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되지 않는 시

[문학더하기(+)]

2010 다시-읽기 Re-View
– 《문장웹진》에서 실시한 2010년대 문학 설문 결과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다시’ 읽어봐야 할 작품에 대한 리뷰

 

 

말이 되지 않는 시

– 박지혜 『햇빛』

 

 

김동진

 

 

 

    1.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오래 하는 일은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책상에 머리를 박고 고민하는 것이다. 더 적절한 표현, 정확한 문장을 쓰기 위해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기표와 기의의 연결이 자의적이라는 점에서 이미 언어는 태생적으로 의미 전달의 한계를 갖고 있다. 아무리 명확한 어휘와 정확한 문장을 구사한다고 해도, 글에 실리지 못하고 넘쳐 분실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달리고 싶은 게 작가다. 사유를 완벽하게 담을 수 없는 것이 언어의 숙명이라면, 언제까지고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잡고 씨름하는 것이 작가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작가들이 언어를 다루는 고유한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보다 섬세하게 언어를 파악하고 조작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미학적 성취를 달성하고 개성을 획득하기 위해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연구하고 습득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박지혜 시인의 『햇빛』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시인이 펼쳐내는 문장들은 논리적 연결이 다소 부자연스럽거나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 편의 시 안에서든 시집 전체에 걸쳐서든 필요 이상으로 반복되는 구절 역시 많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의미가 아니라 말을 꺼내는 방식 자체를 들여다볼 때, 우리는 시인이 언어적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2.

 

    소금 헝겊을 들고 소금 가마니는 아니고 올이 굵은 소금 헝겊을 들고 소금 가마니는 아니고 이런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닌데 그렇지만 도무지 다른 말을 하기가 어렵고 시작은 아무거나 하면 되고 소금 할아버지는 눈이 멀고 눈먼 눈 속 소금 사막이 들어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고 도대체 말해 본 적 없는 시간은 너에게 들어가고 소금 헝겊 소금 가마니는 아니고 아직도 다른 말을 하지 못하지만 시작은 아무거나 하고 너는 소금 사막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소금 사막이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고 이런 건 말이 되지 못했고 그래도 말이 되지 못한 말들로 움직였고 여전히 버석거리는 말들은 소금 헝겊을 들고 올이 굵은 소금 헝겊을 들고

 

– 「올」 전문

 

    “시작은 아무거나 하면” 되기에 정말 아무렇게나 뱉어낸 말이라는 듯, 화자는 “소금 헝겊”과 관련한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으면서 시를 연다.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에 매몰된 사람처럼 화자는 횡설수설 문장을 잇고, 읽는 이들이 따라가기 힘든 간격으로 의미들이 배치된다. 독자는 할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 뒤에 감춰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데 집중한다. 그런데 자꾸 “소금 헝겊”이 튀어나온다. 의도적으로, 매우 자주 반복되는 이 단어는 독자들의 시선과 집중을 끌어당긴다. 시인은 의미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눈먼 “소금 할아버지”나 “소금 사막”처럼 하고 싶은 말을 보여줄 것 같은 시어들 사이에 “소금 헝겊”을 반복적으로 삽입하여 의미를 연결해 낼 수 있는 지점을 끊어내는 것이다. 흩어진 시어들이 굵은 올처럼 얼기설기 시를 짜 올리고, 독자들은 그 틈을 메우려 시도하지만 모호한 이미지와 반복구를 아우르는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때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그래도 말이 되지 못한 말들로 움직였”다는 화자의 진술이다. 그것은 「올」 자체에 대한 화자의 평가다. 「올」은 시어들을 따라 연결되는 의미들의 간격이 발생시키는 리듬에 의해 시가 된다. 의미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조작하는 기표가 텍스트를 견인하고 있다. 의미를 건조하다 무너뜨리고 다시 건조하다 무너뜨리는 그 리듬이 바로 「올」이 시가 되는 지점이다. 이처럼 의미보다 기표를 앞에 두고 시를 읽을 때 박지혜 시인의 작품들은 빛을 내기 시작한다.

 

    핑크문은 분홍문이거나 분홍달이거나 무엇이지 그렇다고 분홍문이나 분홍달이 핑크문이 되는 건 아니야 외로운 핑크문은 입이 사라져 말을 하지 못하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을 떠돌고 영원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 영원에 대해서는 흰빛 속으로 들어간 그림자에게 물어보면 된다 영원과 흰빛에 고유한 감각을 가진 핑크문은 누군가 영원을 물어봐주기를 흥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은 흥분한 분홍문이 되어야지 흥분한 분홍문 흥분한 분홍문 흥분한 분홍문의 결정체가 되어야지

 

– 「핑크문」 부분

 

    「핑크문」 역시 마찬가지다. 풀리지 않는 시어들과 정황들이 가득하다. 눈에 띄는 것은 화자와 대상의 거리감이다. “외로운 핑크문은 입이 사라져 말을 하지 못하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을 떠”돈다는 “핑크문”에 대한 서술은, 화자가 겉으로 드러나는 핑크문의 특성을 관찰하며 기술한 문장이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영원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는 다르다. “핑크문은 누군가 영원을 물어봐주기를 흥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서술로 미루어볼 때, ‘영원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한 주체는 화자가 아니라 관찰 대상에 자리하고 있던 핑크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인용 표지도 없이 화자는 그것을 자신의 문장 안에 삽입하고 있다. 마치 순간적으로 기존의 화자와 핑크문이 결합되어 복수 주체가 되는 듯한 모습이다. 흔들리는 발화 주체는 이어지는 문장들의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흥분한 분홍문”이 되겠다는 문장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핑크문을 관찰하던 화자인지, 또는 핑크문인지 아니면 그 둘을 모두 포함하는 복수 주체인지 불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의미의 혼란이 가중된 뒤에 “흥분한 분홍문”이 반복된다.
    “흥분한”과 “분홍문”의 반복에서 독자들은 ‘분’의 반복과 앞뒤로 배치된 ‘흥’과 ‘홍’이 갖는 발음의 유사성을 감지하며 문자 자체의 특성을 환기하게 된다. 문자와 연결된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본래 특정한 소리를 시각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반복되는 어구에 증폭되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의미를 기표 밖으로 밀어낸다.

 

    산토끼의 바보를 처음 보았을 때 너무 좋아 너에게로 달려갔다 부끄러운 뺨이 되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산토끼의 바보 산토끼의 바보라고 발음하며 토끼의 귀를 만든 손을 접었다 폈다 반복했다 시인의 산토끼의 바보 때문에 나는 산토끼의 바보가 되었다 산토끼의 바보 산토끼의 바보 산토끼의 바보가 눈길로 달려간다 산토끼의 바보가 사라지는 기억으로 미끄러진다 사라지는 사라진 것을 바라본다 산토끼의 바보가 산산이 부서진다 산토끼의 바보가 29일에 만나자고 약속한다 산토끼의 바보가 커피와 포도주를 나눠 먹는다 까마귀가 비둘기의 알을 물고 날아간다 뭐라 말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하는 어미 새를 끌어안고 울고 싶은 아침 아침의 충격 아침의 연민 아침의 파르티타 아침의 파꽃 산토끼의 바보는 산토끼의 바보니까 깨닫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산토끼의 바보가 끝없이 생각한다 산토끼의 바보가 곡선을 그린다 테두리를 그린다 잠과 잠 밖에서 산토끼의 바보가 죽은 것을 불러낸다 기다린다 산토끼의 바보가 사랑을 한다 산토끼의 바보는 산토끼의 바보니까 연민의 절정 연민의 정수 산토끼의 바보는 산토끼의 바보 산토끼의 바보 산토끼의 바보

 

– 「산토끼의 바보」 전문

 

    “산토끼의 바보”의 의미는 시집 『햇빛』에 등장하는 시어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매우 난해하게 느껴진다.1) 두 가지 명사의 신선하고 흥미로운 조합이지만 논리적인 의미 관계가 성립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비유적 표현으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해석의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들을 찾기가 힘들다. 그러나 “산토끼의 바보가 눈길로 달려간다”거나 “산토끼의 바보가 29일에 만나자고 약속을 한다”는 것, 그리고 “산토끼의 바보가 커피와 포도주를 나눠 먹는다”거나 “산토끼의 바보가 사랑을 한다”는 문장들에서 우리는 ‘산토끼의 바보’가 누군가의 이름, 즉 고유명사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고유명사는 다른 명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획득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에서 떠올리는 것은 그와 내가 함께한 기억과, 그것을 통과하며 형성되고 그에게 부여된 이미지다. 즉, 이름은 처음에는 기표만 존재하는 텅 빈 상자와 같지만, 그 이름을 가진 존재와 함께 만드는 기억들이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시인이 “산토끼의 바보”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방식은 그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산토끼의 바보”를 처음 보고 누군가에게 달려가거나,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산토끼의 바보라고 발음하며” 토끼 귀를 흉내 내는 화자를 목격한다. 그러고는 “눈길로 달려”가거나 “산산이 부서”지는, “커피와 포도주를 나눠 먹는” 산토끼의 바보를 본다. 이 모든 진술들은 화자와 관련된 “산토끼의 바보”에 대한 이야기다. 화자는 “산토끼의 바보”를 ‘산토끼의 바보’에 적층시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일반적인 언어에서 ‘산토끼의 바보’가 갖는 의미를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화자의 삶에서 부여되는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1)  의외의 사실이 하나 있다면, ‘산토끼의 바보’가 텀블벅 후원을 받아 간행되었던 ‘키친테이블라이팅 계간문예지’ 『영향력』에 글을 몇 번 실었던 작가의 필명과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의 내용 중 “시인의 산토끼의 바보”라거나 그와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을 보면 시어 “산토끼의 바보”가 해당 작가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시인의 입술은 “객관을 모르는 입술”(「하루」) 같다. 객관적 의미들을 담는 언어를 시인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고민 끝에 시인이 선택한 말하기 방식이다. 그가 『햇빛』 안에 세운 화용의 틀이자, 게임의 규칙이다. 기표가 의미를 견인하고, 객관을 걷어내고 주관을 주입하는 그의 시는 논리적 의미가 아니라 암시와 이미지로 가득 찬다.
    『햇빛』에 많은 반복이 존재하는 것은 객관을 탈피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다. 하나의 시 내부에서 같은 시어들이 반복되는 경우도 많지만, 각기 다른 시편에서 비슷한 이미지가 발견되거나 동일한 시어들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시인의 계산에 따른 결과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단어와 단어를, 이미지와 이미지를 충돌시키며 객관화되어 있는 의미를 제거해 나가고 다양한 정황과 국면에 시어를 접속시키며 기존의 의미를 확장하고 비틀어낸다. 자신의 텍스트가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의미화 되기를 거부하는 시인은 의미를 분산시키고 소거한다. 의미가 사라진 기표의 소리를 증폭시키고, 기표 안으로 사적인 기억과 이미지들을 삽입하여 새로운 의미의 영역으로 기표를 날려 보낸다. 그것은 언어가 갖는 태생적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시인의 언어적 실험이다.
    성공만 했을 리는 없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감정의 기록에 자주 실패하고” “점점 말하는 법을 잊어가고” 차라리 “이대로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하지의 노래」)다고 느낄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시인은 시를 썼다. 그것은 “슬픔을 말하지 않고도 슬픔이 되고 싶었”(「거품섬」)던 욕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온전함을 말하고 싶은 욕망이 시인을 추동하고, 시를 쓰게 한다. 시인은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말을 고민한다. “내일은 불가능한 시를 쓰는 손가락을”(「아침」) 주울 것이라 믿으면서, 시인은 오늘도 “조금도 두렵지 않은 완전한 숲”(「햇빛」) 같은 시를 쓰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김동진

작가소개 / 김동진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장웹진 202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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