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좀 긁어줘 외 1편

[신작시]

 

 

등 좀 긁어 줘

 

 

황형철

 

 

 

    제 몸이어도 제 손이 닿지 않는 데가 있어

 

    누구라도 쉽게 설 수 없는
    수직의 캄캄절벽

 

    아득히 깊은 극지를 홀연히 바라보다

 

    좀처럼 갈 수 없는 먼 곳까지
    손가락 끝에 체온을 실어 오가는 동안

 

    너조차 잘 모르는 네 모습을
    손톱 아래 새겨 넣고

 

    사는 게 끔찍이도 소란스러울 때
    어떤 여지 같은 게 필요하다 싶을 때

 

    등 좀 긁어 줘, 하는 그 자리에 숨어들고 싶어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본 적 없는 나의 낯섦을 수줍게 내밀며

 

    나도 좀 긁어 줘, 하고만 싶은

 

 

 

 

 

 

 

 

 

 

꼬사리 한 주먹

 

 

 

 

    꼬사리 한 주먹 준다고 했응게 줘야지, 하고
    마루 위에 내민 햇꼬사리

 

    나물은 입에 잘 안 대는 나지만
    잘 마른 꼬사리에 눈이 가는 것은

 

    고사리 끊던 수고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청청한 봄날 며칠을 통째 내어줬기 때문

 

    얼마 안 돼 어쩔 줄 모르겠다는
    세상 제일 따스한 공손 때문

 

    귀처럼 오므린 순(筍)에서
    상냥한 말씀 스르르 풀릴 것 같아서

 

    멍하니 꼬사리를 자꾸 보게 되는 것은
    고사리가 품었던 물기
    당신 눈에 촉촉 맺혀 있어서

 

    우리 서로 이렇게 말라 갈 것이니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시간의 줄기가
    전적(典籍)의 문구처럼 떠올라

 

    누가 고사리 몇 봉지 거저 준대도
    열 배 스무 배 비할 수 없이 무거운
    꼬사리 한 주먹 준다고 했응게 줘야지, 라는 말

 

 

 

 

 

 

 

 

 

 

황형철
작가소개 / 황형철

199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6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람의 겨를』, 『사이도 좋게 딱』을 펴냈다.

 

   《문장웹진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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