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문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단편소설]

 

 

세 번째 문

 

 

김동하

 

 

 

    이곳은 번화가의 구석이다. 어둡고 빈집 같은 곳이지만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산다.
    우리는 연일 거리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음들에 둘러싸여 지낸다. 상가에서 나오는 최신가요들이 BGM으로 깔리고 취객들의 고함과 욕망의 언어들이 뒤섞인다. 클럽에서 새나오는 비트가 방바닥을 통해 웅웅 울리고 택시들은 미로 같은 로데오 거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클랙슨을 울려댄다.
    너무 선명해서 가짜 같은 곳이다. 나는 이곳에 안개가 끼는 걸 본 적이 없다. 세상 어디보다도 고요한 시간은 택시들이 골목을 빠져나가야 찾아온다. n과 나는 여기에 산다.

 

    – 이거 한번 차봐. 아빠.
    n이 일러준 곳은 번화가 중심에 있는 이미테이션 골목이었다. 일 년 만에 재회한 n은 다짜고짜 은으로 만든 귀걸이를 내 귀에 갖다 댔다. n은 자신이 만든 액세서리들 중 만족스러운 것들을 내 몸에 걸어 보는 취향이 있었다. 그리고 영 팔리지 않는 것들은 선물로 주기도 했다. n은 액세서리가 잘 만들어져서 만족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기분이 좋을 때 만든 것들에서 만족을 느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내 목에 걸린 조잡한 펜던트를 보며 생색내는 n이 좋았다.
    일 년 전 우리가 헤어지던 날 우리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헤어지고 나서야 헤어진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연락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n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이 번화가에는 없는 안개처럼 사라졌다. 나는 n을 찾지 않았다. 시간만이 우리가 헤어졌음을 인정하게 해주었다.
    n과의 일 년 만의 재회는 약속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n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은 이미테이션 제품들을 파는 번화가의 골목이었다.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n은 어제도 그제도 만났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그녀는 내게 팔찌 하나를 채워 주었다.
    – 종이로 만든 거야.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그리고 오천 원이야.
    그러자 일 년이란 거리감은 사라졌다.
    사실 나는 억울하기도 했고 떨리기도 했다. n을 만나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화를 내야 할지 반겨야 할지 헷갈렸고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어색할 것 같았다. 일 년 만에 만나 일 년 전 일을 운운하며 다투는 건 우스울 것 같았다. 말없이 떠난 건 n이었지만 찾지 않은 건 나였기에 따질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는 건 비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비겁한 쪽을 택했다. n이 떠난 이유를 아는 게 두려웠다. 이유를 듣게 되면 n은 또다시 같은 이유로 사라질 것 같았다.

 

    「우리는 아침이면 똑같이 집을 나서지만 방향이 다르다. 나는 직업학교가 있는 도시의 외곽으로 향하고 n은 번화가의 이미테이션 골목으로 걷는다. 가판대를 등에 메고 걷는 그녀는 납작해 보인다.
    n은 보석세공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싸구려 큐빅을 다룬다. 어쩌면 나도 내 꿈을 팔아 사는 날이 올 거다. 나는 내가 설계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 건축물에 들어가는 벽지나 타일 따위를 파는 상가의 점원이 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 확률은 꽤 절대적이다. 혹은 몰딩 작업을 하거나 페인트칠을 하며 살게 될 거다. 하지만 그렇게만 되어도 다행이다. 내 꿈의 잉여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면 불안하지도 설레지도 않다. 다만 꽤 피로하다.
    재회한 n이 채워 준 팔찌가 족쇄로 여겨지고는 한다. 아니 멈춘 시계 같다. 우리의 시간은 다시 멎었다. 멎어버린 시계를 차고 할 수 있는 일은 섹스뿐이다. 섹스가 끝나면 우울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서로의 몸을 찾는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건 몸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만난 n은 내가 알던 n 같기도 했고 전혀 모르던 사람 같기도 했다. 그녀는 예전보다 밝아진 것도 같았고 오히려 어두워진 것도 같았다.
    우리는 깊은 대화를 피했다. 그런 대화는 불필요했다. 일 년 사이 n의 삶이 이전과 다른 삶이 되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n과 나는 가끔 고양이를 분양받는 일에 대해 의논했다. 가끔은 방범 창살이 쳐진 창문 너머로 호텔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도배를 해보는 게 어떨까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도 이야기에서 머물 뿐이었다.
    우리는 실행하지 못했다. 우리가 실행으로 옮기는 건 섹스 정도였다. 혹은 비슷한 대화의 반복뿐이었다. 다투고 헤어지자 말한 뒤면 둘 중 한 명이 바람을 쐬러 나갔다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다투다 누워 서로의 몸을 더듬다가 등을 돌리고 잤다. 마주 보고 있으면 서로의 숨소리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
    n에게 있어 새로운 일은 그날 판 액세서리 개수가 추가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 만든 액세서리보다는 팔리지 않은 액세서리가 더 많았다. n은 오래도록 팔리지 않은 액세서리들을 해체해 다른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액세서리의 최대 장점으로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다 비슷해 보였다. 차라리 명품 액세서리의 이미테이션을 만드는 편이 나을 것 같았지만 내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n이 은을 녹일 때 나는 연기가 좋았다.   
    n과 가장 많이 하는 데이트는 거리걷기였다. 나는 n과 나란히 걷는 게 좋았다. n과 함께라면 여성속옷가게에 들어가는 것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함께 번화가를 걸을 때면 나는 그녀의 복제인간이 됐다. n의 눈길을 끄는 게 있다면 그 물품은 반드시 나를 거쳐야 했다. 나는 임금의 수라상 옆에서 시음을 하는 상궁이 됐다. n보다 먼저 매니큐어를 바르고 립글로스와 립밤도 발랐다. 허리에 원피스를 대어보고 스커트의 허리 사이즈를 재보기 위해 목에 둘러보기도 했다. n은 탈의실에 붙은 전신거울을 두고도 언제나 내 몸에 먼저 대어보아야 안심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녀의 거울이 됐다. 그녀는 내게서 자신의 팔 길이만큼 떨어져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그때마다 야릇한 기분이 됐는데 싫지는 않았다.   
    내가 두려운 건 매니큐어도, 원피스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 거리를 걷는 게 두려웠다. 혼자일 때의 나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지 못했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죄를 상상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길을 걷다 마주치는 행인들이 있으면 가급적 코스를 바꿨다.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시선을 땅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내 시선은 상대에게 가 닿는 순간 불순한 것으로 바뀌었다.
    n과 동행할 때의 나는 달랐다. 그녀와 함께일 때의 나는 자기검열 없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은 n으로 인해 면죄부를 받았다. 도리어 나는 그들이 나와 n을 탐욕적으로 보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도취되기도 했다.
    n도 홀로 있는 걸 견디기 어려워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n의 경우 낯선 사람들 틈에 혼자 있는 건 얼마든지 견딘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혼자서 이미테이션 골목에 설 수 있는 게 그 증거다. 오히려 그녀가 두려워하는 부류는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겁을 먹기도 하지만 좋아할까 봐 겁을 먹기도 했다. 그래서 n은 그런 이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니 그녀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묻지 않기에 나는 n과 함께할 수 있는 거니까.
    – 관상용이야.
    n과 처음 사귀기 전 제법 친분이 생겼을 때 들은 말이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포토샵 중급반 남자애를 두고 관상용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하고 물었다. 넌 애완용. 나는 화가 났다. 하다못해 반려용도 아니고.
    우리는 싸울 정도까지 화가 나면 스킨십을 하며 장난을 쳤고 그러다 섹스를 하고는 했다. 우리는 절대 말로 화해하지 않았다. 말로 화해에 성공해 본 적은 없었다. 대신 서로의 몸을 만졌다.
    나는 n과 동거하면서 그녀에게 관상용은 포토샵 중급반의 남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관상용은 남자만이 아니었다. 여자도 있었고 물건도 있었다. 사실 n에게 있어 주변에 있는 것들 대부분은 관상용이었다. n은 원하나 얻지 못할 것들을 관상용이라 부르며 자기 욕망을 파괴했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무언가의 대신인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 그녀 또한 무언가의 대신이 되어 주었다.

 

    「야동을 지웠다. n과 다시 만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자 가장 기쁜 일이다. 이제 티슈에 사정할 일은 사라진 거다. 이미테이션 골목에서 n을 보았을 때 나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n의 각 신체 부분들만 보였다. 그리고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가 변했을까 봐. 나를 더 이상 애완용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봐.
    본능이 사랑보다 앞선다는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사랑이 본능보다 앞선다면 비참해진다. 나는 어쩌면 비참해질 각오가 없어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n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는 건 변하지 않는 스스로 때문에 변하는 관계들뿐이다. 그러나 n과 나는 좀처럼 새로운 관계를 맺지 못하는 타입이기에 변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새로운 게 싫다. 진부한 농담과 익숙한 체위를 원한다. 새로운 경험을 대신할 수 있는 건 반복, 반복뿐이다.」

 

    – 아빠 이름이 뭐였지?
    다시 만난 n은 내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에 안심했다. 그녀가 변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셈이었으니까.
    n은 고유명사들을 잘 잊었다. 특히 사람 이름을 잘 잊었다. 유명 연예인의 이름은 물론이고 가장 즐겨 듣는 노래의 가수 이름조차 잊고는 했다. 심지어 로션이나 형광등, 탁상시계나 키홀더 같은 명사들도 곧잘 잊고는 했다. 때문에 잃는 것도 많았다.
    n을 지켜보다 보면 그녀의 건망증이 잃는 걸 잊고자 생긴 거라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녀가 입에 달고 사는 관상용이라는 것들에 대해 그 이름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대표적인 증거다.
    n은 가끔 다른 남자 이야기를 하면서 내 이름을 그 남자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동명이인인가 하고 물으면 “아 그건 네 이름이었지” 하고 웃어넘겼다. 물론 그런 건 우리의 관계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n이 무언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고 말한 순간부터 시작됐다.
    그녀는 누군가가 아니라 무언가라고 강조했다. 사실 그건 n의 기분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을 미행한다는 무언가를 본 적이 없었다. 미행당할 만한 일에 대해서도 전혀 추측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행당하는 게 분명하다고 반복해서 말할 뿐이었다.
    – 날 못 믿는 거야?
    – 널 못 믿는 게 아니라 네 말을 못 믿는 거지.
    – 말은 원래 믿을 게 못 돼. 아빠는 나를 못 믿는 거야.
    n은 흥분상태였다. 억울함이나 불안감 때문의 흥분이 아니라 쾌감을 느낄 때의 상태와 비슷한 흥분이었다. 그녀는 들떠 있었다.
    – 너무해. 달팽이.
    n은 평상시에는 나를 아빠라고 불렀지만 이따금 달팽이라고 불렀다. 직업학교에서 만나 친해진 뒤로 내게 붙여 준 별명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안경이 망가지는 바람에 예비용 안경을 쓰고 있었다. 예비용 안경의 렌즈는 압축이 되어 있지 않아 두꺼웠다. 때문에 측면에서 보면 안경알을 여러 개 붙여 놓은 것처럼 보였는데 n은 그걸 보는 순간 달팽이를 떠올린 거였다. 행동이 굼뜬 것도 달팽이란 연상에 일조를 했겠지만.
    아무튼 나는 달팽이란 별명이 싫지 않았다. 그 별명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공감을 사지 못했다. 그녀와 나 사이에만 유효한 별명이었기에 우리는 보다 빨리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n은 내 이름을 떠올리지 못할 때는 있지만 별명을 잊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모든 걸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 같았다.
    n이 작업대 서랍에서 안경집을 꺼냈다. 안경집 안에는 예비용 안경이 들어 있었다. n은 기분이 좋을 때면 그 안경을 쓰고 셀카를 찍고는 했다.
    – 이 안경 촌스러워. 하지만 그게 맘에 들어.
    – 넌 시력도 좋잖아. 도수 안 맞는데 자꾸 쓰면 눈 나빠진다니까.
    괜찮아. 그렇게 되면 더 바랄게 없지. 있지. 인간이 지구를 정복하게 된 건 순전히 시력 때문일 거야. 무지개를 쫓아간 소년 이야기 알지? 그 소년은 무지개가 좋아서 쫓은 게 아니야. 붙잡을 수 없어 불안했던 거지. 그래서 난 달팽이가 부러워. 눈이 매우 안 좋잖아.
    금세 셀카놀이가 지겨워진 n이 안경을 안경집에 넣었다. 사실 행동에서 달팽이를 떠올리기 쉬운 쪽은 나보다는 n이었다. n은 대부분의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냈다. 물론 이유 없이 들떠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런 상태인 동안에는 나와 함께 있지 않았다. 그녀는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면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 기간 동안 어디서 무얼 하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매번 풀이 죽은 상태가 되어서야 내게 돌아왔다.   
    – 안경을 쓴다는 건 매우 불편한 일이야.
    – 불편한 게 불안한 것보단 낫잖아.
    –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 나는 시력이 나쁘다면 절대 안경 따위는 쓰지 않을 거야. 선명한 게 싫어.
    나는 n이 이런 말을 할 때면 흘려듣는 편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겪어 보지 못한 상황에 대한 막연한 동경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어린애 같았다. 그러나 내가 고개만 끄덕이면 화제를 바꾸는 n이기에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그녀의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염려스러웠다. 이대로라면 곧 잠적할 것이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n은 예전에 알고 지냈던 남자들 중 한 명을 만나러 갈 것이다. n은 남자 쪽에서 연락을 받지 않는 이상 헤어진 모든 남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금 같은 기분이 유지될 때의 n은 나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는 앞으로 며칠간 헤어진 남자들에 대해 좋았던 순간들만을 떠올릴 테고 그때의 기억들은 그녀로 하여금 그 좋았던 순간의 남자들을 찾아가게 할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시작과 끝은 동일한 의미였다. 시작된 관계가 끝날까 불안해 성급히 끝을 냈고 끝난 관계가 영원한 끝일까 두려워 다시 만났다. 그러니 내게는 그녀를 제지할 명분이 없었다. 나 또한 그런 남자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돌아온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건축은 그 공간에 사는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담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건축물이 올라가는 장소다. 더 중요한 건 견적이다. 라이프스타일은 그 사람의 견적에 비례하다. 생활과 삶이란 단어는 분리됐다. 희망과 기대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사실들이 떠올라 설계도면을 그릴 수 없다. 작은 평수를 큰 평수처럼 느껴지게 하는 설계란 비효율적이다. 나라면 자기암시를 거는 쪽을 택하겠다. 이 집은 넓다, 이 집은 넓다. 그 편이 단가가 들지 않는다. 내 집을 짓고 싶다. 열 평짜리 내 방을 갖고 싶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n과 섹스를 할 때 나는 바닥을 보고 n은 천장을 본다. 내가 천장을 보고 n이 바닥을 볼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렇게 보이는 천장과 바닥은 벽처럼 보인다.
    우리는 섹스를 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보기도 한다. 나는 n의 얼굴에서 희미한 테두리를 이루고 있는 솜털을 보는 게 좋다. 희미한 테두리는 n을 이곳에는 없는 안개처럼 비현실적으로 바꿔 놓는다. 그녀는 관계 중에 내 코털이 삐져나왔음을 지적한 적도 있다. 지적하며 n이 조금 웃었으나 나는 웃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도 웃기를 포기했다. 섹스를 할 때는 웃어서는 안 된다. 쾌락과 웃음은 분명 다른 영역이고 우리는 그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함께 지내지만 서로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그건 끝이다. 누군가가 보기에 우리는 웃기는 녀석들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웃어서는 안 된다.」

 

    n과 내가 사는 방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출입문과 방범 창살이 쳐진 창문. 그리고 세 번째 문. 세 번째 문은 봉인되어 있다. 도배지에 감춰져 있는 옆방과 통하는 문. 그러나 그 문은 지금 벽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 세 번째 문은 이 집의 2층이 둘로 분리되기 전의 흔적이었다. 집주인은 문으로 연결되던 방을 벽으로 막아 두 개로 나누고 세를 낮췄다. 그 대신 두 가구의 세를 받을 작정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낮아진 세를 한 집에서밖에 못 받게 됐다.
    벽지에 가려진 이 문 너머의 방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번화가라는 곳은 입점은 많아도 입주가 많은 곳은 아니다. 더군다나 번화가의 구석은 입점도 입주도 애매한 곳이다. n과 나는 비어 있는 옆방을 제법 유용하게 사용했다. 우리는 관계를 가질 때면 비어 있는 옆방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가정을 설정하고는 했다. 그렇게 가정하고 나면 우리는 조용한 섹스를 해야 했다. 그건 n과 나를 흥분시키는 일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상상해 낸 금기를 깨트리며 신음을 삼켰다.
    창문은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바깥을 구경할 때, 그리고 비둘기 밥을 줄 때 사용했다. 나는 창틀에 비둘기가 먹을 밥알을 놓아두다 호텔에 입장하는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을 발견했다. 그들 중 몇은 커다란 백을 들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말하자 n도 내 얼굴 옆으로 자신의 얼굴을 밀어 넣었다. 창문이 좁아서 우리는 번갈아가며 보아야 했다. 나는 우리가 두 마리의 고양이처럼 여겨졌다. 우리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서로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우리는 마지막 선수가 호텔 안으로 사라지도록 그 상태로 있었다. 생각해 보니 호텔 안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내년엔 너와 호텔에서 할 거야.
    – 호텔?
    – 응. 치울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어질러 놓고 나오는 거지.
    – 호텔도 좋지만 그전에 이 방부터 어떻게 좀 해보는 게 어때. 기름 떨어졌나 봐. 추워.
    – 아씨. 보일러 몇 번 틀지도 않았는데.
    돌아보니 보일러 점검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요즘도 기름보일러는 있다.
    주유소에 다녀와야 했지만 나는 여전히 호텔을 바라보며 버텼다. 야구선수들이 사라진 자리에 야구선수 차림을 한 나를 세워 놓고 바라봤다.
    – 투수가 돼보고 싶었는데.
    – 그럼 난 치어리더.
    – 에이. 배트걸이 낫지.
    – 무슨 차인데?
    – 그냥 치어리더보다는 배트걸이 투수랑 어울리는 것 같아서.
    – 잠깐만. 다시 나왔는데?"
    – 뭐가?
    – 12번. 그리고 9번.
    야구선수 두 명이 호텔 로비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둘은 호텔 앞의 정원에서 마주섰다. 한 명은 12번이지만 다른 한 명은 우리 쪽과 정면이어서 등 번호를 볼 수 없었다. n이 제대로 봤다면 9번일 것이다.
    둘은 다투는 것처럼 보였다. 12번이 가슴팍을 내밀고 손으로 옆구리를 짚었다. n의 말대로라면 9번일 선수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러자 12번이 야구 모자에 분노를 담아 날렸다. 야구 모자는 하필 정원의 사철나무 우듬지에 걸렸다. 12번의 의도와는 조금 빗나간 방향 같았다.
    – 제구력이 꽝인데.
    내 말에 n이 킥킥거렸다. 12번이 우듬지에 걸린 야구 모자를 바라보며 “에이 씨발” 하고 소리쳤다. 야구 모자는 12번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교차하는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12번의 시선을 받은 나는 움찔했으나 n은 눈치 없이 계속 킥킥거렸다.
    덕분에 충돌 직전이던 12번과 9번이 머쓱해했다. “병신이냐?” 9번이 12번을 향해 말하더니 9번 앞에 쪼그려 앉았다. 9번이 다시 한 번 욕설을 내뱉으며 12번의 목에 걸터앉았다. 9번은 12번을 목마 태운 채로 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나 12번이 우듬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9번이 기우뚱하더니 목마가 무너졌다. 둘은 위치를 바꿔 다시 한 번 목마를 만들었지만 손이 야구 모자에 미치지 못했다. 목마를 해체한 둘은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른 선수 한 명이 나와 호통을 치고 나서야 둘은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키득거리며 n의 옆구리를 간지럼 태웠다. n이 내 손등을 찰싹 때렸다.
    – 잠깐만. 저 야구 모자 갖고 싶어졌어.
    – 모자? 뭐 하게?
    – 몰라. 갖고 나서 생각하지 뭐.
    우리는 외출 준비를 했다. 야구 모자는 둘째치고 경유를 받아와야 했다.
    이곳의 거리를 나서기 위한 복장은 간편하면서도 자연스러워 보여야 한다. 골목을 벗어나면 약속을 만들고 약속에 나온, 나름 차림새에 신경을 쓴 이들이 태반이므로 우리는 한 블록을 돌기 위한 외출이었지만 차림새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문제는 내 허벅지 옆에서 덜렁거리는 빈 기름통이었다. 그래도 n이 옆에 있어서 괜찮았다.
    양팔을 뻗으면 닿는 골목을 벗어나자 약속을 만들고 약속에 나온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과 먼지 쌓인 가로수들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한 블록을 지나치자 웨딩숍들이 줄지어 있는 블록이 나왔다.
    – 하얀색보다는 저런 색이 나은 것 같아.
    내가 블록의 코너에 있는 웨딩숍을 지나치며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러자 n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 저렇게 큐빅 장식이 많은 건 별로야.
    – 어. 나도 그건 별로야.
    우리는 코너를 돌아 호텔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나는 9번이나 12번이 나타날까 봐 약간 불안했다. 그러나 n은 어쩐지 들떠 보였다. n은 사춘기 때 도벽 버릇이 있었다. 내 생각에 n의 도벽은 n이 겪는 약간의 우울증 때문 같았다. 놀랍게도 n이 십 년 전쯤에 훔친 지우개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n은 그 이유가 어릴 적에도 연필이 아니라 볼펜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뭔가를 잘 잃어버리는 n이 중학교 때 훔친 지우개 따위를 아직까지 갖고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 저걸 어떻게 내리지?   
    야구 모자는 9번과 12번이 번갈아 목마를 태우고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내가 n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자 n은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n은 잠시 뒤 벨보이 한 명과 다시 나타났는데 놀랍게도 벨보이의 어깨에는 접이식 알루미늄 사다리가 걸려 있었다. 벨보이는 친절하게도 직접 사다리에 올라가 야구 모자를 내려 주었다. n은 벨보이에게서 받아든 모자를 쓴 뒤 당당하게 내 손을 잡아끌고 호텔 정원을 벗어났다.
    – 으 짜릿해.
    호텔 구역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 n은 야구 모자를 손에 쥐고 흔들며 캥거루처럼 뛰었다. 나는 뒤통수가 자꾸만 신경 쓰였고 불안했다. 그리고 모자를 흔드는 n이 조금 창피했다. n의 모자를 낚아채 머리에 씌워 주었다. n이 환하게 웃으며 내 볼에 입을 맞췄다. 나는 조금 수치스러운 기분이 됐다.   
    n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홀로 천변을 따라 백여 미터쯤 더 걸어 주유소에 도착했다. 주유소 사무실 문을 열자 아르바이트가 기름통을 받아들었다. 아르바이트는 피곤해 보였지만 친절했다. 대부분의 아르바이트는 피곤하지만 친절하다.
    매번 같은 이만 원어치였음에도 기름통 안의 유면(油面)은 조금씩 낮아졌다. 지갑에서 이만 원을 꺼냈다. 그러자 지갑 안에는 삼천 원이 남았다.
    기름을 채운 아르바이트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사무실에 다녀왔다. 그의 손에는 기름통의 코끼리코 마개가 들려 있었다. 원래 없던 건지 잃어버린 건지 모르지만, 코끼리코 마개가 없었다. 마개를 달아 주는 아르바이트의 얼굴에 작은 보람이 드러났다. 나는 그 표정이 보기 싫어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정확히는 불편한 건지도 모른다. 동질감에 기인한 호의, 나는 그 호의가 불편했다.
    등유가 찬 기름통을 옮기는 일은 힘이 들었다. 단순히 무거워서라기보다는 균형이 맞지 않아서다. 기름통이 자꾸 무릎 옆에 부딪혀 쓰라렸다. 주유소에는 등유를 배달하는 트럭이 있지만 이만 원어치를 배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일러의 연료 탱크에 등유를 붓고 밖으로 노출된 호스를 체크했다. 바닥에서 10센티 정도까지 기름이 올라왔다. 집주인은 보일러가 망가지니까 기름이 바닥이 나기 전에 채워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매번 바닥이 난 뒤에 채웠다. 바닥이 나기 전에 채우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n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이불을 두르고 있었다. 야구 모자는 창틀에 있었다.
    – 걔들이 보면 어쩌려고.
    나는 화들짝 야구 모자를 행거로 옮겼다. n은 여전히 이불을 두르고 있었고 떨고 있었다.
    – 많이 추워? 보일러 틀게.
    – 뭔가 있어.
    – 무슨 소리야.
    나는 보일러 전원을 켜며 물었다.
    – 문 밖에 뭔가 있단 말이야.
    – 나였겠지.
    – 아빠가 오기 전부터 뭔가 있었다니까.
    – 그럴 리 없잖아. 조금 전에 내가 이 문으로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없어.
    – 날 못 믿는 거야? 분명히 들었단 말이야. 아빠가 나타나니까 숨은 거야. 분명 이 근처에 있어.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웅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n이 잽싸게 보일러의 전원을 껐다.
    – 보일러 소리 때문에 안 들리잖아!
    내게는 n이 느끼는 불안을 잠재울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n이 이불을 힘주어 붙들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안아 주려고 했는데 n이 밀쳐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n의 시선은 내가 아닌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 전에 나를 밀쳤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n은 갑자기 이불을 걷어내고 문의 반대편으로 기었다. 그녀는 출입문 반대편에 있는, 옆방과 통하는 문에 덮인 도배지를 뜯기 시작했다.
    – 내가 나가 볼게. 제발 그만 해.
    – 안 돼. 나가지 마.
    n은 행동을 멎고 돌연 나를 쏘아보더니 다시 도배지를 뜯는 일에 집중했다. 나는 그녀의 작업대에서 커터를 찾아 도배지 벗기기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n은 그조차도 가로막았다.
    – 아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감시해. 이건 내가 할 테니까.
    나는 일 년 전처럼 n이 두려워졌다. 헤어지던 날 n은 내게 칼을 겨눴었다. 그녀는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달아날 곳이 사라진 짐승, n의 동공에 비친 나는 동공과 함께 떨고 있었다. 확실한 건 그녀가 나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흥분이 가라앉은 n은 더 이상 나를 만날 기운이 없다고 했다. 나는 무기력했다. 지금도 그때와 달라진 건 없었다. 달라졌다 믿고 싶었으나 자꾸만 일 년 전과 지금의 상황이 겹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출입문 밖이 아니라 그녀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방향이 반대였다.       
    어느 정도 벽지가 벗겨지자 n은 문을 밀었다. 손잡이가 제거된 문은 조금씩 밀리긴 했지만 들썩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문의 반대쪽에도 도배지가 덮씌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힘을 준다면 열리겠지만 이미 한 차례 제지를 당한 나로서는 선뜻 가담할 수 없었다.
n은 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문틈으로 커터 날을 넣어 긋기도 했고 어깨를 문에 부닥치기도 했다. 문은 그때마다 가까스로 밀려났다가도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문은 작은 파도 같았다. n은 도배지 한 장의 척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출입문을 두드렸다. n이 얼어붙듯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떼자 그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노크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나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n은 포기한 듯 양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자 틈 사이로 집주인 아주머니가 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집주인이 뜯어진 벽지를 볼까 봐 문이 열린 틈을 몸으로 막고 잽싸게 밖으로 나섰다.
    – 무슨 일이세요, 아주머니.
    – 왜 이리 시끄러워. 워낙 흉흉한 세상이니 걱정이 돼서 와봤네.
    집주인은 일그러진 표정과는 달리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소음 때문에 짜증이 난 게 아니라 걱정스러워 들른 것임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걱정이 아니라 의심을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 대청소 중이에요. 끝나 갑니다.
    – 코딱지만 한 방에 치울 게 뭐 있다고. 그런 거라면 낮에 해야지. 그리고 월세 밀렸네만.
    – 다음 주까지 낼게요.
    집주인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방 안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고 집주인이 나를 돌아보며 멈칫거리다 다시 내려갔다. 작지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 들어왔을 때 옆방과 통하는 문은 닫혀 있었고 n은 없었다. 끝내 옆방으로 넘어간 걸까. 나는 문으로 다가가 열려고 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 거기 있어. 봐 내 말이 맞잖아. 문 밖에 뭔가 있잖아.
    – 집주인이었어.
    – 거짓말!
    – 진짜야. 비켜 봐. 내가 갈게.
    – 오지 말라니까. 아빠를 믿을 수 없어.
    – 그럼 나가 있을까?
    – 안 돼. 그냥 거기 있어. 지금 있는 자리에, 문 옆에 있어.
    나는 문에 등을 대고 앉았다. 숨을 쉴 때마다 문이 조금씩 밀려났다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숨을 참아 보았다.
    n도 나와 같은 자세로 있었다. 문이 미세하게 밀려났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문고리를 떼어낸 구멍이 있었지만 반대쪽 구멍이 벽지로 막혀 있어 보이지 않았다. n과 나는 문고리 없는 문의 잠금장치가 되어 서로의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의 반은 호텔이 가리고 있었고 나머지 반에 밤하늘이 찼다. 절반의 밤하늘은 다시 방범 창살에 갇혀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는 창문 쪽으로 흐르다 흩어지며 사라졌다. 바닥에 흩어진 도배지 위에 재를 털며 절반의 밤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은 근처의 불빛들에 표백되어 가짓빛이었다. 나는 조금 서러웠고 조금 불안했다. 칼날이 문을 뚫고 들어와 등에 꽂히는 불길한 상상이 이어졌다. 그래서 방범창 밖의 하늘을 보면 그 가짓빛이 서러웠다.
    어쩌면 n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문 밖에는 그게 무엇이든 있었다. 그 무언가가 n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 밖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는 문 안에서만 액세서리를 만들고 애무를 했다. 밖에서는 파는 행위만 이뤄졌다.
    – 아빠, 거기 있어?
    – 응. 여기 있어. 아무데도 안 갈 테니 걱정하지 마.
    n은 내 위치를 파악한 뒤 다시 침묵했다. 신기하게도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n이 옆방에 계속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 밖에 있는 게 n이라면 좋겠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제 그녀의 문 밖에 있는 건 나일 테니까.

 

    「n이 문 밖에 있다고 한 무언가는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이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보다는 그녀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n이 먼 과거로 떠나버린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집이 유적같이 느껴진다. 80-90년대에 유행처럼 지어진 비슷한 구조의 주택들. 건평수를 줄이기 위해 마당을 없앤 대신 층을 높인 집, 외벽을 타고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 달팽이처럼 생긴 집. n은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을 달팽이집이라고 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지고 마는, 겉만 봐서는 단단한 외피를 쓰고 있지만 위장용 껍질에 불과한 집.
    그녀의 아버지는 강인했지만 집 안에서만 강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다정했지만 밖에서만 다정했다. 그녀의 오빠는 그녀를 걸레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녀는 열여섯 살에 집을 나왔다. 미성년인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없었다. 혼자가 된 그녀는 새로운 아빠를 찾아 떠돌았다. 그러다 두 살 많은 새아빠를 찾았다. 먼저 성인이 된 새아빠가 직업학교에 들어가면서 다른 새아빠를 찾아야 했다. 다시 구한 새아빠는 진짜 아빠가 찾아내 데리고 갔다. 그녀는 다시 새아빠를 찾아야 했다. 어떤 새아빠는 그녀를 겁탈하려고 하기도 했다. n은 늘 품고 다니던 커터로 새아빠의 팔을 긋고 달아났다. 그녀는 다시 새아빠를 찾아나서야 했다. 그녀는 새아빠를 찾아야 했고 동시에 새아빠로부터 달아나야 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n이 뒤집어썼던 이불이 보였다. 터진 만두의 만두피 같았다. 이불과 바닥에 흩어진 도배지 조각들이 흩어졌던 간밤의 기억들을 연결해 나갔다.
    – 일어났어?
    대답이 없었다.
    – 거기 있어?
    대답이 없었다. 떠난 걸까. 나는 곧장 일어나지 않고 n이 어디로 갔을지 상상했다. 누구와 만나고 있을지, 무얼 하고 있을지도 떠올려 보려 했다. 그러나 어디도 누구도,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옆방의 벽에도 숨은 문이 있는 상상을 했다. n은 그 문 너머로 사라진 것이다. 그녀의 문은 밖으로 열리지 않았다. 오직 안으로만 열렸다. 그녀는 문을 열고 다시 그 안의 문을 열고 계속해서 안의 문을 열었다. 그 문들 너머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또 다른 문뿐이다.
    비둘기 한 마리가 창틀에 앉아 밥알을 쪼아 먹었다. n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입원실 창틀에 밥알을 뿌려 두고는 했었다. 간호사들은 창틀에 쌓이는 비둘기 똥이 싫어 못 하게 했지만 n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둘기가 징그럽다고 했다. 그러나 비둘기들이 밥알을 먹고 있는 순간에는 괜찮다고 했다. 비둘기들은 밥알이 사라지면 떠났고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됐다. 그러면 그녀는 다음 식사 시간을 기다리며 지루한 시간을 버텼다.

 

    「손목이 간질거린다. 오방색 종이로 만든 팔찌가 끊어졌다. 내게는 그녀가 비둘기다. 징글징글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가 다시 온다면 우리도 이미테이션을 만들어 팔아 보자고 권할지도 모른다. 이곳은 그런 골목이니까. 이따금 누군가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나면 그녀가 방 안에 있다. 방 안의 그녀는 내가 만들어낸 이미테이션이란 사실을 안다. 진짜 그녀는 없으니까. 우리가 헤어지던 날 우리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헤어지고 나서야 헤어진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연락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n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이 번화가에는 없는 안개처럼 사라졌다. 나는 n을 찾지 않았다. 시간만이 우리가 헤어졌음을 인정하게 해주었다.」

 

    n이 떠나고 난 이후 나는 옆방으로 넘어가 보았다. 한때 내가 사는 방처럼 셋방이었을 방은 다락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나는 잡동사니들에 둘러싸여 내 방과 연결된 방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러고 있자면 마주 보는 중인 두 거울 사이에 있는 기분이었다. 무한대의 방들, 점점 작아지는 방들 가운데 있는 상상. 무한한 복제들과 함께 나 또한 복제되어 증식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n의 새아빠들 중 한 명이었다. 문득 끝없이 분열하는 새아빠들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n은 그저 조울증 환자, 혹은 조현병 환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 또한 n을 그런 시선으로 보고는 했다. n이 떠날 걸 알면서도 붙잡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몰랐다. 사실 나는 지쳐 가고 있었다.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n이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눈앞에 있는 건 중년의 사내였다. 사내는 말없이 나를 쳐다만 봤다.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내 뒤편을 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 혹시 우리 n이 여기 있습니까?
    말 한 마디에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n의 진짜 아빠였다. 그는 몹시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 자신을 미행한다던 n의 말은 이 사내를 두고 했던 걸까.   
    – 내 딸과는 무슨 사인가요?
    이어지는 질문에도 나는 답하지 못했다. n이 날 아빠라고 부른 걸 알면 이 사람은 어떤 얼굴을 할까. n의 말대로 밖에서는 점잖은 사람이었다. n에게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그런데도 n이 찾아다니는 새아빠들보다 눈앞의 아빠 곁이 안전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저도 몰라요.
    – 그게 무슨 말이죠?
    사내는 내 대답이 앞서 두 질문 중 어느 것에 대한 건지 헷갈려하는 눈치였다. 내 대답은 두 질문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 모른다고요.
    나는 방문을 닫았다. 잠시 후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행거에 걸린 야구 모자를 쓰고 창밖을 내다봤다. 호텔 정문의 회전문을 지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회전문은 계속해서 돌았으나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n은 떠남으로써 관계를 지속했다. 떠났을 뿐 헤어지지 않았으니까. n이 무엇으로부터 떠나고 있는지, 종착지가 어디일지는 모른다.
    창문에서 돌아서 세 번째 문을 바라봤다. 삼세판이란 말 때문일까. 세 번째란 건 마지막 기회, 혹은 최후의 수를 떠올리게 했다. n은 어디로 간 걸까? 어쩌면 n이 들려준 이야기의 대부분은 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허구이되 거짓은 아닌 이야기들. n에게 세 번째 문은 그 허구의 세계일 수도 있다. 문득 미래의 나를 상상하고 말았다. 앞서 본 사내가 떠올라 흠칫 놀랐다. ■

 

 

 

 

 

 

 

 

 

 

김동하
작가소개 / 김동하

2012년 《광주일보》 신문문예에 단편소설 「녹」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펴낸 소설집으로는 장편소설 『운석사냥꾼』, 『피아노가 울리면』이 있다.

 

   《문장웹진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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