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아남았지 – 박지리론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나, 살아남았지

– 박지리론1)

 

 

최희라

 

 

 

1. (잠재적) 가해자가 된 생존자들

 

    물론 난 잘 안다./순전히 운이 좋아/그 많은 친구들과 달리 살아남았다는 걸./하지만 지난 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내 얘기 하는 걸 들었다./“보다 강한 녀석들이 살아남는 거야.”/난 내가 싫었다.
    – 「나, 살아남았지」2) 전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가 「나, 살아남았지」에서 노래했듯이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소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버지의 예기치 못한 죽음이라는 우연 때문이었다.(『맨홀』) 열여덟 명이 사망한 교내 총기 난사 사건에서 가해자를 제외하고는 유일한 생존자가 된 소년은 그 시각 선생님이 시킨 심부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번외』) 물리적 나이로는 이미 소년이 아니지만 대입 면접에 실패한 이후로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첫 취직에 성공했음에도 살아남음을 의심하며 고군분투를 멈추지 않는다.(『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그렇게 여기 폐허 위에서 살아남아 성장의 문턱에서 세계의 공범으로 내몰리는 소년들이 있다. 2010년 등단한 이래 약 8년여 동안 장편소설 6권과 단편 1편을 출간한 박지리의 소년3)들이 바로 이들이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살아남은 브레히트의 시적 자아와 이 소년들 사이의 간격은 기이하게도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가정폭력이든 총기 난사 사건이든 취업 경쟁이든 간에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재난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을 지배하는 것은 운이 좋았다는, 다행이라는 감각이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며 우연에조차 기댈 수 없어 희생되었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도 된다. 살아남은 이후의 세계는 이들에게 지극히 다행하면서도 폭력의 잔재가 떠도는 곳이 된다.
    실제 박지리의 소년들은 작품 곳곳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번외』의 소년은 온종일 굶어도 식욕을 느끼지 못하고, 『맨홀』의 소년은 지난날 폭력에서 자신을 지켜주었던 임시 피난처이자 “경험한 모든 폭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165쪽) 맨홀로 거듭 되돌아가며,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의 M은 숲으로 둘러싸인 연수원에서 새소리 대신 환청을 들으며 의심과 집착을 키워 간다. 생존에 성공한 다음 소년들은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나, 살아남았지」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같은 시의 달리 번역된 제목이기도 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지금도 더 널리 인지된 제목이며 원문은 “Ich, der Überlebende4)”, 직역하면 ‘나, 살아남은 자’이다 ― 으로 온전히 치환할 수 없는 인식에 맞닥뜨리게 된다. 더 강한 자들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에 따르는 자기혐오는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대변될 수 없다. 그런데 정말 더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가.
    살아남은 계기는 우연이었다 하더라도 살아남음 자체는 필연적으로 ‘수혜’의 성격을 띠며 수혜자는 재난 이후의 세계에서 전보다 더 단단한 자리를 얻는다. 『맨홀』의 소년은 전횡하던 아버지가 사라진 가정에서 자신의 작은 폭력에도 벌벌 떠는 어머니와 누나를 앞에 두고 ‘집안의 어린 왕’(197쪽)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느낀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에서 다른 지원자 네 명을 제치고 마흔여덟 번째 면접을 통과한 M은 취업준비생의 신분에서 대기업의 정규직 사원이 된다.
    『번외』의 소년은 이중적인 지위를 얻는데, 참사와 가장 가까웠다는 점에서 ‘피해자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참사 이전보다 더 생산적으로 변모하도록 주문받는다. 참사 이후 소년의 삶은 단순한 덤이 아니라 “죽은 아이들의 희생으로 얻어진”(96쪽)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이후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게 된 소년들은 수혜를 기쁘게 받아들이지도 못하지만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다. 이들은 자신을 생존의 위기로 내몰았던 사람이나 체제가 자신의 일부라는 인식에까지 이르게 된다. 무리도 아닌 것이 그 가해자는 소년의 아버지이거나 (『맨홀』), 친구이기 때문이다(『번외』). 살아남은 이후 연루된 살인에서 『맨홀』의 소년을 구해 준 것은 바로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였으며 친구가 결과적으로 자신에게만은 총을 쏘지 않았기 때문에 『번외』의 소년은 살아남는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에서 이유는 더욱 은유적으로 바뀌는데, M은 살인자와 도둑 중 하나를 택하라는 면접 질문에 살인자라고 답함으로써 바로 그런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직자에게 할 수 있는 체제에 편입될 만한 자격을 얻는다.
    그렇다. 그들은 살아남음으로써 공범이 된다. 『번외』의 소년은 아예 “내가 공범이 된 것 같은”(68쪽) 기분을 느끼며 살인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미수에 그치긴 하지만 살인을 꾀하기도 한다. 열여덟 명을 살해한 친구 K의 욕망을 곱씹어 보다 결국 이 세계 자체가 신이 내키는 대로 살인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맨홀』의 소년이 저지르는 살인은 우발적이지만 살인이란 결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의 M도 살인까진 저지르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생명을 살해한다. 이는 M이 편입된 세계가 인간다움을 빼앗는 질서 위에 서 있으며 그 질서란 살인자의 태도와 다르지 않음을 그 스스로 내면화했음을 암시한다.
    근본적으로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수혜자가 되는 것. 해서 그 체제에 철저히 복무할 수도, 거기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도 없다. 그 모순이 살아남은 소년들을 길 잃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품들의 결말은 하나같이 유동적이다.

 

    깜깜하다.
    어디로 갈까.
    – 『맨홀』, 278쪽

 

    여기가 어디야, 응?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252쪽

 

    내 앞을 낮은 펜스가 가로막고 있고 공중에 신기루 같은 모래가 아른거린다.
    – 『번외』, 138쪽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에서 구체적으로 그려지듯 타인은 서로 신뢰할 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무한경쟁 체제라 불릴 만큼 경쟁이 극심해지고 신자유주의의 그늘이 짙어진 ‘아무리 과자를 싫어하는 사람도, 과자 회사가 사원 모집 공고를 낸 이상 거기에 지원하는 것이 의무가 된 세상’(24쪽)에서 타인은 생존을 위해 이용하거나 배제해야 하는 대상이다. 박지리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친구와 맺는 우정이 대체로 배신으로 귀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에게 성장이란 잠재적 가해자의 길로 들어서는 일과 마찬가지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의 저서들이 증언하듯 “연대의 부재는 명료하게 인식하진 못했더라도, 어쨌든 수형자들이 부가적으로 느낀 고통의 원인”5)이었다. 이 연대의 부재와 연대감의 상실은 오히려 생존 이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프리모 레비를 포함한 생존자 중 일부는 아우슈비츠를 벗어난 이후 자살을 선택한다. 연대감의 부재는 박지리의 소년들에게도 살아남은 이후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 된다.
    다른 소년들과 달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의 상류층 소년 다윈은 자신이 수혜자라는 인식조차 지니지 않았다. 애초에 피해자의 위치에 서 보지 않았던 소년은 우월감이나 차별의식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루미는 그 여자애들에게서 약간의 승리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보다는 다윈의 ‘순수한 무지’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다윈은 자신을 둘러싸고 흐르는 기류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 『다윈 영의 악의 기원』, 322쪽

 

    생래적인 수혜자가 타인의 피해와 직결된 자신의 수혜를 알았을 때, 즉 이 세계가 그에게도 지극히 다행함을 깨닫고 그 피해를 은폐해야만 현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 작품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악이 탄생한다고 답한다. 정말 강한 자가 살아남는지에 대한 답변은 이 작품에서만은 명확하다. 살아남은 자들의 죄악으로 이뤄진 수혜를 딛고 그들의 대를 잇고 있음을 알아차린 소년 다윈 영은 “자기도 모르게 두 발로 똑바로 서게”(767쪽)된 강한 자로서 친구를 죽이고 진화하여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자로부터 대를 이어 진화한 자는 이제 연대감을 저버린 데 대한 죄책감도, 수치도 모르고 사회악의 기원이 된다.
    낯선 시공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 같지만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한국 현대사의 축약판과도 같다. 작가는 ‘지금 여기’의 균열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들에 프리즘을 대고 시공을 재구성한다. 이 세계는 곧 “수많은 난리와 파국의 상황들을 거쳐 오면서 한국의 민중과 엘리트는 결국 힘의 차등으로 구성된 사회(시민사회로부터 국제사회까지)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강자이며 결국 살아남는 것이 선이라는 원초적 생존주의를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이를 가장 소중한 삶의 철학으로 어린 세대에 학습시켜”6)온 현재를, 근미래에 도달할 디스토피아를 가리키고 있다.

 

2. 공범들의 이어달리기

 

    박지리의 소년들은 같은 또래의 여성과는 다른 자신의 위치를 대체로 잘 알고 있으며 살아남은 이후 드러내놓고 여성을 혐오하기도 한다. “너도 마지막 순간에 가선 꼭 배신을 때리는, 그런 더러운 년이었던 거야.”(『맨홀』, 237쪽)라며 일이 틀어진 순간에 가까운 여성 탓을 하거나, 사회적 생존 여부가 모호해진 상황에서 뚜렷한 증거도 없이 애인의 외도를 의심하고 “여자가 얼마나 안전지향적인 존재인지 알고 나면 구역질이 난다.”(『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209~210쪽)며 표적을 잘못 잡은 증오를 내비친다. 여성 동료가 생리통을 핑계로 봉사활동에 빠진다고 짐작하며 대놓고 비난하기도 한다.(『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이는 현실에서 생리휴가를 가는, 혹은 간다고 상상되는 여성들을 온라인에서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젊은 남성들의 모습과도 겹쳐지며 “한국 남성은 여성과 자본의 변화 앞에 갈피를 못 잡고, 이 둘 모두에 대한 불안으로 미소지니(misoginy, 여성혐오)라는 최악의 반(反)사회성을 표출하고 있다.”7)는 정희진의 분석과도 맞닿아 있다. 자본을 혐오하지 않는 이유는 자본을 열등하다고 여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열등하고 손쉽게 통제돼야 한다고 인식되지만 그 통제를 벗어나는 대상에 대해 갖는 분노를 우리는 종종 혐오라고 부른다.
    『맨홀』과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의 경우 갈등이나 문제의 중심에 아버지들이 있는 반면에 어머니들은 부재하거나 있다 해도 무력한 존재로 그려진다. 남편의 폭력에 아이들과 함께 시달리면서도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의지를 보이지 않기도 한다. 폭력의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아내로서 ‘신뢰를 깨뜨린 행동’(『다윈 영의 악의 기원』, 304쪽)을 했거나 혹은 『맨홀』에서처럼 그 신뢰를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지만 다르게 얘기하면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성이 통제당하고 있고 통제당해야 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관념이 없었다면 『다윈 영의 악의 기원』에서 영 가문의 살인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맨홀』에서 이웃하는 실업계 여자고등학교 학생이 어느 외국인 노동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도 소년들은 처음에는 분개하며 심지어 걱정까지 하지만 이내 여학생의 행실을 의심하고 그를 비난하는 자리로 돌아선다. 자신들보다 더 낮은 계층의 남성들로부터 자신과 같은 계층에 속한 여성의 성에 대한 통제권을 침해받았다는 분노가 그 여성에 대한 혐오로 쉽게 몸을 바꾼다.
    『맨홀』에서는 특히 하위 계층에 있는 남성들, 즉 ‘주변적 남성성’이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과 약자에게 혐오를 분출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언제나 가장 밑바닥이었다. 그런데 파키들이 제 발로 우리 밑으로 걸어 들어”(59쪽)온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듯 “주변적 남성성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더 폭력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8)
    소년들이 저지른 살인도 표면적으로는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것으로 처리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주변적 남성성이 이끄는 혐오와 차별의 문화 속에 있다. “수도권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기 싫어하는”(59쪽) 지역에서, 거기에서도 ‘갈 데 없는 애들이 가는 학교’(59쪽)에서도 아이와 어른, 학생과 선생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낮은 계층이자 외부자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멸시하며 종종 적대감마저 내비친다.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은 우발적이거나 우연한 사고라기보다 이런 혐오와 차별의 감정이 집단적으로 차곡차곡 쌓여서 임계치에 다다랐을 때 벌어진 사건에 가깝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속 세계는 계층과 성에 따른 차별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거주 지역의 차이로 드러나는 계층에 따라 차별받는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 번 더 차별받는다.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또래 남성과 동등하게 프라임스쿨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여성 청소년은 그보다 더 낮은 사회적 기대와 역할이 주어지는 프리메라스쿨쯤에서 만족해야 한다. 상위 지구에서 벌어진 아내 살해 사건의 범인인 남편은 아내의 외도라는 정상이 참작되어 일반적인 살인 사건의 형량보다 가벼운 십 년 형을 확정 받는다. 여성은 이 세계에서 최우선 순위에 놓인다는 교육과 법 분야 양쪽에서 이미 “부족”(128쪽)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세계의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남녀불평등이 빚어지리란 것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박지리의 소설들은 2010년대 이후 한국 문학에 속속 도착하고 있는 페미니즘 서사와는 전혀 다르며 문학사의 흐름과는 사뭇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남성들이 주요 인물로 나오고 여성들이 주체로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하지만 세심히 들여다보면 그의 소설들은 일상에 은폐된 가부장제의 뼈대를 드러내며 이 체제 내에서 역시 피해자인 소년들이 남성 주체이자 잠재적 가해자로서 재생산되는 궤적을 추적한다.
    박지리의 소년들은 “그 아이가 뒤를 돌아 얼굴을 보여주면 그 애도 꼭 부모 형제 없는 고아만은 아니라는 것을”(『맨홀』, 265~266쪽) 깨달으며 ‘김 사무관의 아들은 역시 김 사무관의 아들’(『번외』, 17쪽)이라며 진로계획서에 아버지의 직업과 동일한 장래희망을 적는 등 아버지와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인식을 좀처럼 놓지 못한다. 아버지는 유전자를 물려줬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치나 계층이 재생산되기 쉬운 현재의 사회 구조에서는 소년의 미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다. 이처럼 작가는 동시대의 다른 한국 소설에서 종종 부재하거나 무능하게 그려지는 아버지의 자리를 가늠하는데 이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직시하는 일과도 직결된다.
    작품 속 아버지 중 하나이며 이름조차 달리는 사람이란 뜻의 러너는 ‘쉬지 않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상상이 현실이 돼 있다는 게 이 두 발로 직접 체득한 삶의 교훈’(353쪽)이었다고 회상한다. 자신의 생존과 가족의 번영을 위해 계급적 우위를 점하고자 실제로도 쉴 새 없이 전진한 러너의 모습은 산업화 시대의 아버지상과도 쉽게 겹쳐진다. 러너의 아들이자 또 다른 아버지인 니스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삶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진 않아도 됐지만 물려받은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면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됐던 인물이다. “9지구에서 태어난 소년이 달리고 달려 지금 1지구의 노인이 돼 있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와 정신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755쪽)이라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세계의 문턱에 선 소년들은 이 질주를 이어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제 막 시작점에 선 러너들입니다. 마라톤 경기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174쪽)
    박지리의 소년들은 달리는 아버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종종 뒤를 쫓는다. 그런데 그 여정에서 소년들이 맞닥뜨리는 것은 바로 그 얼굴이 자신의 얼굴과 닮았다는 인식이며 절망에 가까운 낭패감이 그 뒤를 따른다. 아버지에게 면죄부를 준다고 아버지의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맨홀』에서처럼 “그 사람이 했던 짓을 똑같이 하는구나…… 닮은 얼굴로.”(73쪽) 같은 말을 들어도 소년은 반박하지 못한다.
    이들이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라는 것은 이 아버지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동일시되어 실제로도 소녀보다 더한 혜택을 얻으며 적어도 물리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았음을 기꺼워하는 순간 이들은 자신이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성장을 보류하며 길을 잃은 박지리의 소년들이 느끼는 고통이나 슬픔은 자기 연민이라기보다 자기혐오에 더 가깝다. 현실에서 각종 인터넷 게시판과 소셜미디어에 ‘피해자 서사’를 쏟아내며 생래적인 수혜를 부인하는 젊은 남성들의 태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3. 탄성을 잃어버린 자아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에서처럼 희곡 형식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박지리의 작품에서 연극적 요소는 종종 두드러진다. 『맨홀』의 누나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고통 받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상처받지 않은 자아를 연기하며, 자라서는 연극배우를 직업으로 선택한다. 데뷔작 『합체』도 3인칭 시점이지만 ‘우리’로 시점이 잠시 바뀌는 부분이 있는데, 마치 난쟁이인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키 작은 자신들을 차별하는 세계를 무대 삼아 독자라는 관객을 향해 방백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도 기본적으로 3인칭 시점이지만 중간중간 1인칭 시점으로 일곱 차례 전환되는데, 작중에서 비밀을 은폐하고 있는 성인 남성 중 한 명의 독백이 각각 한 대목을 이룬다. 시점의 변화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들은 자신이 연기하고 있음을 종종 의식한다. “프라임스쿨 진입로로 들어설 때마다 니스는 연극무대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다윈 영의 악의 기원』, 270쪽)
    작가는 자신의 인물들이 소설을 무대 삼아 끊임없이 연기하는 존재이며 독자가 속해 있는 현실 자체도 무대와 다름없음을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계산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불연속적으로 드러낸다. 세계의 다행함을, 그 안에 내재한 폭력을 감추기 위해 인물들은 끊임없이 연기한다. 박지리의 소설들이 물 흐르듯 흘러가다가도 종종 굴곡을 보이는 것도 이러한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독자들은 과연 지금 소설이란 장르를 읽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하기도 하고 시점의 변화에 당황하기도 하며 돌연 인물들의 기괴한 내면이 묘사되거나 일그러진 모습이 드러날 때 숨죽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현실 안에 숱한 연극이 끼어들더라도 대체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이 유지되듯 그의 소설도 굴곡들을 자연스레 넘어간다.
    다만 삶이 일종의 연극이며 인간이 무대 위에 오른 연기자란 관점은 전혀 새롭지 않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 1922-1982)은 사회분석에 ‘연극적 관점’을 포함하도록 제안하기도 했다. 일상에서는 ‘연기한다’라는 표현이 부정적인 뜻으로 종종 쓰이지만, 고프먼의 논의에 기대어 보자면 개인의 자아 연출과 역할 연기는 인간이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일정 수준의 윤리성을 유지하게끔 만든다. 사회나 조직에서 무대는 끊임없이 차려지고 개인은 개별 공연의 특성에 맞게 자아를 연출한다. 고프먼의 관점에서 자아란 고정적인 실체라기보다 개인과 사회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며 공연은 바로 그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매개가 된다. 일상이든 실제 연극이든 무대가 무대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공연자들이 자연스레 연기하려면 최소한의 규칙에 대한 이해가 공유되어야 하며 자기 배역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실제 연극과는 다르게 일상에서 개인은 미리 짜인 각본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돌발적인 상황이나 농담에 대처해야 하며, 가정이나 직장, 공공장소, 혼자 있을 때 등 각각의 상황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거나 긴장을 풀어야 한다.
    주체적이지 않은 공연자는 오히려 성공적인 공연을 수행할 수 없다. “공연자는 자기의 연기에 깊이 몰입하여 계산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어야 하지만, 또 우발적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연기에 대해 감정적 거리를 둘 수도 있어야 한다. 공연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연기에 지적·정서적으로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실제로는 지나치게 몰입해서 공연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절제도 해야 한다.”9)
    그런데 박지리의 소년들이 사는 세계는 그 구성원을 보호하거나 안심시키는 공동체의 기능을 잃고 부서져 있으며 규칙은 지나치게 기만적이고 종종 거짓에 기초해 있다. 이미 세계의 균열을 감지한 박지리의 소년들은 규칙을 신뢰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 공연에 참여해야 한다. 따라서 이 연기는 종종 실패할뿐더러 이들은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지(『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맨홀』), 나아가 삶을 지속해야 하는지 의문에 사로잡힌다.(『번외』) 박지리의 소년들은 대체로 이 “연출된”(『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12쪽) 세계에서 고통 받는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에서 영 가문의 남자들은 후드(hood)를 걸치고 살인을 감행하며 이를 대대로 은폐한다. 후디로 지칭되는 9지구 주민들에게 갖은 범죄의 혐의를 씌우며 그들을 사회악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세계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영어 단어 ‘hood’에는 모자가 달린 웃옷이란 뜻 외에 거주 지역이나 빈민가라는 의미도 있는데, 후드로 위장하여 9지구의 얼굴을 빌릴 뿐 실제 살인하는 것은 1지구다. 1지구에서 9지구까지 트램이 가로지르는 세계를 접는다고 상상할 때 양끝은 정확히 겹쳐질 것이다. 아홉 개의 지구로 변별된 이 세계는 후드 한 장으로 압축된다. 세계는 달리는 후드 한 장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렇다. 추악한 비밀을 감추기 위한 연극이 날마다 상연되는 세계에서 위장과 은폐는 세계의 근본적 속성으로 자리 잡는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개인이 사회가 요구하는 공연을 수행하며 마침내 체제에 진입했으나 내면의 분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어떻게 그 무대에서 떨어져 나가는지를 상세히 그린다. “만약 너무 훌륭해서 떨어진 거라면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23쪽) 특히 취업 면접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참여해야 하는 공연으로서 매번 사활을 걸어야 만큼 경쟁은 치열한데 규칙은 모호해서 개인을 압도한다. MAN은 종종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데 그가 공연을 거듭 수행하면서 세계의 균열에 파상(破傷)을 입어 이미 탄성을 잃은 점을 상기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번외』의 소년에게 연극은 더욱 근원적이다.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삶만이 우연하지는 않고 모든 이의 생명이 우연이나 신의 연출에 좌우될진대 그러한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만을 번외로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받는다. 『맨홀』의 소년은 아버지의 폭력과 그 폭력으로 위협받던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구멍’이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어머니와 누나 때문에 더 큰 구멍에 빠진다. 박지리의 소설에서는 여성들도 이 세계에 종종 매몰되는데 피해자임에도 가해자의 범행을 묵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세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땅에 떨어지더라도 그대로 깨지지 않고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힘’(『합체』, 65쪽)을 획득하는 것이 성장이라지만 박지리의 소년들은 대체로 탄성을 잃어버린다. 사회의 연극적 속성은 이들 내면의 고통을 심화시키며 더러는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자아와 사회의 거리를 조절하며 탄력적으로 사회에 대응하지 못하는 소년들은 사회 밖으로 나가거나(『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삶을 그만두려고도 한다.(『번외』) 『맨홀』의 주인공은 일탈 행위를 저지르고 사회 밖으로 한동안 내쳐진다. 외부의 개입이 과도해서 그 힘이 개인을 압도할 때 자아는 주체성을 잃기 쉽다. 개인과 상호작용을 주고받아 세계가 변화할 가능성도 극히 낮아진다.
    유일하게 공연에 성공했으며 앞으로도 성공하리라 짐작되는 소년은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의 다윈 영뿐이다. 그는 이미 세계의 최상위 수혜자일뿐더러 “프라임스쿨과 다윈 영이라는 두 개의 다른 개체가 정교하게 합일”(『다윈 영의 악의 기원』, 767쪽)하는 순간을 통과한다. 거주 지역에 따라 개인의 삶이 구분되는, 시쳇말로 설정값이 과도해 개인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세계에서 그는 세계의 원리를 체득하고 공연의 규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연출자가 되어 공연에 실패할 위험성에서 벗어난다. 자아의 주체성을 잃어버린다는 면에서는 다른 소년들과 마찬가지다.

 

4. 찬란한 폐허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이 이 세계에 전혀 맞서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맞서려 하면 할수록 세계 안에 더 깊숙이 포섭되거나 이용당한다. 파상(破傷)을 입은 채 연대감을 잃어버린 소년들에게 구원은 멀다. 박지리의 작품에서 혁명이나 집단행동에 회의하는 모습이 이따금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남은 소년들은 아예 세계와 거기에 속한 인간 모두를 멸망시키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낡아빠진 구두를 신고 전 세계로 세일즈를 다니면서 불쌍한 아이들에게 설탕이 잔뜩 발라진 과자를 팔자. 아이들을 멍청하게 만들자. 병들게 하자. 없애 버리자. 이제는 인간을 끝내자.”(『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145쪽)고도 하며,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문명에 불을 지르고 이 세상을 원시시대로 만들어”(『번외』, 16쪽) 버리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초기작 『양춘단 대학 탐방기』의 대학 청소노동자 양춘단은 세계를 파괴하지 않고 세계의 상(像)을 부수어 세계를 바꾸려 한다. 박지리의 작품 중에는 유일하게 성인 여성이 주인공인 이 소설도 대학이라는 체제에 제대로 편입하지도, 그에 맞서 싸우지도 못하며 성장을 지연하다 좌초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성을 착취한 주체는 가부장적인 남편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이 낳은 자식들도 마찬가지”(115쪽)라는 교수의 말을 수긍하지 못하는 어머니이자 기성세대 여성인 양춘단은 대학생이던 맏아들을 비롯해 사랑하는 소년들이 맞은 비극 앞에서 의문을 가진다. 친하게 지내던 젊은 시간강사도 대학의 특권의식과 부조리에 절망하여 목숨을 끊자 춘단은 망치질을 시작한다. 상아탑을 연상하게 하여 대학을 환유하는 코끼리상이 춘단의 망치질로 무너져도 대학 내에 가시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양춘단의 대학 탐방기는 양춘단이 대학을 떠나 귀향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버지 양호익이 예수상을 부순 오래전 사건이 그와 대비된다. 아버지의 시대에 상이 파괴된 후 마을 사람들은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이어진 그 나쁜 고리를 끊어내려면 손이 부서지도록 망치질을 해야 했다.”(355쪽)지만, ‘지금 여기’에서 아버지의 방식이 유효할 수 있을까. 혹은 지난 시대에 끊임없이 소환됐으나 현재 그 어떤 관념보다 더 큰 도전을 받는 모성을 해결책이나 해결의 주체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코끼리상이 구조를 상징한다고 본다면 과연 구조란 그렇듯 외부에 별개로 존재하며 돌처럼 견고한 것인가. 개인과 영향을 주고받아 구조가 변화할 가능성은 없는가. 구조가 그처럼 확고한 것이라면 개인은 구조에 순응하거나 그것을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울지 모른다. 이러한 한계는 이후 작가가 데뷔작 『합체』에서 보여준 명랑한 세계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고 살아남은 소년들의 이야기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시련을 버텨내고 극복하여 어린 시절, 혹은 예전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 이것이 일반적인 성장소설이나 이니시에이션 스토리(initiation story)의 문법이라면 박지리의 소설은 대체로 대항할 수 없는 시련을 맞고 우연에 가까운 이유로 살아남아 연대감이라는 제물과 마주한 소년들을 그리며 기존의 성장 서사를 비껴간다. 데뷔작 『합체』에서 쌍둥이 소년들이 신나게 쏘아 올린 공이 마지막 출간작 『번외』에서는 갈 길을 잃고 멈춘다. “덤프트럭이 사라진 뒤 차도 한복판에 배구공이 놓여 있다. 포악한 검은 바탕 위에 놓여 있는 희고 작은 구.”(『번외』, 138쪽) 이러한 결말은 일견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소년이 성장하여 입문할 세계가 이미 부서져 폐허로 변모해 있다면 성장은 오히려 그 길 잃음에 있으며 그 진동을 최대한 증폭시켜야 하지 않는가. 이제 희망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파편에서 채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캄캄한 하늘에 작은 별이 반짝거리고 있다. 어둠 속에서 혼자만 빛이 나는 게 화가 나 엉망으로 깨부숴 봐도 오히려 바짝 선 날을 향해 부스러기가 된 빛 조각을 아낌없이 흩뿌려 준다.”(「세븐틴 세븐틴」, 38쪽)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폐허를 가리는 자는 누구인가. 다시 예전과 같은 꿈을 꾸자며 백래시(backlash)를 유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박지리의 글쓰기는 폐허에서 살아남은 소년을 포섭하여 피해자가 공범이 되게 하는 맥락을 드러낸다. 성장의 문턱에서부터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연대할 의무를 저버리게 하는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연대감을 보존하고 또 확장할 것인가.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짧지만 치열했던 시간 동안 작가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이다.

  1)  이 글은 박지리(1985-2016) 작가의 전작을 다룬다. 2010년 『합체』로 사계절출판사에서 주최하는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작가는 이후 같은 출판사에서 『맨홀』(2012), 『양춘단대학탐방기』(2014), 「세븐틴 세븐틴」(『세븐틴 세븐틴』, 공저, 2015), 『다윈 영의 악의 기원』(2016),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2017), 『번외』(2018)를 연이어 펴냈다. 2018년 9월, 광화문 에무 복합공간에서 열린 <박지리를 읽는 시간> 토크쇼에서 사계절출판사는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 작가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작품임을 밝힌 바 있다. 해당 작품은 제57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 『맨홀』은 2017년 판을, 『번외』는 ‘사계절 1318 문고’판을 참조했다. 작품을 인용할 때는 쪽수를 기재하고 필요에 따라 작품명을 병기했다.
  2)  베르톨트 브레히트/이옥용 역, 『나, 살아남았지』, ㈜ 푸른책들, 2018, 54쪽.
  3)  이 글에서는 소년을 ‘세계에 입문하기 직전의 과도기적 단계에 놓여 있는 남성’을 뜻하는 말로 사용한다. 물론 『양춘단대학탐방기』에 등장하는 30대 시간강사와 춘단의 맏아들, 손자,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의 M은 물리적 나이로는 성년이지만 이들 모두 세계로 진입하는 문턱에서 입문을 유예하거나 삶을 다하거나 다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자에서 춘단의 아들은 대학이라는 사회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한 채, 시간강사는 교수 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채 숨진다. 후자는 말 그대로 MAN이 입사(入社)하지 못하는 이야기다. 미성년인 다른 인물들도 16, 17세 정도로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다. 그래서 이들이 주로 몸을 담는 곳은 학교이며 MAN의 경우는 회사 연수원이다. 학교와 연수원은 초심자들이 기성 사회에 입문하기 전 그 이념을 체화하기 위해 경유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4)  베르톨트 브레히트/김광규 역,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2014, 117쪽
  5)  프리모 레비/이소영 역,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43쪽.
  6)  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289쪽.
  7)  정희진,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공저, 교양인, 2018, 225-226쪽.
  8)  정희진,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공저, 교양인, 2017, 49-56쪽. 이 책에서 정희진은 ‘지배적 남성성’에 대응하는 ‘종속적 남성성’이 남성들의 위계에서는 낮은 자리를 차지하지만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 사이에서는 우위를 점한다는 측면에 주목하여 이를 ‘주변적 남성성’이란 용어로 대체한다.
  9)  어빙 고프먼/진수미 역, 자아 연출의 사회학, 현암사, 2016, 272쪽.

 

 

 

 

 

 

 

 

 

 

 

 

 

 

최희라

작가소개 / 최희라

회사 다니며 글 쓴 지 2년째. 세계의 이음매를 떠도는 이야기를 주로 쓴다.

 

   《문장웹진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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