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비자림로 1472
이종형
산짐승들이 먼저 발자국을 남겼고
사농바치*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오래전 일이었다
봄날, 어린 테우리*들이 소떼를 몰고 초원으로 나가는 통로였고
살찐 소들이 가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백 년 전쯤의 일이었다
고작 5분을 단축시키기 위해
잘려 나간 수천 그루 나무가 신음하고 있는 그 길을
백 년 후의 사람들이 태연하게 지나간다
죽음에 한 발 더 다가서는 일이 저렇게 쉽다
아무렇지 않다
폐허를 쏜살같이 지나 당신들이 향하는 거기
태어나고 자라다 쓰러진 나무들이 다시 몸을 일으켜 대를 이어 온
푸르른 숲 하나
비자림
그건 겨우 천 년 전쯤에 시작된 일이었다
사라진 천 년을 다시 불러내려면
열 배의 시간, 당신들의 목숨 만 개로도 부족하다
* 사농바치 – 사냥꾼
* 테우리 – 목동
부자유친 父子有親
눈이 어두워진 당신이 마침내 내게 손과 발을 맡긴다
또깍또깍 잘려 나간 손톱 부스러기들 튀는 소리가
데면데면한 침묵의 배경음일 뿐
늙은 아비가 보내는 신호는 화해의 기미일까
잘못 해석하고 싶지 않은 나는 골몰히 생각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고를 수 있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화목해졌을까
세상의 아비들은 상처를 덜 받았을까
손발톱을 다 자르고 나서
당신을 내 무릎에 눕혔다
한때 내 몸이었을 당신의 몸
칭얼대지 않는 얌전한 아이 하나가
깜빡깜빡 조는 동안
삼십 년 묵은 귓밥을 파내어 후 불어내자
오래 묵은 상처의 딱지 몇 개도 투둑 떨어진다
무릎이 저려 올 때까지
잠시 이대로 있기로 하자
이 온전한 풍경은 얼마만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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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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