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V씨? V씨! 외 1편

[신작시]

 

 

안녕, V씨? V씨!

 

 

이은주

 

 

 

V씨가 오래된 잠에서 깨어났어 뜨거워진 오렌지가 동면을 방해했어 오렌지가 건넨 열쇠는 자물쇠의 암호를 해독하기에 충분했어

 

누구나 V씨를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V씨를 보지 못했어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힘에 가려져 쉽게 무시되어 버렸어

 

V씨는 까망, V 씨는 빨강, V씨는 파랑… V씨는 N1, N2, N4… 치명적인 N씨, 무한히 생식 무한히 증식 속수무책으로 폭주, 은밀한 독은 이기의 동굴에서 발아했어

 

초록을 갉아먹는 날카로운 톱니가 쑥쑥 자라고 있어 초록을 먹어치우는 거대한 입이 몸을 잠식하고 있어 초록을 전소시키는 잘 달궈진 화폐가 검은 재로 시간을 뒤덮고 있어

 

아직도 V씨의 안녕이 궁금하니? 여전히 V씨를 호출한 오렌지를 거머쥔 손을 모르겠니? 그 ‘보이지 않는 손’과 안부를 나눌 준비가 됐니? V씨, V씨? 이제 그만 안녕!

 

 

 

 

 

 

 

 

산해경과 백합

 

 

 

 

오랜만에 하늘이 청명한 날입니다 반갑지 않았던 태풍이 남긴 적절한 위로입니다 장산에 무지개가 떴습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십 년 만에 본 이변풍경입니다 이사 오기 전 시간까지 헤아리면, 글쎄 기억이 감감입니다 무지개, 이 낱말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사진으로 남겨야 할지 맘에 새겨야 할지 주변 공기가 분주해집니다 잠깐이라도 부여잡고 싶어 큰 창문을 힘껏 밀어 활짝 열었습니다 이른 가을바람이 살갗에 닿아 유쾌해집니다 네모난 창으로 닫힌 아파트 숲이 다정해집니다 마고할머니가 무지개로 된 양팔을 양껏 벌린 채 아파트 숲에 청량한 숨을 불어넣어 줍니다 사르르 가볍게 전율합니다 무지개가 가뭇없이 사라지기 전에 눈을 스르르 감았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산해경(山海經)과 백합(百合), 짙은 향기에 몽롱해져 책 속으로 깃듭니다 신화 속, 태곳적으로 스며들기에 충만한,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이은주
작가소개 / 이은주

2000년 《다층》 등단. 시집 『긴 손가락의 자립』.

 

   《문장웹진 2020년 10월호》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