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밖 고라니

[단편소설]

 

 

궤도 밖 고라니

 

 

이한솔

 

 

 

    원장은 추석이 다 지난 뒤에야 추석 선물을 줬다. 지금이 11월이고, 올해 추석은 9월 중순이었으니 두 달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르고 준 셈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안 주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은 원장에게 검정 쇼핑백을 건네받던 순간부터, 집에 돌아온 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았다. 쇼핑백에 상표라도 쓰여 있으면 기대라도 해보겠는데 아무 무늬도 없이 그저 까맣기만 했다. 심지어 투명 테이프로 입구가 꼼꼼히 여며져 있어 안에 든 내용물을 열어 볼 수도 없었다. 집으로 오는 길엔 뭐가 들어 있을지 궁금했지만, 침대에 드러누우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피곤하다. 저건 내일 뜯어 봐도 괜찮겠지. 내일도 피곤하다면 주말에 열어 보자. 누운 채로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자면 안 되는데, 씻고 자야 하는데, 적어도 양치와 세수는 하고 자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피곤함과 최소한의 인간다움이 싸웠지만, 비강이 크게 진동하는 느낌이 들더니 금세 잠들었다. 그러나 금방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대학 동기로부터 문자가 왔다. 대학생 시절 캠퍼스 커플이었던 전 남자친구가 K 전자로 최종 합격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기업에 걔가 왜 붙어. 학생회장을 한 적이 있어서? 학점이 높았나? 아님, 낙하산인가. 문득 그 사람과 연애했던 두 해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께 수업을 빼먹은 적도 자주 있었고, 시험 기간에 즉흥적으로 기차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다. 더군다나 그때 나는 일학년이었고 그 사람은 군대를 다녀와 삼학년이었는데, 연애 때문에 말아먹으려면 나보다는 그쪽에 차질이 생겨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외우고 있던 그 사람의 SNS 아이디를 검색해 보았다. 팔로우하지 않고 검색을 통해 종종 들어갔었다. ‘얼마나 잘사나 보자’ 하는 마음에 근황이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의 공간에 내가 다녀간 흔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전 애인의 SNS란 그런 애매한 껄끄러움이었다. 그의 타임라인에는 K 전자의 사원증이 떡하니 올라온 채로 ‘최종 합격 후 연수 중’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사원증 안 활짝 웃고 있는 그 사람의 증명사진이 눈에 띄었다. 발목 언저리서부터 짜증이 밀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문득 그 사람이 연애 중일 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이래서 안 돼.” 그 말은 헤어지고 나서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나를 옥죄었다. 취업을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뭘 파는지도 모르는 작은 회사의 면접을 숱하게 봐도 번번이 떨어졌었다. 그때마다 대뜸 결혼이나 임신 계획을 묻는 면접관 앞에서 멋쩍게 웃고 나와야 했었다. 내가 걷는 길마다 돌부리를 놓던 ‘이래서’는 언제나 나를 꼬리표처럼 붙잡았다. 넋이 나가 가슴팍에 여전히 수험표를 매단 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날들이었다. 지금은 직장이 생겼다. K 전자는커녕 동네의 작은 학원이라는 것은 흠이었다. 나는 아침 지하철의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인 채로 휴대전화 화면을 가득 채운 그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새 휴대전화를 사게 되면 K 전자의 것은 절대 사지 않으리라 여러 번 다짐하면서.

 

    나는 의정부의 작은 학원에서 일하고 있다. 이곳은 나를 포함해 두 명씩 각각 영어와 수학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이 근무 중인 곳이었다. 중학생을 가르치지만, 고등학생 몇 명도 학원에 다니고 있다. 모두 중학생 때부터 학원에 다니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계속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원장은 회식 때 벌겋게 술이 오른 채로 정든 학생들을 더는 보지 못한다는 것이 속상하다며 고등학교 수업을 개강하자는 폭탄 발언을 했었다. 모든 선생님이 학을 떼며 취한 원장을 달래 택시를 태워 집으로 보냈다. 영어를 맡은 나와, 수학을 맡은 원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올해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내가 이 학원에 있는 동안 네 번이나 사람이 바뀌었다. 대학교 휴학생이 온 적도 있었고, 다른 학원 이곳저곳에서 경력을 십 수 년을 채운 베테랑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일 년을 채우면 학원을 나가기 일쑤였다. 교사실의 자리는 여러 번 비워지고 채워지길 반복했다. 나는 이곳의 복지가 좋아서 오랫동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직을 준비하고,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가는 과정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 할 때마다 나는 안 된다던 전 남자친구의 말이 생각나 덜컥 겁이 났다. 소극적이게 된 마음은 나를 한 곳에 사 년 동안 머무르게 했다. 원장은 선생님들이 사표를 내지 않게 야유회니 회식이니 사비로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다. 상사인 자신이 말하면 싫어할 것이니 학원에서 가장 오래 일한 나를 이용했다. 그렇게 열심히 써먹을 거면 월급이라도 조금 올려 주지. 늘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다. 나는 그에 반해 원장에게 떠밀려 다른 선생님들에게 무언가를 제안할 때도, 명절이라고 보너스를 현금으로 받았을 때도, 가르치는 학생이 중간고사에서 백 점을 맞아왔을 때도 검지로 입 꼬리를 죽 늘린 듯한 억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보라 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줘.”
    수업을 끝내고 내일부터 새로 진도를 나갈 수업 자료를 준비하고 있는데, 원장이 나를 불렀다. 먼저 밖으로 나간 원장을 따라나서려고 노트북의 화면을 닫는데, 어제 원장이 준 추석 선물이 생각났다. 아, 맞다. 나는 입을 벌린 채로 짧게 탄식했다. 설마 선물을 뜯어보았냐고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원장실로 향하는 짧은 시간 안에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을 모조리 생각해 보았다. 원장에게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고 해야 하나.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둘러대지. 원장실의 문은 열려 있었다. 젖혀 있는 문에 대고 노크를 하니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보던 원장이 고개를 올려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원장 앞에 앉아 그녀가 나를 부른 이유에 대해서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원장은 잠시 더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일자로 넓게 늘린 채 숨을 쓰읍, 들이마신 뒤 말한다.
    “미안한데, 문 닫고 와줘요.”
    원장의 목소리는 자상했지만 단호했다. 내가 문을 닫고 오자 원장은 다시 한 번 입술의 양쪽 끝 공간으로 숨을 길게 쓰으읍, 하고 들이마셨다. 나는 먼저 말을 꺼내기도 뭣한 분위기에 입고 있던 스웨터의 끝자락만 매만졌다. 원장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보라 쌤 올해 몇 살이지?”
    “서른입니다.”
    “벌써? 우리 학원에 온 지 한 이 년 되었나?”
    “사 년이요. 스물다섯 살 겨울에 학원 면접 붙어서 스물여섯 살 때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시간 진짜 빠르네.”
    원장은 등을 뒤로 젖혀 의자의 각도를 크게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에서 지내온 세월을 말로 꺼내어 보니 새삼 이곳에 오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의 나이가 낯설어진다. 나 정말 서른인가? 언제부터 서른이었지. 고개를 숙여 허벅지 위에 놓여 있던 손을 펼쳐 손가락 마디마다 지어진 주름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나에게 언질도 없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점점 나의 몸을 낡게 만들었다.
    “우리 짧게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니까, 나 뭐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뭔데요?”
    원장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나와 눈을 맞추던 시선을 컴퓨터 화면으로 돌렸다. 대체 하려는 말이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나.
    “보라 쌤 서울 지리 잘 알아?”

 

    원장의 부탁은 곧 한국에 오는 외국인의 한국 관광을 시켜 달란 것이었다. 나는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온 뜬금없는 제안에 놀라 “네?” 하고 큰 소리로 되물었다. 원장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자신이 왜 이런 부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초지종을 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이러했다. 한 달 전 원장은 우연히 펜팔 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호기심이 생겨 사이트를 구경하다가 한 대만인과 지금까지 펜팔을 하고 있었다. 만으로 스물여덟, 한국 나이로 계산하면 나와 동갑인 그 여자는 대만의 외곽 지역 주요 관광지를 묶어서 택시로 여행하는 투어의 가이드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투어를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라 여자는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생계를 위해 외국어를 배운 터라 한국에 실제로 와본 적이 없었다. 가끔 그 여자가 틀린 문법을 쓰면 원장은 학원의 학생들에게 문제를 가르쳐주는 것처럼 문장을 고쳐 줬다. 메일의 내용은 대부분 일상에 관한 것이었고 사진을 첨부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가 한국에 오겠다고 답장을 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궁금한 점은 커져만 갔다. 나는 원장이 말을 하려 숨을 들이켜던 순간을 비집고 질문을 했다.
    “그 여자가 한국에 갑자기 왜 오겠대요?”
    “짐작은 가는데, 확실하지 않아.”
    “한국에 호기심이 생겼나 보네요.”
    “아니. 내가 보고 싶은가 봐.”
    원장이 책상에 놓여 있던 난초잎을 매만졌다. 난초 화분에 걸린 리본에는 ‘사랑하는 엄마에게’라는 문장이 검은색 붓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럼 만나면 되잖아요.”
    “나는 딸이 있잖아.”
    나는 펜팔 친구와 직접 만나는 것과 딸이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고요해지는 원장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장은 작년에 이혼했다. 학원의 여름방학 특강 일정에 대해서 회의를 하던 날, 원장은 모든 조율이 끝나자마자 “나 이혼했어”라고 넌지시 고백했다. 그 다섯 글자에 나와 다른 선생님들은 놀란 눈으로 원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원장은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잠깐 웃더니 우리에게 딸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해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이 사진 안에서 여름 교복을 입고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회의하던 강의실에서 제일 의연한 사람은 원장이었다. 이혼의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아무렇지 않던 원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마치 외출하고 집에 돌아와 “다녀왔어”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던 모습이었다.

 

    나는 제안을 승낙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뜬금없이 아는 것도 없고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의 여행을 원장 행세까지 해가며 시켜 줘야 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달 월급을 두 배로 주겠다는 원장의 말에 냉큼 하겠다고 대답해 버렸다. 여행 경비는 물론 원장이 내기로 했고, 여자의 여행을 도와주는 동안에는 학원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까지 걸려 있었다. 그럼 수업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나의 물음에 원장은 아는 후배가 대신 해주기로 이미 이야기를 해놓았다고 대답했다. 내가 하겠다고 할 것을 예상하고 뒷일을 모두 처리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월급 두 배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내가 거절할 리 없었다. 먼저 세상을 오래 살아 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렸을 때는 돈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느껴지겠지만, 나이가 들면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돈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자는 사흘 동안 한국에 머무른다고 했다. 나는 일정을 짜는 시간과 본격적으로 여행을 하는 시간, 그리고 합법적으로 나에게 휴가를 줄 시간까지 합쳐 어림잡아 원장에게 말했다.
    “적어도 닷새는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마음대로 해. 얼마든지 줄게.”
    “그럼 더 늘려도 돼요?”
    “양심 어디 안 도망가고 잘 있지?”
    “그럼요. 농담이었어요.”
    “반은 진심이었으면서, 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원장은 피식 웃더니 메모장 한 장을 뜯어 무언가를 적어 나에게 건넸다.
    “내 메일 아이디랑 비밀번호야. 그 애랑 나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나인 척 할 수 있잖아.”
    “네. 퇴근하고 읽어 볼게요.”
    “참. 걔 이름은 페이야. 페이 리우.”
    “기억하고 있을게요. 저는 원장님 성함으로 소개하면 되죠?”
    원장은 도리질을 쳤다. 곧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우스.

 

    TO. 페이
    안녕하세요. 페이 리우 씨.
    저는 한국에서 작은 학원을 운영하는 한국인 여성입니다.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과 일상을 공유하고 싶다는 소개를 보고 쪽지를 보내요.
    서로의 하루를 궁금해 하는 좋은 펜팔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래에 제 메일 주소를 써놓을게요.

    FROM. 가우스

 

    인천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겠다는 나의 메일에 페이는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을 적어 답장했다. 원장에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받은 이후부터는 내가 메일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둘이 지난 한 달간 주고받은 메일에는 페이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있었다. 자신이 가이드를 하는 투어 장소에서 서 있는 모습이라는 말과 함께 첨부된 사진이었다. 페이는 사진 속 장소가 대만 북부 해안에 있는 관광지 ‘예류’라고 설명하며, 관광객들은 경치 구경보다 유명한 바위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덧붙였다. 대만에 가본 적이 없는 나는 그곳을 검색해야만 했었다. 검색한 사진들을 보니 페이가 이야기한 유명한 바위가 어떤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여왕의 옆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여왕 머리 바위’가 구도나 색감만 다른 채로 수십 장이었다. 개중 그 앞에서 웃고 있는 관광객의 인증 사진도 여럿 있었다. 활짝 웃고 있거나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는 사진들 속 사람들과는 달리 사진 속 페이는 경직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웃음도 미미했다. 여왕 머리 바위 앞에서 찍은 사진도 아니었다. 나는 사진을 한참 보다가 페이의 웃음을 따라 했다. 순간 불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건조하게 고정된 저 입 꼬리가, 내일 서울을 구경하는 페이에게서 보일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페이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맥도날드에서 식사하길 원했다. 페이가 한국으로 오기 전, 나는 일정을 짜기 위해 가보고 싶었던 곳이나 먹어 보고 싶었던 음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장소 몇 곳과 메뉴 몇 가지를 적어 빠르게 답장했다. 거기에다 여행 첫째 날은 꼭 맥도날드에 가고 싶다는 문장을 덧붙였다. 맥도날드? 여행 첫날에 전 세계 어디에나 있고 모든 지점에서 엇비슷한 정크푸드를 파는 그런 곳에서 밥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 한국 음식을 먹어 보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일정에 넣은 한식 메뉴는 모두 지워야 하나. 설마 원장 대신 내가 자신을 만나러 나갈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걸까? 직접 만나지 못한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들은 작은 부분에서도 여러 걱정을 만들었다. 학원에 입사한 이래 처음으로 원장이 간절하게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페이를 만나기로 한 인천공항은 내가 사는 의정부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 멀지 않았다. 경기도에 살며 집 근처 외의 다른 지역을 갈 땐 한 시간 삼십 분을 평균으로 두고 시간을 계산했다. 평균보다 시간이 덜 들면 가까운 곳이고, 그보다 일이십 분 더 드는 곳은 애매하나 그럭저럭 갈 만한 곳이었다. 두 시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곳들은 모두 먼 곳이었다. 평소에는 차를 자주 운전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외국인을 데리고 다녀야 하니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고 공항으로 향했다. 내 차는 중고로 구매한 경차였다. 어느 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신물이 나서 충동적으로 중고차를 파는 곳으로 향해 내 예산으로 살 수 있는 차를 구매했다. 적은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차는 중고 중에서도 경차뿐이었다. 처음에는 차가 있다는 것이 신이 나 장롱면허를 꺼내 열심히 연수를 다녔지만, 도로 위는 격투기 경기장의 링 위나 마찬가지였다. 경차라는 이유로 끼어들기를 숱하게 당했고, 내가 차선을 바꾸려고 하면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언젠가는 셀프 주유소에서 주유 후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고 내 뒤로 줄을 서던 차주가 시비를 걸었다. 나는 안전띠를 매고 있었다. 차주였던 남자는 내 차 앞으로 성큼 걸어오더니 창문을 두들겼다. 나는 겁이 났다. 한참을 창문을 열라고 재촉하던 남자는 내가 창문을 열어 얼굴을 보이자 희미하게 구긴 표정을 한껏 더 일그러뜨린 뒤 불같이 화를 냈었다. 표정이 짙어진 건 남자와 내가 눈을 마주치던 그 순간이었다.
    오후를 넘은 시간 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가 나왔다. 일면식이 없어도 페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사진과는 달리 단발머리를 한 페이가 사진과 똑같은 얼굴과 표정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팔을 들어 그녀를 향해 흔들었다. 곧 페이가 나를 보고 여행용 가방을 끌며 걸어왔다. 페이가 나에게 가까워지는 동안 그녀에게 뭐라고 첫인사를 건네는 것이 나을지 고민했다. 짧은 시간 동안 살면서 접한 인사말이 모두 상기되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문장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페이는 이미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나는 가장 무난한 말을 아무렇지 않은 척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페이는 고개를 짧게 숙인 뒤 어눌하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어절을 끊어 내게 인사했다. 생각보다 작은 키였다. 사진으로 봤을 땐 키가 나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페이의 이마는 나의 가슴께 높이에 있었다. 인사를 건넸지만, 원장의 닉네임이 생각나지 않았다. 본명은 모를 것이 분명했다. 닉네임인 그 단어가 입 밖으로 쉽게 꺼내지지 않았다. 글로 쓰고 읽는 건 쉬웠지만, 직접 누군가에게 꺼내려니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지은 내 닉네임도 아니었다. ‘가우스’라는 말은 내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 더는 꺼내지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자 페이가 쌍꺼풀이 지지 않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가우스 씨 맞죠?”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을 빠져나와 우리는 종로로 향했다. 맥도날드와 경복궁으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페이는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빠르게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페이가 앉은 쪽이 신경 쓰였다. 차 안에 감도는 어색한 공기를 깨고 싶었다. 나는 의무처럼 페이에게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쏟아냈다. 처음에는 한국에 오는 동안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이었고, 나머지는 메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원장과 페이가 주고받은 메일의 내용을 조금씩 꺼내 기억하며 내가 원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페이가 조금도 의심할 수 없게 노력했다. 원장은 아예 메일을 내가 보낸 것처럼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펜팔을 할 때도 이혼을 한 사실이나, 딸이 있다는 이야기 같은 원장의 정보들은 없었기에 나는 원장에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차는 인천공항고속도로를 통과해 강변북로에 올라타 제일 끝 차선을 달렸다. 나는 온난한 대만에서 사는 페이가 한국의 초겨울 날씨에 적응하지 못했을까 봐 걱정되었다. 내가 히터를 틀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도로 밖에서부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페이도 놀란 듯했다. 저 멀리 고라니가 맨몸으로 멀뚱히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머, 뭐예요?”
    “고라니요.”
    고라니? 페이는 단어를 느릿하게 발음했다. 처음 들어 보는 단어인 것 같았다. 도로 위엔 차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뒤차는 영문도 모르고 급정거를 한 내 차에다 대고 경적을 울렸다. 그러나 나는 차를 출발시킬 수 없었다. 고라니가 여전히 멈춰 있기 때문이었다. 멍한 채로 한동안 바라보다가 나는 차에서 내리려 안전띠를 풀었다. 고라니가 차에 치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곧 뒤차가 경적을 한 번 더 울렸다. 조금 더 있으면 내 차로 뛰어와 화를 낼 것 같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차에서 내리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고라니는 가드레일을 가뿐히 넘어 도로 밖으로 향했다.

 

    TO. 가우스
    안녕하세요! 쪽지 줘서 고맙습니다.
    제가 가우스 씨를 좋은 친구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학원을 운영한다니 멋져요. 저는 대만에서 여행 가이드를 해고 있어요.
    여기는 지금 비가 와요. 한국은 어때요?
    잘 부탁드려요!

    FROM. 페이

 

    페이의 호텔에 들러 짐을 두고 나온 뒤 우리는 맥도날드로 향했다. 카운터에는 점원 대신 팻말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지금은 무인 카운터 운영 중입니다’라는 문구였다. 나는 키오스크 앞으로 다가가 화면에 크게 떠 있는 주문 버튼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작은 음식 사진과 함께 메뉴가 나왔다. 페이는 그 옆에서 가만히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많은 선택지 앞에서 나는 페이에게 말했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한국에만 있는 메뉴 뭔가요?”
    페이는 의외의 질문을 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맥도날드는 외국 프랜차이즈일뿐더러 외국에도 지점이 많기에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고유의 메뉴가 있으리라 딱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차피 햄버거는 한식이 아니라 양식이니까.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검지로 화면을 넘기며 메뉴를 하나씩 확인했다. 먹음직스러운 모습들이 내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아래로 내려가며 펼쳐졌다. 빅맥, 쿼터파운더 치즈, 1955 버거,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 그중 나의 눈에 띈 것이 하나 있었다. 이건 메뉴 이름조차 한식을 본떴으니, 분명 한국에만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페이에게 자신감에 찬 눈빛과 손짓을 하고 화면을 가리켰다.
    “이거요. 불고기 버거.”
    “먹을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고기 버거 세트를 눌렀다. 이제 내가 먹을 것을 고르는 일만 남았다. 나는 다시 검지로 화면을 위로 올린 뒤 사진을 보며 각 버거의 맛을 기억에서 꺼냈다. 뭐가 제일 맛있었더라. 오늘은 색다른 것을 먹어 보려다 그냥 평소에 자주 먹던 것을 먹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빅맥 세트를 눌렀다.

 

    TO. 페이
    오늘은 한 학생이 직접 만든 마카롱을 선물했어요.
    너무 예쁘게 생겨서 먹기 아까워요. 수업 집중하라고 혼만 낸 선생님이 밉지도 않은가 봐요.
    학원 선생님의 보람이 생겨요. 선물해 준 아이의 마음이 너무 예뻐요.
    페이 씨도 가이드를 하면서 어떤 일이 기억에 남았어요? 궁금하다.
    나중에 혹시라도 고민이 생기면 나에게 얘기해도 좋아요.
    마카롱 사진 메일에 첨부할게요.

    FROM. 가우스

 

    페이의 한국어는 자연스러웠다. 가끔 외국어 번역같이 어색한 단어도 사용했지만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대화의 흐름은 나름 순조로운 편이었다. 몇 번 해봤던 소개팅이 도움이 되었다. 나는 보험을 팔러 온 사람처럼 페이의 경직된 모습을 풀기 위해 스무고개를 하듯 꺼낸 질문들을 꺼냈다. 대부분 그저 그런 스몰 토킹이었다. 대만 날씨와 유명한 음식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페이의 콜라에 빨대를 꽂아 주다 문득 조금 전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왜 맥도날드에 오자고 했어요? 여행 첫날엔 이거보다 맛있는 걸 먹는 게 낫지 않아요?”
    “이거 먹으려고요.”
    페이가 포장지를 벗기고 있던 불고기 버거를 살짝 흔들었다,
    “외국 가면 맥도날드에 가서 그 나라 메뉴를 먹어요. 재미있어요. 그리고 마음으로 인사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맥도날드는 세계에 많아서, 수집하는 기분 들어요. 수집 맞아요? 컬렉션.”
    “수집 맞아요. 다른 나라 맥도날드 가서 먹은 건 뭐가 있어요?”
    “음, 하와이에서 아침 메뉴. 스팸, 달걀, 밥이 있었어요. 일본은 돈가스랑 데리야키 소스로 만든 버거 먹었어요.”
    “둘 다 그 나라에서 유명한 음식이네요. 불고기 버거는 어때요, 입에 맞아요?”
    “네, 맛있어요.”
    “그럼 대만 맥도날드는 뭘 팔아요?”
    페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밀크티, 하고 대답했다. 나는 밀크티가 대만에서 왜 유명한 것이냐고 또 물어보려다가 내가 질문을 쏟고 페이가 대답하는 과정이 꼭 내가 페이를 인터뷰하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나만 말하고 있는 건가, 하는 기분이 들어 잠시 질문을 멈추니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페이는 그제야 먼저 말을 꺼낼 기회를 잡았다.
    “거기 일은 어때요?”
    “아, 학원이요?”
    “네. 학생들 가르치는 거 멋있어요.”
    “아니에요. 말을 잘 안 들어요. 숙제 안 해오고, 툭 하면 학원 안 나오고……. 단어 시험 보기 싫다고 도망간 학생도 있어요.”
    “그래도 학원은 가우스 씨 거니까 보람 많을 것 같아요. 그, 학원 중에 제일 큰 사람. 한국어로 뭐라고 하더라.”
    “원장이요. 학원 원장 선생님.”
    “아, 원장.”
    나는 감자튀김을 입에 넣다가 아차 싶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화에 몰입하다 보니 내가 가우스라는 이름을 하고 원장 대신 나왔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원장은 수학을 가르치는데, 단어 시험을 얘기했으니 페이가 눈치를 챌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원장이 메일에 자신을 수학 선생님이라고 언급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목의 뒤편이 화끈거렸다. 나는 슬쩍 페이를 쳐다봤다. 페이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하는 일의 원장은 바보예요.”
    “네?”
    “우리 회사 원장이요.”
    “택시 투어요? 사장?”
    “아, 사장. 사장은 바보예요. 가우스 씨랑 달라요. 아는 게 없어요.”   
    페이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는 한 노인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고 있었다. 받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노인의 앞을 빠르게 지나가거나 노인이 내민 전단을 흘깃 보며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전단을 받은 사람 중 몇 명은 열 걸음 정도를 걸어간 뒤 길에 버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페이가 작고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직원이 일하면서 뭘 당하는지 알려고 안 해요.”

 

    TO. 가우스
    마카롱 진짜 예뻐요! 맛있어 보여.
    마음이 모두 예뻐요.
    가이드 일이 기억에 남는 일 많아요. 관광객들이 저한테 선물이나 음식 주세요.
    세상에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많아요.
    가우스 씨처럼요.

    FROM. 페이

 

    우리는 맥도날드에서 나와 길을 걸었다. 차는 근처 공용 주차장에 두었다. 내가 정해 놓은 일정은 경복궁을 가는 것이었다. 서울은 서늘한 공기가 공중에 맴돌고 있었다. 이제는 꽤 추워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피부가 차가워져서 나는 팔뚝을 쓸어내렸다. 페이도 추운지 바람이 불 때마다 얼굴 광대를 들썩였다. 한겨울이 한국의 가을 기온과 비슷한 대만에서 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페이가 추운 걸 덜 느끼게 하고 싶어 마음이 급해지니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페이는 주변을 구경하면서도 나의 걸음에 맞게 잘 따라왔다.
    경복궁의 성인 푯값은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 똑같았다. 우리는 표를 구매한 뒤 경복궁 안으로 들어왔다. 나도 이곳을 꽤 오랜만에 와보는 것 같았다. 딱히 올 일이 없기도 하고, 자주 올 이유가 있지 않은 것도 있었다. 어렸을 때 소풍으로 한 번, 야간 개장이 열릴 때 현재 K 전자의 사원이자 대학생 시절 전 남자친구와 한복을 입고 데이트로 한 번, 총 두 번이 전부였다. 페이에게 한국을 대표할 관광지를 보여주기 위해 고른 장소였지만, 어느새 나도 궁 내부를 들뜬 마음으로 구경했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 있었다. 페이는 정갈하고 넓게 펼쳐진 공간을 눈과 휴대전화 카메라로 열심히 담았다. 우리는 흥례문과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향했다.
    근정전 내부는 들어갈 수는 없으나 활짝 열려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 문 앞에 서서 근정전 안쪽을 구경했다. 선명하게 그려진 단청 아래로 왕이 앉던 어좌(御座)가 있었다. 내부에 온기가 들지 않아 서늘한 공기가 문 밖까지 느껴졌다. 나는 가이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려 휴대전화 메모장을 펼쳤다. 연신 눈동자를 굴리며 “와”나 “오” 따위의 감탄사를 작게 중얼거리던 페이에게 나는 미리 조사해 둔 정보를 설명했다. 말이 설명이지, 그대로 읽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의 말에 경청하는 페이를 보니 쑥스러움과 뿌듯함이 들자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일었다. 대만에서 이런 일을 하는 전문가에게 이러려니 말과 행동에 긴장이 섞여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페이는 나의 설명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원장에게 돈을 받는 만큼은 하려 했다. 그러나 점점 비행기를 타고 한국까지 와준 페이의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한참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폐장 시간이 다 되었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어두워질 기미를 보였다. 추워질수록 낮이 짧아졌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페이의 호텔이 있는 인사동으로 다시 향했다. 차로 오 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페이가 먹고 싶다고 한 치킨과 맥주를 그 근처에서 먹을 계획이었다.

 

    TO. 가우스
    가우스 씨. 페이예요!
    저번에 말씀 주셨던 “천만에요”를 써먹었습니다.
    직접 써보니 발음이 너무 어려워요. ㅜㅜ
    오늘은 허우통 고양이 마을에서 가우스 씨 보라고 고양이를 찍었어요.
    이곳의 고양이들은 자거나, 간식 없으면 멀리 있어요.
    빨리 찍다가 사진이 이상해요.
    그래도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FROM. 페이

 

    치킨집에 도착하자마자 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페이를 앞에 두고 전화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휴대전화 가득 뜬 ‘원장님’이라는 글자에 순간 당황해 전화를 끊어버렸다. 문제는 페이도 휴대전화 화면을 봤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는 페이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추한 목소리로 페이에게 변명했다.
    “그, 다른 학원. 다른 학원 원장님 전화예요. 다음 학기 수업 때문에 전화하셨나 봐요. 한국은 내년에 교육과정이 바뀌거든요. 학교들이 전부 교과서를 새로 교체해요.”
    “괜찮아요. 전화해요.”
    사람이 약점을 찔리면 불필요한 말이 많아진다는 것을 느꼈다. 급하게 둘러대느라 사실인 척 말해버렸다. 한국은 내년에 교육과정이 바뀌지도, 교과서를 교체하지도 않았다. 페이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펼쳐 앞으로 밀며 통화를 허락했다. 나는 치킨을 주문한 뒤 페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치킨집에서 꽤 떨어진 곳으로 와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여 페이가 통화 내용을 듣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들통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원장은 통화 연결음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니 긴장이 풀리는지 다리에 힘이 빠졌다.
    “여보세요.”
    “응, 보라 쌤. 지금 통화할 수 있어?”
    “네. 통화하고 오겠다 하고 나왔어요. 페이 씨한테 안 들리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화 받는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 지금은 뭐 하고 있어?”
    “치킨 먹으러 인사동 왔어요. 페이 씨 호텔이 여기에 있어서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거든요. 아까는 맥도날드 갔다가 경복궁 갔었고요.”
    “안 그래도 보라 쌤이 보낸 메일이랑 페이 답장 다 봤어.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페이 어때? 어떤 사람 같아?”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차분한데,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차분한데 흥미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아, 보라 쌤 말 들으니까 진짜 궁금하네.”
    “궁금하면 직접 만나시지 그러셨어요. 원장님이 만나셨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제가 못 여쭤 봤지만, 페이 씨를 못 만나는 거랑 원장님이 딸이 있는 거랑 무슨 상관예요?”
    “보라 쌤, 메일 다 읽었어?”
    “그럼요.”
    “그럼 알 텐데.”
    원장의 말에 나는 머리를 굴렸다. 원장의 말에 전봇대를 툭, 툭 치던 신발 앞코를 멈췄다. 뭘 안다는 거지. 원장은 페이에게 다시 얼른 가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TO. 가우스
    오늘 온 사람들은 한국인이었어요! 가우스 씨 생각이 나요.
    만약 이곳에 여행을 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습니다.
    관광객들의 모습에서 당신이 보였어요.
    좋아하는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제 여행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우스 씨 모습요.

    FROM. 페이

 

    TO. 페이
    그랬군요.
    초록색 원피스는 입기에도 편해요. 정말 여행 중도 예쁠 것 같네요.

    FROM. 가우스

 

    다시 치킨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음식이 나와 있었다. 페이는 치킨을 건드리지도 않은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것 같았다.
    “저 기다리셨어요? 먼저 드셔도 되는데.”
    “아니요, 아니요. 치킨 방금 왔어요.”
    “얼른 드세요. 여기 치킨 맛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페이는 그제야 포크를 들었다. 나는 아직 살얼음이 녹지 않은 언 잔에 담긴 콜라부터 들이켰다. 차를 몰고 나온 터라 맥주를 마실 수 없었다. 페이는 맥주를 마셨다. 양념치킨보다는 간장치킨이 더 맛있다며 입을 오물거리며 웃었다.

 

    TO. 가우스
    가우스 씨. 많이 바빠요?
    지난주 시험 기간이 아직 안 끝났어요?
    학생들 시험이 끝나고 답장한다고 하셔서 기다려요.

    FROM. 페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치킨집에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가 많이 풀린 채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이야기를 하다가 농담을 자주 던졌고, 페이는 내 말에 쉽게 웃었다.
    “그럼 가우스 씨는 어디 살아요?”
    “의정부요. 서울에서 떨어져 있어요.”
    “처음 들어요. 어떤 곳이에요?”
    “그냥 , 사람 사는 곳이에요. 아마 잘 모를 거예요. 보통 외국인들은 서울이나 부산 같은 곳으로 여행을 가니까.”
    “여의도 면적의 몇 배예요?”
    “네?”
    “한국 뉴스 보면, 다른 지역 설명에서 ‘여의도 면적의 몇 배’ 이렇게 해요.”
    “…….”
    “한국어 공부 때문에 뉴스 많이 봤어요.”   
    나는 기본안주인 오징어를 씹던 턱관절을 멈추고 페이를 바라봤다. 페이의 얼굴에 궁금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런 표현이 자주 나오긴 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기사에서도 무언가의 크기를 설명할 때 여의도가 지척이 되곤 했다. 나는 여의도의 크기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그게 왜 표준이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의도에 가봤거나, 서울에 사는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왜 방송에서 쓰는 걸까. 나는 페이에게 의정부가 ‘여의도 면적의 몇 배’인지 대답할 수 없었다.

 

    TO. 가우스
    오늘은 힘든 일 있어요.
    가우스 씨에게 말해도 돼요?
    답장 기다려요.

    FROM. 페이

 

    대화는 어느덧 의무적이고 당연한 이야깃거리에서 사적인 부분으로 흘렀다. 페이는 자신이 여행 가이드를 하며 만났던 관광객 중 기억에 남았던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메일에는 쓰여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페이는 갑자기 조금 전에 말하던 목소리보다 한 단계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장이 더 싫어요.”
    “사장이요?”
    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어두운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페이는 한 한국인 남자의 투어를 맡은 적이 있었다. 홀로 온 사람이었다. 남자는 관광지를 설명하는 페이의 가슴을 유심히 쳐다봤었다. 투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루를 꽉 채워서 관광하는 택시 투어의 특성상 페이는 그날 남자와 종일 함께해야 했다. 남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페이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몇 살이에요?”, “남자친구 있어요?”, “여기 온 관광객이랑 사귄 적 있어요?” 따위의 추파였다. 남자가 그럴 때마다 페이가 상황을 무마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는 집요해졌다. 운전을 담당한 기사는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페이는 그날 망망대해에 홀로 조난을 당한 기분이었다. 투어가 끝난 뒤 택시가 남자의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그녀에게 함께 호텔에 들어가겠느냐고 물었다. 페이는 끝내 참지 못하고 그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페이는 퇴근 후 곧바로 사장에게 이 일을 알렸다. 그러나 남자가 호텔에 돌아가 여행사에 민원을 넣었다. 남자는 미국 여행 잡지에 영어로 칼럼을 올리는 유명한 여행 칼럼니스트였다. 사장은 오히려 페이에게 화를 냈다. 페이는 자신이 남자에게 지른 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자신에게 고함을 지르는 사장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자신의 이익만 아는 사람이었다. ‘너 때문에’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페이를 쏘아붙였다. 페이가 결국 사장에게 사과했다. 또, 그 남자에게 사과했다. 해고를 당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페이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조차도 중심을 벗어나 있었다.

 

    TO. 가우스
    무슨 일 있어요?
    FROM. 페이

 

    치킨집을 나오니 밤공기가 완연한 겨울이었다. 페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뜨거워졌던 머리가 찬바람을 맞으니 조금 식는 것 같았다. 덤덤하게 말을 하는 페이를 보니 화가 나 덜컥 욕을 했다. 페이는 한국어 욕을 알고 있었다. 크게 뜬 두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푸하하, 하고 웃었다. 페이가 웃는 걸 보니 나도 금세 웃음이 입술 밖을 비집고 튀어나왔었다. 밖으로 나온 뒤 거리를 걸으며 페이는 간판을 읽고, 나는 페이가 읽을 줄 모르는 글자들의 발음을 알려줬다. 김치찌개와 숯불 닭갈비를 지나, K 전자 서비스 센터를 외면하고, 동동주와 성인용품을 거쳐 아동복 상설 할인매장을 읽다 보니 어느덧 페이의 호텔 앞이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내일은 몇 시에 만날까요?”
    “안 나오셔도 돼요”
    네? 나는 잘못 들은 줄 알고 페이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살짝 취기가 오른 페이가 말을 헷갈린 건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페이는 정확히 말을 한 것이 맞았다. 나는 페이의 여행 일정이 이틀이나 더 남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요?”
    “저 알아요.”
    “뭐를요?”
    “가우스 씨 아니잖아요.”

 

    TO. 가우스
    보고 싶어요.
    FROM. 페이

 

    나는 페이에게 사과했다. 이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원래 알고 있는 ‘가우스’는 우리 학원의 원장이고, 나는 그 학원에서 강사로 있는 사람이라는 것부터, 원장이 나에게 이번 달 월급을 두 배 주는 조건으로 대신 이곳에 나오게 했다는 것까지 전부 말했다. 페이가 상처받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는 페이에게 무언가를 숨길 수 없었다. 오늘을 함께 보냈기에 나는 변명일지라도 사실을 가감하지 않았다. 페이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러나 페이는 아무 말 없이 나의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쏟아내고 난 뒤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페이의 건조한 입 꼬리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예류에 경직된 자세로 서 있던, 페이의 사진 속 그 표정이었다.
    “미안해요.”
    페이는 아무 말 없이 호텔의 건너편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생일 고깔을 쓴 사람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다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곧 고깔을 쓴 사람이 초가 꽂힌 케이크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눈을 감고 소원을 빌더니 촛불을 불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건너편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페이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안 나온다고 알았어요. 오히려 당신 나왔으니 다행이에요.”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미안해요.”
    “아니야. 나 진짜 괜찮아요. 진짜.”
    그래도 진짜 미안한데……. 내가 말끝을 흐리니 페이는 그제야 전과 같은 웃음으로 푸하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혹시 어떻게 내가 진짜 가우스가 아닌 걸 알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말투가 달라요.”
    “지금 제 말투요?”
    페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말로 하는 건 진짜 가우스 말투 몰라요. 메일이요. 그 느낌 달라요.”
    “아…….”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줄 게 있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이는 호텔로 올라갔다. 나는 페이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 길거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마 원장도 그랬을 것이다. 얼마 뒤 페이가 다시 나타났다. 페이의 손에는 보라색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이거 가져가요. 대만에서 사왔어요. 화산 1914라고, 예술가들 물건 팔아요. 여기 오르골 유명해요. 오늘 재미있었어요. 이건 가짜 가우스 씨 가져요. 진짜 가우스 씨 주지 마요.”
    “제 이름은 보라예요. 윤보라.”
    페이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서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나를 바라보았다. 페이의 입 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보라 씨 잘 가요. 오늘 욕해 줘서 고마워요.”
    그 사람한테 씨발 새끼라고 해줘서 고마워요. 페이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TO. 가우스
    가우스 씨.
    제가 한국 갈게요.
    제발 만나주세요.
    그리고 연락하지 않을게요.

    FROM. 페이

 

    집에 오는 길에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것을 설명했다. 날이 밝았을 때는 그렇게 궁금해 하던 원장은 “그렇구나”와 “응” 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페이와의 여행을 원만하게 끝내지 못했으니 나는 월급을 두 배로 받는 조건을 철회해 달라 말했다. 아쉽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그건 약속이니까 줄 거야.”
    “그렇다면 감사하게 받을게요.”
    “나는 보라 쌤이 여전해서 좋아.”
    “근데 왜 가우스예요? 닉네임.”
    “그냥. 수학자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라서.”
    원장은 자신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말했던 날처럼 의연하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TO. 페이
    그래요. 곧 연락할게요.
    FROM. 가우스

 

    집에 돌아오자 피곤이 몸 위로 쏟아지는 듯했다.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모든 근육이 뻐근했다. 힘이 빠진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전 남자친구의 문자였다. 허겁지겁 휴대전화의 잠금을 풀고 문자를 확인했다. ‘보라야. 잘 지내?’라고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문자의 나머지를 읽었다. ‘오랜만이네. 너 학원 영어 강사 되었다는 소식 들었어. 염치없는 거 알지만, 네가 알고 있는 학원 중에서 좋은 영어 학원 있으면 추천해 줄 수 있니? 여의도 근처면 좋을 것 같아. ’ 나는 문자를 삭제해 버렸다. 전 남자친구의 입버릇이었던 “이래서 안 된”다는 말이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렸다.
    원장의 아이디로 다시 로그인 했다. 페이와 함께 있을 때와 조금 전의 통화 속 원장이 한 말들이 신경쓰였다. 나는 처음부터 차례대로 페이가 보낸 메일들만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원장을 향한 페이의 감정이 서툰 문장 곳곳에 묻어 있었다. 메일함에는 새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페이였다. 진하고 밝은 파란색으로 쓰인 ‘가우스 씨에게’라는 메일 제목은, 읽었다는 표시를 위해 흐려진 글씨 색의 메일들 사이에서 더욱 눈에 띄었다. 페이가 원장에게 메일을 보낸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용이 궁금했지만 나는 선뜻 메일을 확인할 수 없었다. 원장과 페이의 서로 다른 의미의 보고 싶음 속에 내가 뛰어든 기분이었다. 이제는 나도 가우스였다.

 

    TO. 페이
    안녕하세요. 가우스입니다.
    저번에 한국에 오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오셔서 드시고 싶으신 음식과 가보고 싶으신 장소를 여쭤 보려고 메일을 남깁니다. 일정은 제가 짜놓겠습니다. 한국에서 해보고 싶은 모든 것을 알려주세요. 한국에 도착하는 시간도 함께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FROM. 가우스

 

    나는 페이가 준 쇼핑백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나무로 만든 오르골이 들어 있었다. 나는 오르골 하단에 달린 태엽을 감자 멜로디가 흘러나오며 오르골이 돌아갔다. 중심에 지구 모형이 있고, 그 주변으로 나무 인형들이 지구 주변을 공전하듯 돌았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보다가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검은색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원장이 준 추석 선물이었다. 쇼핑백 입구에 붙은 투명 테이프를 가위로 잘라내니 내용물이 보였다. 참치와 햄 통조림 몇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통조림 겉면에는 스티커를 뗀 자국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추석 선물을 받고 남은 것을 나에게 준 것이 분명했다. 나는 통조림에 남은 스티커 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밖에서 전처럼 비명이 들렸다. 나는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내가 사는 빌라 단지 뒤편 풀숲에서 고라니가 고개를 내밀고 울고 있었다. 꼭 여자가 지르는 절규같이 높고 거친 소리였다. 오늘 페이와 함께 도로 위에서 본 고라니가 떠올랐다. 동그랗고 까만 눈으로 페이와 나를 응시하던 눈빛이 기억에 선명했다. 그 고라니도 서울 어딘가에서 저런 울음을 내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집이 어디였을까. 그곳이 정말 자신의 집일까. 서울과 의정부의 고라니와 페이와 나의 자리는 정말 각자의 자리가 맞을까. 페이는 아직도 가우스가 보고 싶을까. 고라니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밖은 조용했다. 이 도시에서 비명을 지를 수 있는 건 고라니밖에 없는 듯했다. 오르골의 멜로디가 끝이 났다. 나는 오르골의 태엽을 다시 돌렸다. 지구 주변으로 멈췄던 인형들이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고라니의 비명과 함께. *

 

 

 

 

 

 

 

 

 

 

 

 

 

 

 

이한솔

작가소개 / 이한솔

단편소설 「전자레인지」로 202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등단.

 

   《문장웹진 202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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