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곁을 넓혀 가는 이들의 이야기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서로의 곁을 넓혀 가는 이들의 이야기

진형민, 『곰의 부탁』(문학동네, 2020)

 

강수환

 

 

 

1.
    『곰의 부탁』은 진형민 작가의 첫 청소년소설집이다. 사실 우리에게 그는 동화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진형민은 현실 사회에서 쟁점이 되는 사안들을 동화로 녹여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로 정치, 경제, 윤리 등등, 어린이의 세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키워드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직결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 왔다. 그러한 이유로 누군가는 진형민이 발표한 일련의 동화를 가리켜 “어린이 시민 학교 3부작”이라 부르기도 했다.1)
    무모해 보였던 학생회장 선거에 도전했던 아이들(『기호 3번 안석뽕』), 운동장을 확보하기 위해 야구부와 대결했던 아이들(『소리 질러, 운동장』), 친구의 축구화를 사고자 돈을 벌려 했던 아이들(『우리는 돈 벌러 갑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그들은 “어린이 시민 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청소년으로 자랐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통제하기 어려운 뜨겁고 내밀한 감정 때문에 마음고생 했던 날도 꽤 있었을 것이다(『사랑이 훅!』, 창비, 2018). 그 시절 이들이 체득하고 배운 ‘시민성’과 ‘사랑’의 감각은 과연 청소년이 된 지금의 현실 앞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할까.

   1)  3부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은 『기호 3번 안석뽕』(창비, 2013), 『소리 질러, 운동장』(창비, 2015), 『우리는 돈 벌러 갑니다』(창비, 2016)이다. 박숙경은 앞의 두 작품은 민주주의 제도에 관하여, 마지막 『우리는 돈 벌러 갑니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돈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박숙경, <희망을 찾아서: 2017년 동화·청소년소설 총평>, 《창비어린이》 2017년 겨울호, 71~2쪽.

 

 

2.
    『곰의 부탁』 속 주인공들은 이 세계가 ‘표준’이라고 가정해 온 삶의 형태에서 조금씩 이탈해 있는 존재다. 그들은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고(「곰의 부탁」), 임신중절을 한 언니가 준 콘돔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12시 5분 전」), 생계를 위해 배달 노동을 하거나(「헬멧」, 「그 뒤에 인터뷰」), 성별만을 이유로 폭력 범죄의 표적이 되고(「언니네 집」), 다른 피부색 때문에 이방인으로 취급되며(「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날」), 살기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람부탄」) 위태로운 운명의 청소년들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 특정한 성별, 인종, 국적으로 태어나는 것, 여기에는 그 어떤 특별함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사랑하고 일을 한다. 하지만 왜 유독 그들은 위태로움에 시달려야만 했는가?
    이에 답하기에 앞서, 다음 질문을 우회해 보자. 진형민의 아이들은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가? 먼저 점검해 볼 장소는 ‘학교’다. 언젠가 김민령은 진형민이 “학교를 무척이나 이상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적이 있다. 그의 동화에서 학교는 종종 “원칙이 통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곳일 뿐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이 어울려 긍정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공동체”로서의 배경으로 설정된다.2)
    이는 아마도 “어린이 시민 학교”의 풍경에 관한 묘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을 졸업한 이후, 각자 새로운 학교로 흩어진 진형민의 청소년들에게도 여전히 학교는 이상화된 공간일까.
    글쎄다. 차라리 그 반대가 아닐까. 오히려 그들은 학교 바깥에서만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곰의 부탁」은 ‘나’가 친구인 곰 그리고 양과 함께 겨울 바다로 떠나는 이야기다. 곰과 양은 게이 청소년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곰과 양에 대해 함부로 숙덕이던 아이들과 달리, 두 사람의 비밀을 공식적으로 공유하는 친구이다. 그런 그들에게 학교는 절망적인 공간이다. 그곳에서 곰과 양은 자신의 존재를 감춰야만 했으므로. “다양한 구성원이 어울려 긍정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공동체”로서의 학교는 이곳에 없었다. 다양성을 가진 구성원을 재단하기 위한 숨 막히는 시선과 응시만이 있었을 뿐. 그들이 되도록 학교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나서야 비로소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에서다.
    「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날」의 지용에게도 학교는 전혀 이상적인 장소가 아니다. 국제결혼가정 자녀인 지용은 학교에서 소외를 느낀다. 그것은 단지 몇몇 아이들이 생김새를 이유로 지용을 못살게 굴기 때문만이 아니다. 어느 날 수학 교사가 지용을 향해 “‘구구단을 19단까지 외우는 나라’ 출신이라 역시 다르다”(147쪽)는 말을 칭찬이랍시고 공연히 말한 적이 있다. 비록 지용의 출신은 한국이며 외려 “구구단을 19단까지 외우는 나라”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에게 지용은 철저한 이방인이니까. 자신들과 지용을 다른 존재라며 구별 짓는 시점에서, 이미 그들의 의도가 선한지 악한지 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괜찮으냐는 친구 재희의 물음에 지용은 곰곰이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괜찮지 않았다. 앞으로 더 괜찮지 않을까 봐 날마다 속이 졸아들었다.”(162쪽) 학교는 지용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 그들 사이에 온전히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을 나날이 확인시켜 주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지용이 위로를 얻는 장소 역시 학교 바깥이다. 지용을 다시 한국으로 데려온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다르기에 오히려 “우리 좀 잘 맞는 거 같지 않냐”(154쪽)던 재희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기 시작한다.
    「12시 5분 전」에서 은비와 영찬은 콘돔 때문에 헤어진다. 은비가 지갑에서 콘돔을 흘린 것을 본 영찬이 말도 없이 돌아간 것이 그 이유였다. 영찬의 반응은 여성과 청소년에게 성적으로 정숙하기를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편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는 어떤 당혹감 때문이었다. 실은 영찬도 지갑 속에 콘돔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찬은 그것으로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콘돔은 그저 친구들과 “한바탕 낄낄”(53쪽)거릴 만한 물건, 그래서 “학생이 콘돔을 왜 그냥 사!”(52쪽)라고 다그칠 어머니 몰래 숨겨야 할 물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은비의 콘돔은 달랐다. 여기에는 막 임신중절 수술을 마친 사촌언니 수연의 애틋한 당부가 담겨 있었다.
    영찬의 친구들이 이를 낄낄대며 가벼운 것으로 여기게 된 것도, 수연이 홀로 모든 책임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도, 이는 모두 우리 사회가 청소년의 섹스에 관한 것이라면 일단 감추고 침묵하기를 요구해 온 결과일 테다. 여기서도 학교는 어떤 “긍정적인 해답”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태원의 콘돔 자판기에 적힌 글귀 “누구나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53쪽)로부터, 그들은 반성과 깨달음을 얻는다.
    이 소설집을 통틀어 학교를 이상적인 장소로 여기는 인물은 딱 한 사람이다. 「람부탄」의 세디게. 전쟁을 피해 아프간을 탈출한 세디게는 이란을 거쳐 어렵사리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난민이다. 무엇을 좋아하냐는 오미드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학교가 좋아. 아무도 떠나지 않는 학교.”(111쪽) 분명 위에서 살펴본 학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억압의 공간, 자신을 타자화시키는 배제의 공간,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침묵하기를 요구하는 은폐의 공간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모두 학교를 떠나서야 나름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디게의 말은 정반대다. 그는 학교를, 심지어 아무도 떠나지 않는 학교를 원한다.
    학교는 누군가에게 억압과 제약의 공간이었다. 그런 학교를 세디게는 어째서 간절하게 바란 것일까? 여성, 무슬림, 난민…… 세디게는 그야말로 자신이 서 있는 세계의 질서에 포함되지 못하는 인물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에게는 억압과 제약의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자유는 오직 제약 위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언어가 대표적인 예다. 언어를 통해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문법적 제약에 단단히 결속되어야만 한다. 그 이후에야 자신이 가진 언어의 한계와 제약을 차례차례 극복해 가면서, 우리는 더 넓은 자유에 가닿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디게, 그리고 세디게와 비슷한 운명을 지닌 아이들에게는 학교라는 최소한의 제도적 제약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체류 허가서에 적힌 기간이 만료되는 대로 그들은 생존을 위해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들의 언어와 목소리가 세계 위로 떠오르지 못한 것은, 단지 그들에게 가해지는 제약 때문만이 아니라, 정확히는 제대로 된 제약조차 주어지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세디게에게도 학교는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가 이상화한 학교의 모습이란 현재의 학교가 아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를 세디게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2)  김민령, <리얼리즘 아동문학이 서 있는 자리>, 《창비어린이》 2018년 가을호, 29~31쪽.

 

 

3.
    “원칙이 통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곳일 뿐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이 어울려 긍정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공동체”로서의 학교는 그들에게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미래는 전적으로 학교 바깥에 있는 걸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세디게의 목소리에 조금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무도 떠나지 않는 학교”라는, 너무도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정작 이 세계에 없는 학교의 상을 희구했다. 혹시 이렇게 말해 볼 수는 없을까. 진형민의 인물들은 단순히 학교를 떠나 위로를 구한 것이 아니라고. 어린 시절 체득한 시민성과 사랑의 감각에 근거하여, 학교 바깥에서 그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학교’를, 바꿔 말하자면 “해답을 찾아가는 공동체”를 각자의 방식으로 함께 쌓아올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그들은 왜 이미 존재하는 ‘학교’를 떠나 자기 손으로 직접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했을까. 조금은 이상한 접근법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 답을 모색해 보고 싶다. 『곰의 부탁』에서 진형민의 인물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한다. 바로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거나, 양육의 책임을 지지 않고 부재하거나, 언급되지 않아 존재 여부를 알 수 없거나, 또는 등장하더라도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아버지를 향해 그리움을 표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반대에 가깝다.

 

    “망할 거면 빨리 망했으면 좋겠어.”
    인류 종말 얘기인가 했더니, 피자집 얘기였다.
    “나도 딴 데 가서 돈 받고 알바 좀 하게.”
    아버지가 사장이면 좋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하긴 가족끼리는 돈 안 주고 일을 시켜도 어디 가서 신고도 못 한다. 은주는 자기네 가게가 진짜로 금방 망할 것 같다면서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헬멧」, 84~5쪽)

 

    여기에는 그리움도 애틋함도 없다. 사실 ‘나’는 은주네 피자집에서 다시 배달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배달 대행업체는 분명 벌이 자체는 더 좋았지만, 그날 사정에 따라 수입은 불안정했고, 부당한 일이 벌어져도 자신을 보호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위험했다. 비가 오는 날 배달을 하다 사고를 당해도, 명백히 노동하는 중에 발생한 재해임에도 그것은 단지 개인의 불행 정도로 치부되었다. 그래서였다. ‘나’는 은주네에서 다시 일하고 싶다고, 최저시급만 맞춰 달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은주의 아버지는 배달 대행이라는 발상을, 그러니까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이 시스템이 기발하다며 연이어 칭찬했다. 은주는 그런 아버지가 곧 망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배달 대행업체로 돌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실상 은주의 희망은 진즉에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망했다. 다만 그것을 아직 서로가 모르고 있을 뿐. 위 대화는 ‘가(부)장’이라는 이름으로 득세했던 그들의 존재가 오늘날의 현실에서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는 은주의 아버지가 위험한 조건 위에 놓인 ‘나’의 처지를 파악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무책임한 시스템을 찬탄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가장의 책임”을 운운하던 그들의 시대는 망했다. 그것이 진형민의 인물들이 공통으로 마주하고 있는 세계의 풍경이다.
    물론 아버지가 없다는 그들의 공통점을 새로운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김애란의 한 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3) 그 시기에도 이미 아버지는 없는 존재였다. 문제는 “하지만” 뒤에 덧붙인 내용이다. 아버지는 단지 이 자리에 없을 뿐 “계속 뛰고 계신다”는 것. 그 때문에 이따금 마음 위로 떠오르는 그의 존재를 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비록 우스꽝스러운 형상이기는 하나, 이때의 아버지란 물리적으로는 부재하지만 정신의 차원에서 여전히 배회하는, 그래서 성장하기 위해 어떻게든 극복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진형민의 인물들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조차도 되지 못한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은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지점 자체가 보이지 않는 혼란한 공터 위에 서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왜 유독 진형민의 인물들은 위태로움에 시달려야만 했는가? 이 세계가 그들 소수자에게 가하는 부당한 폭력 때문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새삼스러운 진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새로운 문제는 바로 ‘아버지’가 부재하다는 것, 바꿔 말하자면, 맞서 싸우고 극복함으로써 성장의 발판으로 작용할 상징적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정 기인한다. 마치 학교로부터 제대로 된 제약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세디게의 상황처럼 말이다. 앞에서 인용한 문구를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진형민의 인물들에겐 아버지가 없다. 그들은 계속 뛰고 있기는커녕 그 어디에도 없는 존재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많은 청소년소설에서 등장인물이 이른바 자본주의적 체계의 모순을 체감하는 대표적인 계기는 아르바이트의 과정에서다. 조금이라도 더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고용주, 그리고 을의 위치에서 핍박을 받는 청소년 노동자 사이의 대립적인 구도. 그 속에서 청소년들은 ‘청소년’이면서 ‘노동자’라는 어떤 정체성의 교차로 인해 더욱 다층적인 모순과 좌절을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헬멧」에서 ‘나’는 사실상 누구에게도 고용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분명 노동자이지만 동시에 신분상으로는 개인 사업자다.4) 자신을 착취하는 이가 정확히 누구인지, 누구를 향해 저항하고 맞서 싸워야 하는지, ‘나’는 쉽게 겨냥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조용히 헬멧을 눌러”(86쪽)쓰는 일뿐이다.
    성차별적 구조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우리는 성차별을 생산하는 기제로 가부장제를 지목해 왔다. 그렇다면 가부장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이러한 모순은 과연 해소되었는가? 그럴 리가. 이 시대 가부장이라는 존재는 분명 은주의 바람처럼 망한 듯하다. 출산과 임신중절을 여성 홀로 감내하는 상황(「곰의 부탁」, 「12시 5분 전」)에서 보듯, 소설 속 남성들에게서는 이제 가부장으로서의 일말의 책임의식 같은 것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폭력적 구조는 이처럼 전통적인 가부장의 얼굴과는 다르다.
    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언니네 집」에서 언니가 당한 사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자기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132쪽)들을 향한 젠더 폭력의 정도는 일면 더욱 잔혹해지고 교묘해졌다. 이때 ‘나’는 누구를 향해 싸워야 하나. 남성 일반으로 그 적을 확장하면 될까. 불가능한 답은 아닐 테지만, 적의 범주가 확대되고 추상화될수록 구체적으로 싸우고 저항하는 일도 아울러 힘들어진다.
    극복하고 대항해야 할 상징적 대상을 스스로가 찾아내어 구체화해야 하는 시대의 청소년들. 진형민은 이 세계의 소외된 청소년들의 형상을 그리는 동시에, 저항과 성장의 내러티브조차 온전히 손에 쥐기 어려운 그들의 고립감과 곤란함을 함께 비춘다. 그들이 기존의 학교를 거점으로 “해답을 찾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기보다, 오히려 학교 바깥에서 이를 새롭게 모색하고자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3)  김애란, 「달려라, 아비」,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5쪽.
   4)  참고로 2019년 8월 주로 음식을 배달하는 서울 지역 배달원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음식배달 노동자 실태 조사>에 따르면, 개인 사업자 자격으로 대행업체와 계약한 배달원은 64.0%, 근로자 자격으로 근로계약을 맺은 배달원은 33.3%로 전자의 비율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영재, <음식배달 라이더, 1건당 3천원 벌어 대행업체에 300원 낸다>, 《연합뉴스》, 2019년 11월 26일자.

 

 

4.
    「곰의 부탁」에는 ‘모데나의 연인’에 관한 인상적인 삽화가 등장한다. 이탈리아 모데나 지역에서 손을 잡은 모습으로 죽은 두 사람의 오래된 뼈가 발견된다. 사람들은 그들을 ‘모데나의 연인’이라 불렀다. 어느 날 검사 결과 뼈의 주인이 둘 다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돌연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형제라고, 사촌이라고, 전쟁 때 같이 싸우다 죽은 전사들이라고.”(26쪽)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식 이외의 삶이 의식의 지평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더 나아가, 그런 자신의 편견에 기초하여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한편에서는, 그러한 지평 위에 세워진 거푸집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그들의 삶의 여정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기만 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암울한 현실과 슬픔 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서로의 곁을 함께하는 이들이 든든히 자리하기 때문일 테다.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옆에 있어 주는 것,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함께 울어 주는 것, 그것만이 서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은 변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듯하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각자의 슬픔을 공유하며 공통의 지반을 만들어 가는 것, 그렇게 점점 서로의 곁을 넓혀 가는 것. 아마도 “해답을 찾아가는 공동체”는 오직 그 과정에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강수환
작가소개 / 강수환

아동문학 평론가·문화연구자. 제9회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문장웹진 202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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