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없는 여자들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남자 없는 여자들*
– 이소호 『캣콜링』

 

 

진송

 

 

 

    살리(지 못하)는 인간

 

이브 : 늘 네 생각을 해. 뭘 입고 있을지. 뭘 하고 있고 누구랑 하고 있는지. 어떤 친구들을 만나고 일하기 전에 뭘 먹는지. 어떤 샴푸를 쓰고 가족들은 어떻게 된 건지. 당신 눈과 입을 떠올리고 누군가를 죽일 때 당신이 뭘 느낄지 상상해. 아침으로 뭘 먹었는지도. 난…… 모든 게 궁금해.
빌라넬 : 나도 당신 생각해. 당신 생각하면서 엄청 자위해.
(…중략…)
이브 : 원하는 게 뭐야? 솔직하게. 엿 먹일 생각 말고.
빌라넬 : 평범한 거. 괜찮은 인생. 쿨한 아파트. 재밌는 직업. 같이 영화 볼 사람.

 

    드라마 《킬링 이브 : 시즌 1》 8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수사관 이브는 사이코패스 빌라넬의 아파트로 쳐들어간다. 빌라넬의 아파트에 몰래 쳐들어가 정체 모를 파토스의 추동으로 온갖 가구들을 깨부수며 그녀의 공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이브는, 난데없이 위와 같은 애정을 토로한다. 뒤이은 대사에서 빌라넬이 원한다 말한 것 ― 같이 영화 볼 사람 하나쯤 있는 평범하고 괜찮은 인생에서의 ‘같이 영화 볼 사람’이란 아마 이브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다음 장면에서, 빌라넬은 피곤하다며 빌라넬의 침대에 드러누운 이브 곁으로 다가간다. 이런 로맨틱한 순간에 빌라넬이 챙기는 것은 다름 아닌 이다.

  *)  정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등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제목을 공유하는 텍스트들에서 빌려와 바꾼 제목이다.

 

이브 : (총을 안고 누운 빌라넬을 보고) 나 죽일 거야?
빌라넬 : 아니.
이브 : 약속해?
빌라넬 : 약속해. ……조금만 있다 갈래?
이브 : 그래.
빌라넬 : (이브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이브 : 나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어.
빌라넬 :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이브가 말한 ‘이런 거’란 레즈비언 섹스를 의미한다. 총을 내려놓은 빌라넬과 그녀를 마주 보고 누운 이브는 섹스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두 ‘여자’의 관계가 성적이라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뒤이은 이브의 행동이다.
    이브는 돌연 품에서 을 꺼내 빌라넬을 찌른다. 빌라넬을 찌른 이후 이브의 반응은 더욱 난해하다. 그녀는 자신이 빌라넬을 칼로 찔렀다는, 아니 로 찌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빌라넬보다도 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미친 듯이 부엌으로 뛰어가 빌라넬의 상처를 치료할 무언가를 찾는 이브는 정말 미친 사람 같다.
    이브는 정말 자신이 빌라넬을 찌를 거라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 어쩌면 빌라넬의 몸에 닿기가 무섭게 손가락의 자리에 이 자라나 버리는 섬뜩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걸까. 이브의 진심처럼 보이는 당혹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주자면, 그녀가 빌라넬에게 밀어 넣은 칼은 도구가 아니라 이미 신체다. 신체를 잃은 자의 신체에 잘못 자리 잡은 신체,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고 동작하는 신체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지난 2018년에 출간된 이소호의 시집 『캣콜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향해 식칼을 들고 사과를 깎는 자매, 동생의 팔목을 그어 주는 언니(「동거」). 이들은 독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은 복어국(「복어국」)을 나눠 먹으며 동생은 방구석에서 말라 가는 언니에게 야멸찬 펀치를 날린다(「시진이네―죽은 돌의 집」).
    장은정이 그의 해설 「겨누는 것」에서 지적했듯 분명 이 시집은 서로를 겨누는 여성들 간의 생생한 적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내가 읽은 것은 그의 분석과 달리 “차가운 몰입”*을 유도하는 ‘폭력의 구조 자체’가 아니었다. 내가 이 시집에서 안타깝도록 느낀 것은 ‘살려야 한다’는 강한 충동이었다. 「복어국」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죽겠다고 고백한 날 동생도 고백했다.”
    “중절수술”, “미역국”, “그러니까 약을 꼬박꼬박 먹었어야지 멍청한 년아” 등에서 짐작해 보건대 그 고백의 내용이라 함은 아마 원치 않은 임신인 것 같다. 언니는 출산 후 먹는 음식으로 알려진 미역국 대신 독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복어국을 동생과 함께 퍼먹는다. 이 상황에서 독이 제거되지 않은 복어국이 아닌 독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은 복어국에 언니가 어떤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을지를 추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똑똑히 들어. 내가 꼭 너보다 먼저 죽을 거야”, “걱정 마 니가 죽으면 나도 그때 죽어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이 언니는 어째서 자신의 죽음을 유보하면서까지 동생에게 복어국을 먹이게 된 것일까. “지긋지긋하게도 오래” 살아남은 끝에, 자살을 시도하는 동생의 목에 감긴 허리띠를 풀어 주게 된 것일까. 자살의 충동과 낙인처럼 새겨질 ‘살인’의 경험 ― 시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기운 사이에서 언니는 동생을 살린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언니가 독을 통해 비로소 동생을 살린다는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이 독이 아니고서 동생을 살릴 방법 따위는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버려진 인간, 더러운 먹이, 생존

 

    이 시집 전체의 시적 화자라 할 수 있을 이경진과 그의 가족은 "'비좁다'는 조건"**에 완전히 장악당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 조건이 시집의 주된 정서인 서로를 향한 여성들 간의 적대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장은정의 분석에 동의하는 바, 그 조건을 한 차례 더 거슬러 올라가 이들이 "비좁은 유모차"에 "구겨 앉"은 채 "비좁다 비좁다"를 되뇌게 될 수밖에 없었던(「동거」) 배경까지를 살펴보노라면, 그에 중첩되어 있던 '가난'이라는 조건을 함께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경진이네―거미집」에서 거미들로 표현된 경진이네 가족은 "가진 게 다리뿐인"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이 처한 곤경을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다리뿐만 아니라 그 다리들이 뒤엉킨 결과 재앙처럼 태어나 버린 "1989개의 동생" 혹은 1989개의 ‘먹여 살릴 입’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가진 게 없거나 가진 게 가난뿐인 이 가족이 가난한 삶을 가장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은 바로 수축하는 신체를 통해서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배고플 때마다 이불 속에서 똥구멍을 조이는 연습"을 하며, "한 호흡에 한 번씩 조여지는 똥구멍, 수축하는 질"을 느낀다.
    가난해서 굶주리고, 굶주림을 수축으로 견뎌내는 '수축하는 하루들'의 한가운데서 시인은 "아무런 수축이 없는 하루"(「아무런 수축이 없는 하루」)에의 상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상상 속에 가득한 것은 먹을 만한 음식들이 아니라 악취가 진동할 듯한 더러운 먹이들이다. “삭아 가는 아귀의 눈알”, “곰팡이가 핀 아귀찜”을 “울궈 먹”고 “가시까지 씹어 먹”는 모습에는 수축이 없으나 풍요도 없다. “입안 가득 우유를 쏟고 우유가 묻은 팬티를 입고 우유가 묻은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는 기이한 넘쳐흐름 속에서 화자의 혀는 뭔가를 맛보기는커녕 삼켜지지 못한 것들 사이를 “둥둥 떠다”닐 뿐이다.
    빈곤에 대한 진단들이 현실에서 으레 그러하듯 어쩌다 경진이네 가족이 비좁은 것과 수축하는 것의 바깥을 상상하지조차 못하는 지경에 도달하게 된 것인지 그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란 어렵다. 다만 우리는 그런 식의 삶, 혹은 그런 삶을 만들어내고 정당화하는 세상의 구조가 어떤 신화를 그 기저에 두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비좁은 현실의 공간에서 여성-인간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 까마득한 신화 속 공간이 정초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신’의 존재다.
    아버지의 존재는 “옛날이야기”와 같은 무형의 이야기로 전해지거나, 아버지가 “위층에서 침대를 흔들” 때 발생하는 “아래층 침대”의 흔들림을 통해서 추론된다(「함께 세우는 교회」). 전해 듣기로 “아빠는 모두를 사랑”하신다는데, 만인을 사랑하는 아빠 대신 “가족을 사랑”한 “죄”를 짊어진 엄마의 목소리에 담긴 “아빠의 모든 말씀은 희미”할 따름이다(「마망」). 신은 여기-비좁은 곳에는 없다.
    『캣콜링』이 그리는 아버지-신은 우리가 신(神)에게 흔히 기대하는 바와 달리 신성(神聖)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무너진 교회에서 자매님과 자고/이미 지은 죄를 입고 그 위에 예복을 입”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내리는 “축복”은 전혀 성스럽지 않다. 인간들이 믿는 아버지-신의 말씀 또한 신의 성기가 변해서 된 것이라 전해지는 쥐의 찍찍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함께 세우는 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신을 믿는다. 심지어는 세계를 창조하는 신의 역할을 사실상 대리 수행하면서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 애쓰기도 한다. 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을 차용하여 쓰인 시 「마망」에서, 위대한 거미 엄마는 붉은 실로 신과 그의 여자들이 붙어먹을 거대한 붉은 방을 만들어낸다. 엄마는 아버지-신의 “말씀을 수선”하는 신성모독을 감내하면서까지 신화의 세계를 수호하며, 신에게 “젖을 먹이”고 그를 “기르는” 역할까지도 도맡는다. 신성함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듯한 이 세속적 아수라장 속에서, 거미 엄마는 자신이 신이라 ‘믿는’ 자에 대한 ‘믿음’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애써 ‘믿고’ 싶다는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가, 외로울 때 신을 믿으렴/신을 믿는 사람들은 다 착해.”
    믿음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거미 엄마를 대신해 아픈 진실을 고발하건대, 아버지는 신성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이 여기-비좁은 곳에서 목격된 바 없는 채로도 여전히 ‘신성한’ 신으로 상상되며, 그 상상은 부재에 기대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이 허상이 닿지도 않을 저 멀리 무너진 교회에서 그는 자매님들과 자고 있을 것이고, 그가 돌연 인간이 바라는 신의 모습으로 변하여 비좁은 집까지 친히 도래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편 시의 내부에도 이 모든 사태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자가 있는데, 그는 바로 딸인 이경진이다. 그는 “숯을 깎아서 아버지의 비밀을 적”어 내려가는 유일한 자이며, “여기서는 보이고 거기서는 보이지 않는 말을 뾰족하게 깎아” 진실을 보지 못하는 “엄마를 찔”러 내기까지 한다(「함께 세우는 교회」).
    엄마와는 다르게 아버지-신에 대한 기대를 버린 딸이 시선을 돌린 곳은 재화로서의 남성이다. 딸은 더 이상 믿음을 통해 빈곤한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 딸들은 굶주림에서 해방되기 위해 먹이를 구해 올 남편을 찾고, 때로는 남편으로 먹이를 사고, 더 나아가 남편을 먹어치우려 한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순조롭지 않다.

  *)  장은정, 「겨누는 것」, 『캣콜링』 해설(민음사, 2018), 151쪽.
  **)  위의 글, 142쪽.

 

    나는 다 자란 애인을 남편으로 고쳐 적는다

 

    그러니까 남편
    늙으면 죽어야 해

 

    잘하면, 늙어 죽을지도 몰라
    냉장고에 꽁꽁 얼린 한 움큼의 남편 남편의 뺨을 개수대에 치대 본다 방바닥에 쾅쾅 치대 본다

 

    왜 우린 그대로지?

 

네년이 나를 떼어먹으니 그렇지
입이 있음 처먹지를 말든가
말을 마

 

    거짓말
    네놈이 나를
    살림을 같이 파먹고 살아서 그렇지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 주둥이를 사 왔다 남편은 비닐봉지를 비집고 나와 내 종아리를 콱 물었다 물고 덤벼도 뭣처럼 나는
    척추를 한껏 오므리고, 남편 이에 정수리가 눌린다 뭣처럼
    벌어진 입이라고 벌린 입으로 남편은 내 시가 구리다고
    했다 들었다고 더럽다고
    했다 나는 오징어처럼 질겅질겅 씹히고
    나 말고
    그년은 다시 남편을 향해 맥주 한 병을 더 따고

 

– 「경진이네―원룸」 일부

 

    처음에 경진은 냉장고에서 식재료 대신 꽁꽁 얼린 남편을 꺼내어 그것을 먹으려 한다. 그러나 남편을 “떼어먹”는 일은 어찌 된 일인지 생각처럼 쉽지 않고, 어느새 경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먹이를 사 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며, 그렇게 애써 마련한 남편은 되려 경진의 종아리를 콱 물어버린다. 끝내 “질겅질겅 씹히”는 신세가 된 쪽은 오히려 경진이다.
    엄마를 경멸하는 딸들, 그러나 여전히 비좁은 가운데서 남자라는 재화를 근근이 나눠 쓰는 엄마와 다를 바 없는 딸들, 동시에 비대한 신의 세계로부터 밀려나 비좁은 생존의 곤경에 처한 인간을 지키려 “엄마를 아빠 몰래 배 안에 숨”기고도 여성이 아니기 위해 안간힘쓰는 이 딸들(“그러니까 아빠한테는 비밀이야/내가 아직 여자라는 건”, 「엄마를 가랑이 사이에 달고」)은 대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남편-신-재화에 대한 믿음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너무나 비좁은 가운데 물러설 틈은 없고, 딸이 가진 것이라곤 이미 넘치는 가난과 더 많은 가난을 잉태할 포궁뿐이다.
    나는 이제야 여러 가지 비참과 실패와 애증이 누적된 이 자리에 「경진이네―거미집」의 가장 문제적인 장면을 불러오고자 한다. 볼품없는 조건, 볼품없는 신체를 가진 여성들에게는 ‘페니스가 부재하며’,* 여성에게는 아주 다층적인 의미에서 어떠한 방식의 생산도 허락된 적이 없다. 사회의 모든 구성단위들을 기능하게 하는 근간으로서의 가족제도와 남성과 여성의 결합(만)이 풍요와 생산으로 직결되던 단순한 도식의 폭력성 혹은 신화의 견고함을, 이 시는 과연 단 한 발짝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  여성에게 페니스가 ‘부재한다’고 지나칠 정도로 거듭 이야기되는 바와는 달리, 사실 이 부재는 생각보다 그다지 결정적인 결핍이 되지 않는다. ‘여성에게 남성기가 부재한다면’ 남성에게는 여성기가 부재한다. 그리고 세상에 시스젠더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돌이켜보건대 ‘~면’으로 말해진 이 조건 자체가 이미 무효한 것이다.

 

    찌르는 것

 

    거미 가족의 딸 경진이는 「경진이네―거미집」의 각주를 통해서 잊히지 않는 기억 속의 한 장면을 털어놓는다. 그것은 벨벳 거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어느 날의 일이다.

 

    벨벳 거미는 자살적 모성 보호가 있는 곤충으로, 산란 후 어미가 자식들에게 자기 몸을 먹이로 내어준다. 이는 모성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 극단적 모성은 숙명이다. 자식의 미래는 어미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는 이것에 관한 다큐를 보고 엄마에게 욕을 하셨다. “거미 같은 년”이라고. 나는 그날을 기억한다. 엄마는 아이처럼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서럽게 울었다.

 

    “극단적 모성은 숙명”이며, “자식의 미래는 어미”라고 기록한 이 날의 경진이 가늠한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니, 경진이 가늠한 것은 과연 미래였을까?
    꼭 걸어 잠근 방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엄마의 울음소리에서 경진이 들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정말 ‘단지’ 자신의 미래였을까? 어쩌면 그건, 완료되지 않은 채 진행 중이기에 얼마든지 중단될 수도 있을 엄마의 현실은 아니었을까.
    경진이네 거미 가족은 그야말로 곤경에 처해 있다. 다리를 통해 만들어졌고 가진 건 다리 뿐이며 다리로 인해 가난해진 경진이네에서는 다리가 뒤엉킨 날 1989명의 동생이 태어나 버린다. 이경진과 그의 동생들은 언젠가 엄마의 몸을 먹이로 취할 “거미 같은 년”들이자 “비좁은 요람”을 더 비좁게 만드는 골칫거리이지만, 지금 당장은 먹을 것이 없어 이불 속에서 똥구멍이나 조이고 있는 비참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가진 게 다리뿐인 나는/살아야 했다”고 되뇌며 생존의 욕구에 굶주려 있는 이 자식들은 (자신 또한 자식들의 먹이가 되고야 말 불행한 미래를 감수하고서) 엄마가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주기를 마냥 ‘기다리지’는 않는다.
    경진과 그의 동생들은 “젖을 빠는 대신” “자궁에 인슐린을 꽂고 매일매일 번갈아가며 엄마 다리 사이에 사정”을 한다. 언뜻 남성의 사정을 모방한 듯한 이 행위의 결과로 엄마의 다리 사이에는 1989마리의 거미 동생이 태어났듯 1989마리의 개미가 모여든다. 이 개미들은 굶주린 거미 가족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식들에 의해, 자식들에 의해 잡아먹히는 폭력적인 관습에 의해 잡아먹히지 않고 “똥파리가 들끓는 1989명의 동생을 뜯어 먹으며” 끝내 살아남는다.
    이렇게 본다면 「경진이네―거미집」에서 딸이 엄마를 강간하는 장면을 단지 폭력의 주체인 남성의 자리에 여성을 위치시킨 것으로만은 해석할 수 없다. 딸은 단지 “엄마의 고통에 감정 이입하고 자신의 분노에 격렬히 분노”*하기 위해 이리도 위악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나의 것으로서 주어질 자격조차 없었던 죄를 대리 속죄한다고 해서 그 죄를 가능케 하는 구조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폭력들을 발생시키게 만드는 ‘구조 자체’”**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폭력의 가해자로서 어떤 폭력을 행하는지, 그리고 그것의 영향이 어떠할지가 아주 결정적인 방식으로 결정되는 이러한 특정 형태의 폭력 속에서, ‘가부장’이 아닌 ‘(가부장이 사라진 세계의)딸’이 폭력의 가해자로서 가부장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 또한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에 의한 여성 강간이 실재하고 어머니에 대한 딸의 근친상간적 욕망이 고유한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와중에 성폭력의 가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폭력이 여성으로 만들어낸 남성 폭력의 ‘모형’으로 해석되고, 읽는 이로 하여금 그에 대한 몰입을 차가운 것으로밖에 갖게 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다.
    아버지의 정액과 딸이 자궁에 꽂은 인슐린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엄마를 죽게 하는 1989명의 동생을 태어나게 한 것은 구원이자 생산이자 풍요로 이해되어 온 아버지-신이고, 엄마를 살릴 1989마리의 개미를 끓게 한 것은 딸이 자신의 자궁에 꽂아 넣은 인슐린이다. 어찌 보면 아버지에의 어설픈 모방으로, 그 모방 행위에 내재한 폭력성으로, 인공적이고 볼품없는 도구로, 그리하여 최초로, 딸은 미치도록 고통스러운 현재와 그 고통을 반복하며 자신에게도 공포스럽게 도래할 미래를 중단하고 동시에 누구보다 그 고통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엄마를 구해 낸다. 여전히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말이다.
    그러니 이 시에서의 인슐린이 폭력의 수단으로서 남성의 페니스를 대체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이브가 떨리는 손으로 빌라넬의 몸에 밀어 넣은 칼이고, 「복어국」에서 언니가 동생에게 끓여 준 복어국 속의 제대로 제거되지 않은 독이며, 「함께 세우는 교회」에서 딸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엄마를 찔러 낸 날카로운 칼이자 아버지의 비밀을 적어 내린 연필로서의 숯이다. 무뎌질 여유 따위 갖지 못한 이 날카로운 도구들은 현실의 긴박함 속에서 신체의 연장과 다름없이 몸에 뿌리내린 채, 부딪혀 본다면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를 버려진 인간들의 삶 속으로 부딪혀 들어간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의 죽음’을 선언한 바 있다. 이때 ‘신의 죽음’이란 물리적인 실체로서 신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가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암묵적인 토대로서 기능해 온 것의 불합리함에 대한 고발과 신 없는 토대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시작하겠다는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니체는 여러 가지 메타포를 통해 ‘신의 죽음’ 이후의 상황을 그려 보이는데, 이는 마냥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외줄 하나에 의지해 걸어가는 광대와 같이 토대의 상실과 그로 인해 초래된 위험을 상징하는 메타포가 반복해서 등장하며, ‘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이에게는 항해나 모험과 같이 불확실한 상황 속으로 몸을 내던질 것이 계속 요구된다.
    차라투스트라가 보였듯, 어떤 (허구의) 관념이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의 문제는 (그것이 애초부터 허구에 불과했다손 치더라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 믿음이 무너진다는 것은 믿음 자체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토대로 기능하던 거의 모든 것의 존재 기반이 위태로워지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앞서 언급했던 시 「마망」에서, 거미 엄마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데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는 형태의 삶을 고안해 낼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말씀을 수선하지 않고서도 딸에게 삶에 대해 뭐라 말해 줄 만한 것이 있었을까? 아버지와 다른 여자들이 붙어먹을 방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제 공간이 마련된 세계를 설계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어찌 됐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준비되었는가와 무관하게 오랜 믿음은 제 힘을 잃어버렸고, 위태로운 현실에의 목도를 차마 피할 수 없게 된 이 혼란의 상황 속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의 소멸이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직결되는 것보다야 서로를 향한 적의가 곤두서는 것이 차라리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걸 ‘자연스러움’이라고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자리에 도달해서야 가능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성이라는 관념에 기대지 않고 헐벗은 채 드러난 여성 간의 적개심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전에 이러한 형태의 감정을 목격한 바 있었던가? 수많은 의미와 조건들이 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어서 읽어낼 수조차 없이 복잡한 ‘여성 간의’ 애증을 말이다. 이들의 감정은 남성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존재를 결박하고 있는 현실의 궁핍과 여성-가족-관계에 지독하게 얽혀 있다. 존재를 옥죄고 있기에 존재보다 더 무거울 증오와 공격성을 짊어진 채로도 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 방향이 서로를 향해 있다는 것.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온통 비참하고 폭력적인 가운데서도 그러한 사실들로부터 발생하는 묘한 힘이었다.
    남성-신에 대한 신화가 무력해진 이후에도 변화한 것은 관념의 세계일 뿐, 어쨌거나 현실의 조건들은 이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경진이네 가족이 가진 거라곤 여전히 가난과 가난을 잉태할 포궁뿐이다. 그러나 감성의 세계만큼은 분명 서로를 겨누는 이 낯선 적의를 통과하며 우리에게 선명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제 여자들은 신을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 속의 서로를 겨눈다. 그리고 오로지 비좁음만이 허락된 이곳의 현실을 망쳐버리고자 인슐린을, 숯을, 혹은 신성함 없음을 무릅쓰고도 ‘함께’ 살아남고 싶은 지금 이 순간의 강렬함을, 서로에게 찔러 넣는다.

  *)  위의 글, 149쪽.
  **)  위의 글, 151쪽.

 

    보이지 않는 섬과 보이지 않는 세계

 

    『성의 역사 3. 자기에의 배려』에서 푸코는 성적 관계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무의식을 성적인 꿈을 분류하고 해석한 아르테미도르의 『해몽의 열쇠』로부터 찾아낸다. 아르테미도르는 근친상간의 꿈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분석한다. 1)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근친 관계, 2) 아버지와 장성한 아들의 근친 관계, 3) 아버지와 딸의 근친 관계, 4) 어머니와 자식의 근친 관계.
    아르테미도르 본인은 부모와 자식 간의 근친상간을 제외하고는 다루지 않겠다고 말하긴 했으나 남매간의 근친상간을 3) 아버지와 딸의 근친 관계에 포함시키며 사실상 다뤄 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은 여기서 꽤 눈여겨볼 만하다. 또 4) 어머니와 자식의 근친 관계는 아들과 딸로 분리되어 다뤄지지 않으면서도 당연하게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인 것으로서 간주된 채 다뤄진다. 한마디로 아르테미도르의 책에서는 여성 간 근친상간적 관계의 가능성이 완벽하게 지워져 있다. 근친상간적 욕망이 비도덕적이고 무익한 것으로 의미화되는 동안 여성들 간의 관계는 고려되지도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근친상간적 욕망을 사회적 성애의 규범을 이탈한 일종의 퀴어한 욕망으로 볼 때, 퀴어라는 주변화된 영토에서조차 여성인간의 욕망은 다시 한 번 배제된다. 배제된 그 욕망에는 금기라는 악명조차 없다.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름 없는 것들은 눈앞에 있어도 목격되지 못하고, 목격된다손 치더라도 내용이 없는 껍데기 혹은 난해한 암호로서 인식될 뿐이다. 마치 다음의 시처럼. 다음의 시와 「경진이네―거미집」이 『캣콜링』의 세계를 함께 구성하며 현실과 가상의 간극, 그리고 그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처럼.

  *)  졸고에서 발췌하여 인용, 〈그리고〉, 웹진 《지평》, (2020.3.12), http://lhorizonsociety.com/3950/

 

    빛 속에서 그늘을 들쳐 업고 너와
    섬에서

 

    물담배 피우고 싶다. 글라스로 와인 한 잔을 시키고 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럼 넌 내 눈을 보고 그림 이야기를 하겠지. 여러 개의 시선이 뒤섞인 세잔에 대해서. 세잔을 말할 때 반짝이던 네 눈에 대해서, 쓰겠지. 좁은 캔버스에 갇힌 검은 침대와 컵과 흰 장미를. 한 쌍의 브래지어를 우리에게 채우는 나라에 대해서. 그럼 우린 왜 이 순간이 위대한지 말하겠지. 우린 섬에서 또 다른 섬에 가 눕겠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네 방에 앉아서 맨해튼을 바라보겠지. 내일은 그랜드 센트럴에 가서 우리 주니어스 치즈 케이크를 먹자. 먹으면서 왕가위 영화를 보자. 이랑의 노래를 듣자. 들키지 말자. 그리고 우리 참 지질하다고 웃겠지. 목에 커튼을 걸고 거울 앞에 서서 우린 잘 어울린다고 말하겠지.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째서 사랑이 아니야?

 

    웃겠지

 

    내가 돌아가는 그날은 눈이 아주 많이 왔다고 네가 그랬다. 뉴욕에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그랬다 네가.

 

– 「루즈벨트 아일랜드」 전문

 

    3부 ‘한때의 섬’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시인의 인상과 무의식을 다룬다.* 3부의 시들에서 로맨스의 공간은 ‘섬’이라는 반복되는 테마를 중심으로 시간의 질서 밖에 놓인 듯한 신비로운 해변(「망상 해수욕장」), 이국(「루즈벨트 아일랜드」, 「네가 살지 않는 상하이」) 등 육지-현실로부터 아득히 멀리 놓인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특징은 사랑에 빠진 여성 화자의 슬픈 시선에 포착된 연인의 모습이 동성인 여성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연인의 침대에는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긴 머리카락”(「혜화」)이 놓여 있으며, 두 연인은 “한 쌍의 브래지어를 우리에게 채우는 나라에 대해서”(「루즈벨트 아일랜드」) 이야기한다. ‘한때의 섬’들은 이렇듯 분명히 퀴어한 공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섬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공간 속에 있다. 루즈벨트 아일랜드는 ‘~싶다’, ‘~하겠지’로 이루어진 소망의 문장들을 통해 가상 속에 자리 잡는다. 레즈비언 커플이 자신들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이야기하는(할 수 있는) 가상 속의 섬과, 개미가 끓는 좁은 방에서 썩은 아귀찜을 울궈 먹는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존재한다. 물론 ‘한때의 섬’들이 마냥 행복하고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그려지고 있지만은 않다. 육지로부터 외로이 떨어진 그곳에서 연인들이 체험하는 것은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뿐 아니라 그 애틋함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가늘지만 절대적인 간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연인들은 “뒤척이는 소리”(「한때의 섬」)까지 공유되는 가까운 곳에서조차 등을 돌리고 누워 있으며(“마주 본 등은 익숙하고 무서웠다”, 「한때의 섬」), 소박하고도 낭만적인 연애의 일상 속에서 그들이 응시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정면이 아닌 뒷면(“우리는 뒷면을 응시한다 하루의 뒷면, 칫솔의 뒷면, 크랜베리 빵의 뒷면, 미키마우스 티셔츠의 뒷면, 그리고 섬의 뒷면”, 「혜화」)이다. “먼 세계에 버려진 후에야 우리는 그릴 수 있었다”(「네가 없는 상하이」)고 회상되는 이 로맨스는 원경에서야 더 세세하게 보인다.
    그러나 섬이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슬픔의 조건들이 섬이 존재하는 차원을 현실로 끌어내렸다기보다 상상적 공간으로서 섬이 갖는 멜랑콜리하고 감상적인 매력을 배가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슬프고 아름다운 ‘한때’의 유토피아는 연인들 사이의 가느다란 간격으로 만들어지는 침범 불가능한 고독을 통해 비로소 변형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보존의 영구성에 힘입어 ‘한때’의 섬은 볼품없는 현실의 시간성을 탈출하고 시간의 질서 바깥에 놓인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 획득된 아름다움을 음미하기에 앞서 섬들이 스스로 탈출한 것인지, 아니면 시간의 바깥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를 고민해 보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 퀴어한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상상이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현실의 비좁음 밖으로 튕겨 나와 시간 너머의 먼 곳에 떨어져 버린 것은 아닌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상상적이거나 공상적인 것들이 무한한 자유와 동시에 실재성의 희박함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보건대, 섬 속의 여자들은 서로를 겨누고 찌를 자격과 시간 속에 오래도록 머물며 생생한 물성을 가지고 낡아 갈 자격을 가상의 자유와 맞바꾼 것에 가깝다. 그리고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섬의 공간적 특수성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면, 그 자유는 고립된 자의 고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섬은 퀴어한 상상이 가능한 공간이기도 하면서, 현실과 육지로부터 유리되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퀴어 공간-섬의 비가시성은 여성 간의 관계 그리고 여성 간의 감정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남성을 굳이 가정하지 않는 여성 간의 관계는 아르테미도르가 자신의 꿈 목록에서 남자 없는 여자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리기 훨씬 이전부터 지금까지 쭉 존재해 온 것이었으나, 감히 상상되지도 심지어는 인식되지도 못한다. 「경진이네―거미집」이 읽힌/읽히지 못한 방식 또한 여성들의 관계 자체가 읽히지 못하는 사정과 크게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진이네―거미집」에서, 엄마와 딸 사이에는 인슐린이 놓여 있다. 복잡한 맥락의 보탬 없이, 어떠한 숨김도 없이, 시의 장면들 속에서 그것이 드러나고 기능하는 모습만으로도 인슐린은 모녀의 관계가 어떤 성격인지를 충분히 보여준다. 경진이는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궁에 인슐린을 꽂”는다. 그러니 인슐린은 생존의 도구다. 경진이는 인슐린으로 “엄마를 향해 사정”을 하고 그 결과 엄마의 다리 사이에는 “1989명의 동생”이 태어난다. 그러니 인슐린은 마치 남근‘처럼’, 성관계의 수단이면서 창조와 생산의 수단이다. 이는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극단적인 해석이라기보다 정당한 해석이다. 나는 시가 드러낸 것을 보았을 뿐이다. 나는 이 글을 전개하는 과정 내내 ‘왜 드러난 대로 보아서는 안 되는가’가 아니라 ‘명백하게 드러난 어떤 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비가시화되는가’에 대한 직·간접적인 논리의 흐름을 만들고자 애썼다.
    모니크 위티그는 그의 글 「이성애적 사유」에서 “이성애적 사유는 계속해서 근친상간을 승인하고, 동성애 금지가 아닌 근친상간 금지를 주로 재현한다.”*고 말한다. 이는 정확한 분석이다. 정신분석학은 근친상간 욕구를 인간 정신의 ‘정상적인’ 발달 과정으로 편입시켰으나 그 ‘정상성’에서 퀴어는 정상성의 변형태에 불과한 것으로서 정상성으로 다시 환원되거나 정상성으로부터 아예 배제되어 버리고 만다. 근친상간 욕망에 대한 이성애적인 분류와 해석은 단지 근친상간을 승인하는 것을 넘어 그것과 관련된 견고한 상징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아버지, 남근 등의 남성성을 언제나 우위에 두는 그 상징 질서에 근거하여 쓰이고 해석된 역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부친살해 모티프를 지겹도록 반복하며 역사를 아버지와 아들의 것으로 독점하고 상징 질서가 갖는 문화적 의미와 중요성을 한없이 비대하게 만든다.
    ‘한때의 섬’의 시들뿐만 아니라 「경진이네―거미집」 역시도 퀴어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 그리고 「경진이네―거미집」을 비롯한 『캣콜링』의 시들이 남근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거침없이 해체 혹은 전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이 시집이 아버지의 질서인 ‘이성애 가족제도’에 대한 반발과 여성(간)의 관계와 감정을 다루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것 모두는 결코 서로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지금 이소호의 시적 의도가 퀴어라는 핵심 주제 아래에 이성애 가족제도에 대한 비판과 레즈비언 연애, 모녀·자매의 관계를 위치시키는 것이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질서를 벗어나 역사와 문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풍부하게 인식하고 창조할 새로운 관점이 퀴어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금 바꿔 말해 남성 없는 언어·상징 질서·관계·감정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과 퀴어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렇기에 퀴어를 읽지 못한다면 그 새로운 역사와 문화의 모든 풍부함을 놓치게 될 거라는 확신이기도 하다.(『캣콜링』에서만도, 각각 부친살해라는 지겨운 모티프와 의미가 과잉 부여된 남근이라는 상징과 관련하여, 엄마를 숯으로 찌르는 딸의 모습과 자궁에 인슐린을 꽂은 딸의 모습이 기존의 것과 다른 새로운 문화에 대한 상상력을 엄청나게 자극하지 않는가?)
    이소호는 아버지에 대한 신화를 무너뜨리고 상징 질서 내에서 남성-남근이 독점하고 있던 권위와 역할을 거침없이 침범함과 동시에 우리가 상상할 수도 드러낼 수도 없었던 여성들 간의 긴밀한 감정과 관계를 드러내고 상상한다. 생생하고도 난해한 적의와 사랑이되 사랑이 아닌(“이렇게 사랑하는데 어째서 사랑이 아니야?”, 「루즈벨트 아일랜드」) 애틋한 감정을 치열하게 주고받는 이 인물들을 ‘여자들’로 묶어내는 순간, 존재하되 사유되지 않던 감정들은 부유하기를 멈추고 현실 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 여성이 여성의 족쇄이자 적이자 애인이자 모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queer)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실 속에서, 나는 지금 ‘한때의 섬’을 『캣콜링』의 ― 퀴어(함)의 존재를 이 세계의 ― 진지한 구성요소로 받아들인 순간이 앞선 모든 독해를 가능하게 한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었음을 감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   『캣콜링』의 각 부는 숙련된 큐레이터가 솜씨를 발휘한 듯 세심하게 분류된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2부 ‘가장 시적이고 보편적인 경진이의 탄생’은 이제껏 과잉된 맥락을 부여받아 온 남성들의 말하기가 가진 상투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시들로 묶여 있다. 한편 3부 ‘한때의 섬’은 강렬하고 다소 공격적인 이 시집의 다른 부분들과 확연히 차이 나는 잔잔하고 멜랑콜리한 톤의 시들로 묶여 있다. 2부의 일부 시들과 3부의 시들은 낭만적 사랑의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언뜻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부와 3부의 시들은 소재적 측면에서 엄밀히 따져 볼수록 비슷하다 하기 어려운 큰 차이를 보여준다. 2부의 일부 시들에서는 남녀 관계가 유발하는 각종 구차한 정서와 특히 남성의 구질구질함이 잘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 시들이 본격적으로 새롭게 드러내는 지점은 로맨스와 관련된 정서, 감정이라기보다 이성애 관계라는 ‘제도’가 가진 폭력성과 상투성이다. 시인이 의도적으로 조롱해 둔 관계의 양식을 낭만적 사랑의 본질에 대한 접근으로 미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낭만적 사랑의 ‘정서’에 대한 시인의 인상과 무의식이 다뤄지는 것은 오로지 3부 ‘한때의 섬’에서다.
  *)  모니크 위티그, 허윤 옮김, 『스트레이트 마인드』(행성B,2020). 89쪽.

 

    ‘지금, 여기’?

 

    『캣콜링』에 김수영문학상을 시상하는 것을 망설였던 이유는 오로지 시의적절성뿐이었다는 정한아의 심사평*에 나 역시 열광한 바 있으나, 이소호 시의 퀴어함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이 시점에 와서야 문득 그 시의적절한 시기가 대체 어디에 놓여 있었던 것일지를 궁금해 하게 된다.
    포털 사이트에 ‘이소호 캣콜링 퀴어’, ‘이소호 퀴어’, ‘캣콜링 퀴어’ 등의 검색어를 입력하면 (퀴어와는 상관없는) 여러 가지 검색 결과와 함께 재미있게도 다음과 같은 화면을 목격할 수 있다.

  *)   정한아, 2018 제37회 <김수영문학상> 심사평 중에서, 《릿터》 15호, 218쪽.

 

누락된 검색어: 퀴어 ‎| 다음 정보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 퀴어

 

    ‘누락’이라는 단어 자체와 ‘퀴어’라는 단어에 매정하게 그어진 가로선이 너무 적절하게 느껴져서 조금 웃음이 났다. 『캣콜링』의 ‘지금, 여기’가 어디였는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퀴어의 ‘지금, 여기’가 있다면 바로 이 화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라는 말은 2016년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그것을 둘러쌌던 열기를 지칭 혹은 추억할 때만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발휘할 뿐, 어떤 실제적 삶(들)의 현장성을 담아내는 데는 놀라울 정도로 무력하거나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지도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나는 이제 ‘지금, 여기’가 단순히 뜻 맞는 이들을 쉬이 호출하기 위한 편리한 장소보다도 ‘지금, 여기’(혹은 그때, 거기)라는 특정 위치에 선 누군가가 지닌 시야의 한계를 지적하고 파괴하는 움직임으로 동작하기를 바란다. ‘지금, 여기’란 늘 복수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지금, 여기’ 역시도 물론 하나로 종합될 수 없는 복수의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키워드가 내게 계속 환기하는 피상적인 희망, 편리하게 소환되는 당위, 복수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그것의 한계 등등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지금, 여기’라는 말로 대표되는 현재성을 포기하기 힘들다. ‘지금, 여기’에서 누락된 자들 또한 서로를 겨누고 찌를 수밖에 없는 환경에 내던져지게 될지언정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한 경멸 – 어쩌면 앞선 세대의 여성들을 향한 경멸, 세상이 변하는 가운데서도 은밀히 고루한 신앙을 품고 있는 자들에 대한 환멸, 이토록 비좁은 세계를 같이 살아가야만 하는 여자들을 향한 적대, 이것들을 여전히 품은 채로도 나는 속물적 신들의 세계보다는 차라리 개미들이 들끓는 현실 속에서 내게 가능할 감정들을 찾아내기를 원한다.
    이제 내 믿음의 내용은 신화도 유토피아도 아닌 저 멀리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캣콜링』이 겨눈 언어들보다 더 날카로운 경멸, 적개심, 열등감, 혹은 애정, 가능한 모든 감정을 가지고 성큼성큼 다가올 누군가와 관련되어 있다. 이 믿음은 신성한 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방식으로 존재 가능한 인간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확보한다.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 비좁은 집과 한때의 섬을 뛰어넘은 곳까지 확장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의 ‘지금, 여기’는 내가 모르는 당신에 의해, ‘우리’가 모르는 우리에 의해 기꺼이 파괴될 수 있을 것이다.

 

 

 

 

 

 

 

 

 

 

 

 

 

 

진송

작가소개 / 진송

진송
 
블로그 chkrtsyoi.egloos.com
메일 zinsongzin@gmail.com

 

   《문장웹진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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