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을 다시 크롭하기 2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풍경을 다시 크롭하기 2

 

 

민경환

 

 

 

“그런 Money 그런 Power 우리는 관심도 끊어버린 지 오래”
– Red Velvet

 

    1. 내깃돈을 내라는 문지기가 있다면, 가위바위보를 신청하려는 건

 

    ‘지금’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텍스트에 다른 맥락을 긴급히 수혈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읽기와 쓰기는 불가피하게 현재라는 시간에 묶여 있는 행위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요구를 벌충하려 든다면 원론적인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다. ‘동시대’가 건네는 요청은 사사로운 관심 이상의 당위로만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년대를 여는 시점에 김홍중을,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을 다시 읽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묻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해야 좋을 것이다. 인아영이 “진정성은 ‘1980~90년대라는 시대’가 아니라, ‘비장애인 이성애자 지식인 남성이라는 사회적인 위치’에 의해 공유되는 에토스일지도 모른”1)다고 지적했을 때, 90년대 이후를 지배해 온 논리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한계를 노출해 버렸다면 철 지난 논의를 다시 읽을 이유는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서를 뒤집어 다른 결론을 당기는 편이 옳다. 가라타니와 김홍중에 대한 재독해는 지난 10년간 반복된 착오의 순간이 현재까지 행사하는 위력들로 인해 피할 수 없다. 10년대에 우리가 당면해야 했던 비평적 풍경들을 저 두 이름과 함께 다시 읽는 것은 20년대를 차별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너무도 오래 지속되는 전제들을 확인함으로써, 그 전제를 벗어나 현재를 다시 쓰고 또 다시 읽기 위함이다. 지난 역사를 모범으로 삼기 위함이 아니라, 여전히 신도를 거느린 그 무덤을 난도질하기 위해, 그게 아니라면 기념비를 파괴하기 위해 지금 바로 그 만신전에 입장해야 한다. 오혜진이 천명관을 둘러싼 비평을 읽어 가며 확인했던, “비평가들이 말하는 ‘지금-여기’가 사실은 ‘그때-거기’의 질서와 미학에 고착된 것이라는 아이러니”2)는 지난하게 반복되고 있다.
    첫눈에는 큰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함께 묶어 보면 어떤 징후로밖에 볼 수 없는 장면들은 물론 비평에도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흐름에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복도훈, ‘종언’을 기정사실화하고 다시금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물으며 ‘이야기꾼’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김영찬, 또 김영찬의 00년대 소설 비평에서 제출된 개념인 ‘왜소한 주체’를 확장하며 00년대부터 10년대까지 이어지는 시적 성취를 계급적 무의식의 산물로 이해하는 박상수. 이들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작업을 전개하고 있음에도 이론적 거처로 삼는 곳에는 크고 작은 유사성이 있다. 그리고 그 이론적 자원을 통해 이루어진 해석들은 여전히 우리가 작품을, 더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고, 또 요구한다. 그렇다면 가라타니와 김홍중이 어떻게 현재에 여전히 위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묻는 일은 출발점으로 삼기에 나쁘지 않다.
    그들이 공유하는 어떤 태도에 가라타니나 김홍중이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손쉬운 결론을 이끌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공유하는 태도로 인해 특정한 이론적 참호를 선택하고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 또한 목표하는 바가 아니다. 그들이 (또 그들을) 꾸려 나가는 이론적 자원과 그들이 내놓은 평문 사이에서 발견되는 낙차, 이론이 펼치는 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굴절을 확인하고, 그로써 그들의 적대자이기를 자처한 우리의 입으로 음독(飮毒)해 버린 그들의 목소리를 지워내는(undub) 것이 전부다.

  1)  인아영, 「눈물, 진정성, 윤리 – 한국문학의 착한 남자들」, 『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 p. 94.
  2)  오혜진, 「‘장편의 시대’와 ‘이야기꾼’의 우울 – 천명관과 정유정에 대한 비평이 말해주는 몇 가지 것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2018, 오월의 봄, p. 35.

 

    “쓰는 이는 기쁨, 슬픔, 안타까움, 분노 등등을 쓰기도 하지만, 실은 기쁨, 슬픔, 안타까움, 분노 등‘이’ 쓰는 것이기도 하다.”[김미정, 「'나-우리'라는 주어와 만들어 갈 공통성들」]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쓴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문학평론가는 앞으로 누가 아프다고 쓰면 아프다고 부르르 떠는 사람이어야 하겠다.3)

 

    이 글[조연정,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이 문학을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현실변혁에 복무하는 사회운동의 도구쯤으로 치부했던 1920년대 카프 비평의 속류화된 페미니즘 버전으로 읽히는 것은 나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4)

 

    나는 양경언의 작업이 문학장에 대한 비평가의 중요한 개입이자 좋은 의미의 비평적 압력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오래된 ‘문학적 진정성’ 추구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의 ‘윤리비평’이 2010년대의 ‘진정성 비평’으로 그 자리를 옮겨왔다고 할까. 이렇게 되면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시에서 힘겹게 얻어낸 ‘입체적 개인’은 또다시 사라지고 만다.5)

  3)  복도훈, 「‘유머’로서의 비평 – 축제, 진혼, 상처를 무대화한 비평의 10년을 되돌아보기」,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18년 봄호, p. 112~113. [ ]의 내용은 인용자의 것.
  4)  김영찬, 「비평은 없다」, 『문학이 하는 일』, 2019, 창비, p. 65. [ ]의 내용은 인용자의 것.
  5)  박상수,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 2010년대 시와 시 비평에 관하여」,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2018, 문학동네, p. 121.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이론적 배경을 느슨하게 공유하고 작업을 전개하는 이들이 10년대에 비평적 활기를 부여한 페미니즘적 독해의 흐름에 반기를 드는 것은 새삼 가라타니의 이름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복도훈과 김영찬의 경우 직접적으로 자신의 논의에서 가라타니 고진을 언급하고, 박상수는 상대적으로 가라타니 고진을 언급하는 일에 조심스럽다. 그러나 이후 살펴보겠지만, 박상수가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인용하는 김홍중의 논의에 가라타니 고진이 불가피하게 엮여 있어, 박상수는 자신이 딛는 발판의 정체를 모른 채로 유사한 이론적 맥락에 함께 탑승한다. 그리고 바로 이 무지에 대한 질문이 10년대의 비평이 종종 저지른 실수를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
    답을 향해 가는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기존의 관점에 내재된 한계를 지적하고, 바로 그 이론적 바탕들을 뒤집어 텍스트를 위한 오독을 실행하게 될 것이다. 김홍중에게 00년대의 시는 한때 가능하다고 여겨진 ‘진정성’의 부재가 낳은 형식이었지만, 20년대의 우리는 그러한 관점으로부터 모두 탈피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질문되어야 할 것은 김홍중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모형이 그와 얼마나 다르고, 달라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결국, 가라타니 고진을 오염된 이론적 자원으로 취급하고 이를 서둘러 매장하는 것도, 또 그를 근거지로 삼는 평론가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젠더적 인식의 미진함을 기소하려는 것도 아니다. 비평의 전개에서 누락된 것과 과장된 것을 셈하여 마땅히 발견했어야 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을 다만 찾으려는 것이다.

 

 

    2. 비평이 텍스트를 외면하기 위해 필요한 분리와 합체에 대한 건

 

    송승언의 작품이 “자신을 제약해 온 믿음을 허구화하지만, 그렇다고 ‘실재’의 역동성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지 않는 지점에서”6) 성립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이로부터 10년대를 둘러싼 비평적 충돌을 생각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6)  민경환, 「풍경을 다시 크롭하기 (5)」, 『문학 플랫폼 던전』, 2020년 3월 연재분

 

    이들[황인찬, 안미옥, 정한아, 전문영]의 의심은 ‘지금-여기’를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에 맞춰져 있다. 의심하는 주체는 주어진 조건을 살피는 과정에서 지금 상황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색하고, 그를 통해 정해진 회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탐구를 시작한다.7)

  7)  양경언, 「삶다움의 가능성을 믿는 시」, 『안녕을 묻는 방식』, 2019, 창비, p. 340 [ ] 안의 내용은 인용자의 것.

 

    큰 맥락에서는 반박하기 어려운 진술이지만, 여전히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1) 10년대 시인들의 ‘의심’이 지시하는 ‘지금-여기’는 텍스트 외부 ‘현실’의 구조적 문제인가. 2) 이들의 의심이 ‘회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탐구로 이어지는가? 하지만 그 가능성을 질문하기 전에, 위의 명제는 또 다른 비평적 문맥과의 대질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기에 또 다른 덩어리의 인용이 필요하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지금의 상황이 문제적이고, 바꾸어야 할 상태라는 관념이 발생하고, 그래야 시적 주체가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송승언과 황인찬]의 관념 속에는 “좋은 곳”이 애초에 부재해 있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없고, 더 움직일 이유가 없는 것이며, 화를 낼 필요도 없다. 어떻게 해도 더 나빠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무기력’하게, 혹은 ‘무능감’ 속에 앉아 있는 것이다.8)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겠지만 대신 실패할 필요도 실패의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희미한 ‘전능감’을 체험하게 된다. 최선을 다하면 성공하겠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하면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을 상처 없이 보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된다. 송승언은 빛, 물, 순백, 눈부심, 백조와 같은 이미지를 자주 소환하는데 이것은 ‘하지 않음의 전능감’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 그러나 서글픈 결과물들이다.9)

  8)  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한 경향」,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2018, 문학동네, p. 60 [ ] 안의 내용은 인용자의 것
  9)  같은 글, p. 66

 

    훨씬 의심스러운 비평적 진술로 옮겨온 지금, 문제는 다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 10년대의 시인들에게 과연 ‘현실’을 좋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2) 그러한 능력의 존재, 또는 부재가 이들을 행동, 또는 비행동으로 이끄는가? 3) 그 결과 시적 주체들은 나르시시즘을 보존하게 되는가? 육박해 오는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아니겠지만, 박상수의 이론적 병장기들을 다시 살피는 것으로 질문을 우회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와 현실을 연결하는 박상수의 입장이 성립되는 과정을 되묻는다면 질문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뀔 것이고, 바뀌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박상수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근간을 이루는 줄기는 소설 비평에서 이미 제기된 분석을 반복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핵심 주장은 시 비평 영역에서도 충분히 일찍 발견된다. 김수이가 00년대에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현실 속에서 시인들은 ‘미적인 것’을 하나의 출구로 인식하게 된 것”10)이라고 진단한 내용을 10년대에 반복하면서 박상수가 덧댄 것은 고작해야 조금의 사회학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명명이 ‘자폐적 이기성’이나 ‘자아의 확장’으로 귀결되고 만다”11)는 고봉준의 지적을 또한 기억한다면 사실 박상수의 입장 그 자체로는 어떤 과장 없이 대단한 위치를 점하기 어렵다. 그의 비평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다른 지점을 살펴야 한다. 가령 독해의 불가능성을 이유로 ‘자폐’라는 명명을 동원해 00년대의 시를 부정했던 독해가 대부분 피상적 수준에 그친 것과 달리 박상수에겐 ‘자아’의 ‘쾌락’을 찾아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면밀한 독해와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는 점과 같은. 그리고 이러한 독해의 결정적 발판은 ‘환상’과 ‘자아’라는 틀이다. 00년대 비평이 그토록 부정하고자 했던 ‘자아’와 ‘환상’이라는 독법의 결합으로 발생하는 화학작용 이후에야 보이는 어떤 것들이 그의 평론에 약간의 특별함을 부여했다. 따라서 그의 입장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형철의 평론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며 00년대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을 때, 바로 그 구태의연한 입장으로 회귀한 ‘전환’이 중요하다.
    특정한 시기의 문학이 시대적 ‘환경’에 대한 ‘주체’의 ‘대응’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10년대의 문학을 그렇게 읽도록 만든 시선은 그보다 오래된 결정의 결과물이라는 점이 더욱 주의를 요한다. 그렇다면 박상수가 00년대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결정적 구도는 어떻게 마련되었는가?

  10)  김수이, 「시간의 원근법과 잔여물 – 박형준ㆍ전남진ㆍ이원의 최근 시를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 p.294~295.
  11)  고봉준, 「개인이라는 척도, 혹은 ‘나’라는 자폐적 이기성」, 『실천문학』, 2006년 여름호. p.156.

 

    표면적으로 보기에 자폐증처럼 보이는 환상의 전면화는 개인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필사의 안간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젊은 시인들의 시는 자폐적이다.12)

 

    ‘시적이다’라는 말에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비윤리적 쾌락(옳지 않은) – 즉 실재와의 대면을 부정하고 오로지 현실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는, 오히려 ‘자아’에 가까운 – 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13)

  12)  박상수, 「2000년대 한국 시에 나타난 환상의 의미와 전망 – 환상의 정신분석적 독법을 위한 시론(試論)」,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99.
  13)  박상수, 「무한(無限)의 주인 – 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000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202.

 

    이상의 두 문장으로도 박상수가 10년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00년대에 대한 분석에서 이미 결정되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00년대에 형성된 시선과 관점을 10년대로 연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을 가능케 한 여러 조건들이다. 그가 각주에 남긴 단서로부터 우리는 어떤 흥미로운 반복을 보게 된다. “비록 소설의 경우이긴 하지만 2000년대 작가들의 탈내면화 저변에 후기 자본주의의 전일적인 지배에 따른 주체의 왜소화 경향이 놓여 있다는 분석(김영찬)이나 환상적 서사는 일종의 ‘정신승리법’으로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그로 인한 대상 카섹시스의 철회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 에고 카섹시스로 바뀌어 편집증적 서사를 통해 환상으로 분출한다는 분석(김형중)은 시의 경우에도 전용이 가능한 분석”14)이라고 진단하며 소설의 구도를 시로 옮길 때 그의 틀은 ‘무중력의 문학’(이광호)을 다시 현실의 중력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정신분석학적 틀을 도입한 김영찬의 전개15)를, 신형철에 대해 거꾸로 반복했던 것이다.
    주어진 텍스트를 ‘환상’으로 분류하는 순간, ‘실재’와의 대면은 전제에 의해 차단된다. 그러므로 텍스트에 대한 분류가 끝난 순간, 독해는 결정된다. 그러므로 분류의 시점에서 신형철의 ‘윤리비평’은 이미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물론 신형철에 대한 비판 역시 김홍중과 심보선이 “실재에의 무관심이 시의 태도라면 ‘실재에의 열정’을 끊임없이 찾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비평의 태도”16)라고 크게 유사한 논지를 이미 내놓은바 비판 자체를 새롭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흥미로운 지점은 박상수가 신형철과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을 자신의 이론적 배경으로 삼고 있음에도 해석의 차이가 꽤나 발생했다는 쪽에 있다.
    이는 ‘실재’를 ‘특정한’ 텍스트 외적 현실(에 숨은 중핵)과 연결함으로써 발생하는 균열이다. 텍스트에서 정신분석과 텍스트의 외부적 현실을 잇는 보조선은 표준적인 지젝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차이는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박상수가 ‘환상’이라는 틀을 취하며 동시에 ‘능력주의 신화’를 믿지 않는 10년대의 ‘시적 주체’들에 관한 독법을 연결했을 때, 그로부터 확인되는 굴절은 사소하지 않다.
    박상수가 10년대를 해석하기 위해 설치한 틀 속에서는 건조하기 그지없는 인식조차 환상으로 거듭난다. “‘A의 뒤에 아무것도 없다’ ‘A는 다시 A로 돌아올 뿐’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현실감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몰락하는 중간 계급의 불안을 저지시켜 주는 아름다운 가상(假想)이기도 하다.”17)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 냉소적인 ‘주체’에게서 발견되는 ‘환상’이란 무릇 까다로운 논리를 요구하지만, 박상수의 독법에서는 너무도 매끄럽게 해석된다. 바로 이 지점이 ‘평론’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사회학’의 행복한 결합을 꿈꾼 박상수가 누벼야 했던 지점이자, 안전한 착지를 위해 너무 빨리 낙하산을 펼쳐버린 지점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딛기 위해선 박상수가 물을 긷는 사회학적 원천이 어디인지 묻는 것이 순서다.
    단서를 얻는 일이 크게 어렵지는 않다. “절박해진 문제는 당장 살아남는 것, 살아남기 위한 ‘정체성의 획득’”18)이라는 문장이 투명하게 지시하듯, 그의 사회학적 수원지가 김홍중의 ‘생존주의’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진정성의 모델이 현실적으로 융성할 수 있는 환경과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유사-자연적 정글로 변화한 사회에서 가장 절박한 관심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 즉 ‘생존’의 문제로 집약되기 때문”19)이라는 김홍중의 사회학적 분석이 “좋은 곳”을 찾지 못하는 황인찬과 송승언의 텍스트에 적용된 결과가 바로 박상수의 입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식을 수용한다고 해도 ‘믿지 않는’ 10년대의 시적 주체는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 있었다. 말하자면 텍스트에는 10년대의 시적 주체가 드러내는 ‘없음’의 감각은 실패를 피하고 전능감을 보존하는 것으로 읽힐 필연성이 없다. 이러한 차이는 비평 속의 사회학이 전제하고 있는 시인의 신체가 여러 ‘장치’들에 의해 호명되고, 신자유주의적 리듬을 문신처럼 온몸에 두르고 있는, 속고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낙차는 ‘환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마름질을 거쳐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룬다. 이렇게 사회학적 틀(생존주의, 마음의 부서짐)-정신분석학적 틀(환상)-텍스트 분석(믿지 않는 주체)의 위태로운 조합은 서로를 굴절시키며, 독해를 중층적으로 결정하는 심급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굴절의 중심에 여전히 ‘좋은 곳’이라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정리하면 10년대의 비평은, 어느 시점 이후로 불가능해진 ‘좋은 곳’을 진단하는 방향과, 그에 반대하여 ‘좋은 곳’은 여전히 있고 심지어 모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큰 흐름으로 나뉜다. 그리고 여기서 의심되지 않은 것은 ‘좋은 곳’, 또는 ‘진정성’의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 그 자체다. 그 ‘진정성’이 이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이라는 입장이 숨기는 전제 역시 정확히 동일하다. 특정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좋은 곳’이라는 거짓 문제를 함께 받아들이게 되는 함정은, 아직까지 성공적으로 피해 간 사람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도식의 적용이 역설적 풍요로움을 생산하고 있을 때, 한편으로 우리의 보폭은 어떻게 제한되는가? 그 질문은 저 이질적인 도식의 결합이 모두 00년대, 혹은 그 이전으로부터 확립된 것이란 지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박상수의 입장은 00년대의 비평을 추동했고, 그 입장들이 망각하고자 했던, 당시의 암묵적 참조점을 묻어 둔 그 매립지 위에서 성립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목적지는 문학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이끈 00년대와 그를 둘러싼 담론의 층위로, 또는 읽히지 못한 어떤 질문으로 향해야 한다. 애초에 도식이 정당하게 집행된 것이 아니라면 10년대의 어떤 독해는 00년대의 관성에 의한 결과물 이상이 될 수 없으므로.

  14)  박상수, 「2000년대 한국 시에 나타난 환상의 의미와 전망 – 환상의 정신분석적 독법을 위한 시론(試論)」,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98, 각주 23.
  15)  “가령 김중혁 편혜영 서준환 김애란 한유주 등 언뜻 그런 듯 보이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만 하더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들 소설 곳곳에 숨어 있는 부재원인(absent-cause)으로서 현실을, 이 시대 문학의 상상을 지탱하는 무력한 정신의 공통감각을 알아차리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김영찬, 「2000년대 문학, 한국소설의 상상지도」, 『비평 극장의 유령들』, 문예중앙, 2006, p. 82.
  16)  김홍중, 심보선,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 – 미래파의 시와 시학」, 『문화와 사회』, 2008년 봄/여름호(4권), p. 138.
  17)  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한 경향」,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2018, 문학동네, p. 68. 강조는 인용자의 것
  18)  박상수, 「정체성, 그것이 전복인 시대가 되었다니」,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2018, 문학동네, p. 36.
  19)  김홍중,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한국사회학』 43권 5호, 2009, p. 4.

 

 

    3. 종언이 선언되었을 때 가라타니가 짓는 표정을 알았던 건

 

    박상수가 10년대에 관한 분석의 도약대로 삼기 위해 00년대에 대해 남긴 내용은 약간의 개편을 거쳤으나 생각 이상으로 간소하다. “이장욱, 김행숙, 이근화, 하재연의 시적 주체는 ‘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교육과 부동산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중간계급’의 후예로, (…) 대학 교육을 통한 계급 이동 가능성이 잔존했던(그랬다고 믿어졌던)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았던 ‘상승하는 중간 계급’에 해당”하고, 그러한 계급적 조건이 “‘언어’라는 상징 자본을 엄격하게 정련하고 통제하여 부르주아 계급의 미적 취향인 ‘우아함’에 도달하고 싶었던 무의식적 상승 욕망”20)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문학을 ‘객관적 현실’에 대한 주체의 ‘주관적 대응’으로 이해하는 접근은 몹시 상식적이지만, 동시에 박상수 자신이 앞서 각주에 묻어 둔 김영찬과 김형중의 논리에서 여전히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일반적인 논리이지만 두 사람의 논리와 특별히 유사한 하나를 짚어 보자.
    가라타니 고진이 친숙하게 들리는 독자라면 공히 알려진 가라타니 고진의 논제와 앞서 박상수가 각주에서 소개한 두 사람의 논리 사이의 유사성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소설이나 자유민권운동 쪽을 향하던 리비도가 그 대상을 잃어버리고 내부를 향했을 때 <내면>이나 <풍경>이 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21) 이 논리가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가라타니의 추종자라고 보기 어려운 신형철에게조차 논의의 핵심부에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90년대가 산출한 빼어난 서정시들이 증명하고 있거니와 큰 타자의 몰락은 ‘자기에의 배려’라는 반작용을 호출했고 내성(內省)적 서정시의 시대를 열기도 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들 중 일부는 ‘자연’이라는 큰 타자를 호출함으로써 주체성의 곤경을 넘어설 수 있었”22)다는 진단은 그와 가라타니 사이에 직접적인 비평적 채무 관계를 확정할 정도의 증거는 아니지만, 여러 손을 거쳐 가라타니와 유사한 구도가 그에게 닿았다고 말하기엔 충분한 수준이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가라타니가 말하는 바는 ‘정치’ 운동의 실패 이후에 비로소 순수한 ‘문학’이 시작되었다는 식의 문학적 자율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내면’ 또는 ‘문학’이 형성되는 과정에 기여한 여러 ‘제도’와 ‘테크놀로지’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진술은 (푸코의 분석을 빌려)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내면적 ‘진실’을 역사화하고, 제도에 의해 산출되는 부산물로 만든다. “고백이라는 형식, 또는 제도가 고백해야 하는 내면 또는 <진실한 자아>라는 이름의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지가 아니라 고백이라는 제도 그 자체에 있다.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어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의무가 감춰야 할 무언가를, 혹은 <내면>을 창조한다.”23)
    ‘내면’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들의 결과물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파격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내면’을 중심으로 ‘문학’과 ‘사회’ 사이에 일방적 인과관계를 수립하는 일은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에 담긴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가지는 고유의 유연함은 ‘문학’이 ‘주체’를 둘러싼 여러 근대적 ‘테크놀로지’의 결과인 동시에, ‘주체’의 ‘내면’을 형성하고 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에 가까운 무엇으로 동시에 존재하길 허락한다.

  20)  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한 경향」,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2018, 문학동네, p. 44, 45~46.
  21)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근대일본 문학의 기원』, 2010, 도서출판 b, p. 54.
  22)  신형철, 「진실은 앓는 자들의 편에 – 2005년, 뉴웨이브 진단 소견」, 『몰락의 에티카』, 2008, 문학동네, p. 210. 두 논리 사이의 유사성은 다른 지면(민경환, 「공유된 출구에 대한 합법적 불신과 다른 입구들」, 『자음과모음』 2020년 여름호.)에서 간략히 지적한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23)  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p. 115.

 

    따라서 나는 <내면>을 기반으로 <언문일치> 운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언문일치>라는 제도의 확립에서 <내면의 발견>을 보고자 시도해 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내면>과 그것의 <표현>이라는, 오늘날에는 자명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형이상학을 더욱더 강화할 뿐이며, 그러한 형이상학 자체의 역사성을 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뜬구름』이나 「무희」에 나타나는 <내적 갈등>을 운운할 때 사람들은 그 작품들의 에크리튀르를 등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내면>이 에크리튀르의 문제와 별도로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내면>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식의 환상이야말로 <언문일치>에 의해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다.24)

  24)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근대일본 문학의 기원』, 2005, 민음사, p. 83.

 

    개정판에는 없는 내용임에도 특별히 힘주어 인용할 수밖에 없는 위의 진술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을 현실의 단순한 결과로 이해하는 대신, 현실과 맞물려 ‘주체’의 ‘내면’을 구성하는 ‘제도’의 일부로 작동함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다. 그는 “<내면>이 직접적이고 현전적인 것으로 자립”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언문일치’라는 근대문학의 전제이자 글쓰기의 조건을 확인함으로써 “<내면>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물질적 기원”25)을 망각으로부터 건져낸다. ‘언문일치’라는 제도의 확립, 그러한 ‘(의사) 자기현전성’의 달성은 당연히 수많은 글쓰기-실천을 전제로 하고, 그에 ‘문학’이 포함됨은 물론이다. 이로써 원인으로서의 ‘내면’과 결과로서의 ‘글쓰기’라는 단순한 인과론 대신, 자리를 교대하며 뒤섞이는 인과의 복잡성을 수락하는 종류의 가라타니로 장면을 옮길 준비는 끝난다.
    그의 논의를 거칠게 요약하면, ‘국민-국가(네이션-스테이트)’와 그에 결부된 정치적 전언을 하달하기 위한 일방적 ‘도구’로서의 문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성립의 과정에서 원인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는, 공통감각을 형성하고 동질성을 결집할 수 있는 처소로서의 ‘내면’을 배태하는 ‘문학’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가라타니는 과연 민족국가의 동질성을 준비하는 이 ‘내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까? 가라타니 고진의 초기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가르치는 입장’과 ‘파는 입장’에서 ‘타자’의 은폐를 발견하고 그 ‘비대칭성’을 덮기 위해 행해지는 ‘목숨을 건 도약’을 지적26)하는 지점부터, 후기 저작인 『세계사의 구조』에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는 실로 교묘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물론 그것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데 있다.”27)라고 말하며 ‘자본=네이션=스테이트’가 형성하는 ‘보편성’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바를 고려한다면, 가라타니에게 그 매듭의 조건인 ‘내면’은 아직 긍정적 의미로 소환될 수 없다.
    가라타니가 설령 ‘공통성’이나 ‘보편성’이라는 범주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선적으로는 ‘국민국가’가 형성한 종류의, ‘타자성’을 삼키는 ‘보편성’에 대한 적대적 비판자로 등장한다. 가라타니를 빈번히 인용하는 복도훈은 “‘문학의 정치’는 가라타니의 ‘정치의 문학’이 떠난 빈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카섹시스 대상”28)이 된다고 말하며 그 이름을 빌리면서도, 종종 가라타니의 논지를 위반한다. 가라타니 고진과 지젝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음험한 의도를 지닌 다음의 진술은 특히 문제적이다. “물론 누군가는 여전히 ‘보편성의 숨겨진 편향과 배제’를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반론을 제기할 때, 그는 ‘이미 보편성이 개방시킨 영역 내에서 그렇게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29) ‘보편자’를 다시 무대에 올리는 기획을 승인하는 지젝의 문장이 긴급히 인용되며 논지에 힘을 보탤 때, 지젝의 힘으로 인해 가라타니에게 ‘보편’보다 중요한 몇 가지 측면이 유실된다.
    ‘보편’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김영찬의 문장에서도 발견되는데, 그의 경우엔 시효가 끝난 보편에서 다른 보편으로 이동함으로써 ‘보편’의 유효성을 연장하고자 한다. “근대문학 이후의 시대에, 문학은 더 이상 국가나 민족 같은 상상의 공동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뿐더러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여전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부산한 시장 바닥에서 유통되고 형성되는 공감과 정서적 연대의 공동체다.”30) 이러한 논리는 사실 ‘시민성’이라는 제목으로 오갔던 논쟁의 역사를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 익숙한 것이다. 도달해야 할 당위이자 발명되어야 할 목표로 설정되던 ‘시민’은 ‘근대’라는 맥락을 배면에 두고 여전히 비평적 무의식을 관장하는 범주로 작동하고, ‘근대’를 부정할 때도 절반만 부정하는 얼굴을 벗어나지 않는다. 가라타니의 저작에 이미 근대적 ‘시민성’ 그 자체를 역사화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작업이 일부 포함되어 있음에도, 가라타니를 근거지로 움직이는 담론은 여전히 과거의 (국민 국가적) ‘시민성’을 지양함으로써 더 옳고, 더 좋은 종류의 (때때로 세계로 올라가는) ‘시민성’으로 대체하는 과정을 거듭 주장하는 손쉬운 경로로부터 이탈하지 않는다.
    세간의 많은 이해와 달리 가라타니 고진이 선언한 ‘근대문학’의 ‘종언’을 수용하는 것은 한때 자랑스러웠으나 이젠 불가능한 것에 대한 향수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 아니며, 또 그것을 지양하여 다른 ‘시민성’의 영토를 찾아 나서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타자성’의 은폐와 ‘동질화’를 부추기는 ‘상징형식’으로서 ‘문학’이 존재했음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러한 집단적 ‘공통감각’ 내지는 ‘보편성’의 신전으로 기능하는 문학의 숨은 해로움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써 00년대의 격렬한 논쟁을 거치고 10년대에 보다 빈약하게 인용되는 가라타니에겐 두 가지가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객관적 ‘현실’을 겪는 ‘주체’의 ‘내면’을 반영한 ‘글쓰기’, 또는 ‘정치적 전언’을 배달하고 그 공간에서 보편적 ‘공통감각’을 설립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글쓰기’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으로서의 ‘내면’을 형성하는 여러 ‘장치’들 가운데 하나로 ‘글쓰기’가 또한 작동한다는 점. 즉, 일부 논자가 극구 분리하고자 하는 ‘정치의 문학’과 ‘문학의 정치’가 모두 이미 가라타니의 저작에서 발견된다는 단순한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 둘째로, 그러한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방식으로서의 ‘문학’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달리 말해, 가라타니에게 ‘보편성’이라는 범주는 일관된 긍정의 대상이 아니라 때로는 부정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긍정될 때조차 단서 조항을 걸어 두고 있다는 복잡한 사정이 무시된 채 편의적으로 인용되곤 했다.
    그러나 이 두 지점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동반한 김홍중이 훗날 “분리할 수 없는 일체를 이루는 마음과 마음가짐(마음/가짐)을 형성시키는 사회적 실정성(이념들, 습관들, 장치들, 풍경들)의 특정 배치”31)로 정리될 ‘마음의 레짐(regime of the heart)’을 향해 분석의 격자를 전진시켰을 때, 문제의 방향은 꼭 정확히 수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틀어진 00년대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바로잡기 위해 조금 엇갈린 반대의 방향으로 해석을 돌릴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성취될 수 있거나, 도맡아야 할 어떤 ‘정치적’ 기획이 없음으로 인해, ‘미래파’의 글쓰기를 “자폐적” 순수라는 항에 귀속시키는 것은 필경 사회학적으로 지당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책무가 여타의 다른 제도로 이전된 텅 빈 백색의 공간에서,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어쩌면 순수한 놀이의 정신으로, 어쩌면 시 쓰기의 본질에 대한 무사심한 탐구심으로”32) 시를 쓴다는 진술은 김홍중과 심보선이 미래파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러한 태도를 사실로 확정함으로써 그들은 ‘미래파’라는 사건을 단순히 비평가들의 오해로 비롯된 해프닝으로 취급하고 “실재에의 무관심이 시의 태도라면 ‘실재에의 열정’을 끊임없이 찾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비평의 태도”33)라고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김홍중과 심보선의 문제 설정 속에서, 00년대의 시인은 포스트-역사 시대의 도래와 함께 세계에 대한 수동적인 대응만을 보였으나, 비평가들은 이를 과잉 해석함으로써 역사의 종언을 사실상 부인한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신형철의 비평은 ‘역사의 종언’에 대한 반박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00년대의 시를 “역사적 변혁의 가능성이 좌절된 탈역사의 시대에 하위문화의 폐물들에 심취함으로써, 대타자(大他者)의 실종을 상징적으로 대리보충하고 있던 것”34)으로 정리하는 것은 무언가 미심쩍다.
    우선, 미래파의 글쓰기가 과연 ‘역사의 종언’에 따라 도출되는, 현실의 필연적 ‘결과물’인지를 묻는 것이 정당한 순서가 될 것이다. 여기서 1920년대 동인지 문학에 대한 탁월한 연구자이기도 한 김행숙의 존재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혁명과 예술이 함께 걷던 시절의 러시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연구서를 내놓은 이장욱 역시 중요한 참고점이다. 이어지는 김행숙과 이장욱의 진술이 각각 2004년과 2005년에 이루어졌음을 고려한다면, 김홍중과 심보선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시와 비평 사이의 선후 관계는 반전된다. 물론 그러한 역전도 충분히 놀랍지만, 이들의 논의를 가라타니와 함께 놓고 볼 때 훨씬 선명히 보이는 지점은 더욱 그러하다.

  25)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근대일본 문학의 기원』, 2010, 도서출판 b, p.78.
  26)  가라타니 고진, 김재희 옮김, 『은유로서의 건축』, 1998, 한나래; 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옮김, 『탐구 1』, 1998, 새물결.
  27)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세계사의 구조』, 2012, 도서출판 b, p. 16.
  28)  복도훈, 앞의 글, p. 100.
  29)  복도훈, 앞의 글, p. 105.
  30)  김영찬, 「공감과 연대」, 『문학이 하는 일』, 2019, 창비, p. 32.
  31)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한국사회학』 49집 1호, 2015, p. 186.
  32)  김홍중, 심보선, 앞의 글, p. 129.
  33)  같은 글, p. 138.
  34)  같은 글, p. 128.

 

    즉, ‘안(내부, 주체)/바깥(외부, 객체)’의 이분법을 강하게 의식했던 1920년대 초기 일군의 문학인들은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내면’에 공간적 형상을 부여하여 실체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내면’을 ‘보고자’ 했던 것이며 ‘내면을 보는 인간’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35)

 

    ‘일기’가 새롭게 문학적인 욕망 속에서 부각되었고, ‘고백’은 내면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이때의 표현은 ‘내 안의 무엇’인가가 흘러넘친 것으로 생각되었고, ‘내면’과 ‘표현’을 매개하는 언어는 투명해져야 하는 것이었다.36)

 

    서정성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소실점을 설정한다. 흔히 서정시가 세계를 ‘주체의 표상’으로 변환한다고 말할 때, 이 ‘표상된 세계’는 단일한 시점의 단일한 소실점을 중심으로 구획된다.37)

 

    문학을 회화에 투영시켜 생각해 보면 근대문학을 특징짓는 주관성이나 자기표현이라고 하는 발상 자체가 세계는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파악된 것이라는 사태와 대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하학적 원근법은 객관뿐만 아니라 주관까지 만들어내는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산수화가 묘사하는 대상은 하나의 주관에 의해 통일적으로 파악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 하나의 (초월론적) 자기라는 존재는 없다. 문학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투시도법과 같은 화법이 성립하지 않는 한 근대적인 <자기표현>이라는 관점은 성립하지 않는다.38)

  35)  김행숙, 「내면의 미적 발견과 유토피아」, 『한국학연구』 21집, 2004, p. 108.
  36)  같은 글, p. 115.
  37)  이장욱, 「꽃들도 세상을 버리고」,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p. 76.
  38)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근대일본 문학의 기원』, 2010, 도서출판 b, p. 32.

 

    가라타니의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단순한 결론을 서두른다면 논의는 한결 지루해질 것이다. 순서를 따지자면 이들의 문제의식이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에 대한 고전적 규정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 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들이 ‘다른’ 시를 쓰기 시작한 배경에는 ‘마음의 레짐’이 변화하면서 ‘포스트-진정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사회적 변화만이 작용한 것은 결코 아닌 셈이다. 과거의 장르 규범, 특히 ‘근대’ 문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학술 사회에서 누적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그러한 담론의 선제적 수용자인 동시에 생산자로서 이들이 존재했고, 그러한 조건이 이들의 글쓰기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추론이 될 것이다.
    김행숙이나 이장욱의 이론적 입장과 그들의 작품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이름을 수용하는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을 획득할 수 있다. 우선 이들은 ‘보편’의 상실을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그 상실을 회피하기 위해 “하위문화의 폐물”에 심취한 것도 아니고, 또 ‘보편’을 대체할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선 것도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자.
    김행숙의 문장이 그토록 무책임한 청유형으로 끝맺어야 했던 것, 그렇게나 수상한 초대장을 끝없이 발송해야 했던 것은 이제 “오히려 사물을 소유하고 대상을 자신만의 리듬으로 제어하는, 보다 확고부동한, 거의 ‘자아’에 가까운 시적 자아의 비인간적인, 비현실적인 능력”39)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내면’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현전’을 가능케 하는 근대적 ‘언문일치’ 또는 ‘투명한 문체’의 힘을 빌려 ‘비밀’스러운 ‘내면’을 ‘표현’하는(‘표현’이라는 착시를 유발하는) 수단을 얻고, 그로부터 ‘깊이’를 얻어 완성되는 것이다. 김행숙의 작업은 그 ‘비밀’을 생산하는 방향과는 반대로, ‘비밀’을 철저히 침투 가능하고 얄팍한 것으로, 또 시답잖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근대적 글쓰기 실천을 뒤집고, 글쓰기의 힘으로 형성되는 ‘내면’을 파괴하는 일에 봉헌된다. 독자가 김행숙의 시에서 ‘깊이’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는 화자가 보여주는 ‘내면’의 복잡함으로 인함이 아니라, 투명성을 상실한 문체와 문자의 층위에서 발생하는 결정 불가능성으로 인한 것이다.
    박상수가 김행숙으로부터 발견하는 ‘비인간적인 능력’은 “김행숙의 시적 주체는 시 속에서 영상 매체의 인식 방법을 일정 부분 자신의 능력으로 전유하여 이를 만끽”40)한다는 분석을 논리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박상수가 ‘카메라’의 논리를 흡수한 시로 판단한 「얼굴의 탄생」에서 화자가 스치듯 “냄새의 세계에는 비밀이 없으리”라고 선언하는 문장이 있음을 기억하는 독자가 또한 있을 것이다. 김행숙의 세계가 시각의 원리에 속하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2연과 3연만으로도 이미 박상수의 독해는 이미 시시해진다.

  39)  박상수, 「무한(無限)의 주인 – 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000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204.
  40)  박상수, 「카메라 옵스큐라 – 최근 시적 주체의 전능화된 지각 방식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172.

 

    검은 비닐봉지 같은 얼굴을 하고 걸어오면서 찢어지는 얼굴을. 툭, 하고 떨어지는 물체. 죽은 건 줄 알았는데 개의 죽음은 또 아주 멀었다는 듯이 발을 모아 높이 뛰어오르고. 착지와 비약으로 이루어지는 선상에서 음표처럼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 아닌 바퀴들이 지나가고

– 「얼굴의 탄생」 부분

 

    일관된 서술의 원리로서의 시각적 진행은 “툭”과 “빵”이 침투함으로써 중단된다. 외부의 물체는 화자의 시각적 리듬에 개입하는 불투명한 존재로, 화자의 전적인 지배에 놓이지 않는 대상이 된다. 이 속에서 화자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외부 세계를 ‘풍경’으로 소화하는 대신 스스로를 세계에 노출시키는 ‘연루된’ 화자이며, 화자를 향해 돌진하는 외부 세계의 ‘운동’을 통해 기존의 앎을 수정하는, 훼손되는 화자이다. 그런 점에서 김행숙의 화자는 외부 세계에 대한 객관적 묘사와 시각적 지배를 통해 ‘내면’을 발생시키는 근대적 절차로부터 벗어난다.
    이제 그가 ‘근대적 글쓰기’로서의 ‘언문일치’와 그 ‘내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본다면 대답은 그리 미묘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도 잘 알려진 결구, “뒷문으로 나가 볼래?//나랑 함께 없어져 볼래?//음악처럼”(김행숙, 「미완성 교향곡」)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그는 ‘-었-/-았-’과 같은 선어말어미를 통해 분절된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연속으로 창출해 내는 자아를 운용하는 대신, 자아의 위치를 확정될 수 없는 미래로 전송하고 있다. 비교를 거치면 보다 분명해진다. “여름이 흔들렸기에 나는 웃었다./바구니를 잃듯 그 사람의 손을 놓을 때/내겐 그 일이 기쁜 것이었다는 게 떠올랐다.”(조연호, 「근친의 집」) 조연호의 시적 화자가 문형의 차원에서 ‘자아’를 이탈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문법적으로는 과거를 집약하는 주인으로서의 ‘자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41) 이를 염두에 둔다면, 둘의 차이는 확연하다. 행위와 시점 그리고 판단의 주인 된 위치에 김행숙의 화자는 좀처럼 올라서지 않는다. 김행숙의 오래된 화자들은 정지한 상태로 세계를 하나의 시공간으로 집약하는 일에 골몰하는 대신 “으으으 달릴 뿐이다”(「폭풍 속으로」). 데카르트적 ‘자아’의 확실성에 대해 “어떤 행위에 행위자를 덧붙이는 우리의 문법적 습관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42) 하다는 니체의 비판을 받아들인다면, 문법적 습관을 바꾸는 것은 결국 ‘자아’의 모양을 바꾸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자면 ‘역사’의 종언과 함께 찾아온 ‘보편’과 ‘문학’의 종말을 애도하고, 대체하고, 그 상실을 외면하는 역사철학적 서사에 ‘미래파’를 위치시키는 것은 온당치 못한 해석이다. 애석하게도 “세계와 불화하고 세계와 자신 사이에 간극을 절감하며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세계의 실정성(Positivität)을 부정하는”43) 것을 ‘진정성’의 핵심적인 요건으로 삼았기에, ‘불화’가 끝난 ‘종언’ 이후의 문학은 그런 모습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미래파’라는 이름을 ‘개별’의 항으로 귀속시키고 ‘보편’과 대립되는 ‘왜소한’ 위치를 쥐여 준 것은 그런 인식의 부드러운 귀결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부정’의 정신이 없었다는 진단은 사실이었으되, ‘실정성’을 갖는 사회적 제도와의 결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음을 앞서 짧게 확인했다. 오히려 이들은 그러한 의사-보편을 형성시키는 힘으로서의 ‘문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런 ‘자아’가 아닌 다른 무엇을 향하는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었다.
    빛을 수집하던 ‘자아’라는 집광렌즈가 파괴됨에 따라 한 점에 모인 광선이 비로소 산란할 때, 그로부터 ‘아름다움’을 구하고, 확장된 ‘자아’를 찾는 것은 ‘자아’가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전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전제를 통해 결론을 들여오는 박상수의 진술은 기각되어야 한다. “‘언어’라는 상징 자본을 엄격하게 정련하고 통제하여 부르주아 계급의 미적 취향인 ‘우아함’에 도달하고 싶었던 무의식적 상승 욕망”44)은 기실 그런 ‘자아’를 형성해 온 힘으로서의 ‘문학’, 또는 제도로서의 ‘글쓰기’로부터 멀어지는 몸짓을 오독한 결과이다. “시대에서 주체로 가는 선로는 존재하는데 어째서 주체에서 시대로 가는 선로는 존재하지 않는가”45)라고 질문하며 신형철의 한계를 지적한 박상수는 정작 자신에 대해선 그렇게 질문하지 못했다.
    김홍중이 이들로부터 수동성을 읽은 것은 옳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박상수가 이들로부터 ‘능동성’을 읽은 것 또한 옳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주관적 지배를 통해 낭만적 승리를 얻으려던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문학’을 변화시키려 한 것이므로.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김홍중의 해석 역시 마찬가지로 전면적 개정을 요한다. “그러한 책무가 여타의 다른 제도로 이전된 텅 빈 백색의 공간에서,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어쩌면 순수한 놀이의 정신으로, 어쩌면 시 쓰기의 본질에 대한 무사심한 탐구심으로”.46) 이러한 진술은 특정한 종류의 ‘이상’을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으로 걸어 둔 채로, 숨은 전제를 망각한다. 어떤 ‘이상’을 가능케 만드는 ‘체계’, 또는 입사점으로서의 ‘자아’를 당연한 전제로 고정하며 그 전제 자체에 대한 의심을 거둔다. 그러나 실정적 제도와 무관한 곳에 위치하는 고독한 내면은 일부 시인에게 선망의 대상도, 애도의 대상도 아니었으며, 추구된 일 역시 없다.
    결국, 00년대의 변화를 ‘사회적 변화’에 귀속시키려는 시도는 절반의 타당성만을 지니는 것으로 밝혀진다. 문학사를 내재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율적 운동으로 이해한다면 오만한 주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배제한 논리 역시 어딘가 아쉬운 분석이 되고 만다. 사회적 변화에 대한 귀속으로부터 00년대에 대한 독해를 갱신하고 나면, 다시금 10년대로 눈을 돌리게 된다. 과연 박상수가 “‘하강하는-몰락하는 중간 계급’의 감각”으로 인해 “기묘하고 슬픈 아름다움 속에서” 드러나는 “‘부재(不在)’의 정서”47)를 확인한 10년대의 장면이 여전히 유효한지 묻게 된다.
    00년대를 문학사에 대한 개입으로 확인한 이상, 송승언의 시를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미적 가상’으로 축소한다면, 그의 진술을 찢고 나오는 어떤 돌출부를 잘라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송승언, 「녹음된 천사」)나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너는 발생하지도 않았는데”(송승언, 「셰이프시프터」)와 같은 문장에서 시적 주체는 객관적 현실에서 겪는 패배에 대해 주관적 승리를 선언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시라는 허구를 유지시킨 어떤 ‘환상’의 토대로서의 ‘설계’, 또는 시라는 장르가 존속하기 위해 필요한 믿음의 근거지로서의 ‘너’를 부정해 버린다. 시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과 전제를 부정하는 글쓰기라는 점에서, 이는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을 상처 없이 보존”48)하는 것일 수 없다. ‘환상’을 스스로 진술하고 부정하는 과정은 반대로 ‘자아’를 ‘실재’로부터 보호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형식’을 무너뜨려 ‘실재’와의 대면을 촉진하는 쪽에 가깝다.49) 장면과 장면의 이음매를 봉합하는 형식의 허구를 폭로하는 이 장면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환상’을 읽는 것도 신뢰하기 어려운 독해가 되겠지만, 10년대의 텍스트가 지시하는 내용을 ‘외부’의 객관적 현실이나, 그로부터의 미적 도피처로 추론하는 일은 확실히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송승언의 다른 시를 보자. “흥얼거렸네/ 어디서 배운 노래인지도 모른 채// 어디서 다 본 것들이지/ 어디서 다 들은 이야기들이지”(송승언, 「베테랑」) 앞의 진술은 시적 주체가 폐색감에 빠진 원인을 시인이 처한 경제적·사회적 현실로 추측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 박상수의 논지에 따르면 도피처여야 할 ‘문학’의 공간은 오히려 단독성의 환상을 밝혀 놓던 전구가 깨져버린 공간으로, 익명성의 환상마저 부정된 가운데 체념과 냉소, 적응과 음악을 반복하는 이 장소는 결코 ‘전능감’을 만족스럽게 즐길 탈출구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00년대에 대한 오래된 전제로서의 ‘현실’과 근본적으로 단절해야 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00년대의 시적 텍스트가 ‘현실’에 대한 ‘주체’의 ‘대응’으로 요약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0년대의 시인 또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1) 이들의 텍스트가 지시하는 대상은 ‘객관적’ 외부 현실인가? 2) 이들은 자신이 지시하는 대상을 긍정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할 힘이 있거나, 없는가? 3) 그러한 판단의 끝에 이들의 화자가 보여주는 태도는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가? 4) 그러한 적극성, 또는 소극성은 결국 ‘자아’의 ‘쾌락’에 귀속되는가?
    앞의 세 논점은 이전과 같이 볼 수 없음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00년대의 그들이 ‘실재’가 아닌 ‘쾌락’을 추구했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그 비판은 지젝의 ‘외설적 초자아’라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고, 그 개념을 발판으로 ‘법’과 ‘향유’를 덧대어 놓는다. 간략히 말하면, ‘초자아’의 명령을 수락하는 일 자체에 ‘향유’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논의를 단순화하자면, 미래파(또는 그에 대한 비평)가 추구한 바는 ‘윤리’가 아니라 다른 ‘도덕’이었고, 따라서 ‘실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를 재생산하며 그에 덧붙은 ‘향유’의 과육을 맛보는 것이 그 실체였다는 주장이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우리는 일견 절대적인 차이로 보이는 두 입장의 간격을 미래파의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실재’의 성격에 관한 논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미래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그 이론적 모형의 복잡성 덕택에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 있으며, 또 손쉽게 반박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지점에서 달려들어야 한다. 여기에 얽힌 오해를 풀지 않으면 우리가 꾸민 이 모든 일이 허사가 된다.

  41)  자세히 다루기 어렵지만, 조연호의 방식은 ‘주어진’ 과거의 우연을 ‘자신’의 선택이자 필연인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주어진 운명에 대한 능동적 주인으로 거듭나는 언술의 구조를 취한다. 이에 따라 그의 문장은 불가피하게 과거를 향하게 되지만 이를 이유로 그의 작업을 ‘퇴행’으로 쉽게 간주할 수는 없다. 그의 언술이 ‘회상’과 ‘재인’의 질서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42)  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 옮김,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2000, 책세상, p. 255.
  43)  김홍중,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한국사회학』 43권 5호, 2009, p. 10.
  44)  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한 경향」,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2018, 문학동네, p. 44, 45~46.
  45)  박상수, 「무한(無限)의 주인 – 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000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197.
  46)  김홍중, 심보선, 앞의 글, p. 129.
  47)  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한 경향」,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2018, 문학동네, p. 63.
  48)  같은 글, p. 66.
  49)  하지만 ‘실재’라는 범주를 대동하는 이론적 틀 자체를 폐기하는 편이 우리에게 이롭다.

 

    4. 칸트가 그어 놓은 경계선에 대응하는 실재의 위상학을 거절하겠다는 건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오해로 비롯된 일이라 말하는 것은 사태의 복잡성을 너무 크게 축소시키는 일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사실 이 모든 일은 ‘실재’라는 개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가 현상계와 예지계 사이를 단호하게 갈라놓으며 손에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물자체’를 배치한 시점에서 이 모든 오해는 예정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접근권이 부정된 ‘실재’를 다시금 긍정의 대상으로 복원하는 것은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을 확장하는 결과보다는 정오표만을 새로 고치는 일에 그칠 수 있다. 만약 ‘실재’라는 개념이 문제의 진원지라면 다시금 질문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진실은 언제나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앓는 자들의 편에”50) 있다는 신형철의 입장에 대해, “앓는 자들은 순수하게 앓지 않는”51)다고 박상수가 반론을 내놓는 시점에서 ‘실재’의 위치와 기능이 문제가 될 때, 우리는 무엇이 박상수와 신형철을 갈라놓았는지, 또 어쩌면 둘은 비판적 공모관계에 있지는 않은지 다시 질문할 필요가 있다. 신형철과 박상수를 나란히 놓아 보자.

  50)  신형철, 같은 글, p. 230.
  51)  박상수, 「무한(無限)의 주인 – 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000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195.

 

    90년대 초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 20대를 보낸 세대들에게 큰 타자의 심급은 아예 없었거나 거의 무력했다. 이 세대들에게 전통적인 가부장적 부권의 압력은 미약했고 상징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이데올로기 역시 치명적으로 위력적이지는 못했다. 정치적 억압과 성적 금기는 약화되었지만 너무 많은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아가 힘을 얻었고 ‘구별짓기’에의 욕망은 커졌지만 미디어의 영향력 때문에 자아들은 균질화 되었고 무차별성은 증대되었다. 현실이 전반적으로 가상화(virtualization) 되면서 실재(the Real)에 대한 열망은 강해졌고 그것은 도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사라져 가는 ‘나’를 확인해야 했고 구별되지 않는 ‘나’를 증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런 곤경이 얼마간 도착증적 태도를 초래했고 이런 환경이 새로운 시를 촉발했다. 나를 말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도 좋다.52)

 

    다만 역사와 사회와 정치라는 대타자의 실종, 혹은 아버지 권위의 몰락 앞에서 준거점을 찾지 못한 어떤 시적 주체들은 금기 없는 자유를 무작정 즐긴 것이 아니라 더 강한 개인적 준거점을 마련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때로 ‘강박적 반복’으로 나타났으며 ‘반복’은 ‘과잉’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법을 세우고, 개인 실존의 균열을 방어하고자 한 것이다.53)

  52)  신형철, 같은 글, p. 211.
  53)  박상수, 「2천년대 한국시 연구」, 『한국문예비평연구』 2015년 4월호 제46집, p. 74.

 

    순수하고 무용한 ‘시’에 대한 집요한 지지자라고 생각했던 신형철의 논의로부터 지금까지 확인한 표준적 논리의 얼개가 전부 확인된다는 점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회문화적 현실이 텍스트로 접혀 들어가는 지점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분석력, ‘자아’라는 매개항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논리, ‘주체’의 대응이 집약된 증거물로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앞선 박상수의 논리와 다른 점을 찾는 일이 오히려 어렵다. 비판하는 자와 비판되는 자, 둘 사이의 차이를 붙잡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차이를 누군가의 사소한 부주의로 취급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박상수가 00년대의 ‘윤리비평’에 대한 비판을 위해 김언의 시를 요약하며 “타자의 욕망에 응답해야 할 이유도, 근거도 사라지기 때문에 타자와 대면하여 불필요한 불안에 시달릴 이유도 없”54)다고 말할 때, 그가 후기 라캉의 윤리를 기점으로 움직이는 00년대 비평과 불화하게 되는 지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후기 라캉의 ‘윤리’를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타자’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소외된’ 주체가 ‘환상’을 가로질러 자신의 고유한 ‘향유’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향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상징계’ 이전의 그것이 아니라 그것의 비틀림으로 등장한, 설명을 초과하는 잉여물이다. 정신분석학의 수용과 보급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젝에 따르면 “실재는 상징적인 구조의 뒤틀림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후에 축조되어야만 하는 실체”55)로서, 상징계 ‘이전에’ 존재했으나 유실된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사후적으로, 상징계의 실패로 인해 요청되는 범주에 가깝다. ‘실재’는 상징계와 독립적으로, 전적인 ‘바깥’에 외따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시스템 사이로 힐끗 보이는 틈의 모습에 가깝다. 박상수가 정신분석학의 ‘윤리’에서 비윤리성을 검출하게 되는 핵심적 계기로서의 ‘타자’는 사실 정신분석학의 ‘실재’와 묘한 거리가 있는 범주인 셈이다. ‘윤리비평’에서 마주하도록 권장하는 ‘실재’를 박상수가 ‘타자’와 같은 층위에 배치하고 있다는 결정적 진술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자신의 오랜 논지를 요약하는 방식은 그가 ‘실재’를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추측하기에 넉넉하다. “2천년대 ‘윤리비평’은 이들의 작품을 ‘소수자에 대한 인정’, ‘차이 긍정’의 윤리로 뒤바꾸어 ‘약자 승인’의 맥락 속에 이들을 지지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하였다.”56) 하지만 신형철이 ‘뉴웨이브’를 해설하는 맥락에선 ‘타자’를 아래와 같이 이해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타자’는 결코 긍정적인 대상이 아니고, 응답의 대상으로 취급되기도 어렵다.

  54)  같은 글, p. 67.
  55)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002, 인간사랑, p. 275.
  56)  박상수, 앞의 글, p. 58.

 

    자아는 아버지, 동료들, 국가, 민족, 이데올로기······ 등등의 타자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 타자들의 권위가 허물어질 경우 자아 역시 사상누각이 됩니다. 오늘날 뉴웨이브들이 서 있는 위치가 바로 그 사상(沙上)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누각(樓閣)의 허구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57)

  57)  신형철,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 – 뉴웨이브 총론」, 『몰락의 에티카』, 2008, 문학동네, p. 274.

 

    신형철에게 00년대의 시는 ‘(대)타자의 결여’와의 조우에 의해서 발아한다. 00년대의 시로부터 읽히는 어떤 ‘증환(sinthome)’은 알고 있다고 가정된 ‘타자’의 은폐된 어떤 무능력과의 조우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전제되고, 기표의 반복 속에서 그 거짓을 마주하게 되는 것을 ‘윤리’, 더 나아가 문학의 본령으로 삼는 것이다. 신형철이 보기에 환상과 증상이 교차할 자리로부터 박상수는 ‘능동적’ 방어 작용인 환상만을 승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때의 주체는 실재와 대면하려는 의지가 없이 자기가 ‘견딜 만한 수준의 고통’만을 반복하는 것”58)이라고.
    이러한 차이는 박상수가 윤리, 주체, 실재라는 묶음을 도덕, 자아, 쾌락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 같이, 후기 라캉의 정식에서 ‘쾌락’ 또는 ‘향유’는 ‘윤리’와 대립하지 않는다. 어떤 ‘쾌락’이 윤리로 이름 되는 것은, 상징화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에 대한 ‘향유’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그만두도록 만듦으로써 기존 상징질서의 재생산을 멈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상수가 후기 라캉의 ‘윤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해’가 빚어진 것이라고 단정하긴 아직 이르다.
    ‘향유’의 해석에서 발생하는 차이의 숨은 배경은 ‘타자’ 또는 ‘초자아’의 성격이다. 즐기라는 향유의 명령을 내리는 ‘외설적 초자아’를 보느냐, 또는 이미 부재하는 ‘대타자’를 보느냐 하는 관점에 따라 ‘환상’과 ‘증환’이 결정된다. 박상수의 경우엔 ‘초자아’가 이미 ‘향유’까지 집어삼킨 사회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기에, 즐기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지점으로부터 구조의 재생산을 멈추는 전복적 ‘행위’를 찾아낼 수 없다. ‘초자아’와 ‘대타자’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 따라 10년대의 김승일에 대한 해석 역시 분기한다. 김승일의 첫 시집이 뿌리내리고 있는 정황에 대한 해석이 “자기가 아니어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애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공적 기대가 어느 정도는 유지”59)되는 상황과 “말하자면 ‘에듀케이션’의 공백 상태”60)라는 진단으로 나뉘는 두 갈래 길목에서, 당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에 대한 해석이 텍스트의 해석에 침범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크게 다르지 않은 이론적 캠프에 속하는 두 평론가가 정신분석학적 ‘윤리’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갖고, 텍스트로부터 특정한 형상을 찾아내는 일에는 ‘현실’이라는 심급에 대한 해석이 분명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보였던 대립엔 ‘현실’의 ‘대타자’와 ‘초자아’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잠복하고 있다. 박상수는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실재’의 조각을 ‘초자아’에 귀속시킨 뒤, 그로부터 전복적 역량을 부정한다면, 신형철은 그 ‘실재’를 ‘증환’과 엮음으로써 ‘도착증(Perversion/Père-version)’이라는 개념 속에 잠재된 건설적 역량을 최대치로 조명한다.
    물론 이러한 차이를 단순히 ‘현실’에 대한 상이한 시선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순진하다. 비록 신형철의 논리가 그 자신의 이론적 출처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거대서사의 붕괴’를 극복하려는 당대의 비평적 과제와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론적 구조물 사이의 결합을 함께 보는 편이 옳다. 위기를 겪는 이의 눈에 정신분석학은 ‘역사의 종언’ 이후의 문학, ‘타자’와 무관한 층위에서 자기 충족적 운동만을 반복하는 (코제브의 맥락에서) ‘동물’적인 문학으로부터 다른 의미화를 허락하는 이론적 잠재성을 내장한 구조물이다. 이렇게 바라볼 때, 00년대 비평이 놓인 여러 배경들은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론적 구조물의 기계적 적용을 방해하는 잡음으로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통상의 정신분석학적 전제들을 다소 피해 가는 박상수의 해석보다 증환과 도착증의 논리에 충실한 신형철의 해석이 후기 라캉에 가깝다는 이유로 신형철의 손을 드는 것은 불필요하다. 이론적 정교함을 근거로도 신형철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할 수는 없는데, 이는 박상수가 정신분석학의 ‘윤리’에 ‘타자의 윤리’라는 문제를 설치하려는 이론적 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가 라플랑슈와 레비나스를 정신분석학에 들여놓으면서 ‘주체화 과정’에서 ‘타자’의 역할에 문제를 제기한 바61)를 고려한다면, ‘타자’와 그 책임에 대한 요청은 정신분석학의 윤리에 대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개입들 가운데 하나다.
    종국에 주목을 요하는 지점은 이론과의 정합성에 관한 부분이 아니다. 사회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텍스트 분석이 결합하며 서로를 굴절시키는 과정이 복잡하고 능동적인 결정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형철의 도식 또한 그러한 굴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신형철이 보여준 ‘정신분석학’적 도식은 이론의 기계적 적용이 아니라 고도의 미세 조정과 사소한 굴절을 모두 거친 뒤에 등장할 수 있는 판본이다.
    이 자리에서 결정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의 이론이 다른 누구에 비해 더 정확하다는 어려운 결론이 아니다. 간결한 대답은, 비평에서 윤리의 과잉을 발견하는 이가, ‘윤리’와 무관하다는 ‘텍스트’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마찬가지의 조급함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에 대한 이론과 해석이 텍스트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는 당연한 귀결을 부러 내려고 한다. ‘독자’의 발견에 냉소를 유지하는 이들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태도는 사실 그 자신 역시 독자임을 무심히 지나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제 신형철과 박상수 사이에 불가능한 동맹이 맺어지기 위해 덮어쓰기 된 ‘현실’은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 마무리를 준비할 수 있다. 앞서 00년대에 발견된 ‘나르시시즘’에 관한 많은 논의가 ‘대타자’의 소멸로부터 ‘리비도’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정신분석학적 논리에 입각해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다른 많은 이들이 터를 잡고 있는 논리이기도 하지만, 신형철의 논리적 물줄기를 책임지는 큰 전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상수는 10년대의 시적 텍스트로부터 ‘세카이계’, 즉, “‘나’와 ‘세계’가 날것으로 직접 만나는”62) 서브컬처 문화와의 친연성을 발견하기 위해 00년대의 텍스트에는 ‘대타자’가 건재한 세계를 배당해 주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빌려오는 논리들에서 ‘내면’과 ‘자아’ 그리고 ‘자기애’가 발견되는 것은 ‘대상의 상실’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00년대에 대한 박상수의 입장은 헤어 나오기 어려운 논리적 곤경에 처한다.
    애초에 실재로부터 주체를 보호하는 상징 질서가 붕괴하지 않았다면 그로부터 틈입하는 실재를 방어하는 환상이라는 논리는 살아남기 어렵다. 또한 대타자가 건재하던 00년대의 시적 주체들이 “나르시시즘을 가장 유능한 시종으로 거느린”63)다고 말한다면, ‘나르시시즘’이라는 진단이 나오기 위해 전제된 여러 맥락과 심지어 상충되기까지 한다. 서로 다른 전제로부터 크게 다르지 않은 독해가 나오고, 그에 대해 상반되는 주장이 정신분석학이라는 독법 내에 존재할 수 있음은 시사적이다. 그렇게나 이질적인 전제들 사이에서 유사한 독해가 도출될 수 있었던 일은 그 자체로 00년대의 시를 둘러싼 담론에 대한 의심을 가중시킨다. 어쩌면 ‘실재’의 위치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를 파기할 전제로 삼아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형철이 『근대일본 문학의 기원』에서 운용되던 논리를 전격적으로 탈취하여 실재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개시하는 지점은 우리가 품은 의심에 가속도를 부여한다.

  58)  박상수, 「무한(無限)의 주인 – 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000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197.
  59)  박상수,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 2010년대 시와 시 비평에 관하여」,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2018, 문학동네, p. 112.
  60)  신형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p. 380. “이 소년에게 문제가 되는 상황은 억압하는 대타자가 아니라 오히려 부재하는 대타자”라는 함돈균의 지적 또한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 있어 현실에 대한 해석이 결정적임을 짐작하게 한다.
  61)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 『윤리적 폭력 비판 –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2013, 인간사랑.
  62)  박상수,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 2010년대 시와 시 비평에 관하여」,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2018, 문학동네, p. 109.
  63)  박상수, 「귀족예절론 – 감정의 귀족주의자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76.

 

    일반적으로 그것[‘나’에게 충실하겠다는 것]은 나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들이 있다. ‘실재의 시’라고 명명할 수 있을 일련의 시들이 2000년대 시의 한 흐름을 이룬다. 그러나 ‘표면의 시’를 쓰는 이들은 그것이 일종의 통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심층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나’를 창조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64)

  64)  신형철, 「미니마 퍼스펙티비아(minima perspectivia) – 시의 ‘깊이’에 대한 단상」, 『몰락의 에티카』, 2008, 문학동네, p. 294~295, [ ] 안의 내용은 인용자의 것.

 

    ‘실재’에 대한 일관성 있는 태도를 취하는 대신 작품에 따라 다소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일을 흠잡을 필요는 없다. 가라타니 고진의 ‘원근법’을 통해 문제를 조명하며 이장욱의 평론을 인용하는 장면은 그가 실재에 투항하는 대신 원근법의 파괴자로 등장하는 ‘미래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실재에 대한 열정에 대한 열정’으로 코드화된 신형철의 비평엔 놀랍게도 그것을 거절하는 장면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 비일관성을 비난하는 것은 역시 불필요하다. 라캉의 계열로 합류할 수 없는 종류의 시에 대해선 들뢰즈를 선택적으로 기용함으로써 우회하는 운용법이 성립할 수 있는 배경엔, 후기 라캉과 『안티-오이디푸스』의 저자인 들뢰즈가 모두 ‘재생산’의 반대자라는 점이 크게 작동할 것이란 예상을 할 수 있다. ‘질서’와 ‘재생산’의 반대자라는 유약한 끈으로 두 이론가의 이름이 위태롭게 엮인 모습으로부터 확인하듯, 비평은 텍스트라는 정화될 수 없는 혼합물을 상대하기 위해, 설치된 내적 비일관성이 터지길 기다리며 째깍거리는 복합적 실천의 산물이다.
    신형철이 옳게 말을 했다면, (종종 오해될지라도) 굳이 에두를 필요는 없다. 그들은 애초에 ‘실재’를 추구한 바가 없다. 우리가 파괴해야 할 것은 실재계-상상계-상징계라는 잘못된 위상학이다. 셋을 도식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보로메오의 매듭으로 엮는 논법 또한 피해야 한다. 저 셋을 정렬하고 엎어 놓고 혼탁하게 뒤섞는 모든 과정이 ‘주체화 과정’이라는 이론적 픽션을 통해 구성되고 있을 때, 그 픽션은 때때로 ‘사회학적’ 거대 서사 — 거대 서사의 상실이라는 거대 서사 — 를 은밀히 들여오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거대 서사(의 부재)가 오히려 이론을 들여오는 부분 또한 있지만, 둘은 분명한 공생적 관계 속에서 몸집을 불린다.
    어떤 개념은 그 자체로 이미 특정한 사회학적 서사를 요구한다. 현실에 대한 해석을 결정하고 또 부추기며, 어쩌면 그런 해석에 대한 대답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할 때, 어떤 개념은 그것을 도입하는 순간 그 이전과 같게 볼 수 없도록 현실을 바꿔 놓는다. 그러므로 정녕 문제 되는 일은 ‘개념’을 발명하고 손질하고 점검하고 퇴출하는 일이다.
    ‘실재’라는 개념과 그 적용은 단순한 도식의 기계적 적용에 그치지 않는다. 그 틀이 전제로 요구하는 외적 배경과 서사를 함께 수반하며, 이에 따라 ‘생존주의’ 혹은 ‘역사의 종언’이라는 해석은 텍스트로부터 발견되어야 할 개념과 그 해석을 결정하는 표준적 위력을 행사했다. ‘역사’ 속의 ‘진정성’의 숨은 전제는 “세계와 불화하고 세계와 자신 사이의 간극을 절감하며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세계의 실정성(Positivität)을 부정하는”65) 것이었기에, 불화하지 않는 종류의 ‘진정성’은 꼭 한 번은 부정되어야 했다. 김영찬이 “문학을 문학으로 만드는 것은 그렇게 환원되지 않는 잉여이고, 일탈이며, 거리 두기이다. 다른 제도적 산물들과 구별되는 문학의 경계와 자기 정체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기원에 대한 부인을 통해 구획된”66)다고 했을 때, 드러나는 전제 또한 그것이다. ‘쓸모’의 바깥에 문학을 배치해 두고 그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던 종류의, 입가에 맴도는 헤겔의 저주로는 긍정의 민낯을 보고도 축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다른 것을 먹고, 다른 것을 마시고, 다른 것을 입고, 다른 것에 웃음으로써 이미 종래의 세계를 바꿔 왔다. 무엇과도 불화하지 않으면서 세계를 바꾸는 힘이 부정되었을 때, 세계를 바라보는 오래된 시선과 개념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지점을 일소하지 않고서는 10년대를 다르게 보는 것 또한 요원하다. 자본주의를 영속화하는 부역 행위로 취급되곤 하는 어떤 소비는 오히려 그 자본주의에 정확히 반대되는 일로써 집행된다.
    이제 즉각적인 기각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진단과 가정이 있다. 복도훈이 진은영의 논리를 훑은 뒤, “‘문학의 정치’는 가라타니의 ‘정치의 문학’이 떠난 빈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카섹시스 대상”67)이 된다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은 결정적인 결함에 힘입으며, 선결 논제를 묻어버린 채 성립된다. 문학의 ‘장’에 새로이 입장하는 이들은 애초에 그 ‘정치’에 리비도를 투자한 바 없으며, 그러므로 힘겨운 ‘회수’도 없고, 그 힘겨움을 외면하기 위해 요동치듯 ‘대상’을 바꿔댈 필요 또한 없다. 그것은 이전 세대의 문학적 충동이 좌절된 것에 대해 후대의 문학이 이를 보존할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거나, 보편에 대한 열망을 자연화 하는 것이다.
    진은영의 ‘정치’를 살펴본 뒤에 다시금 ‘유머’를 주장하는 복도훈에게 돌려줘야 할 문장은 바로 이렇다. “그래서 유머의 정치학자들은 완전무결한 하나의 허구인 상징계가 폭로를 통해 한순간 본래의 실재로 변화한다는 이데올로기론의 낡은 버전을 믿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의 상징계를 순식간에 새로운 상징계로 변모시키는 실천이 가능하다고도 보지 않는다. 새로운 방식으로 출현하는 하나의 세계가 허구를 벗어던진 참다운 실재인지 또 다른 상징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68) 그들은 ‘보편’의 부재와 상실을 슬퍼하거나, 대체하거나, 재발명하거나, 관심을 돌림으로써 위로를 얻기엔 시간이 아까운 사람들이다.
    00년대를 향한 오해는 진은영에게 ‘유머’의 방법이 (복도훈에게와 달리) ‘히스테리 담론’이 아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주인 담론’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상징계’로부터 ‘실재’와의 이격을 발견하고, 이 거리가 부재하는 참된 ‘실재’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이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이 결심한 이주는 애초에 ‘실재계’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재와의 대면을 부정하고 오로지 현실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는, 오히려 ‘자아’에 가까운”69) 것을 발견하는 것은 ‘만족’을 추구하는 주체를 말했다는 점에서 00년대의 시에 대한 절반쯤 옳은 독법이다. 다만 그들의 ‘쾌락’은 애초에 ‘실재’를 향할 생각이 없었고, 비윤리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쾌락’을 ‘실재’와의 대립항으로 간주되는 ‘자아’의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오래된 도식의 단순한 결과물이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거대 서사와 인사해야 할 이유는 이제 더없이 명백하다. ‘탈역사’의 시대의 ‘동물’이 “안락과 편리가 주어진 육괴적(肉塊的) 생존에 대한 ‘만족’만을 느낄 뿐”70)이라는 역사철학적 전제는 텍스트의 성격을 이해하고 규명함에 있어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전제는 어쩌면 ‘타자’의 욕망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텍스트를 긍정하기 위해 특정한 이론적 구조물을 들여오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또한 ‘환상’이라는 독법을 사전에 결정해 두고 텍스트의 의미 지평을 축소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 속에서 ‘역사’의 전개는 ‘부정’의 정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들로부터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박탈되었다.
    그렇지만 ‘사회학’을 청산하는 것으로 끝마친다면 마찬가지로 유쾌하지 못한 결론이 된다. 소박한 ‘텍스트’ 중심주의 역시 사회학적 전제들에 오염된 독서를 피할 길은 없다. 앞서 살핀 것과 같이, 만약 텍스트에 대한 구체적 해석이 ‘사회학’과의 밀월 관계를 피할 수 없다면, 일단은 “마음은 구조화하는 구조인 동시에 구조화된 구조”71)라는 규정에 담겨 있는 부르디외를 피하지 않고 반복해야 한다. 미래파의 “시적 기획은 타자의 인정이나 다른 문학적 경계를 고려하지 않은 ‘자폐적’인 시가 아니라, 기존의 문학적인 전통 아래에서 기성 미학에 대항하여 ‘무엇이 좋은 시인가?’에 대한 정의를 재정의하고자 벌어진 투쟁의 산물”72)이라는 단서 조건을 걸되, 여전히 전제로 걸린 부정의 정신을 중화해야 한다. 외국의 한 비평가의 선언으로 촉발된 반성적 판단이 다른 형식으로 축적되어, 주체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로서의 ‘문학’에 대한 변화를 이끈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율성과 부정성의 뒷맛을 청소하는 편이 더 좋다는 뜻이다. 여전히 부르디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면 ‘장’에 속한 행위자들의 최종적 목표가 상징자본의 축적만이 아님은 물론이고, 또 행위자들은 ‘장’의 규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어떤 환상(illusio)에 동참하지 않고도 실용적으로 ‘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정도의 몇 가지 추가적 가정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무언가의 부재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문제는 작품을 사회적 구조의 부속물로 보는 대신, 작가를 (장에 속한) 사회적 행위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평의 자리는 진료가 이루어지는 카우치와 꼭 같을 수만은 없다. 텍스트가 비평을 입고 나타난다면, 둘 사이의 빈번한 교대를 나름의 방식으로 긍정하는 선에서만 비평은 유효할 수 있다. 종언이라는 선언이 자신을 은폐하고 비밀스러운 권좌 속에서 머물고 있을 때, 우리는 널뛰기 이후의 현기증 속에서 그 기원을 역사화하는 선에서만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

  65)  김홍중, 앞의 글, p. 10.
  66)  김영찬, 「문학연구의 우울」, 『문학이 하는 일』, 2019, 창비, p. 117.
  67)  복도훈, 앞의 글, p. 100.
  68)  진은영, 「감응(Affect)과 유머의 정치학」, 『시대와 철학』 18권 2호, 2007, p. 448.
  69)  박상수, 「무한(無限)의 주인 – 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000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 『귀족예절론』, 2012, 문예중앙, p. 202.
  70)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2011, 문학동네, p. 58.
  71)  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2016, 문학동네, p. 529.
  72)  김남진, 「죽은 시인의 사회 – 한국 미래파에 대한 장 이론적 분석」, 서강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8, p. 62.

 

 

 

 

 

 

 

 

 

 

 

 

 

 

사진 : 홍석영(@imsomewhereinthestreet, 2019)
작가소개 / 민경환

평론을 쓴다. 갚아야 할 것이 많다.

 

   《문장웹진 202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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