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소녀, 죽(이)는 소년, 몸을 되찾는 여자들

[문학더하기(+)]

2010 다시-읽기 Re-View
– 《문장웹진》에서 실시한 2010년대 문학 설문 결과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다시’ 읽어봐야 할 작품에 대한 리뷰

 

 

사라지는 소녀, 죽(이)는 소년, 몸을 되찾는 여자들

: 임승유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문학과지성사, 2015)

 

 

김보경

 

 

 

    임승유의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에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성폭력, 모성성 등의 주제가 풍부하게 담겨 있는데, 그런 만큼 이 시집이 출간 당시 충분히 의미화 되지 못한 점은 다소 의아하다. 이에 안지영은 출간 후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시집을 재독하며 이 시집이 “피해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침묵하게 되는지, 그 목소리를 피해자 정체성에 가두지 않고 연대의 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무엇을 경계하고 또 추구해야 하는지”1)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요약한 바 있다. 안지영은 이러한 독해를 통해 이 시집에 불분명하게 재현된 성폭력의 문제를 가시화하고 피해자성이라는 주제로 해석의 시야를 확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독해 과정에서 성차의 문제, 예컨대 가족 관계 내에서 아버지/어머니의 차이나 소년/소녀의 차이 혹은 이들 간의 관계성은 고려되지 않는다. 예컨대 임승유의 시에서 여자와 아이가 가부장적 폭력의 피해자로 나타난다는 분석은 타당하지만, 이들이 다양한 관계망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며 이 시집을 읽을 때, 눈에 띄는 것은 이 시집에서 가족 관계 내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다양한 관계성이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이 시집에서 딸의 위치를 보여주는 시들을 읽어 본다.

   1)  안지영, 「틀어막혔던 입에서-임승유의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계간 모:든시』 11, 2020.3., 96면.

 

    친척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그런 모자 속으로 사라지는 일 모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건 또 모자만 아는 일

– 「모자의 효과」 부분

 

    식구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엄마가 들어오고 오빠가 들어오고
    조카가 밥을 먹고 있는 식탁에서 큰소리를 치면 누가 좋아할까 생각 안 한 건 아니지만

– 「결석」 부분

 

    잇몸을 드러내며 아버지는 웃었다 나는 왜 고함을 쳤다라고 적지 않고 웃었다, 라고 적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나는 조금씩 사라지는 법을 배우고

– 「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부분

 

    임승유의 시집에서 딸들은 “사라지는 일”을 연습한다. 그것은 자신이 겪은 친족 간 성폭력이 야기한 죄책감이나 그것이 드러났을 때의 비난과 몰이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을 가리키기도 하며(「모자의 효과」), 자신이 없는 곳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가족들의 입방아에 함부로 오르내리는 일에 대한 거부 의사를 가리키기도 하고(「결석」), 아버지의 계속되는 폭력에 훼손되어 가는 자아 혹은 그러한 폭력으로부터 덜 상처받기 위한 자기 보호의 기술을 가리키기도 한다(「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이와 같이 가족 관계 내에서 딸들은 ‘사라짐’으로써 생존하는 기술을 터득해 간다.
    임승유의 시집에서 어머니는 이러한 딸들을 폭력으로부터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가령 ‘나’가 사라지는 법을 배우는 동안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내”거나 “쇠죽솥 가득 우아하게 저녁을 삶고 있”을 뿐이다(「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이 어머니들은 오히려 딸에 대한 폭력을 방관할 뿐이다. 그러한 무기력과 체념, 방관 속에서 딸들은 어머니의 운명을 반복해 산다. 예컨대 “아버지”가 “집에 오다가 엄마랑 닮은 여자와 했다”면, ‘나’가 “최고로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과는/엄마처럼도 하고 엄마랑 닮은 여자처럼도” 한다(「건강하고 안전한 생활」)는 구절 역시 “엄마”의 삶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는 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고려하며 「모자의 효과」로 돌아가 보자.2) 친족 간 성폭력의 피해자인 “여자 아이”를 화자로 설정하고 이 화자가 친족 간 성폭력을 당하는 것이 암시되는 장면 사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뜬금없이 작은 폰트 크기로 삽입되어 있다. “아이를 낳았지/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아이와/아이와/아이를” 이 구절은 다른 부분과 달리 “여자 아이”의 발화로 읽히지 않는다. 이때 앞서의 시들을 고려하면 이 구절의 화자를 “여자 아이”의 어머니로 읽을 근거가 생긴다. 이 시가 여자 아이가 겪는 폭력을 다룬 시라는 점을 기억해 보자. 이 삽입구에는 여성이 여성을 낳는 일은, 모녀 관계가 주는 그 모든 풍부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폭력의 굴레를 물려주는 일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강고한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피해를 입는 것이 “나 갖고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러한 현실을 향해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아이를 낳는다고 위악적으로 말한다.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딸이 겪을 폭력을 직감하는 어머니들은 딸과의 관계를 분열적인 것으로 경험하기 쉽다. 딸을 통해 자신의 삶이 재생되기를 기대하거나 예감하면서도 그것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위 삽입구에는 이러한 분열적인 모성성과 딸들을 가부장적 폭력에 내몰게 되는 현실에 대한 어머니의 처절함을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여기서 우리는 가부장제라는 유산을 물려받은 딸들이 비록 사라지는 방법으로라도 스스로를 보호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2)  「모자의 효과」는 이 시집에서 가장 앞에 배치된 시이자, 시집의 제목 역시 이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박상수는 이 시집의 해설에서 “아이를 낳았지/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라는 구절을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열망’ 혹은 ‘새로워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해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이 시에서 여자 아이가 겪는 일을 친족 간 성폭력이 아니라 “아이와 아이가 맺는 관계”로 볼 때에 가능한 해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 안에서 친족 간 성폭력이 충분히 암시될뿐더러, 가족 관계 내에서의 여자 아이를 재현한 다른 시들을 함께 본다면 이 시에서 폭력성을 삭제한 독해는 불충분하다.

 

    반면 임승유의 시집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주로 서로에 대한 가학적인 태도로 엉켜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먼저 「밖에다 화초를 내놓고 기르는 여자들은 안에선 무얼 기르는 걸까?」에는 밖에서는 (화초에) 물을 주는 “여자들”이 집 안에서는 소년을 학대하는 것이 암시된다. “엄마, 나는 엄마가 그립고 무섭고 무조건 미안해요”와 같은 대사에서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받지만 어머니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아들을 학대하는 어머니는 모성 신화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 요컨대 어머니한테 기대하는 자애롭고 자식을 보살피는 이미지와 전면 배치된다. 이는 이 사회에 실재하는 가정폭력이 어머니에 의해서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한다. 그런데 이 어머니의 폭력은 아들(소년)-어머니(여성인 ‘나’)의 관계를 다룬 다음과 같은 시들을 함께 읽을 때 좀 더 복잡한 맥락에 놓이는 듯하다.
    「소년을 두 번 만났다」를 읽는다. 이 시는 “문장 속에서 살해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시작해야 한다//나는 소년을 두 번 만났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두 인용문은 낯익은 어느 여성을 지나치는 상황에 대한 묘사로, 둘 모두 “나는 소년을 두 번 만났다”는 구절과 대비된다. 이 구절에서는 ‘나’를 주어 삼아 소년이 객체로 묘사된다면, 두 인용문에서는 여성이 객체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문장 속에서 살해”당한다는 것은 문장 속에서 ‘나’의 행위성이 삭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에서는 “소년의 목이 대롱거”리는 장면이 이어지고 바로 다음 “오늘까지만 살려두자/이건 오늘까지 하는 다짐”이라는 화자의 독백이 서술된다. 여기서는 소년을 죽이고 싶어 하는 화자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앞에서는 자신이 문장 속에서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소년을 두 번 만났다”고 썼다면, 여기서는 화자가 소년을 살해하고 싶어 한다.
    이때 이 시의 마지막 인용문은 이 욕망의 정체를 가늠케 한다. 보르헤스의 「엠마 순스」의 일부 구절에 해당하는 이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희망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가 살아오는 동안 일어났던 단 한 번의 커다란 사건이었고, 또한 그것은 계속해서 한없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보르헤스의 이 소설은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딸 엠마 순스가 아버지의 살해범을 찾아 복수해 가는 서사이다. 이때 그녀가 알리바이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어떤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상황을 연출하는데, 그녀는 이 남자의 행동이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한 일과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녀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엠마 순스는 살해범을 찾아가 죽인 후 그에게 강간 일을 뒤집어씌우게 된다. 엠마 순스의 복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얽힘 때문에 그녀의 복수가 아버지를 위한 것인지, 아버지를 향한 것인지 불분명해진다. 후자의 경우라면 이 복수는 아버지로부터 강간을 당했던 어머니를 위한 복수가 된다. 다시 위 시로 돌아와서, 이 시에서 임승유는 보르헤스의 소설 속 엠마 순스-아버지-살해범의 구도를 그녀(어머니)-아버지-소년(아들)으로 전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이 소설 대목의 삽입으로 인해 “소년”에 대한 살해 욕망은 사실상 살부 욕망이 투사된 것으로 읽히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상징적인 “살해”를 겪는 이 여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소년”을 죽이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살해하고자 한다. 만약 이 ‘살해’가 성공한다면, 여자는 아버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살릴 것이고 그럼으로써 소년을 죽일 필요가 없어진 여자는 역설적으로 소년 또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을 두 번 만났다」에서의 소년에 대한 살해 욕망이 위와 같이 결국 소년과 자신의 관계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16년」에서 나타나는 소년의 공격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읽힌다. 이 시는 “태양을 잡아당겨 시동을” 건 소년이 “나”를 향해 돌진하고 ‘나’는 “오토바이에 뒤꿈치를 갈아버린”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장면 이후 소년의 성장을 과일에 빗댄 감각적인 묘사가 이어진다. 소년은 “태양을 씹어 먹”고 자라며 심장이 과일처럼 여물어 가는 것처럼 묘사된 후 ‘나’는 “시간을 갈아 만든 주스를 파는 가게”에서 “운향과 소년을 빨아 마”시고, “만다린계 귤의 총칭처럼 소년은 웃는다”고 서술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 두 장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지만, 「소년을 두 번 만났다」와 함께 놓고 본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가 소년과의 시간을 감각적으로 향유하고 소년 또한 웃을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살리기 위한 ‘죽임’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 마지막 연에서 소년과 여자 그 어느 누구도 “살해”되지 않는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극지에서는 오줌과 함께 얼어붙지 않기 위해 망치가 필요하다는데 자신이 꾸고 있는 꿈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두드려 깨고 있는 여자들

 

    복숭아는 제 몸의 껍질을 벗어놓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저 흘러내리는 속살을 다 견디려면 제 몸을 먹어치워야 한다

 

    (중략)

 

    하룻밤을 뜬눈으로 보낸다는 건 남은 밤을 눈 감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 나라고만 할 수 없는 향기가 스멀스멀 빠져나오고 그게 꼭 너라고만 할 수 없을 불빛이 벌레처럼 내 살을 갉아 먹고

– 「여인숙」 부분

 

    그리고 ‘아버지’ 없는 세계에서 임승유 시의 “여자들”은 퀴어한 사랑을 나눈다. 「여인숙」의 제목 ‘여인숙’은 원래 여행객이 머무는 곳을 뜻하지만, 여인(旅人)과 여인(女人)이라는 동음이의어 탓에 여인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이 안에서 여자들은 “꿈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두드려 깨고”, 이 몸은 과즙이 흘러내리는 복숭아로 빗대어진다. 여성의 몸을 제약해 온 상징적 굴레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이 “흘러내리는 속살”은 스스로 통제하거나 예측하기 어려운 욕망과 같은 것이어서 화자는 이를 견디려면 “제 몸을 먹어치워야 한다”고 쓴다. 그리고 이 먹어치움은 “너”로부터 이루어진다. 서로의 육체적 관계를 암시하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몸에서 나는 복숭아 향은 “나라고만 할 수 없는 향기”가 되고, 나의 몸을 벌레마냥 갉아 먹는 ‘너’ 또한 “너라고만 할 수 없을 불빛”이 된다. 「여인숙」의 여자들은 ‘나’와 ‘너’의 뒤섞임을 통해 자신의 도둑맞은 몸을 되찾는다.

 

    샛길로 난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습니다 얼굴 긁히면서 내가 말했습니다 아무데도 가지 않는 우리가 되자/왜 그렇게 말하지?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 같이 했습니다 블라우스를 가장 감각적으로 떠올리는 방법에 대해 하나씩 말하기

– 「블라우스」 부분

 

    여자들과 여자들이 블라우스만 입고 돌아다닌다면 얼마나 싱그러운 아이들이 태어나겠니?

– 「연습」 부분

 

    여성들 간의 에로틱한 관계는 등산 장면과 블라우스를 벗기는 장면을 겹쳐 감각적으로 그린 「블라우스」와 같은 시에서 나타나기도 하며,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에 대한 상상(「연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퀴어한 “여자들”은 여성들 간의 관계성이나 성적 실천을 제한해 온 가부장제라는 “꿈”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몸을 깨고, 서로의 몸을 일깨운다. 나는 이러한 장면들을 레즈비언십에 대한 안이한 미화라기보다는 여성들 간의 충분히 탐사되지 않은 관계성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읽고 싶다. 여성이 가부장적 폭력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누군가를 살리는지 혹은 살리는 데 실패하는지, 나아가 여성은 여성으로부터 어떻게 몸을 되찾고 감각할 수 있는지, 이 모든 것들을 임승유의 시집은 보여준다.

 

 

 

 

 

 

 

 

 

 

 

 

 

 

 

김보경 작가소개 / 김보경

2020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문장웹진 2020년 09월호》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