를 노숙자로 만들 수 있는 – 것, 나를 외롭게 하는 것,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 요소는 제거되어야 한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지만,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전염병에 걸려 방제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일자리를 잃고 노숙 생활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고 자꾸 엄습해 오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다. 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은 남 대신 살아남은 구차함에 익숙한 면역력으로 상쇄된다.

   8  외국인 C국에 있는 ‘그’는 모국에 있는 유진을 통해 자신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살해 사건을, 모국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전처와 개가 살해당한 채 발견된 사실을 전해 듣는다. 이 살해 사건에 대한 정보는 유진의 전언과 서서히 되살아나는 ‘그’의 기억이 전부다. 독자는 유진이 말한 것과 ‘그’가 기억하는 것을 아무 의심 없이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전처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가정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는 것이나, 종국에는 자신이 전처를 죽였다고 실감하게 되는 장면은 ‘그’가 실제 전처를 죽였든 죽이지 않았든 간에 상관없이 전처를 죽일 수도 있는 ‘그’의 폭력성을 명시한다. 게다가 ‘그’는 전처를 향한 자신의 폭력성을, 그녀를 죽일 수도 있는 폭력성을 자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그’가 전처를 죽였다”는 문장을 사실 명제로 취급하지 않는 한편 실현 가능성이 잠재된 명제로, 상징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6.
    소설 속 현실은 우리의 현실을 비춘다. 우리가 떠올려 보는 ‘그’의 얼굴은 나의 얼굴과, 길에서 마주치는 누군가의 얼굴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독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모습은 꿈속에서 본 누군가의 모습이나 수없이 지나친 수많은 남을 한데 모아 놓은 듯한 인상일 것이다. 신종 전염병이든 계절성 독감이든 전염병이 일상화한 도시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린 채 서로 몸이 닿지 않고 숨이 닿지 않게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벗고 싶지만 벗을 수 없는 절박함을 공유하는 이방인들이다. 절박한 생존 본능은 우리 모두의 공통점이지만 그것은 연대의 불씨가 아니라 그 불씨를 끄는 찬물이다. 지금 우리가 숨 쉬는 위기는 남의 외로움을 들이마시고 나의 외로움을 내쉬며 연명한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은 아름답지 못한 삶의 바닥을 친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엄습해 오는 두려움은 남을, 심지어 너를 위협한다.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8)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은 위험을 경고하고, 끝내 아름답지 못한 삶은 아무 경고 없이 위험에 직면한다. 살아남기 위해 경고를 경계하며 연명하는 삶은 불안하고, 비루함에 무덤덤한 면역력을 기르는 삶은 암울하다. 불안하거나 암울한 생존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어 보이는 삶의 현실에서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을 떠올리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처럼 뜬금없는 생존의 아름다움은 살아남는 것이 아름다울 수 없음을 반향한다. 아름다울 수 없는 삶을 연명할 것인가, 살해할 것인가. 너의 삶을 살해하고 나의 삶을 연명하는 ‘그’는 독자에게 선택의 순간을 경고한다. ■

 

 

 

 

 

 

 

 

 

 

 

한승은
작가소개 / 한승은

학부에서는 철학을, 대학원에서는 예술학을 공부했다. 소설과 영화에서 생태계 내 인간의 위치를 다룬 서사 구조에 관심이 많다.

 

   《문장웹진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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