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후의 시(時)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어떤 노후의 시(時)

-박형서의 『당신의 노후』 중심으로-

 

 

선해용

 

 

 

    1. 어떤 노후의 징후들

 

    지난 2016년 영국의 청년층 사이에선 노인들의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이 제기되었다. 브렉시트에 대한 찬반 투표 결과, 젊은층과 노년층 사이에 극심한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층은 ‘브리메인’을 노년층은 ‘브렉시트’를 원했으나, 최종 국민투표에서 52%가 찬성해 브렉시트가 결정되었다. 이후 영국의 젊은층은 노년층의 투표 결과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며 65세 이상 노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노인들이 우리의 미래를 망쳤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청년들은 언론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노인들을 브렉시트의 맹목적 추종자처럼 그려냈다. 노인들이 엄연히 국민의 일원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적 의식을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자신의 집단을 노인과 분류하며, 노인을 ‘쓸데없고’ ‘쓸모없는’ 존재로 규정하는 배제 담론은 비단 영국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의 노인 배제 담론은 혐오 담론과 결합하여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노인들은 무조건 1번을 뽑는다”를 비롯한 정치적 우롱뿐만 아니라 ‘틀딱’, ‘노인충’, ‘연금충’1) 등의 과격한 혐오 표현이 대표적인 예이다. 거듭된 혐오와 배제 속에서 노인은 부양해야 할 짐이나 해소되지 않는 질병, 해충 같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혐오 표현은 영국에서 발화된 “노인들이 우리의 미래를 망쳤다”라는 슬로건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인들이 우리의 미래를 망쳤다. 제발 죽어 달라.

  1)  각각 틀니를 딱딱거리는 벌레, 벌레 같은 노인, 연금이나 축내는 노인이라는 의미의 온라인 용어.

 

    2. ‘당신’과 당신 ‘아닌’

 

    박형서의 소설 『당신의 노후』는 초고령 사회가 된 미래의 한국을 그린다. 소설 속 한국은 지하철 “열 량의 객차 중 여덟 량이 노인 전용 경로 차량”2)으로 다니며 “청년 세 명이 노인 일곱 명을 부양”(126쪽)할 정도로 노후된 상태이다. 노인 모두에게 연금을 ‘마땅히’ 지급하는 행위는 심각한 재정 위기와 직결된다. 이에 국민연금공단은 외곽 공무원들로 조직된 암살 집단을 통해 연금 과다수급자들을 살해한다. 이러한 국가 단위의 계획적 살해는 청년층의 혐오 논리를 대행한다. 노인을 향해 끊임없이 죽어 달라고 말하는 청년들의 호소는, 노인들의 정치적 참여뿐만 아니라 생존권 자체를 위협하며 끝내 여탈한다.
    소설은 크게 두 편의 서사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주인공 ‘장길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분투의 서사이다. 장길도는 국민연금공단의 암살요원으로 복무한 뒤 정년이 되어 은퇴한 인물이다. 소설의 갈등은 장길도의 아내 한수련이 국민연금공단의 ‘적색 리스트’3)에 오르게 됨에 따라 전개된다. 장길도와 같이 복무했던 국민연금공단의 옛 동료들이 적색 리스트에 올라간 한수련을 살해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 것이다. 장길도는 ‘젊고’ ‘세련된’ 킬러들의 암살을 막기 위해 ‘늙고’ ‘처절하게’ 분투한다.
    다른 한쪽의 서사는 충남 공주의 강 씨(77세, 남), 서울 용산구의 김 씨(88세, 남), 강원도 춘천의 송 씨(81세, 남), 경남 진주의 최 씨(83세, 여) 등 어떤 노인들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소설은 어떤 노인들의 죽음과 그 이전의 행적에 대해 냉소적이고 무심한 어투로 말한다. 그들의 죽음은 장길도의 서사와 어떤 관련성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설은 계속해서 ‘어떤’ 노인들의 죽음을 나열한다. 죽음을 계속해서 말하고, 연결한다. 그렇게 소설 중반부에 들어서서야, 노인들의 죽음이 장길도와 공단의 공무원들에 의한 살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2)   박형서, 『당신의 노후』, 현대문학, 2018, 80쪽, 이하 이 소설에서의 인용은 쪽수만 표시함.
  3)  소설 속에서 ‘국민연금공단’은 노령연금의 과다수급자들을 ‘적색 리스트’에 등록시킨다. 리스트에 등록된 노인들은 국민연금공단 소속 공무원들에 의해 암살된다.

 

    “하루는 그녀에게서 장미꽃 한 다발을 얻었다. 신이 나 화장실 세면대로 가져가 물올림을 하던 중에 그만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꽤 큰 가시였다. 수도꼭지에 비벼 부러뜨린 후, 한 송이 한 송이 정성껏 물병에 꽂았다. … 그날 밤, 방 씨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비상벨 소리에 간호사가 달려왔다. … 급히 호출되어 온 당직 의사가 간이 혈액검사를 거쳐 파상풍 진단을 내렸다. 그런데 이미 신경망 깊숙이 독소가 퍼진 터라 파상풍 혈청을 주사해도 중화되지 않았다. 당직 의사의 표현에 따르면 ‘돌아버릴 정도로 급격한 진행’이었다.”(100쪽)

 

    이와 같은 플롯의 구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드러낸다. 첫째,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여겨졌던 노인들의 죽음이 국가 차원의 소행이었음이 드러남에 따라 ‘쓸모’를 기준으로 추방/배제되는 노인들의 삶을 소환한다. 소설 속에서 노인에 대한 추방/배제는 국민연금공단에 의한 암살의 형태로 수행된다. 그렇다면 현재를 사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추방하고 배제하고 있을까. 내몰려진 그들의 삶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소설은 그렇게 의문한다. 둘째, 노인들의 죽음을 ‘자연적으로’ 여겼던 사고방식이 우리 주위의 소외자에 대한 무관심과 관련된다는 것을 환기한다. 소설은 그 공공연한 살해를 일반적 죽음으로 은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 모두의 죽음은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 그 죽음은 모두 국가에 의한 공공연한 살해였다. 모든 죽음을 ‘자연’으로 치부하는 당신의 사고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이처럼 소설은 죽음의 위협에 맞서는 어느 노인의 분투와 노인들의 죽음을 은폐하는 사고 논리를 이중적으로 나열한다. 당신이 인지하지도 못하는 새에 ‘어떤’ 노인들은 강제로 죽음을 선고받고 있으며, 그 위협적인 선고에 가담하는 것은 바로 당신임을 밝혀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노후』라는 소설 내에서 당신과 ‘당신’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당신의 노후』에서만이라도, 라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당신이라는 단어는 부부가 상대방을 높이어 이르는 말로 사용되거나, 마주하는 상대를 높이는 말로서 사용된다. 『당신의 노후』에서의 당신 역시 표면적으로는 장길도가 아내인 ‘수련 씨’를 높이는 말로 일컬을 수 있다.

 

    이대로는 차 따위를 몰 거 없이 밤새라도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련 씨가 오늘은 뭘 먹고 싶어 할까? 한 입이나마 직접 먹어 보자고 그 먼 길을 달린 게 아니었으니까. 땀에 젖은 그 두 알의 사과를 씻지도 않고 남김없이 먹어 주어서 진심으로 기뻤다.(114쪽)

 

    장길도는 자신의 아내 한수련을 늘 ‘수련 씨’라고 부른다. 이 호칭은 애틋함과 감사함, 사랑 등을 내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외곽 공무원에 의해 암살될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서도 ‘수련 씨’라는 호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로부터 위협받는 한수련의 이름을 더욱 애타게 호명한다. ‘수련 씨’라는 호칭에는 언젠가 살해 위협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한수련과 남은 노후를 같이 보내고 싶은 장길도의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길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 길 달려 구해 온 사과를 먹어 보라고 한 번 말하지 않아도 나는 기쁘다고. 당신이 남김없이 먹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고. 어제와 같이 무탈하게, 사과를 베어 먹는 노후를 바라는 것만으로 나는 기쁘다고. 이처럼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당신”은 한수련을, “당신의 노후”는 한수련과의 노후를 소망하는 장길도의 바람을 나타낸다. 이 “노후”는 장길도의 노후가 되기도 한다. 장길도는 오랜 시간 동안 ‘수련 씨’가 없으면 호명되지 않는, 호명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던 인물이다. 장길도에게 지금까지의 노후와 남아 있는 노후 모두는 한수련과 분리되어 호명될 수 없다. 따라서 장길도가 호명하는 “당신”의 노후는 바로 장길도-당신의 노후가 된다.
    한편 『당신의 노후』에는 당신(장길도-한수련) 외의 노후가 존재한다. 당신과는 개별 되는, ‘당신’에 의한 노후이다. 이 ‘당신’은 ‘수련 씨’나 장길도를 지칭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의 노후』라는 소설 자체가 호명하는 존재(내포 독자)이자 텍스트 바깥에 상주하는 비존재(독자)이다.4)‘당신’은 어떤 노후를 가상으로 전제한다, 수많은 노인의 죽음을 자연적으로 인식한다. 그 죽음들의 비밀(노인 살해)을 서사의 자연적인 흐름에 맡겨버린다. 그리고 모든 노후를 자신의 ‘일’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긴다. 그는 장길도와 한수련이 아니므로, 그들을 표상하는 노후를 자기 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당신’은 수많은 죽음의 징후들을 포착하지 못한다. ‘당신’은 영원히 “당신이 아닌” 존재가 된다. 그렇게 노후는 끝없이 당신 ‘아닌’ 영역으로, 다시 말해 ‘당신의 일이 아닌’ 노후로 유보된다. 이와 같은 부정의 역설을 통해 서사는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띤다. 즉, 『당신의 노후』는 국가장치의 권위적 살해와 주체의 분투에 관한 서사(장길도-한수련)인 동시에 ‘나’와 타자, ‘당신’과 ‘당신의 타자(당신이 아닌)’에 관한 서사로 작동하고 있다.

  4)  채트먼에 따르면 이야기는 서술자에 의해 청자에게 전달되는 형태를 취한다. ‘서술자-청자’ 바깥에는 ‘내포 작가’와 ‘내포 독자’가 존재하며, 그 바깥에는 ‘작가’와 ‘독자’가 존재한다. 즉, 서술자가 청자에게 하는 ‘이야기’는 내포 작가에 의해 통제되고 실제 작가에 의해 문장화되는 것이다. 내포 독자는 내포 작가의 공감자로 설정되며, 텍스트를 전달하는 의미망(문화적 규약)을 전달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독자이다. 한편, 독자는 서사물을 보며 작품의 의도 및 의미의 원천(내포 작가가 설정한 문화적 의미망)을 상상한다. 이 과정에서 내포 작가는 독자에 의해 구축된다고 볼 수 있다.

 

    3. 끊임없이 부재하는

 

    소설은 이토록 위협받고 억압받는 비극적인 노후가 ‘당신’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작금의 현실에서 이런 방식의 발화는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 ‘당신’은 그 많은 죽음의 징후를 포착하지도 못했으며, 그러한 노후를 당신 ‘아닌’ 영역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후·죽음의 배제는 텍스트 내부(장길도-젊은이)와 외부(노인들-‘당신’) 양쪽에서 나타나 두 공간을 계속해서 교란한다.

 

    (1) 장길도-젊은이의 공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젊은이’는 국민연금공단의 연금 이사이자, 노인들에 대한 과도한 혐오를 일삼으며 암살을 지시하는 인물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장길도는 자신의 아내를 암살하라고 지시한 ‘젊은이’와 마주한다. 그리고 ‘젊은이’는 “시간이 노인의 편이 아닌 것처럼 젊은이의 편도 아니지. 어느덧 자네들도 맥없이 늙어 있을 테니까.”라고 말하는 장길도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이보세요, 장길도 씨. 내가 지금 당신 보면서 내 미래를 떠올리는 것 같아? 나도 당신처럼 될지 모른다고? 시간의 연속성을 맹신하고 계시는군. 아이에서 청년으로 흘러 결국 노인으로 이어지는 그 질긴 연속성 말이야. 하지만 다 허상에 불과해. 과거는 해마가 관장하는 기억이고 미래는 전두엽이 꿈꾸는 상상에 지나지 않아. 실재하는 건 현재밖에 없어. 나머지는 여기(머리)” … “여기서 꼼지락거리는 가짜 이미지일 뿐이고. 사람은 누구나 아이 아니면 청년 아니면 빌어먹을 노인, 셋 중 하나야. 내가 왜 재수 없게 당신을 보며 내 미래를 생각하겠어?”(134~135쪽)

 

    ‘젊은이’는 장길도를 보며 결코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노후된’ 미래가 없다. 그에게 과거나 미래는 “기억”이자 “상상”일 뿐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현재만이 실재한다. 노후된 장길도의 시간은 결코 ‘젊은이’의 시간과 연속될 수 없다. 그 둘은 같은 ‘현재’를 살고 있을지언정 완전히 다른 영역에 위치한다. ‘젊은이’는 연속되지 않는 장길도의 삶을 완전한 타자의 영역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당신(한수련-장길도)의 일들은 영영 젊은이의 일로 포섭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맥없이 늙어 있는” 장길도를 동정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웃기라도 하듯 동정에 호소하는 장길도를 질타한다. 그는 노후된 존재와의 어떠한 ‘연속성’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혐오를 정당화하고 끊임없이 가속한 결과, 마침내 그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까지 배제하고 만다. 젊은이는 늙지 않은 이들, 즉 ‘당신 아닌’ 이들만을 살아 있는 “현재”로서 취급된다. 그 외의 모든 노후는 ‘가짜’이며 ‘허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젊은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젊은이’의 영역에는 연대의 책임도 공감의 가능도 실존하지 않는다.

 

    (2) 노인들-‘당신’의 공간

 

    병원에 도착한 지 닷새가 되던 날 밤에 원 씨는 병실 창문을 통해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누구든 잡히기만 하면 실력을 보여주려고 벼르는 의사가 주변에 득실거렸음에도 이번엔 심장이 파열되었기 때문에 어찌 손써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의 추측은 비슷했다. 원 씨는 늙었다. 가진 게 없고, 별 희망도 없고, 하루하루 지치기만 했다. 살아 있으면 뭐 하나, 병원비는 또 누가 내나. 왜 굳이 이 고생을 하나. 그랬던 게 아닐까.(51쪽)

 

    “모두”는 원 씨(82세, 남)의 죽음을 “가진 게 없고, 별 희망도 없고, 하루하루 지쳤기 때문에” 죽어버린 것으로 취급한다. 아무도 모르며, 모를 수밖에 없는 원 씨의 죽음은 그토록 쉬운 방식으로 ‘알려진’(읽힌)다. 소설은 원 씨를 비롯해 강 씨, 최 씨, 김 씨 등 노인들의 죽음을 차례로 나열한다. 그들의 죽음은 장길도의 서사와 교대로 나열됨으로써 일종의 ‘후경’처럼 기능하게 된다. 또한, 소설은 노인들의 죽음에 “그럴 만한” 이유를 붙인다. 그를 통해 노인들의 죽음은 모두 자연스러운 죽음이 된다. 이에 따라 독자는 노인들의 죽음이 연속해서 등장하는 까닭을 의심하더라도 그 서사의 ‘연속성’을 주체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독자는 노인들의 죽음이 갖는 공통성, 동일성, 외연적/내연적 차이 등에 주목하여 이들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의 죽음이 서사적 장치로 기능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해석의 주체성을 플롯의 서사에 맡겨버리는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모두”가 추측하는 것처럼 저마다의 비극적인 이유로 ‘자연스럽게’ 죽지 않았다. 노인들은 국민연금공단에 의해 살해됐을 뿐, “모두”가 추측하는 비극적인 노후를 이유로 자살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모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죽음을 방관할 뿐이다. ‘당신’은 “모두”의 편에 서서 노후된 죽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노인들의 죽음은 영영 ‘당신’의 일로 포섭되지 않는다. 연속되지 않는 두 개의 삶은 서로에게 완전한 타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진지한 마주침 없이 타자의 정보를 ‘읽어낼’ 뿐인 주체는 그 어떠한 공감도, 연대도 수행하지 못한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현재에 상주할 뿐이며, 당신(한수련-장길도)의 노후와 연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부재의 공간

 

    물론 원론적인 차원에서 독자와 텍스트 내의 서술자는 단연 같은 현재에 상주할 수 없다. 그들은 엄연히 다른 동시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과 당신(한수련-장길도-노인)은 같은 현재에 있지 않으며, 극복할 수 없는 타자의 간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끈질기게 그 타자의 간격에 대해 의문한다. 앞서 말했듯 ‘젊은이’는 “실재하는 건 현재밖에 없”다며 장길도라는 타자를 완전한 바깥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비연속성은 ‘당신’과 당신(한수련-장길도)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당신 보면서 내 미래를 떠올리”지 않는 것과 같이 ‘당신’은 영원히 당신(한수련-장길도)의 미래를 떠올리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당신(한수련-장길도)의 시간은 ‘당신’의 시간과 연속되지도 연속될 일도 없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공간상에 놓일 뿐만 아니라 양립할 수도 없다. “실재하는 건 현재밖에” 없는 것과 같이, 당신과 ‘당신’의 시간은 자신의 현재를 간신히 지탱할 뿐이다. 연속되지 않는 둘의 삶은 서로에게 완전한 타자의 영역이다. 당신(한수련-장길도)의 일들은 영영 ‘당신’의 일로 포섭되지 않는다. ‘당신’의 현재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소설은 이러한 ‘동시적 현재의 불능’을 ‘현재적 동시성의 불능’으로 확장한다. ‘당신’은 ‘당신’이 상주하는 현재(텍스트 바깥-실제 현실)의 노후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반 시민의 편에 선 채 노후된 죽음을 방관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어떤 이들의 노후와 죽음에 대해 그 어떠한 연속성도 갖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실존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침내 이러한 동시성의 불능은 부재의 공간을 포착한다. ‘당신’은 ‘나’와 현존할 수 없다. 내게 ‘당신’은 부재한다, ‘당신’은 끊임없이 부재한 대상이다. ‘당신’ 또한 당신이 선 세계의 타자들과 연속하지 못한다.5) 그래서 ‘당신’은 현실에 있는 어떤 노후들과도 동시적으로 현존하지 못한다.

  5)  당신이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타자’라는 존재를 수반한다. ‘타자’가 있어야만 당신을 호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타자는 필연적으로 현재적/부재적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첫째, 당신은 ‘나’라는 존재와 동시에 존재해야만 하는 현재적 존재이다. 둘째, 당신은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존재하지 못하기에 (실존적으로는) 부재한 존재이다. 이렇듯 당신이란 호명은 타자적/부재적 현존성에 근거하고 있다. 본래 ‘타자’라는 존재는 ‘나’와 전혀 별개로 존재하는, ‘나’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당신이라고 부르는 친밀한 호명 행위는 타자의 본질을 훼손한다. 타자의 고유한 존재를 ‘자연스럽게’ 묶어 두기 위해 인위적으로 ‘현재성’과 ‘부재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의 모든 타자성은 제거된다. 그렇기에 『당신의 노후』에서 드러나는 ‘당신’의 호명은 그토록 고립된 존재로서 표상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노후(당신)는 ‘나’에 의해 ‘언제나/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4. 신성하고 투명한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의 추측은 비슷했다. 원 씨는 늙었다. 가진 게 없고, 별 희망도 없고, 하루하루 지치기만 했다. 살아 있으면 뭐 하나, 병원비는 또 누가 내나. 왜 굳이 이 고생을 하나. 그랬던 게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꽤 합리적이어서 부검이 생략되었다. 국가는 모든 죽음을 부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게 다 국민의 세금이다.(52쪽)

 

    “모두”의 추측이 너무나도 합리적이어서 원 씨의 부검이 생략되었다는 사실, “국가는 모든 죽음을 부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사실은 국가와 노동력, 주체 간의 긴밀한 관계를 투영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 “모두”는 원 씨를 비롯한 노인들의 죽음을 자신의 논리에 근거하여 재조립하는 군상이다. 이들에게 원 씨는 더는 살아 있을 의미가 없어 자살한 인물로 그려졌다. 하지만 모두의 추측과 달리 원 씨는 연금 과다수령자라는 이유로 국가의 세금 확보를 위해 살해되었다. 이처럼 원 씨의 죽음의 진실은 외곽 공무원과 국가기관의 체계적인 작업에 은폐될 뿐만 아니라, 바로 원 씨의 주변부로부터 은폐되고 있다. 즉, 『당신의 노후』 속에서 노인들은 국가에 의해 살해되는 한편 그 죽음의 진실성마저도 은폐되고 있는데, 그 은폐에 동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민들 스스로이다. 이와 같은 죽음의 은폐는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내면화, 내면화된 권력의 기제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자발적 은폐 수행은 권력의 내면화라는 근대국가의 기제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들의 행위는 내면화되기엔 너무나도 발현적이며, 발화적이기 때문이다.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요즘 툭하면 10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 하는 일이라고는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주제에 당신들 대체 왜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거야!”(126~127쪽)

 

    모든 노후는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상태이며, 죽는 게 당연한, 죽음으로의 과정으로 그려진다. 모든 노인 역시 국가와 청년에게 이익이 되는 어떠한 노동력도 가지지 못한 채 세금만 축내는 무용한 존재로 여겨진다. 따라서 노인에 대한 혐오와 노후에 대한 배제는 국가/청년의 미래를 위해 정당화된다.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 이치이므로, 조기 사망의 가능성을6) 높여 청년들의 부양 부담을 줄이는 것은 필연적인 섭리가 된다. 즉, 청년들은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은밀한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국가는 그 욕망의 대행자로서 신성한 살해를 한다. 그리고 모든 청년은 저마다의 합리적인 추측을 통해 노인들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한다. 그들 모두는 노후와 죽음의 과정(부검)을 생략함으로써 국가가 행하는 살해를 외면한다. 노인들의 죽음은 청년들의 현재와 연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소설에 등장하는 노인 살해는 다음과 같은 개인의 욕망 기제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알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욕망(권력)을 실현하라.
    국가에 있어 노인들은 노후한 세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노인들은 국가에 의해 ‘행정적으로’ 처리된다. 이러한 ‘행정’의 성격은 일반 시민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시민에게 노인은 자신의 사회에 남아 있으면 안 되는 존재, 도움 안 되는 ‘해충’, ‘짐’ 등의 ‘불합리한’ 것들로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은 노인 혐오는 『당신의 노후』 속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된다. 첫째, 노인은 국가를 통해 반드시 해소되어야만 하는 ‘짐’이며, 죽여야만 하는 존재/상태이다. 둘째, 그를 죽이는 행위는 시민들의 살해 욕망을 대행하며, 시민들 스스로에 의해 완전히 은폐된다. 셋째, 시민은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무지’하고자 하는 욕구를 보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민은 국가권력과 일체화하는 동시에 노인들의 생명을 국가에 위탁한다.
    노인들의 죽음은 시민 욕망과 국가 행정을 통해 더욱 명확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처리된다. 따라서 시민들은 노인들의 죽음에서 어떠한 이질성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의 죽음은 혼탁해서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너무 투명해서 찾을 수 없다. 즉, 노인 살해는 시민의 욕망을 대행하는 ‘투명한 것’이자, 그 과정의 당위성, 엄숙함의 차원에서 ‘신성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신성성-투명성의 절차(행정)는 시민들이 질문해서도 안 되고, 의심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따라서 시민들은 그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아포리즘을 바탕으로 노인들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정당화시킬 뿐이다. 시민들에게 노후는 언제나 그들 영역의 바깥에 있으며,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설은 그 많은 노후를 ‘당신’의 일로 취급하지 않는 시민의 혐오와 추방, 배제 등을 드러낸다. 노인들의 비극적인 죽음도 비참한 생존도 모두 일이 아닌 짐으로, 즉 ‘일 아닌 것’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이러한 ‘非일’의 개념은 타자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주체가 자신이 아닌 타자의 어떤 사실을 ‘일’로 개념화하기 위해선 타자를 주체의 영역 내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체의 영역이 아닌 타자의 사실들은 ‘일’로 처리되지 않으며, 외면하고 싶은 사실, 부정해야 할 사실들로 처리된다. ‘나’의 죽음, 혹은 ‘나’의 주변의 죽음은 내가 처리하고 맡아야 할 책임이지만, 타자의 죽음, 타자 주변의 죽음은 내가 처리할 필요도 없고, 처리해서도 안 되는 ‘신성한’ 죽음에 위치하게 된다. 그 죽음은 개인의 인지나 도덕, 사고에 의해 처리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은 그 죽음을 투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죽음은 도처에 있지만, 나의 현실에서는 행사되지 않는 무언가이며, 법률적인 예외의 상태이다.

 

    5. 유랑의 가장자리

 

    장길도는 그런 진짜를 여럿 보아 왔다. 어떤 노인은 사망보험금을 노리고, 어떤 노인은 사랑하는 가족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또 어떤 노인은 순전히 홧김에 자기 몸을 찢었다. 비록 노인이지만 장길도는 그들에게 애틋한 동지애를 느껴 왔다. 죽은 노인은 착한 노인이다. 자살한 노인은 우리 사회의 동지이다.(76쪽)

 

    소설 속에서, 노인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 양상은 “80세 이상 노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시위”(38쪽)로 구조화되거나 “도로를 점령한 것은 요컨대 젊은이들의 세를 과시하는 자축 행사”(39쪽) 등으로 자행되고 있다. 노인에 대한 개인과 국가의 혐오 발화가 추방과 배제로 접합/행사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당신의 노후』 속의 노인들은 아렌트가 정의한 ‘난민’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 난민과 인권과의 관계를 분석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난민은 국적을 잃음과 동시에 법과 권리를 상실하며 ‘인간(인권)’의 범주에서도 벗어난 존재로 취급된다. 이 지점에서 아렌트는 난민의 역설에 대해 말한다. 본래 ‘난민’은 국가가 없기에 ‘국민권’이 아닌 ‘인권’만을 가지는 가장 순수한 존재여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국민권’조차도 없는 난민은 ‘인권’에서조차 완전히 배제된다. 아렌트의 논의는 “인간에 의해 시민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 의해 인간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도출한다.7) 국민과 국가권력의 선택과 배제에 따라 난민은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될 수도 혹은 ‘인간 아닌 존재’로도 취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노인들은 국가에 의해 살해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국적과 인권을 빼앗긴다. 이들은 인권을 가져서도 안 되며, 가질 필요도 없는 존재로 규정된다. 노인들의 생명은 시민에 의해 좌우된다. 마침내 무지한 시민에 ‘의해’ 그토록 자연스러운 죽음이 만들어진다.
    『당신의 노후』에 등장하는 노인 살해는 모두 ‘암살’로 수행된다. ‘노후’들은 배후에서 은밀하게 살해된다. 이는 그들이 애초에 국가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았던 ‘비존재’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상실한 이상, 노인은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비존재로 규정된다. 이러한 비존재들은 국가적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살해되어야 한다. 오직 죽은 노인만이 “우리 사회의 동지”로 인정된다. 살아 있는 노인은 그 어느 순간에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노동력을 가진 국민들에 의해 핍박(시위, 자축 행사)받으며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던 노인들, 투명한 옷을 입은 채 자신을 사회 바깥으로 내몰아야 했던 노인들은, 마침내 그 죽음마저 투명화 된다.
    『당신의 노후』는 전면에 걸쳐 노인들의 혐오담론과 인간적인 면모를 상실하는 노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혐오, 배제의 논리는 국가와 개인에 의해 유기적으로 실현된다는 점에서, 동시에 현실에 실존하지 않는 존재처럼 설정된다는 점에서 ‘난민-유랑’의 위치에 자리한다. 이러한 서사 속에서 소설은 다시금 ‘당신’에게 ‘당신’의 노후를 호명하고 있다. 물론 소설은 그 많은 노후들, 죽음들, 그 징후들이 ‘당신’의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의 현실에서도 그와 같은 노후들이, 그 징후들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으며, ‘당신’은 그에 대해 신성하고도 투명한 살해를 행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소설의 화법이 동시성의 리얼리즘 화법8)이 아닌, 비동시성의 리얼리즘 화법9)을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은 결코 동시에 현존할 수 없는 서사를 구성하는 동시에, 당신과 ‘당신’의 노후를 동시에 호명함으로써 ‘나’의 바깥에 있는 타자를 불러낸다. 이러한 호명 속에서 소설은 ‘당신’이 외면하고 있던 비동시적인 타자들을 바라보는 목소리를, 그들을 은폐했던 권력적 시선을 해체하는 호명을, 그들의 세계에 진입하는 소음을 담지한다. 노후는 단순히 ‘늙음’이나 ‘늙어버린 상태’가 아니다. 단순한 늙음 이후에도, 노후의 영토에서는 숱한 사건이 발생하며 서사가 생성된다. 노후는 늙음 이후 동일성을 연명하는 방식으로 서사가 마무리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노후는 ‘늙음-죽음’이라는 단순한 도식의 차원에서 벗어나 타자의 죽음과 타자로의 확대, 젊음에 대한 재인식과 늙음에 대한 수행 등으로 이어진다.

  7)   황정아, 『개념비평의 인문학』, 창비, 2015.
  8)  현실에 대한 고발을 목적으로 한 리얼리즘적인 화법은 ‘불편’을 통해 작업화된다.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권력 비판적 대안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현실의 외재적인 조건들이 어느 정도 충족(불편의 보편화, 불편의 완화)되었을 때, 불편은 곧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즉 ‘불편한’ 사실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과거의 것, 미학적 장치 정도로 취급된다. 현실비판, 알레고리를 통해 사용되었던 ‘불편’은 현실 속에서 관습적인 코드로만 활용되는 것이다. ‘불편함’은 전복성, 공격성, 권위에 대한 도전은 현실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해체하지 못한 채, 일종의 문학적 장치(현실 비판이 아닌 현실의 재현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9)  반면, 『당신의 노후』에서 등장하는 리얼리즘 화법은, ‘당신’이란 호명을 통해 소설의 현실과 괴리된 비동시성의 공간(‘당신’의 현실)을 환기한다. 이 가운데 주체는 현실의 외재적인 조건들이 전혀 충족되지 않았음에도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냉소적이고 유머러스하게 전달되는 장길도의 화법은 ‘당신’의 현실, 권력, 권위를 적극적으로 해체시키기보다 숱한 노후의 징후들에 대해 비동시적인 연민을 자아낼 뿐이다.

 

    “그깟 사과가 뭐라고 그걸 구하려 밤새 달렸던 자신의 젊음과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사과 두 알을 꼭지째 우적우적 씹어 먹던 수련 씨의 젊음, 그토록 수많은 게 가능했던 젊음, 그리고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저 새파란 젊음이 그리운 것이다.”(133쪽)

 

    한수련의 (살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때, 장길도는 타자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확대한다. 앞서 말했듯, 장길도의 노후는 결코 ‘수련 씨’와 분리될 수 없다. 장길도가 호명하는 당신(수련 씨)의 노후는 곧 장길도의 노후가 된다. 장길도에게 ‘수련 씨’의 사망은 노후의 ‘끝’이나 타인의 죽음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한수련의 죽음은 자신의 노후에 뒤이을 공허와 부재를 생성하는 자신의 죽음이자, 그 공허와 부재조차도 ‘생성’임을 깨닫게 하는 ‘죽음 이상’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장길도는 어떤 ‘젊음’을 계속해서 반추한다. 장길도는 어느 겨울 ‘수련 씨’가 사과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자, 40킬로미터의 눈길을 파헤쳐 사과 두 알을 구해 온 ‘젊은 시절’을 기억해 낸다. 이러한 장길도의 ‘기억’과 ‘젊음’은 역설적으로 한수련의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구체화되고 적극적으로 반추된다. 젊음을 반추하는 장길도의 행위는 젊음에 대한 욕망이나 그리움으로 표명될 수 있으나 이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장길도의 ‘젊음’은 노후된 몸뚱어리로도 외곽 공무원과 국민연금공단, 국가 전체와 싸우려는 자신의 의지를 연결하는 서사적 장치로서 작용한다. 장길도에게 ‘젊음’은 언제나 새파랗기에 “수많은 게 가능했던 것”, 잃어버렸기에 “영영 그리운”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노후된’ 자신에게 “스스로가 참 열심히 달린다는 느낌을 받”(119쪽)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이를 통해 장길도는 “어쩐지 달려가는 두 다리에 새로운 힘이 생겨”(114쪽) 분투의 서사를 이끌고 갈 힘을 확보한다.
    장길도의 노후는 젊음이 소진되어서 당장이라도 죽음에 이를 것같이 ‘늙어버린 상태’가 아니다. 그의 노후는 자신의 ‘젊음’을 소환하고 반추하는 결핍된 위치로 표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후는 ‘젊음’ 이후 죽음까지 마주해야 할 필연적인 사투로 취급된다. 노후는 단순히 젊음의 결핍이 아니라 젊음의 연속이며, 부재나 공허의 공간이 아니라 무수한 생성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이곳에서 장길도는 자신의 삶을 구성해 왔던 삶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뛰어들며, “달려가며”, 노후한다. 그의 노후는 ‘청년/국가’에 의해서는 포착되지 않는 생성의 시간을 갖는다. 따라서 ‘당신’의 노후를 호명하는 모든 젊음과 노후, 죽음의 시간들은 생성의 시(時)학을 통해 재건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노후를 바깥으로 내몰고 있다. 노인들은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 자신을 국가 외부의 가장자리로 유폐한다. 그 숱한 유랑 속에서 그들의 시간은 죽음으로 처리된다. 그들은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청년/국가에 의해 변별되며 객체화된다. 근면이 없는 그들의 노후는 죽어 마땅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그들의 노후에는 어떠한 생성도 가능하지 않으며 죽음으로 이행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단정해 왔다. 그렇게 노후는 ‘당신’ 아닌 영역으로, 우리의 ‘일’이 아닌 예외의 영역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그와 같은 노후에도 생성은 가능했다. 이미 그들은 늘 무엇인가를 생성해 왔다. 그 생성은 청년/국가가 주시하는 노동과 생산의 관점으로는 포착될 수 없다. 청년/국가가 관리하는 항시적 예외 상태에서 벗어날 때, 노후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지금은 ‘당신’ 주변의 노후에 자연스럽지 않은 ‘늙음 이후’가 받아들여져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후한 현재와 연속해야만 한다.

 

 

 

 

 

 

 

 

 

 

 

 

 

 

선해용

작가소개 / 선해용

1995년 출생. 동국대학교 재학 중.

 

   《문장웹진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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