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슥 스스슥” : 김소형, 『ㅅㅜㅍ』

[문학더하기(+)]

2010 다시-읽기 Re-View
– 《문장웹진》에서 실시한 2010년대 문학 설문 결과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다시’ 읽어봐야 할 작품에 대한 리뷰

 

 

“스슥 스스슥”

– 김소형, 『ㅅㅜㅍ』 (문학과지성사, 2015)

 

 

홍성희

 

 

 

    전등이 깜빡깜빡
    사형집행인이 탈 시간
    신호가 깜빡깜빡

– 「사형집행인이 타는 열차」 부분

 

    김소형의 시에는 깜빡이는 눈알들이 있다. ‘지켜보고’ ‘쳐다보’면서 “모든 것들을 게걸스럽게 씹어 먹”는 눈들(「눈」). 시계를 따라 하루 종일 깜빡거리는 그 눈꺼풀이 열릴 때마다 검은 눈동자로 밀려들어간 ‘당신’들은 ‘하얀 방’에 새처럼 갇힌다. 어떻게 들어온 줄도 모르는 채로 ‘빛이 드는 창문’을 향해 날아가다, 다가서는 하얀 벽에 부딪히고 마는 새처럼(「4」), ‘하얀 굴’에서 ‘당신’들은 길을 잃는다.

 

    어서 자, 여긴 네 방이잖아 당신이 말했지 방은 열어도 방이었고 벽은 움직여도 다시 벽이었어 창문이 열리고 닫히고 다른 세계를 열고 닫아도 우리는 여기 있었지

 

    여기 이 굴에서 길 잃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당신, 더러운 발 꼼지락거리며 슬프게 잠든 당신, 이 하얀 굴에서

 

    쓰다듬고 있었네 사랑하는 시간들 후드득후드득 정수리로 쏟아지고 우리는 끌어안은 채 단단하게 굳어 갔지 하나의 뱀처럼 이어져, 서로가 기어가는 소리 내면서 스슥 스스슥

– 「굴」 부분

 

    ‘하얀 방’에서 사람들은 몸이 굳어 “녹색 돌이 되고/붉은 돌이 되고/검은 돌이 되어/차곡차곡 쌓”인다(「벽」). 비가 내리는 날씨, “벽이 꿈틀거”리는 날에는 “흰 돌처럼 쌓여 벽 이룬 뱀들”, 허물어질 리 없는 벽들에 둘러싸여 ‘당신’들은 끝내 서로를 “끌어안”고 “하나의 뱀처럼 이어져” “슬프게 잠”이 든다(「굴」). ‘눈’은 그렇게 “당신을 천천히 삼켜 한 구의 시체로” 제 벽에 “밀어 넣”으며(「눈」), “마치 시간의 물집”처럼 “말랑말랑하게 부풀어 오른”다(「벽」).
    시선의 세계 속에 산다는 것은 그토록 두터운 눈의 벽 속에, 무수한 ‘하얀 방’들에 끊임없이 갇히고 매몰되는 일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선(視線)은 이쪽의 ‘초점’과 저쪽의 ‘초점’을 연결하는 ‘선’을 그리고, 그 선을 이동시키며 사유의 ‘공간’을 건축해 가는 일이다. 처음 눈을 뜨는 순간 시공을 시작하여 눈이 영영 초점을 잃어버리게 되는 순간까지 공사를 멈추지 않을 그 거대 건축물 속에, 무수한 시선의 대상들이 밀려들어와 방을 배당받는다. 우리는 모두 ‘눈’의 주체로서 타인들이 거주하는 건축물의 ‘임대인’ 역할을 하고, 동시에 모든 ‘눈’의 주체들의 ‘임차인’으로서 빼곡한 건축물들의 한 칸 방들을 점유한다. ‘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라면 그 ‘임대인’ 역할이 근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착각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를 묻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어 갈 폭력의 윤리를 따져 보겠지만, 김소형의 시가 “눈은 당신을 천천히 삼켜 한 구의 신선한 시체로 밀어 넣을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할 때 무게 중심은 거기에 놓이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사이 “그곳은 흰 방이었다”(「눈」)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한참을 걷고 또 걸어도 문을 찾지 못하는 임차인이 되어 거대 건축물의 일부가 되어 가는 일, 그러나 ‘시체’가 되지 못하는 임차인으로서 끝내 그 ‘방’들을 살아내는 일에 관한 것이다.
    ‘흰 방’에서 ‘나’는 “사내들 옆에서 잠이 들”어도 이내 홀로 눈을 뜬다(「눈」). “눈을 떴을 때/사내들은/늘/죽어 있”다. ‘나’는 그들의 죽은 몸, “시체의 가죽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른다. 잠들어 있는 그들이 돌이 되어버리기 전에, 그렇게 ‘하얀 방’의 ‘벽’으로 밀려들어가 버리기 전에 그 “질긴 살을 두들기”며 “둥, 둥” 소리를 낸다. 어차피 이곳엔 온통 ‘시체’들뿐이고, ‘내’게 “원하는 것” 없이, 그저 ‘공놀이’처럼 이 ‘방’은 내내 굴러가겠지만(「후」),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 ‘방’의 ‘벽’을 이루는 ‘돌’로 잠들어 버리지 못하는 이유로, ‘눈’ 속에 갇혀 홀로 ‘눈’ 뜨고 있는 이유로 ‘나’는 “둥, 둥” ‘방’을 소리로 채우며 앉아 있다.

 

    소녀는 사람들의 뒤통수만 봐요 축축한 슬픔과 함께
    썩어 가면서 소녀는 자신을 눕힌
    신사를 봐요 엄마와 할머니가 공원을 지나가지만 여길 보지 않네요
    그들은 행복해 보였고 뒤돌아볼 이유가 없었어요 소녀만
    작게 외쳤어요
    엄마

– 「소녀들」 부분

 

    김소형의 시는 그렇게 때로 “아무도 찾지 않는 숲”에서 ‘머리’를 잃은 채로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믿지 않”는 시간을 사는 ‘나’에 대해(「하얀 장미, 숲」) 서글프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둥, 둥”, ‘방’에 갇힌 제 운명을 소리 내어 우는 일보다 먼저 “둥!” 먼 곳에서 나는 북소리를 듣는다(「눈」). 속삭이는 연인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자신을 눕힌 신사”, 엄마와 할머니,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않”고 “보지 못”하는, ‘눕힌’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겨져 ‘엄마’ 작은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소녀들’을 그는 보고, 듣는다. 내 침대에 올라와 “시커먼 속삭임 멈추지 않”는 “붉은 여자”(「사랑, 침실」)의 낮은 신음을 듣고, 아침마다 기차역에 가 “침묵의 돌을 입에 넣고/서로의 비명을 움켜쥐”는 “아이를 안은 아주머니,/붉은 머리칼의 여자”들(「검은 오렌지와의 대화」)을, 돌 바스라지게 이 악무는 그들의 비명을 김소형의 시는 자꾸 듣는다. 그리고 스스로 ‘소녀들’이 되어서, ‘여자’의 끝없는 속삭임에 시달리는 유일한 청자가 되어서, 혹은 ‘우리’가 되어서 말한다. “이걸 봐!” 그에게 들리는 것을 보라고, 이걸 좀 ‘보라’고, “사랑, 침실로” 떠나 “나흘 밤 되도록 다들/깨지 않”는 사람들에게 외친다.
    그렇게 시키는 사람 없이도, 부탁하는 사람 없이도, 그의 시는 “홀로/우두커니 거리에 서서 되돌아오는/여자의 팔을/되돌아오는 긴긴 밤을 계속/계속, 던”진다.(「사랑, 침실」) 어차피 허공을 돌아 자신에게로 돌아올 ‘여자의 팔’을 그가 계속해서 던지는 것은, 그것이 ‘여자’를 위로해 줄 거라 믿기 때문도, 언젠가 누군가 깨어나 그 모습을 발견하고 ‘여자’의 ‘속삭임’을 함께 들어줄 거라 기대하기 때문도 아니다. ‘하얀 방’에 ‘새’처럼 갇힌 이들에게 그렇듯, 세계에는 어차피 문이 없고, 바깥이 없으며, 그래서 ‘바깥’에서 손 뻗어 꺼내어 줄 구원자도 없다. 영영 ‘이곳’에 있을 우리들을 생각하면서 그가 세계를 살아가고 사랑하는 방식은, ‘이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는 것, ‘이곳’을 다만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제게로 돌아오고 말 긴긴 밤을 던지는 일을 계속, 계속하는 것은 그렇게, 제가 ‘하얀 방’ 속에 갇혀 “둥, 둥” 살가죽을 두드리는 소리로 오래 ‘시체’가 되지 않고 살아 있듯이, 나 한 사람에게밖에 들리지 않더라도 ‘소녀들’의, ‘여자’의, ‘여자들’의 소리가 끝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보이지 않는 소리들이 보이지 않는 채로도 가득한 공간을 상상한다.

 

            그리고 너는 귀를 내밀었다
    희멀건 귀와 마주하고 있으니 삐쩍 마른 몸에 들러붙은 희미한 얼굴이 떠올랐다 네 귓속에는 백양나무와 살찐 암말이 있어, 내가 말하자 귀가 움찔거렸다 말똥이 뒤섞인 초콜릿 깔린 길이 있고, 그 위에서 뛰어다니는 쌍둥이 소녀가 있고, 하품을 하며 하나의 계절을 산책하는 남자가 있네, 그러자 귀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그 안에 뭔가 더 있어, 나는 귓바퀴를 잡아당기며 더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네 귓속에 묻힌 묘지를 보았다
    여긴 정말이지 조용하고 아름다워, 나는 비석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사라진 소리들이 햇살을 받으며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저기 내 이름도 있어, 네가 나를 불러 주지 않는다면 저곳에 눕게 될 거야,
            그땐 난 뭘 하고 있을까.
    정원을 가꾸듯이 닦으면서 기다리겠지, 내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네 귓속에서 잠들 거야, 그러자 너는 다시 귀를 내밀었다 귀에다가 속삭인다는 건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래, 귓불을 매만지며 수줍게 말하던 너의 희미한 얼굴이 떠올랐다

– 「귀」 전문

 

    ‘네 귓속’에는 “사라진 소리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고, 그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문자로만 남아 있는 언어가 그 소리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듯,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이름들은 돌에 새겨져 ‘볼’ 수 있어도 허공에 흩어져 사라진다. ‘네 귀’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라진’ 소리들이 몸으로 누워 있는 묘지이다. ‘보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것에 무언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마음으로, ‘네 귓속’ 깊은 곳에는 그렇게 ‘소리’들을 위한 ‘정원’이 있다. 그리고 ‘네 귓속’에서 “백양나무와 살찐 암말”, “말똥이 뒤섞인 초콜릿 깔린 길”과 “그 위에서 뛰어다니는 쌍둥이 소녀”, “하품을 하며 하나의 계절을 산책하는 남자”를 발견하는 것이 ‘나’이듯, 그 ‘귀’가 안으로, 안으로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게 하는 것이 ‘나’의 음성이듯, ‘네 귓속’에서 ‘사라진 소리들’의 ‘묘지’를 보는 것은 ‘나’의 일이다. ‘나’의 귓속말이 ‘네 귓속’에 백양나무를 심고, 말똥이 뒤섞인 초콜릿 길을 깔고, 사라진 소리들의 묘지를 만든다. 그리고 그 묘지를 정원처럼, ‘내’가 가꾼다.
    ‘사라진 소리들의 무덤’으로서 ‘귀’의 풍경과 깊이는 ‘나’의 시선과 목소리보다 앞서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효과이기도 하다. ‘네’가 ‘귀’를 내밀면서 ‘나’의 귓속말이 시작되었으니 ‘귀’가 기원이고 개시이지만, 귓속말이 풍경을 ‘발견’해 주고 ‘묘지’를 ‘보아주’기 전에 ‘귀’는 “희멀건 귀”, “삐쩍 마른 몸에 들러붙은 희미한 얼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나’는 ‘네 귓속’ ‘묘지’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다. ‘네’가 아니라 ‘내’가 기원이 되는 일이지만, “저기 내 이름도 있어”라는 말에 기대어 다시 ‘내’가 아니라 ‘네’가 기원이 된다. ‘너’와 ‘나’는, 네 ‘귓속’과 내 ‘귓속말’은 그렇게 어느 것이 먼저랄 것 없이 서로가 서로의 기원이자 효과가 되어 뫼비우스의 띠 같은 ‘묘지’의 일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사라진 소리들’이 누워 있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로 이미 채워져 있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이제 막 ‘묘지’의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아직 비어 있는 공간으로서, ‘묘지’가 깊어지고 있다.

 

    꿈속이라 믿었던 숲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음악이고 어디서나 음성이던 숲
    저는 환한 잠을 따 광주리에 담았습니다
    제게 잠을 먹이려는 어수룩한 무리가 있었고 다시 이 세계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천사들이 있었지요 밤마다 불 피우며 땅속에다 숲을 두고 돌 속에다 숲을 두고 주머니에도 발가락 사이에도 두었습니다
    이미 죽은 당신에게 총을 겨누는 병사들과 당신을 묻기 위해 땅을 파는 인부들과 숨겨 둔 숲을 찾아 도끼질하는 벌목꾼을 피해 그리하여 숲은 만들어졌습니다

 

    숲을 두고 숲을 두고
    그저 당신과 하루만 늙고 싶었습니다
    빛이 주검이 되어 가라앉는 숲에서
    나만 당신을 울리고 울고 싶었습니다

– 「ㅅㅜㅍ」 전문

 

    김소형의 ‘내’가 음악과 음성으로 가득한 숲을 상상하고 그 숲을 곳곳에 놓아두고 싶었던 이유는, 당신의 울음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귀가 되어 “나만 당신을 울리”면서, 당신의 울음으로 내가 “울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체’들로 가득한 ‘하얀 방’에 홀로 눈 뜨고 앉아 죽은 이들의 살가죽을 두드리는 자신의 모습이, 말 걸 곳 없이 ‘부메랑’처럼 제게 다시 돌아올 뿐인 북소리가, 도대체 서글프고 서러워서, 아무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이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아무도 불러 주지 않아 사라지는 소리들이 깃들 수 있는 텅 빈 ‘묘지’를 그는 소리보다 먼저 만들고 가꾸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귀를 내밀”고, “귀를 움찔거리”고,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그렇게 이미 “어딜 가나 음악이고 어디서나 음성이던 숲”이 아니라, “빛이 주검이 되어 가라앉는 숲”, 깜빡거리는 전등이 꺼지지 않는 ‘하얀 방’ 안쪽에 ‘눈’의 ‘바깥’ 같은 공간을 만들어 내가 먼저 그곳에 들어가 울고 싶었던 것일는지도.
    그렇게 그는 한편에서 채워질 ‘숲’을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 그 숲을 채울 음성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너를 부르”고 “너는 소금 뿔이 되었다고 말했다”고 내가 말하면서, “바다로 뛰어든 네”가 “뿔, 파도에 날리는 유령들”이라는 환유로 살아 있도록 하는 일, 이 뿔은 “내 속에 사는 박쥐”, 이 뿔은 “피리를 부는 해골” 그렇게 이름 붙이면서 자꾸만 “입속에서 솟아난 하얀 돌” “또 하나의 당신”을 만드는 일, “이미 죽은 당신”을 “단단하고 텅 빈” 줄 알면서도 귓속말처럼 만들어내는 일(「뿔」). 그렇게 내가 내 귀에 귓속말을 하고, 내가 내 귓속 묘혈을 채우고, 그곳을 소리들의 ‘숲’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 김소형의 시 쓰기였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아무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당신들’을 숲 속으로 불러들이면서, 나 자신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웅크린 삶을 ‘당신들’이 있을 그 숲 속으로 함께 불러오면서 그의 시는, 내가 타자를 함부로 초대하는 파티도, 타자들이 나를 환대해 주는 낙원도 아닌 ‘아름다운’ 목소리의 장소를, 마음을 다해 구했다.
    다정한 음성들로 가득한 안온한 공간으로서의 ‘숲’을 꿈꾸지만 끝내 그런 공간을 지금 여기에 ‘불러낼’ 수가 없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숲’의 꿈으로만 지금 이곳에서 “둥, 둥” 내가 살아 있을 수가 있어서, 시집의 제목은 ‘숲’이 되지 못한, 그러나 언제나 ‘숲’이 되기를 꿈꾸는 자음과 모음들로 지어졌을 것이다. ㅅ, ㅜ, ㅍ, 의미가 되지 못한 채 흩어져 있는 이 ‘자음’, ‘모음’들이 그러나 김소형의 ‘나’ 혼자만의 목소리로 채워지는 정말 ‘텅 빈 뿔’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스슥 스스슥”, 굳어 가는 중에도 “우리는 끌어안은 채” “하나의 뱀처럼 이어져, 서로가 기어가는 소리 내”고 있는지도(「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채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울리고, 동시에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집이 어떤 맥락 없이 ‘하얀 방’에 강제로 사람들을 집어넣는 ‘눈’의 일로 시작하고 그 ‘방’에서 조용히 ‘신선한 시체’가 되어 ‘벽’을 이루는 ‘돌’로 밀려들어가는 ‘우리들’의 일로 끝끝내 번져 가는 이유는, 그러한 폭력이 너무도 오래 거부하거나 벗어날 수 없는 완고하고 억센 권력으로 경험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힘의 자장 속에서 자신의 눈을 뜨고 살아 있는 일이 외롭고 서글플 때마다 나는 ‘나’처럼 “숲을 두고 숲을 두고/그저 당신과 하루만 늙고 싶었습니다”라는 말을 자꾸 떠올린다. 이 시집이 나온 이후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앞으로 오래도록 계속될 것들 앞에 “둥, 둥” 내 얇은 살가죽을 두드리는 마음으로 2020년에도 나는 김소형의 ‘ㅅㅜㅍ’을 내내 생각할 것 같다.

 

    그리고 버려진 성당에 종이 울린다

– 시인의 말

 

 

 

 

 

 

 

 

 

 

 

 

 

 

 

홍성희

작가소개 / 홍성희

문학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

 

   《문장웹진 202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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