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죽음과 어떤 죄책감 : 백온유 『유원』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세 죽음과 어떤 죄책감

백온유, 『유원』(창비, 2020)

 

 

강수환

 

 

    “나는 미안해하며 눈을 떴다.” 백온유의 장편 청소년소설 『유원』의 첫 문장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다음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무사히 돌아온 나를 부둥켜안아 주었다.” 소설을 제대로 읽기 전에 우선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확인해 보는 것은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을 나의 오랜 습관 중 하나다. 최소한의 단서로 소설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짐작해 보려는 것인데, 물론 추측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틀릴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리라는 나름의 방향성을 미리 설정해 두면, 비록 작중 인물들이 방황을 거듭하고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더라도 덜 힘든 마음으로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유원』의 두 문장을 읽고서 나는 안심했다. 아직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미안함을 느끼던 주인공은 어떤 여정을 거쳐 무사히 돌아와 행복한 결말을 맞겠구나, 더구나 그 자리에는 “부둥켜안아” 줄 친구가 있는 모양이구나. 과연 그럴까. 나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주인공이 무사히 돌아오기까지 그 성장의 여정을 동행해 볼 시간이다.

 

 

    책임질 수 없는 죄책감

 

    『유원』은 화재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은 주인공 유원의 성장기를 다룬다. 첫 문장에서 보다시피 그는 미안해하며 눈을 뜬다. 살아남았다는 것,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미안한 것이다. 너무 어린 시절에 벌어진 일이기에 유원에게는 기억이 많이 남지 않은 듯하다. “기사에 나와 있다”(32쪽)거나 “그랬다고 한다”(34쪽)는 표현에서 보듯, 유원은 자신의 기억이 아닌 누군가의 진술에 의지하여 당시의 사건을 술회한다. 그런 유원은 누구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걸까?
    먼저, 유원의 언니 예정. 불이 난 11층 아파트에서,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예정은 침착하게 동생 유원을 젖은 이불에 말아 바깥으로 던져 대피시켰다. 그리고 예정은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는다. 유원이 미안함에 눈을 뜬 저 날은 바로 죽은 예정의 생일이었다. 사고 이후, 유원의 가족과 주변인들은 12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예정의 생일을 기념했다. 올해도 그들은 유원의 집에서 예정을 추도하는 예배 시간을 갖는다.
    죽은 이를 그가 태어난 날에 기억하는 사람들. 그 자리의 누구도 예정이 부활하리라고 믿지는 않겠지만,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예정을 기리는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큼은, 여전히 예정은 그들 사이에 살아 있다. 이 자리에 없음으로써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현존하는 존재. 예정은 죽은 채 여전히 유원 곁에 살아 있는 것이다.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언니에게 유원이 미안함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다음은 아저씨 진석. 아저씨는 11층에서 던져진 유원을 받아 안는다. 그 충격으로 아저씨의 오른쪽 다리뼈는 산산조각이 난다. 화물 트럭 운전을 하던 그는 직장을 잃고 재활에 매진했지만 결국 다리를 회복하는 데 실패한다. 그런 아저씨를 언론은 ‘의인’이라 보도했고 사연을 접한 사람들은 그를 위해 성금을 모으기도 했다. 그 도움으로 치킨 가게를 개업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수시로 잠적하는 등 아저씨는 가게 운영에 불성실했고 집을 나와 가족과도 멀어지게 된 아저씨는, 결국 망가졌다.
    그는 수시로 늦은 밤에 유원의 집을 불쑥 찾아와 숙식을 청하거나 돈을 빌렸다. 망가진 채 유원의 곁을 배회하는 그의 형상은, 분명 예정처럼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예정과 정반대로, 아저씨는 살아 있는 상태로 죽어 있다. 유원은 “아저씨를 망가뜨려 놓은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82쪽)라고 자책한다.
    살아 있는 죽음(예정)과 죽어 있는 삶(진석), 유원은 그 두 죽음 모두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유원이 겪는 마음의 문제다.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유원의 시간은 화재가 벌어졌던 그때 그곳에 붙들린 채 앞으로 흐를 수 없다. 더 나아가기 위해, 유원은 어떻게든 이 죄책감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죄의식은 주체가 그 죄의 책임을 감당할 때에야 해소될 수 있다. 그런데 유원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나. 예정과 아저씨에게 벌어진 결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사후적인 책임을 지는 일 또한 철저히 유원의 능력 바깥에 있다. 무엇보다 유원에게는 죄책감을 가질 만한 잘못이 없다. 그는 단지 살아남았을 뿐이다. 마치 원죄처럼,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죄의식의 교착 속에서, 유원은 살아간다.
    아니, ‘살아간다’는 말이 유원에게 과연 적절한 걸까. 물론 유원은 두 사람의 희생으로 12년 전 사고에서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유원 또한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은 셈이다.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는 유원을 붙잡아 자꾸만 그를 화재가 일어났던 그 시간 위로 붙박는 사람들에 의해서다. 유원을 통해서, 누군가는 죽은 예정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그날 자신의 희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현재의 유원이 아닌 끔찍한 사건을 겪은 과거의 유원으로서 그를 대한다.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이들조차 ‘댓글’로 유원을 붙들었다. 이곳이 유원이 죽은 자리이다. 그들이 바친 희생이, 그리고 그들이 베푼 호의가 의미 있기 위해서, 유원은 그에 걸맞은 ‘생존자’로서의 상으로 고정되어야 했다. 현재의 자신을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유원의 죽음은 ‘삶 없는 삶’에 해당할 것이다.
    살아 있는 죽음, 죽어 있는 삶, 그리고 삶 없는 삶. 이렇듯 소설의 시작점에는 유원을 둘러싼 세 죽음이 나열되어 있다. 우리는 이 소설이 죽음에서 삶으로 향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단지 청소년소설의 문법이 그러하기 때문도, 또는 슬쩍 미리 읽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희망적이었기에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답은 첫 문장에 있다. 유원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보통 죄책감은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했을 때 발생한다. 하지만 앞에서 살폈듯, 유원은 화재 사건에서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의 죄책감은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가. 만약 우리가 유원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정하지 않는다면, 더 자세히는 유원을 삶 없는 삶으로 이끈 이들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계속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의 죄책감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시선은 현재의 유원을 향해 이동해야 한다.

 

“나는 나를 살린 우리 언니가 싫어.
나는 나를 구해 준 아저씨를 증오해.”(126쪽. 이탤릭체는 원문)

 

    그것은 유원이 그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는 내면 깊숙한 비밀이다. 즉, 유원이 느끼는 죄책감은, 마땅히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을 “싫어” 하고 “증오해” 하는 현재적 감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기 때문에?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살고 싶어서, 부연하자면 더 제대로 살고 싶어서가 아닐까.
    현재가 없는, 삶 없는 삶이라는 주어진 운명에 유원은 더 이상 얽매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언니와 아저씨가 여전히 유원의 주변을 배회하는 이상 이는 어려운 일이다. 두 죽음은 모두 유원의 현재를 흡입함으로써 각자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원의 죄책감이 발원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살고 싶어서, 역설적으로 자신을 살게 해준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는 상황.
    해결하기 어려운 곤경 속에서, 유원은 자신을 과거의 시간 아래로 붙드는 현재의 사람들을 피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미래를 응시하곤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유원은 학교 옥상 문 앞에 홀로 앉아 영어 단어를 외운다. “미래의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는 만족감”(17쪽)을 느끼면서. 하지만 현재라는 발판을 비약한 채 미래로 도약하려는 시도는 공허할 따름이다. 바로 그때 사건이 발생한다. 수현을 만난 것이다.

 

 

    죄짓기와 두 세계의 화해

 

    유원과 수현은 옥상 문 앞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수현은 마스터키를 이용해 건물 이곳저곳의 잠겨 있는 옥상을 열고 그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는 아이인데, 마침 우연히 유원과 맞닥뜨린 것이다. 수현은 유원에게 제안한다. “들어올래?”(50쪽) 수현의 비밀 공간 속으로 초대를 받은 유원은 이내 금방 마음을 연다. 유원이 수현에게 호감을 느낀 이유는 여럿 있겠으나, 가장 먼저는 그가 유원의 과거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늘 자신을 과거 화재 사건과 결부하여 대했던 다른 친구들과 사뭇 다른 모습에 유원은 편안함을 느낀다.
    이상한 일이다. 유원을 과거의 시간으로 붙들던 이들과 대화할 때, 그들의 대화는 철저히 과거를 외면하고 있었다. “유원아, 지금 영어, 영어!”(58쪽) “응! 오늘 수업에서 시험 문제 나온대.”(61쪽)와 같이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서만 그들은 이야기했다. 정확히는 현재에 관한 대화라고 보기도 어렵다. 시험 문제로 출제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더 나아가 그 시험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불분명한 ‘현재 없는 미래’에 관해서만 그들은 대화했다.
    하지만 유원은 수현 앞에서 사고 당시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유원이 이를 남에게 자진하여 고백한 것은 처음이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든 과거들을 자연스레 공유하면서, 그들은 함께 발을 딛고 설 공통의 현재를 마련해 갔다. 결국 삶 없는 삶을 넘어서기 위해, 과거로의 정박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유원에게 필요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과거의 시간을 나눠 가질 친구였다. 그렇게 삶 없는 삶이라는, 유원을 사로잡았던 어떤 죽음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다.
    소설이 중반부를 지나면서 한 가지 비밀이 밝혀지는데, 수현이 사실은 유원을 구해 준 아저씨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원이 직접 말해 주기 전까지, 수현이 특별히 유원의 과거에 관해 궁금해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수현 본인 역시도 그날의 사건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수현은 아버지 진석을 통해 유원에 관해 많이 전해 들었다고 했다. 좋은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희생이 가치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유원 때문에 진석은 망가졌다. 어떤 의미에서, 수현은 유원의 처지와 비슷했다. 유원이 현재 없는 미래로 시선을 향할 때, 수현은 미래 없는 현재에 몰두했던 것이다. 당장 어려운 이들을 돕고 불의에 저항하고자 수현은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와 일인시위의 현장으로 향하는 인물이다. 즉, 수현은 거꾸로 선 유원인 셈이다.
    현재 없는 미래, 그리고 미래 없는 현재. 두 상이한 세계가 화해에 이르는 접점은 뜻밖에도 아버지다. 이때 아버지는 물론 진석을 가리킨다. 그는 수현의 생물학적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죽을 뻔한 유원에게 삶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유원의 상징적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에 관한 논의는 자연스레 정신분석학에서 주체 형성을 이야기할 때 쉬이 동원되는 ‘부친 살해’의 은유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은 금지의 체계로서 우리에게 규칙, 선악, 윤리 등의 척도로 작용한다. 그것을 내면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승인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금지의 체계는 결코 모두에게 동일할 수 없고,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다른 기준이 적용되기 마련이다. 마치 어린 시절 유원의 장난을 제지하던 할아버지의 말처럼 말이다. “얘. 너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너는.”(85쪽)
    두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남은 유원에게 유·무언으로 가해진 금지의 압력은 그가 “조심성이 많은 아이로”(같은 곳) 자라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유원은 실수해서는 안 되고, 다쳐서도 안 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예정과 아저씨가 치른 희생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원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실수하지도, 다치지도 않았으며,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죄의식을 느낀다.
    그것은 전술했다시피 ‘아버지’로 대표되는 금지의 체계를 향한 반발심에서 연원한다. 그리고 바로 이 죄의식에서 주체는 형성된다. 위반 없이는 주체도 없다. 가령, 만약 유원이 이러한 금지를 절대적으로 내면화하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죄책감을 덜 느끼는 대신, 자신이 아닌 두 죽음을 위해 “조심성이 많은 아이”가 된 것처럼, 앞으로도 삶 없는 삶이라는 죽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상태를 욕망했다.
    다만, 유원은 이 죄책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없는 미래만을 응시했던 유원에게 현재의 이 죄의식을 책임지기란 불가능했다. 가령, 유원은 아저씨를 향한 부채감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편으로 “사회복지학과와 재활학과”(44쪽)로의 진학을 떠올린다. 그곳으로 진학하면 먼 미래에 아저씨를 도울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것은 당장 대면해야 할 죄책감을 불확실한 미래를 속으로 지연시키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유원은 수현을, 그러니까 미래 없는 현재에 놓여 있는 또 다른 아버지의 딸을 만난 것을 계기로 달라진다. 유원의 집 근처에서, 유원, 수현, 아저씨 세 사람은 조우한다. 어느 날 방송 출연을 제의받은 아저씨가 출연을 주저하는 유원을 직접 설득하려고 불쑥 집을 찾았다가 벌어진 일이다. 주저하는 유원을 대신해 수현은 소리 지른다. “할 말 없다고 했잖아! 나 좀 괴롭히지 마요. 우리 전부 다 그만 괴롭혀!”(172쪽)
    수현은 유원이 대면해야 할 죄의식을 향해 용기를 내어 대신 소리쳐 준 셈이다. 유원은 깨닫는다. 자신을 괴롭히는 이 죄책감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란 아버지의 금지를 위반하는 것, 즉 죄를 직접 저지르는 일뿐이라는 것을. 유원은 수현을 통해 죄의식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용기, 그래서 주체로 거듭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유원이 다시 자신을 찾아온 아저씨 앞에서 이번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한 태도로 그를 거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한편, 아버지와의 관계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수현이 미래 없는 현재에 전념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연이은 실망 때문이었다. 언젠가 유원이 수현을 향해 아저씨가 얼마나 가족들을 그리워했는지를 말했던 날, 수현은 화를 내며 말한다.

 

    “이제 알아. 아빠는 해로운 사람이야. 아빠는 이 세상에 해로워.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빠는 변하지 않을 거야. 포기해야 돼. 나는 아빠랑 다르게 살 거야. 너도 내 노력을 우습게 보지 마.”(184쪽)

 

    즉, 수현은 아버지에게 거듭 실망하지 않기 위해, 혹여나 막연한 희망이라도 품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세계에서 부단히 미래를 삭제해 왔던 것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희망은 종종 기대를 배반하고 더욱더 큰 좌절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반복되는 좌절을 추스를 여유가 없는 수현은 그렇게 희망과 믿음을 포기하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수현 역시 유원을, 다시 바꿔 말하자면 현재 없는 미래의 세계를 사는, 아버지의 또 다른 딸을 만나면서 기존의 단단했던 세계 일부가 깨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수현은 유원을 통하여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11층에서 떨어지는 아기를 본 진석이 자신의 몸이 부서지더라도 즉각 아이를 구하기로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건 아직 오지 않은 앞으로의 시간을 계산하며 행동을 주저하는 대신 지금 당장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한 것이니까. 그리고 바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수현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소설의 끝에서, 수현은 유원과 재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랑 있으면 그래도 아빠를 손톱만큼은 칭찬해 주고 싶어져. 진심이야.”(209쪽) 공동의 아버지를 극복함으로써 유원은 현재를 그리고 수현은 미래를 자신의 세계 속으로 불러들인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 화해를 이룬 자리에서, 유원과 수현은 성장한 것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저 너머로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유원은 앞에서 제시되었던 세 가지 죽음을 차례차례 극복해 간다. 먼저 수현을 만나 자신의 삶에 현재를 불어넣었고, 죽어 있는 삶의 형상으로 자신을 배회했던 ‘아버지’ 진석을 대면하고 오래도록 품어 온 진심을 토로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살아 있는 죽음으로 유원에게 중압감을 불러일으켰던 예정과 화해한다.
    이전까지의 유원은 자신을 통과해 예정을 바라봤던 시선으로부터 혐오와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유원은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에게서 예정의 상이 드리워지는 것을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해준 언니”의 “용기를 닮고”(226쪽) 싶다고 말하면서. 다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무사히 돌아온 나를 부둥켜안아 주었다.” 누구나 예상했다시피 유원이 세 죽음을 극복하고 무사히 착지한 자리에는 수현도 함께 있었다. 부둥켜안은 두 사람에게서, 현재와 미래의 두 세계가 포개어지는 순간을 언뜻 본 것만 같다.
    죄책감으로 시작하여 두 세계의 화해로 마무리되는 소설 『유원』은 정지된 시간에 매인 이들이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단단하지만 무겁지 않은 태도로 그려낸다. 그 시작점은 수현이 건넨 한 마디였다. “들어올래?” 비록 우연한 마주침이었지만, 용기는 때때로 그러한 우연을 필연으로 승화시킨다. 그들은 상대가 매여 있는 자리로 무작정 다가서지도, 반대로 상대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그들의 만남은 닫혀 있었던 옥상 너머로, 아직 열리지 않은 공간 속으로 함께 발을 내딛는 데에서 출발했다.
    잠긴 문을 여는 행동은 그 자체가 규칙을 어기는 일이다. 유원과 수현의 첫 만남은 그 점에서 이미 앞으로 일어날 위반을 예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전히 우리 앞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수많은 문이 있다. 용기를 내라고, 『유원』은 닫힌 문 앞에 멈춰 선 우리를 향해 사려 깊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강수환

참여자 / 강수환

아동문학 평론가·문화연구자. 제9회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문장웹진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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