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던 그 날, 아름답던 그 사람들 : 배삼식 『화전가』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아름답던 그날, 아름답던 그 사람들

배삼식 희곡 『화전가』

 

 

박하령

 

 

    「벽속의 요정」, 「삼월의 눈」, 「1945」 등의 희곡을 통해 한국의 굽이진 현대사 속 고단한 삶을 이어 간 범인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배삼식 작가가 3년 만에 신작을 내놨다. 국립극단 창단 70주년 기념 신작의 기반이기도 한 「화전가」가 바로 그 작품이다. 희곡이 완성되기 전부터 공연계의 기대를 한껏 모았던 작품이지만 안타깝게도 역시 코로나19의 여파를 완전히 피해 가지는 못했다. 올해 2월로 공연이 예정됐다가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되고 다시 반년 만인 8월 6일 마침내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어렵게 올랐으나 결국 공연 일정을 다 채우지는 못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19일부터 23일까지의 공연이 다시 취소됐기 때문이다. 희곡이 무대상연을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간 오래도록 공연에 목말라 했던 관객들, 배삼식 작가의 필력을 믿는 관객들이 어려운 시국에도 앞서 공연표를 매진시켰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난 2월 민음사에서 펴낸 희곡 『화전가』가 이 같은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공연을 미처 접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생각지 못했던 기회가 마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희곡이 다시 무대화될 그날까지 텍스트를 이리저리 곱씹으며 나만의 무대를 상상해 볼 시간이 주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공연을 볼 수 있었던 입장에서 약간의 힌트를 남기자면,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연출한 명동예술극장 무대 위 〈화전가〉의 세계는 대체로 희곡에 충실한 무대였다. 인물들의 감정 결을 찬찬히 따라가는 가운데 마치 글자 위에 방점을 찍듯 희곡의 몇 개 장면을 엄선, 극대화해 표현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아마도 코로나 시대 연극을 사랑하는 대표적 방법 중 하나는 희곡 읽기가 아닐까. 공연이 재상연 되기 전에 희곡을 펼쳐 뒤적거리며 과연 연출가가 도드라지게 표현한 장면이 어느 장면이었을지 상상해 보거나, 만약 내가 무대를 만든다면 어떻게 그려낼까 생각해 보는 즐거움을 누리면 어떨까 싶다.

 

모든 삶은 찬란하다

 

    배삼식 작가의 「화전가」는 경상북도 순흥 지방에서 벌어진 어느 화전놀이를 이야기로 풀어낸 「덴동어미 화전가」로부터 모티프를 얻은 작품이다. 조선 후기 작자미상의 작품인 이 장편 서민가사에는 덴동어미(불에 덴 아이의 어머니라는 뜻)의 비극적인 일생이 담겨 있다. 순흥의 어느 마을에 살고 있는 부인들이 비봉산에 올라 여자들만의 화전놀이를 하는 도중 어떤 젊은 과부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자 덴동어미가 자신의 기구한 일생을 말한 후 주어진 운명대로 살자고 다독이며 즐겁게 놀다 가는 것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이 일 년에 하루 집 밖에서 노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됐다고 하는데 이때 화전을 부쳐 먹으며 꽃놀이를 하던 것을 화전놀이라 일컫는다.

 

    「화전가」 역시 「덴동어미 화전가」처럼 경북 내륙의 어느 반촌을 배경으로 한다. 시간적 배경은 1950년 4월 하순(음력 3월경)이다. 일제강점기를 보내고 마침내 해방을 맞았지만 조선의 보통사람들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품 속 권 씨 집안은 일제강점기 시절 간도까지 올라가 독립군을 지원했을 정도로 마땅히 구현되어야 할 정의를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 집안이지만 해방 이후 전 사회적으로 퍼진 극렬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또 한 번의 풍파를 겪는 중이다. 집안의 누군가는 빨갱이라 몰리고 있고, 집안의 가장 웃어른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몇 년째 행방이 묘연하다. ‘닭실할매’ 김 씨가 남편의 생사도 모르는 중 환갑을 맞게 된다는 상황에서 극이 시작된다. 어머니의 환갑을 축하하고자 흉흉한 시국에도 서울에 공부하러 간 막내딸 봉아와 대구로 시집 간 둘째 딸 박실이 등이 모이며 모처럼 집 안이 북적거린다. 여인들만이 함께 모인 자리는 예상외로 시끌벅적하다. 잠시잠깐씩 권 씨 어른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세상사에 시달리다 몸도 마음도 다쳐 먼저 유명을 달리한 큰아들 기준에 대한 이야기,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옥고를 겪고 있는 둘째 아들 기협에 관한 이야기가 조심스레 오가지만 이 집안과 관련한 여성들이 한데 모인 경신야(庚申夜)만큼은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박실이 서울에서 가져온 초콜릿과 커피를 나눠 먹으며 부인들은 모처럼 즐거운 밤 한때를 보낸다. 환갑상 받기를 한사코 거부하던 김 씨도 경신야를 보내며 기왕지사 놀 바에는 아예 집 안에서 번거롭게 일하기보다는 다음날 화전놀이를 가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모든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던 시절 한 집안의 여성들이 모처럼의 작은 일탈을 꿈꾸며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보낸다.

 

    1950년 4월을 살아가고 있는 작품 속 인물들은 이처럼 불안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긍정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 작가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연달아 몰아치던 시대,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대 배경 속 기구한 운명에 처한 여기 이 여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고 각각 개성 있는 캐릭터로 만들어냈다. ‘닭실할매’ 김 씨는 침착하고 의연한 어른의 모습으로, 고모는 순수하고 정 많은 모습으로, 금실이, 박실이, 봉아 등 세 딸은 서로를 위하면서도 때로는 아옹다옹하는 모습으로, 독골할매는 권 씨 집안일을 성실히 돌보는 모습으로 각자 그곳에서 자기의 삶을 이어 간다. 이처럼 한 집안의 다양한 여성 인물들의 삶에 대해 끈기 있게 응시함으로써 배삼식 작가는 그들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녔던 것들이라며 따뜻한 응원이라도 보내는 듯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홍다리댁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설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전가」와 「덴동어미 화전가」 사이 가장 큰 차이점은 아마도 이야기 흐름의 초점이 누구에게 맞춰져 있는가가 아닐까 싶다. 서민가사인 「덴동어미 화전가」의 경우 덴동어미라는 인물의 산전수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치 ‘삶이 힘든 사람은 많겠지만, 여기 이렇게까지 고초를 겪으면서도 삶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니 용기를 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당시 대중들을 상대로 지어진 이야기였던 만큼 덴동어미의 우여곡절에 포인트가 찍혀 있다. 반면 「화전가」는 권 씨 집안의 다양한 계층, 다양한 인물 군상에게 골고루 시선을 보낸다. 다시 말해, 작가는 자신의 삶을 다른 누군가의 삶과 비교함으로써 느끼는 상대적 행복감을 지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대신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기 본분에 충실하려 하는 각자의 모습을 오롯이 드러내고자 하는 데 힘쓴다.

 

    구체적으로 보면 「화전가」 속 홍다리댁은 일단 「덴동어미 화전가」 속 덴동어미와 마찬가지로 남편을 네 번이나 바꾸며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다. 다만 옛 서민가사 속 덴동어미와 달리 홍다리댁은 자기 이야기를 굳이 남들 앞에서 길게 꺼내 보이려 하지는 않는다. 부끄러워서라기보다는 ‘머 심심치는 않게 살았제, 히히’ 하며 실실 웃어넘기는 식이다. 실제로 희곡에서 홍다리댁의 ‘흑역사’는 그저 초반부에 한 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간단히 언급되는 데 그친다. 즉, 홍다리댁은 권 씨 집안 둘째 딸 박실이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저 박실이의 성화에 못 이겨 그간 겪은 일을 자못 덤덤하고 간단명료하게 읊어낼 뿐이다. 배삼식 작가는 홍다리댁이 자신의 삶을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도구로써 내던지게 하는 대신, 삶에 달관한 듯한 자유로운 태도를 온몸에 띠며 타인에게 긍정적 기운을 불어넣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고전에서 모티프를 딴 인물이지만 나름의 주체성을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부여함으로써 동시대 독자의 감수성에 좀 더 걸맞은 매력적인 캐릭터로 거듭나게 한 셈이다.

 

언어의 향연 속으로

 

    「화전가」를 희곡으로 접하길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언어다. 희곡은 글이 아닌 입말을 적은 텍스트다. 「화전가」는 이 같은 희곡의 기본 개념에 매우 충실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는 작가가 꼼꼼하게 수집하고 검증한 경상도 사투리가 가득 넘쳐흐르고 있다. 역사에는 한 줄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여인들의 평범한 삶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생생한 당대 사투리를 적극 활용한 셈이다. 이 세계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머물던 인물들이 역시 주변부 언어로 치부되곤 하는 사투리를 담아내는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희곡에서는 묘한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또한 인물들의 삶은 배삼식이 여러 사료와 기록물들에서 세심하게 길어다 재창조한 걸쭉한 사투리 언어로 인해 한층 활기를 띠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캐릭터별 개성을 살려 인물들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는 역할도 한다. 「화전가」 희곡 내용 중 맛깔 나는 사투리를 살짝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을 골라 아래 소개한다.

 

권 씨   (슬몃 웃고 소쿠리 안의 보리이삭을 뒤적이며) 야물도 않은 보리는 뭐 할라꼬?
독골할매   액씨가 잡숫고 숲다 캐가.
권 씨    시퍼러이, 이거를 어애 먹노?
독골할매   이기 손이 마이 가니더. 이거를 짱두로 수염을 쪼아가주고 챙이(키)다 까불러 뿌고 솥에다가 살살 소금을 뱅 돌래 가매 볶아요. 볶아 가주고 방앗간에 가가주고 한 아홉 번을 찧어야 되니더. 아홉 번을 그라믄 고 새파란 껍질이 벗거져요. 그라믄 그 속을 호박(절구)에 옇고 찧어가 죽 끓이는 게래요.

희곡집 『화전가』 중 일부 발췌

 

    이처럼 「화전가」는 사투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물의 생생함을 더하는 동시에 당대의 소소한 문화까지 아울러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당대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그들의 말을 통해 미시사까지 엿볼 수 있게 하는 셈이다. 또한 입으로 소리 내어 읽을 때 비로소 의미가 명확히 들어오는 사투리 고유의 특성 덕에 자연스레 희곡을 때때로 소리 내어 읽어 가며 연극무대를 머릿속에 상상하게 하는 재미도 독자에게 선사한다.

 

    이 같은 사투리의 향연과 별개로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점은 여기 여성들 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대학 물 좀 먹어 본 봉아의 입을 통해 셰익스피어 소네트 15번, 「세상은 하나의 연극일 뿐」을 전달한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중세에서 현대 영어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시대의 언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작가의 선택은 한국의 1950년대 언어적 환경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다. 희곡의 앞뒤에서 각각 한 번씩 봉아가 직접 이 소네트를 영어로 읊어 내려가는데, 소네트라는 서양 옛 시의 형태는 한국의 옛 가사문학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삶의 덧없음에 대해 애수에 젖어 노래하는 이 소네트의 내용은 희곡 「화전가」 전반을 관통하는 메시지와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소네트 삽입의 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네트는 이 희곡의 앞뒤로 배치돼 있는데, 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는 각각 서로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이는 다름 아닌 1950년 4월 모처럼의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봉아가 고모에게 읊어 주는 소네트와 이후 봉아가 포탄소리 속에서 울부짖듯 홀로 서서 읊는 소네트는 서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독자들은 곧 6·25 전쟁이 닥칠 것을 역사적 사실로 이미 알고 있는 데 반해, 희곡 속 인물들은 뭔가 시국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와 같은 희곡 안팎의 맥락 차이는 독자가 느끼는 애상성을 더욱 짙게 하는 효과를 낸다. 소네트는 짧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이 효과를 증폭시킨다.

 

산다는 것은 결국 마음에 기억을 새기는 일

 

    작가는 희곡 「화전가」를 통해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일상 속 감정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강조한다. 남성들이 부재하는 이 집안에서 여성들이 소소하게 삶을 꾸려 가는 모습을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작은 감정들의 소중함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희곡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삶을 이어 가려 했던 당신들의 모습을, 그때 그 시절 당신들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기억하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는 듯한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삶에 대해 진실한 태도를 보이는 모든 이들에 대한, 애틋한 응원의 노래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희곡 속 이 여성 인물들이 가장 많이 호출해 내는 인물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이는 독립투사를 열성적으로 지원했던 집안의 어른도,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둘째 아들 기협도 아니다. 다름 아닌 죽은 첫째 아들 기준이다. 희곡 속 인물들의 말을 종합하면 기준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집안어른들의 걱정을 샀으며, 1926년에 있었던 한 만세운동 때 아버지 대신 끌려가 고초를 겪은 후엔 마음까지 병든 인물이다. 몸도 마음도 한없이 섬세하고 여리던 기준을 이 집안 여인들은 끊임없이 호출해 내 기억하고 애도하고 있다. 아마도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식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큰 이유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기준이라는 인물 자체가 생전에 품고 있던 어떤 정신적인 지향점에 대해 이 집안의 여성들이 깊이 공감하고 연민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기준의 이와 같은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 중 하나로 종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놋쇠 공출이 횡행하던 일제강점기 끝물 무렵 동네 뒷절에 놓여 있던 종이 원인 모를 화재에 녹아내리고 결국 쇳덩이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기준은 울면서 온몸으로 막아선다. 여린 심성의 소유자인 기준이 이같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던 것은 당시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 종소리가 사람들에게 아마도 말로는 다 못할 위로를 선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희곡 속에서 죽은 기준을 상징하는 것도 다름 아닌 종소리다. 김 씨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딸들이 모두 모이는 날, 김 씨는 바람결에 문득 종소리를 듣는다. 마치 먼저 세상을 등진 기준이 어머니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듯 느껴지는 대목이다. 희곡 속 인물들 중 김 씨 혼자서만 경험하는 이 청각적 환상은 이 희곡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또한 희곡 「화전가」를 통해 작가가 독자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키려 하는 기억은 비단 사람에 대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화전가」에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거의 잊힌 한국의 옛 풍경이 마치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는 ‘고가의 안방, 대청마루 언저리, 고방’ 등 집 안의 곳곳 외에도 ‘우물가, 마을 들이 건너다보이는 동구 정자나무 아래, 정자나무 아래, 들 가운데 자리 잡은 마을 못, 길게 나 있는 못둑길 위,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솔숲 언덕 위 작은 정자, 뒷절 암자터’ 등의 바깥 공간을 이 희곡의 공간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우리에게도 자연과 긴밀하게 연결된 삶의 방식이 존재했으며, 또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넉넉한 품을 지닌 자연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연대하며 살아가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삶의 본질은 어쩌면 기억을 쌓으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작가에게는 「화전가」 희곡 쓰기가 다름 아닌 마음에 기억을 새기는 일이 아니었을까. 여기 이들 여성이 잠시잠깐 즐기는 화전놀이처럼 인생은 비록 허망할 수는 있지만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리하여 모든 인생은 그 자체로 기억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작품의 페이지 사이에서 나지막이 들리는 듯하다.

 

 

 

 

 

 

 

 

 

 

 

 

 

 

 

박하령

참여자 / 김나볏

공연 보고 글 쓰는 활동을 시작한 지 10여 년째. 현실의 고민과 동떨어지지 않는 연극, 글쓰기를 지향한다.

 

 

   《문장웹진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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